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했네
푸른 칼은 녹슬어 붉게 부스러지고
검은 팽나무 아래
내 젖은 손은 그대가 빠져나간 둥근
흔적의 가장자리만 더듬네
마을은 비어 있고
탱자나무 가시 울울한 내 마음의 자리엔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했네
검은 팽나무 아래
내 젖은 편지를 찢네 오
내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는 나날들을 찢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3.016.26. -
이 시는 1995년 처음 세상에 나왔다가 최근 복간된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에 수록돼 있다. 시인은 여러 편의 시에서 ‘유리(羑里)’라는 공간을 그리워한다. 유리는 중국 주나라 문왕이 유배된 주역의 발상지면서 박상륭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서 주인공이 기거한 곳이다. 사랑하는 그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점(占)을 치거나 유리에 가면 그대를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에서 두 공간과 무관치 않다. 또한 유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머무는 상상의 공간이다.
이 시는 ‘젖은 편지를 읽다’의 후속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내 손에 들려 있던 젖은 편지는 눈물에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다. 태워버릴 수도 없는 편지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나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편지를 찢는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유리는 죽어야 갈 수 있는 마음의 감옥이다. 시인은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불에 타 재가 될지언정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