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을 오르며
연숙자
눈이 내린 날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이 걷고 싶어진다.
순백의 길을 따라 걸으면 일상 속에 짓눌려 있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
라앉고 그 고요함에 이끌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하얀 눈이 내리던 날 나는 이런 설레임을 안고 군자산으로 향했다.
홀로 떠난다는 것, 그 자유로움에 마음은 어느새 저만치 달음질쳐
간다. 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
볍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판에는 볏짚이 이리저리 뒹굴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허허로운 겨울산은 나무들을 감싸 안은 듯 정적에 싸
여있다 달려가는 버스는 무미건조하게 생활하는 나를 세상 밖으로
조금씩 밀어내듯 도시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쌍곡의 작은 마을에 멈
추어 섰다.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니 크고 작은 산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
며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 중에도 신선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군
자산은 멀리서 보아도 단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어 모습이 수려하고
의연하다.
쌍곡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자연계곡으로 접어드니 부드러운 햇
살이 골짜기마다 가득하다 잎이 바랜 들풀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쓸
쓸히 고개 숙이고 가슴이 싸해지는 겨울의 황량함은 고독한 영혼
의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소나무 숲길로 들어서자 오르막이 나타났다 등산로가 개발되지
않아서인지 인적도 드물고 자칫 잘못하다간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헤매게 된다 더구나 모래가 섞여있는 바닥은 잠시라도 방심하면 미
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가파른 절벽 아래로 펼쳐진 계곡은 위험스
럽기 짝이 없다.
갑자기 적막한 산중에 홀로 있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전신을 엄습
해 왔다 산모퉁이로 돌아난 길은 걸어가기가 무섭기만 한데 날카로
운 북서풍은 나 목 사이로 불어와 꼭꼭 여민 옷깃 속으로 파고든다.
추위를 유난히 싫어하는 나는 되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언제나 편
안한 길만 가려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조
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다 보면 안주하는 삶은 나를 뒤쳐지게 한다는 것을 절실
히 느낀다 힘이 들어 멈춰 서있으면 뒤따라오는 이가 나를 앞서고
발을 떼지 않으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그 쉼이 오래될수록 앞질러
간 사람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산을 오르는 일은 나 아닌 다른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오직 스스로 가야 하는 인생 길과 같다.
그래서 산행은 살아가면서 어려움으로 좌절할 때 시련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방법을 깨닫게 하고 넓은 가슴으로 포용하는 힘을 지닌 커
다란 자연의 모습을 닮게 한다.
능선 분기점을 지나 다소 완만해진 오름 길로 접어드니 기암절벽
이 우뚝 솟아있고 옻나무와 단풍나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
쟁이라도 하는 듯 빽빽이 들어서 있다 줄기를 하늘로 향한 전나무는
늠름한 젊은이의 기상처럼 우렁차고 오리나무 가지에는 열매를 떨
어뜨린 빈 껍데기가 세 갈래로 퍼져있어 마치 꽃이 피어난 듯 하다.
한 옆으로 으름이 아카시아 나무를 감으며 올라가는 모습은 서로 의
지하며 살아가는 정다운 이웃을 보는 것만 같다. 좌우에 군락을 이룬
우람한 장송들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나무들이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을 헤치
고 왔을까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였을
많은 시간들 오랜 세월의 풍파에도 꿋꿋한 여인의 절개를 보는 듯
삶의 터전을 튼튼하게 뿌리내린 모습이 대견스럽다.
이렇게 나무도 제 삶을 강인하게 지켜내고 있거늘 나는 과연 어떠
한 모습으로 살아왔던가 지나온 시간들 속에 나의 존재는 현실에 뿌
리내리기를 두려워하고 작은 어려움에도 서둘러 꽃을 떨어뜨리는
나약한 모습은 아니었을까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겨울을 나고있는 나
무들을 대하니 자연은 내게 마음을 비우라고 순응하는 삶을 살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철쭉나무 사이로 한참을 오르니 시계가 확 트인 군자산 정상이다.
기암 괴봉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산 아래로 이화령 고개에서 속리
산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솟아오른 바위들
과 둥글게 이어진 능선들이 굽이쳐 넘실거리고 하얀 눈 속에 덮인
겨울산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간결하다.
나는 가슴을 펴고 하늘을 향해 "야호..." 하고 크게 외쳐본다. 하늘
과 맞닿은 듯 날아오를 것 같은 환희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자유를 안겨다준다.
산은 모나있던 마음도 둥글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넓
게 해준다 그래서 뭇 사람들은 산을 어머니에 비유하기도 하고 산
을 오르는 마음을 두고 고향 찾아가는 그리움이라 하였나보다.
차가운 바람이 적막을 깨듯, 나뭇가지 위에 쌓인 희디흰 눈꽃을 흔
들고 지나간다 숨죽인 듯한 모습의 겨울산은 긴 기다림이다.
『모든 빈 구석, 모든 잊혀진 것과 구석진 곳에, 자연은 생명을 불어
넣고자 갖은 애를 쓰며, 죽은 것과 생명 자체에도 생명을 불어넣고자
투쟁한다』는 베스튼의 말처럼 얼어붙은 땅속에서도 끊임없이 거듭
나기 위한 생명들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침묵과도 같은 시간은 새로
운 시작을 꿈꾸며 희망을 품게 하는 기다림이다.
이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이 산에도 봄이 올 것이다 인
고의 시간들을 보낸 겨울산은 눈이 녹아 습기 찬 대지에 고귀한 생명
의 싹을 틔우겠지. 혹한의 환경 속에서도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겨울
산에 오르다 보면, 힘겹고 무겁기만 한 내 현실에도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어둠의 그림자가 내려와 산골짜기를 물들이더니 금방 어둑해진다.
산 그림자가 내 얼굴을 가릴 때쯤 멀어져 가는 군자산은 언제라도
반겨줄 것 같은 오랜 친구처럼 믿음직스럽게 서 있다.
2001. 9집
첫댓글 산은 모나있던 마음도 둥글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넓
게 해준다 그래서 뭇 사람들은 산을 어머니에 비유하기도 하고 산
을 오르는 마음을 두고 고향 찾아가는 그리움이라 하였나보다.
차가운 바람이 적막을 깨듯, 나뭇가지 위에 쌓인 희디흰 눈꽃을 흔
들고 지나간다 숨죽인 듯한 모습의 겨울산은 긴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