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이란 이름으로 언젠가에는 같았을 존재-인간 위에 군림하여 살아간지도 셀 수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 세월을 가늠할 수 있을까. 악몽같고 지독한 슬픔의 나만의 아픔을 간직한채 난 <악신>으로서 군림한다.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으로서 냉소로 죽이고 강력한 힘으로 모두를 두렵게 하고 있다. 내가 살렸을 그들을 내 손으로 죽이고 있다.
난 항상 2명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고리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세라자드. 베라모드. 세라자드. 베라모드. 세라자드. 베라모드.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데, 세라자드가 무슬림으로서 성녀가 되었던 것은 아마 그녀의 무의식에 남아있을 베라딘의 죄에 대한 참회가 아닐까. 그렇지만 그런 식의 어설픈 동정심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내가 죽인 생명은 얼마나 나를 증오하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원한을 먹고 이렇게 불행한 길을 가야 했던 것인가.
"베라모드님. 괜찮으십니까?"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디아블로. 그런데, 벨제부르는 이제 다 완성되었다고요?"
"네.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럽시다."
당신은 나의 군주이십니다.
인정되지 않는 선행을 하는 우리는 당신에게 의지합니다.
착한 그대. 사랑하는 동료들을 미소라는 가면아래 거짓을 말할 때, 그들을 속일 때, 당신 혼자 흘리던 눈물은 서서히 말라버리고 이제 딱딱한 가면만이 그대를 지탱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살라딘. 그리고 과거 그 행복했던 그 날로 돌아가는 것.
나는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군주이시기에.
어둑하고 음습한 이곳에 중앙에서 잠자고 있는 아이. 유리관에서 깨어날 그 날을 기다리는 아이의 이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건만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벨제부르.
모든 그리마들의 제왕으로서 군림하고 베라모드의 오른팔로써 강함의 극을 보여줄 그 아이. 그리고 뫼비우스를 이어줄 그 아이.
아직 어리기만 한 그 아이가 불현듯 어떤 존재를 느끼고 눈을 떴다.
새하얀 음모의 신. 베라모드.
아이는 베라모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라모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디아블로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베라모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인공자궁과도 같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디아블로는 방금 전 베라모드의 미소를 기억 속에서 지우려 노력하며 빠르게 걸어나왔다. 몇몇의 그리마들이 그녀를 보고 서둘러 예를 표하는 것에 응하지도 않은 채.
세라자드의 미소.
아기의 벨제부르를 보는 그는 베라모드가 아니라 세라자드였다.
약해지지 마세요.
이제 와서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이제 와서 세라자드가 되시면 안됩니다.
군주를 믿고 있지만 세라자드로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약해지지 마세요.
이곳에서 시간의 흐름은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기에 그 누구도 지금이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벨제부르. 넌 누구보다도 강하다."
베라모드는 그의 뒤를 열심히 따라오는 아직 어린 제왕에게 말하였다.
"헥... 네..."
고생스런 그의 숨소리를 알아듣고 베라모드는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그런 은총에 감사해하며 서둘러 베라모드의 뒤를 쫓은 벨제부르는 다시 숨을 가다듬으며 주군의 말을 기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보지 못했겠지만 세라자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라자드는 말했다.
"벨제부르. 아직 어린 너에겐 그리마의 황제란 이름은 벅찰지도 모르지만 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기에 그 이름이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리마의 황제로서 노력하길 바란다."
아직 어린 벨제부르는 평소의 베라모드가 아님을 모르는 듯 했다. 갑자기 따뜻한 태도를 보이는 베라모드에게 당혹스러운 충정을 느끼는 아직 어린 벨제부르.
"노력하겠습니다."
세라자드는 미소짓는다.
"...그것이 나의 목적이다."
벨제부르는 베라모드가 기대했던 놀랍다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라자드는 은근히 실망했지만 베라모드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놀라워하지 않는군."
벨제부르는 대답하였다.
"이미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베라모드님. 이 모든 일이 세계를 위해서라고 디아블로님은 말씀하셨지만, 베라모드님의 목적이 그것과는 어긋나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가..."
벨제부르. 그가 주었던 것은 이제 너에게로.
"...프로젝트는 제가 반드시 완성시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