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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사랑인지 원한인지
구양적과 모용쟁, 일속 대사는 올 때와는 달리 불쾌한 기분으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오를 때는 희망에 차 있었는데, 지금은 오로지 실망과 오리무중에 빠진 기분이었다.
일속 대사는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다. 전진교 교주 왕중양과 무공을 겨루어 볼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대리 단씨 가문의 무예인 일양지로 왕중양이 《구음진경》에서 터득한 선천공에 맞서 싸워보니 양쪽이 강약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엇비슷했다. 일속 대사는 왕중양과 서로 게를 읊던 일을 떠올렸다.
'사람이란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에든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일단 오류를 범하면 한평생 후회가 따르는 법. 하지만 인간이 정(情), 한(恨), 권(權), 욕(欲)에 봉착할 때 항상 정(正)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일 자그마한 실수조차 없이 산다면 어찌 부처 되기가 어렵다 하겠는가? 나와 중양이 게 읊기를 주고받아 보니 나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고 그 사람은 금세에 미혹되어 있다. 둘
다 총명하고 지혜롭지만 모두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여 창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일속 대사는 지혜롭고 명석하여 세상일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기 가슴속의 응어리만큼은 풀기 어려웠다.
구양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그 흥이 몽땅 깨어진 채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종남산을 내려오면서 그는 한동안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사부님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다. 사부님의 원수는 바로 사문의 원수이기도 하다. 사부님이 나에게 《구음진경》을 빼앗아 오라 하신 것은 이 사람을 찾아 사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진경도 손에 넣지 못했고 또 눈앞에 있는 이 원수도 무예가 대단하여 나로서는 적수가 못 되니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모용쟁은 흥이 나서 걸으면서 일속 대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속 대사님, 한 가지 물어 봐도 될까요?"
"낭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소승이 아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말씀드리리다."
일속 대사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사찰들은 한결같이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있더군요. 이런 산엔 물과 식량은 물론 인적이 드물어서 매사에 무척 불편할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하필 절을 이런 산 꼭대기 위에다 세우는지 모르겠어요. 화산(華山)의 옥화봉(玉華峰),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 등 알려진 큰 절들이 다 그렇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산에 들어와 불공 드리는 사람들한테도 이
얼마나 불편한 일이에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의 대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또 절에는 무슨 이점이 있나요?"
일속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낭자께선 이 일의 깊은 뜻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대저 불공을 드린다고 하면 그 정성을 보아야지요. 만일 인가 부근에 절간을 세운다면 조석으로 분향 재배를 할 수 있어 그 횟수는 많아지겠지만 부처에 대한 공경심이 꼭 커진다고는 할 수 없지요. 이렇게 되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생생사사(生生死死)든 길흉화복이든 모든 일을 부처님께 묻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집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을 비롯하여 장작이며 쌀이며 기름이며 소금 따위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도 부처님을 성가시게 굴겠지요. 그러면 부처님도 부처답지 못하게 돼 버리고 사람의 마음속에도 불경스러운 심리가 생길 텐데 그러고야 부처님을 중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낭자께서 부처님을 만날 생각이시면 사흘 동안 음식을 삼가고 갱의목욕(更衣沐浴), 불행방사(不行房事), 수거향촉(手擧香燭)을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음걸음마다 정성을 담아 산에 올라와야 합니다. 이 산은 또 비할 데 없이 가파르지 않습니까? 낭자께서 평소에 문 밖에 나설 때는 차교(車轎)를 소리쳐 부르고 앞뒤로 옹위를 받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팔을 쳐들면 계집종이 그것을 받쳐 주고 눈을 껌벅이면 옷을 입혀 주고……. 부귀는 인간을 게으르고 타락하게 만들지요. 낭자께선 일찍
이 이런 고초를 맛본 일이 있습니까? 오늘 낭자께선 발이 부르트고 땀투성이가 되면서 만 장이나 되는 계단을 밟고 산을 올라가서 부처님을 만나 보았지요? 그때 낭자의 심정은 보통 때보다 더 경건해지며 더욱 감개무량했을 것이오. 이번 사묘(寺廟)를 돌아봄은 낭자에게 있어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일속 대사는 모용쟁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심산에 오랜 절 숨어 있어
작은 골목의 술 더욱 향기롭네
인간이 세상일을 안다면
웃음마다 온통 문장이 되리.
모용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리며 일속 대사를 바라보았다. 긴 옷소매를 나부끼며 산바람을 따라 걷는 품이 구름 속의 나한(羅漢)인 듯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모용쟁은 내심 부러워 하며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사내로구나. 입만 열면 문장이 샘솟듯 하고 무예도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데다가 부드럽고 민활한 게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야. 구양네 형제들도 물론 인걸이긴 하지만, 구양적은 늘 소침하고 괴벽스러우며 곁에 누가 있든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으니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구양봉은 더 한심한 바보지 뭐야? 대사막에서 기갈에 시달리면서도 책벌레의 본성을 버리지 못해
달이나 노래하니 그런 한심한 바보가 어딨어? 두 사람 다 일속을 따라가려면 멀었어.'
그녀는 일속이 점잖고 재능이 출중한 사내 중의 사내로 여겨졌다
구양적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일속을 거꾸러뜨리겠는가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사부가 10여 년 동안이나 서역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전에 그는 사부가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사부와 자기가 손을 잡으면 어찌 당해 낼 수 있겠는가고 여겼었는데, 이 일속의 일양지신공을 보니 그 대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사부와 자기가 함께 손을 써서 일속과 결사전을 벌인다고 해도 승산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이 일양지신공을 갖고 있으니 사술(邪術)을 제어하고 독악(毒惡)을 막아낼 수 있을 테지. 내가 네 놈한테 독을 사용한다 해도 성공할 수 없으리란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수를 써서라도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구음진경》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 사문의 원수인 네 머리라도 갖고 가야 사부님 앞에서 면목이 서지 않겠느냐?'
세 사람은 산을 내려와 여관에 묵게 되었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논쟁을 시작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이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 거예요. 일속 스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을 보는 눈도 만만치 않고 매사에 남보다 한 수 앞서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일속 스님을 해치겠다는 거예요?"
구양적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산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웃고 떠들고 그 작자와 죽이 잘 맞던데, 그 정초가 좋아진 모양이구려."
두 사람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다.
모용쟁이 약이 올라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왜 나빠요? 당신이 나한테 뭐길래 상관이에요, 상관은?"
구양적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모용쟁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화를 내는 통에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성격대로 언제나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구양적은 어려서부터 대사막에서 자랐는데, 극심한 추위와 남모를 어려움들을 겪는 동안 쌀쌀하고 괴팍한 성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속에 할말이 있어도 입을 여는 것을 싫어했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굽히려 하
지 않았다. 모용쟁 같은 처녀들이 남자에게 어떤 마음을 기대하는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연히 그의 행동은 거칠고 무뚝뚝하여 종종 모용쟁의 기분을 상하게 하곤 했다.
그는 모용쟁은 내버려둔 채 머리를 숙이고 어떻게 하면 일속을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모용쟁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처럼 운이 없는 년도 없을 거야. 서역의 대사막에서 그 고생 끝에 다행히 구양 형제들을 만나 기뻐했더니 이렇게 비뚤어진 심보를 가진 사람들일 줄이야. 이런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는 건데.'
기분이 상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었어요. 그만 가서 자야겠어요."
그녀는 구양적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방에서 나가 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거리는 정적에 잠겼고 여관도 조용해졌다. 구양적은 침대맡에 앉아 옷을 갈아입은 뒤 사두장을 들고 일어섰다.
이때 삼경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일속 대사가 묵고 있는 방 앞으로 걸어갔다. 문틈으로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일속 대사는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구양적은 품에서 작은 통을 끄집어냈다. 통에 든 것은 그와 그의 사부가 차디찬 얼음 동굴에서 키워 낸 이상한 누에였다. 이 벌레는 독성이 비할 바 없이 강할 뿐만 아니라 놀랄 만큼 추위를
몰아 와 사람의 피부에 닿았다 하면 몸이 얼어붙어 동태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구양적과 사부는 10년이나 걸려서 이러한 누에를 한 쌍밖에 키워 내지 못했는데, 그나마 수컷은 사부의 손에 있고 이것은 암컷이었다. 구양적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 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일속을 넘어뜨릴 수 없을 테지. 하지만 이 벌레로 중독시킨다면 일속이 아니라 대라진선(大羅眞仙)이라 하더라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구양적은 문 앞에서 얼음누에가 약통을 벗어나 방바닥을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벌레는 구불구불 기어 곧장 일속에게로 향했다. 벌레가 기어가는 자리를 따라 한 갈래의 빙선( 線)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뜻하던 방바닥 한복판으로부터 얼음줄이 무시무시하게 뻗어 나왔다. 벌레는 일속이 자고 있는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구양적은 일속이 깨어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일
속은 가볍게 코까지 고는 품이 깊게 단잠이 든 모양이었다. 벌레는 이제 그의 등허리에 기어들어갔다. 한기가 일속의 체내에 주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구양적은 독사장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 곁에 서서 일격을 가할 틈을 노렸다.
이때 꼼짝 않고 누워 있던 일속의 장삼이 부스럭거리는 듯하더니 그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대는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는고?'
일속은 잠에 취한 듯 눈을 감은 채 입도 벙긋하지 않았으나 마치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아 구양적은 놀란 나머지 사두 장으로 일속의 머리에 일격을 가했다. 이것은 독사비천(毒蛇飛天), 일룡귀연(一龍歸淵), 용반호거(龍磐虎踞)라는, 사장독초(蛇杖毒招) 가운데 가장 악랄한 세 가지 타격 법이었다. 이 법수로 머리를 가격하면 제아무리 대단한 기공을 가진 일속이라 해도 축지 않고는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그 독사장을 막아낸다고 하더리도 벌레가 몸에 기어올라간 이상 반드시 죽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속은 신통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문득 왼손을 들어 꽃이라도 따듯 가볍게 그것을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구양적은 손에서 쥐가 나는 듯한 느낌에 하마터면 독사장을 떨어뜨릴 뻔했다. 구양적이 멈칫하자 일속은 손가락 두 개를 써서 독사장을 확 붙잡았다. 구양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의 무예로는 일속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구양적은 벌레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
런데 이미 일속의 몸에 달라붙은 벌레가 일속이 식지로 가리키는 시늉을 하자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일속이 정색을 하전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는 시주님이 길을 오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눈에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 살의는 다름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소. 나와 구양 시주님 사이에 무슨 연원이 있길래 시주님은 이처럼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구양적이 성난 기색으로 말했다.
"일속, 당신은 내가 누군지나 알그 있소?"
"그대는 서역 대사막의 으뜸가는 고수 구양적이 아니시오. 이미 알고 있소이다."
일속의 대답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말해 주지 않으니 알 리가 없지. 나의 사부님은 백면라살 수라아시다."
그의 말에 일속은 크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주의 사부님은 어디 계시오? 그녀가 지금도 살아 있소?"
구양적이 버럭 화를 냈다.
"네 놈이 죽지 않았는데 사부님께서 어찌 죽을 수 있겠느냐?"
일속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그는 천천히 구양적의 독사장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 내가 죽지 않았는데 그녀가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죽지 않고 있는데……."
일속은 그답지 않게 몹시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독사장을 집어든 구양적은 이때를 틈타 일격을 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였다. 그는 일속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일속은 몹시 괴로워하며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수라아, 수라아, 천룡팔부(天龍八部), 귀신은 나살(羅熬)을 위하고 신은 인도(人道)를 위함이니 여귀(女鬼)를 막아냄은 수라를 위함이라."
구양적은 염불을 모르는지라 일속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속이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어안이벙벙해졌다. 갑자기 일속이 구양적의 옷자
락을 틀어쥐며 물었다.
"말해 주게,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12년이나 되도록 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사부님은 얼음 동굴 속에 계시지. 그분은 네 놈을 죽이려고 벼르고 계시다. 그동안 사부님의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분은 너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하고 있어. 만일 그분이 네 놈을 만났더라면 기어이 죽여 버렸을 거다!"
구양적의 대답에 일속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녀가 어떻게 혼자 얼음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어? 그리고 그 아리따운 얼굴에 어찌 혈색이 없을 수 있어?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가 어찌 백발이 될 수 있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속은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이미 죽은 몸이고 마음도 죽었어. 다만 숨만 쉬고 있을 뿐이야. 그것은 내게 아직도 자그마한 속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난 그녀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괴롭히는 까닭은 뭔가? 나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야? 자네는 왜 그녀가 잘살고 있고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지 못하나? 그렇게 말하면 자네한테 해라도 생긴단 말인가?"
구양적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나? 나 역시 사부님을 사랑한다. 그 분은 나를 구해 주셨고 무예를 가르쳐 주셨지. 난 그분을 좋아한다. 난 그분이 어떤 지경이 되었는지 네 놈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
아. 세상 누구든 그분을 만나려 한다면 난 그 놈을 죽여 버리고 말 거다."
일속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구양적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자네, 그 말이 진정인가?"
구양적이 머리를 끄덕이자 일속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더는 말이 없었다.
일속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듯싶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방안을 한바퀴 날아서 돌았다. 이것은 그의 일지 법인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기만 하면 마음대로 허공을 떠다닐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돌아와 평온하게 앉더니 손으로 얼음누에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음 동굴이 차다고 하는데 이 벌레보다 더 찬가? 인심이 독하다고 하는데 이 벌레보다 더 독한가?"
일속은 마치 그 벌레가 얼마나 독한지를 전혀 모르는 듯이 손바닥에 놓고 말했다.
"구양적, 이 벌레가 독이 있다고 하지만 나를 해칠 수는 없네. 보게나."
일속이 왼손을 곧게 펼치자 벌레가 내뿜은 냉기로 인해 손바닥이 삽시에 얼음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혈맥 속의 피는 여전히 제대로 순환하고 있었다.
일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독벌레가 있다고 해도 나한테 일양지신공이 있으니 자낸 나를 해치기 어려울 걸세."
그러나 구양적이 보기에 그의 왼팔은 이미 얼음 덩이가 되었고 몸은 덜덜 떠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독벌레를 이겨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속은 오른손을 내밀어 식지로 왼쪽 어깨의 천천혈(天泉穴)을 가리켰다. 식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니 매우 힘든 눈치였다. 그러나 그 식지가 차례로 아래쪽을 가리키자 시꺼멓게 죽었던 혈색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본래대
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저 놈이 이렇듯 기공이 대단한데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다 해도 그의 적수가 되기는 어려웠겠구나……."
구양적은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살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졌다.
일속은 여전히 손바닥에 벌레를 놓은 채 구양적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나의 수법을 보여 준 건 자네에게 내 마음을 알리기 위해서네. 나는 벌레의 독을 달갑게 받고 싶네. 내가 죽은 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수라아에게 전해 주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일세."
일속은 숙연히 정좌를 하고 두 손을 한데 모아 쥐었다. 손에 여전히 벌레를 쥔 채, 그걸 들여다보며 그가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그대는 나를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나는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독하고 그대도 독하지만
마음은 둘 다 고독하구려.
구양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일속이 무엇 때문에 두 손으로 벌레를 그냥 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벌레를 두 손으로 쥐고 마음속에 끌어들이면 혈맥을 통하여 온몸이 굳어 버리므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속은 얼굴에 평온한 미소를 띠고 각오가 되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추호의 속념도 없이 곧장 서방의 극락 세계로 갈 참이었다.
구양적은 멍하니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백면라살 수라아를 스승으로 모신 뒤 사문의 원수를 저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속이 언 시체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리고 싶었고 빨리 사부께 알리고 싶었다. 이제 사문의 원수가 죽어 없어질 테니 그녀의 근심은 사라져 이제 사부는 얼음 동굴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모용쟁이 들어왔다. 그녀는 일속 대사와 구양적을 번갈아 보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었다. 그녀는 곧장 일속에게로 달려가려 했으나 구양적
의 사두장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녀는 사두장에 밀려 곤두박질쳤다.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구양적이 쌀쌀하게 말했다.
"낭자가 저 사람을 건드리면 낭자도 죽고 마오. 저 사람이 쥐고 있는 벌레에는 무서운 독이 있어서 죽지 않고는 못 배기오."
모용쟁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에 불을 켜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군요!"
모용쟁은 다시 일속에게로 가려 했다.
구양적이 두 번이나 막아 섰으나 모용쟁은 기어이 그를 뿌리치고 일속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있는 벌레를 땅바닥에 떨쳐 버렸다.
"당신은 미쳤어요. 얼음 벌레로 중독시 켰으니 저분은 죽고 말 거예요!"
그녀는 펄펄 뛰었다.
구양적이 차가운 어조로 빈정댔다.
"모용낭자, 저 놈이 죽고 사는 건 우리 사문의 일인데 낭자가 무슨 상관이오? 어서 물러나시오."
벌레는 땅바닥에서 여전히 꿈틀거리며 기고 있었다. 모용쟁은 홧김에 얼음누에를 밟아 죽이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비열한 인간이군요! 정정당당히 싸워서는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이런 악독한 궤계를 쓰는 거지요? 벌레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이런 부끄러운 짓이 어디 있어요!"
"모용 낭자, 저 놈은 우리 사문의 원수요. 낭자는 상관 말고 물러나시오!"
모용쟁은 서글픈 심정으로 일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속 대사를 무척 존경했다. 이 세상에서 일속 대사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기란 어려울 것임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속은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굳어 있었다. 모용쟁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구양적, 당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당신은 인간도 아니라구요!"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구양적은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서역 대사막에 계시는 사부님께서 이 제자가 사문의 원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신다면 큰 위안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사부님께선 이제 더는 그 얼음 동굴에서 고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이번엔 일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속 대사, 그대는 아주 비장한 죽음을 택했소. 내가 돌아가면 사부님께 그대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하겠소."
구양적은 비록 일속이 읊은 게(偈)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속에 은밀한 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고스란히 사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관에서 달려나온 모용쟁은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저려 왔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극악스러운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못살게 구는가? 일속 대사 같은 인물은 실로 귀한 분인데 구양적은 왜 그분을 기어이 죽이고 말았을까? 아
아, 알 수 없는 일이야.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무거운 심정으로 수림 근처에까지 와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모용쟁,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며 어떻게 살아 나갈 작정이지? 너는 정암으로 돌아가려느냐, 아니면 강호에서 유랑하려느냐? 너는 부모 형제는 물론 돌봐 줄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녀는 갖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이렇듯 번뇌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듯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모용 낭자, 이곳에서 뭘 하고 있지?"
깜짝 놀란 모용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세요? 제가 모용쟁인 걸 어떻게 아시나요?"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천년 묵은 얼음 동굴에서 한 번 상봉하였거니, 오로지 지난 일을 알 뿐 내세를 알 수는 없도다."
"당신은 백면라살 수라아시군요!"
모용쟁이 놀라며 말했다.
상대방은 그렇다고 대답한 뒤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모용쟁, 넌 왜 우리 적이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가 널 버렸느냐?"
그녀는 모용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적이는 자기의 동생과 함께 있겠구나."
모용쟁이 대답했다.
"구양봉은 북강 노독물(老毒物)의 제자들한테 끌려갔어요."
여인이 놀란 듯 되물었다.
"뭐라고?"
모용쟁이 다시 한 번 똑같이 대답하자 여인은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노독물을 잘 아는 그녀는 구양봉이 노독물의 부하들한테 잡혀 갔으니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적이는……, 그 앤 잘 있느냐?"
그녀의 이 물음에는 깊은 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모용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여인은 정말 흉악한 인간이지 뭐야? 자기가 그 얼음 동굴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구양적을 짐승같이 무서운 사람으로 만들다니!'
모용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당신의 그 제잔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뭐예요? 그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여인이 놀란 소리로 물었다.
"뭐?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그래 누굴 죽이고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은 일속 스님을 죽였어요."
모용쟁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인은 모용쟁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모용쟁의 머리칼을 틀어쥐더니 큰소리로 물었다.
"그 애가 어디에 있느냐? 빨리 말해라. 그 애가 어디에 있지?"
모용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 사람은 객점에 있어요. 운우(雲雨) 여관에 말이에요.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그곳에나 가 보세요. 날 괴롭히지 말고."
여인은 모용쟁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나는 듯이 걸어갔다.
구양적은 일속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죽어 가던 일속이 구양적에게 할말이 생각났는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다만 두 눈으로 구양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있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일속 대사, 당신이 죽으면 내가 묻어 주리다. 하지만 당신의 머리는 베어 내야겠소. 서역에 갖고 가서 사부님께 보여야 하니까."
일속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양적이 한 말을 알아듣고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백발의 여인이 나는 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일속에게 다가가 그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란 구양적은 얼른 그녀를 뒤쫓았다.
"적아!"
일속을 안고 나가던 여인이 소리쳤다. 구양적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사부님이 어떻게 여길…….'
구양적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뒤쫓았다. 멀리 사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림 속으로 번개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구양적은 영문을 모른 채 부지런히 뒤쫓았으나 사부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시냇가에 앉아 있는 사부를 발견했다. 달빛 아래서 일속을 안고 앉아 있는 사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속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명전(明 )씨, 내가 당신을 해쳤어요. 내가 당신을 해쳤다구요……."
구양적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모용쟁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구양적의 곁에 섰다.
일속은 이미 잿빛으로 죽어 가고 있었으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 듯 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그가 불가에 귀의하기 이전의 속세지념(俗世之念)을 남겨
준 그 여인임을 알았다. 바로 그녀가 그로 하여금 불조와 만날 수 없게 했고 한평생 우울하고 허무한 나날을 보내게 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면서 백발 여인과 일속 스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일속 스님을 꼭 끌어안은 채 여인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명전 씨,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군요. 만일 당신이 죽을 생각이 없었던들 적이가 어찌 당신을 죽일 수 있었겠어요? 적이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명전씨……, 난 최근에야 당신이 무엇 때문에 법명을 일속이라 지었는지 알게 됐어요. 당신이 일속이라 한 건 일 점(一點)의 속념, 즉 저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말씀해 주세요.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
구양적과 모용쟁은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속의 몸에서는 점점 얼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인은 일속의 이빨 사이로 약을 흘려 넣으려 했다. 그것은 얼음누에의 독을 푸는 영약(靈藥)이었다. 하지만 일속은 그녀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명전 씨, 입을 벌리세요. 이 약을 자셔야지요. 이 약을 자시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그녀는 자기의 입으로 환약을 씹어서는 일속의 입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일속은 여전히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녀가 일속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일속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오열을 터뜨렸다. 비 오듯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시냇물이 일속의 몸에 돋은 얼음을 씻어 갔다. 얼음 조각들이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자 시냇물에서 물고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벌레의 독성이 어찌나 극렬한지 시냇물의 물고기들까지 모두 중독되어 죽어 버린 것이다.
백발의 여인은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어리석군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당신은 일양지공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음누에한테 독살당한단 말이에요? 당신은 그래 일양지공을 사용하기가 소원이 아니었던가요? 바보 같은 양반……, 바보 같은 양반……."
그녀는 자기와 함께 웃으면서 인생을 담론하던 지난날의 일속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얼마나 유쾌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던가?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일속은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그녀는 얼음 동굴 속에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그랬던 것이 어언 12년, 뼈를 깎는 고통 끝에 만나고 보니 그는 스님이 되어 있고, 또 죽어서 자기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고쳐 생각해
보아도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구양적은 사부가 일속을 끌어안고 냇가에 앉아 목놓아 우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부의 심정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부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찾아가서 복수하려 하지 않았고 또 무엇 때문에 《구음진경》을 구해 오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구음진경》을 얻어 무예를 닦은 다음 일속을 찾아 정식으로 겨루어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일속
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왜 내게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던 걸까? 일속을 죽이지 말라고 왜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았을까?'
구양적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구양적이 일속을 찾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절대 일속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구양적이 일속을 찾게 되더라도 일속이 절대 구양적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구양적이 얼음누에를 사용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또한 일속이 제대로 막아내지 않고 죽기로 작정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어느덧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발의 여인은 일속의 시체를 부둥켜안은 채 여전히 물가에 앉아 있었다. 일속의 몸에 돋아났던 얼음 덩이들도 어느덧 완전히 녹아 그와 수라아의 몸뚱이는 온통 젖어 있었다. 수라아는 한기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일속을 부둥켜안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감히 나설 엄두가 안 나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모용쟁이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그분을 내려놓으세요.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수라아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꼭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모용쟁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런 걸 보고 애증이라고 하나? 남녀간의 사랑과 증오란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 이들의 생과 사는 원한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 때문인가?'
모용쟁은 잠자코 수라아의 모습을 지켜 보다가 마음을 다져 먹고 물 속에 들어섰다. 물은 어찌나 차가운지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그녀는 수라아에게 다가가 완곡한 말투로 권했다.
"선배님, 춥지 않으세요? 일속 대사께서도 추워하실 텐데요……."
그러자 수라아는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뭐라구? 이분이 추워한다구?"
모용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아는 일속이 살아 있는 사람이기나 한 듯이 그에게 물었다.
"명전 씨, 추운가요? 당신은 일양지신공을 하시는 분이니 춥지 않으시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이 찬물 속에 이렇게 있는 걸 원치 않으시죠? 당신은 선원(禪院)에서 등잔이나 낡은 불상을 지키고 앉아 있고 싶죠?"
수라아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천천히 기슭으로 올라가 일속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일속의 곁에 꿇어앉아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명전 씨, 당신은 돌아가셨군요. 당신은 정말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잠자코 서 있던 구양적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사부님, 이 제자가 죽일 놈입니다."
"적아,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건 나와 저 사람 사이의 일이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수라아가 무심한 어조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는 옷소매로 일속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주고는 또다시 탄식했다.
"당신은 여전히 스무 살의 젊은이 같지만, 절 보세요. 전 이제 꺼져 가는 촛불과도 같아요. 이렇게 덧없는 게 인생인 것을……."
그녀는 계속해서 일속의 몸을 정성들여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명전 씨, 당신은 어땠나요? 당신도 나와 헤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겠죠? 그런데 당신은 왜 도망을 갔나요? 왜 한마디도 나한테 귀띔하지 않았나요? 혹여 당신이 나와 헤어지고 싶었다면, 그런 말을 한마디라도 했던들 전 당신을 물고늘어 지진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왜 귀띔도 하지 않으셨어요?"
구양적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품안에서 컸으며 그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녀는 그를 안아 줄 때마다 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명전이었던 것이다. 명전이 누구인지 구양적은 알지 못했었다. 그는 다만 사부가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분노가 차 올라 괴로워하신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런데 사부의 한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구양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부님, 적이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구양적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두장으로 자기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백면라살은 꿈짹도 하지 않고 구양적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용쟁이 잽싸게 달려들어 지팡이를 낚아챘다.
"선배님, 구양 오라버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데 왜 막지 않나요?"
백면라살이 탄식조로 대답했다.
"너 같은 계집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저 앤 죽어야 해. 일속이 죽었으니 저 애도 죽어야 해. 그리고 저 애가 죽게 되면 나라고 해서 혼자 살아 있을 성싶으냐?"
그녀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모용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참지 못하고 속엣말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당신은 한 남자를 죽이고도 모자라 당신의 제자까지 함께 죽일 작정이에요? 제자는 당신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인데, 그것이 설령 잘못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다 누구 탓인데요? 당신이 일속 대사를 죽도록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쓰라린 결과가 빚어진 거예요. 자업자득이라구요!"
구양적이 모용쟁의 말을 막았다.
"모용 낭자, 그만하라구!"
모용쟁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백면라살 수라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이 모든 건 자업자득이니 남을 원망할 것이 없지."
그녀는 모용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말을 대담하게 할 줄 아는 이 처녀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일속의 시체를 한쪽에 눕혀 놓고 세 사람은 조용히 마주앉았다.
그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말이 없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 올 뿐 사위는 그지없이 고요했다.
백면라살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적아, 저분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더냐?"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그는 그제야 일속의 말들이 생각났다.
"저분은 게어(渴語)로 말씀하셨는데 승인들이 죽을 때 말하는 도리 같았습니다."
여인이 재촉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내게 들려주렴."
그녀는 구양적이 그것을 다 기억하기 어려우리란 걸 알고 덧붙여 말했다.
"네가 기억하는 만큼만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구양적은 사실 일속이 했던 말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사(詩詞) 따위에는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죽어 가는 사람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제가 사부님께서 얼음 동굴 속에서 12년이나 계셨다고 하니까 그분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속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얼음 동굴 속에서 살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이때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마침 밖에서 그분이 게를 읊으시는 걸 들었는데 말씀드리지요."
"어서 말해 보아라."
모용쟁은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 속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그대는 날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난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독하고 그대도 독하지만
마음은 둘 다 고독하구려.
여인은 조용히 듣더니 그것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 속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었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명전 씨, 나는 얼음 동굴에서 살더라도 당신은 그 벌레를 피했어야 했어요. 얼음 동굴에서는 사람이 살 수가 있지만 얼음누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당신은 정말 어리석구려."
그녀는 다시 눈물을 쏟으면서 일속의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대는 날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난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네……. 당신 말씀이 맞아요. 난 당신을 지독하다고 생각하고 당신도 날 지독하다고 생각하셨겠죠. 당신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독한 생각이 골수에 뻗쳐 백발이 되었지요. 독한 생각에 영혼이 없어지고 독한 생각에 배가 긁혀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지요."
구양적파 모용쟁은 그녀를 보면서 슬픈 생각에 젖어 들었다. 불제자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버리고 떠난 남자를 잊지 못해 자신의 삶을 훼멸시키면서까지 애증을 키워 온 이 여인……. 이처럼 비극적이고 허무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첫댓글 ``@-@``
감사합니다.
^^
잘보구 갑니다././
즐감~~~
즐감
즐감
ㅎㅎ
즐감 ~~
감사히 잘 봤습니다...
즐감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