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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고난예고와 제자의 길
마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1-28 /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막8:31-9:1,눅9:22-27]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절히 말하였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23)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터인데 그때에 ㄱ) 각 사람이 살아온 대로 심판할 것이다. (시 62:12, 잠 24:12) 2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인자가 자기 나라의 왕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고난을 받고 죽어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크게 책망하십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21-23) 하나님의 생각은 때로 사람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때부터 그분의 사역에 관한 새로운 국면, 곧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하듯이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거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나의 생각, 나의 방법을 포기하며 나아가 나의 목숨까지도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재산과 명예와 권력들을 추구하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처럼 제자들은 승리와 영광의 메시야를 기대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더 크고 깊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의 삶(24-28) 메시야가 가야할 길을 설명하신 예수님은 이어 메시야를 따르는 자들이 걸어야할 길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상과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당돌하게 반박하며 영광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는 법을 배웠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고난을 달게 받는 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서 받은 고난은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적용: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지혜로운 것임을 인정합니까?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나의 야망을 따르고 있습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부인은 무엇이며, 내가 질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멕시코에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특별한 이름의 조각상은 처음부터 이렇게 불리지 않았습니다.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기간 멕시코를 대표할 조각상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조각가 콘트레라스(Jesús F. Contreras)는 거짓말을 한 죄로 벌거벗은 채 밧줄로 묶인 여자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작품을 만들던 중에 섬유성 암으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조각상이 완성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왼손으로 조각하는 방법을 연습했고 1898년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조각상을 완성했습니다.
< 설 교 >
천하와도 바꿀 수 없어서
마태복음 16:26-28 / 손상률목사
사람마다 좋고 나쁨에 대한 사리판단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교육정도나 생활환경 또는 문화의 수준에 따라 다른 가치관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衣食住)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것에 비중을 두고 물질 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경우는 권력이나 명예에 집착하여 물불 안 가리고 이를 위해 전력투구합니다. 그 외에도 육신의 쾌락과 세상적 즐거움에[ 자기를 던지기고 하고, 어떤 이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남보다 우월한 도덕률에 자기 인생을 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것 한가지도 가치 없는 것이 없겠지만 그 비중에 있어서는 단연 사람에게 비길 것은 없습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천하를 주어도 바꾸지 않을 그 가치 때문에 하나님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그것을 지키려 하십니다.
오늘날 지상에 있는 자기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다지도 소중히 여기며 가치를 부여하는 그 생명을 맡기고 관리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이 일에다 자기 교회의 존재 이유를 실어 놓은 것입니다.
Ⅰ. 인간생명의 존엄성
세상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하는 경우가 있고, 또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폭력으로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오늘날 일부 단체에서는 자연 환경을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보다 귀중한 인명은 무시하는 행동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입니다.
(1) 생명이 있고 천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좋다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은 사람도 막상 그 생명을 잃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옛날 마게도냐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약관 20세에 제왕이 되어 세계를 제패하였습니다. 당시 세계 곳곳에는 그가 정복한 땅에 자기 이름을 딴 도시(Alexandria)만 70개가 넘게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그처럼 광활한 영토에 찬란한 희랍문명을 꽃 피우는 등 불세출의 인물이었지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남으로서 인생의 허무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죽어가자 그의 부관이 "폐하께서 서거하시면 이 넓은 땅을 누가 맡을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알렉산더는 귀찮다는 듯이 "힘센 자가 다 가지라고 해라"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곡간을 크게 하고 곡식을 많이 쌓아둔 어떤 농부가 스스로 자기의 부요함에 도취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눅 12:15-21).
(2) 생명을 위해서 천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위해서 사람을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물질을 있게 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짓기 전에 차례대로 천지와 만물을 먼저 만드셨습니다(창 1:1-14). 창세기 2:4-7에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 지으신 다음 사람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경작하고 다스리게 하신 것으로 보아 자연과 만물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생계의 수단으로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꿩과 산비둘기들이 씨앗을 주어 먹어 버립니다. 이 농부는 새총을 가지고 그것들을 막아내며 작물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세상은 이 사람에게 삼림을 훼손한 것과 야생 동물을 포획했다는 죄목으로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삼림이나 야생동물보다도 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볼 때 세상의 제도나 관행도 당연히 생명을 위한 생존의 수단이 우선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그 어떤 것도 생명의 가치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14:1-6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가셨을 때 고창 병 든 사람을 보시고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곧 안식일에 해서 안 될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문이나 그들의 생활 관습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귀할 수 없다고 정의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가셨는데 거기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로 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그곳에 돼지가 이천 마리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있는 귀신을 나가게 하시니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그 많은 돼지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몰사했습니다(눅 8:26-39).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는 재산상으로 엄청난 액수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귀신 들린 한 사람의 생명에 비하면 그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Ⅱ. 가장 가치 있는 생명은,
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듯이 사람의 생명에도 가치가 다릅니다. 가령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가치 없는 인생으로 분류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 대하여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0:24). 세상을 사는 사람 중에 가룟 유다처럼 멸망을 위하여 예비된 자식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7:12, 살후 2:3). 이들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영생을 위하여 예비된 생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생명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뿐 만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까지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되는 자들입니다(마 13:43).
(1) 거듭난 자의 생명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에게서 구별된 사람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연인인 본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3). 여기 거듭난다고 하는 중생(重生)의 도리를 니고데모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도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요 3:4).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3:5). 거듭난다는 말은 육체가 두 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을 가진 자연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신비로운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생명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 갈 때는 송아지와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 몸을 불태워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단에서 피를 흘리고 불태워지는 제물은 제사 드리는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찾아보아야 됩니다. 히브리서 9:13-14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존귀한 생명의 소유자들입니다. 사도행전 20:28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물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의 피로 속죄하시고 거룩한 신분에 걸맞게 하사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32에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눅 22:29-30).
성도는 내세에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 받을 자일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펼쳐나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존귀하게 여기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예레미야 1:18-19에는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이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
천하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생명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이사야 43:4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애착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자기가 가장 아끼는 귀한 물건이 있으면 아무데나 방치하지 아니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며 마음을 쓰게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사 43:4). 이사야 49:16에는 "내가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2:10에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4에는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건넸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9:15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잃거나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10:28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들을 각별히 아끼시고 관심을 갖는 것만큼 절대로 잃거나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두고 부모와 자식간의 애정으로 묘사한데가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3:16-28에는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옵니다. 거기에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솔로몬은 칼을 가지고 그 아이를 반으로 쪼개서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산 아이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그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어도 좋으니 아무쪼록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자식을 향한 모정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을 때 "백발이 음부로 내려가는 고통"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창 42:38).
(3) 기어이 찾아내고 맙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따라 오시며 어느 곳에 숨어 있어도 기어이 찾아내시고 만다고 하였습니다(시 139:7-12). 중생한 영혼을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잃거나 빼앗기고도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습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역대의 선지자를 보내기도 하셨고, 계시와 환상을 보이기도 하셨으며, 급기야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시고 찾아내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9:10).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자를 찾는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목자가 백 마리 양떼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과,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것과, 그리고 두 아들 중하나를 찾는 아버지의 심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다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고 노력을 한 끝에 기어이 찾아내고 맙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그 중에도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경우 이웃을 다 모아 놓고 크게 잔치를 하면서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천하를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혼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마 16:26 / 박경호목사
마태복음 16장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맥락없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때로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 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때로부터 라는 말은 앞에서 베드로의 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이후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이 고백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고백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이 때로부터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이 하실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2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항변이라는 단어는 꾸짖는다 라는 의미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은 것입니다. 주여 그러한 일이 절대도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라는 단호하게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누구나 받을 수 없으며, 누구나 순종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데 마태복음 16장 24-25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합니다. 또한 더하여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나 쉽게 받으며, 순종할 수 없는 이유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명령하시는데 여기서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즉 자기를 죽이고 주님을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목숨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과 죽음과 자를 목숨을 내어 놓음에 대한 받기 쉽지 않고,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 후에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 말씀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을 보면 이 말씀의 문맥과 배경을 보면 이제 이 말씀이 이해가 가게 됩니다. 왜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모른다고 하며, 자신을 위한 일에 반응하지 않고, 자기를 죽은 자처럼 여기며, 자기 목숨을 내어 놓게 되는가 하면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내용에 대하여 고민하게 될 때에 왜 그렇게 하지, 그렇게 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한 순종을 하는 것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모든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네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의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앞의 내용들에 대하여 아까워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고, 억지로하지 않고 기쁨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하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사실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비교되는 것은 온 천하와 사람의 목숨으로 여기서 목숨이란 단어는 헬라어 프쉬케로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비교는 온 천하라는 표현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부, 은과 금, 명예와 영광, 화려함과 즐거움과의 자신의 영혼에 대한 비교입니다.
둘째로는 비교 되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익과 가치와 그리고 값어치 입니다. 셋째로는 이 구절에는 두 개의 의문문 즉 질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둘에는 매우 강한 결정과 그 결과가 비교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와 어찌 바꾸겠습니까? 입니다. 이러한 비교에 대하여 진지하고 깊은 숙고를 하게 되면 누구나 온 천하가 목숨과 비교하여 더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목숨의 얻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 목숨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 온 세상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교는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실제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것이며, 취한 것입니다.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모두다 한편을 취할 수 밖에 없었고, 취해야 했습니다. 이 양편에서 중립 지역은 없는 것입니다. 한 쪽 편을 취하면서 다른 편을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말씀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보는 자들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얻는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참으로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염려하며, 자신의 목숨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는 자라면 반드시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유는 그래야만 자신의 목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가 하면 첫째로 세상의 좋은 것들은 모두 다 그 끝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은 언젠가 끝이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언제 있었는가 할 정도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0절을 보면 주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시에 어떠한 일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고 합니다. 첫째로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합니다. 떠나 간다는 말은 사라진다라는 뜻으로 불로 인하여 하늘이 덮여 보이지 않게 되건 또는 실제적으로 사라지 건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의미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불에 의해서 해체되어진다는 의미로 세상이 더 이상 이러한 존재의 양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당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이제 세상 종말에는 불로 심판하셔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경고에 대하여 주의 하며 믿고 살기에 온 세상을 얻는 것에 마음을 두거나 선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세계의 모든 것은 각 개인이 죽게 될 때에 끝이 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그와 동시에 그의 세계는 그와 더불어 끝이 납니다. 그와 관련된 모든 세상의 즐거움과 덕 그리고 명예도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땅에서 그가 소유하며 기뻐하던 것들과 그가 모은 모든 금과 은의 보물창고가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가 그것들을 꼭 품고 갈 수 없다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그것들을 영원히 두고 가야 합니다. 살았을 때 매우 화려한 가운데 살았던 것이 그에게 무슨 위로가 될 것이며, 높은 자리에 올라 명령하면서 누렸던 모든 것들이 호화롭고 빛나는 장식 가운데 정렬되고, 그의 장례식이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한들 다만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를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 그가 세상에 살 때 누렸던 부와 명예를 나타내주는 것 외에 어떤 위로가 되겠습니까?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와서 절하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굽실대는 것을 보는 것이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감각적 쾌락과 매우 풍요로운 삶과 기쁨 가운데 살아갔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죽어가고 있는데 지구의 많은 부분들을 지배하고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12-19-20절을 보면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자신이 얻은 부를 조금이라도 나누어줄 마음이 없던 그 엄청난 부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고를 허물고 더 크게 짓고 그 안에 많은 것들을 쌓아둔 그는 영혼에게 말합니다. 수 년 동안 먹을 것을 쌓아 두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부르면 네가 쌓아둔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사는 자이기에 온 세상을 보다 자기의 목숨을 더욱 귀하게 여길 수 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세상의 좋은 것들은 매우 불확실하며 죽기 전에 사라지는 것도 있음을 알고 사는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병에 걸릴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사고나 불행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확고하게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언제든 우리의 손에서 빼앗겨 지며, 잃어버리며,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이 빼앗겨지면 그는 살기보다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임시적인 것을 즐기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날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그러할진데 온 세상을 얻은다 한들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에도 자신의 목숨 보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숨 즉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세상 끝 날에 모두 파괴되며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개인에게는 그가 죽을 때에 끝이 납니다. 어느 때는 죽기 전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파멸될 때, 지상의 모든 것들이 불살라질 때, 바다도 다시 있지 않게 되며,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그 빛을 잃을 때도 영혼은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 때도 영혼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고와 병 그리고 노환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끝날 때도 영혼은 계속 될 것입니다. 세상의 유익과 즐거움은 몸보다 더 이상 오래 존속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계속 존속할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잠시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항상 존속하여 영원히 존속하는 것은 잠시 존속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백 만년을 존속하는 것은 일 분만 존속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것입니다. 천 년이 이 분보다 긴 것보다 영원은 사람의 생애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길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곧 자의 육신을 위한 삶을 죽이며, 자신을 잃고 사는 것이 더 나은가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목숨보다 네 영혼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냐? 영생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냐? 너는 무엇을 너의 최고의 가치로 이익으로 유익으로 삼으려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립은 없을 뿐만 아니라 둘 다는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 하며 그것을 위해 살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며, 자신의 영혼을 파멸에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믿는다면, 이것에 대하여 확신한다면 주님의 말씀이 옳으며, 내게 유익한 것이며, 나를 살리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의 물음에 어떠한 답으로 살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영혼과 영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마태복음16:26, 전도서3:11 / 박덕기 목사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여러분, 잠시 옆에 앉으신 분과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생애 최고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복된 결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11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모든 것 주심 감사/지난 추억 인해 감사/주 내 곁에 계시네./향기론 봄철에 감사/외론 가을날 감사/사라진 눈물도 감사/나의 영혼 평안해/응답하신 기도 감사/거절하신 것 감사/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아픔과 기쁨도 감사/절망 중 위로 감사/측량 못할 은혜 감사/크신 사랑 감사해/길가의 장미꽃 감사/장미꽃 가시 감사/따스한 따스한 가정/희망 주심을 감사/기쁨과 슬픔도 감사/하늘 평안을 감사/내일의 희망을 감사/영원토록 감사해/
이런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가는데, 제가 집으로 가는 길은 도로를 따라 가는 큰 길과, 아파트 울타리를 조금 걷어 내고 만들어준 오솔길로 된 샛길이 있습니다.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했는데, 가까운 맛에 저는 그날도 좁은 샛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런데 비탈길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서 아주 미끄러웠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그 길을 무사히 다 통과했는데, 그 때 아직도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아내와 전연님 권사님 생각이 났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칫하면 두 분이 크게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구두를 신은 한쪽 발로 낙엽을 길가로 밀어제쳤습니다. 그러다가 길에 박혀 있는 조그만 돌멩이에 걸려, 갑자기 중심을 잃고 1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을 했습니다. 제가 떨어진 아래쪽 밭에는 고구마를 심어놓은 둑이 있었는데, 떨어지면서 바로 그 둑에 제 허리가 맨 먼저 걸치게 되었습니다. 숨이 꽉 막히고 아파서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하고 주님을 부르고 있다가 간신히 일어나 집으로 오는데, 그 날 그 길이 얼마나 먼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나 권사님이 굴러 떨어졌더라면 틀림없이 팔다리가 부러졌을 터인데, 그래도 제가 다쳐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제가 좀 착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굴러 떨어지면서도, 한쪽 손에 든 성경은 놓치지 않고 꼭 쥐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믿음이 좋아서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제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박 목사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말고 꼭 붙들고 살아라!”
하남에 있는 ‘세계로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의사의 권유로 MRI 검사까지 하게 되었는데,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고 금이 가지도 않았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의사가 저더러 “아주 착하게 넘어지셨네요.” 라고 해요. 넘어지는데 무슨 착하게 넘어지고 악하게 넘어지는 것이 있겠어요? 제가 그 좁고 위험한 길에서 어리석고 지각없는 짓을 했고,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척추가 다 망가질 번했는데, 데,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종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신 것이지요. 할렐루야?
만일 제가 허리대신 팔이 부러졌더라면 깁스를 하고 이런 모습으로 설교를 할 것이고, 또한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하고, 세수와 샤워는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또 제가 만일 발이 부러졌더라면 화장실 출입도 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지금 이 단에 설 수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또 제가 거의 55년 만에 병원에 입원을 한 셈이니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간증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받은 은총은 감사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만 크게 생각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어요. 여러분, 팔다리가 모두 성하고 허리도 다치지 않은 건강한 모습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교통사고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암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것보다, 아예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고, 암에 걸리지도 않는 것 자체가 얼마나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까?
제가 건강할 때의 가장 큰 소원은 1)성령 충만한 것이고 2)신앙과 인격의 생명력이 진실한 것이고 3)우리 교회의 부흥이었어요. 그런데 만일 척추가 다 망가져서 종신토록 병상에 누워있어야 한다면, 그 때는 틀림없이 소원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것은 교회 부흥보다 하루빨리 병상에서 일어나 걸어보는 것이 가장 크고 간절한 소원 아니겠어요?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라지고 바뀔 수 있는 소원은,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어요. 유명한 사상가 몽테뉴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 가를 아는 것이다.”고 하였고, 올리버 웬델 홈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좋은 책을 만나고, 좋은 짝을 만나는 일들이 중요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란, 1)지금 이 시간, 2)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3)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라고 하였더군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몇 달째 의식 불명한 상태 가운데 있는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에게도 돈이 제일 중요할까요? 그분에게 있어서는 이 나라 첫째가는 재벌의 자리에서 내려올지라도, 건강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어요? 인생에게 있어서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잘 압니다. 그래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람들이 건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까요? 금요일 오후에 TV를 보는데, 진도군 ‘곽도’라는 섬에서 유일하게 혼자 사는 강경엽이라는 할머니는, 83세의 고령에 90도 구부러진 허리임에도 불구하고 슬리퍼를 신고, 험준한 암벽을 기어오르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는데,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하니까 심심해서 그렇대요. 중한 병이 들기 전까지는 건강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아요. 그렇다면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다.
오늘 마 10: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목숨이란 ‘푸쉬케’라고 하는데, 생명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혼’이란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영혼이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적에 아이들이 눈을 꼭 눌러보라고 해요. 그래서 눈에 불이 번쩍번쩍 하면 혼이 있고, 불이 보이지 않고 캄캄하면 불이 나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그 눈에 보이는 불이 과연 사람의 영혼일까요? 또 시골에서 살 때 어른들이 어제 밤 어느 쪽에서 불이 나갔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어보았어요. 그리고 불이 나가면 반드시 그 마을에서 사람이 죽는데, 그 불이 기다란 빗자루 모양이면 남자가 죽고, 동그란 모양의 불이면 여자가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연세 많으신 분들은 그러한 말을 들어보셨지요? 물론 그러한 것이 영혼이라고 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이 죽으면 “혼이 나갔다” “그 양반 영혼이 떠나셨다”라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이 말은 성경하고 딱 들어맞는 말이에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곧 사람은 영혼과 몸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에 영혼이 있을 때 말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이지, 영혼이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영혼이 떠난 육체를 가리며 뭐라고 말합니까? ‘시체’ ‘시신’ ‘송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몸도 죽고 나니까 시신이고, 정몽헌 회장의 몸도 죽고 나니까 시체이고, 최진실의 몸도 죽고 나니까 송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영혼 떠난 몸은 제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재벌 회장이라도, 최고의 탤런트라도 시체이고 시신이고 송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리한 분이라면 당장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아하, 영혼이 떠나면 대통령이라도, 재벌 그룹 회장이라도, 최고의 탤런트라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러니까 영혼이 떠나면 대통령도, 재벌 회장도, 톱스타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영혼은 어떤 권력보다, 제아무리 많은 재물보다, 하늘처럼 높은 인기와 명예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영혼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몸뚱이밖에 몰라요. 이 몸뚱이 육신만을 위해서 살아요. 그저 이 몸뚱이 하나 잘 먹고, 편히 살고, 즐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세상에는 원리가 있어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안 심으면 못 거두고, 이것이 농사의 원리에요. 이와 같이 영적인 세계도 반드시 원리가 있어요. 즉 몸뚱이 육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분명히 영혼이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떠나는 현상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나요? 그것을 가리켜 곧 죽음이라고 하고 사망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 있을까요? 가난이 슬프고, 사업의 실패가 슬프고, 질병이 슬프고, 사랑의 상실이 슬프지만, 죽음보다 더 슬픈 일은 없겠지요? 세월호 참사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아직까지 사랑하는 자식을 바다에 두고 있는 부모들의 피맺힌 슬픔을 당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을까요? 소중한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고, 아끼던 자식을 잃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애통해하는 사람들의 슬픔은 당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고, 반드시 사별의 아픔을 맛보는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최고의 슬픔, 인간 최대의 원수인 죽음은 어떻게 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죽는 것을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그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절대로 자연현상도 아니고, 순리도 아닙니다. 성경은 그 까닭을 죄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죄 때문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요, 형벌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에 대한 죄의 대가, 곧 죄 값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았고, 김염삼,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것도 보았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형이 감옥에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들처럼 감옥에 가지 않더라도, 인간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법이고, 그 양심의 가책이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비록 감옥에 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대로 죄가 남아 있고,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죄에 대한 대가와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기만 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인간이 존재하려면 지금 시간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살아 있지 않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는 이 시간은 ‘지금’ 하는 그 순간에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그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그만큼 시간의 제재와 위협을 받고 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세월은 공통성이 있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과 세월은 똑같이 유한하고 빠릅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릅니까? 새 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또한 어떠합니까? 예부터 인생의 짧음을 가리켜 초로인생(草露人生)라고 했습니다. 인생이란 마치 풀잎 위의 한 방울 이슬 같다는 뜻입니다.
성경 역시 인생의 짧음을 일깨워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약 4:14절에 보면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새벽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가도, 중천에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이 안개 아닙니까? 이 안개라는 말은 연기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안개나 연기처럼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편 39:4-5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인생 70년 80년이란 것이 기껏해야 한 뼘 길이만큼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 1: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생이 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을 때가 있고, 인생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 3: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내세를 동경하며 영원을 사모하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사모하고 동경하는 그 영원한 세계 이상향을 가리켜, 영어권에서는 ‘유토피아’라 하고, 중국에서는 ‘이화세계, 도화세계’ 또는 ‘무릉도원’이라 하고, 티베트에서는 ‘샹그릴라’ 남미에서는 ‘엘도라도’라 불러왔습니다. 배고픔의 욕망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고, 목마름은 마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성에 대한 욕구는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세에 대한 동경은, 영원한 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 사회에는 원시사회든지 문명사회이든지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죄와 삶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 모두에게 영원과 내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세도 영원한 세계도 없다면, 많은 종교가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철학자 칸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내세는 있어야만 하는 당위의 세상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이 한 번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는 말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학생이 시험 답안지라사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채점은 학생이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선생님이 하고 교수님이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이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 평가와 심판은 절대로 자신이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생이 한 번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과, 사후의 심판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한 번 사는 인생 곧 편도 승차표 인생을,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세에서의 인생은 초로인생이요, 안개 인생이요, 나그네 인생입니다. 현세에서의 인생은 고락간에, 행불행간에 짧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의 부귀영화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 불행하다고 하여 낙심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생이 다 짧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영원한 세계이며 무궁한 세계입니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기쁨과 평강을 누릴 것이나, 지옥에서는 영원한 슬픔과 고통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했는데, 세상에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죽은 후까지 또 영원한 지옥 형벌과 고통을 겪는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반대로 세상에서는 잠시 혹 가난과 질병과 슬픔을 맛보고 살지라도,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며 살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사람에게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녀를 낳고, 먹고, 자고, 하는 일이야 동물들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꿈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꿈이고, 깨고 나면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세의 영화는 일장춘몽과도 같습니다. 죽고 나면 그것이 따라 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나를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실 것입니까? 영원이란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려운 무궁한 기간을 뜻합니다. 영원을 여기 한 꾸러미의 실타래라고 한다면, 인생 7. 80년은 한 치의 길이에다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이러한 가치 판단도 할 수 없다면, 결코 지각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희락과 복락만이 가득한 영원무궁한 세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저주와 고통만이 가득한 영원무궁한 세계가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 곧 여러분의 부모님,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일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예수를 믿으면 지옥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천국이 주어집니다. 이 믿음은 당장 가져야 하는 것이지,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은 곧 “너무 늦었는데요.”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약도 수술도 소용없다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원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다음으로 미룬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영원토록 후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정말로 중요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돈은 잃었다가 다시 벌수도 있고, 건강 역시 잃었다가 다시 찾을 수도 있지만 영혼은 한 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다시 되찾을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영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영혼을 잃으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현세는 유한하지만 내세는 영원합니다. 인간의 몸을 떠난 영혼이 사후에 가는 장소는 두 곳밖에 없습니다. 곧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둘 다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어디에서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꼭 예수님을 믿으시고, 그리하여 슬픔 하나도 없는 금빛 찬란한 나라, 사랑과 평화, 기쁨과 행복만이 충만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세세무궁토록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생명의 패러독스
마 16:24-27 / 이필재목사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나름대로 삶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가치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라는 희망 “내 평생소원 이것 뿐”을 뭐냐고 물으면 여기 계신 모든 교우님들은 각기 다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국가도 민족도 소원이 항상 있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이 원하는 일이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바로 G8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달에 G20이 한국에서 모이는데 거기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지금 ‘우리나라는 언제 G20이 될까?’ 소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그렇게 소원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G20이 됐는데 10년 안에 G8국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인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얼마 전 김정일이 말한 것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개인적 소원을 성취시킨 사람이 성경에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먹을 양식을 곡간에 많이 쌓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한해농사를 지었는데 여러 해 먹을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는 만족스럽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먹을 양식을 쌓아두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쌓아둔 물건이 뉘 것이 되겠느냐?” 결국 헛된 삶의 가치관이란 교훈을 주기 위한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 하나를 말한다면 오늘 성경말씀대로 판단이 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최고의 가치는 생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의를 내린다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천하보다도 귀한 선물을 지금 모두 소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감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삶의 가치관은 아주 훌륭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목표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이 ‘생명’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에 약 300번 나올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오늘 말씀도 똑같은 문맥으로 복음서 여기저기에 6번 가량 반복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천하보다도 귀하게 정의하신 이 생명의 문제를 오늘날의 인간들은 모두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도들은 돈 몇 푼을 빼앗기 위해서 생명을 죽입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1년에 강도 살인 피해자는 몇 만 명씩 나옵니다. 요즘은 사람 죽여주는 사업까지 등장했습니다. 청부 살인업자가 있어서 한사람 죽여주는데 얼마 돈 내라고 거래합니다. 이 살인이나 자살 같은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데 내 마음대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든지 문명국은 식품, 약품, 과학기구를 철저하게 검증합니다. 조금이라도 생명에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생명을 대량으로 해치는 일을 막기 위한 제도적 수단입니다. 생명사랑입니다. 문명국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이라든가 풍성한 경제력이라든가 학문이라든가 모두다 생명보존에 도움을 주어야지 해를 끼치면 그 자체가 인류의 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모든 인류 과학의 노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을까? 또 생명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그래서 줄기세포, 유전자 공학이 다 나온 겁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류는 인류의 삶과 생활을 향상시킨 몇 번의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제1변화가 농업 혁명입니다. 야생의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열매를 따먹고 눈에 띄는 짐승을 잡아서 생명을 유지하던 우리 인간들이 한 곳에 모여서 정착 생활을 하고 농사를 지어서 안정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식량 안정의 행복을 누리면서 농업 혁명을 일으켜서 행복하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산업 혁명입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안경이 필요하면 안경을 만들어내고 마이크가 필요하면 마이크를 만들어내고 자동차가 필요하면 자동차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만들어내서 산업공해가 될 만큼 물건이 온 세상에 산더미같이 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제 3변화는 정보화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내가 필요로 하는 세계 모든 정보를 내 책상에서 다 얻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 예배드리는 것을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내일 여러분이 파리로 가신다면 내 책상에 앉아서 내일 파리 기후가 어떤지 거기 모든 상황의 정보를 얻고 미리 준비해서 가실 수가 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성경책을 안 들고 다닙니다. 스마트폰에 성경 66권, 찬송가 600곡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 켜면 다 나옵니다. 이제 앞으로 그 어려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옵니다. 통역폰이 나오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말하면 다 통역해 줍니다. 얼마 있으면 나올 겁니다. 이제는 기계 말을 안 들으면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정보화 혁명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또 올 혁명이 뭔가요? 그것이 바로 생명 혁명 시대입니다. 인간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혀서 건강하게 오랫동안 넉넉히 살 수 있는 문제해결입니다. 저는 신앙적으로 이것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열어주신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데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기독교는 어느 시대 세계관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열어놓고 살아라.” 말했습니다. 지구가 돈다고 말하는 갈릴레오를 하나님께 대한 불경죄라고 데려다가 호통을 치는 죄를 이제 다시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열어놓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열어주신 선물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바라보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열려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여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하게 정의하셨는데 그 생명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종의 생명 패러독스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모순된 말씀을 하셨는가? 죽으란 말인가, 살라는 말인가 잘 분간이 안 됩니다. 여기 오늘 성경 말씀에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또 다른 곳에 가보면 “이 귀한 생명을 죽도록 충성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뭡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최대의 고귀한 생명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는데 이 세상에는 불행하게도 그러한 천하보다 귀한 고귀한 남의 생명을 무참히 빼앗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령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령의 활동을 이 세상에서 정지시키는 일은 다른 생명 구하는 일에 내 생명을 던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육신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으로 연결되는 내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영생의 진리를 위해 내 생명을 던지는 일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일이라서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말씀하시며 자신이 먼저 인류의 생명 구하기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패러독스입니다.
‘생명이 살아있다’는 우리 생명을 한번 분석해볼 때 우리 인간이 이 목숨 하나를 지상에 존재시키기 위해서 투쟁을 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물들도 자기 생명 보존을 위해서 얼마나 지혜롭게 행동하고 얼마나 극한투쟁을 하는지 인간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동물의 세계는 아주 분명한 것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희생시킵니다. 자기 새끼일지라도 극한 상황이 오면 물어 죽여 버립니다. 자기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에서도 절대 양보를 안 하는 것이 먹이를 먹을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제비들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시골 농가에 집집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서 집을 짓고 처마에서 새끼를 번식시켜서 날아올 때는 두 마리가 왔지만 돌아갈 때는 어느 집이나 똑같이 7~10마리가 되어서 갑니다. 그 집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은 지은 다음에는 반드시 그렇게 새끼를 번식시켜서 나가는데 동물들이 인간보다도 우수한 능력이 하나가 주어져있습니다. 바로 육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지진 지역이 아니라서 그런 일이 없지만 지진 지역에 가면 지진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동물들은 한 달 전부터 지진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움직입니다. 유난히 개미들이 집안으로 많이 기어들어오고 쥐들이 전부 거리로 노출됩니다. 뱀들이 전부 숲속에서 기어 나와서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꿈틀거립니다. 이런 동물들의 움직임은 지진 예고입니다. 제비는 장마철을 미리 압니다. 긴 장마철이 올 것을 예상하면 새끼에 절반 정도는 물어서 집어던져 죽여 버립니다. 집어던진 새끼들을 꾸물거리는 것을 사람들이 ‘이게 왜 떨어졌나?’ 하고 집어서 다시 제비의 집에다 넣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어미가 물어서 무자비하게 땅에 떨어뜨립니다. 왜 그러는가? 하루에도 제비 한 쌍은 수백 마리의 곤충을 잡아야 식구가 살아갈 수 있는데 장마철에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먹는 입을 절반 이상으로 줄이기 위해서 자기 엄마, 아빠가 살아남기 위해서 새끼들을 미리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생명 원리는 이러한 동물적 생명 원칙에 반대되는 생존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이 지금 이렇게 어지러워지는 것은 바로 온 세상 사람들, 온 나라의 국가 이념이 동물적 생존 원칙을 위해서 인간의 생존 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은 약소국가들을 침략했습니다. 무수히 죽였습니다. 자신과 자국의 동물적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소멸시키는, 물리적인 힘을 조직적으로 사용하면서 인종청소 작업을 끝없이 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중남미 전쟁의 역사이고 알렉산더요 칭기즈칸이요 히틀러였습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독일도 영국도 일본도 스페인, 몽골, 소련 수많은 강대국들은 절대로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생명 살리기에 내 생명을 희생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 패러독스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위해서 내 생명을 던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평생 아벨의 생명을 죽인 가인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비극과 불행은 내 생명을 위한 다른 생명 죽이기였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불행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 결단이 곧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귀한 생명을 희생시켜야 되는 생명의 패러독스입니다. 오늘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러한 진리를 따르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동물적 생존 원칙에서 벗어나 인간적 생존 원칙에서 사는 길이다.”
세상의 생명 원칙을 보면 한쪽을 죽여야 한쪽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생명이 생기기까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생명이 내 생명으로 연결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는 탯줄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뱃속에서 이 탯줄 연결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아기는 뱃속에서 죽습니다. 그 탯줄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는 생명줄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중요한 생명줄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쪽을 끊음으로 한쪽을 자생능력을 갖게 하는 작업을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생명 관계를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쪽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예수의 삶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가치관이기 때문에 이대로 사는데 만약 이렇게 살아가는데 내 생명에 희생이 필요할 때가 온다면 나는 그 길을 따르고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동방정교의 신자들은 세례 받는 즉시 자기 생일을 없애버립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것은 헛수고이다. 새로운 생명 탄생의 의미로 이제 나는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세례 일자를 자기 탄생일로 정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나와 같이 되려는 자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영생을 누리려는 자는 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생명 살리기에 내 생명 던지는 일을 위해서 살라.” 우리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생각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십자가가 무거운가? 너무 무겁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나는 이 고난스러운 십자가를 평생 지고 이렇게 고난스럽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렇게 안하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너무 십자가가 무겁다.’ 오늘 여기 보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절친한 친구 목사님은 나만 보면 약간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늘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치 않으시다.” “뭐가?” “왜 하나님이 이 목사님은 그렇게 사랑하시고 난 이 모양이냐?” “어떤 모양인데?” “나는 이 목사처럼 한 달만 살고 천국 가도 좋겠다.” 이렇게 늘 비아냥스럽게 말을 합니다. 저는 그 친구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압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는 교인이 많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는 교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꾸만 그럽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구와 동유럽 여행을 둘이서만 한 적이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하며 갔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니까 가까워졌습니다. 출생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과 현실을 모르고 있던 분야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가니 여행이 지루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서 다 알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 항상 나를 부러워했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 다 오픈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당신 주변에 당신이 이루고 있는 모든 조건과 내 것과 바꾸자. 우리가 아마 여기서 약속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바꾸어 주실 수 있을 것이다. 바꾸겠느냐? 결정해라.” 그랬더니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아내까지 포함하는 거냐?” “그것도 당신이 결정해라.”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게 바꾼다고 바꿔지겠느냐? 생긴 대로 살자.” “바꾸기 싫지? 왜?” 따져보니까 자기가 좋은 게 훨씬 더 많거든요? “나한테 이제 비아냥거리지도 마. 당신이 훨씬 더 좋아. 객관성 있게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교인이 좀 더 많다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나한테 자꾸 그랬지? 훨씬 좋지? 못 바꾸겠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적당한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영생의 생명을 얻은 후에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보세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잘 안보입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 가서 밝히 알리라. 내가 이런 과정에서 이렇게 사는 것, 내 몫의 십자가, 누구에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이렇게 다소 고난스럽게 살았던 것은 이것을 벗어날 때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르는 위험이다. 가장 선하고 좋은 길을 내게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기 원하면서 살아가는데 언제 사랑이 뜨겁고 언제 식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주는 것이 아까워진 사람은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때는 무엇이 아깝습니까? “아낌없이 주련다.” “다 가져 봐!” 맞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주는 게 싫고 받는 것도 귀찮고 싸늘한 계약서만 남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게 와 있고 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는 순교까지 합니다. ‘아! 나는 주님을 위해서 내 생명을 십자가 위해 똑같이 희생하겠습니다.’ 그 뜨거움을 막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식어지고 그 사랑이 식어지면 싸늘하게 짜증만 납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집니다. 생명의 영생을 주려면 내 생명을 버려야 합니다. 생명의 패러독스로 살아야 합니다.
이 근래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생명 관계 사건이 두 번이 터졌습니다. 하나는 칠레 33명 광부 구출 사건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천안함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건이 모두 생명에 관계된 사건인데 성격은 정 반대입니다. 천안함 사건은 테러에 의한 생명 죽이기 사건이었고 칠레 광부는 살리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온 세계인에게 고난과 어두움을 안겨준 마귀의 사건이었고 광부 사건은 인류에게 희망을 밝혔습니다. 지금 온 세상에 제일 큰 마귀 역사는 생명 죽이기 테러 문화입니다. 지금 온 세상은 이것 때문에 고난스럽고 불필요한 고난을 감수하고 살아갑니다. G20의 3만 명의 경찰관을 동원해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테러 때문입니다. 이제는 공항 검색대에 가서 창피하게 알몸 투시해야 됩니다. 자기 집 안방에서나 벨트를 풀었지 공항에서 여자들 옆에서 벨트를 풀어야 하니 무슨 문화가 이렇게 꾸질꾸질하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몸수색이 너무 지나치다고 시애틀 공항에서 되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상 역사 가운데 비인도적 전투를 한 나라가 일본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가미카제 전투입니다. 아무리 전쟁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무기로 삼아 비행기와 함께 투하시키는 것이 비인간적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본은 그 전쟁에서 이겼습니까? 졌습니다. 지금은 자살 폭탄 테러입니다. “생명을 던졌다면 생명 살리는 일에 던져야지 내 생명과 함께 다른 생명을 죽이는 이것은 악령의 역사다.” 빨리 없어져야 하는 문화입니다. 매몰 광부 33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온 세계 밝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죽음의 시간 속에서도 작업반장 루이스 우르주아의 명령에 질서 있게 따랐다고 했으며 그 캄캄한 지하 622미터 속에서도 예배 자리를 따로 마련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예배 모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먼저 구조된 마리오 세불베다의 왼쪽 팔뚝을 보십시오. “JESUS”는 큰 문구와 함께 티셔츠를 입고 구출되었습니다. 광부가 33명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34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그 분은 주님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칠레 축구 협회는 33명에게 한국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그 제안대로 한국 땅에 한번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안함 46명의 젊은 병사들의 죽음은 한국뿐이 아닌 온 세계 사람들의 어두움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누가 그런 악령의 심부름을 했는지 세계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일한 사람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33명 광부 구출은 생명 사랑이기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온 세계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그 구출 과정을 하나하나 보면서 행복한 눈물의 박수를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지요? ‘아! 내가 이 지상에 이렇게 발을 딛고 서있고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생명 사랑입니다. 바로 천하보다도 귀한 그 생명이 오늘 아침 현실적으로 나에게 이렇게 주어져있음에 대한 감사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존중하고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생명 보존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이 되고 그런 교회가 될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그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구하기에 나서라. 나와 같이 하라.” 이 삶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동물적 생명 원칙에서 벗어나서 인간적 생명 원칙에서 살아봐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와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마 16:24-27 / 김홍도 목사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나 광야시절의 성막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제일 바깥마당은 여자들과 이방인들도 들어 올 수 있는 장소이고, 그 안 성소에는 유대인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다음 가장 깊은 곳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강단과 같은 곳입니다. 이 지성소는 이름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차례씩 속죄의 피를 양푼에 담아가지고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만약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면 즉사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의 옷자락 끝에는 방울이 달려 있어서 제사 드리는 동안 움직일 때는 쟁그렁 쟁그렁 소리가 들립니다. 만약 그 소리가 안들리면 대제사장이 죽은 줄 알고 끌어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마음에도 하나님만이 임재하고 차지할 수 있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마음의 지성소는 오직 하나님만이 차지해야 되고 하나님만 계셔야 되는데 그 자리에 들어와서는 안될 하나님의 피조물이 들어와 차지하고 하나님은 외곽으로 쫓겨난 상태에 있는 성도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나 세상 것들이 들어가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돈 많은 부자 신랑과 약혼할 때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신랑은 사랑하지 않고 신랑이 준 다이아몬드 반지만 사랑하고 어루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저주는 하나님을 그 거룩한 자리(shrine)에서 추방하고 세상 것들이 들어오도록 허락한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경배해야 될 터인데,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들이 가득하게 차지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왕좌에 계시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는 것과 즐기는 것들을 너무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들이 마음의 우상이 되고 그들의 신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마음의 지성소에 모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면 하나님이 다 준비하시고 공급해 주시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먼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과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다 창조하시고 준비하신 다음에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가 되시고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마음의 지성소, 마음의 왕좌에서 밖으로 몰아내고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이 꽉 들어차게 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에게는 참 평안이 없어지고 무질서와 혼돈(chaos)속에서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지성소에 하나님이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많이 소유하면 그만큼 행복한 줄로만 알고 “나의 것”을 끈질기게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그것을 뽑아 버리면 죽을까봐 뽑아 버릴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이기심과 욕심과 탐심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를 지배하게 할 때, 참 자유와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죽는 길인 줄 압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의 제일 첫머리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물질적인 것, 외적인 것들을 다 몰아내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은 먼저 마음의 천국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 것들로 가득 차서 배가 부른 상태에 있기 때문에 참 자유와 평안과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가장 미워하시는데, 사람이 이 하나님의 원수들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길은 ‘심령의 가난’이라고 하는 고독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죽는 길인 줄 압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27절에서 주님은 중요하고 깊이 있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생명과 자아(Life, Self)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아중심생활(Self-Life)이라고 하셨는데, 그 특징은 바로 소유(Possession)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지성소에 있어서는 안될 외적(External)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단지 성경지식을 쌓아 두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포기와 항복의 용기
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원수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왕좌에, 지성소에 모시려면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귀한 진리를 구약의 아브라함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가운데 극적인 묘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날 때 너무 늙어서 아들이라기보다 손자라고 해야 마땅할 만큼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 아이는 아브라함의 큰 기쁨이요 우상이었습니다. 허리를 굽혀 그 아들을 들어 안을 때 아브라함은 그 아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며, 가장 큰 사랑이었습니다. 또 장차 나타날 메시야의 언약이며, 소망이며, 꿈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 지나쳐서 넘어선 안될 경계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의 지성소에 올라앉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아들을 그릇된 사랑에서 구해내실 결심을 하기고 개입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장 2절) 그 음성이 들린 곳은 브엘세바 가까이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몸부림치는 고통과 고뇌를 하며 밤하늘의 별빛 아래서 고통의 씨름을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 다음으로 가장 큰 고뇌를 겪었을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아브라함에게는 죽음이 그렇게 큰 고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갈 자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배치되는 그 명령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삭 안에 네 씨라고 부를 후손이 들어있다”고 하셨는데, 이 무슨 모순된 명령입니까? 그런데 하늘의 별빛이 이삭이 누워있는 천막을 통해 고요히 비치고 있을 때, 그 심령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쳐졌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아들을 데리고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고통하는 가슴의 결단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살리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신앙입니다. 삼일 길을 다 가서 장작더미 위에 독자 이삭을 묶어서 올려놓고 칼을 들어 치려고 할 때, 천둥 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이제야 알았다 네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세기 22장 16절-18절) “아브라함아 사실 그 아들을 정말 죽이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결코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는 그 자리에 있는 네 아들을 옮겨 놓기 위해서였단다. 나는 그 그릇된 사랑을 바로 잡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아들을 데려가도 좋다. 건강한 아들을 데리고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한 것을 내가 보고 알았다”라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후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지극히 높은 자의 친구가 되고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완전히 항복(surrender
)하는 자가 되었고, 복종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랑이 아들에게만 집중했던 그 아들을 데려 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밖으로 밀려 나갔던 자리에서 다시 그 중심 속으로 들어 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잘라 내고 분리시키는 작업이 잔혹해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처리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아브라함은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전에 소유했던 것들을 여전히 소유했습니다. 그 아들도 옆에 있었고, 그 많은 양과 염소, 약대와 송아지를 누리고 즐겼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영원히 던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나의”, “나의 것”(My, Mine)은 아브라함의 단어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참 자유를 얻었고 세상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부자”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그 늙은 족장은 빙긋이 웃기만 하고 그 은밀한 진리를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은 아주 해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장래의 안전을 위해 보화를 주를 위해 포기하지 못하도록 방해 받습니다.
예수님은 파괴(destroy)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save)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맡긴 후에는 모든 것이 더 안전하게 됩니다. 내가 붙들려고 하고 그것들로 마음의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 한 더 위험한 것입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쩌다 우물에 빠져서 미끄러우니까 올라오지는 못하고 돌멩이를 붙잡고 ‘야옹야옹’ 하며 죽겠다고 울어댔습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불쌍히 여긴 한 사람이 긴 각목 나무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오라고 하니까 고양이는 자기를 빠뜨려 죽이려는 줄 알고 올라오지는 않고 더욱 부르짖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고양이를 밀쳐서 빠뜨린 후에 그 나무를 갖다 댔더니 얼른 그리로 타고 올라오더랍니다. 그래서 구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방법을 쓰실 때가 있습니다.
좀 더 할 수 있었잖아요?
마 16:24-25 / 김영헌목사
우리 교회 함광호 장로님의 맏따님인 함규정 박사가 새로운 책 하나를 번역했습니다. 예일대학 교수들인 데이비드 R. 카루소(David R. Caruso)와 피터 샐러비(Peter Salovey)박사가 지은 “하트 스토밍”(Heart Storming)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는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이라는 말을 익히 압니다.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려고 할 때 여러 사람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모으는 방법을 ‘브레인 스토밍’이라고 합니다. ‘하트 스토밍’이라는 말은 새롭게 등장한 용어인데 ‘효과적인 문제 해결과 목표달성을 위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 내고 활용하도록 하는 전략적 감성 툴, 즉 감성기술’이라고 함규정 박사는 용어풀이를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심리학적 접근이기 때문에 재미도 있으면서 리더십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어서 큰 흥미를 주었습니다. 한번 읽어서는 안 되고 좀 더 공부를 해야 잘 이해될 것 같습니다.
감성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는 4가지 스킬을 말하는데 첫째가 감정인식이요, 둘째가 감성의 활용, 셋째 감정 이해, 그리고 넷째가 감정 관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보다 깊은 심리학적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도 감성스킬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자기 관리와 자기 성장과 발전에 이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앞으로 좋은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연구해 왔습니다. 신앙이 너무 감정에 치우쳐도 안 되고, 너무 이성적으로 따지기만 해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이 감리교 신앙의 네 가지 표준으로 성경, 전통, 체험, 그리고 이성으로 세운 것도 바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서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체험은 반드시 이성의 뒷받침이 있어야 만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없는 이성은 삭막할 뿐입니다.
사람은 먼저 감성의 느낌(feeling)이 옵니다. 그 느낌이 깨달음(awakening)을 줍니다. 깨닫게 되면 곧 실행(doing)에 옮겨지는 것이 인간의 결단과 행동과정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좋은 느낌이 다가왔는데도(feeling), 깨닫지 못할 때도 많고(awakening), 깨달았으면서도 용기가 없거나 나태함으로 미루다가 좋은 기회를 놓치곤 합니다. 때문에 ‘감성이 다가올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발전과 퇴보, 성공과 실패의 분깃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느끼고 깨달았을 때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복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삶(great life)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감성(feeling)에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감성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셔서 슬픈 일, 기쁜 일, 좋은 일, 나쁜 일을 만날 때 맨 먼저 감성이 작용을 합니다. 슬픈 일을 만나면 눈물이 나오고, 기쁜 일을 만나면 웃음이 나오고, 나쁜 일을 만나면 기분이 나쁘고, 좋은 일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람은 이런 기분을 갖고 행동을 합니다(Doing it with feeling). 한국인의 감성을 빗대어서 기분이 나쁘면 천국도 안가고, 기분이 좋으면 지옥에도 뛰어든다고 합니다. 감성이 깨달음을 주고, 그 깨달음이 행동을 유발하여 신앙의 성장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감성을 통해서 깨달음이 왔는데도 행동하지 않으면 자칫 용기가 없는 비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poor life)이 되고 맙니다. 신앙도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큰일을 해내지 못합니다.
지난 2006년 10월 2일, 우유배달을 하던 32세의 젊은 남자가 총을 들고 학교 교실로 난입했습니다. 자신의 인생과 사회에 불만을 품은 로버트(Charles Carl Roberts)라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학교 교실로 난입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교실 안에는 7-13세 연령에 속한 10명의 여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열세 살 먹은 학생 하나가 살인마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먼저 쏘라!”(Shoot me first)고 소리쳤습니다. 마리안 휘셔(Marian Fisher)라는 아이입니다. 그 반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살인마는 그녀를 쏘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명의 학생들을 쏜 다음 스스로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습니다. 급히 도망하여 목숨을 구한 다섯 명의 학생 중 하나가 마리안의 관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살인마가 총을 들고 교실에 뛰어들자 마리안은 순간적으로 “내가 앞을 막을 테니 너희들은 빨리 뒷문으로 도망쳐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학생들은 앞뒤 생각 없이 뛰어나갔다는 것입니다. 마리안이란 소녀가 살인마의 앞을 가로 막으며 시간을 벌어주었기에 다섯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마리안 휘셔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그의 동생 바비(Barbie)가 “다음에는 나를 쏘라!”(Shoot me second!)며 그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 바람에 무사히 교실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며 학생들은 울었습니다. 다행히 동생에게 쏜 총탄이 빗나가서 생명은 구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언론들과 온 세계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온 인류는 마리안 휘셔에게 생명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마리안은 위대한 인생(great life)을 살았습니다. 메소나이트교회에서 자란 그 아이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습니다. 이때쯤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나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은 매우 흡족해 하시며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셨습니다. 머지않아 저 많은 군중들이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결국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베드로의 이 간언은 결코 나쁜 말이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은 벌컥 화를 내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심각한 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 노스케롤라이나의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노스케롤라이나 덜험(Durham)에는 명문 듀크대학교(Duke University)가 있습니다. 감리교대학인 이 학교는 대학농구팀으로 유명합니다. 여러 번 우승을 한 명문대학입니다. 그 대학의 응원 심볼이 “푸른 악마”(Blue Devils)입니다. 어느 날 농구시합장에서 응원을 했던 듀크대학생이 ‘푸른 악마 옷’을 입은 채로 저녁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흉측하고 무섭게 디자인된 응원복을 입었다는 것을 모른 채 이 학생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너무 놀랬습니다. 악마가 사람을 납치하러 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예배를 보던 교인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중의 한 부인이 손을 들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다가 쓰러졌습니다. 이 대학생은 그 부인을 도와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다가오지 마라! 악마야! 더 이상 내게 가까이 오지 마라. 나는 25년 동안 이 교회에 다녔지만 나는 언제나 네 편에 서있었다는 것을 너는 알지 않느냐?”(Stop! Devil. Don't you come any farther. I want you to know that I have been a member of this church for 25 years… but I've been on your side all the time).
오늘 여러분께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오래 이 교회에 다닌 분들께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있었습니까? 예수님 편에 있었습니까? 악마 편에 서있었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만류하는 간언을 들은 예수님을 베드로가 악마 편에 서있다고 꾸짖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여기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사탄은 언제나 나쁜 사람들을 이용해서 나쁜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만을 이용해서 하나님과 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을 이용하여 사탄은 나쁜 일을 하는 것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사탄은 나쁜 사람만 붙잡고 일하니 나와는 관계없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 3:15-16에서도 주님의 단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신앙이 너무 이지적으로 가면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머물러 있게 마련입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따지다보면 기회를 놓치거나, 이기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감성이 열릴 때 결단하면 더 큰 믿음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친구의 아내가 갑자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비탄에 젖어 아내의 시신을 붙들고 울부짖는 친구를 바라보니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감성은 그때 함께 울도록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만일 그때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며 눈물은 몇 리터를 흘려야 되며, 몇 분간 울어야 친구가 위로를 받을까 따져본다면 그는 차가운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감성을 먼저 작용하도록 창조하신 이유는 감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성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때 즉시 깨닫고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결단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감성의 결단이 동반되어져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은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남을 위해 ‘나의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내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희생한다 해서 영원히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단계를 높여야만 믿을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단계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희생은 희생으로 끝나는 것으로만 믿기 때문에 더 큰일을 못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 군대는 미사일을 만들어 런던하늘을 불과 폭음으로 뒤덮었습니다. 온 시내가 나치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처칠 수상은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나치를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을 주어야 합니다”(to give blood, sweat and tears). 백성들에게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호소한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피가 마침내 영국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희생할 때 성장합니다. 나를 바칠 때 신비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내놓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 죽음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흘 뒤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감성적으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욱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용기를 갖고 예수님을 위하여 나의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 다가가야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라는 영화중에서 눈물을 머금으며 감동받은 장면을 늘 기억합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체코의 사업가였습니다.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땅에 공장을 세워 군납용 식기 등 식당재료를 납품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그가 폴란드에 공장을 세운 이유는 수용된 유대인들을 싼값에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쉰들러는 독일 나치당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동정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공장을 나치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피난처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가스탱크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독일 병사들에게 밑돈을 주고 공장 인부로 데려와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합니다. 무려 1,100명의 유대인들을 가스탱크의 죽음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이 그를 찾아가서 감사를 표합니다. 그때 쉰들러는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손가락에 끼어있는 금가락지를 빼들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이 금가락지로 두 사람의 생명을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구두요?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나의 코트요? 두 사람은 더 살릴 수 있 었습니다. 이 소매 단추요? 세 명은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My God, I could give bought back two more people with this ring. These shoes? One more person. My coat? Two more people. These cufflinks? Three more people.)
그는 거기서서 더 살리지 못한 안타까움에 후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좀 더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후회의 장면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좀 더 할 수 있었잖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너 있는 곳에서 좀 더 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
어느 기독도가 후회합니다. 용기 있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산도 오르고 들도 지나고 강도 건넙니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는 조금만 잘라도 십자가의 모양에는 별 흠이 없을 듯 했습니다. 목공소를 지날 때 조금만 잘라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가는데 너무 지쳐 십자가를 지고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무를 자르는 나무꾼에게 부탁하여 조금만 더 잘랐습니다. 이렇게 몇 번 자르고 나니 지고 가기가 쉬웠습니다. 드디어 천국 문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천국에 들어가려면 큰 낭떠러지를 건너야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내려서 거기에 걸치고 그것을 다리로 삼아 건너오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이 기독도는 얼른 십자가를 내려 낭떠러지 위에 대니 길이가 짧았습니다. 후회하고 슬피 울며 통곡해도 소용이 없었답니다. 핑계가 있을 때마다 잘라낸 십자가가 끝내는 구원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는 비유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위해 희생의 길을 걸으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목숨까지 내놓는 희생을 합니까? 이웃이 굶주릴 때, 병들어 신음할 때, 실패하여 낙담할 때 조금만 여러분이 그를 위해 희생한다면? 조금만 돕는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만 더하면 하나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남편을 사랑하는 것,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 부모님을 섬기는 일, 형제자매를 돌보는 일,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일, 그것들이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것들이 목숨을 내놓는 상징입니다. 작은 선한 일에 인색한 사람이 어찌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좀 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며 섬기는 일을 위해서라면 조금 더 희생이 되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반드시 상급으로 보상하십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잃으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약속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손해를 계산하고 우리의 손을 오므리거나 뻗었던 사랑의 팔을 거두어 드렸다가 주님께서 오셔서 “좀 더 할 수 있잖았느냐?”는 아쉬운 핀잔을 듣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할 수 있지 않느냐?”(Can you do for me?) 지금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