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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무림 고수들의 만남
구양봉은 형님을 찾기 위해 중원으로 향했다. 형님을 찾으면 자연히 모용쟁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고 밤늦게 유숙하면서 드디어 임안에 도착했다.
그는 임안에 도착한 후 형님이 있을 만한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그러나 객점이란 객점은 거의 훑다시피 하고 몇몇 무술관까지 살펴보았으나 형님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형님이 임안에 있지 않고 종남산에 가서 그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과 무예를 겨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구음진경》을 얻기 전에는 대 사막으로 돌아갈 리가 없으므로 형님을 찾으려
면 먼저 왕중양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종남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가다가 그는 짬짬이 자신의 합마공을 점검해 보곤 했다. 다행히도 그는 신독행이 60년이나 닦은 내공을 흡수한 터라 그것을 익히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과거와 달랐으며 어제의 구양봉이 아니었다. 오늘의 구양봉은 노독물의 제자로서 이 세상의 모든 원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악인인 것이다.
그는 사부 앞에서 자기의 사형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지만 거친 사나이 석초수 하나를 죽였을 뿐 제갈정, 속문성 그리고 그 과묵한 두 사형과 음험하고 지독한 사숙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사부에게 그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든 눈에 띄기만 하면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으리라고 구양봉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종남산에 당도한 구양봉은 산 아래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생각을 더듬었다.
'사부님께서는 임종하실 때 《구음진경》은 확실한 기서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형님 역시 그것을 찾고 있는데 내가 어찌 형님과 쟁탈전을 벌일 수 있으랴. 하지만 남이 그 책을 얻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더구나 왕중양이 남에게 《구음진경》을 빼앗겼을 정도라면 그만큼 무예가 신통치 못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 두려울 게 뭐겠는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그들도 하나같이 《구음진경》을 얻기 위해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을 고쳤다.
'보아하니 왕중양의 《구음진경》은 빼앗긴 게 아니야. 만일 그가 그 책을 빼앗겼다면 종남산이 이처럼 북적거릴 리가 없어.'
구양봉은 왕중양이 천하의기(天下義旗)의 수령이며, 이렇듯 무림 인물들이 오가는 까닭이 결코 《구음진경》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금과 결전을 벌여 대송강산(大宋江山)을 되찾을지 왕중양과 상론하기 위해서 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은 산 아래에서 이틀쯤 묵으며 동정을 살피다가 밤을 틈타 산에 뛰어들었다.
그는 나는 듯이 산을 올라 한 시간도 채 안 걸려서 중양궁 밖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암석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과거의 그 서생이 아니라 봉황력과 합마공이라는 신비한 기술을 가진데다 외공과 내공에 있어서도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암석 위에 앉아 중양궁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궁 안에 들어가 왕중양을 탐지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몸을 날
려 중양궁으로 들어갔다.
중양궁을 지키던 몇몇 사람들은 날아가는 구양봉의 그림자가 어찌나 빠른지 누구 하나 제대로 보아 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는 듯하자 떠들어대기 시작하더니 더는 아무런 기척이 없자 이내 조용해졌다.
중양궁 안에 들어온 구양봉은 큰 도관(道館)이 바로 왕중양의 거처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곳저곳 뒤지다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별채로 다가갔다. 그는 손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집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 앉은 사람이 의심할 바 없이 왕중양인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그 앞에서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왕중양의 제자인 마옥과 구처기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옥아, 금의 군대가 강을 건넌 후에 계속 밀고 내려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마옥이 대답했다.
"사부님, 금군의 세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고 조정의 관원들이라곤 모두 제 잇속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금군이 공격해 올 때 누가 앞에 나서려 하겠습니까? 그자들은 금인(金印)을 옷소매에 넣고 도망가지 않으면 금인을 걸어 둔 채 종적을 감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탐관 허화정(許華亭)이란 놈은 금인을 옷소매에 넣고 달아났는데 변경에서 이 금인이 팔렸다고 합니다. 개자식이 어
찌나 제멋대로 노는지 나와 사제 두 사람은 그 놈을 죽일 생각을 다 했을 정돕니다."
옆에 앉아 있던 성미 급한 구처기가 큰소리로 덧붙였다.
"사부님, 사형께서 절 말리지 않았다면 그 놈은 벌써 귀신이 됐을 겁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대송강산이 피폐해지고 인심이 흩어지게 된 건 전적으로 그런 개 같은 놈들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그 놈을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그런 자들이 생겨나게 될 텐데 왜 그 놈을 죽여 버리지 못했느냐?"
구처기가 대답했다.
"사부님, 제가 그 놈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죽여 버리면 되옵니다."
"처기야, 네가 가서 그 놈을 죽이고 그 놈의 머리를 금인과 함께 깃대에 매달아 대송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이런 탐관들이 종국에는 어찌 되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
왕중양의 명령에 구처기는 얼른 내일이라도 당장 이 일을 처리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나의 사부님을 노독물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고 악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왕중양도 사람을 죽이기는 마찬가지구나. 도사의 손에서 피비린내가 나니……. 세상이 이러한데 천하의 선인과 악인을 어찌 똑똑히 가려 볼 수 있겠는가? 대송강산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대송의 강산은 그 우매한 군주의 것이다. 그 놈이 기개를 잃어버렸는 데
사람을 시켜 그 놈을 돕게 하다니. 왕은 날마다 주색에 빠져 나라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고 신하라는 것들은 모두 제 잇속만 챙기려 드니 이처럼 썩을 수밖에. 그런데 그걸 어쩌겠다는 말인가?'
왕중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들으니 일부 금의 군대들이 종남산에 오려고 했다더구나. 그들은 대부분이 무림 사람들이야. 너희들은 행여라도 금나라 사람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이미 문하의 제자들에게 다 말해 놓아 모두들 조심하고 있으니 그런 불상사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마옥이 대답했다.
"그럼 됐다. 너희들도 지쳤을 텐데 가서 쉬도록 해라."
왕중양의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조용히 물러났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은근히 기뻤다. 이제 왕중양이 혼자 남았으니 《구음진경》을 손에 넣기가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그는 당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행동을 멈추었다.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는 왕중양의 행동을 좀더 지켜 보기로 했다. 그는 분명 《구음진경》을 깊이 감추어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뛰어들었다간 그것을 손에 넣기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양봉은 마음을 신중히 하고 왕중양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창문을 열고 교교한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이 오래 살기를 원하노니, 천리 길을 그대와 같이하며 월색을 감상하리……."
구양봉은 그가 읊은 것이 당대의 대문인 소식(蘇軾)의 시구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네 놈도 수사전진(修士全眞 ; 도사)이거늘 어찌 욕심이 그리 많단 말이냐?'
이때 왕중양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급히 밖으로 나갔다. 구양봉은 그가 《구음진경》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되어 내심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여럿이면 소란스러운 일이 많은 법이라 《구음진경》을 집에 두지 않고 어느 비밀 동굴에 숨겨 둔 채 거기서 무예를 연마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만일 그렇다면 너 왕중양은 오늘 내 손에 죽게 된 거다.'
구양봉은 왕중양의 뒤를 쫓아 뒷산에 이르렀다.
왕중양은 커다란 묘 앞에 멈춰 섰다. 뒤에 숨어 서서 묘지의 비문을 본 구앙봉은 생각했다.
'그래, 이 놈은 이곳에서 《구음진경》의 무예를 배우는 게 틀림없어. 무예를 연마하는데 공동 묘지만큼 조용한 장소는 없지.'
그런데 갑자기 왕중양이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구양봉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왕중양의 무예가 놀랍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리지르는 걸 들으니 실로 용이 큰 연못에서 울부짖고 봉이 구천(九天)에서 날갯짓 하는 소리 같구나.'
그 소리는 실로 대단하여 계곡 사이를 메아리치면서 오랫동안 사라질 줄을 몰랐다. 구양봉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왕중양이 무예나 익힐 일이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묘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그제야 깨달았다. 왕중양은 묘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르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자기가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겠으니 문을 열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온 사람을 보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25, 6세쯤 되는 젊은 여인이 제집 뜨락에서 산보라도 하듯이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왕중양 앞으로
다가와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왕중양……, 당신이군요?"
왕중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또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왕중양, 당신은 명도 그다지 길지 못하면서 어찌 이다지도 몸을 돌보지 않나요? 그래, 천하 대사가 당신을 이토록 노심초사하게 만든단 말인가요?"
왕중양이 그 말에는 대꾸를 않고 안부부터 물었다.
"조영, 잘 있었소?"
여인이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조영이라, 당신이 날 그렇게 불러요? 참 듣기 좋은데요. 전에 는 날 어떻게 불렀죠? 임 시주라고 부르지 않았나요?"
왕중양은 그녀가 중양궁 앞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일속과 구양적, 두 사람과 무례를 겨루고 있을 때 임조영이 나타나자 그가 그녀에게 매우 공손히 임 시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왕중양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임조영이 그 일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조영, 당신에게 할말이 있어 왔소. 이 묘지에서 떠나는 게 좋겠소. 이곳은 내가 있던 곳이지만 그땐 내가 홧김에 그리 했던 것이고 또 혈기가 넘쳐 바보짓을 한 게 아니겠소? 다른 곳으로 가시오. 내가 당신이 거처할 장소를 마련해 주겠소. 고분은 습기가 많아 당신한테 좋은 점이 없을 거요."
임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중양 진인의 성의만은 알 만해요. 하지만 중양 진인이 건망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이 묘지는 당신 것이었지만 당신이 무예를 겨루어 나한테 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내 것이 된 거예요. 난 이곳에서 살겠어요. 내가 살기 싫으면 그때 떠나면 되는 거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보아하니 왕중양과 관계가 아주 깊은 사람 같군. 난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 대는 여자는 세상에 모용쟁 한 사람뿐인줄 알았더니 여기에 모용쟁 같은 한심한 여자가 또 한 사람 있었구만. 여자가 왕중양 앞에서 저렇듯 기고만장한 것은 정말 자기에게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일까?'
이때 임조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왕중양, 내가 당신을 오라고 한 건 당신과 이런 한담이나 하자는 게 아니에요."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왕중양, 당신의 이 묘는 아주 좋은 곳이에요. 난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우선 여기서 살다가 죽게 되면 사람을 불러 이곳에 내 시체를 매장하게 하는 거예요. 난 이 묘에 관을 두 개 갖다 놓겠어요. 내가 죽게 되면 제자를 시켜 나를 관에 넣게 할 거예요. 좋은 생각 같지 않아요?"
왕중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임조영이 이렇게 말하니 그는 할말이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왕중양은 착잡한 심정으로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자기만 아니었어도 오늘날 그녀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때 왕중양은 인마를 이끌고 강호를 넘나들었었다. 그것은 금의 군대가 중원에 쳐들어와 마을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살육하므로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금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첫 싸움은 그의 승리로 끝났고 중원의 의병들은 모두 왕중양을 높이 추대하였다. 그는 의병들을 거느리고 금의 군대와 수차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금의 병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의군은 점차 열세에 몰
리기 시작했고,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한 탓에 연거푸 패전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왕중양은 모함을 받아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됐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보니 의군은 뿔뿔이 흩어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크게 자책과 회의를 느껴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이 옛 무덤에 틀어박혀 묘지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으려 했으며 스스로 '살아 있는 죽은 사람[활사인(活死人)
]'이라 칭하였다. 어느 날 임조영이 찾아와 그에게 무예를 겨루자고 청했다. 임조영은 만일 자신이 지게 되면 자결하고 왕중양이 지게 되면 이 활사인 묘를 자기가 차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예 시합을 앞두고 임조영은 산 위에 있는 큰 바위에 여덟 구절로 된 시를 새겼다.
자방은 진을 멸할 뜻을 품었건만
한때는 다리 밑으로 기어 나가야 했고
한이 이 세상에 일어선 후에야
하늘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네
적송(赤松)을 동무하여 빈들거리고
무예를 배우고는 뿌리치고 가 버렸지만
뛰어난 사람과 뛰어난 책을
조물주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더라.
이 여덟 구절의 시는 왕중양을 두고 쓴 것이었다. 시합에서 임조영은 왕중양에게 두 사람이 각자 바위를 골라 글자를 새기자고 했다. 임조영은 손가락 하나로 이 큰 돌에다 여덟 구절이나 되는 시를 새겼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석공이 정으로 쪼은 것처럼 정교했다. 이를 본 왕중양은 깜짝 놀라 당장에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했다. 활사인 묘가 임조영에게 넘어오게 된 경위는 바로 이
러했다.
"조영, 내가 당신을 찾은 건 당신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오. 내 보기에 이 묘는 습기가 너무 많은 것 같소. 고집은 그만 부리고 여기서 나왔으면 하오."
임조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양 진인, 당신은 워낙 이곳에서 잘 지내지 않았어요? 나는 이제야 이곳이 좋은 줄 알게 되었단 말이에요. 난 이곳에 있는 게 아주 좋아요. 당신은 내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왕중양은 할말이 없어졌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그는 임조영이 줄곧 자기를 연모해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임조영을 좋아했지만 그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에서 겪을 풍파와 위험을 생각하니 임조영을 데려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을 천하의 큰 영웅이 되려는 생각만 하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조영, 내가 당신을 찾았소, 아니면 당신이 날 오라고 한 거요?"
왕중양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매사에 분명한 걸 좋아했다. 이번 일 역시 그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임조영은 그의 물음에 발칵 화를 내며 쌀쌀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오라고 했지요. 내가 '옥녀심경'이란 무예를 새로 닦았는데 당신과 한 번 겨뤄 보고 싶어서예요."
왕중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영, 난 정말로 《구음진경》이란 책을 얻었소. 이 책은 기서인 데 난 그 책에 기재된 무예를 다 닦았소. 그건 모두 기묘하기 이를 데 없소……."
왕중양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기재된 무예는 진정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오."
임조영이 여전히 쌀쌀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왕중양, 당신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 그 《구음진경》이란 책은 누가 썼다던가요? 책을 써내는 사람들이 신선이야 아니겠지요?"
"신선은 아니지만 그분은 확실히 기인이지요. 그분은 대송조의 도종 황제 때 사람으로 황상이라 부르오. 그분은……."
임조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꼬리를 낚아챘다.
"됐어요, 됐다구요. 당신은 또 그가 《만수도장》인지 뭔지를 수정하던 일을 끄집어내려는 게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그 일을 입이 닳도록 말했어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들한테는 이야기해 주지 않고 이 야밤 삼경에 쓸데없이 날 붙들고 이러는 건가요?"
왕중양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난 당신과 말다툼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당신이 '옥녀심경'을 다 익혔다고 하기에 한 수 배우러 온 것뿐이오."
"그런가요?"
임조영은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왕중양, 난 당신을 겸손한 군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신도 호남아였군요. 난 당신이 마음속으로라도 날 이해하고 정분도 좀 있는 줄 알았어요. 이 깊은 밤에 이렇게 와 주신 것도 날 생각하는 마음에서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당신은 소위 그 대사라는 것을 다 치른 다음에야 와서, 결국 한다는 말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거군요. 보아하니 내가 공연히 속을 태운 것이로군요. 당신 같은 사람
을 두고 괜한 속을 태운 거예요.'
그녀는 생각할 수록 설움에 겨워 눈물을 홀리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미처 그녀의 심증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조영, 몸이 불편한 모양인데 난 돌아가겠소. 후에 다시 와서 무예에 대해 의논하기로 합시다."
임조영은 얼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의 호의에 대해선 알 만해요. 오늘 당신에게 나의 '옥녀심경'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전 당신한테 진짜로 져보고 싶어요."
워낙 전번의 시합도 임조영이 주장해 벌인 것이었다. 그녀가 암석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기자 왕중양이 선뜻 패배를 인정했던 진짜 이유는 그가 임조영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지게 되면 그녀는 약속대로 당장 자결해 버릴 게 분명했던 것이다. 그가 어찌 임조영이 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신선이 왔다 하더라도 무쇠같이 단단한
암석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길 수는 없을 것이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임조영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지금 날 우습게 보고 있구나. 좋다. 네가 정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지금부터 또 한 가지 무예를 연마하여 너를 정식으로 격패시키고야 말 테다. 그때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보기로 하자.'
이리하여 그녀는 왕중양의 활사인 묘를 차지하고 앉아 새로운 검법을 생각해 냈던 것인데 오늘에야 그것을 겨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검법으로 전진교의 검법에 대항하여 왕중양을 꺾어 볼 심산이었다.
왕중양은 그녀의 이런 심사를 모르는 채 임조영에게 말했다.
"조영, 당신한테 그런 검법이 있다고 하니 나의 전진교의 검술을 가히 격파할 수 있겠소. 시합을 해 보지 않았으니 장담할 순 없겠지만 말이오."
임조영이 대답했다.
"좋아요. 겨뤄 보지요."
이들을 지켜 보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사부님한테서 무예를 배우고 합마공과 봉황력을 체득한 후로는 천하 무림들의 무예를 실로 어린애들 장난으로 여겨 왔다. 이 왕중양의 무예가 천하에 일품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는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그리고 저 여자 역시 겁없이 왕중양한테 덤벼드는 걸 보면 무공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야.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잘 보아야지, 도대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그의 마음은 한편으론 흥분이 되고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일신에 기공을 갖게 되긴 하였지만 왕중양과 임조영 같은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남산에 온 목적까지 깡그리 잊은 채 정신없이 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왕중양이 땅에서 나뭇가지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임조영과 마주서더니 말했다.
"조영, 덤비시오."
임조영도 내심 매우 흥분되었다. 그녀는 몇 년을 고심한 끝에 '옥녀심경'을 새롭게 심화시켰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검법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수법들은 모두 전진교 검술의 특징에 대처하여 고안한 것인데,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는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조영도 손에 검을 뽑아 들고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전진교의 검법이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고 봐요. 내가 꼭 당신의 전진교 검법을 물리치고 말 테니까요."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전진교 검법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검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개 아녀자가 내 전진교 검법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을걸? 내가 당신과의 오랜 정을 생각해서, 아니 당신에 대한 이 마음 때문에 당신이 너무 형편없이 참패당하지 않게 해 주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요.'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조영, 어서 칼을 뽑으시오."
임조영은 움직치지 않고 되레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이 출검해야 해요. 당신께 알려 드린다는 걸 깜빡했군요. 나의 검법은 전진교에 대처하는 것으로서 뒤에 손을 써서 제압하는 것이에요. 당신이 먼저 출검해야 나도 출검할 수 있어요. 당신 검법의 위력이 클수록 나의 검이 더욱 무섭고 강해지죠."
두 사람은 곁에서 구양봉이 지켜 보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채 싸움을 시작했다.
곧 두 개의 칼날이 정신없이 왔다갔다 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구양봉은 그것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깝짝 놀랐다. 보아하니 이 두 사람의 무예는 자기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왕중양의 무예는 추호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임조영은 이상하게도 칼을 뽑은 후로 줄곧 막기만 할뿐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손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조영, 내 보기에 당신은 싸우려는 투지가 조금도 없구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소."
임조영이 대꾸했다.
"왕중양, 저도 당신을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내가 말씀드렸지요? 당신의 전진교 검법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요. 괜히 큰소리치는 게 아니에요. 믿기지 않거든 보세요……."
임조영은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술 동작은 구양봉이 볼 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유운장에서 내공심법과 사문기공만을 배웠을 뿐으로 검도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검법이오? 우리 전진교 검법을 격파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한 것 같구려."
임조영이 가볍게 웃으며 쌀쌀하게 말했다.
"왕중양, 당신의 전진교 검법도 일반적인 것에 불과해요. 나의 '옥녀심경'은 바로 당신의 전진교 검법을 격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당신에게 72식의 검법이 있고 나한테는 '옥녀심경'이 있지요. 결국 당신의 모든 검법이 다 나한테 격파되었어요. 당신은 전진교 검법을 대단하다고 여길 테지만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임조영이 갑자기 손을 치켜 들어 검을 휘둘러 댔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마치 장하대천(長河大川)처럼 도도하였다.
왕중양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조영의 검법은 그 일초일식(一招一式)이 하나같이 중양검법을 격파하기 위한 것으로, 손을 쓸 때마다 전진교의 검법 동작을 철저히 막아내고 또 그것을 깡그리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임조영은 연이어 예닐곱 가지 동작을 보여 주었는데, 갈수록 그 동작이 더욱 절묘하여 그것을 보는 왕중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다 막혔다. 그는 임조영의 몇 가지 검법을 보고 나서 말했다.
"조영, 이것이 당신이 새로 만든 '옥녀심경'이란 무술이오?"
"맞아요. 당신 보기에 중양궁의 검법으로 나의 '옥녀심경'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나요?"
임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영, 조영……, 당신은 왜 이토록 정력을 낭비하는 거요? 나도 당신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하필 전진교를 적으로 삼을 게 뭐요? 전진교는 하나의 큰 교파로서 그것은 결코 무림에서 무예를 겨루자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소. 중요하게는 강포한 자를 제거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며 강산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오. 당신은 온통 전진교를 대처하는 데만 마음을 쏟고
있는데, 이게 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그가 자기의 무예를 보고 내심 두려워하는 줄로 착각하고 득의양양해졌다. 그녀가 '옥녀심경'을 연마한 기본 목적이 왕중양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탄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태도를 보자 여간 통쾌하지 않았다.
"중양, 당신이 보기에도 나의 '옥녀심경'은 만만치 않지요? 당신의 전진교 사람들 모두에게 이 무예를 보여 주고 싶군요. 내가 앞으로 제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애도 우의도관(羽衣道冠)을 걸친 당신의 제자들보다 더 무서울 거예요."
그녀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함빡 웃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기가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자기의 무예가 왕중양을 진심으로 감복시켰으며 이 세상에 자기한테 감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임조영은 기쁨에 젖어 계속해서 말했다.
"중양, 한 가지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중양, 오늘은 당신한테 꼭 말해야겠어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해야겠어요. 만일 오늘도 말하지 못한다면 난 다시는 당신한테 이런 말들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중양,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은가요? 당신은 한 여인이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하게 해야 하나요? 그래도 당신이 사낸데 이런 말은 당신 쪽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문득 화가 치밀어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중양, 나와 당신이…… 내가 아까 당신과 무예를 겨룬 건 다만 장난이었을 뿐이에요. 난 당신에게……."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교교한 달빛 아래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가 버렸다. 말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가 버린 것이다.
임조영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들고 있던 검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구양봉은 물론 왕중양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남모르는 사연이 있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모용 낭자만 천하에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중양의 저 여자도 마찬가지로군. 세상 여자들이란 다 저 모양인가? 이러니 사내들이 여자들한테 무슨 기대를 가질 수 있겠어?'
교교한 달빛과 싸늘한 대기 속에서 구양봉은 왕중양이 천천히 산꼭대기로 걸어가 큰 바위 곁에 앉는 것을 보았다. 구양봉은 그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 앉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거기에는 바람이 불고 있고 풍세도 대단하다는 것뿐이었다.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구양봉은 몸이 떨려 왔다. 왕중양은 저곳에 앉아 무엇을 하는 걸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
가?
왕중양은 지난날 자기와 임조영 간에 있었던 한 차례의 도박적인 시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도박에서 패배한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활사인 묘를 내준 것이다.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왕중양의 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가 갖은 애를 다 쓴 항금대사(抗金大事)는 성공하지 못했고 자기와 임조영 간의 일도 엉망이 되었다. 그는 손으로 바위를 쓸어만지다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에 만져지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임조영이 한 획 한 획 손가락으로 새긴 글자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결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조영은 글자를 써냈으며 왕중양은 그녀가 바위에 써 놓은 여덟 구절의 시를 분명히 보았었다.
왕중양은 그것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자방은 진을 멸할 뜻을 품었건만
한때는 다리 밑으로 기어 나가야 했고
한이 이 세상에 일어선 후에야
하늘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네.
왕중양은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임조영은 자기를 한조(漢朝)를 흥하게 한 개국 공신 장량(張良)에 비유했던 것이다. 장량은 유방(劉邦)을 보좌하여 5백 청사에 길이 남을 공로를 세웠으며, 그 도형서(圖形書)가 능연각(凌烟閣)에 그려져 실로 천하의 일대 미담으로 남아 있다. 임조영이 자기를 장자방에 비유한 것은 칭찬을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왕중양은 탄식했다.
'내가 어디 장자방 같은 사람인가? 나는 다만 패군지장이며 하나의 활사인일 따름이다. 격노한 임조영에 의해 옛 무덤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묘 속에 갇혀 있는 신세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한을 일으킨 공신 장량에 비할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왕중양이 암석을 만지면서 깊은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지레짐작했다.
'《구음진경》을 저 암석 밑에 숨겨 둔 게로구나. 왕중양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군. 《구음진경》을 저런 곳에다 감추다니.'
이때 맑은 피리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피리 소리는 어떤 고사(故事)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앞에 고요히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닷물은 어찌나 맑은지 그 속의 것들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다. 헤엄치는 물고기들, 춤추는 해초들, 그 밖에도 수많은 조용하고 한가로운 것들이 다 들여다보인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대해에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커다란 파도가 일더니 그 물결을 타고 바닷속에 잠겼던 시해(尸骸)들이 떠올라온다.
그 피리 소리는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점점 비통하게 만들어 물고기처럼 바닷속에 뛰어들고 싶게 했다.
왕중양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 몹시 괴로운 눈치였다. 그는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신을 모아 그 피리 소리에 대항하는 듯했다. 피리 소리는 여전히 멎지 않고 들려 왔다. 그 곡절 많고 가락의 변화가 잦은 피리 소리는 마치 왕중양과 싸워 그를 거꾸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싶었다.
구양봉도 음악에는 조예가 깊고 특히 아쟁에 솜씨가 있는지라 피리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내 손에 아쟁만 있다면 저 피리 소리와 맞춰 볼 수 있을 텐데. 저 피리 소리가 강한 선율을 표현할 때면 나는 부드러운 화음으로 맞추어 주고 저 피리 소리가 유연해질 때면 나는 강한 음을 내어 주고……."
그런데 그 피리 소리는 구양봉에게도 이롭지는 않았다. 구양봉은 번뇌와 함께 가슴속의 혈기가 끓어오르는 듯하여 일시 혼란에 빠졌다. 그는 급급히 정신을 집중하고 내공을 모아 피리 소리를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중양과 구양봉이 정신을 집중하여 전력으로 피리 소리에 대항하고 있을 때 피리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대여(大呂)의 큰 종소리 같았다.
"불설(佛說)에 초(初)에도 무난(無難)이요 후(後)에도 무난이라고 했은즉, 인생이 시초부터 힘 다하다가 한결같이 끝나는 것은 구구)(九九 ; 9월 9일로 중양절이라는 명절)가 돌아와야 진심으로 뉘우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니라. 색을 보고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을 보아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탐하지 않고 역정 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극락으로 사는 것을 불가의……."
이 염불 소리는 교묘하게도 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곤 하는 사이에 나곤 했는데 구구절절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 염불을 외우면 사람의 마음이 밝게 열리고 푸근해지며 모든 번뇌가 없어질 것 같았다.
왕중양이 갑자기 왼쪽 신발을 벗어 들고는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에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이 피리 소리에 미친 거 아냐? 갑자기 뭣 땜에 신발을 들여다보는 거지?'
왕중양은 그 신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오른쪽 발에서 나머지 신발마저 벗겨 내어 두 신발을 손에 든 채 달빛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해상의 파도는 이제 집채같이 사납게 일어나 모든 생령들을 통째로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염불을 외우는 사람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져 간곡하게 인생과 예의, 불법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구절구절마다 더욱 가슴 갚이 파고들었다.
마음이 동한 구양봉은 앉은 채로 아쟁을 타기라도 하듯이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의 아쟁 연주곡인 대사막풍사진(大沙漠風沙塵) 을 끊임없이 연주해 댔다.
한편 왕중양은 손을 움직여 두 신발 바닥을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두 신발 바닥을 마주치다가는 한쪽 신 바닥으로 철썩 무릎을 갈기고 다른 한쪽 신 바닥으로는 큰 청석(靑石)을 철썩 내리갈겼다. 이어서 그는 또 두 신발 바닥으로 청석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신발 바닥에서 생생한 음률이 튀어나오는 것 이 아닌가? 그의 신발 바닥 두들기는 소리는 때로는 염불 소
리와 한데 어울리고 때로는 피리 소리와 한데 어울렸으며 때로는 다른 것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울리곤 했다.
세 사람은 이렇게 한바탕 법석을 떨다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소란을 멈췄다.
왕중양은 여전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는데 미소를 띄우고 있는 품이 제정신을 잃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손님은 동해 도화도의 도주 황약사가 아니시오? 참으로 무서운 곡입니다. 대해마저 뒤집어질 지경이니까요."
그의 질문에 누군가 한바탕 웃더니 대답했다.
"중양 진인께서는 귀가 밝으시군요. 이건 제가 만든 신곡 벽해조생곡(碧海潮生曲) 이온데 도화도에서는 너무나도 무료하여 파도가 치는 듯한 이 곡을 즐겨 듣소이다. 일부러 진인을 괴롭혔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은 운남 대리의 단씨 나으리가 아니십니까? 인간들에게 진심으로 뉘우칠 것을 권하시면서 남과 다투더라도 부처의 인자한 마음을 체득해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댁은 틀림없는 대리의 단씨 나으리인 것 같소이다."
가지가 울창한 한 노목 아래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가 입은 연한 자주색 두루마기가 달빛을 받아 짙게 물들어 보였다. 손에는 긴 피리를 들었는데 보아하니 옥소(玉簫) 같았다. 나무 밑에 앉아 배를 탄 듯 몸을 좌우로 흔들던 그가 왕중양에게 읍하며 말했다.
"중양궁에서 묵다가 한밤중에 피리 소리를 들었소이다. 군(君)이 선도(禪道)를 아시는지라 감격하여 백현경(白玄經)을 함께 이야기한 셈이지요."
그는 황약사의 모습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어느 틈엔지 바위 곁에도 사람 하나가 와서 서 있었다. 그는 몸에 담황색 두루마기를 걸쳤고 오른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스물네 알 염주를 한 알씩 세면서 세월을 보냈을 사람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읍하면서 말했다.
"객이 중양궁에 당도하니 때마침 보름이고 사람들은 모두 묘체(妙諦 ; 인생을 깨달은 자)들이라 경서를 말하고 가을바람을 이야기하게 되었소이다."
왕중양은 즉시 태도가 숙연해지더니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인은 중양궁에서 살고 중양은 제 이름이올시다. 구구(九九)는 중양일(重陽日 )이온데 누구와 기경(奇經)을 담론하리까?"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구양봉은 내심으로 무척 기뻤다.
'내가 대사막에서 갑자기 미침증이 들어 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음풍영월을 하다가 모용쟁한테 조롱을 당했지. 그녀는 나를 글에 미친 멍청이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보니 무림의 고수라고 하는 이자들도 모두 어줍잖은 시 몇 줄쯤은 읊을 줄 알잖아?'
그는 마음속으로 기쁘기도 하고 가소로운 생각도 들어 숨어 있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소리 내어 웃어댈 뻔했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모두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 인물들인데 시를 읊은 재주는 썩 신통치가 않구나. 내가 읊어 볼 테니 어디 들어 보거라. 아마 너희들보다 못하진 않을 게다.'
하지만 그가 미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유, 더럽구나, 더러워. 홍칠아,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게 어떤 놈들인지 어디 말해 봐라."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더러운 놈이란 아마도 변소 치우는 사람이겠지요?"
사부라는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놈은 왕중양, 단지흥, 그리고 황약사야."
홍칠이 대답했다一
"사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 만합니다. 천하에서 가장 맛좋은 요리를 저는 가려 볼 줄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강산이개'가 맛이 좋다 하시지만 그래도 묘수주자가 만든 '원앙오진회'가 더 맛좋지 않소이까?"
사부라는 사람이 거만하게 소리쳤다.
"부아를 돋우어 날 죽일 셈이냐? 남들은 모두 팔이 안으로 굽는다던데, 너는 사부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그 묘수주자 놈의 개떡 같은 원앙오진회를 맛있다고 하니 부아를 돋우어 날 죽일 셈이구나?"
두 사람은 이렇게 주고받으면서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대뜸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경성 홍안루의 요사 소씨 거렁뱅이였고 또 한 사람은 자기와 함께 황궁에 들어가 어선방의 음식을 훔쳐먹던 홍칠이었던 것이다.
―제3권에 계속―
첫댓글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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