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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색의 물신 사회
-탐욕;
나는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는 것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인간의 자발적 반란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때문이라고 전망한다.
자본을 매개로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의 반란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기어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도 자본주의는 탐욕스러운 아집을 계속 부리겠지만 끝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전쟁 수행자이고 인간 문명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연의 반란은 지배, 피지배 관계를 뒤어넘어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온다.
인간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사라남으려고 굴종한다. 인간이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면 억압과 착취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죽는 대신 굴종을 택한다. 인간의 삶은 모진 것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 된다.
자연은,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파괴되어 죽는다. 자연이 놀라운 복원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파괴행위는 속도에 있어서 자연의 복원력을 앞지른다.
그리하여, 자연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끝까지 발버둥치겠지만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함께 죽을 수박에 없다.
‘우리는 이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지만, ‘인간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올뿐’이라는 성찰이성의 소리는 도구 이성의 소리에 비하면 아주 약하다.
인류가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기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않는 한 전쟁 또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탐욕이 사라질 수 없다면 인간의 자연파괴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거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
당시의 인간사회를 ‘원시공동체사회’ 또는 ‘원시공산사회’라고 부른다.
당시 인간에게 변화무쌍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잇는데 12월25일 성탄절이 하나의 예다. 시베리아와 위도가 비슷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옛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여러모로 지혜가 부족한 시대였지만 당시 사람들도 태양이 사라지면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양이 사라지면 뭇 생명이 죽는다. 태양은 곧 생명이었는데 바람에 날리는 가을이 지나고 흰 눈 날리는 겨울이 다가오면 낮은 갈수록 짧아졌고 태양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려했다. 두려웠다.
그러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태양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사흘째 날이 바로 12월25일이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기념했다.
나중에 그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태양축제일은 성탄절이 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역으로 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자연에 맞서 생존해야 했던 인간에게 배고픔 이상으로 두려워한 것이 또 있었으니 더불어 사는 인간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벼.밀.옥수수를 발견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힘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일부로 자연을 두려워했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잉여생산물은 인간에게 여유 시간을 주어 문화와 역사를 일으키게 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계급과 소유하지 못하는 계급으로 나누어지게 했다.
잉여생산물은 계급분화를 불러왓고, 노동력을 필요오 하는 경작에는 다른 공동체를 공격하여 손에 넣은 노예를 동원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남아있을 때엔 잉여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분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도 없었는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하며서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전쟁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인간은 자연을 존중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땅에서 잉여생산물이 나왓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은 더욱 오만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땅에서 멀어졌고 옛 사람들이 가졌던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점차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인간의 탐욕은 오만에 비례하여 더욱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탐욕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의 뿌리이듯이,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 그 최종형태인 전쟁 또한 인간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뿌리는 이제 너무 깊이 박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까지 착취하기에 이르렀으니 갈 데까지 간 것이고, 마침내 인간은 자연의 반란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 실체를 드러냈다.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다른 인간의 자발적 반란에 대해서는 전쟁과 탄압으로 억누르고 굴종시켜 왔지만,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아무리 오만한 인간이라도 자연에 맞서 전쟁을 벌일 수 없다. 자연과 벌이는 전쟁에서 이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게다가 자연은 인간과 달리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면 스스로 파괴되어 죽을 뿐 살아남으려고 굴종하지 않는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어떻게 끝날까?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앞에서 결국 투항할까. 그리하여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을 존중하듯 다른 인간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갈까.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공멸의 길로 나아갈까?
-보잘 것 없음;
‘무엇이 되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가?’
‘삼성’왕국이 주는 떡값을 받는 마름이나 머슴이 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하는 청소년은 없을 것이다.
일제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출세를 위해 학업에 정진한다는 의미는 지배계급이 설정한 평가기준에 잘 따른다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배계급의 충실한 마름이 되어 그 하부에 편입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난 사람은, ‘개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할 nt 없고 지배층의 요구에 순응하는 조건으만 출세할 수 있다.
여기서 짚고 싶은 얘기는...한국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근엄한 지위에 오른 인물들의 보잘것없음에 대해서다.
남달리 형성한 ‘교육자본’을 통해 성공한 엘리트들ㅢ 전형적인 모습이 ‘보잘것없음’이라면 이 사회는 참담할 정도로 보잘것없다.
자유인.평화인.문화인이 가당키나 한가?
검사는 국가의 엘리트들인데 ‘법 정의’의 파수꾼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그들이 삼성왕국이 던져주는 떡값을 받아 챙기고 그 경비견이 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국가 엘리트들이 자신의 보잘것ㄱ없음조차 부끄러워할 줄 모를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검사뿐인가. 우리는 국호ㅓㅣ의 인사청문회에서 예외적인 인물을 만나기 어렵다. 부동산 투기나 학군을 바꾸기 위해 대충 위장전입하고, 대충 탈세하고 그것을 관행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 이 땅의 사회귀족들이 보여주는 보편적 모습이다.
마름의 속성은 ‘자발적 복종’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자유이다.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
오늘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출세한 인물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지배권력과 맘몬의 신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충실한 마름들이다. 그래야 출세할 수 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인들은 대개 불온하지만 한국사회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해 불온하지 않고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지배권력과 맘몬의 신을 모시는 신료들은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유인을 억압하며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이렇게 바꿔쓰면 더 좋을 것이다. ‘스스로 보잘것없으려면 출세하ㅣ라’
마름의 좌우명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소중한 삶을 기존 체제에 기생하여 그것이 허용한 기름진 생존을 누리며 환호작약하라’쯤 되겠다.
-몰상식;
‘스님들은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빨리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머리를 민 정신 나간 사람들’
‘불교 믿는 나라는 가난하고 하나님 믿는 나라는 다 잘 산다’
다른 나라라면 ‘정신 나간’ 보통사람도 하기 힘든 말들이 한국 목사들의 입에서 나왓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서울 명동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부 광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에 엽기적인 일이 참 많지만 가장 엽기적인 일은 엽기적인 일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목사님들의 행태가 그런 예에 속한다.
루소;‘자기가 믿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두에게 냉혹한 저주를 내리는’ 불관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몰상식은 불관용을 낳고 불관용은 제어되지 않을 때거침없이 폭력으로 나아간다. 이 사회에서는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몰상식이 용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류를 차지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이 인류역사상 얼마나 잔인한 살육을 낳았고 집단광기르 불러왔는지...
‘한국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갈들이 없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정말 한국사회구성우너들이 유독 종교의 다양성만큼은 존중하는 것이F까?
현상이 본질을 감추듯이 이유는 다른 데 있다.
1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점. 그래서 어떤 종교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불교22.8 개신교18.3 천주교10.9
2종교의 차이말고도 사상.이념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로 편가르기를 할 게 이었기 때문이다.
극우 반공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는 사상.이념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를 차별.억압.배제의 근거로 삼는 강자.다수에게 아주 편리한 무기다.
공자;‘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
지상의 꽃들은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다른 꽃을 시샘하지 않는데,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이중성은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자기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민족.종교.지역.혈연.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자기성숙의 긴장이 없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며, 그가 속한 집단이다.
볼테르;‘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혀야 빛이 난다’ 서로 다른 견해가 표현되어 부딪힐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의 성찰이성이 성숙되지 않고, 긍정적 가치를 공유하지 못할 때, 다름의 관계는 서로 부정하는 관계로만 설정된다.
공익과 진실이라는 목표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이 합리적 논거를 통해 경쟁하는 대신, 서로가 서로를 극복해야 하는 부정의 관계로만 설정되는 것이다.
다름이 경쟁 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극복 대상으로 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는 항시 인권침해의 대상이 될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다름=틀림’의 등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 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
무릇 잘못된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으되 존재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은 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 배제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라는 사회적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등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비굴할 정도로 제1세계와 백인을 선망한다.
미국인한테는 마냥 ‘바치기’를 하면서 굶주리는 북한에 대해서는 ‘퍼주기’라고 떠들어대는 모습과 상통한다.
사람은 죽어 누울 자리는 선택할 수 있으나 태어나는 자리는 선택할 수 없다.
유럽인들이 16세기에 같은 하느님의 자식이면서 신/구교로 분연되어 서로 잔인하게 죽이고 전쟁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20세기에 같은 민족이면서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잔인하게 죽였고 전쟁을 일으켰다.
20세기 초 유태인 청년은 자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아, 난 유태인이야’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게르만인 독일인은 자고 일어난 아침에 ‘아, 난 게르만인이야’라고 확인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유태인에게 독일인은 걸핏하면 ‘너, 유태인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너, 게르만인이지?’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한국사회에서는...‘난 서울사람이야’‘난 경상도 사람이야’라고 혼잣말하는 서울사람이나 경상도사람은 없지만...‘나는 전라도 사람이야’라고 혼잣말하는 호남사람은 없지 않다. ‘너 경상도 사람이지’하고 묻는 사람은 없지만 ‘너 전라도 사람이지?’하고 묻는 일은 이따금 일어난다.
‘너, 경상도 사람이짐?’‘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두 개의 질문에 차이가 없을 때는 언제쯤 올까?
소수자는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소수자에게 강요된 ‘자기 돌아봄’은 사회적으로는 천형일수 잇지만 인간적으로는 천혜일 수 있다.
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자기 돌아봄’을 통해 역지사지를 쉽게 익히지만, 다수자들은 자기 돌아봄도 부족하고 역지사지도 어렵다.
소수자에겐 자기성숙의 긴장이 살아 있지만 다수자는 다수파에 안주함으로써 자기성숙의 긴장은 놓치기 쉽다.
우리는 비교라는 말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
남과 비교할 때 서로 장점을 주고받기 위한 경우로 한정할 일이다.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비교는 멀리 하라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보다 더 성숙된 내일의 관계를 위한 비교에 머문다면 다수자, 소수자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분노;
-쓴소리;
인간은 편함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특히 정의와 진실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요구한다.
일상에서 사회문제, 정의와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소수가 한국사회에서는 극소수에 가깝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회색의 사회에서 원칙과 상식은 애당초 불편한 것이다.
한국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노동자가 아닌 소비자의 정체성인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노사간 균형이 아직 먼 얘기이듯,.....
한국사회의 신문은 진보신문 대 보수신문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몰상식한 부자신문 대 상식적인 가난한 신문으로 나누어지는데; 상식적인 가난한 신문의 부수는 늘어나지 않았고 영향력은 커지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마름이나 머슴이 되지 않겠다는 늠름한 민중에게 생존의 한계선상에 서도록 강요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천박한 자본즈의를 비판해야 하는 신문은 그만큼 어려운 생존의 한계선상에 설 수박에 없다. 진보성을 일관되게 펼 수 있는 일간지는 진보의식을 일상성으로 확보한 시민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달걀;
옆으로 하나의 직선을 긋자. 그리고 그 횡선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조건이라고 부르자. 횡선의 위쪽에 있으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아래족에 있으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한 것이라고 하자.
북유럽등은 달걀이 자연스럽게 누운형태...
한국사회는 아래부분이깨지고 종으로 서있는 콜롬부스의 달걀모습.
콜롬버스의 달걀=발상의 전환?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맞선 인위적인 폭력이었다.
그 폭력적인 발상과 행위, 그것으로 피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시작되었고, 피식민지인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나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굴종의 삶을 살아야 했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 학생들을 보자. ‘오늘을 저당잡힌 삶’을 살고 있다.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불안한 미래 때문에 모든 오늘을 저당잡혀야 하는 사회, 미래의 불확실성이 오늘의 불성실성을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요하거나 합리화하도록 작용하는 사회,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아름다운 삶은 애당초 거리가 멀다.
당연히 오늘의 삶, 오늘의 나에게 성실할 수 없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입니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톨스토이
‘당신에가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다’
-나눔과 분배;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큰 폭의 나눔과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분배’를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채, 시혜.온정.선행의 ‘나눔’에 만 호소하려고 한다.
‘노불레스 오블리주’란 본디 ‘귀족이 스스로 의무를 진다’는 뜻인데, 역사는 귀족이 스스로 의무를 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귀족은 스스로 의무를 지지 않았다.
스스로 의무를 지지 않으면 지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배하기 위해 의무를 져왔을 뿐이다. 그게 역사의 진실이다.
따라서 귀족이나 사회상층이 스스로 의무를 얼마만큼 지느냐는 국민의 비판과 견제능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역에서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가당키나 한가?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사회상층의 손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민중의 비판적 안목과 견제 능력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처럼 사회환원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데다가 국민이 제도교육을 통해 비판의식을 기르지못한 곳에서는 노블레스오불리주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큰 폭의 분배를 제도화한 뒤 나눔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회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더욱 분배의 제도화를 우선해야 한다. 그렌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조세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가진 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금을 낼 게 별로 없는 저소득층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가진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모두 조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왜 그럴까?
1정부예산낭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들 수있다. 별로 하는 일 없는 지자체 의원 한 사람이 연간 6천만원씩 세금을 축내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기지 이전비용으로 수조원의 세금을 쏟아붓고, 유인촌장관이 스포츠토토 기금을 제멋대로 쓰고, ...경영을 잘못한 건설사에 나랏돈을 퍼주는 것을보면서 기분좋게 세금을 낼 국민은 없다.
2조세형평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유리지갑을 열어 빈틈없이 세금을 내는 봉급생활자들은 의사.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탈세하고, 강부자들이 세금을 체납하는 소식에 스스로 바보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세금을 낸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단 한푼인들 더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70퍼센트를 넘는 국민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50퍼센트 이상이 감세정책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은 수백만원씩 소득세를 덜 내는데 비해 고작 5만원을 덜 내지만 그래도 덜 내기 때문에 동의한다.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바로 이점이 유럽사회와 다른다. 사회공공성과 시민복지가 실현되는 유럽사회의 서민들은 경험을 통해 ‘서민인 내가 100유로를 더 낼 때, 고소득층은 천 유로, 만 유로를 더 내는 것이며 그 재원의 일부가 나에[게 돌아오므로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한국의 서민층은 사회공공성과 사회안전망 혜택의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세는 그저 빼앗기는 것으로 인식한다. 조세에 있어서 서민층이나 부유층이 한편에 서게 되는 배경이고, 한국의 기득권층이 사회공공성 실현과 사회안전망 확충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유럽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이 있다.
애국주의는 본디 공화국 기본 가치인 사회 공공성과 연대의 실현에 따라 구성원들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위함’을 받는데서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을 기대할 수 없다. 국가는 나를 지배할 뿐 나르 위해 해주는 게 없다.
우리사회에서 ‘현실’은 ‘바꿔나가야 할 현실’보다는 ‘피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이 훨씬 강하다. 분배의제도화를 비롯하여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너무 몰라’ ‘너무 순진해’‘이상주의자’ 등의 말을 듣는다.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의 의미만 가질 때, 그래서 각자의 세게관에 반해 현실을 수용해야 할 때, 이는 거의 강자의 뜻을 수용함을 뜻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점차 강자에게 관대해진다.
북한보다 미국에 관대하고, 대기업노조보다 재벌에 관대하고, 한겨레나 경향신문보다 조중동에 관대하고, 진보정치세력보다 현실 정치세력권에 관대하다.
그렇ㄹ게 현실의 벽앞에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그 내면에서 반작용을 일으키고 그런 현실을 주로 같은 약자의 탓으로 돌린다.
사회적 약자들은 함께 연대하지 못하고, 현실은 바꾸어야 할 것이 아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유럽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무상교육제도나 보편의료제공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주의자라는 점에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않는 프랑스인들의 65퍼센트가 이렇게 말한다.
‘내 소득의 일부를 떼내어 나보다 가난한 사람의 교육비.의료비.주택보조비.연금 등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오늘 우리 사회의 부유층.재배층에게0는 기대할 수 없는 연대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부유층.지배층은 본디 뻔뻔하게 태어났나? 그렇지는 않다. 연대를 하지않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어도 지배할 수 있으니 계속 뻔뻔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견제력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상교육;
19세기 중반 유럽. 수구반동세력의 수장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자유사상, 비판정신의 거처인 대학을 없애려고 했다.
21세기 한국의 대학은 스스로 기업이 되었다. 21세기 메테르니히의 신자유주의 관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업이 되었으니 대학은 이제 문 닫을 필요가 없다.
‘학문의 전당’이니 ‘자유정신, 비판정신의 요람’이니 하는 말들이 계면쩍어졌고, ‘인문학의 위기’는 사치스런 일이 된지 오래다.
‘대학이 산업’이라는 논리 위에서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산업의 역군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 한국사회에서는 무상교육제도가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꾼다. 이 꿈에는 가난을 이유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공부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분노도 담겨 있는데, 이는 가난 때문에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치료받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만난다.
무상교육제도는 그 자체로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이다. 계층간 연대, 즉 횡적 연대의 실현인 동시에, 세대간 연대, 즉 종적 연대의 실현이다.
계층간 연대의 실현이란 소득이 많은 사회구성원이 세금을 더 내 소득이 낮은 집안의 자녀들의 교육자본 형성 비용을 부담해 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횡적 연대라고 부른다.
그와 동시에 오늘의 경제;활동인구가 낸 세;금으로 오늘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자본 형성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세대간 연대이며 종적연대라고 부를 수 있다.
학생들 자신이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인 무상교육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남과 더불어 살아야하며 연대의식을 가져야한다고 말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제도와 사회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사회환원 의식이다. 사회구성원들의 교육자본 형성비용을 사회가 부담하기 때문에 사회에 되돌려준다는 생각이 열려있다. ‘교육자본의 사회화’이다.
경제자본과 대칭되는 표현인 상징자본은 문화자본과 교육자본으로 이루어진다.
무상교육이 실현된 나라의 구성원들이 형성한 교육자본에는 ‘나의 것’인 동시에 아주 일부분이라도 ‘사회의 몫’이 들어 있다.
한국사회에선 그 누구의 교육자본에서도 한국사회의 몫을 기대할 수 없다.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자격을 획득한 사람은 나고, 공교육비뿐만 아니라 사교육비를 쳐들었기 때문에 나의 교육자본은 철저하게 내 것이다.
당연히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은 생기지 않는다. 한국의 의사,교사나 대학교수, 법조인들에게서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준 한국사회가 고맙고 그래서 나의 작은 부분이라도 한국사회에 되돌려준다’는 의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다. 교육자본을 통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엘리트층에게서 특권의식만 발견될 뿐, 사회적 책무의식이나 사회환원 의식을 발견하기 어렵다. 누리기만 할 뿐 사회에 되돌려준다는 의식은 없다.
무상교육과 보편의료체계를 비롯하여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면 정부 재정이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긴 자가 독차지하는 승자독식체제를 없애, 구성원간 소득편차를 줄이는 일도 중요한데 여기서는 재분배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하자.
스웨덴같은 나라도 조세 이전의 소득을 살펴봅면 우리 사회와 비슷하게 소득 편차가 꽤 높다. 그렇지만 세금과 사회보장 분담금을 낸 뒤에는 편차가 많이 줄어든다. 우리사회와 크게 다른 점이다. 소득이 많은 부자일수록 세금과 사회보장 분담금으로 국가와 사회에 내놓은 돈이 많고, 국가와 사회에 내놓은 게 많지 않은 저소득층이 그 혜택을 함께 누린다.
유럽 나라들의 사회안전망이 튼튼한 것은 무엇보다 국민부담률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부담률은 미국과 비슷한 25퍼센트 수준이다.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등은 50퍼센트에 이르러 우리의 두 배에 가깝고 프랑스는 45퍼센트 수준이다.(국민부담률;국민이 부담하는 조세총액과 사회보장성 분담금-건강보험.고용보험.국민연금등-을 합한 금액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양극화로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소득 편차가 더욱 심해지고 직접세의 비율이 낮은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한국은 분배.재분배 모든 면에서 ‘가진 자’들의 천국이다. 그럼에도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걸핏하면 ‘세금폭탄’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
지금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 그리고 불행을 끊임없이 줄여나가야 한다.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면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집권보수세력과 조중동의 영향력을 줄여야 하며, 그만큼 진보정치 세력의 영향력이 커져야 한다.
우리는 사익추구 집단이 공기의 탈을 쓴 ‘조중동’이 신문시장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놀라운 일에 놀라지 않고, 민주공화국의 지향과 거리가 먼 집권당이 아무리 낮아도 30퍼센트 이상의 지지율로 정당 중에서 제일 높은 지지를 받는 놀라운 일에 놀라지 않는다.
정말 놀라운 일인데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놀리자 못하는 것이다.
집권보수당, 조중동, 뉴라이트에게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누리게 하는 토양이 영남패권주의, 극우반공주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같은 불관용에 있다면 그러한 불관용을 계속 용인하는 것은 서민 대중의 무관심과 무지이다.
무관심과 무지는 그 자체로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몰상식의 자양분이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된다.
서민대중은 기득권세력을 선망하고 가진 자들의 언어에 잘 현혹되고 그들을 지지한다. 뻔뻔한 자들의 기득권체제는 지속되며 사회 안에서 불평등과 고통, 불행, 폭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더구나 서민대중은 무지와 무관심으로 발가벗은 채, 광신자들.극단주의자들.사익추구집단의 집요함과 열성 앞에 노출되어 있다.
18세기에 볼테르;‘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근대시민의 자격요건을 제시하였다.
광신과 극단주의가 집요함과 열성을 내장하고 있듯이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무지와 무관심은 중립이 될 수 없으며, 사회불의보다 사회정의를, 사익보다는 공익을, 몰상식보다는 상식을 원하는 사회구성원이라면 사회현안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정의, 공익, 상식읅 지향하는 사람들이 의지로 열성과 집요함을 결합시켜야만, 열성과 집요함을 내장하고 있는 광신자.극단주의자.사익추구집단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기득권세력에겐 무기가 또 있다. 권력.금력이라는 말은 정권과 돈에는 그 자체에[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역사에 진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정의.상식.공익.진실이 힘을 획득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의.상식.공익.진실을 추구하는 건강한 시민이라면 의지로 서로으 힘을 결집시켜야 하며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부른다.
시민사회의 발전단계는 대중이 무지와 무관심 단계에0서 벗어나 얼마나 시민의식이 성숙했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시민사회의 발전 단계는 시민의식이 광신과 극단주의,사익추구 자체에[ 내장하고 있는 열정과 집요함에 얼마나 맞서고 있는지, 권력과 돈이 가진 힘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3.긴장의 항체
-쓸쓸함;
사람은 전망이 보이지 않을때 절망한다.
사람은 처지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정서는 처지가 빠뀌어도 변하지 않은가 보다.
나는 어린 학생들이 장래희망으로 ‘CEO'를 꼽을 때 더 쓸쓸함을 느낀다.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고 말없이 묻는 동창생의 시선에 ‘너는 왜 그렇게 사냐?’라고 똑같이 말없이 대꾸하기 전에 먼저 슬쓸함을 느낀다.
역사의 진보를 일컬어 힘없는 정의가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그 길은 답답하고 인타깝고 험난하다.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기념되고 학살 책임자들은 사면되었다. 학살책임자들이 참회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용서와 화해가 주장되었다.
나로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고, 힘이 약한 정의가 힘을 키워가며 강한 불의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 주저앉으며 그럴듯한 수사를 붙인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 비겁한 합리화 과정에서 영악하게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챙긴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억압과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고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앴던 신문들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오늘 광주사람들까지도 그 신문들을 잘 보고 있고, 합천에는 일해공원이 들어섰다. 나는 시민의 휴식공간에 버젓이 학살자의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도대체 이 쓸슬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람시;‘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말을 품고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 이 사회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서 오는 것일까?
어느 곳에선 돈이 아직 사람을 덜 규정하고 사람들을 덜 이간질하며 덜 오염시킨다.
‘지겨운 천국’보다 ‘즐거운 지옥’이 더 낫다?
한국에서 즐거우려면 일단 돈이 많아야 한다?
우리 사회 대부분은 백인들에게는 받는 것 없이 배려하고 호의를 베풀기도 하지만, 자국민들 사이엔 주는 것 없이 좀처럼 배려나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공중파를 통해 거리낌없이 토해지고 있는 사회?
자본주의 생활방식의 특징은 제로섬 게임에 있다. 내가 승리하려면 너는 패배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황페화하는 것은 이러한 성질 때문이다.
인간성의 발현은 이 제로섬게임과 정반대의 성질을 갖는다. 사랑이 그렇듯이 하염없이 주고 또 주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성의 발현은 베풀수록 스스로 충만해지고 베풀지 않을때 오히려 그 샘이 마른다.
‘교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대드는 듯한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신 몰상식이 막무가내로 관철되며, 생존하려면 스스로 뻔뻔해지든지 뻔뻔함에 굴종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자화상;
-항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샤르트르.
나, 곧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존재이유를,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의이며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인간 존재의 이유와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훼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유한 영역을 보존하면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반인간적인 것. 비인간적이게ㅐ 하는 것들과 싸우고 저항하는 실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자에게 있어 휴머니즘은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권리이다.
이것이 내가 자 자신을 그 무엇보다 우선 휴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유이며, 내가 기계적 이데올로기 논쟁과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던 근본 이유다.
딱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사회에서 휴머니즘은 왠지 낭만적인 센티멘탈리스트나 심지어 프티 부르조아의 유약하고 따뜻한 마음 정도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탄생이 중세의 종교라는 성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도 그것이 얼마나 강건하고 적극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짐작핧 수 있다.
이 사회에서 휴머니즘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자유애 대한 왜곡된 이해와 쌍벽을 이룬다.
실존적 고민은 비로소 이 땅의 배반과 증오, 그리고 절망의 역사 속 인간을 사랑하게 했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했다.
이땅은 나에게 실존적 고민의 한가운데서 선택한 시지프스의 바위였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상황은 마치 고릴라가 사람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여 잘만 하면 사람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얼토당토 않은 부조리의연속이었다.
나는 지금도 ‘믿어만 주면 사람을 낳을 수 ldT다’고 주장하는 고릴라들에게 놀아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이 위험하고 부질없기 짝이 없는 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으 l 피페한 현실이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들 곁에 달라붙어 있더 절망, 좌절 그리고 생존의 욕망이 만들어낸 엽기적 판타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성과에 대한 조급성과 일에 대한 전문성과 지적.논리적 취약함을 은페하려는 의도와 맞물려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풍조가 자리잡은 데 기여한 것은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떳떳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 느닷없는 총부리에 놀라 밥 한그릇 펴준 것은 부역죄가 되어 온갖 고초를 겪게 되지만, 독립이 물 건너가기를 바라듯 일제에 붙어먹던 자들은 주인을 바꿔가며 배를 불리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에게 남는 건 낭패감과 박탈감 뿐이다. 정신적 공황을 피할 nt 없었고 올바른 생활은 개그가 되었다. 차차 부도덕한 사회의 비도덕적인 개인들이 되었고 고릴라가 들어설 자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생존을 삶의 기본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라면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인간적 삶을 위한 충분조건인 양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이 강조되는 것을 내 정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생존의 굴레 앞에서 굴종을 강요하는 상황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인간적 삶을 되살리기 위한 지난한 저항의 시기를 가져야했다.
자유와 평화. 사랑과 예술도 삶의 필수조건일 뿐, 인간에[게0 충분조건이란 없다.
세월은 역시 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품었던 의식과 이념은 세월과 함께 그 빛이 바랬다. 그 빛바램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 세월은 또한 자유.민주.인간의 자리에 토익점수.학점.취업준비가 들어앉도록 했다.
심각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진지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남보다 잘 사는 확률은 언제나 마찬가지인데 온 사회가 호들갑을 떨며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달린다. 음악ㅇ 심취하고 문학을 예기하고 철학에 몰두하면서도 가질 수 있었던 확률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야 가질 수 있는 확률로 되었다. 이상한 현상이다. 모두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자는 것도 아니고, 작은 수를 조금이라도 늘려 확률을 높이자는 것도 아닌, 확률은 그대로 둔 채 모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전력질주하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케하는 구체적 요인은 교육.의료.주거.실업.노후 문제다. 실제로 이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갖춰지지 않는 한, 우리느 평생을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살아햐 한다. 우리 사회의 소득 100만원과 유럽사회의 소득 100만원은 그 가치가 다르다.
힘을 모아 크고 안전한 다리를 놓으려 하지않고 외나무다리에 연연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익적 가치가 실종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싹틀 수 없는 사회는 ‘나 먼저 살고 보자’ ‘내 것은 무조건 지키고 보자’는 이전투구의 풍토를 만들어냈다.
애석한 것은 ‘나만 안 떨어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이 위태롭고 협소한 외나무다리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감으로 사람들은 더욱 악착스레 매달린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우리으 것과 내 것을 함께 지키고 기름진 생존을 넘어 인간적 삶을 되찾기 위해.
나의 20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시늘 위해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20대의 젊음은 분출하는 욕망과 삶을 향한 벅찬 기대, 그리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예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세대는 억압된 욕망과 자유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회의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신ㅇ0 우리에겐 자유와 민주의 복원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의 열망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본원적 질문과 고민을 주저없이 할 수 있게 한 것 또한 젊음이었다. 엄혹한 상황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차라리 낭만을 찾을 수 이께 하는 능청스러움이 젊은 패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난하지만 생활에 대한 구체적 압박감이나 의무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시기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충실하게 젊음을 향유했다고 말할 수 ldT다. 출발선에 선 내게 주어졌던 삶의 얼개가 아무리 형편없었다고 한들 결코 주저앉지 않게 한 것 역시 젊음과 무관하지 앟다. 나에게 젊음, 그것은 저항이라는 단어와 항상 함께 한다. 애당초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거겠어’ ‘둥글둥글 살아야지’하는 기성세대들의 서글픈 비책에 나는 죽는 날까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실현에 있지 기름진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자유에 대한 극심한 왜곡과 핍박에 정항한 역사라고도 할 nt 있을 만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늠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 하지 말라.자아실현을 휘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이성의 성숙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박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긴장;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가치를 따르는 것을 변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가치관이 바뀐 것이 아니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했르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아리스토테레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 보다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고, 그래가 우리가 내면화하고 일상화한 합리화의 속살은 대개 ‘현실적 성공’과 ‘명분’이라는 떡을 양 손에 쥐겟다는 욕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30년대 후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했던 2만여명에 이르는 스페인의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프랑코 독재가 30년 넘게 지속되어 70년대 중반까지 조극에 돌아갈 수 없었다.
청장년이었던 그들은 하나 둘 눈을 감았고 프랑스 땅에 묻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그래, 우리의 인생은 실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하는 것도 ‘불온’이 된 탓인가? 사람들은 농민의 억울한 죽음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눈물하는 절규에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다. 놀라운 조로현상인데, 사람들이 늙은 것인지, 사회가 지친 것인지 분간이 잘 안된다. 이땅에서 현실은 더욱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으ㅗ 남고, 우리가 바꾸어야 할 현실이란 의미는 사라진다. 여기에 사람은 망각이란 편리한 삶의 방식을 가진 동물이라는 점이 보태진다.
어는 소설의 주인공은 말했다. 역사는 아주 더디고 지루하게 조금씩 바뀐다고.맞는 말이다.
그래서 변화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삶인가에 대한 선택이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거듭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지쳐버리고 말테니까ㅓ. rm 주인공인 말했듯이, 인간에게는 나를 나이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나 보다.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죽음과도 같은 생존만이 남는다는 그 어떤 것 말이다.
흔히 유혹은 밖에서 온다고 하지만, 실은 바같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은밀히 키워진 것들이 간단치 않은 현실을 구실삼아 실체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좋은쪽으로의 변화는 무척 어려운 반면에 나쁜 쪽으로의 급격한 변화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스스로 바뀌고, 또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더 바뀐다.
세상은 바뀌지 않은 채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만 바뀌는, 이 조화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권력은 비민중적이며, 따라서 ‘민중권력’이란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권력은 지배의 일상속에서 자기성찰의 계기를 갖기 어렵고, 따라서 성찰하지 않는 권력은 그 지위의 일상성 속에서 의식이 점차 변해가듯이 점차 반민중적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긴’=줄어듦
‘장’=베풂
긴장은 ‘줄어듦’과 ‘베풂’이 합쳐진 것으로...그 사이의 균형이다.
침묵은 때로 타인의 잘못된 선택에ㅐ 편승해 열매를 탐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내면에 감춰진 자신의 욕망에 대한 면죄부가 되기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 위한 유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엄혹했던 시절이 끝날 것 같지않다는 절망감에서 침묵했다. 순수한 인간성을 빙자한 교묘한 침묵을 꾀하기도 했다. 내면에 침잠하며 낭만적인 절망으로 포장하고 침묵하기도 했다. 룸팬이나 되는 양 자신을 학대하며 고뇌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했다. 무력감과 자괴감으로 ‘창백한 지식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얻기도 했다. 냉소라는 무기로 제구실을 하지못한 것에 대한 추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도 했다. 얼마나 놀라운 자기 합리화의 귀재
인가?
‘내 삶의 최종평가는 나 자신’/
첫댓글 참 길어요...이해하기도 참 쉽지않아요...시간이 난다해도 읽기가 부담스럽ㅁ지요?.....//애독자님들?의 성화로..시작했던 것이라...이왕지사 끝내긴 끝내야했는데요.. 오늘에야 끝을 보게되니 이또한 좋습네다....덕분으로 난 또 한번더 정독을 했으니 남는 장사했지요???...
오랜만에 책 한 권 샀다. 요즘 바빠서 많이 못 읽었다.
참으로 긴 시간동안, 오로지 기러기식구들의 양식을 물어다주기위해 온 정성을 쏟아주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힘든 작업인줄 알았으면 보채지않을걸....ㅋㅋㅋㅋ , 읽는 사람도 몇 번씩 쉬었다 읽곤했으니 월매나 힘들었을꼬? 아무튼 감사,감사.
선생님들이 학생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 맞지요? 열심히 읽고 이 자리에서 정리하고 완전 박사되겠네요. 계속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