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이 세상가운데 계획하시고 우리 인생들을 위해 준비하신 치료의 광선이 있는데..
그에 있어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권능으로 인한 생생한 실제와 강렬한 누림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곧 근본적, 실질적으로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길 같이 임하시어 하늘의 은사와 능력들로 불타오르게 하신 성령님의 뜨거운 역사와 다를 수 없는 것이고, 다메섹 도상에서의 옛바울인 사울에게 비추어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사도 바울이 될 수 있게 만든 직접적, 경험적인 하늘의 힘과 실제와도 본질적으로 다를 수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원론적으로는 시대와 장소들을 넘어 갈멜산의 엘리야에게 하늘에서 임하여 우상의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둡고 더럽혀진 영성을 치유하고 돌이키며 결단하게 한 하늘로부터의 불과도 별개일 수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실상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시어 그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성전 미문에서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에게 보이지 않게 비추시어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뛸 수게 만드신 성령님으로 인한 실질적인 하늘의 권능과도 원론적으로는 조금도 별개일 수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부연하면 육신의 그 어떤 병과 문제들뿐 아니라 심령의 약함과 상처들도, 영혼의 죄악과 눌림들도, 뿐만 아니라 가정들에서도, 일터들에서도, 교회 공동체들에서도, 더 나아가 모든 삶의 자리들, 사역의 현장들,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도 날마다 순간마다의 문제와 버거움들, 절망과 불가능들, 사망과 영벌까지 치유할 수 있고 깨끗하게 하며 해결되고 새롭게 하면서 순식간에 뒤바뀌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마치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생명력과 활기들로 넘치고, 역전과 이적의 일들로 더욱 넘치게 할 수 있는 성령님으로 인한 신령하고도 기적적이면서 실제적이고 경험적이며 절대적이고도 상상도 다 못할 정도의 하늘의 힘과 실제와 누림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치료하는 광선의 실제와 경험들, 생생함과 강렬함들에 있어서의 모든 필요와 전제는 반드시 아래 본문에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이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진정 그러한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고 창세 전부터 시작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자체부터가 근본적으로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기에, 근원적, 본질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며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사람, 말씀의 신앙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사모한다는 것, 동행한다는 것, 연합한다는 것, 거룩하게 된다는 것, 의롭게 된다는 것, 영적이라는 것, 기뻐 역사하시기에 합당하게 된다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다 마찬가지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좀 더 현실적, 실제적으로 말해 그 어떤 시련과 시험들, 유혹과 박해들, 더 나아가 목숨까지 왔다 갔다 하는 상황들일지라도 내 감정이나 경험, 소견, 욕심, 눈치보다도, 또한 세상의 상식과 법칙들보다도, 심지어는 과학이나 불가능들보다도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바로 그 말씀을 더욱 더 전심으로 붙잡고, 가장 최우선으로 하며, 힘들수록 오히려 더더욱 치열하고 절실하며 뜨겁게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오직 말씀대로 의지하며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실행하는 믿음이..
사실상 그 어떤 인생도 완벽할 수야 없겠지만 순간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진정으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사모하며 읽고 실천하면서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경외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고, 다름 아닌 소위 말하는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과 직결된 의미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경외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며, 실상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힘, 세상적 방법으로는 제대로 거하고 누리며 다다르기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라도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야 하는 현실인 것이기에 그러한 경외보다는 반대에 가깝게 되곤 하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원론적으로 모든 인생들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그 자체로는 영적으로 죄악과 진노와 저주들, 음부와 사탄과 심판들의 손아귀에 있고, 갈수록 더 죄와 불신앙들을 반복하며 쌓고 또 쌓게 되는 실제와 현실인 것이며, 뿐만 아니라 스스로 죄를 해결하거나 극복하는 것도 불가한 존재와 실정인 것이고, 사실 애초부터 경외의 전제인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 자체부터 사람의 힘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정 모든 인생들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있어서 모든 전제이자 우선, 절대적 요건에 있어서는 어쨌거나 반드시 메시야 개념이 함께 이어야 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 세상과 세상 끝 날, 영원에 이르기까지 죄악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위해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메시야를 계획하시고 약속하시며 예정하시고 계시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성취되어 지게 하신 일, 곧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그 시작인 것이고..
게다가 실제로 유일한 메시야이신 구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에 따라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온 세상과 모든 인류보다 더 크시고 모든 시간과 공간들을 뛰어 넘으시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어 길과 통로와 대문과 접점 등과 같은 위치와 역할과 권한이신 메시야로서의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해 필요한 모든 값과 대가들을 대신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구원을 모두 다 이루심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며,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그 누구든지, 그 어떠한 죄인이든지 간에 바로 그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든 믿음으로 인해서만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이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실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정말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본질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이자 말씀의 나라인 천국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으로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약속의 말씀들을 말씀대로 믿으면서 참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경외의 모든 처음이자 전제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라도 참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삶의 자리들, 현실의 순간순간들 속에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얼마든지, 실제로 적잖이 죄악과 세속과 정욕과 자기 소견과 온갖 불신앙들 등으로 인해 병든 신앙, 마치 죽은듯한 신앙도 될 수 있는 것이기에 더 이상 옛 사람과 같이 자기 자신의 힘이나 의, 세상적 능력이나 방법들이 아닌 다른 그 무엇보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에 대한 말씀을, 직접적으로는 그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존재와 도우심에 대한 약속의 말씀도 말씀 그대로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삶의 자리들, 사역의 현장들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더 이상의 인간적인 힘이나 세상적인 능력들이 아닌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인데, 특히 사도 바울처럼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붙잡고 의지하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 가운데 약속되시고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실제적인 도우심으로 인해 죄악들과 싸우고, 혹 범한 죄악들에서는 발을 씻듯 회개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그러한 회개가 실질적인 사함과 나음과 역전의 효력도 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바로 그러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순간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가면 갈수록 더 가까이 할 수 있게 되며, 더욱 더 그러한 말씀을 깨닫고 믿으며 붙잡고 행하며 증거할 수도 있게 되며, 그러면서 더더욱 결단하고 실천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로 그러한 말씀의 몸부림들과 함께 갈수록 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케 되면서 어떤 시점에서는 목숨까지 아끼지 않을 정도로 말씀의 그릇과 영성과 열정들이 되어 지고, 특히 그러한 말씀의 신앙은 점점 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해 지고 불길 같은 역사들에 거할 수 있게 만드는데..
근원적으로는 말씀 그 자체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강력함과 실제들에 직결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살아 있는 신앙 가운데, 곧 말씀의 뜨거운 열정들이 크면 클수록 더욱 사람이 못하고 세상이 상상도 못할 하늘의 힘과 응답들까지 더 생생하고 풍성히 경험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점점 더 강하고 견고한 말씀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만드는 점진적, 점증적인 선순환들이 되는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자신 뿐 아니라 온 지경에 가면 갈수록 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의 충만하심들, 불길 같은 역사들로 인한 치료의 광선들로 차고 넘치게 만드는 견고한 신앙, 장성한 믿음, 강한 군사 같은 영성으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렇게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들, 곧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시며 준비하신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이 실제가 되고 경험이 되며, 그로 인해 더 죄와 싸우면서 더욱 말씀의 신앙이 되며, 그러면서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더더욱 충만해 지고 하늘의 역사들로 넘치게 되는 일들의 순간순간들, 상황 상황들에 있어 참 많이 유사한 면을 ‘정글의 법칙’이라는 한 TV 프로그램 속에서 잘 발견할 수 있는데..
실상 아무 것도 없는 밀림 속에서 특별히 준비한 부싯돌로 불꽃을 만들고 나무들을 넣어 태우면서 점점 더 불타오르게 할 수 있는 것이듯이 죄악된 세상에서 연약한 우리 인생들이 세상의 그 어떤 힘과 방법들로는 할 수 없는 일들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특별히 계획하시고 준비해 주신 구주 예수님으로 인해, 곧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불꽃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현실적, 실질적 시작과 누림들이 가능한 것이며, 거기에 나무를 넣듯 말씀을 통해,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으로 인해 더 큰 불길 같은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갈수록 더욱 더 실질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 구주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하는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근원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모든 역사들에 있어 그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전부 말씀과 함께 이고, 말씀의 신앙에 전적으로 직결되는데..
그것이 바로 경외의 본질이자 근본이고 실체인 것이며, 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다 실행하시며 말씀 그대로 하나하나 모두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 그러한 말씀 신앙에 있어서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과 계획과 섭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차이들은 있을 수는 있을 것이나 순간순간 가운데 크고 작은 치유의 광선들이 있고, 원론적, 실제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실상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님의 역사들인 것으로 때로는 그러한 실제들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와 이방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와 같이 마치 불길 같이 타오르고 넘쳐 나게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 누구보다 바로 오늘 나 자신에 있어서도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과 함께 얼마든지 경험케 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그에 있어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최우선으로 자랑하고 붙잡음으로 인한 지금 나 자신의 경외, 믿음의 정도나 실제들, 다른 말로 말씀 신앙의 몸부림과 열정들과 전적으로 직결되어 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그와 함께 무엇보다 이 시간 오늘 내 안의 모든 문제와 기도의 제목들에 있어서 부터 온 지경,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이를 정도의 치료하는 광선이 여러 모양으로 비침과도 같은 실제와 경험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경외의 본질이자 중심인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그 모든 일들 하나하나에 아주 깊이, 생각 이상으로 실질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1~2)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1월 2일(토)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