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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난예고와 성전세
마 17:22-27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마 17:22-27 / [수난에 대한 두번째 예고;막9:30-32,눅9:43하반절-45] 그들이 갈릴리에 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인자는 멀지 않아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23)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한없이 슬퍼하였다. 24) [세금을 바치시다] 예수 일행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ㄱ)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하고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ㄱ. 성전에 바치는 세금, 로마 동전으로 2드라크마, 유대 돈으로는 반 세겔) 25) 베드로가 `물론 바치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와서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예수께서 먼저 물으셨다. `베드로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자기 백성에게서 받느냐, 아니면 정복한 이방인에게서 받느냐?' 26) `이방인에게서 받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백성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27) 그러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으니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라. 그래서 맨 먼저 낚인 물고기의 입을 벌려 보라. 돈 한 ㄴ) 세겔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다 너와 나의 몫으로 갖다 내라.' (ㄴ. 한 스타테르짜리 은전. 4드라크마짜리 로마 화폐, 유대 돈으로는 한 세겔)
예수님이 갈릴리에 도착하자 역시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22-23)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베드로가 신앙 고백했을 때부터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세 번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으며 생명을 취할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죽는 것이지 어떤 세상 세력 때문에 죽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잡히신 것이며 능력이 없고 방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순수한 자발적 사역이셨습니다. 제자들은 구원에 관한 구속의 진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매우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바로 붙잡았다면 죽으시고 난 다음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고기 입 속의 성전세(24-27) 갈릴리 지역에서 큰 도시가 가버나움이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실 때, 성전세인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너의 선생께서는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반 세겔은 성전세로 누구라도 낼 수 있도록 적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까지 내오셨기에 이번에도 낼 것이라고 대답하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이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백성에게 세금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전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성전세를 받으면 되겠느냐”라고 또 물으실 때 베드로는 난처해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충분히 있지만,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오해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는데, 첫 번째 잡힌 고기의 입을 열어보면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의 성전세 한 세겔이 있을 것이며 그것으로 성전세를 지불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하여 동전을 얻었고 성전세를 지불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적용: 성도로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은 자신을 통과하는 물을 결코 붙들지 않습니다. 강은 결코 물을 소유하지 않지만, 강물과 더없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물의 힘이 강의 모양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믿음으로가 아닌 과욕으로 자신의 생각과 기대에 머물게 되면 삶의 모습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죽어지지 않아서 열심히 에너지를 쏟고 있음에도 성취되지 않은 비전이 있지 않은지 살펴서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른 깨달음이 있어 그 말씀이 무기가 되어 하나님 나라 세워가는 하루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수난의 예고와 성전세
마 17:22-27 / 이상호 목사(세광교회)
1부 수난의 예고(:22-23)
사순절이란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4순, 즉 40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간으로 하면 6주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여행을 하셨지만 이 기간은 특별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 여행기간에 예수님이 몇 차례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는 거의 없었던 말씀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옆에 있던 제자들이 근심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수난을 말씀하셔야 했는지 그 필요성을 모두가 뜻밖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이것을 알려야만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 의미를 여기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난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 닥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수난이 없기를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1.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 말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시고,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결코 사람들의 손에 있으면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계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 충만의 능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할 수 없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적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요, 로마의 정치가들입니다. 넓게 말하면 모든 군중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넘겨진다는 것은 사람들의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법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항상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사람들의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뚜렷이 구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면에서 자신을 세상에게 내맡기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류구속의 대사명을 위하여 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인들이 와서 체포하려고 할 때도 베드로에게 하신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셨습니다.
2.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넘겨진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살려 보려고 재판과정에서도 바라바를 내세워서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한 노력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에 위험이 올 것을 알고 얼른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가장 잔인한 사형법 이었습니다. 즉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나 외국인에게 주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시민도 아니요, 식민지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표면적인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그 내면적인 뜻을 살피게 됩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가가였습니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그의 구속의 희생이었으며, 한번에 드리는 속죄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는 인간의 승리로 나타나고 있지만 예수님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기독교의 가장 깊은 교리이며 믿음을 가진 각 개인에게는 감격입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던들 우리는 아무 가치 없는 인생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로 인하여 오늘 믿음을 소유한 영원한 천국의 사람으로 희망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를 깨닫고 살도록 십자가를 명상하는 생활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3. 삼일 후에 살아나십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실패요, 절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수난의 예고에서 반드시 따라 나오는 말씀이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입니다(16 :21, 20: 19, 27 .63).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이 있으므로 빛이 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여기서 최대한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무덤을 돌로 막고 그 곳에 인장을 찍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그 돌을 굴려낼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굴려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보장을 하나님이 허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십니다. 부활은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도 그 자리를 지키다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나는 데 그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시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를 확인하기 위하여 무덤에 갔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는 들어갔었지만 요한은 무서워서 무덤 안에 들어갈 용기를 갖지 못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인류의 근본역사를 변화시켰으며,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희망이 무엇인가를 본질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것은 자신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따라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반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러한 반대에 부딪치는 젓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어느 정도의 각오인가를 타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확고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그러나 각오가 실천될 때까지는 여러 차례의 결단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자리에 서야 할 때는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같은 제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정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수난은 예수님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도 수난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찬식에서 이것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깊은 자리에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을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 뿐입니다.
2부 성전세 문제(:24-27절)
오늘 본문은 세금받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성전 세금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우리들에게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란 말은 유대인들의 예배중심지인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20세 이상된 남자들에게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반 세겔씩 내게되어 있었습니다.(출30:11-16)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전통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바치던 자치세였습니다. 고로 이 세금을 받는 자들은 순수한 유대인들이었으며, 로마에 바치는 국세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다분히 시비쪼로 베드로에게 너와 선생은 성전세인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말했고 그들의 말에 베드로가 성급하게 대답을 했으며, 예수님은 그 문제를 처리하셨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성전 세를 안내도 되는 분이셨습니다.(25-26절)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들이 관세나 정세를 타인에게 받지않느냐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성전에 대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이 곧 성전의 주인이시며, 친히 성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시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이끄시는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바로아시기 바랍니다. 고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성전세를 내셨습니다.(27절상)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이시며, 성전을 친히 만들게 하셨고 그 성전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이시며, 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도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과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아시고 성전세를 내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생겨서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함으로 시끄러워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장애가 될 것 같아서 예방적 조치로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배워야할 사항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었고 우리가 모든 것을 믿음으로만 한다고 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키지 말고 겸손하게 들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의 실족함을 막기 위해서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영혼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이며, 내가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자유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배려하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5절상)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인 성전세를 내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지도 않고 “내신다”하고 집에 들어 갔는데 예수님께서 벌써 아시고 베드로에게 먼저 성전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하신 예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와같이 우리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말씀드리기 전에 벌써 우리 주님은 우리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벌써 알고 계십니다. 구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시지만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신 예수님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필요한 것과 어려운 문제를 아뢰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4. 전능하신 예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27절하)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행하신 이적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풍랑을 잔잔하게도 하셨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불치의 병을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들은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한가지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르시길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한마디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처음 물고기의 입을 열면 돈이 나올 것이란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려면 처음에, 빨리, 즉시 이루어 주시기도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미리 아신 예수님이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즉시 이루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넘치시길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받을 교훈이 무엇입니까?
1)우리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주님이 원하지 않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결단과 용기의 신앙인이 됩시다.
2)예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들의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을 보시고 아십니다. 고로 거룩하며 하나님에게 부요한 마음을 가집시다.
3)그런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주님은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와 성전세
마 17:22-27 / 이정선목사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입체적으로 볼 수 있으면, 훨씬 이해도 쉽고 실감나게 스토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갈릴리에 모일 때’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전에는 어디 있었습니까? 산에 갔다 왔었지요. 헐몬산으로 추정되는 높은 산에 다녀왔습니다. 그렇다면 헐몬산에서 갈릴리까지는 얼마나 떨어져 있고, 오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 알고 이 본문을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마운트 마웅가누이 올라가는 중턱에 앉아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파파모아 비치로 가셔서 거기서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벌써 그 그림이 다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성경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이 이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그저 막연한 이야기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스라엘에 가서 직접 현장을 답사하지는 못할망정 지도를 보면서 공간적 이해를 돕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갈릴리로 돌아와서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이 살아나리라.” 산에 올라가기 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신 말씀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고 했어요. 이 말씀을 처음 하셨을 때는 베드로가 펄쩍 뛰며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예수님께 심하게 꾸중을 들었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심히 근심만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듣기 괴로워하는 말을 반복해서 하시는 것입니까? 사람들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 말씀은 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셔서 제자들을 낙심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한번 물어볼까요?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체로 좋아하는 구절들이 뻔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좋은 말씀입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얼마나 든든한 말씀이에요?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런 말씀이나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이런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씀은 들으면 괴롭거든요.
듣고 싶은 말씀만 골라서 듣는 사람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만 성장하겠지요. 신앙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에는 열심인데,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면,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온전히 받으실 만한 산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삶입니다.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것은 듣기에 괴로운 말씀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런 말씀은 얼마나 듣기 괴롭겠습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시 19:7)고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The law of the LORD is perfect.’라고 되어 있습니다. Perfect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거슬리고 괴로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perfect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괴롭게 느껴지는 순간은 나에게 가장 유익한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비뚤어지고 병든 나를 교정하고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찬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순간이 괴롭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고 합니다. 괴로운 말씀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크게 실패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슥 7:9-11).
귀에 거슬리고 듣기 괴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싫어한다면, 우리도 이스라엘의 실패를 답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오히려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해 보십시오. 그것은 나를 포기하는 일이고,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이고, 내가 창피를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복종시킬 때, 내가 죽고 하나님의 말씀이 살 때, 불편하고 괴롭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식입니다.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고 매우 근심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지금까지 믿고 따르던 스승이 붙잡혀 죽게 된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붙잡혀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분이었습니다. 이분만이 이스라엘의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붙잡혀 죽는다고 하니까 근심할 수밖에요.
그런데 제자들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뭔가 하면 제 삼일에 살아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죽는다는 말에만 사로잡혀가지고 근심하고 혼란스러워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하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했냐고 물어보면, 죽는다는 말만 했다고 할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렇게 근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어떻게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귀도 자기가 원하는 것만 선택해서 듣는 기능이 있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말을 들었는데, 나중에 하는 말들을 보면 다 다릅니다. 그렇게 들은 말이 몇 차례 더 옮겨지다 보면 전혀 다른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없던 일도 있던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어쨌든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 언어생활에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사시던 곳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시고, 사역의 본거지로 삼으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 가버나움 출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집을 떠나 여행을 한 후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베드로를 기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뭔가 하면 세금고지서입니다.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를 찾아왔다고 했는데, 이 반 세겔이란 성전세입니다. 로마에 바치는 세금이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의 자체적 세금입니다. 출애굽기 30장에 이 성전세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후에,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조사를 하면서 숫자에 포함된 사람은 누구나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액수는 반 세겔로 정해졌는데, 그 돈을 자기의 목숨 값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그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목숨 값을 드릴 때, 부자라고 더 내서도 안 되고 가난하다고 해서 덜 내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목숨은 똑같다는 뜻입니다. 누구 목숨은 더 귀하고 누구 목숨은 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목숨은 귀하게 취급됩니다. 반면에 가난하고 천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목숨도 천하게 취급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숨을 똑같이 귀하게 보십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귀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거둔 생명의 속전은 특별히 회막의 봉사를 위하여 써야 했습니다. 나중에 성전이 세워진 후에는 성전의 유지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겠지요. 그래서 성전세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가장 귀중한 목숨 값을 거두었다면, 그 돈은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성전의 봉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목숨으로 바꾸어서 해야 할 만큼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반 세겔이면 예수님 당시의 가치로는 이틀 분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인구조사에는 20세 이상의 남자만 해당되기 때문에, 모든 성인 남자는 매년 유월절 즈음이 되면 이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성전세 걷는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너의 선생은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성전세를 베드로에게 받으러 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또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셔서 매우 근심하고 있던 참인데, 세금고지서까지 받고 나니 마음이 더욱 심란했습니다. 고기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일도 그만두고 예수님만 따라다니던 베드로로서는 그 세금 내는 일이 작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왜 이렇게 문제가 연달아 터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세까지 내겠다고 대답을 하고, 심란한 마음을 안고 베드로가 집으로 들어가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안고 눈물과 한숨을 짓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깊이 탄식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은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야 하느냐 내지 않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세상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지만 아들들은 세금을 면제받지 않느냐는 것인데, 아들이라고 해서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는 주체와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객체 사이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전세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의 봉샤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부과하신 세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고 성전세를 부과하시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성전세가 부과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신다고 대답한 베드로가 잘못한 것입니까? 가서 성전세 내기로 한 것을 취소하고, 성전세를 내지 않음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주장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러지 말자고 하십니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자고 하십니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하자는 단순한 의도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의 구속사역의 본질이 오해되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세를 낸다는 것은 율법의 규례를 따르는 일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따라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율법의 수여자로서 율법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그분은 또한 율법 아래로 나신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분은 율법을 주신 분이면서 또한 율법 아래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율법 위에만 계신 분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세를 내야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같은 주제 아래서 이해되는 이슈들이 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사람들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성전세 문제를 가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설명하시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성전세를 내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돈을 어디서 날 것인가가 또 문제가 되겠군요. 예수님은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가룟 유다를 불러 예수님의 성전세를 내라고 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담당하고 있는 재정은 예수님 일행의 복음전파 사역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돈에서 빼다가 자신의 성전세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대신에 특별한 방법으로 돈을 마련하시는데, 베드로에게 가서 낚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잡힌 고기 입을 열면 돈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셔서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지만, 나가서 낚시를 하는 베드로의 수고를 통해서 그 돈을 마련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협력(cooperation)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cooperation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신나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cooperation하실 것입니다. 나가서 낚시하라고 하시는데, ‘싫어요,’ ‘무슨 물고기 입에서 돈이 나오겠어요?’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cooperation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고기 입에 돈이 얼마가 들어 있을 거라고 하시는가 하면, 한 세겔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에이 참 예수님도, 기왕 하시려면 물고기 입에서 금화가 나오게 하셔서 제자들 전체의 세금도 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다 우리 인간의 욕심을 섞으면 이렇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세금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과 자신의 세금을 내야 했던 베드로에게는 꼭 필요한 액수의 돈이 주어진 것입니다. 거기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지, 좀 더 주시지 않고... 하는 생각은 아주 좋지 않은 결과로 흐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세금 걷는 사람들이 왜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님의 세금을 내라고 했을지, 여러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요구에 베드로는 자기가 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자기 세금 낼 돈도 없는 사람이 예수님의 세금을 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설령 자기 것은 못 내더라도 예수님의 것은 내야겠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결론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세금까지 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종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드려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가 날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체험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입을 열면
마 17:24-27 / 박지온 목사
오늘 "입을 열면" 이럴 때에, 얼른 시편 기자가 한 말이 생각나죠. '너희 입을 넓게 열라 그러면 채우리라!' 그런데 이 입은 사람 입이 아니고 무슨 입입니까? 고기 입입니다. 그런데 이 상당히 귀중한 뜻을 오늘 볼 수가 있어서, 여기 "입을 열면" 말씀에 제목을 삼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고기 입이나 우리 입이나 하나님 앞에서 열릴 때에 축복이 옵니다. 고기 입도 안 열리면 세겔이 나올 수 없어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을 이제는 믿음으로 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본문 내용이 세금 내는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복음이 바로 되면 율법은 저절로 따라온다!' 그래서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은 누리는 것이다!' 이번에 그 조직 신학을 강의하던 민병환 목사님이 그렇게 표현을 했어요. 맞는 말로 저도 역시 긍정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걸핏하면 뭐 '율법주의, 율법주의!' 그러는데, 율법주의라는 것은, 복음을 깨달으면 나올 수가 없어요. 그것은 율법주의라는 말은 복음 모를 때에 하는 이야기이고, 복음 깨달으면 율법주의가 아니고, 복음 깨닫게 되면 저절로 율법이 나오게 되고, 율법은 나온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은 누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그 열매가 전도로 맺혀진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복음 깨닫고 나서 율법이 안 나오면, 율법이 누려지지 못하면 전도라는 것이 나올 수 없어요. '당신 보니까, 예수 믿을 마음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 율법은 내가 노력하고, 애쓰고,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율법은 되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따라서 전도가 되어진다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바로 되면 현장은 규모로 바꾸어집니다. 규모로 바꾸어진다는 말이 지금 우리 율법, 율법이 오해되어서 규모라고 자꾸 말했는데, 그게 성경에는 율법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전도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해되어야 현장에 말씀이 성취됩니다. 그러니 결국은 여러분, 그 율법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행한 것이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완성이라 그랬습니다. 율법에 폐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보이게 되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사실이 바로 보여지게 되는 그곳에, 전도라는 것이 자연적인 열매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 세겔의 세금은 성전 세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유대인 성인이 되면,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 이 반 세겔! 반 세겔이라는 말이 아니고, 한 세겔의 반이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반 세겔을 내도록 유대인들에게 의무가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그 세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세금 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들이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겠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져서 올라오는 고기 입을 열면 그곳에 반 세겔이 나올 것이다! 이걸 그대로 했더니만, 그 반 세겔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야기죠. 그래서 이 반 세겔을 내는 유대인들의 세금은, 하나님의 집, 성전 유지를 위해서, 예배를 위해서 내는 세금입니다. 원래 이 배경이,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성전 자신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반 세겔의 유대인들이, 인간이 내는 세금을 사실 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 세금을 받으실 자리에 있지, 세금을 내는 자리에 있지 않다!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5절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죠.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겠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먼저, 먼저 되어야 되고, 먼저 알아야 되고, 먼저 확인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이다! 그렇게 말이 되죠. 그러나 조금 더 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 다음에 만물에 창조자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런 배경에, 모든 만물에 상속자이십니다! 만물을 누리고, 찬양 받으실 그런 말씀이죠. 그래서 이것이 되면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되어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죠.
그러나 주권이 해결되면서 따라오는 것이 뭐냐하면, 나와 여러분이 해야 될 책임도 따라온다는 것이, 저절로 여기에 연결되어집니다. 그 열매가 전도입니다. 여기에 여러분 '주권!' 그러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책임에 눈이 열리고, 책임이라는 것은 현장입니다. 내가 주권 속에, 현장에 들어가면, 여러분과 제가 해야될 책임이 자연적으로 보여집니다. 그 열매가 전도다!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말라기서 3장 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 전에 임하리니'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부분을 말씀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시다!' 그리고 또 바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3장 6절에는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했지만, 예수님은 뭐로 그랬습니까? 아들로, 상속받을 아들로 그렇게 히브리서에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시오, 예수님은 바로 성전이시오, 예수님은 바로 모든 창조물을 누리실 창조하실 뿐 아니라, 누리실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장 2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우리가 도저히 인간의 지혜로 이해가 안 되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창조 당시에는 성부로, 그 다음에 구속하실 당시에는 성자로, 주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이지, '성자만 일하셨다! 성자만 하셨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종말에는, 현재 여러분들이 예수께서 오신 후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다 합쳐서 종말이라 그럽니다. 종말 일에는 누구입니까? 성령으로! 그런데 여러분 창조할 당시에 성부로, 주로 엘로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죠. '하나님!' 그럴 때에, 하나님 홀로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배경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똑같이 누가 함께 했습니까? 성부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똑같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똑같이!
그러면 지금 이시기에 성령 하나님! 그럴 때에, 여러분에게 누구도 같이 있습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내 안에 계신다!' 그럴 때에, 누구도 내 안에 있습니까? 예수님도 내 안에, 누구도 내 안에 있습니까? 성령으로 내 안에, 이것이 이해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죽었다 깨어도 여러분 지혜로는 되는 게 아니에요. 삼위이면서도 또 하나입니다. 어떻게 세 개가 하나가 되느냐! 여러분 세 사람이 모이면 하나가 된다! 이건 말도 안되거든요. 그러나 각각 또 세 개입니다. 세 위가 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삼위를 건드리고, 삼위에 대해서 설명을 열심히 하려고 할수록, 이단이 되었다는 것이 이건 뭐 쭉 역사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설명을 하려고 아이들한테 많이 애를 썼죠. '전기 불을 봐라! 들어오면 빛이 되고, 또 들어오면 열이 되고, 또 들어오면 또 뭐가 됩니까...' 뭐 이래가지고, 그것은 양태 설이라고 삼위일체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성경대로 '삼위일체다! 믿어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가만히 있는 게 제일 낮습니다. 자꾸 말하면 점점 더 이단이 되고, 이상해지는 것이 삼위 일체 설입니다. 왜? 우리 입으로 말로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말로, 생각으로, 이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안다! 하나님 다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난 다 알았다! 다 되었다!' 여러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극히 부분적인 것 밖에 더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겸손하게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오신 그분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삼위로 내 안에 오시고 바로 그 분이 창조주요. 바로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신앙이 나온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되고, 누림도, 감사도, 인도도, 기쁨도, 누구를 통해서? 그 분! 우리가 기도도, 예배도, 전부 그분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와지지 않으면, 이걸 복음이라 안 그럽니까! 이 복음이 모든 문제 해결 자다라는 이 복음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해가 안되면 삶이 나올 수 없어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삶이 나온다는 것은 억지로 살아간다. 그래서 억지로 산다는 것은, 전부 위선이 될 수밖에 없죠. 그러니 삶이라는 것으로 누리면 되요. 여러분 그 복음에서 삶이라는 것은 누림입니다. 그러니 누림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뭐가 됩니까? 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뭐가 나오느냐? 위선이 나오는 겁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올 때 웃어야 되죠. 웃음이 안나오는데 억지로 웃으려고 하면 주름살만 껴요. 그러니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에 누림입니다. 우리가 먼저 뭐가 있느냐? 복음이 되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나와 여러분 안에 오셨고, 모든 문제 해결하셨다! 그 다음에 문제는 따라온다! 진짜 이 고백이 체험되고 이 일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이상 뭐가 나오느냐? 비로소 오해되지 않는 삶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오늘 17장 27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잘 정리를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복음이 되면 복음을 통해서 여러분과 제가 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그 복음을 통해서 산다는 것은 내가 노력하는 게 아니고 복음이 주체가 되어서, 복음에 의해서 살고, 복음을 위해서 살고, 복음 때문에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의해서 인도 받고, '복음에 의해서 인도 받는다!' 그럴 때에, 복음에 능력에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뭘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여러분 복음 모를 때에 율법주의가 나오고, 복음 모를 때에 율법이 나옵니다. 복음 모를 때에, '내 힘으로 뭘 하겠다!' 그게 율법이 되고, 인본주의가 되는 것이지, 복음을 알고 나오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그것은 누림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거룩하게 지낸다! 복음을 알면 거룩하게 지낼 수밖에 없도록 되는 겁니다. 뭐 예를 들어서, '참,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있다!' 말씀 받기 위해서 주일날 저절로 준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말씀 듣는 일을 기다리면 기쁨이 와요. 주일날 온다는 것이 기쁨이지, 여러분 올 때에, '아이고, 주일날 왔구나!' 찡그리면서 보얀 성경책 먼지 다 털고, 그래가지고 교회 온다! 그건 지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일날! '벌써, 주일날 됐느냐!' 새벽부터 준비한다 아닙니까! 그리고 오는 발걸음이 콧노래가 나와 야죠. 여기 딱 오는 순간 벌써 여러분 기쁨이 있고, 찬송 부를 때에 감사가 있고, 그리고 주일날 말씀들을 때에 너무 감사하고, 이것이 바로 주일날을 거룩하게 지낸다! 거룩이 지킨다기보다도, 주일날은 저절로 거룩한 나의 기쁨의 날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 되고 난 후에 저절로 따라오는 문제거든요.
이때부터 뭔가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하지 않는 삶이 나옵니다. 그러면 내게도 하나님은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나도 너도 오해되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 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상당히 이 말은 중요합니다. 뭐냐하면 우리가 가난하다! 그 다음에 어렵다! 고난이 온다! 이런 모든 문제는, 그러니 예수 믿고 난 후에 대번 오는 문제들이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떤 사람은 초 신자들 중에 교회 오면, 교회 오는 마침 그 날! 생전 안 오다가 한번 왔는데, 마침 그 날 도적이 들어 가지고 몽땅 가지고 갔다! 이게 바로 그런... 왜, 교회 왔는데 이 문제가 생기느냐! 교회 올수록 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교회 왔기 때문에 복 받았다!' 오해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 돈 몇 푼 주는 것으로 주시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격과 감사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데, 그 근원이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근원이 되어야 되는데, '교회 왔더니 복 받았다! 사업이 잘 되었더라!' 사업 잘 되는 것 그걸 보고 기뻐하면 안 되거든요. 오해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오해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니 어떤 면에서 과정 속에 이런 부분이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난 후에 오는 고난은, 또 오는 일들은, 안 되는 문제는 되어지는 일입니다. 생명에 중요한 핵심이 뭐냐? 바로 이 부분이에요. 여러분 어린 아이를 낳아놓고, 말하자면 생명이 바로 아이에게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아이는 계속해서 저지래합니다. 똥싸고 오줌싸고, 똥싸고 오줌싼다고 해서 안 되어지는 게 아니고, 똥싸고 오줌싸는 것이 되어지는 과정입니다. 만일 여러분 아이를 낳았다! 똥 안 싼다! 죽는 겁니다. 그건 안되어지는 것 아닙니까! 똥 싸는 게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하면, '똥싼다! 에이 내버려 버려라!' 그것이 이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안되어지는 것이 되어지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지금 안되어지고 있느냐? 되어지고 있다는 것이 생명입니다. 참 생명을 가진 것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받을수록, 어려움이 있을수록, 이상하게 집안에 문제 있을수록, 더 복음 앞으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죠. 이게 우리가 이상하게 생명의 원리입니다. 참 생명이 들어가면 이렇게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여러분 참 생명이 들어가면, 주일날 한번 와 가지고 도둑 들었다고 해서 그 다음에 '에이, 치워버려라! 안 나오겠다!' 그게 아닙니다. '아, 이건 또 희한한 게 틈타네!' 그러고 '이게 또 사단의 역사 하는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참 복음이 바로 깨달아 지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축복이 섞어질 것과 비교되어져서 그것을 더 중히 여기는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되어지는 과정에서, 생명의 역사 속에서, 이런 문제들이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고, 고난 당하는 문제가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때에 여러분 '되어지는 구나!' 이래되어야지, 이게 안되면 곤란하죠. 그래서 생명 주었다! 그때부터 안 되는 게 일입니다. 계속해서...
제가 요즘 희락이가 와있는데, 하여튼 오고 난 후부터 계속해서 우리 입에, '그러지 마라! 이리 온나!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그런다고 내어 던져 버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게 과정입니다. 되는 과정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아이들 보면서 농땡이 중에 농땡이요. 그때에 제일 어렵게 만들었던 아이들이, 그게 되어지는 과정이에요. 언제 보니까 벌써 커 가지고 점잖게, 전화 받을 때도 점잖게, '그래 너 아무개냐! 예!' 그러면 끊고 난 후에 웃습니다. 아이고 벌서 그놈이, 벌써 커 가지고 이 점잖더라! 전화를 받을 줄 안다!' 그게 되어지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중요하고, 축복된 역사가 되어지는 과정인데 안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는 이걸 깨달으면 되어진다는 사실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들이, 너무 절실한 문제죠. 전도 안 되어집니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이해가 되어야 되죠. 그래서 오해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 봉사도 지금 상당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교회 봉사가 2003년도에 우리 교회가 준비해야 됩니다. 뭔가 우리 그릇이 준비 안되고, 봉사에 준비가 안되면, 큰 교회를 맡겨 놓을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봉사하는 구체적인 것이 안 되어지면, 이게 문제가 어렵게 되거든요.
우선 보세요. 성가대 딱 왔다! '한 달에 100만원씩만 준다!' 그래보세요. 성가대 들어오려고 막 시험을 쳐도 힘들 겁니다. 여기 아마 우리 송현 교회 교인이라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싸매고 성가대 들어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가대 대장을 비롯해서 성가대 지휘자가 연초마다 시험 친다고, '누구를 떨구어내어야 될 것인가?' 이럴 겁니다. 그러면 누가 들어오느냐? 가짜만 다 들어온다! 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 중심이 되고, 그런 것은 안 받아야 되요. 완전히 봉사하고, 정말 하나님 바라볼 수 있는 이게 되었다! 그게 되어야 되는데, 만약에 성가대가 돈준다! 그것은 오해케 만드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늘 그런 이야기 안 합니까! 주일학교 얼마나 귀중한 교사들입니까!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다! 뭐 1억까지 줄 것도 없어요. '10만원만 준다!' 그래도 여러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주일날 여기 왔다! 여기에 뭐 100만원 준다, 할 것 없어요. 만원만 준다고 해도 대구시내 거지 때들 다 모입니다.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뭘 보느냐? 정말 예수는 그리스도,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는 참 생명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 왔으나 거들 떠도 안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 와서, 송현 교회 와서 '거들 떠도 안보더라!' 자신 있으니 거들 떠도 안 보지! 자신이 없으면, '굽신, 굽신 어서 옵쇼, 다음에 또 옵쇼!' 이러지, 뭐 거들 떠도 안보거든! '야, 이 교회 확실히 복음 있으니 거들 떠도 안 보는구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 이 축복된 역사가 여러분이 보셔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거들 떠도 보지 말라 그랬다 그래도, 또 뒤에 안내하는 집사님들이나 거들 떠도 안보고 이러지 말고... 지금 왜 이런 말하느냐! 이 금년도에 모든 이걸 해결해야 됩니다. 오는 사람도, 또 오시는 분들도 이 해결이 되어야 되죠.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은 이 축복의 역사! 엄청난 이 축복의 역사!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과 제게 십자가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로...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런 의미에서 참 복음에 눈이 열릴 때에 뭘 지고 가야 합니까? 십자가를 깨닫고 이해해야 되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2장 20절이 복음에 관문 아닙니까! 이 깨닫는 만큼 복음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을 통해서 옛사람은 죽고, 새롭게 복음을 통해서 되어지는 역사가 나올 때에, 비로소 여기에 모든 것이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칫 잘못하면 우리 자신부터 복음을 오해할 수 있어요. 복음을 통해서 '뭘 받는 것!' 그래서 '복음은 돈이다!' 오해할 수 있어요. 유대인들이 깨달은 것처럼, 여러분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게 이해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보면 욥도 이것 깨닫기까지 많은 과정을 안 거쳤습니까! 나중에는 뭡니까? 너무 너무 힘들어서 앞을 봐도 없고, 뒤를 봐도 없고, 왜? 다른 것을 보고 있으니까! 이 오해하고 있으니까! 이걸 깨닫기 위해서, 그래서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내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후부터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배나 엄청난 축복을 욥에게 부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습니까! 손이 짧습니까! 귀가 어둡습니까! 그런데도 왜, 안주십니까! 너무 오해하고 있으니까! 복음을 오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오해하고 있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신 이 축복과 은혜가 이해가 안되니까! 믿는 성도들이 늘 어렵고 힘든 과정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내용에서 이 사실들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 여러분 이 복음이 이해가 되고, 복음을 깨닫게 되면, 아무리 좀 이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상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을 하지 말아라! 조금 뭐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비판하지 마라! 그게 '내가 비판하지 않아야 되겠다!' 이건 율법이 되지만, 복음 깨닫게 되면 자연적으로 이것이 나와요. 비판하지 않는 삶을 뭡니까? 누리게 된다! 이걸 이해 하셔야 됩니다.
비판 안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화병에 걸려요. 말하고 싶은데, 말 안하고 있으면 오히려 병이 걸려요. 그렇지만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복음이 나를 인도해 갑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누린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죠. 그래서 교회 안에서 남을 상하게 한다기보다, 뭐 서로 서로간 갈등하게 만들고, 좋은 말이라도 서로 서로간 뭔가 이렇게 나누어지게 만드는 일들은, 다 그것은 속는 이야기들입니다. 속는 일이고, 그것은 이상한 이야기가 되죠.
고린도 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참 복음을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아주 가난한 자 중에 가난한 자로 나왔습니다. 그게 뭡니까? 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동방 박사가 알고, 반드시 왕궁에 있을 것이다라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하니까!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별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가장 가난한 자들도 그렇게 나오지 않는데, 구유에 오셔서, 그러니까 마구간에서, 더군다나 소죽 통에, 구유에 그러는 것보다는 소죽 통에, 우리는 말이 없으니까 말죽통인데, 소죽 통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움푹 패여 있으니까, 거기다가 보자기를 깔고 거기 뉘이셨죠. 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참 복음이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바로 이해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했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가난하심이요. 너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오셨다!' 그 말씀이 참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누가복음 8장 3절에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시고, 돈을 마음대로 만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남자가 아닌 주로 여기 보면 여인들입니다. 여인들의 뭐로 통해서? 헌금을 통해서, 그 헌금가지고 쓰셨습니다.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면 특별한 경비를, 할 수 없이 특별한 경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오병이어' 라든가, '칠병이어' 라든가, 4000명, 5000명 먹이시는 그런 일들은, 그 다음에 다른 여러 가지 일들... 그런 일들은 기적들을 일으켜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면서 교훈을 해 나갔던 사실들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과 제가 이런 가난함으로 이 땅에 오셨고, 이런 연약함으로 오셨지만, 그 분은 본래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이것을, 앞에 부분이 이해가게 될 때에 그때부터 여러분과 제가 삶이란 것이 이해가 됩니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앞에 부분이 이해가 될 때에,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뭔가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이제 이것이 구체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전능하심은 물고기 입에 성전 세를 넣어 두셨습니다. 이 전능하심인데 아주 사소한 겁니다. 이 말씀을 잘 오해 없도록 하셔야 됩니다. 그는 전능하시지만, 물고기 입을 창고로 삼았습니다. 물고기 입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도 창고로 삼았다는 것은, 하나의 비사적인 이야기지만, 여러분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참 복음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고, 확실하게 알면 하나님은 물고기 입 속에도 기초적인 의무를 감당할 세겔을 준비해 두셨다 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 복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상상지도 못할 곳에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탈출구가, 말하자면 해결점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기도했다고 해서 이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기도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해결점이 나옵니다. 여기 기도했는데 이쪽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것을 기도했는데, 큰 게 나왔다!' 아닙니다. 보잘것없는 곳에서도 큰 문제가 해결됩니다. 심지어는 여기서 뭐냐? 아주 보잘것없는 것까지도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나옵니다. 전능하심이 이해가 안되면 그게 안 나오죠.
여러분 뭔가 바느질 하다가 바늘이 떨어져 버렸다. 보통 찾잖아요. 찾지만 전능하심이 이해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 바늘 찾게 해 주옵소서!' 옆에서 보다가 '야, 별걸 다 기도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삶이 나온다니까요. 이런 부분이 많은 경우 체험되지 않습니까! 이 사실이 구체화 될 때에 여기에서 우리도 알지 못하게 엄청난 기적이 나온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삶과 생활에 해결이, 말하자면 문제가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게 풀려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만물의 여호와 시라는 증거가, 적고 큰 사건 속에서 다시 말하면, 물고기 입 속에서 이해가 됐다!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이해가 될 때에 비로소 물고기 입 속에서 반 세겔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아니면 받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지금 현재 우리가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게 안 되어서 그래요. 왜? 기도가 안되어요. 물고기 입에서 반 세겔이 나온다는 이 믿음이 안되어요. 그러니까, 아예 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 아예 안 하는 것이죠. 문제 생겼다. 죽도록 땀흘리고, 그 다음에 절대로 하나님 안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전부 뭔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과 연결되어 진다는 부분을 잘 보셔야 됩니다.
시편 8편 6절에 보면,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우리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전능자이신 것을 알게 될 때에, 모든 것을 그 발아래 두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은, 이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이해되는 동시에 모든 것이 해결되어진다! 이 말씀을 잘 붙잡아야 됩니다. 이 부분이 간과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는 것은, 그리고 이것을 이룬다는 것은, 이것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합니다. 그걸 가지고 우리가 누린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누린다는 것이 앞에 부분이 안 되는데, 누린다!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그것은 외식입니다.
이때부터 여러분 아실 것은, 주일날 말씀이 임했다! 말씀이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부터 전능자의 말씀이기 때문에 뭐가 됩니까? 구체적으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여러분 한 주간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에, 말씀이 성취된다! 그게 바로 누리는 것 아닙니까! 이 앞에 부분이 안되면 말씀이 나왔다! 그건 뭐 박 목사가 준비해 나온 말이요, 박 목사가 갖고 있는 어떤 것에서 나온 말이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요, 전능자의 말씀이요, 성취될 말씀이라고 믿어지게 될 때에 뭐가 나옵니까? 행동이 나옵니다. 말씀을 붙잡고 구체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음주에 오실 때는 마태복음 한 권을 한번 읽고 오시는 것이 좋겠다! 적어도 마태복음 지금 17장하고 있거든요. 다음 18장, 19장... 그래서 적어도 10장부터 20장까지라도 읽고 오셔야 되겠다. 그래서 숙제를 낼께요. 다음주에는 10장부터 20장까지 숙제입니다. 한 권 다 읽으면 더 좋고요. 내가 10장부터 20장까지는 숙제입니다. 내가 강단에 서서, '다 읽은 분들 손들어 보세요!' 한번 물을 거예요. 워낙 말씀을 안 읽으니까!
그 다음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붙잡고 뭐합니까? 행동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절대로 말씀 붙잡고 행동할 필요가 없어요.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 체험되어져야 되고, 이 축복이 사실적으로 와져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말씀 붙잡고 행동하게 되고,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말씀을 붙잡고 행동하기만 하면 물고기 입에서 반 세겔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역사 아닙니까! 이게 바로 성경이 약속하는 여러분과 제의 약속입니다.
보잘것없는데서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더니 일이 풀리기 시작해요.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한번, 두 번 체험되면요, 그 다음부터는 걱정할래야 걱정할게 없어지는 것이죠. 그게 안되니까 자꾸 걱정을 하게 되고, 염려가 나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명령을 지킬 때에, 물고기가 동전을 물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주의 명령을 따라 갈 때에, 물고기가 돈을 물고 올라오더라 그랬습니다. 이 말을 또 잘못이해하면, 낚시 들고 또 밖에 나가서 '주여, 합니다!' 그러고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안 그랬습니까! '앉은뱅이 일으켰다 그랬는데, 나는 왜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내게도 은혜 주옵소서!' 앉은뱅이 붙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안되고, 한쪽 귀퉁이에 가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한다! 앉은뱅이야, 일어나라!' 얼마나 잡아당겼던지 팔이 빠져버렸다! 그래요. 그러니 그분이 한국에서는 전무후무한, 지금도 그런 분이 없어요. 신유에 병 고치는 은사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이 말씀 붙잡고, 낚시 던져서 '물고기야 동전 물고 오너라!' 행동할 수 있는 단순한 마음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킬 겁니다. '아이고, 유치한 소리하지 마라!' 이래서 죽어도 안 하지. 여기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그곳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시겠다! 준비하실 때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주 우리가 상상밖에 방법으로 준비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물고기 입에다가 동전을 넣어 놓았습니다. 그것으로 준비하셨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9편 11절에 보면,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말씀 붙잡고 말씀으로 나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안 된다 안 된다 말씀 붙잡고 하느냐? 헛되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면 항상 물고기를 낚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그 물고기 속에 준비된 하나님의 축복에 손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오늘 약속한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주의 할 것이 있어요. 주의 할 것이 뭐냐하면, 딱 맞게 주십니다! 절대로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랬습니다. 성전 세는 반 세겔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아마 다른 제자들은 다른 지역에서 아마 낸 것 같아요. 예수님과 베드로에게 성전 세는 한 세겔 밖에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물고기 입에서 나온 것은 딱 맞게 한 세겔만 딱 나왔어요. 예수님과 제자가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은 동전 한 닢으로 한 자루 만드실 수 있습니다. 아니 두 자루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예수님은 물고기 입에서 동전 20개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필요한 딱 한 세겔! 베드로와 예수님께 의무를 행할 수 있는, 그것도 먹고 마시는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의무를 행하시는 딱 필요한 한 세겔 이상 더 이상 주시지 않았다!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여러분 필요를 채우시지,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가장 기도에 그물이 뭐냐? 또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누림에 대한 그물이 뭐냐? 욕심과 다른 동기가 가장 방해합니다. 정말 여러분과 제게 솔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하나님은 채우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1년 먹을 양식을 달라 하지 않고 뭐라 그랬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저 광야에서도 매일 매일!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광야에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만나를 주신 것 너무 감사한 은혜입니다. 만약에 광야에 1년 먹을 양식 만나를 한꺼번에 다 주었다. 큰일납니다. 이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그러면 모래땅에 사람 죽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딱 눈을 뜨면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그것도 운동도 적당히 하라고... 만나를 딱 먹을 수 있는 양만큼, 그것도 욕심을 내어서 가지고 오면 뭐가 됩니까? 하루 밤만 지나면 벌레가 다, 썩어져 버리고 딱 먹을 있도록, 일용할 양식을 필요한 부분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여러분 오늘 이 사실을 조금 붙잡으면 여러분 오늘 먹을게 있고, 오늘 입을 것이 있고, 오늘 내가 교회 왔을 때에 하나님 앞에, '주여, 오늘 내게 필요를 채워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러면 행복해 진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 내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앞으로 모든 것 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다 내 것입니다. 여기에 일이 이루어지는 거죠. 이 사실을 바로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2,500만이 넘는다고 그래요. 1달러면 얼마입니까? 우리 돈으로 요즘 1,200원 까지도 안 되죠. 그런데 여러분과 저는 얼마입니까? 아무리 못살아도 한 달에 10만원가지고 사는 사람 없죠. 한 달에 5만원가지고 사는 사람 없죠. 1달려 보다 훨씬 많은... 그래서 여러분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은, 우리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 빈곤이지, 밥 못 먹어서 못 사는 게 아니거든요. 너무 밥을 많이 먹어 가지고 보리밥 먹으려고 야단하잖아요. 너무 밥 많이 먹어 가지고, 옛날에 등겨 먹던 시절을 생각해서 현미 먹으려고 그러고, 또 요즘은 등겨를 갈아 가지고 마시고 안 그렇습니까! 옛날에 그 등겨 떡을 먹고 안 그랬습니까! 혹시 여러분들 젊은 사람들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제 나이 또래면 등겨 떡 많이 먹었어요. 그것도 못 먹어 가지고 송구 벗겨 가지고 송구 떡 먹고, 그걸 송구라 그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오늘에 먹고 마시는 축복! 오늘에 만족하게 하셨다! '한날에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하나님께 전 인생을 맡기고 나갈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 이해가 될 때에, '염려, 걱정, 근심!' 나올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여기서부터 뭐가 나옵니까? 그 다음에 누림이라는 것이 나오고, 누림이라는 것이 나오면 그때부터 뭐냐? 여러분 기적의 역사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이 사도행전 4장 35절에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그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다! 저것이 필요하다!' 그릇입니다. 그릇대로, 여러분 그릇대로, 그릇에 필요한대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한다!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건축하는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를 살려라!' 하나님의 필요입니다. 마음은 좁아 터져 가지고 막 요만한 것도 못 놔두고, '복음 전파하라!' 이것은 절대로 안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성전 건축합니다! 내게 뭘 주옵소서!' 주기는커녕 있는 것도 뺏어 버립니다. 여러분 그릇입니다.
앞으로 성전 건축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음을 넓혀야 됩니다. 정말 여기 사도행전에 보면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복음이 되었다! 이게 나오는 겁니다. 이때부터 뭐냐? 봉사다! 헌신이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안되면 나 혼자, 나의 것, 어느 때보다도 강한 것이 교회 안에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그릇준비가 되어진다! 그러면 그때부터 진실로 너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신 우리 주님의 역사! 이게 이해가 되면 그때부터 뭐냐? 내가 헌신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그 다음에 봉사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여러분 이게 성가대 앉아서 한다! 훨씬 힘든 일이거든, 아침 일찍 와야지, 또 노래 불러야지, 감기 걸려도 노래 불러야지, 소리안내면 안 좋다 그러지, 또 지휘자 우리 집사님 얼마나 까다로운지! 안 된다 그러지, 그러면 성도 나지! 여러분 문제는 정말 하나님의 약속, 복음에 분명한 역사 나오면, 그때부터 여러분들에게 그릇만큼 필요가 나옵니다. 내가 뭘 해야 될 것인가? 봉사만큼 필요가 나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뭐가 나옵니까? 채우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채우시는 역사가 인색하냐? 성경은 '흔들고, 누르고, 넘치도록 채워 주시리라!' 죽어도 안 되는데, 그릇 꽁꽁 다 덮어놓고, 도대체 안 되는데, 거기에 맨 날 흔들고 넘쳐... '아, 나 흔들고 넘친다!' 그러지, 오늘 하나님의 약속을 잘 붙들어야 됩니다. 복음을 깨닫고, 흔들고 넘치도록 채운다는 것은 누림 속에서 나옵니다. 조금만 열고 우리 그릇을 조금만 넓히면,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넘치는 역사! 그래서 조금만 주님 앞에 역사 이루어지게 되면, 전혀 상상치도 못할 물고기 입에서, 우리가 물고기 입만 열면, 여기서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도저히 상상도 못할 곳에 입만 열면, 나가기만 하면, 헌신만 하면, 하나님이 채우시리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