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톨을 까다가
가을 들머리 태풍이 세 차례 지나간 이후 연일 하늘은 우중충 비가 온 날이 지속되었다. 구월 셋째 토요일부터 비로소 가을다운 날씨로 돌아왔다. 일교차 큰 기온으로 아침나절 안개가 짙게 끼었다. 그 무렵 작대산 산허리를 돌아가다 안개가 펼친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안개는 운해를 이루어 낮은 산들은 안개 아래 잠겼다. 옥녀봉과 백월산 등 몇 봉우리만 섬처럼 봉긋했다.
작대산 트레킹 길을 걷다가 야생 밤톨과 도토리를 제법 주웠다. 골프장 철조망을 둘러친 곳이라 멧돼지 출몰이 어려워서인지 알밤이 남아 있었다. 암반 구간을 지나다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가 가득해 배낭을 벗어놓고 주워 모았다. 도토리는 다람쥐가 좋아한다만 멧돼지는 왕성한 먹성으로 먹어치우는데 벼랑이라 덩치가 큰 녀석들이라 오르지 못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내 차지였다.
구월 셋째 일요일이다. 하늘은 어제보다 더 쾌청해 전형적인 가을날이었다. 점심나절 고현을 가는 버스를 타야하기에 산행이나 산책은 자제하고 집안에 머물렀다. 전일 주운 도토리는 우리 집에서는 해결할 수 없어 같은 아파트단지 친구에게 보냈다. 초등학교 동기 아내는 시장 방앗간에 가 도토리를 갈아 전분을 가라앉혀 묵을 빚을 수 있다. 나중 그 도토리묵을 맛볼 수 있으려나.
일요일 이른 아침 어제 다녀온 산행기를 남기고 주워온 밤톨을 깠다. 매년 추석 전 고향 벌초를 가면 선산 주변 밤나무 그루 아래 알밤을 제법 주워왔더랬다. 올해는 코로나로 이동에 제약이 있어 벌초는 큰형님이 혼자 해결해 걸음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작대산 산행에서 밤톨을 주워 가을의 정취를 느꼈다. 야생으로 자란 밤이라 크기는 작아도 개량종 굵은 알밤보다 풍미는 더 좋다.
밤은 삶아서 껍질을 까서 먹어도 좋으나 생밤을 한꺼번에 까 모아두었다가 밥을 지을 때 넣어 먹어도 된다. 어제 주워온 밤은 야생이라 밤톨이 작아 삶아 먹기보다 까서 밥에 넣어 먹기 알맞았다. 도토리처럼 작은 밤톨을 인내심을 발휘해 까 모았다. 과도가 아닌 밤을 깎는 가위로 까니 수월했다. 밤은 겉껍질 안에 속껍질 보늬가 감싸고 있다. 보늬는 일부 남겨도 먹기에 지장이 없다.
밤을 까면서 친구에게 보낸 도토리가 떠올랐다. 갈색 윤이 반질반질 나던 도토리였다. 몇 해 전 가을 물금에서 강변 트레킹을 나서 원동에 닿았다. 경부선과 경전선 무궁화호가 간간이 정차해 출발하는 역이 있는 강변 마을이었다. 면 소재지였지만 6,70년대 드라마 세트장 같은 이발관과 시계포 등이 있는 골목을 지났다. 어느 방앗간 앞에 가득 펼쳐 말리던 도토리가 기억에 새롭다.
올해는 지난 팔월 말 원동으로 나가봤다. 원동 원리는 골목 담장엔 7080 벽화거리를 조성해 눈길을 끌었다. 철이 일러 도토리가 나올 때가 아니라 볼 수 없었다. 대신 방앗간에서는 참깨를 볶아 기름을 짜느라 분주하고 건고추도 빻고 있었다. 원동은 낙동강 강변이지만 배냇골로 드는 길목이다. 봄이면 산나물이 많이 나오고 가을이면 현지인이 주운 도토리가 그곳으로 모여 들었다.
이번에 원동 거리를 찾았을 때 유심히 살폈더니 그 작은 동네에 방앗간이 세 군데나 되었다. 세 곳 다 분주히 참깨를 볶고 기름을 짜는 기계 돌고 있었다. 산중에서 나오는 곡물을 빻아 기름을 짜거나 가루로 내는 방앗간이었다. 두부를 빚을 콩을 가는 경우도 있을 테다. 아마도 배냇골에서 나온 곡물들이지 싶었다. 평야는 벼농사만 짓지만 산골은 밭작물을 심어 가을이 풍성했다.
사족을 하나 더 붙이면 삼랑진 송지 장터 ‘유가네묵밥’ 집이 있더이다. 송지는 읍사무소가 위치한 4일과 9일에 오일장이 서는 데다. 송지 장날이면 배를 드러낸 민물고기가 활어로 나오고 꼼장어 연탄구이로 유명하다. 나는 그보다 장터 골목 유가네묵밥이 기억에 남아 있다. 메밀이나 도토리로 빚은 묵으로 밥상이나 무침을 차려낸다. 가을이 가기 전 삼랑진으로 나가 볼 틈이 나려나. 20.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