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불교는 선과 악의 구별을 부인하고
세상을 허망한 공과 환으로 보는 관념논리에 의해
유루공덕·무루공덕, 유주상보시·무주상 보시라는 비현실적인 구분을 하여
세상에 분명히 도움이 되는 좋은 원인마저 유위 공덕이니 집착하지 말라하며 보시를 할 때도 베푼 마음이 없는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루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알지도 못하는 부처님의 무루경지를 흉내내어
분별심을 버리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관념에 빠진 무지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현 불교는 중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루의 경지를 가정하여 '세상이 공하니 모든 것을 벗어나라' 라는 식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불교는 생명의 공통적인 존재법칙인 윤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선업마저 짓지 않고자 보시를 하되 선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이러한 관념적 분별은
오히려 선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불교인들의 행동력을 억제하는 측면도 있고
현실적으로 의도하지 않고 보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없는 만큼
그 진실 여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무주상보시의 함정을 살펴보자.
현불교는 돈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며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도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하게 되면 돈에 머물지 않는 큰 공덕을 짓게 된다고 한다.
내가 남에게 베풀었다는 마음을 갖고 하는 공덕은 선업을 짓는 공덕이므로 궁극적으로 완전한 해탈로 이끄는 보시가 될 수 없으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공덕을 베푸는 보시가 진정한 공덕이 되는 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주상보시가 공덕이 크지 않다고 하지만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며 필수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뜻이 있어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남을 돕겠다는 의지를 내지 않고 선행을 베풀기는 힘든 것이며
자기가 의지한 것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공덕이란 세상에 축복이 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법을 이고득락이라 했듯이
정법을 행하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축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좋은 일이라 했는데
그것이 남에게 고통이 되거나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부처님법을 잘모르고 한 무명의 행동이며
공덕이 아니라 악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것이 공덕이 될 수 있고 악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돈은 소중한 것이다. 돈을 소중히 생각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이 모이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없으며 생활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돈을 경시하거나 우습게 여기면 열심히 일할 의욕을 낼 수 없으며 의욕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할 수 없는 것이다.
돈에 집착을 가지면 업이 된다고 하지만
내가 열심히 이치대로 살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오는 것은 청정한 재산으로 나의 생활을 건강하게 하고 내 마음을 밝게 한다.
여기에 돈에 대한 욕심과 소망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소망은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이끌지만 욕망은 이치를 어겨 화를 부르고 업을 쌓게 된다.
돈은 소중히 써야 한다.
귀하게 번돈을 함부로 쓰면 그것은 어리석은 무명이 된다.
그 좋은 예가 무주상 보시이다.
지금 불가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주며 오른손이 행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보시하는 것이 무위공덕이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의 유희이며 말장난이다.
의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행한 것을 아무런 자각없이 모르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관념적 분별이며 말장난이다.
다음으로 주었다는 생각이 없이,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뜻과 이치없이 행하는 보시는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무지하게 만들어 자신과 세상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돈을 쓸 때는 그것이 세상에 좋은 원인이 되는 곳을 바로 알아 바른 이치로 써야 한다.
따라서 무주상 보시를 한다고 여기 저기에 함부로 돈을 준다면
그것은 공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이상한 선원이나 종교단체에 빠져 자신의 전재산을 아낌없이 희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은 무주상보시를 했다고 하겠지만
그 돈은 말법을 전하거나 탐욕스런 자의 배를 불리는 역할을 하여 세상에 어둠을 번지게 했다면 그것은 공덕이 아니라 악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 알고 세상을 축복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밝게하여 다음 생에도 좋은 근본을 갖게 하고 밝은 시각을 갖게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을 어둡게 하고 상대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러한 행위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리석은 자신과 불행한 세상을 가져오는 것이며
다음 생에도 똑같은 일을 저질러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말법을 좋아하며
지원하는 악업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치도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무주상보시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준 다음 그 용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고 한다.
돈을 받는 사람에게는 이것보다 편한 일이 없다.
모든 보시는 주는 사람은 아낀 돈을 좋은 곳에 쓰도록 관심을 쏟고 주고 받은 사람은 좋은 곳에 쓰도록 노력하여 준 사람에게 샅샅이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복지역사를 살펴보면
전쟁후 고아원이나 복지시설, 종교시설을 운영한 자치고 부자가 안된 자가 거의 없었으며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제대로 쓰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보시가 올바르게 쓰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을 어둡게 하거나 악하게 만드는데 기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메스컴에서 목사나 스님들이 신도들이 기부한 돈을
마음대로 착복하고 횡령하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신도들이 재물을 주는 것으로 공덕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잘 사용되는지 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알아야 할 것은
공덕이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돈이 잘 사용되도록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자신이 지은 원인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자기가 어리석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업을 지었다면
그 업은 다음 생에도 다시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한다.
즉 보시를 한다고 부정한 자나 말법을 행하는 자에게 재물을 준다면
그것은 자신의 어리석은 업을 더하는 것이다.
세상의 인과는 지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본인이 의도하든 않든 관계가 없다.
인과는 본인이 알던 모르던 지은대로 세상에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치에 맞게 좋은 원인을 지어
상대도 좋고 세상도 좋고 나도 좋는 공덕을 짓는다면
본인이 의도하던 않든 간에 좋은 공덕을 지은 것이니
복잡하게 유주상보시, 무주상보시라는 말을 만들어 업이 되고 안되고를 따지는 것은
말법이 관념으로 만들어낸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출처 : www.ginc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