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삶과 종교> 기말고사 대처 레포트입니다.
학 번 : 200441046
학 부 : 인문계열
성 명 : 박 소 영
제출 일자 : 2004. 12. 4
1.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Religion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각각 어떤 관점에서 종교 혹은 Religion이라고 하는지 밝히되, 그것들이 지향하는 최종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울러 설명하시오.
단순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동양-비인격적, 비실체적, 대상을 꿰뚫어 보는 경향이 강함(觀).
서양-인격적, 실체적, 대상늘 논하고 증명하는 경향이 강함(論).
비인격적 내지 인격적이라는 말은 궁극자에 대한 관념을 말하는 것 입니다. 즉 동양에서는 궁극자에게서 모든 성격과 성질을 박탈 내지 부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궁극자 내지 절대자는 비인격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는 동양의 사고로써 서양의 사고를 분석내지 해석 한다면, 서양의 사고 체계에서는 궁극자 내지 절대자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 내지 결여 되어 있지요.
비실체적 내지 실체적이라는 말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접근할 때, 대상의 근본을 변화하는 존재로 보느냐, 불변하는 존재로 보느냐의 차이 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대상에 대하여 불변하는 자아-영혼, 아트만 을 인정하지 않느냐 또는 인정하느냐 하는 차이 입니다. 서양의 경우 동양과는 달리 어떠한 대상에서 영구적이고 불변하며 존속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서 부터 사고를 진행시킵니다.
관 내지 논 이라는 말은 동양의 경우 대상을 관 합니다.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입니다. 논리적인 접근에 있어서도 모순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서 부터 궁극자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시도 됩니다. 반면 서양은 대상을 논 하려 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근본적인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것 입니다. 이를 위하여 과감히 모순되는 것은 잘라버리고 논리적인 증명이 가능한 것들을 취하게 됨으로써 동양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고를 하게 되었지요.
참고로 이렇게 말은 하였으나 동서양 모든 종교에서는 비인격과 인격이, 비실체와 실체가, 관과 논이 모두 융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경향을 본다면 나누어 지는 것 이지요. 참고로 동양의 종교 중에서도 도교적인 성향을 지니는 종교는 대체적으로 인격적인 신 개념을 가지고 있고, 서양에서는 그노시스파가 대체로 비인격적인 궁극자(신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거룩한 공간과 시간이란 속된 공간이나 시간과 다른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간과 시간이 무엇인지,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속된 공간과 시간에서 체험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시오.
1. 시간은 인간에게 한정된 단어입니다.
즉 인간은 시간에 갇혀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면 그것은 4차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4차원인지 5차원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그러나 인간은 3 차원이고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타임머신은 없습니다.
점 : 1 차원 선 : 2 차원 : 공간 : 3차원
공간에 시간의 흐름은 매우 규칙적이기 때문에 시간은 요소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죄를 스스로 없앨 수 없는 것은 죄란 이미 과거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지 뒤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뒤로 흘러간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는 필요하고 고마울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불공평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시간은 수직선적인 개념입니다.흘러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2.시간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부분부터 인간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동일하다는 말은 엄청난 비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리이고 진리는 또한 사실입니다.진리는 참되다는 것이며 사실은 사물의 실제 모습을 말합니다.
책상위의 종이는 수 만년이 지나면 소멸됩니다. 사그라집니다.
형광등도 그렇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인간의 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데 이는 현재의 나의 젊은 모습이 영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영혼은 영원하다 라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존재방식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사그라질 어떤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영원히 동일한 것이 바로 영원한 것입니다.
모양이 바뀐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어제의 그 모습은 사라져서(disappear) 다시는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니 영원하다 말할 수 없고 일시적(temporary)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이란 다시 말하면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한 이것이 인간에게는 절대라는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은 변하지 않으니 우리가 변하게 하려 하여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은 절대적이며 또한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것은 동일하며 절대적이며 가장 강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 한 마디에 이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3. 그러면 인간에게 시간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창조되었는가?
영원에 비하여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의를 택하느냐 죄를 택하느냐를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입니다.
3.최근 중동전쟁을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주요한 교리를 비교 분석하시오.
이슬람교 교리-
<이슬람교>의 교리와 시대 배경
<오주>
⑴ 신앙고백(샤하다):<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그 사도(예언자)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앙의 길로 들어갈 때 고백하는 말이며, 예배나 그 밖의 경우에 무슬림이 항상 표명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코란에는 없지만, 이것은 무슬림이 되는 것과 무슬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명하는 일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일신교의 원리를, 뒷부분에서는 마호메트가 신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마호메트를 통해 신이 계시한 말씀(코란)을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⑵ 예배(살라트):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양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1일 5회씩(새벽·정오·오후·저녁·밤)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형식을 따라 행한다. 금요일 정오, 단식 직후의 제사(祭祀), 희생제(犧牲祭),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원제(祈願祭) 등을 지낼 때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본다.
⑶ 자카트:희사(喜捨)나 시혜(施惠)를 뜻한다. 사다카가 자발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것인 데 대해, 자카트는 일정량 이상의 재산에 부과되는 종교세(宗敎稅)·구빈세(救貧稅) 라고 할 수 있다. 금전·곡물·가축 등 종류에 따라 과세율이 정해져 있으며 가난한 사람, 나그네, 고아 등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세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무슬람 여러 나라들은 자카트를 개인의 발의(發意)에 맡기고 있다.
⑷ 단식(사움):이슬람력의 제9월, 즉 라마단월에 행하는 단식을 말한다. 단식하는 사람은 새벽부터 해가 지기까지 일체의 음식을 끊고, 근신(謹身)해야 한다. 병이나 여행으로 단식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달에 똑같은 일수(日數) 만큼 단식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베품으로써 보상(補償)할 수 있다. 단식기간은 인간 최대의 욕망인 식욕을 이기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환기시키는 때라고 한다.
⑸ 순례(하지):이슬람력 제12월, 즉 두알히자월 7∼10일 사이 메카의 카바신전 및 메카 근교의 성역(聖域)을 순례하는 것을 말한다. 육체적 능력과 재산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 일생에 1번은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상의 오주를 <이바다트>라고 하며, 이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봉사의무를 말한다. 이에 대해 일상생활의 인간관계, 예를 들어 혼인·상속·계약·매매·재판·형벌·성전(聖戰) 등을 규제하는 인간의 의무관계를 <무아말라트>라고 한다.
(성립배경 : 빈부 격차 심화, 다신교 및 우상숭배 폐단, 유대교, 크리스트교의 영향
1) 기원 :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마호메트가 창시
(2) 특색 : 아랍 원시 신앙, 유대교 와 크리스트교의 복합 종교
경전 - 코란, 엄격한 계율, 종교 의식, Dom 양식을 형성
(3) 전파 : 북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정복지 주민 →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 면제
교리 : 최후의 날의 구원-심판과 부활의 날 알라와 모하메드를 따르고 복종한 자들은 천국(쾌락의 전당, 낙원으로 불림)에 갈 것이요 거역하는 자들은 지옥에서 고통받을 것을 믿음. 그때에는 모든 이가 들림받고 기록책이 공개되어 심판자인 신은 각 인간의 행위를 저울질함
기독교의 교리-
[기독교도란 무엇인가 ?]
오늘날은 도저히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기독교는 좀더 그 뜻이 막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자신을 기독교도라 부르려면 다음의 서로 다른 두 조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의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서, 하나님과 불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지 않는다면 자기를 기독교도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교도들도 신과 불멸을 믿고 있지만, 회교도들은 자기를 기독교도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격하시키더라도 그리스도가 하느님은 아닐지 모르나,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가장 선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만큼이라도 믿을 생각이 없다면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할 권리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위테커 씨의 연감과 지리책에 있는 것과 같이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이 세상 사람은 기독교도, 회교도, 불교도, 물신숭배자 등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가 기독교도입니다. 지리책은 우리를 전부 기독교도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의미에서이며, 이것은 무시해도 좋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저는 두 가지 다른 점을 들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느님과 불멸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도덕적 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는 왜 그리스도를 인간 주에서 가장 선량하며 현명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가를 말해야만 합니다. 과거에 비신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이처럼 탄력성이 있는 기독교를 정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옛날의 기독교는 휠씬 생기발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지옥에 대한 믿음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한 지옥의 유황불은 기독교 신앙의 한 본질적인 조항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추밀원의 결의로 이 신조는 본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이 결의에 반대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종교가 의회의 조례로써 결정되므로 추밀원은 양 주교를 무시할 수 있었고, 지옥은 더 이상 기독교도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기독교도는 지옥을 꼭 믿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을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 문제에 이르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또 만약 제가 이 문제를 적절한 방법으로 다루려고 한다면 내세가 올 때까지 저는 여러분을 이 자리에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문제를 대체적인 방법으로 다루어도 저를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카톨릭 교회는 교의로서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도움을 빌지 않고 증명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소 기묘한 교의이긴 하지만 어쨌든 카톨릭이 그것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는 한때 자유사상가들이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이성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논할 만한 이러이러한 증명법이 있다고 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카톨릭 교회는 신앙의 문제로서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증명법과 이론들이 장황하게 발표되었으므로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가 다른 도움을 빌지 않는 이유로 증명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소위 그들의 증명법을 세웠습니다. 물론 그 증명법은 많지만, 저는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
아마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연쇄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 1원인에 도달하는데 이 원인을 하느님이라 이름한다.” 제가 보기에 이 증명법은 오늘날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원인도 옛날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원인에 대하여 계속 연구해 보았으나, 그것은 옛날만큼 힘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제 1원인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이 증명법은 아무런 타당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봅시다. 제가 젊어서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었을 때, 저는 오랫동안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 여덟 살 되던 어느 날 '존 스튜어트 밀' 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가 다음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즉 “아버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누가 나를 만들었나’ 하는 문제는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곧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나’ 하는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지극히 간단한 문장은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의 오류를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인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처럼 세계도 원인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타당성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계는 코끼리의 잔등에 얹혀 있었으며, 코끼리는 거북의 잔등에 얹혀 있었다는 힌두교도의 생각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북은 어떻게 되었소?” 하면, 그 인도인은 “화제를 바꿔 봅시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은 정말 그 얘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세계가 원인 없이 생겨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세계가 반드시 존재했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세계는 그 시초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물은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이상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자연법칙에 의한 증명법]
다음에 자연법칙에서 나온 아주 흔한 증명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전체를 통해서, 특히 아이잭 뉴튼 경과 그의 우주론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증명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유성이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태양의 주위를 운행하는 것을 관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이 유성들에게 그 특정한 양식으로 운행하도록 명령하였으며, 바로 이 명령 때문에 유성들이 그렇게 운행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편리하고 단순한 설명으로서, 그들에게서 인력의 법칙에 대한 설명을 더 이상 추구할 수고를 덜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인 소개한 좀 복잡한 방식으로 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인슈타인이 해석한 인력의 법칙에 대한 강의를 여러분에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뉴튼의 세계에서 보던 그런 자연법칙은 이미 볼 수 없습니다마는 이 뉴튼 법칙에 의하면,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연은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인간의 관습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주공간의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똑같이 1야드는 3피트임을 알 것
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사실입니다만, 여러분은 이것을 자연법칙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연법칙으로 생각되던 것 중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 반면에 여러분이 원자가 실제 어떠한 일을 하는가를 알아보려고 하면, 원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훨씬 법칙에 좌우됨이 적으며, 찾을 수 있는 법칙이란 결국 우연히 생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통계학적 평균치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두개의 주사위를 던질 때는 36회에 단 한 번씩 쌍육이 나온다는 법칙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것을 주사위가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구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약에 주사위가 번번이 쌍육이 나온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법칙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많습니다. 이 법칙들은 우연의 법칙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러한 통계학적 평균치입니다.
이로 인하여 자연법칙에 의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보다는 훨씬 그 감동이 적어졌습니다. 이러 이야기는 내일이라도 변할지 모르는 과학의 일시적 관계를 대변하는 것이므로, 이와는 아주 떠나서 보더라도 자연법칙이 다른 법칙의 모체라는 생각은 자연법칙과 인간법칙을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법칙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활동하라고 가르치는 명령이며, 이대로 여러분은 행동할 수도 있고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자연법칙이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실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단순한 기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런 일을 하도록 가르친 자가 반드시 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곧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은 왜 그러한 자연법칙은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느님의 단순한 기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뿐 다른 이유가 없다 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은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결국 자연법칙의 일관성은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비교적 많은 정통파의 신학자들이 말하듯 하느님은 다른 법칙보다 자기가 제정한 모든 그 법칙들을 만드신데 이유가 있었다고 하면 즉 하느님이 만든 법칙에는 어떤 이유가 실제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하느님 자신이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셈이 되며, 따라서 하느님을 중간에 개입시켜 보았자 아무런 유리한 입장에 서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사실 하느님의 명령 이외에 또는 이전에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은 여러분의 목적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궁극 법칙 제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 자연법칙에 대한 증명법은 전체가 이미 과거와 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증명법들을 검토하는, 적절한 시기에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이 증명법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격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 증명법들은 아주 명백한 어떤 오류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처음에는 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시대가 현대로 바뀜에 따라 이 증명법들은 지적으로 덜 숭상받게 되었으며, 한갓 도덕적인 장막으로 점점 가리워 지게 되었습니다.
[목적론적 증명법]
이 과정에 있어서의 다음 단계는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다 아실 줄 믿습니다만,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이란 세상을 살아 나가기에 꼭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만약에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입니다만, 이 증명법은 흔히 이상한 모양을 지니고 나옵니다.
예를 들면 토끼는 총을 쏘기에 좋도록 흰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의견의 적용을 토끼는 어떻게 생각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재담거리가 되기 쉬운 증명법입니다. 코는 안경을 끼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볼떼르의 말을 다 아시지요. 이러한 재담은 18세기에는 엉뚱한 논리로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왜 주위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환경이 생물에 적합하도록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갔기 때문이며, 이것이 적응의 기본 원리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의 증거도 없습니다.
이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의 내용을 조사해 볼 때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 속에 사는 삼라만상과 그 많은 결함들을 보면서도 전지전능의 신이 수백년 걸려서 만들어 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전지전능과, 당신의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만년이라는 시일을 받는다면 쿠 클럭스 클랜(주 1915년에 조직된 미국 국수주의자들이 비밀 조직)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밖에 못 만드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또 과학의 일반법칙을 인정하신다면 이 지구상의 인간의 생명과 전생명체가 때가 오면 다 죽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태양계가 몰락하는 한 단계입니다. 몰락의 어느 단계에 가서는 원형질에 적당한 온도 조건 같은 것을 가지게 되며, 전태양계에 잠시 동안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달에서 지구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일종의 죽음, 냉기, 무생명 등의 그 무엇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은 사람들의 마음을 암담하게 만든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그런 것을 믿고서야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곧이 듣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두 넌센스입니다. 수백만년 후에 일어날 일 때문에 정말 걱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그 일 때문에 자기가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훨씬 계속적인 어떤 일은 걱정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소화불량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수백만년 이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어떤 일을 생각해서 정말 심각하게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어진다는 것은 물론 우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들을 곰곰이 생각
해 볼 때에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위안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해줄 그런 것은 아니며, 단순히 여러분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 뿐입니다.
[신을 위한 도덕적 증명법]
이제 우리는 일신론자들이 그 논증의 활동에서 세워 놓은 지적 계보라고도 할 만한, 한 발 더 나아간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존재를 위한 도덕적 증명법이 그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옛날에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지적 증명법이 있었습니다. 이 증명법들은 모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언급 직후에 그는 새로운 증명법을 발명했습니다. 그것이 곧 도덕적 증명법이며, 그는 이에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보통 사람과 같았습니다. 즉 지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는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격언들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분석가가 그처럼 강조하는 것-후년의 연상보다도 유년 시절의 연상 쪽이 우리에
게 훨씬 큰 지배력을 갖는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칸트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도덕적 증명법을 발명했으며,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어 19세기에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에는 여러 종류의 형태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시비, 곧 옳은 것과 그른 것에 차이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에 대해서는 덮어두겠습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요점은 만약에 옳고 그른 것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다음과 같은 입장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차이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생겨났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처음 생겨났다면, 그때는 하느님 자신에게는 그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이니까, 하느님이 이야기한 선이라는 말은 벌써 뜻이 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하느님을 선이라고 한다면, 옳고 그른 것은 하느님의 명령과는 상관없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의 명령은 단순히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선한 것이며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려면 또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생겨난 것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는 논리적으로 하느님에 앞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만든 하느님에게 명령을 내린 더 높은 신이 있다고 가정하려면 할 수도 있고, 일부는 그노시스 파(주 1세기 후반에 일어난 2세기에 교회을 위협한 지적 신비주의적 운동을 일으킨 일파. 구약의 신을 비인격적인 관념으로 바꾸어 율법의 준수를 배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정하였다)의 설명 방식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방식이란-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이 보지 않는 사이에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꽤 많습니다만, 저는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불공평성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증명법]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아주 기묘한 형식의 도덕적 증명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우주는 커다란 불공평이 있어서 선한 자가 가끔 피해를 입기도 하고 악한 자가 흔히 번창할 수도 있으니, 어느 쪽이 남을 더 많이 괴롭힌 자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 전체를 공평하게 하려면 이 지구에서의 인생의 차액을 보상받기 위하여 내세를 상상해야만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이상한 증명법입니다. 만일 이 문제를 과학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결국 나는 이 세상밖에는 모른다. 우주의 다른 부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률상으로 증명할 공평이 있는한, 아마 이 세상이 적당한 표본일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불공평이 있다면 다른 곳에도 역시 불공평이 있을 것은 뻔하다고, 여러분이 귤이 다 상한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차액을 보상받기 위해서 밑에 있는 귤들은 좋아야 한다”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학자도 역시 우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즉 “이 세계에서 많은 불공평을 보게 되니 결국 세상에는 정의가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하느님에게 유리한 도덕적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도덕적 증명이 될 만하다”고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지적인 증명법이 정말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님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도록 움직이게 하는 결코 어떤 지적인 증명법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며, 그것이 주요 이유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장 유력한 이유로 생각되는 것은 안전을 원하는 마음, 즉 나를 돌봐줄 든든한 형이 있다는 느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믿으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격]
이제 저는 합리주의자들이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고 이따금 생각하게 되는 화제에 대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즉 그리스도가 가장 선하고 가장 현명한 인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모두 찬성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 기독교도' 라고 하는 분들 이상으로 제가 그리스도에게 공명하는 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와 똑같이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칭 기독교도라는 수많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려면 할 수 있습니다.
“악에는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거든 왼빰도 돌려 대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할실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보다 약 5,6백년 전에 노자나 석가가 한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실상 기독교도들이 긍정하는 이론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현 수상(주 스텐레이 발드윈(1967~1947)을 말함. 1908년 보수당 하원 의원으로 입문한 영국의 정치가. 세 번이나 수상을 지냈으며, 1937년 은퇴시에는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이 독실한 기독교도라는 것을 저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한 분이 그 분에게 가서 빰을 때려 보라고 권할 생각은 없습니다마는, 이것을 가상해 본다면 여러분은 수상이 성서의 이 텍스트를 비유한 뜻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네가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이론이 많은 기독교 국가들의 법정에서 인기가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도인 수많은 판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 한 분도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나게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교리입니다.
사회자께서 여기서 정치 문제는 언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는 부득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총선거 때에는 여러분에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르침을 위배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정말 그들은 그 당시 강력히 거절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의 격언이 있는데, 저로서는 그 속에 의미심장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도인 제 친구들 사이에는 이 말이 그렇게 인기가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말씀 하시기를 “만일 그대가 온전하기를 원한다면 가서 그대의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훌륭한 격언이나 제가 말한 바와 같이 별로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비록 따라 행하기는 좀 어렵다고 하겠지만, 좋은 격언임에 틀림없습니다. 저 자신도 이 격언대로 살 것을 공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도를 두고 말하면 사정은 다릅니다.
[그리스도 교훈의 결점]
이 격언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저는 복음서에 서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최상의 지혜, 최상의 선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점을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상의 문제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도대체 생존하였는가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생존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문제는 언급치 않겠으며, 또한 그것은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대로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겠으며, 복음서의 이야기를 쓰인 그대로 보겠습니다. 그 중에는 그리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자기의 재림이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기 전에 영광의 구름 속에서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것을 증명할 만한 텍스트는 복음서 중에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자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 도시를 통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고, 또 “여기서 있는 자 중에는 인자가 그의 왕국으로 들어올 까지 죽지 않으리라”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가 자기의 재림이 그때 생존하던 많은 사람이 죽기 전에 있으리라는 걸 믿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초기의 제자들의 믿음이었으며, 그의 도덕적 교훈의 기본이었습니다. 그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라든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것은 그의 재림이 곧 있을 것과 모든 세속의 일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데에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믿는 기독교도들을 몇 사람 알고 있습니다. 한 목사가 재림이 매우 가까워졌다고 하는 바람에 교인들이 깜짝 놀랐으나, 그 목사가 뜰에 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모두들 좀 안심했다고 이야기의 주인공을 저는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도가 이것을 정말 믿고 뜰에 나무를 심는다든지 하는 일을 삼간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재림을 그대로 받아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만큼 현명하지 못하였으며, 물론 가장 현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적인 문제]
다음으로 도덕적인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격에는 하나의 중대한 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옥을 믿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원한 형벌을 옳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서술되어 있는 그리스도도 확실히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그이 설교를 듣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여러 번 보복적인 분노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이것은 설교자에게는 흔히 있는 태도이기는 하나, 지존의 성품을 어딘지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이러한 태도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에게도 매우 온화하고 정중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격분하기보다는 훨씬 성자다운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모드 소크라테스가 임종 때에 한 말이라든지, 자기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너희들 뱀의 무리여, 독사의 세대여,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제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최선의 말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 관한 이와 같은 말은 이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물론 성령을 거역하는 죄악에 대한 유명한 텍스트도 있습니다.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이에 대한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텍스트는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즉 모든 사람은 다 자기가 성령에 대하여 죄지은 것으로 알아 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진실로 웬만큼 다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무섭고 끔찍스런 말을 이 세상에 퍼뜨리지는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또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인자는 그의 찬사를 보내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을 범하는 자를 거두어 이글거리는 불가마에 넣으려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를 갈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이를 갈고 통곡하는 광경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 절에 걸쳐 나옵니다. 이것을 읽는 사람이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통곡과 분노를 머리에 그리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자주 나올 수는 없습니다.
다음에는 양과 산양을 두고 한 말을 모두 기억하실 줄로 압니다. 재림할 때에 양과 산양을 분간하기 위하여 어떻게 산양에게 말하려고 했는가 들어봅시다. “너희 저주받을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의 불 속으로 들어가라”거 하였고, “이들을 영원의 불 속에 넣어라”고도 하였으며, “만약 너의 한 손이 거역하면 그 손을 끊을지니 불구가 되어 생명으로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기보다, 영원히 꺼질 수 없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나으리라. 거기에는 구더기가 언제나 끓고 불이 꺼지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합니다.
이 전체 교의, 즉 지옥의 불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하는 이 교의를 저는 잔인한 교의라고 보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 잔인성을 퍼뜨린 교의이며, 여러 세대에 가해지는 잔인한 고문을 이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록자들이 쓴 대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밖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다라의 돼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확실히 악마를 그 속에 넣어 언덕에서 바다로 내달리게 한 것은 돼지에게 친절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함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악마로 하여금 그냥 지나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마를 돼지들 속에 들여 보냈습니다.
다음에는 무화과나무의 기묘한 이야기가 있는데, 저는 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경위를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봅니다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배고픔을 느끼시자 멀리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먹을 것이 있을까 하여 그리로 갔으나 이에 이르자 아직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더라.” 그리스도가 이에 “누구도 네 열매를 영원히 먹지 않으리라”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말씀드리기를“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를 보소서, 시들어 버렸나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만큼 자라지도 않았다고 그 나무를 나무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그리스도가 지혜에 있어서나 덕에 있어서나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위에 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와의 관계]
638년 예루살렘이 점령 당하고 비잔틴(희랍정교권) 제국의 지역이 이슬람권으로 넘어가고 두 번째 칼리프(왕) 우마르 1세가 회교 사원을 세운다. 초기는 기독교인 성지 순례를 허락했으나, 셀죽 트르쿠의 통치부터 이슬람들이 방해하기 시작했다. 교황 우르반 2세 Deus Vult(하나님이 원하신다)를 주장하였고, 1096년 잠간 탈환한 후에 다시 점령당한다. 그 후에 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모두 실패, 두 종교의 골은 커졌고, 20세기가 될 때까지는 성지는 회교도의 수중에 있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 두 종교간의 갈등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슬람권 국가의 식민지화에서 심해진다. 1948년 영국의지지 속에서 이스라엘의 독립과 팔레스타인의 추방으로 종교적 갈등이 심화된다. 수많은 중동전으로 배후에 미국의 유대인들과 미국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였다. 걸프전에서 미국이 쿠웨이트를 도와 이라크를 공격하였다. 결국 이런 역사들이 이슬람 국가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미국을 증오의 대상을 삼게 되었다. 이에 중동의 보복성 테러 911사건이 발생하였고, 미국은 바로 보복 공격으로 이라크를 무력으로 함락했다.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이란 의미는 순종, 항복(surrender)을 의미한다. Islam이란 말의 뿌리는 slm에서 왔다. 이 slm은 평화롭게 되는 것(to be in peace), 혹은 완전하게 되는 것(to be an integral whole)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슬람하면 신의 법에 항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완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슬림은 항복한 사람을 말한다. 자신을 알라에게 포기하는 자는 알라가 그의 인격을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슬림이란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세계 인구 가운데 13억 명이 무슬림들이다. 이 종교는 신자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 개인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영향을 강하게 끼친다. 그들의 삶이 신의 뜻에 순복할 것을 가르킨다. 철저한 종교의 예배와 행위 그리고 법을 중시한다.
이슬람은 사우디 아라비아 사람인 교주 마호메트(이슬람어로 무하마드, 570-632)가 만든 종교이다. 그가 만든 종교는 초기 부터의 십자가의 죽음 택한 예수와 순교자들과는 달리 칼을 사용하여 아라비아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지금도 지하드의 변형된 과격한 원리주의자들이 이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무슬림들이 호전적이고 전쟁을 자주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원래 비옥한 땅이었으나 점차 사막으로 변화되었다. 아립인들은 셈족 계열, 최소 왕국은 사바(Saba)로서 성경의 시바(Sheba)라고 추측됨. 그들은 공동체의 보호를 위해 베두인 사회에서는 단체위주의 민족주의 였다. 그들은 수나(sunna)에 의해 통제받았는데 수나란 지도자들이 부족의 삶을 이끌어가면서 수년간에 걸쳐서 축적한 관습과 전통들이었다.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이었다. 오아시스의 메카는 주요한 곳으로 부상하였다. 거기에는 천연숭배, 정녕숭배함, 정규적으로 방문하는 성소가 있었다. 부족들이 인정하는 신은 마낫(Manat, 운명의 여신), 우자(Uzza, 새벽 별 여신), 알랏(Allat, 태양의 여신)이 있었다. 이 신들은 최고의 신인 알라 밑에 있는데 알라는 일종으로 멀리 떨러진 창조주이며 이 여신들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최고의 신으로 그 상징은 빨간 장막 속에 있는 돌. 신들을 숭배하는 성소의 중심이엇다. 그 성소는 후에 마호메트가 차지하였고 하지(hajj) 순례의 중심적 장소가 되었다. 계시를 받는 마호메트- 주전 570년 메카 출생, 알라(히, 엘)믿음, 천사 미카엘이 "낭송하라" 말함, 이 단어가 코란이 되었다.
마호멧의 사상인 피의 정복. 칼로써 이웃 나라 정복. 우마르때- 바니 가산와 바니 히라라는 기독교 부족이 이슬람에 협조하여 페르시아가 아랍화되게 함. 또 그들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사이가 좋지않음. 이유는 이 두 부족의 기독교인 비잔틴을 단성론적이며 네스토리우스적(그리스도의 이성을 철저하게 분리)으로 간주-반 쪽 기독교인으로 간주하였다. 반면 비잔틴 통치자들은 시리아인 핍박- 로마 카톨릭과 교제를 맺지 않음으로 인해. 동 로마의 헤레클리우스 황제가 시리아에서 패배는 시리아 크리스챤들이 헬라 지배자들을 갖느니 차라리 아랍 지배자들을 갖기 원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것은 같은 기독교인 끼리 서로 사랑과 도움이 필요하다. 교리의 차이로 미움과 전쟁의 역사로 연결되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다.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종교적 의무. ‘성전(聖戰)’이라고 번역한다. 이 싸움은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코란’이라고도 표현되듯, 옛날부터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약탈전쟁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반드시 공격적 성격만을 띠는 것은 아니고 평화를 갈망하는 이슬람교도가 위기에 처하여 부득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방위적 성격의 것으로 보고 있다. ‘지하드’는 반드시 무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 의한, 펜(논설)에 의한, 지배에 의한, 그리고 또 검에 의한 4종의 지하드로 나뉜다. 오늘날에는 무력에 의한 지하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펜에 의한’ 평화적 전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성년이 된 모든 남자 이슬람교도는 지하드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이슬람교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참가자에게는 전리품의 분배가, 순교자에게는 천국이 약속된다. 한편, 지하드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이슬람교 단체들이 이란·팔레스타인·레바논·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이스라엘 등 서방 국가 등에 대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일부는 테러 행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을 이슬람 지하드라고 하지만 그 실체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슬람 아말이나 헤즈볼라 등 시아파 과격단체의 위장이라는 설도 있고, 여러 단체가 독자적으로 테러 행위를 수행한 후 이슬람 지하드의 이름으로 성명을 낸다는 견해도 있다. 1983년 베이루트 주재 미국대사관에 대한 폭탄트럭공격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해 베이루트 미군해병 사령부와 프랑스군 본부에 대한 폭탄트럭공격에서도 이 기구의 이름으로 성명이 발표된 바 있다."가 있다.
이제 911테러 사건과 이라크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도 계속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종교와 이념으로 시작된 싸움이 벌써 그 한계를 넘었다.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는 좀 더 지켜 볼 일인 것 같다.
4.도교와 자연종교를 오늘날의 자연주의와 비교분석하시오.
도교-
[요약]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
[본문]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 ·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1. 제신과 경전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 ·무시천존(無始天尊) ·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 ·문창제군(文昌帝君) ·후토(后土) ·서낭신[城隍神] ·조군(君:五祠 중의 한 神) ·화합신(和合神) ·삼관(三官) ·재신(財神) ·개격신(開格神) ·동악대제(東嶽大帝:泰山神) 등 수많은 신들을 제사지낸다. 한편 도교의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神符:부적) ·옥결(玉訣:秘試) ·영도(靈圖:鬼神像) ·보록(譜錄:敎法의 연혁) ·계율(戒律:修道의 율법) ·위의(威儀:齋戒 등의 의식) ·방법(方法:귀신을 쫓는 術策) ·중술(衆術 ·鍊丹類) ·기전(紀傳:老子 등의 전기) ·찬송(讚頌:神典의 偈) ·표주(表奏:귀신에게 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졌다 금주(禁呪)나 부록(符) 등 방술을 행하는 것도 이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특정한 날과 시간에 목욕재계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지,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 요괴(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따위가 방술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 태식법(胎息法)으로 충화기(沖和氣)를 받아들여 장생하는 수련인 내단(內丹), ② 황금 ·수은과 약물들을 복용하거나 몸에 주입하는 외단(外丹), ③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 충만하게 하는 방중술(房中術) 등이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수련 결과, 상자(上者)는 허공에 올라가 우주에 소요하는 천선(天仙)이 되고, 중자(中者)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에서 사는 지선(地仙)이 되며, 하자(下者)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尸仙:人仙)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와 같은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2. 한국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 ·무속(巫俗) ·산악(山岳)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 ·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眞)을 도모하는 사람이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 ·영성(靈星) ·산신(山神),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위 2년에 연경궁(延慶宮) 후원에 있는 옥청정(玉淸亭)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시고 달마다 초제(醮祭)를 지냈고 청연각(淸燕閣)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 ·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 ·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종교 -
[요약]
계몽주의 시대에 있었던 합리주의 종교로,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나 통찰에만 바탕을 둔 종교.
[본문]
계시종교(啓示宗敎)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자연종교의 개념에는
①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종교를 가리키는 경우와,
② 문화적인 입장에서 본 원시적 미개종교의 경우가 있다.
후자는 자연숭배에 가까운 경우이어서 자연숭배와 혼동되거나 또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나, 자연숭배는 애니미즘이나 범신론(汎神論)과 같은 원시적 미개종교를 말한다. 그 대표
적인 예가 영국의 이신론(理神論)과 독일의 라이마우스 등의 주장인데, 그 특징은 권위주의
적이고 제도적인 기성종교에 대한 안티테제이며, 계시가 아닌 자연, 또는 이성에 의한 진리
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D.흄은 기적을 부정, 조작이 아닌 인간정신으로부터 자연발생적
으로 우러나오는 자연종교를 주장하면서 무신론으로 기울어졌다. D.디드로도 역시 모든
계시종교를 이단이라고 반박, 자연종교를 주장하며 무신론으로 기울었다.
자연주의 -
서정적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던 자연주의는 현실을 아무 목적이나 선입견 없이 충실하게 관찰
하고 모사해 나간다.이것은 이상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에 의해 조장된 감정에 대한 반발로 나타
났다.''자연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만프레디, 리베라, 발렌틴, 혼도스트 등과
카라밧지오의 제자 벨로리였다.충실하게 모사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주의라는 말을 썼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농민화가였던 밀레의 「만종」「이삭줍기」와 고요한 서정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던 코로의 「진주를 단 여인」「모르트퐁텐의 추억」이 유명하다.
영국에서는 밝고 풍부한 색감으로 전원과 빛, 대기의 풍요함을 표현했던 컨스타블과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물과 안개의 화가라 불리는 터너가 있다.
자연주의의 개념
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라는 용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용례도 다양하기 때문에 프로테우스적 성격을 가진다.
문학에서는 1870년 이후의 소설 및 연극의 지배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지만「자연
주의」는 문학에서보다 철학에 먼저 사용된 말이다.
원래자연주의란 유물주의(唯物主義,materialism), 쾌락주의(快樂主義,epicureanism), 혹은
여러 형태의 세속주의(世俗主義,secularism)를 뜻하던 것으로서 고대 철학에서 사용되던 말이며,
이러한 본래의 의미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사상가 홀바하(1723-1789)는 "18세기의 자연주의는 인간을 가지(可知)적인 현상 세계, 즉 초경
험적(超經驗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신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우주, 그 안에 홀로
생(生)을 영위해 가는 것으로 파악하는 하나의 철학 체계이다."라고 설명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언어학자요, 실증주의(實證主義) 철학자인 리트레(1801-1881)까지도 철학적
용어로밖에 모르고 있었다.그의 <프랑스어사전(1877)>의 자연주의 항목을 찾아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이러한 철학적 의미는 문학가들도 사용하고 있다.
19세기 전반의 문학 비평가 센트 뵈브(1804-1869)는 18세기의 사상을 유물론(唯物論) 내지
범신론(汎神論) 및 자연주의와 동일시한다.
자연주의의 전성기라 할 19세기 후반에 철학자 카로(1826-1887)는 유심론(唯心論)의 대립 개
념으로서 「순수하고 단순한 자연주의-물리화학(物理化學)주의의 이론」이라고 말한다.
자연주의라는 말은 박물학자(博物學者,naturalist)라는 말의 영향을 받고 있다.
박물학자란 자연의 산물의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세기 전반에는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하여 박물학자의 방법과 문학자의 방법이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자연주의라는 용어가 결정적으로 일반화된 것은 미술 및 문학에 사용되면서부터이다.
그것은 미술 비평에서 나타나고 다음에는 문학 비평 용어로 등장한다.
미술 분야에서 자연주의의 의미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주장하는 사고 방식」이다.
미술 비평가 카스타냐리(1830-1880)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동일시하였다.
「예술이란 모든 양식과 단계에 있어서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라 함이 자연주의 파의 주장이다.
그 유일한 목적은 최대의 강도와 최고의 긴장에 있어서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 진실이다.」이런 카스타냐리의 미술 비평에서 자연주의가
예술상의 실증주의이면 과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미술 분야에서 쓰인 자연주의는 마침내 문학 분야에 들어오게 된다.
졸라(1840-1902)가 이 말을 독점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소설 <테레즈 라캥(1867)> 제 2판 서문에서부터 쓰기 시작한다.
5. 2004학년도 2학기 동안 현대인의 삶과 종교를 수강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을 위 답안과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 다 쓰시오(20점).
2학기동안 현대인의 삶과 종교란 강의를 수강하면서 사실 나는 착실하게 수업을 모두 참여 치는
않았다. 처음에 종교라고 함에 있어 내 생각은 그저 신앙심일 뿐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각 종교
마다 각각의 생겨난 배경과, 교리, 신앙, 윤리관등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 되었고, 이는 곧 나에게 수업내용에 관한 관심이 되었다. 사실 종교 뿐만이 아니라 철학
에 관한 지식도 덤으로 배우고 가는 기분이다. 사실 처음에 우주에 관한 것과 우주와 나의 관계
에 대한 수업을 들을 때 종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종교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거 같다. 사실 나는 종교에 관한것이나 철학, 사상에 관한 것은 아직 무지하기 때문에
위의 답안과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의 배운것... 참 어려운 것 같다. 내가 그나마 알고 있는 부분
이라함은 수업시간에 배운 교수님의 강의.. 참.. 교수님 사모님 이야기와 자제분 이야기들은
언제들어도 참 재밌었다. 강의와 조별발표과제에서의 내가 참여 했던 6조의 발표 부분. 위의
발표내용과 중복되지 않는 내용에서의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을 쓰자면 뉴에이지 운동에 관한
내용인 것 같다. 뉴에이지 운동에 관해 줄이자면
1. 뉴에이지 운동이란 -말 그대로 새시대란 뜻으로 오랜기간 동안 서구 역사가 기독교 신관속
에서 발전해 왔는데 18,19C의 사상적 변동기를 거치면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통을 반대하면서 생긴 것이다. 대표적으로 히피족같은 부류가 있었으나 보다 조직
적으로 널리 지금까지의 기독교 문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무리들이 나타났는데 그들를 뉴에이
저(뉴에이지 운동가)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린 시대는 구시대이며, 이제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다스리는 시대가 오는데 그 시대가 "새시대"이며 그들은 이런 새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전도사들로 자처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뉴에이지 운동의 범위는 종료, 문학, 음악,
영화, 티비, 스포츠등 모든 분야에서 활동을 한다. 대부분이 반기독교적인 요소로 무장하여
활동을 함으로 한마디로 기독교 문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사단의 문화라고 볼 수 있으며,
좀더 깊은 영적 판단을 내린다면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할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사단 종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한 사전 포석단계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2. 뉴에이지 운동 발생의 배경-여러 세기동안 지구의 문명을 이끌어온 현대 서구의 문화는
쇠토현상을 명백히 나타내주고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이런 현상을 크게 부추켰다. 그래서
서구는 피곤을 느끼고 물질문명에서 오는 여러가지 모순과 부조리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사상
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 했다. 이미 20세기초 오스왈드 스펭글러(Oswald Spengle
r 1880-1936)같은 사람은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이라는 책에서
흥미있는 관찰을 한 바 있다. 자연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문명이 그와 같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인데, 이른바 서양문명이 봄과 여름을 거쳐서 가을
에 다다랐다는 말이다. 그 가운데 특히 서방세계의 정신적, 영적 생활의 지주역할을 하여
온 것이 이른바 유태교-기독교(Judeo-Christian)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서구의 정신세
계의 약화나 몰락현상은 곧 기독교 세계관의 쇠퇴를 가져오고 이는 기독교적으로 보았을 때
매우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뉴에이지 운동 미국에서 표면화하기 시작하여 대중 속에 (교회
를 포함)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로 볼 수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많은 아시아 사람들의 이민 붐(boom)이 일어나게 되었다. 잘
아는대로 이민법 개정의 결과로 수많은 한국 사람들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이민들 가운
데는 특히 힌두교 계통의 종교 지도자들(Guru)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적극적인
포교에 나섰다. 미국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기성 기독교에 관심이 약화되어 가고 있고, 아울러 전통 가치관과 윤리관의 몰락, 폭력과 마약의 성행, 그리고 한계를 모르는 자유와 욕망의 세계 등, 정신적 영적으로 지칠대로
지친 서방세계 특히 미국 사회의 새로운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계층 사람들이 흥미를 갖
고 이른바 동방종교들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줄일 수 있다. 참, 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종교와 종교전쟁 종교사상이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굉장히 가까운 범위에 접해있다는 것이다. 다음 학기부터는 인문학부가
아닌 철학과 이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