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땅 ! 내 고향 호남!
절상호남국가지보장(竊想湖南國家之保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1,004개(천사)의 섬이 있는 천혜(天惠)의 고장
대원군(大院君)이 권좌에서 물러나 울분을 달래려고 강화도에서 범선을 타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호남의 관문인 영광이었다.
포구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굴비를 말리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아~하 이곳이 호남의 팔불여(八不如) 중 첫 번째인 호불여 영광(戶)이구나!
“인불여 남원(人), 지불여 순천(地), 결불여 나주(結), 곡불여 광주(穀), 문불여 장성(文),
전불여 고흥(錢), 여불여 제주(女)”~
이처럼 호남(湖南)은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풍요(豊饒)롭고, 축복(祝稫) 받은 땅으로
예술(藝術)의 고장이며 정의(正義)로운 고장이다. 누란(累卵)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나라를 지키는 민중항쟁과 정의(正意)를 위해 앞장서 온 고장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전쟁(1592~1598)을 여수 진남관에서 이끌다 노량 앞바다에서
순직할 때까지 한시도 호남을 잊은 적이 없었다
호남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절상호남국가지보장(竊想湖南國家之保障: 가만히 생각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다 )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했을까?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모든 조선인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 두려움과 공포를 용기와 희망으로 바꾼 원동력은, 바로 전라 좌수군(全羅左水軍)의 해상전력(海上戰力)과
육상 의병(義兵)들의 정신전력(精神戰力)이 합쳐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장수들까지도 존경심을 갖게 했다는 세계 인류역사상 해상전투의 최강자 "성웅 이순신(聖雄 李舜臣)~
그를 도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백전백승(百戰百勝)으로 이끈 4명의 위대한 참모들,
녹도만호(鹿島萬户)‘정운(鄭運:영암),’거북선 개발 및 제작의 총책임자‘나대용(羅大用:나주),’
이순신 장군보다 무려 31살이나 연상이며, 선배 수군절도사였던,‘정걸(丁傑: 고흥),
’ 이순신 장군의 직계 수하 핵심 참모‘송희립(宋希立:고흥),’이 네 사람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조선도 없었을 것이다.
호남 곳곳에서 들풀처럼 일어난 의병(義兵)들 그들의 중심에는, "고경명(高敬命:광주), 김천일(金千鎰:나주),
김덕령(金德齡: 광주), 최경회(崔慶會:화순), 신무기 화차(火車)를 만들어 육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변이중(邊以中:장성), 등~~”이들을 따르는 의병들이 없었다면~ 전라 좌수군의 전력만으론
호남도 조선도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왜군은 조선의 북쪽 끝까지 다 점령했지만 끝내 호남만은
다 점령하지 못한 채 물러가고 말았다.
이런 성웅 이순신에게도 풍파가 있었다 권좌에 물러나 실의에 빠진 류성룡 대감이 이곳을 방문했다.
이순신은 류 대감을 피난민들이 풍년가를 부르며 보리 수확을 하는 돌산으로 인도했다.
이순신은 갈 곳 없어 유랑민처럼 떠돌던 이들을 이곳 군용지에 정착시켜 보리농사를 짓도록 했다.
군용지에 민간인을 정착게 하다니~ 거기다가 떠나가는 그에게 제조 산하(再造山河)라는 글을 써 주었다
“나라를 다시 만들다”라는 뜻이지만 이순신의 속내는 그런 뜻이 아니라~~ 백성을 보살피고 충성한다는 뜻이었는데~
이를 받아 본 선조는 아연실색하여 결국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당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 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광주 항일 학생운동(光州坑日學生運動), 군부 독재 시대의 "광주 민주화 운동(光州民主化運動),
이 모두가 민중이 봉기(民衆蜂起)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과 정치적 권력의 탐심(貪心)이 아닌 순수한 민초(民草)들의 항쟁이었다.
호남의 민초들! 한없이 온화하고 순박한 농사꾼이었고, 학생들이었고, 그리고 소시민들이었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는 죽음을 불사하고 거대한 바위와 같은 불의의 집단 앞에 피 흘리고, 찢기고,
목숨까지 바쳐 항쟁하였다. 앞으로도 "의향 호남(義鄉 湖南)은 이 정신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불의에 맞섰는데도 호남은 항상 권력의 뒤안길에 머물렀고 푸대접만 받았다.
자유당 독재 시절~ 앞장서 질타한‘서민호, 김준연~~등’ 이들의 올바른 절규에 몸서리친 이승만은
‘하늘 아래 이런 국회는 없다며 호남을 하와이’라고 폄하(貶下)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35년간 내리 통치한 경상도 정권하에서는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더라도 ‘비서실장, 안기부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 권력의 요직에는 문턱에도 갈 수 없는
설움을 당했고 이보다도 더 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은 호남을 말살하려는 박정희의 지역 차별로
1960년 영호남의 인구 대비는 8,031/5,948 천명으로 35% 차이였으나 2020년 현재 12.912/5.044 천 명으로
그 격차가 무려 156%로 호남을 영원히 말살시켜 버렸다.
백주(白晝) 대낮에 일본에서 느닷없이 납치당해 현해탄에 수장될뻔했고 사형선고를 받아 언제 죽을지 모른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인동초’처럼 꿋꿋하게 살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뤘고
I.M.F를 슬기롭게 극복한 DJ~ 한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호남은 한(恨)이 서린 고장이다. 한이 서릴 때마다 육자배기에 슬픔의 한을 달래는 그 서러움이 노랫가락에
구구절절하게 배어 있다. 우리나라 3대 "아리랑, 중 으뜸인 "진도 아리랑이 그렇고 ‘서편제’‘동편제’등
대부분 노래가 그렇다. 흥겨운 대목의 노랫가락에서는 절로 어깨춤이 들썩여지고 한 서린 대목에서는
가슴을 후비고 애간장을 녹이는 애절한 감정이 그대로 가슴에 깊이 전해진다.
호남인의 한 어린 애창곡 호남가!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허고~ 제주어선 빌려 타고~~’
임방울이 부른 애절하고도 투박한 그 육자배기는 천세 만세를 가도 그 한이~~
가야금 소리 북소리와 함께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서편제와 동편제가 서로 경쟁하듯 유명한 소리꾼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 "임방울(林芳蔚) 조상현(趙相腎)”등
보성을 근거로 한 서편제 명창들과 남원 지역이 중심인 동편제 판소리의 거장 "송만갑(宋萬甲), 박초월(朴初月),
안숙선(安淑善)”등의 명창 소리가 서로 경쟁하듯~~ 가야금 병창의 거장 "심상건(沈相建), 이영희(李英姫)”등
국보급들~~ 또한 대중가요의 큰 별‘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과 ‘비 내리는 호남선’은 한 맺힌 호남인들이 즐겨 부르는
대표적인 노래가 됐다
도자기를 만든 혼(魂)처럼 지금까지도 創氏改名을 하지 않고 조선 이름을 고집하여 조선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대표적인 명문 지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그곳에 "사스마 도가를 만들어 그 후손 대대로 15대에 걸쳐 420여 년 동안
일본 도예의 명가 "심수관 가(沈壽官家)”를 이루어 일본 도예 계를 이끌고 세계에 그 위상을 세운
그들의 선조 "심당길(沈當吉), 이 고장 남원 출신이다.
호남으로 귀양살이 온 벼슬아치들도 온화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넉넉하고 훈훈한 인심에 힘입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송강가사(松江歌辭)의 대부분,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이조 3대 장르(詩, 歌辭, 訓書)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해남 대흥사에서 한국 차의 중흥을 일으킨 초의선사(草衣(禪師)도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하면서 조선 후기 문학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송강 정철은 당시 우의정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로서
호남인으로 주축이 된 동인 사람들을 무수하게 죽여 호남사람들에게는 원수와 같은 인물이지만~~
이를 용서한 호남사람들의 통 큰 마음가짐에 감명받고, 호남의 인심과 민심에 푹 빠져 무등산 자락 ‘지실’ 마을에‘
지실 정씨’라는 족보를 남기고 그 후손들은 그 족보만으로도 명문 지가에 혼사 할 수 있다.
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