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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되신 예수
마 17:1-13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 17:1-13 / [변화산의 광경;막9:2-8,눅9:28-36]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고 한적한 산으로 올라가셨다. 2)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희어졌다. 3)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4)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여기서 지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만일 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초막 세 채를 지어서 하나는 주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6) 이 음성을 듣고 제자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7)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와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씀하셨다. 8) 그들이 얼굴을 들었을 때 그곳에는 예수만 계셨다. 9) [엘리야와 요한;막9:9-13]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10) 제자들이 물었다. `왜 율법학자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고 주장합니까?' 11) ㄴ)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는 준비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 (ㄴ. 11절이 빠져 있는 사본도 있다) 12) 사실 그는 이미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대접하였다. 인자도 그들의 손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께서 침례 요한을 두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형되신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세 명의 제자에게 보이신 모습(1-3)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가신 이유가 있습니다. 세 명의 제자는 대단한 사람이고 나머지 아홉은 형편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증거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입니다(눅 9:29). 하나님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때 원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졸다가 깨어보니(4-8)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언한 모세와 엘리야를 분명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산 위에서 주님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고 계속해서 교제하며 살자고 말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두 사람을 보았다고 합니다. 졸지 않고 주님과 기도했다면 초막을 짓고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이야기보다 더 놀라운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이한 현상에 제자들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아니라 손을 잡아 주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 곁에 모세와 엘리야는 없으나 예수는 제자들 곁에 계십니다.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13) 제자들에게 부활의 권능을 보기 전에는 변형된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럼에도 왜 말하면 안 되는지 깨닫지 못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는지 묻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는 것과 엘리야가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받음과 인자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이가 세례 요한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적용: 체험적인 신령한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늘 깨어 기도하고 말씀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공기를 호흡하기 전에 이해하려 들면 죽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나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러주는 선의의 목소리들도 마치 끊을 수 없는 끈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결정 앞에서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직접 살아내야만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온 자에게 공평하신 하나님은 다른 대가와 은혜를 주십니다. 너무 피곤하여 졸았지만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산에 오르고자 하는 결단과 실행이 있었을 때 심령을 바라보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 설 교 >
신령한 경험과 현실 사이
마태복음 17:1-8 / 안효관 목사
유대교 랍비와 기독교의 목사님이 함께 공원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까이 있는 호수에서 함께 보트를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노를 저어서 가다가 갑자기 유대교 랍비가 벌떡 일어서서 보트 밖으로 나가더니, 물위를 걸어서 유유히 호수가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물위를 걷던 예수님 같아 보였습니다.
함께 보트를 타고 있던 목사님이 그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던 목사님이 자기도 한번 그렇게 기적 같은 일을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랍비도 물 위를 걷는데, 예수님의 기적을 믿는 목사가 왜 그것을 못한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서 걸어가면 랍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좀더 깊은 곳으로 보트를 저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서서 보트 밖으로 힘차게 두 발을 내어 디뎠습니다. 그러나 물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즉시 물에 풍덩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목사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겨우 헤엄을 쳐서 호수가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랍비가 씩- 웃으면서 천천히 다가오더니 목사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 번에 걸어서 호수가로 나오려거든 나에게 미리 귀뜸해 주시오. 내가 어디에 돌들이 있는지 알려 주겠소."
우리는 모두가 뭔가 신비한 경험을 하고 싶어합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도 그렇지만, 색다르고 새로운 경험이 때때로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평생 잊지 못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지 6일이 지났을 때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가 끝마쳐 갈 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조용히 부르시더니 나머지 제자들을 그 자리에 남겨 놓으시고는 앞장서서 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변화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이 어느 산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갈릴리의 '다볼산'이라고 알려지고 있지만, 현대의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팔레스틴 북쪽에 위치한 헬몬산이 변화산이라고 합니다. 이 헬몬산은 '거룩한 산'이란 뜻을 가진 산으로 높이는 우리나라 백두산과 비슷한 2,850미터나 됩니다. 그 산 정상에 올라가면 팔레스틴 거의 전역을 볼 수 있고, 그 정상에는 사철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등산해 보신 적이 있지요? 등산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정상에 올라가서 온 산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그 기분입니다. 그 때의 감격은 산 정상까지 올라올 때 느꼈던 힘든 것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눈 아래 두고 눈에 들어오는 곳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가졌던 온갖 잡생각은 다 사라지고, 마치 깨끗한 하늘의 언어가 영혼 가득히 채워지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간 제자들은 그런 감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는데,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도 영롱한 광채를 빛내며 하얗게 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희어졌더라"(막 9:3)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광경이었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살다 간 구약의 전설적인 두 인물이 그 변화산에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건 정말 황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전설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오늘 여기에서 보게 되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황홀한 광경을 본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가복음에는 여기에 이런 설명이 덧붙여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한 마디로 말하면 베드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도 황홀해서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넋을 잃어버렸습니까? 너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황홀하다는 말은 너무 행복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라는 뜻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황홀할 정도로 행복한 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짓고 천년 만년 살자"고 말한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프로이드(Freud)에 따르면,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하는 말은 대체로 거짓말이고, 정신없이 하는 말이 참말이라고 합니다. 프로이드의 말이 맞다면 지금 베드로는 너무 너무 행복해서 거기에서 오랫동안 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는 거짓이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변화산 위에서 행복해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복했습니까? 어떤 큰 욕망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뭔가 많은 재산을 얻었기 때문입니까? 출세해서 어떤 큰 권세를 얻었습니까?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신령한 영적인 경험, 황홀한 경험을 했을 뿐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재산을 많이 가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갑자기 재물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출세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행복한 것도 역시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런 것 하나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주님만 여기 계신다면 세상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이 행복의 자리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높은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살고 싶어했습니다.
여러분, 진정 베드로와 같은 황홀한 행복을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한번쯤을 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으로 인해 그런 행복을 언제쯤 맛보셨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념의 옷을 입고 있는 그런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의 옷을 입으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모든 관념과 욕망의 옷을 벗으신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변형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변형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모습, 하나님의 우편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던 바로 그 모습을 잠깐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지금까지 만났던 그 주님은 변형되사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주님의 모습은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의 본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고 싶은데 왜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꾸만 먼 미래처럼만 생각되어집니까? 주님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의 생각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각한 범위 안에서만 주님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별로 감격이 없습니다. 생각했던 모양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려면 주님을 바로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바로 만나면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다 잊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랬습니다. 그는 산 아래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이 황홀한 광경에 도취되어서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하나에 미친 듯이 빠져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하면 세상 걱정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은행에 카드 빚을 갚아야 할 날짜가 다가와도 그런 것 걱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마약을 할 때는 세상 걱정 다 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을 다 자기 손안에 넣은 것처럼 행복해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행복이 아니기에 문제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될 뿐이지, 그 순간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술에 중독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 미친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에 빠지면 그는 세상 걱정 다 잊고 그 순간에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콜에 빠진 사람들은 그 행복의 순간이 끝나면 그 이전보다 더욱 큰 불행과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약이나 알콜에 중독되어 그것으로 행복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그 이후에도 그 행복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 행복은 일평생을 두고 우리의 삶에 행복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진정으로 일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꼭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시되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가 만나 주님처럼, 본래 모습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 욕망으로 옷 입혀지고, 세상적인 욕구로 옷 입혀진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행복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도 바로 만나야 합니다.
변화된 주님을 만난 베드로 보십시오. 그에게는 어떤 욕심도, 욕구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 행복을 계속 간직하고 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이것저것 계산하고 초막을 짓겠다고 말했다면 그는 초막 셋을 짓겠노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모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여기에 영영히 살고 싶다면 초막 셋을 지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 초막 네 개는 지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짓겠다고 하는 초막 세 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은 어디에 산다는 말입니까? 거기에 계속 머물러 살고 싶다면 자기들을 위한 초막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으로 인해 행복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내 욕망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주님 앞에서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 안에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불행합니까? 주님을 만났으면서도 '나의 욕구와 욕망'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욕구도 없었는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내 욕구를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행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나'라는 존재와 나의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행복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병중에 있는 어느 환자의 이런 기도를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주님! 저는 출세를 위해 당신께 건강과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간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이루게 하시려고 제게 질병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제게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만민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서 명예를 달라고 기도했으나,
당신은 저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 주셨습니다.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간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제게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 나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제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한 가지도 받지 못했으나
당신은 제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이고,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황홀한 경험으로 인해 너무너무 행복해하던 베드로에게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분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황홀한 경험을 했던 변화산에 초막을 짓고 살든 아니면 산 아래로 내려가든,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라는 바대로 되어지면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내 생각이나 내 계획대로 되어진다고 행복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진정한 행복으로 삼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어디에서 기쁨을 얻습니까? 내 생각과 계획대로 되어진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해서 기뻐하십니까?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황홀했던 모든 모습들은 다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 곁에는 오직 주님 한 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도 변형된 모습이 아니라, 변형되지 이전의 모습이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오기 이전의 그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변화산에 올라오기 이전의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 '산 아래'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 영영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산 아래에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누가복음에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신 것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영원토록 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가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가셔서 거기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 가셔야 했습니다.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그곳이 아무리 황홀하고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산 아래로 예수님과 함께 내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늘 황홀한 경험 속에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무리 좋고 은혜스러워도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만 살수는 없습니다. 주일에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가슴에 품고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서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경험한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지, 나만 은혜 속에 머물겠다고 교회당을 떠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힘들고 험난한 세상입니다. 때로는 좌절과 시련의 한복판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요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네가 은혜를 체험했느냐? 은혜를 받았느냐? 그렇다면 그 은혜를 가슴에 품고 산을 내려가거라. 마을로 가고, 가정으로 가고, 직장으로 가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거라." 이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면 세상일, 가정일, 직장일 모두 잊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고 은혜 받을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원이 은혜스럽고 거기가 좋아도 기도원에만 머물러 있다거나 기도원 중독에 걸려서 걸핏하면 기도원에 올라가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고 신령한 체험을 했으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더 아름답고 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론 그 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 죽으셔야 하는 주님의 길과도 같을 수가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의 길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화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다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또 다시 변화산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제 변화산의 신령한 체험을 했다면 그 다음에 남은 것은 현실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와 그 신령한 체험을 통해서 얻은 능력을 가지고 '오늘'이라고 하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신령한 경험을 했던 요한도 이 후에 변화산에 대한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책이 네 권이나 됩니다. 요한복음, 요한 1,2,3서. 그러나 그 책들 어디에도 변화산에서 경험했던 그 신령한 경험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변화산의 체험이 별것 아니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신 음성처럼, 신령한 체험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현실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변화산의 경험을 잠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의 핵심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님을 확고하게 붙잡고 환난과 고난이 많은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신령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매 주일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을 만나면서 은혜 받지 못하고 주일을 지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모두가 변화산에게 세 제자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신령한 경험을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매 주일 교회당에 나오면서 그러한 은혜를 여기에서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체험이 현실을 잊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늘 영광의 신비로움을 경험한 은혜를 가지고 가정에 가서 가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가도록 열심히 가정을 섬겨야 합니다. 그 신령한 은혜를 가슴에 품고 직장이나 사업장에 가서 영적으로 메마른 그곳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 내가 경험한 신령한 체험은 남들 앞에 자랑할 것도 없고,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내가 잘 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중앙가족 모든 식구들은 주일마다 변화산 위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시고, 그 은혜를 가슴에 품고 우리의 삶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믿음과 주신 은혜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만 보이더라
마 17:1 ~ / 손상률목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산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며 그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때 구름이 덮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황홀한 광경을 목도한 베드로가 거기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을 떠보았을 때 그때의 그 모습은 다 사라져 버리고 그곳에 예수님만 보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적을 보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보아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1. 성경말씀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면서 그 속에서 영혼의 양식을 취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문서로서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변화산의 현장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구약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2:40).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서서 대화를 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주됨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사람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 됩니다(요 5:39).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2.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지를 나타내실 때 여러 가지 계시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중에도 꿈이나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내시는 경우를 신비 또는 이적이라고 합니다. 변화산의 환상도 이적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적은 잠시 잠간 지나가 버렸고 오직 예수님만 거기 계셨습니다. 이것은 신비나 이적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붙들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비로운 은사를 체험할 때도 거기서 예수님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붙들어야만 됩니다. 이적만 따라 다니다가 예수님을 놓쳐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변화산의 체험을 한 제자들은 잠시 후 예수님과 함께 마을로 내려 왔습니다. 산 아래는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아들을 살려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환상이 있는 산위에다 초막을 지어놓고 거기서 살고 싶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사역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서 그 불행한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고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또 한번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의 불행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질병과 죽음과 슬픔에 시달리는 인간들이 그의 삶의 현장에서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고 확실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히 12:2).
산으로 올라가시는 주님
마태복음 17:1-13 / 홍인식목사(현대교회)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님의 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서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고 또한 주님의 생애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사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거기서 신비스러운 체험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 이후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의 내용과 흡사했습니다. 또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체험을 보도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 내용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이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삶의 위기 앞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요즘 우리의 삶이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정치 사회를 막론하고 모든 면에서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삶이 처해 있는 위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이러한 삶의 위기의 한 복판에서 오늘의 본문을 읽어봅니다. 그러면서 저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산에서의 변모사건이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삶의 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산에서 생긴 일’은 그 분의 삶의 가장 큰 위기에서 발생한 것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생긴 일’은 예수님의 생애의 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산에서 생긴 일’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와 두 번째 수난예고 사이에 편집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16:21∼28에 기록되어 있는 첫 번째 십자가에서의 죽음 예고와 17:22∼23에 기록되어 있는 두 번째 죽음예고 사이에 끼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수난과 죽음을 보면서 답답해집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예고된 죽음 앞에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전제하에서 늘 예수님은 슬픔, 두려움, 분노, 기쁨, 눈물, 안타까움, 환희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초월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소유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예고된 죽음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생의 위기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의 위기 앞에서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는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보면서 오늘 우리의 생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생의 위기 앞에서 산으로 올라가셨다.
왜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셨을까요? 생의 위기를 피하려고 가셨을까요? 유명한 성서 주해가 William Barclay는 17:1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Jesus went up Mountain Hermon to listen for the voice of God. Jesus always asked. not "what do I wish to do?" but "What does God wish me to do?"(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헐몬 산을 오르셨다. 예수님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가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 였다)
주님은 생의 위기 앞에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랬듯이 위기를 당하면 자신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셨습니다. 그에게 삶의 위기는 다시 한 번 하나님에게 다가가서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변화 산상에서의 주님의 변모 사건은 바로 이러한 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찾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위기 대처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험 하셨던 것처럼 생의 위기에서 ‘산에서 생긴 일’ 과 같은 믿음의 체험을 하는 것은 가장 필요하고 근본적인 일입니다. 위기를 눈앞에 두고 불안 해 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드는 산의 경험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음성 듣기
진실한 믿음은 삶의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고 그에게 나아감으로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위기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무기입니다. 믿음은 어떤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굳건히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당했을 때 그리고 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어떤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진정 ‘산에서 생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유행하는 시류의 소리에 솔깃해 십니까?
솔로몬 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이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광대한 통일왕국을 다스려야 하는 과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국무회의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솔로몬 왕때부터 나라를 섬기던 나이 든 원로들의 말을 듣습니다. 원로들이 르호보암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원로들과의 대화 후에 르호보암은 다시 젊은 자신의 친구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언을 듣습니다.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소리를 물리치고 자신의 친구들의 소리를 듣고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결과는 다윗을 거쳐서 솔로몬에 이르러서 통일 왕국이 이루어졌던 것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게 됩니다.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은 원로들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젊은 자신의 친구들로 상징되는 소위 유행하는 시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갈림길에서 르호보암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었던 믿음의 소리를 듣지 않고 짜릿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시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나게 파괴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갈래의 길에서 하나님 음성 듣기
우리에게 삶의 위기는 두 갈래의 길 선택을 강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믿음의 길과 유행하는 지식과 시류에 영합하는 길 중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흔들리는 삶의 정황에서 우리는 믿음의 반석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변화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처럼 ‘산에서 생긴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위기 앞에서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경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자들의 행동과 예수님의 행동을 비교해 봅니다.
제자들의 태도: ‘여기가 좋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발생한 신비스러운 일을 보고 이런 제안을 합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변화 산에서의 사건이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예고는 당시 제자들의 마음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고 이 고생 저 고생 당 감수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자신들의 의지하고 있던 그 분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지가 분명하기에 제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는 시기에 발생한 변화 산의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예수님을 설득할 기회를 부여 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산 아래의 상황, 다시 말하면 고난을 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도 싫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자신들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더불어 말하는 사건은 그들을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 가 보았자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참혹한 현실뿐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에게 제의합니다. 여기에 그냥 남아서 현실을 잊어버리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이 같은 소리가 있습니다. “여기가 좋습니다.”라는 타협과 회피와 도피의 소리가 있습니다. 어려운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회피하기를 즐겨합니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Karl Marx는 19세기의 영국에서 이토록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게 만드는 기독교를 보면서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과 함께 기독교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종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 안에 안주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위로와 안식을 찾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안정을 허락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 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자오락과 컴퓨터 게임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요즘 사람들은 전자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게임은 게임하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하다 지면 또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다가 계속하게 되면 그 게임에 익숙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 게임의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자게임에서는 언젠가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가상공간의 전자게임에 몰두하는 사람은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상정체성(virtual identity)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냉혹한 현실로 돌아올 때입니다. 현실은 again 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기회는 단 한번이고 또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virtual identity(가상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현실을 회피하게 되고 점차 가상현실 속으로 몰두하게 됩니다. 가상현실, ‘여기가 좋습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점차 적응력이 떨어지게 되고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산에서 생긴 일의 위험성
‘산에서 생긴 일’도 그런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이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생긴 일’ 이 그들로 하여금 가상정체성을 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냉혹한 현실을 바라보기 싫습니다. 거기는 실패도 있고 눈물과 한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여기에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 도피를 위하여 믿음을 사용하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집단자살을 하는 종교집단의 경우들이 바로 이러한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을 구변하지 못한 데에서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삶의 현장을 회피하거나 도피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오히려 ‘여기가 좋습니다.’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그 어려운 현장을 애써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이들은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타개해 나갈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꾸만 가상현실 속으로 자신의 삶을 도피시켜서는 안 됩니다. ‘여기가 좋습니다.’의 유혹을 늘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시는 예수님!
이제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산 위에서 생긴 일’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의 예수님, 또 한편으로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몸소 겪으셔야만 하는 어려움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로 하여금 일어나라고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 떨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위기를 회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정면으로 맞아 싸우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경험 기록이 수난예고 사이에 편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신비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은 어려운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변화산 경험은 예수님으로 가상현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험은 냉혹한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변화산 경험을 해야 합니다. 위기가 심각해지면 해 질수록 우리는 예수님처럼 변화산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생의 위기의 순간은 좌절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현실을 도피하도록 만든 것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생의 위기의 순간은 변화산의 경험을 하도록 하는 기회입니다.
사업을 잘 하는 사람은 경제침제기에 자신의 사업 구상을 합니다. 어떻게 사업을 잘 할 수 있는가를 열심히 구상하고 실지로 열심히 뛰어 다닙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리고 사업과는 관계없는 다른 일로 자신이 처한 불황을 잊어 보려고 애씁니다. 가상현실을 설정해 놓고 거기로 몰두해 갑니다. 술을 통해서 혹은 오락을 통해서 애써 어려운 현실을 외면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가 좋습니다.”를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정작 호경기가 왔을 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생의 위기의 순간에 열심히 ‘산 아래로 내려가자’의 노력을 한 사람들은 호경기가 왔을 때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까? 이 순간은 바로 변화산의 경험을 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예전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분의 놀라우신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산에서 생긴 일’이 우리에게도 발생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도록 해 줍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위기의 한 복판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산에서 겪으신 일은 단순한 신비스러운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당히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원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준 사건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용감하게 산 아래로 내려가도록 해준 경험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위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경험입니다. 위기 속에서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위기는 우리에게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지고 ‘산 위에서 생긴 일’을 기억하면서 모두 산 아래로 내려갑시다.
여기가 좋사오니
마 17:1-8 / 이필재목사
요즘 우리나라 뉴스는 한반도에 날마다 전쟁 난다는 이야기를 톱뉴스로 계속 전하고 있어서 불안감 조성이 되고 있는데 내일부터 20만 명의 군인이 참가하는 키리졸브 훈련이 있어서 이제 그것을 핑계 삼아서 북한이 도발할지 모른다는 예상들을 하고 있으니 내일부터 일주일이 매우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만날 때마다 늘 이렇게 생각을 정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리 생각에는 불안스럽게만 느껴지지만 우리가 많이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이러한 일도 있어야 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보면 절대 권력은 절대 멸망합니다. 북한은 아마 지금 세상에서 남아있는 절대 권력의 마지막 주자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또 이런 인간들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대로 잘 정리가 될 것으로 믿고 그렇게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기록이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말씀이 그 중의 하나이고 겟세마네에서 밤새워 기도하실 때도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시체가 들어있는 방에 들어가실 때도 이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신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조금은 불평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객관성 있게 판단을 했을 때 상식적으로 ‘예수님도 편애를 하시나?’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는 제자들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엿새라는 시간이 나오지 않습니까? 엿새 전에 혼났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제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런 선언을 하셨기 때문에 ‘오늘 죽으러 가시는 게 아닌가? 우리도 죽어야 되는 게 아닌가?’ 베드로는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전에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사탄 소리를 들은 상태라서 오늘 말 잘못했다가 큰 책망을 받을 것 같아 영문을 모른 채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 전체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비적 사건 중의 하나가 됩니다. 과학적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기록에 속합니다. 여기 보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별안간 변형되었다.”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해같이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했다.” 산꼭대기에서 별안간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제자들이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신 옷도 빛이 나는데 얼마나 희어졌느냐 하면 다른 복음서에는 “세상에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더라.” 그런 모습으로 변했고 더 이상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곳에 와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준으로 봐서 모세가 죽은 일은 1400년이 지났고, 엘리야가 승천한지는 850년이 지났는데 하늘나라에 간 그들을 제자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어떻게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했는지 신비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름까지 빛이 나서 황홀한 신비적 사건이 벌어지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는데 제자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깊은 관계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도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다 산에서 이루어진 고산지대 신 개념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시작이 되었고,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 역사 때는 방주 건축의 장소가 가장 높은 산인 아라랏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던 장소도 모리아산이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 시내산이고, 엘리야가 불을 내린 곳은 갈멜산이고, 이스라엘 왕국의 기준은 시온산이고, 예수님의 팔복 설교도 산에서 하셨다고 하고, 밤새 철야기도 하신 곳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고, 갈보리산에서 돌아가시고, 산에서 승천하시고, 오늘도 높은 산이라고 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의 숨결을 찾으러 산을 찾아가서 하나님 만나기를 즐겨했기 때문에 수도원이라든가 기도원은 모두가 시장 한복판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 속에다 마련하는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산은 거짓이 없고 거룩하며 신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어 이 산을 찾아간다는 의미는 어느 면에서 세속을 잊어버리는 하나의 훈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갈 수만 있다면 산을 자주 가는 것은 건강과 영혼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삼림욕이라는 단어까지 생겼습니다. 숲속을 많이 걸어 다니면 이 삼림들에게 목욕이 되어서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내외분은 은퇴하셔서 지금 강원도 깊고 깊은 산속의 별장을 지으시고 자연 속에서 지내시며 매주일 여기 나오십니다. 저도 몇 번 거기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동네에 암 투병중인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내 인생은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러면 내가 조용한 산 속에 가서 조용히 지내다 하나님께로 가자.” 그래서 조용한 집을 마련하고 텃밭을 하나 마련해서 도시 안 나가고 거기서 물과 흙과 더불어서 날마다 숲속에서 생활하셨는데 암이 어디로 갔는지 깨끗하게 치유가 되셨습니다. “저기 저 집이 그 목사님 댁입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가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신비한 체험을 보여주어서 이들에게 사명을 주시려는 영적 수련의 작업입니다. 여기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못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을 두 가지에서 찾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예언자입니다. 국가적인 헌법도 따로 없습니다. 율법이 그냥 헌법입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작용까지 생겼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들이 순종하라는 율법이 어떡해서 주어졌느냐? 모세를 통해서 제일 먼저 십계명을 통해서 주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세 율법이라는 말이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그 다음에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는 예언자들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광야에 외치는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가 설교를 하니까 성경에 “온 유대 지방과 한 나라 전체가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대표적 예언자가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인간 중에 에녹과 함께 유일하게 죽음을 피해서 살아있는 육체로 승천한 예언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의 해석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구원관이란 예언자를 통한 율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맨 나중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예수만 남았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언자들과 율법에 목적한 초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제자들에게 지금 보여준 것입니다. 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전설 같이만 들어오던 1500년 전 모세와 850년 전 엘리야를 직접 보고 또 그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왜 그 자리에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만 남고 “너희는 이의 말을 들으라.”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신비한 영적 체험은 바로 율법이 말하고 예언자가 말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이 이의 말을 들어서 구원관을 확립하라.” 그런 하나님의 축복 언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한 영적 사건은 제자들에게 금방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런 말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왜 싫어졌느냐 하면 지금까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나는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거 말리다가 사탄이라고 혼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도 죽을 것인데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 보장이 있을 때 행복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아무 보장이 없습니다. 보장된 생활 대책이 없는 제자들의 공동체, 나라의 최고 권력 실세들이 날마다 못살게 구는 괴로운 현실입니다. 3년 전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뛰쳐나온 집을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서 다시 찾아들어가기도 자존심이 허락지 아니하고 이렇게 계산을 해도 저렇게 계산을 해도 하나도 자기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귀찮은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 도피의 유일한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 예수여! 여기 우리가 초막이라도 짓고 여기서 살다가 이대로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나라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다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들의 소원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교회 오셨습니다. 아주 좋으실 것입니다. 노래하고 하나님 말씀 듣고 성가대가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가는 또 색소폰 연주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재미나게 노래나 부르고 예배드리다가 식당가서 국수 먹다가 그냥 이매동에 산이 있으니까 올라가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배 마치고 세상으로 내려가면 곗돈 내야지, 자식들 말 안 듣고 가출하지, 취직 안 되지 복잡합니다. “예수님! 가지 맙시다.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이 산에서 그냥 엘리야와 모세의 뒤를 따라서 올라가고 맙시다. 이게 훨씬 좋습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나? “그래!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너와 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장래 우리에게 주어질 세계는 그러한 영광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세계에 가서 우리가 영광을 누리려면 지금 나는 골고다로 내려가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너희들도 너희들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지금 너와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과 교회들이 넘어지는 걸림돌입니다. 오늘 말씀 그 다음절인 9절을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자고 말하는 제자들을 설득해서 예수님은 마을로 끌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그냥 가지 왜 내려옵니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십자가를 져야 할 때다.” 내려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신 일을 보면 귀신 들린 아이에게 귀신을 쫓아내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인간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요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불교의 최고 지도자께서 자성의 소리를 하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한국 불교는 산속으로만 들어갔지 민중의 곁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민중에게 외면당한 종교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강의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아픔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며 피를 흘려 자기 몸을 번제물로 던졌을 때 거기서 이루어진 구원의 열매가 곧 영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가끔 산 위에 올라가 영적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신비 체험은 그 체험 속에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의 힘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그 속에서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골목길을 누비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1년에도 수십 번씩 그룹별로 수양회를 떠납니다. 경치 좋은 산이나 물을 찾아가서 시설이 좋은 수양관을 빌려서 거기서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열정적으로 기도도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밤새워 이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아! 여기가 좋습니다.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이대로 있다가 이 산에서 그냥 하나님께로 올라가 버리면 가장 좋은 생애가 될 거 아닙니까?” 이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수양회의 목적은 거기서 있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 와서 십자가 고난을 더욱 훌륭하게 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유럽에서 한 소녀가 전쟁 중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잿더미 위에서 굶주렸습니다. 어머니와 그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처참한 쓰레기통을 뒤지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녀는 아동구호단체의 도움을 통해서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소녀는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 후에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어린아이를 위해서 일평생 내가 살겠다.’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나고 그 소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그 고통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와신상담으로, 마침내 그녀는 세계인이 바라보는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니고 세계가 바라보는 정상의 산에 아주 우뚝 섰을 때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오늘 내가 이 정상의 산에 신비적 황홀의 세계에 이렇게 서있는 것은 내려가기 위한 것이다. 내가 옛날 굶주렸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자.’ ‘유니세프’라고 하는 아동 구호단체를 위해서 자원봉사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존경의 인물인지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있는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는데 그 우표가 얼마 전에 6억 7천만 원에 팔렸고 그 모든 기금을 그 기관에 전부 기부했습니다. 싫어진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바울 사도는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는가? 사는 자체가 사명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큰일은 하지 못했어도 내게 주어지는 나의 삶으로 인해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사명 완수입니다. 어떤 학생이 공부를 하다가 지쳐서 죽었다면 그 학생은 자기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소방관이 불을 끄다가 죽었다면 그 소방관은 훌륭한 자기 삶의 마침표를 사명적으로 마친 것입니다. 설교하다가 쓰러져 죽은 목사가 있다면 죽도록 충성한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황홀한 체험을 한 이 세 제자는 산에서 내려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베드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운 기초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1대 교황은 베드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제자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중학교 다니는 학생이 엄마에게 슬픈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왜 우리 집은 다른 집 같지 않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야 돼? 내가 봤을 때 아버지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일을 하시는 목사잖아? 엄마도 같이 하잖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평생 하는 아빠, 엄마를 하나님이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고 복을 주어야지, 엄마!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못살아. 나같이 가난하고 못사는 아이는 한명도 없어. 왜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가장 충성하고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는 아버지를 축복해주시지 않지? 이렇게 고생스럽게 하시지? 엄마? 왜 그런 거야? 하나님이 살아계신 거야?” 더군다나 그렇게 어렵게 사시는 목사님은 자녀를 6명이나 낳으셨다고 합니다. “엄마! 왜 그런 거야? 말해봐!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신다는 일을 계속 해야 돼?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다른 일을 하면 안 돼?” 엄마가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아! 너는 지금 중학생인데 이 세상 살아가는 너의 일생 여정에 이것보다 더 큰 어려운 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때 그 어려운 일을 네가 잘 극복하라고 하나님이 어려서부터 너를 훈련하시는 거야.” 그는 정말 더 어려움이 왔습니다. 실명을 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를 따라 신학을 공부하고 장애인으로 지금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열심히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다하는데 고난스러울 때마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 엄마와 부엌에서 나눈 이야기 “요한아! 그것은 너의 일생에 하나님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것을 이기게 하시려고 훈련시키시는 거야.” 그 한마디가 자기의 일생을 지켜준다고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와서 간증하셨습니다.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뒤돌아서서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여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을로 내려가자.” “예수여! 지금 사순절인데 오늘 우리 교회에서 그냥 노래 부르고 하나님께 그냥 예배드리고 우리 식당에 가서 국수 한 그릇 먹고 이매동 뒷동산에 올라갑시다.” 이랬으면 좋을 텐데 “그래. 마지막에 우리가 갈 곳은 거기야. 모세와 엘리야를 따라서 우리도 가야 돼. 나도 그렇게 갈 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마을로 내려가자.”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기다리는 마을로 내려가서 사명을 다합시다.
십자가의 고난과 하늘의 영광
마 17:1-13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다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 부르는 이 이야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잠시 되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시고 그때부터 비로소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오히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책망하시고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말씀하셨으며 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 제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그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신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더 중요할 수 있는 다른 현상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의 변화뿐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 나누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씀을 제자들이 들은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엎드려져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기에 눈을 들었지만 이미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변화하심뿐 아니라 그 산에서 제자들이 목격한 모든 광경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제자들에게 그 모든 광경을 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본문 2절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했는데 그 변형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얼굴과 옷이 해같이 빛나고 희어진 것은 예수님의 영광과 주권과 순수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넘어서서 그의 본래적이고 영원한 초월적 영광을 잠깐 동안이지만 제자들에게 보이신 사건입니다.
3절에서는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고 전합니다. 구약성경의 두 큰 인물이고 각각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옆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돋보이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모든 계시가 예수님에게서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했습니다. 성경에서 빛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분이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심을 재확인하신 사건입니다. 모두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할만큼 그가 권위를 지니신 이심을 확실히 하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마3:16-17)와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들렸던 이 말씀이 이제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려 할 때,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을 때에 다시 들렸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벧후1:16-18는 이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여기서 우리는 그 때 그 산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경험이 "그의 크신 위엄", "지극히 큰 영광", "존귀와 영광"이란 표현으로 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지신 예수님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늘의 영광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두 번째 관심사로 나아갑니다. 즉 "하늘의 영광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압축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그 모든 특별하고 놀라운 광경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비록 예수님께서 머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시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임을 가르치신 사건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9:30-32에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영광 중에서 예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것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와 십자가는 제자들이 생각하듯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하늘의 영광은 함께 가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고난 당하셔야 할 메시야"라는 이해되지 않는 말씀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뿐 아니라 훗날 그들 자신이 겪을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고 이기도록 용기를 주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특별히 보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에게만 허락되었던 이 특별한 경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하늘의 영광이 있다는 것과, 하늘의 영광을 누릴 이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까지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산 이야기는 그 산에서 있었던 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산을 내려오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 속에서도 변화산사건의 의미는 계속 드러납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 질문의 의미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말3:1)이라 했고, 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출현과 연관하여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사라진 엘리야를 본 제자들은 말라기 선지를 통해서 주어진 예언과 서기관들의 말들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여쭌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 어찌하여?"라는 의문사에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말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의 그 물음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방금 엘리야가 온 것을 목도하고 내려오던 중이었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나 산에서 본 예수님의 변화하신 광경과 하늘로부터 들린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영광의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이 재차 확인했음을 전제로 할 때는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는 물음은 서기관들은 아직도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고 따라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가리키며 한 말일 수 있습니다. 즉 서기관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비판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제자들이 엘리야를 특별한 상황에서 잠깐 보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 그가 다시 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여기 이렇게 와 계신데 왜 서기관들이 말하는, 메시야에 앞서 오리라 한 그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메시야시라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아직도 자신들 속에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음을 드러내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 밑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물음, 즉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면 고난 당하고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말은 그가 참 메시야가 아니시라는 것 아닌가? 사실 메시야가 오기 전에 오리라 한 엘리야도 아직 안 오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이 의문을 해소시키고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1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그리고 13절에 보면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때에야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냈던 것입니다. 마11:10 이하에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0-11, 14). 오리라 하던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말은 곧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야시라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대답의 함축적 의미는 "그러므로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비록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지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다. 산에서 나의 그 하늘 영광을 너희에게 보여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의 의미에 대해 앞서 내렸던 중간결론을 다시 한번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하늘의 영광이 있다는 것과, 하늘의 영광을 누릴 이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까지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참 구세주이시므로 그의 말씀을 신뢰하고 끝까지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세상적으로 화려한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의 삶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고, 우리 또한 걸어야 할 길이지만, 그 길이야말로 참된 영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이 십자가의 고난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라
마 17:1-8 / 이정선목사
옛날 시골에서 엿장수가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빈 병이나 쇠붙이, 머리카락, 찢어진 비닐 등 온갖 고물을 가지고 나와서 엿과 바꾸어 먹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그런 고물을 찾지 못한 아이들은 엿장수 좌판 주변에 둘러서서 다른 아이들이 엿 먹는 것을 구경하며 침만 삼킵니다. 그러면 마음씨 좋은 엿장수 아저씨가 엿을 조금씩 떼어서 그런 아이들에게 먹어보라고 줍니다. 그렇게 주는 것을 맛뵈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맛뵈기를 주는 것은 엿 사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판촉활동이기도 합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다음에 사먹으라는 말이지요. 지금 당장은 엿을 사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맛뵈기를 줌으로써, 엿이 얼마나 맛있이 있는가 하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맛뵈기는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지는 못하지만, 그 맛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을 맛뵈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리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메시야이신 주님이 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의 승리와는 거리가 먼 그림입니다. 나중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겠다고 하는데, 왜 굳이 나중에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인지, 왜 지금 그렇게 안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말처럼, 나중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미덥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의 맛뵈기를 보여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마태가 묘사하는 예수님은 왕이신 분입니다. 천국을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말로 천국이라고 하는 것보다 영어로 kingdom of heaven이라고 하면, 왕이라는 의미가 훨씬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예수께서 초지일관 외쳤던 메시지는 천국이었습니다. 영웅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 수 있지만, 그 나라는 세상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천국을 가져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천국을 가져올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로 천국 왕의 능력과 위엄을 여러 차례 나타내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물 위로 걷거나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은 자신이 천국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신적 광휘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모시며 함께 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 행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역시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밥 안 먹으면 배고프고, 잠 못 자면 피곤한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화장실에도 가셔야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곱이 끼었을 것입니다. 모양은 인간인데, 하시는 말씀이나 능력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자기 옆에 누워 곤히 잠이 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고백했지만, 사람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모순이 자꾸만 그의 믿음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그들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보고 나서,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거룩한 지식을 불어넣어주신 후의 일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이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 광휘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 광휘를 보여주시는 것은 매우 신중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 제자들만 따로 부르실 때가 많았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일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숫자의 제약 때문에 이 세 제자들만 부르신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방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을 다 데리고 들어가기는 곤란했겠지요? 나중에 다른 제자들은 이 세 제자들을 붙잡고 예수님이 어떻게 아이를 살리셨는지 물어봐야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높은 산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을 다 데려가기보다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것이 간편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산 위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말하자면, 그 놀라운 광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고 또 그것을 비밀로 간직해야 할 만큼 이 세 제자들이 특별히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높은 산이라고 했는데, 대체로 헐몬산이라고 추정합니다. 헐몬산은 현재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 이 세 나라에 걸쳐 있는데, 해발 2814미터의 높은 산입니다. 산봉우리는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셨는지 아니면 중턱까지만 올라가셨는지 모르지만, 세 제자들과 함께 멀고 힘든 산행을 하셨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3천 미터 가까운 고지의 산을 하루 만에 운동 삼아 올라갔다 내려올 수는 없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배낭에다 먹을 것과 담요 같은 것을 잔뜩 넣고 짊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 가까이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면, 저 아래 있는 것들이 의미 없게 생각되고,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즉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렇게 산에 올라가셨는데, 제자들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표현했습니다(막 9:3). 즉 그것은 인간의 능력과 경험 세계를 초월한 신적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접촉할 때, 하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담의 범죄 이후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죄 가운데 출생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모습, 즉 보고도 죽지 않을 모습으로 나타나 주셔야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천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또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아예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너무 벅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도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에게 뒷모습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출 33:20-23).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자기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습니다(사 6:1,5). 그러나 그 영광 가운데서 이사야는 사명을 받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백성을 위하여 헌신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 낙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금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것을 백성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지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산다는 역설입니다. 마치 햇빛을 받아야 식물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보고 그 빛을 받아야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본분을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명이 오그라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천국의 맛뵈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땅에 살면서 병들고 슬픔을 겪으면서 살지만, 우리는 저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 산 위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어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주님의 옷이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이 났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도구는 빛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빛은 태양빛입니다. 우리가 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해발 2814미터의 헐몬산 정상은 잠시 천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갑자기 천국을 경험하게 된 베드로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신비로운 영적 세계가 어찌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이 물리적 세계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침 따라온 제자들도 세 사람이니까, 각자 한 분씩 모시면 되겠군요.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이것이 맛뵈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온전하게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맛뵈기를 보여주시는데, 거기 눌러 앉겠다고 하면 안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천국의 맛뵈기를 경험하는 것은, 거기서 힘을 얻어 이 세상을 능력 있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내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게 하신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으로 다듬어지고 성숙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천국의 맛뵈기를 경험고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천국을 맛보며 어리둥절해 있는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면서 그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래서 제자들은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면서, ‘주님, 그런 일이 주님께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날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연약하고 초라한 육신을 입은 모습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광휘를 보았습니다. 이 경험이 그들의 앞으로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잠자는 영혼이 깨어나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좌절과 낙망을 떨치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천국을 맛보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접하게 될 때, 나의 삶을 온전히 바치고 주님을 위해 살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모세처럼 구하십시오.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함으로써, 날마다 힘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변화산의 교훈
마 17:1-13 / 최영기 목사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고 고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모습을 구체적으로 머리에 그리려면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부활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부활 후의 일상적인 삶은 어떠한 것일까? 부활한 후에 한번도 만나 보지 않은 사람, 예를 들어서, 바울 같은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서 이러한 의문에 관한 대답의 일부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 변화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얼마간의 답을 얻습니다. 이에 대한 답과 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I. 고난은 영광의 전주곡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지 엿새만에 일어났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주일 정도 있다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처럼 날짜를 명기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예고와 변모의 사건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상호 상관이 있는 관련된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처참한 죽음을 예고하셨기 때문에 제자 베드로는 말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후에는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장차 있을 영광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고난은 영광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상징으로 구약에 나오는 욥을 예로 듭니다. 욥은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도 생업이 망하고 자녀들은 잃고 건강까지 상실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고민하며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적어놓은 것이 욥기입니다. 욥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끝난 후에는 2배의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합니다(욥 42:10).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고난 후에는 반드시 축복이 따릅니다. 이 축복이 욥처럼 이 세상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 세상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인생을 이 세상에서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 번 삽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9개월, 이 세상에서 90년, 그리고 영생을 삽니다. 저 세상에서 누리는 복을 우리는 상급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고난을 당하면 뛸 듯이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4:12-13). 예수님도 자신으로 인하여 욕을 먹고 비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5:11-12). 하나님의 통치 밑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난에 반드시 의미가 있고 고난 후에는 반드시 축복이 따르는 것을 아시고 고난 가운데에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II. 우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예수님께서는 찬란한 모습으로 변형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활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순결하고 찬란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표현을 제자들은 사용하고 있습니다(막 9: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문을 잠가놓은 방에 나타나셔 서 부활하신 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질량과 부피가 있지만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몸입니다.(눅 24:39). 산에서 변모하셔서는 부활한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송충이가 변하여 나비가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흉측한 색깔에 털이 숭숭 나고 나무 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보면서 알록달록한 색깔의 날개를 갖고 하늘을 훨훨 나는 아름다운 나비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송충이가 나비가 되는 것을 영어로는 metamorphosis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변형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17절에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다는 단어가 바로 metamorphosis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송충이 정도입니다. 우리가 부활한 몸은 아름다운 나비와 같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말하면서 썩을 것으로 심는데 영원한 것으로 나고 약한 것을 심는데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5:42-44).
나이가 들어서 얼굴이 쭈글쭈글해 지고 신체가 쇠약해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도 변형될 것입니다. 질병으로 망가진 몸을 입고 사는 분들도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에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은 훨훨 벗어버리고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II. 세상 떠난 분들은 살아있다
우리가 예수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통하여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환상이었다면 이 사건은 의미가 없습니다. 진짜 모세와 진짜 엘리야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사건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타난 분들이 모세와 엘리야인지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도 천국에서 어떻게 사람을 알아볼 것인가에 관한 힌트를 주지 않는가 싶습니다.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냥 알아봅니다. 우리가 지구 위에서 사는 동안에도 같은 현상을 체험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에 어떤 부부가 갖고 있는 문제를 보여주십니다. 누가 가르쳐주시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에 나오는 지식의 은사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난 수년 동안 후원해온 몰도바의 이태형 선교사님에게 어떻게 몰도바를 가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도 중에 몰도바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환상 중에 몰도바가 눈에 떠오르고 몰도바 사람이 눈에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시인 것을 알고 몰도바에 도착하였더니 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꿈에 본 그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각 기관을 통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아야할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능력은 육감과 대단히 비슷합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멀리 계신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감지했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러한 육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고도로 발달된 곳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소개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세를, 엘리야를, 바울을, 베드로를, 또 앞서 간 선배들을 알아보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돌아가신 신앙 선배들은 죽지 않고 지금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언제인가는 다 반갑게 만날 것입니다. 이분들이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음부라는 곳에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꼭 대답하여야 한다면 천국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제한된 시간 개념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100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면 금년에 죽은 부모님은 100년간 어디엔 가에 계셔야합니다. 그렇다면 그 계신 곳이 어떤 곳일까? 이런 식으로 생각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에서는 공간과 시간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 전연 다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벧후 3:8).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경험하는 시간은 정지된 물체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빛의 속도와 비슷한 속도를 가진 로케트를 만들고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그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 지구 위에는 100년이 흘러서 아는 사람들은 다 죽고 손자뻘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과학 공상 소설이 씌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후 100년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쪽으로는 그분은 100년 동안은 어떤 곳에 있어야되지만 돌아가신 그분 입장에서는 죽자마자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돌아가신 신앙의 선진들은 천국에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면 그분들을 만나서 영원토록 헤어짐 없이 즐길 것입니다. 만났을 때에 돌아가신 부모님, 조부님, 친지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삶을 결심하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 새로이 믿으신 분들은 부모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쉬지 말고 전도하여서 다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기쁨가운데에 사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IV. 예수님은 예언과 율법의 완성이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엘리야의 예언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나타났다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과 예언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40명의 사람이 약 1천년에 걸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다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켜지지 않는 율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또 율법에는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죗값을 다 치르시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부어주셔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갈 5:22-23). 이것이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해주셨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하나도 빼지 않고 그대로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가책에서 벗어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자유로운 삶을 사시고 동시에 성령 충만하여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V. 하나님은 죽는 것을 기뻐하신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마태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는 장차 닥쳐올 죽음을 얘기하였다고 했습니다(눅 9:31).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좋아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는 것을 좋아하십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면 죽어야합니다. 죽음에는 세 가지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순교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사업일 수가 있고 어떤 분에게는 명예일 수가 있고 어떤 분에게는 배우자일 수가 있고 어떤 분에게는 자녀일 수가 있습니다. 주가 원하시고 주를 위하여서라면 이것을 포기할 때에 이것이 죽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죽고자 하면 삽니다. 포기하면 얻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포기하여야 합니다. 포기하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생명보다 귀한 늦둥이 아들을 잡아 바치라고 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은 진실로 잡아 바치려하였습니다(창 22:9-10). 이때에 하나님은 아들을 살려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아들을 통한 복을 허락하셨습니다(창 22:16-17).
죽을 때에는 또 영적인 권위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육성을 들려주실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을 들어야할 권위는 죽기를 결심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권위 있는 목자가 되고 권위 있는 집사가 되고 권위 있는 목회자가 되려면 죽어야합니다. 집에서 권위 있는 가장이 되려면 죽어야합니다. 힘으로 순종을 강요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죽을 때에 하나님이 영적인 권위를 주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VI. 세상에서 천국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변모하시는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신 것을 보았을 때에 황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순간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을 세 개 짓자고 했습니다. 초막을 지어서 어쩌자는 것인지 초막을 짓고 자신들은 어떻게 거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좋고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것입니다(눅 9: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죽어야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너무 좋아서 기도만 하고 찬송만 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야합니다. 우리는 죽어야하고 섬겨야합니다. 우리는 성도들끼리의 모임이 너무 좋아서 세상과 분리되어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목장 모임이 너무 좋으면 믿지 않는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야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베드로가 경험하고 너무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명을 갖고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보냄 받은 특공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 맛을 볼 수는 있지만 천국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행복 불행이 좌우될 수가 있습니다. 수양관에 가서 수양회를 가질 때 벙커 베드에서 잔 사람들은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수양관을 호텔로 생각하면 무척 불편합니다. 그러나 수양관이 포로 수용소라고 하면 이처럼 편한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좌우됩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은 계속되는 실망과 좌절을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경과 고난 가운데에서 순간 순간 주어지는 쉬임과 평안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적진에 투입된 특공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평안과 축복은 다음 전투를 위한 전주곡으로 생각하여야합니다. 그러치 않고 이 세상에서 천국을 기대하면 베드로처럼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실망과 좌절을 맛볼 것입니다.
VII. 세상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한다
제자들이 산에서 나려올 때에 엘리야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실체와 그 사명에 관하여 좀더 확실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나타나서 세상을 회복한다고 하였는데 (말 4:5) 그렇다면 다음에 오시는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야가 나타나서 길을 닦고 다음에 그리스도가 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킨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혼돈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는 이미 왔고 회복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성경학자들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의 상황을 자기 나름대로 너무 상세히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예언을 다 성취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이 컸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말이 어떻게 올 것이다 에 관하여 너무 상세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불안을 느꼈습니다. 다미 선교회라는 이단성이 있었던 단체에 속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날짜까지 정해놓고 기다리다가 오시지 않는 바람에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종말에 관한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언을 주신 것은 호기심을 만족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악이 승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결국에는 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서 고난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성취되기 위한 전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믿고 매일 매일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도 주관하십니다. 절대 절망하지 말고 절대 소망을 버리지 말고 절대 좌절하기 말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제 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에 굴러갑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예언의 성취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1,000년 후에 오실 것처럼 계획하고 내일 오실 것처럼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