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밀양 만어사
“내일 **가 오기로 했어?”
“아참! 내일 못 온다고 전화가 왔더라.”
“그럼, 만어사나 다녀오자.”
절집을 찾아다니기로 정한 후로 아내는 절을 답사하자는 제안에는 무조건 찬성이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만어사에 마음이 끌렸다. 젊은 날에 절집을 정말 많이 찾아다녔다. 어인 일인지 만어사는 쏙 빠져 있었다.
만어사는 삼국유사에서도 소개하고 있어 꽤 흥미를 끄는 절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토속신앙과 불교가 마찰을 일으키지만 불교가 승리한다는 내용이 주류이다. 토속신앙에 대한 불교의 우위를 증명하는 이야기들이다. 설화는 터무니 없는 내용들이지만. 그런데도 진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설화를 역사로 믿는 사람도 많았다.
김수로 왕 때 만어산에는 다섯 나찰녀가 살았고, 산 아래 옥지(玉池)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농민들을 해꼬지하여 농사를 망치게 하였다. 김수로왕이 모시고 온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불교로 그들을 교화했다는 내용이다.
만어사로 부르게 된 내용도 불교를 선전하는 이야기이다. 동해용왕의 아들이 죽을 때가 되자 자기가 죽을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수많은 고기들도 그를 따랐다. 이 산에 와서 숨을 거두면서 미륵바위가 되었다. 그 바위는 아주 영험하여 절에서 미륵부처로 모시고, 전각까지 지어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이 바위는 앞으로 구부러져서 무엇이거나 붙어있을 수가 없다. 작은 돌이던, 동전이던 바위에 누르고 소원을 빌면, 소원을 들어줄 때는 바위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민간신앙을 붙임돌, 문댐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과학적인 설명도 하지만 절집이나 신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아 생략하겠다. 용왕을 따르던 고기들도 돌덩이가 되어서 절앞의 너럭에 수많은 돌덩이가 쌓여 있다. 이들이 만어석이다.
절 마당에는 고려 양식의 3층 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탑은 절을 창건할 때 함께 세운다. 고려탑이라는 것은 이 절의 창건시기를 암시한다. 수로왕 이야기는 시대에 맞지 않아 그냥 전설일 뿐이지만, 불교신앙을 돈독히 해주는 효과는 수로왕의 권위만큼이나 크다. 전설은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설은 우리에게 수많은 자료들을 전달해준다.
며칠이나 눅눅하던 비안개는 햇살에 녹아버렸다. 오늘도 먹을거리를 만들고 커피와 음료수를 준비했다. 오늘 같은 날은 여행하기에 정말 좋다. 생소한 길인데도 네비가 안내하는 데로 따라가니 하나도 낯설지 않다. 처음 가보는 시골길이 오히려 싱그럽고 맑다. 밀양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주변의 산빛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이 감돈다. 밀양 인터체인지가 두 곳인데 잘못 선택하여 내린 탓에 밀양의 시골길로 밀양시를 가로지르는 옛길을 따라 지나갔다. 한적한 시골길이라선지 낯설지 않고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다.
삼량진 역 앞에서 만어사로 가는 길이 갈린다. 한참을 달리니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4km라는 안내판을 지나자 산으로 오르는 길이 좁고 가파르다. 운동신경이 둔한 운전자에게는 쉽지 않는 길이었다. 그래도 절 마당 앞에 주차장이니 절집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편리한 길이다.
용왕의 아들이 미륵바위가 되었다는 바위에는 전각을 세우고 미륵전이라는 현판까지 달아 두었다. 절 마당에는 영천 할매돌을 닮은 들돌도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에 절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어떤 곳이었을까?
이 의문이 내가 만어사에 관심을 가지고, 오고 싶어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산에 살았다는 못된 나찰녀는 우리의 산신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토속 산신은 거의 대부분이 여신이다. 그러나 절의 산신각에 모신 산신은 수염이 허이연 노인네들이다. 산신도 중국서 수입했나 싶다. 옥지에 살았다는 독룡은, 농민들에게 비를 선사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은 용의 전설과도 들어맞는 내용이다. 용이(용의 아들이므로 용이다) 죽어서 미륵바위가 되었다는 것도, 우리 고유 신앙인 바위신앙과 부합한다. 지금은 산불 때문에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젊었을 적에 팔공산을 오르면 덩치가 크고, 잘 생긴 바위 밑에는 으레 촛불을 켰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리는 할머니를 보기도 하였다. 절 마당의 들돌은 영천의 할매돌이다. 만어사에는 불교와는 관계없는 토속신앙의 흔적들이 숱하게 남아 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해보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만어산은 우리의 토속신앙의 성지이다. 후속신앙인 불교가 들어와서 이전의 신앙지를 자신들의 신앙지로 만들었다. 이것은 토속신앙-불교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세계 종교사를 보면 모든 종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토속신앙과 불교 사이에는 심한 알력이 있었다. 삼국유사 뿐 아니라 전설로도 많이 전해온다. 삼국유사에 보면 고승의 지팡이가 날아가서 천년 된 여우를 죽였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많다. 삼국유사는 불교의 일방적인 승리를 다루었다. 우리의 토속신앙이 1000년이나 된 여우처럼 불교승의 지팡이를 맞고 죽어 사라졌을까? 아니다, 사라지지 않았다. 무속으로, 총각도사가 펼치는 민속신앙으로, 양밥이라는 형태의 주술신앙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절 마당 주위에는 여기저기에 하늘을 어루만질 듯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산바람을 맞으면서 그늘에서 쉬고 있다. 준비해 간 음식을 먹을 장소가 마땅찮다. 사람이 없는 종각 뒤의 계단에 앉아서 음식물을 먹고 있으니 지나가던 스닙이 자꾸 흘깃흘깃 처다본다. 우리 부부도 마주 처다보고 웃었다. 쓰레기를 어디에다 버리려나 궁굼해서 일까. 그래서 음식을 먹은 자리를 깨끗이 치웠다.
내려오는 길도 수월하지 않았다. 좁은 꼬부랑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니 어느 사이에 평지길이 나왔다. 긴장해서인지 어깨가 뻐근하다. 온 몸도 뻐근하다.
오늘 하루도 절집을 찾아가서 우리 아이들과 손자녀까지 가족의 편안을 빌었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집사람이 법당으로 들어갈 때 나에게 손을 벌리고 내 지갑을 열게 하지 않았다.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정말 신기하다. 절집을 찾아다니다 보니 부처님의 공덕이 나에게 미치는가.
절 집을 찾아다녀 보면 절의 창건설화에서 이곳이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터이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나는 절에서 토속신앙의 흔적을 찾아내는데 많은 흥미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