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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큰 자
마 18:1-1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1-14 /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막9:33-37,눅9:46-48,22:24-27]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위대한가를 물었다. 2)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 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5) 누구든지 나를 생각해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6) [죄의 유혹;막9:42-48,눅17:1-2] 그러나 만일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간에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7) 이 세상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 때문에 화를 당할 것이다. 죄의 유혹이 없을 수는 없으나 남을 죄짓게 유혹하는 사람은 화를 받을 것이다. 8)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9) 또 만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10) [한 마리의 잃은 양;눅15:3-7] 너희는 작은 어린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11)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12)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길을 잃고 헤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은 양을 찾아 온 들판을 돌아다니지 않겠느냐? 13)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만일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안전하게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14) 이와 갈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 대한 가치의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내용은 명예욕에 대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1-5)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토론을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그리고 천국의 열쇠를 약속하신 것, 베드로를 포함한 세 명의 제자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목격한 것 등으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발생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빌미가 되어 예수님께 질문을 드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고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절대적 의존의 상태 즉 하나님을 향한 철저히 의지하고 자신의 큰 능력과 의로움이 아닌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미 6:8).
작은 자를 실족게 한 자의 화(6-9) 작은 자의 구체적인 예는 앞서 언급된 어린 아이입니다. 연약한 이들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크게 책망 받을 일이 됩니다. 8절에서 손이나 발이 범죄하게 한다는 말은 의지 또는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죄악된 행동과 그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단호하고 철저하게 끊어버릴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서 어떤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외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을 가리키며 ‘네 손이나 네 발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여전히 연약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작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10-14)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무지하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10). 하나님의 관심은 큰 자와 명예로운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 연약한 자를 잃지 않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큰 자가 되기 위한 경쟁하는 제자들과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는 이들에게 천국은 또 다른 차원의 갈등과 절망을 느끼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주목하십니다. 당신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믿음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요가 동작에 아기자세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이면서 두 팔을 등 뒤로 뻗어 올려 머리를 가슴보다 낮게 만드는 것입니다. 머리를 끊임없이 가슴 아래에 두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자아가 점점 커집니다. 스스로 자신을 굽히지 않으면 삶이 우리를 굴복시켜 버립니다. 머리는 가슴 아래, 생각은 느낌 아래에, 의지는 고차원적인 질서 아래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겸양. 이런 받아들임이 축복의 길입니다. 내가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 안에서 나는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언제나 겸손하게 나를 낮추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잃은 양에 대한 집념
마 18:12-14 / 노경모목사
2006년도에 개봉되어 13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 '괴물'이라는 영화는 한강변에 나타난 괴물에 의해 사라진 '현서'라는 중학생 여자 아이를 칮기 위해서 나서는 일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오로지 현서를 찾기 위한 집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섭니다.
그 영화에 전반에 흐르는 강력한 느낌은 한 아이를 찾기 위한 일가족의 집념입니다. 그 집념으로 결국 '현서'를 괴물에게서 찾아 냅니다. 한 아이를 찾기 위해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의 집념, 삼촌의 집념, 고모의 집념, 할아버지의 집념이 너무나 강렬하게 관객의 마음에 깊이 박히는 영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양 일백 마리가 있는 어떤 사람이 그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위해서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1대 99입니다. 한 마리보다는 아흔 아홉 마리가 더 가치가 나갑니다. 우리는 흔히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대답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목자는 나선 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목자는 한 마리의 잃은 양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이고 있을까요? 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한 집념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이 예수님께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세지입니다.
첫째, 바로 그것이 '목자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너희라는 어떨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다음에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는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잃을 양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두 말할 필요없이, 더 이상 생각하거나 지체할 필요없이 바로 찾아 나선다는 것이지요.
100마리의 양의 주인인 목자가 '나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반드기 찾겠다.'고 말한다면 그 누구도 그 말에 대해 시비를 걸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주인인 목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한 마리의 잃은 양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리의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마리의 길을 잃은 양과도 같았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들짐승에게 물려 죽든지 아니면 굶어 죽든지 해메다가 지쳐 죽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53:6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 행하여 다 자기 길로 갔었습니다. 그 길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영적인 사망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쓸모가 있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목자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이 길을 잃은 양인 우리들을 찾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에스겔서 34:12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말씀처럼 하나님이 잃은 양을 찾아서 구원하시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 마음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다는데 그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잃어 버린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잃어 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마가복음 2:1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잃어 버린 한 영혼이 아닙니까!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도, 과거의 우리와 같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섭시다. 우리의 주변에 길 잃은 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목자의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3절을 볼까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길을 잃은 양을 찾으면 목자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합니다. 얼마나 기뻐하냐 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 15:7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기라성과 같은 믿음의 위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위인들 99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것 즉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잃은 것을 찾았을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셨지요? 어릴 때 잃어버린 아들을 30년 만에 찾은 부모님을 보셨지요?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괴물에게서 '현서'라는 아이를 찾은 가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영화를 보신 분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분들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잃었다가 찾은 사람들은 너무 기뻐서 한결 같이 잔치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6절을 보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엽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합니다. 잃었던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너무 기뻐서 이웃을 불러 모으로 함께 즐기자고 잔치를 베풉니다.
우리가 일었던 한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면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서 찾은 영혼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을 찾은 우리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 잔치의 주역으로 우리들이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얻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잃은 한 영혼을 찾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그 고통이 인간적으로 너무나 크고 힘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여 나에게서 십자가의 고통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하셨지만 그러나 곧바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잃은 영혼을 찾는데 강한 열정과 집념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셨습니다.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뜻일진데 우리도 기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한 영혼을 찾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집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집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십니까? 그 집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까요?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시 위한 예수님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십니까? 그 집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셨을까요?
우리도 길잃고 방황하는 우리 주변의 한 영혼에 대해 안타카운 마음과 사랑의 마음과 강한 집념을 가집시다. 그리고 그들에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 냅시다.
19세기 미의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는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특히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잠 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밤중에 거리에 서서 말씀을 전할 대상자를 찾는데, 한 술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가가서 다가가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술 주정꾼은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부터 벌컥 내었습니다. 무디는 너무나 낙심이 되어 기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는데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렸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예전의 그 술 주정꾼이었습니. 그 술 주정꾼이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느냐는 말에 크게 화를 냈으나 그뒤로 부터 그 말이 내내 계속해서 귓전에서 떠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잊을려고 해도 잊어지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씨는 무디가 뿌렸으나 씨가 자랄 텃밭인 그 분의 마음을 성령께서 내내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형체도 없는 작은 씨가 그 사람은 굳은 마음의 밭에 뿌려져 묻히고 뿌리를 내려 계속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역사를 합니다. 그러므로 잃은 영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시편 126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강한 집념을 가지시고 우리를 기필코 구원하셨는데,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처럼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그러한 충성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족케 하지 말라
>성경본문|
마18장 05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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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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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상호목사
>비 고|
세광교회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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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5-9
오늘 말씀에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실족'이라는 말입니다. 남을 넘어뜨린다는 뜻과(16:23), 혹은 남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뜻(17:27)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남을 잘못 판단하게 하여 낭패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가족들의 과거 신앙 경력을 꼭 물어봅니다. 비록 현재는 교회 생활을 하지 않는 가족일지라도 과거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은혜를 체험하고 제직이나 교사 혹은 성가대원으로 봉사 생활을 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현재는 교회 생활을 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생활 중 남에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교회를 그만두었다고 말합니다. 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물질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부도덕한 행실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 다툼과 분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이모저모로 실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을 넘어뜨리는 결과는 큰 비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세상은 실족케 하는 일로 말미암아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화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불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 보면 영원한 불, 혹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걸려 넘어졌든지 스스로 넘어졌든지 신앙에 실족한 결과는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때 주님 앞에 서서 남들이 나를 넘어뜨려서 신앙을 팔아먹었노라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족케 만드는 사람도 화가 있지만, 실족하는 자 자신도 화가 있습니다. 법정에서 죄인을 처벌할 때에 주범이 있고 공범이 있습니다. 주범은 대개 범죄를 앞장서서 꾸민 사람이고, 공범은 이 범죄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주범만 죄인이고 공범이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많은 범죄자들로부터 자신의 범죄가 사회 탓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가장 무책임한 말입니다. 굶는다고 모두 남의 것을 훔쳐야 되나요? 속상하다고 남에게 분풀이를 해야 됩니까? 유혹받았다고 해서 꼭 범죄에 빠져들어야만 되나요? 남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꼭 내가 신앙을 버릴 이유가 됩니까? 모든 범죄의 일차적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1:32은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죄는 사형이다! 왜냐하면 범죄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기 때문이고, 그 범죄의 상대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실족하는 사람과 실족시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주범과 공범들로 충만합니다. 국가법을 어긴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어긴 불신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이나,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신앙에서 떠난 사람들은 실족으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소자 한사람을 넘어뜨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위대한 자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고,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자란 말은 첫째로 어린 아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둘째 의미는 어린 아이처럼 소홀히 취급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남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입니다. 비천하고, 가진 것이 없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소자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상대해야 될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명성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유명 인사들이 예수 믿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여기고 자랑합니다. 간증 집회를 했다 하면 무슨 유명한 가수요, 배우요, 전직 고관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창경원에 원숭이 구경하는 것처럼 신기한 일인가요? 교회가 무슨 유명 인사 끌어들이는 곳입니까? 사실 우리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될 사람들은 무명하고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성의 열 문둥이, 열두 해를 혈루로 고생하던 여인, 갈릴리의 순진한 어부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베다니의 가난한 고아들 나사로 남매, 백부장의 하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간질병 걸린 아들....이 주님이 만난 사람들입니다. 작은 소자 중 하나가 구원 받는 것! 그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고관대작의 신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미미한 한사람 한사람의 신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높은 사람, 학식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설교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사람 하나가 실족지 않고 신앙에 서도록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세상적으로 큰 자 넘어지는 데만 관심 갖지 말고, 작은 자 넘어지는 것에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요즘은 대형화의 시대입니다. 대형화 시대에 작은 자들은 멸시와 천대를 각오해야합니다. 서글픈 것은 교회조차도 대형화의 유행을 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인들 마다 대형화에 휩쓸려서 작은 자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강물에 자갈 밀려가듯이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밀려다닙니다. 소자들이 실족하는지 죽어 자빠지는지 살필 길이 없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최근에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대형화가 사회 발전의 한 현상이지만 장차는 소형화 개인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디다.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보다 지금은 학급당 인원이 열명 이상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학급당 인원은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실에는 열두 명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어떤 예배당에는 목자와 양이 대부분 안면도 모르면서 앉아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작은 자 한사람이 넘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작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실족케 하는 원인을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가장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자신이 가장 신앙적으로 옳고, 자신이 가장 신앙이 좋고, 자신이 가장 고상하고, 자신은 결점이 적고, 장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남들은 다 잘못된 신앙을 가졌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결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점이 비극의 원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남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남의 얘기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너희가 남을 실족시키고 있지 않느냐! 바로 지금 너희가 남을 시험에 들게 하고, 남을 유혹하고, 남의 신앙을 약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넘어뜨립니다. 고의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려고 해서 넘어뜨리는 것이 아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가 남을 실족케 합니다.
언젠가 모 교회 사모님이 기도 때문에 혼난 적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 중에 기도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항의를 했어요. 사모님이 자기를 교회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집에 와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언제 남을 나가라고 기도한 적이 있느냐?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라. 무슨 뜻이든지 간에 나간다는 의미의 기도를 한적이 없는가? 그랬더니 한참 생각하더니 배꼽을 쥐고 웃습니다. 최근에 취업하러 해외에 꼭 나가기를 원하시는 집사님이 계신데 비자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서 그것을 놓고 한참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같이 웃었습니다. 좌우간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다음부터는 중얼 중얼 기도하고 한국말로 기도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꼭 자기가 눈 똥을 자기가 밟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실족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꼭 의도적으로 남을 넘어뜨리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중에라도 남을 넘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명령을 하십니다. 성직자가 되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입니다. 남보다 위대한 자가 되고 싶어하는 제자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해내기 위해서 나선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남을 전도하고 남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하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작은 자 하나라도 넘어뜨리지 않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남을 실족케 만드는 결점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뽑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결점이 많습니다. 個性이 너무 강해요. 이 개성을 요즘 아이들은 개같은 성질을 줄여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개같은 성질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남들이 실족합니다. 남이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만 생각지 말고,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세요. 남의 눈에 티끌만 찾아내지 말고 내 눈의 대들보를 뽑아내세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세요. 표정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피차 넘어지고 자빠지다가 볼일 못봅니다. 실족하고 나서 남을 탓하는 사람이나, 남을 실족케 한 사람이나 각자 자신을 먼저 뜯어 고쳐야 됩니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손을 자르고, 발이 범죄케 하거든 발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눈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 땅에는 온 몸이 멀쩡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체가 건강해서 육체의 힘만 믿고 살다가 지옥에 간다면 차라리 병들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두 손이 멀쩡해서 놀음하고 폭력을 휘두른 다면 두 손을 자르고 조용히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두 발이 멀쩡해서 간음하러 다니고, 강도짓 하러 다닌다면 차라리 두발 자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혀가 멀쩡해서 이말 저말 남을 시험에 빠뜨리고 지옥에 가게 한다면 차라리 혀를 자르고 벙어리고 천국 가는 것이 낫습니다. 지식이 많아서 걸림돌이 된다면 차라리 백치가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실제로 그런다면 온전한 사람 하나도 없겠습니다만 그런 각오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지체 속에 있는 모든 실족의 원인들을 뽑아내 버려야 합니다.
남을 실족케 한 사람들은 어떤 처벌을 받나요? 오늘 말씀에 보니까,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사형법에는 이렇게 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 방법이 없습니다. 시리아나 그리이스 로마의 사형법입니다. 특히 아버지를 죽인 원수, 혹은 사회의 공공 안녕을 파괴한 자를 죽일때 적용한 사형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극형을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보다 낫다는 말일까요? 살아서 남을 실족케 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28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 불에 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죽고 영혼이라도 구원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꼭 필요한 사람,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 오늘 주님은 남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신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가정도 만드셨습니다. 이웃과 이웃을 만드시고 연합하여 살도록 하셨습니다. 전쟁이나 하고 남을 죽이라고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강도짓이나 하고 간음하면서 불행을 만들어 내라고 인간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악 세상에 교회를 만드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남보다 앞서서 예수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높아지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남을 시험에 들게 한다면 신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신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결심을 하고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첫째는, 소자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작은 자들의 것입니다. 목에 힘주고 다니는 자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낮고 비천하고 작은 자들을 살피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이 교회에 어느 지위 높은 사람이 와서 앉아 있는지를 살피지 말고, 어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이 와서 앉아 있는지 살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이런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높은 자의 눈치 보다가 낮은 자를 놓치지 말고, 가진 자를 살피다가 못가진 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실족케 하는 일은 무의식중에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못된 인간성 때문에 부지중에 남들이 실족합니다. 우리는 피차 자신을 살펴서 서로가 남을 넘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주님의 심정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신앙을 세워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마 18:5-6 / 김남수목사
오늘 아침에 맨하탄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콜롬부스 애비뉴를 지나면서 뉴욕은 멋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리는 것이 파리의 어느 거리처럼 멋있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세계적인 도시 뉴욕에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멋있는 도시에, 멋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은 참으로 멋있고, 아름답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뉴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도시요, 멋있는 도시입니다. 하와이에 갔더니, 너무 멋있고, 아름다웠습니다. 남태평양의 훈훈한 바람과 떠다니는 아름다운 구름, 푸르른 태평양의 바다 색깔, 예쁜 꽃들과 새, 아름다운 야자수, 모래 밭, 수 많은 산들과 언덕, 참으로 멋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에게 “당신들은 참으로 멋있고, 아름다운 곳에서 사십니다” 고 말을 하니까, 그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한 달 만 좋습니다. 두 달째부터는 진력이 나고, 석 달째는 짜증이 나고, 넉 달 째는 본토가 그리워서 대부분 불평을 하며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서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 분은 어디를 가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행복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환경보다는 천국이 내 손이 닿는데 있다라는 말씀처럼,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만, 내 손 닿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천국을 여기 저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신명의 천국, 영혼의 천국, 여기가 천국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뉴욕에 살면서 여러분 마음속에 참 기쁨과 감사와 신나는 마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영혼 속에는 사람이 밥만 먹어서 만족하는 건 아닙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해서 신명의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이루어 드릴 사명감을 깨달을 때 행복하게 됩니다. 내가 왜 존재하며, 무엇 때문에 살아 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야만 공동이 메워지고, 여기에 만족감과 기쁨과 행복이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과 구원의 감격과 그 구원 받은 후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사명을 깨달을 때 우리는 날마다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기쁨도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사실, 신앙은 사람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종교는 사상과 문화와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인도를 여행해 보니, 인도의 가난과,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 역할의 결정적인 주범은 바로 종교인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은 대부분 힌두교인이고, 힌두 교인은 Ganges 강에 가서 한 번 몸을 담그는 것이 일생의 소원입니다. Ganges 강을 어머니라 부르고, 인도를 거치는 히말라야 에서 출발한 강 줄기를 언젠가는 한 번 가서 몸을 담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강에 몸을 담그면, 죄 사함을 받고, 죄는 다 용서 받고, 다음 세상에 환생을 할 때 좋은 환경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일생 동안 성지를 순례하고 목욕을 하기 위해서 Ganges 강으로 갑니다. 금년에도 1, 2월에 쿰부 멜라이라는 최대의 힌두교 축제에 700백 만에서 1,000만 명이 두 달 동안 Ganges 강에 와서 예식을 행하고, 물에 들어 가서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목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Ganges 강가에는 크고 작은 화장터가 즐비하게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연기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공동 묘지와 같고, 정말 복잡한 곳 입니다. 다 태운 재를 강에 수 없이 뿌리기 때문에 강물은 시커멓게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부자들은 시체를 다 태울 만큼 장작을 가져 와서 태우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장작이 충분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타다만 시체가 강에 떠 내려 가는 모습은 수시로 보입니다. 속죄를 위해 몸을 씻고 의식을 하는 사람, 빨래 하는 사람, 보트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여행자 모습, 또 화장 후에 뿌려 지길 기다리는 시신,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 하수물, 화장도 못하고 떠 내려 가는 시신들이 그 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빨래하고, 목욕하고, 한 쪽에서는 화장해서 그 가루를 뿌리고, 새카맣게 된 구정물을 성수라고 마시고, 그걸 병에 담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마다 끊임없이 인생이 무엇인가, 죽음이 무엇인가, 종교는 무엇인가 하는 깊은 회의와 만감이 교차되는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성경 마태 복음 18장을 보면 제자들이 나와 예수께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이걸 보면 제자들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천국도 세상에서처럼 계급과 등급이 있어 누가 다스리고, 높고 낮음으로 계산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이가 없으셔 아이 하나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이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천국 가서 높이기는커녕, 들어 가지도 못 할 것이다 하시고, 이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이니라 하시면서 아이를 보신 다음 그것과 상관 없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를 보니 세속에 물들은 제자들의 모습에 비해서 아이가 너무 pure하고, 이 아이의 순결한 영혼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 다시 이 아이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시던 말씀, 제자들과 주고 받던 말씀과는 상관 없는 다른 주제를 꺼내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이런 말씀을 주시면서 이런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천사들이 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느니라.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으시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설명을 하시면서 한 영혼, 한 생명,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한 가치를 인정해 주신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건물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직책과 제도나 종교적 계율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사람 하나를 사랑하시고, 그 사람의 영혼과 인생과 삶과 영생을 바라 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종교와 잘못된 종교의 차이 인 것입니다.
인도의 캘커타에는 빈민가가 있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물론 인도인이 아닌, 선교사 수녀였습니다. 어느 날 다른 수녀들과 거리를 지나는데, 거적에 둘둘 말린 시체 같은 것을 보고, 거적을 열어 보니 쥐 세 마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너무 놀라서 자세히 보니 시체 같은데, 쥐가 발을 뜯어 먹은 흔적이 있습니다. 개미와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죽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덮으려고 하니까, 시체인줄 알았는데 움직이는 것 이었습니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녀들과 함께 그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 이 환자를 받아 달라고 하니 너무 늦어서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환자를 받아 줄 때까지 테레사 수녀는 떠나지 않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병원에서 치료를 해 주고 결국 얼마 후에 그 환자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테레사 수녀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마저 잃은 채 마지막 순간을 짐승처럼 맞고 있는 이 모습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사랑의 집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노상에서 방치되어 임종을 맞는 수 많은 사람들,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임을 인식하고 죽을 수 있도록, 시체처럼 된 사람들을 받아서 씻기고, 약을 주고, 따듯하게 보살피고 마지막 순간에 손을 잡고 걱정하지 않고, 편안히 죽을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짐승처럼 죽어 가던 사람들이 많은 군중 속에서 자기가 죽어 가고 있는데도 아무도 돌보지 않고, 도리어 개나 고양이는 귀여워하면서 죽어 가는 사람은 무시 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종교가 이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인도에서는 곡식의 20%를 쥐가 먹는다고 합니다. 2,680만 톤을 쥐가 먹는다고 합니다. ¼인 700만 톤만 있어도 북한의 주민들이 1년 농사 짓지 않고도 전 국민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 양의 4배를 쥐가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쥐를 잡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종교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짐승으로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에 집에 돌아 다니는 쥐가 죽은 자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환생했다고 믿기 때문에 쥐약을 나누어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도시에 가 보면 소가 마음대로 어디든지 여유를 갖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소가 신이기 때문에 아무 곳에 가서 먹어도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는데, 소가 배부르게 먹어도 손대지 못하는 종교가 무엇입니까? 종교가 잘못되면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렇게 수 많은 군중 속에서 죽어가는 한사람 한사람을 씻기고, 따듯하게 위로하고, 죽음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영생과 천국에 대해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새로운 신앙의 안내를 하고, 그들의 눈빛 속에서 안정감을 찾고, ‘이제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조용히 숨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때는 힌두 교인들이 와서 도대체 왜 이런 건물에 냄새 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모아 오느냐며 청년들이 데모를 하고 힌두 교인들이 경찰에 고발을 해 경찰이 왔습니다. 경찰이 조사하기 위해 둘러 보고 나가서 “너희가 너의 부모, 너의 아내, 너의 어머니나 자식들이 이 일을 하려면 하고, 그렇지 않으려면 잠잠이 있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것, 이것이 신앙이고, 참 종교라며 이런 말을 힌두 교인들에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중의 어린 소자, 작은 자라도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람의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모습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 교회, 신학, 교리, 전통은 부끄럽게도 이 주님의 중요한 가르치심의 핵심을 잊어 버리고, 이상한 풍토에 밀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성장이라는 바람, 축복이라는 물질주의에 사람들은 점점 취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중요한 핵심, 주님의 명령을 어느 시간에서부터 사람들이 잊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Dynamics를 잊어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폭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특히 아주 순결하고, 어린 영혼들의 눈을 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분야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잊어 버린 이것을 공산주의자들이 발견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18세 미만의 모든 어린이들에게는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전에는 어떤 종교 교육도 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국 교회는 지금은 좀 달라 졌지만, 주일 학교라는 자체를 없애 버렸습니다. 옛날부터 없었지만, 아이들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회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18세 이전까지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사상 교육이 완전히 끝나기까지 절대로 종교 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18세까지는 무엇이라도 교육을 시켜라. 세속주의이던, 물질주의 이던, 타락 주의 이던 다 가리키고, 18세 이상이 되면 열심히 전도하고, 전도 폭발해서 그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들여서 몇 명 구원 받았으며, 교인이 몇 명 되었는가를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번에 캄보디아에 가서 놀랐습니다. 그 곳에 선교사님이 두 분 계시는데, 한 분은 10년, 한 분은 5년 그 곳에 계셨습니다. 아무리 어른, 노인들한테 전도를 해도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무엇이라도 주면 오고, 안 주면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선교 보고를 해야 되는데 곤란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또 교인이 늘어 교회가 성장을 했다는 보고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른들은 안 모이면 놔두고, 아이들을 데려다 10년 동안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가르쳐서 그동안 300명을 잘 돌 봤드라면, 10년 지난 지금 300명이 되었을 것이고, 그 아이들에게 가족이 생겼으면 배가 넘는 교인이 생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선교사님이 왜 그리 쉬운 방법을 생각 해 내지 못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들에게 교인이 어른 300명, 아이들 700명이라고 하면, 교인은 어른 300명만 생각하고, 1,000명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용주의 교회에서 실적과 실제적인 숫자만 세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계수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분야를 교회가 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이들 영혼과 어른 영혼들이 동일하다는 것과 색깔과 빈부, 노소도 없는 것은 영혼의 소중함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실한 주님의 말씀, 소자 이 어린이 하나를 대접하는 것이 나를 대접하는 것이고, 이 사람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신학생들이 혼두라스에 다녀 왔습니다. 여기서 보던 얌전한 신학생들과는 달리 그 곳에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열심히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돌아 올 때는 다른 신학생들이 되었습니다. 초롱초롱한 어린이들의 눈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본 것입니다. 소중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돌아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꿈이 있을 때 새로운 한국 교회가, 한국 선교학이, 한국 신학이, 한국 교회 성장학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것을 빼 놓은 잊어 버린 이 분야를 우리가 꿈꾸고 이루어 드리는 새 역사의 비전을 갖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는 이러한 꿈과 비젼을 마음속에 지니십시오. 새 역사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 하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가지십시오. 그리고, 꿈을 가지십시오. 꿈이 없는 사람, 살아 갈 목적을 잃어 버린 사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는지 이것이 희미한 사람은 용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 시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단을 세우시고, 새로운 역사의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처럼 뜨거운 열정과 애정을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작은 아이라도 귀하게, 소중하게 세우시고, 사랑을 쏟으시며, 나를 보아서 이 아이를 영접하고, 이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동일한 가치와 동일한 우선 순위를 부어 주시면서까지 영혼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인간의 인간됨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말씀 마음에 새기고 우리 시대에 잊어 버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편 드시는 하나님
마 18:5-9 / 이정선 목사
서울의 강남에 가면 소위 잘 나가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인들은 의사나 변호사, 교수,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CEO, 이런 분들로 구성이 되어 있고, 목사님들도 외국에서 받은 박사 학위 하나쯤은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과 경제력, 권력까지 갖춘 집단이다 보니, 하는 일들도 많고, 뭘 해도 잘 합니다. 소위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곳에 가면, 역시 예수 믿고 믿음으로 살면 성공한다는 환상과 신화가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저의 형님 한 분은 경기도 안산에서 목회를 합니다. 안산은 공단 도시입니다. 한국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도시는 새로 생긴 도시라서 깨끗하게 단장이 잘 되어 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저의 형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가 보니까 교인들 중에는 시골에서 올라와 쪽방에 살면서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도 있고, 길거리에서 리어카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고, 풀타임 잡을 구하지 못해서 파트타임으로 여기 저기 몇 군데 다니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었고, 파트타임 일을 마치고 택시비를 아끼려고 뙤약볕에 교회까지 걸어와서 봉사하는 분들, 고된 일을 마치고 철야기도회에 나와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신실하고 믿음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믿음으로 살면 성공한다는 논리는 무엇입니까? 강남의 교인들이 믿음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라면, 공단 지역의 교인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힘들게 사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그런 신화에 물이 들어 있습니다. 강남의 잘 나가는 교회의 성공한 교인들도 믿음으로 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고, 공단 지역의 가난한 교인들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것은 동일합니다. 같은 예수를 믿고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공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강남의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이나 공단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나 우리 주님의 입장에서는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 두 집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같지 않습니다. 한쪽은 존중과 찬사를 가지고 바라보지만, 다른 쪽은 무시하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간증한다면 사람들이 감동하고 존중합니다. 그러나 힘들게 살면서 그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우리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세상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실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 여기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실제 어린아이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그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던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이 어린아이는 요즘 핵가족 시대에 가족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고대의 봉건적이고 어른 중심적인 사회에서 어른들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힘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아무런 자기주장도 할 수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큰 일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는 꼴이 초라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처럼 영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하신 말씀을 보세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은 대표성의 원리, 또는 동일시의 원리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빌립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1). 나는 선지자도 아닌데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습니다. 동일시의 원리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게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어린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그것은 곧 주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동일시하십니다.
우리의 본성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을 사모하고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무시당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즉 그들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의 역전 현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요구됩니다. 높아지려 하기보다 낮아질 줄 알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틈에 끼어보려고 발버둥하기보다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돌보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가 되기를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미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나의 능력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이 되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얕보이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예수님에게는 소자, 즉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가장 존귀한 사람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자는 세상에서 무시를 당합니다. 불이익을 많이 당해요. 예수를 믿고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은 인정과 존중을 받지만, 예수를 믿어도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이리 저리 많이 치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믿는 사람들에게마저 무시를 당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보십니까? 우리 주님이 보신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데 힘이 없는 사람을 누군가가 실족케 했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넘어지게 한다는 것인데, 죄를 짓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힘없고 돈없는 사람이 무시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니까 속도 상하고 미움도 품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결국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족한 사람도 잘못이지만, 여기서 주님은 그를 실족케 한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십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힘없는 사람을 실족케 해서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실족케 하는 일이야말로 벌을 받아도 크게 받아야 할 나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 다른 사람을 범죄하게 하는 것이 큰 잘못이고 제거해야 할 일인데, 그것은 개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들을 실족케 하는 일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그렇게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었으면, 예수 믿고도 아직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서로가 서로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그래서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영접하며 사는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소원합니다.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
마 18:10~ / 문기태목사
여러분의 자녀들을 큰 인물로 키우고 싶습니까? 작은 사람으로 키우고 싶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자녀를 크고 훌륭한 인물로 키우고 싶어합니다. 하다못해 키라도 많이 크라고 어려서부터 많이 먹입니다. 음식은 물론이요 좋다는 것은 가리지 않고 많이 먹이고 싶어합니다. 공부를 잘 해야 위대하게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이미 초등학교때부터 한 번에 과외를 너 댓가지씩 시키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조기 유학 열풍이 불어서 아예 일찌감치 외국으로 데리고 나가 살며 아버지와 떼어 놓는 가정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총동원해서 정말 큰 인물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큰 인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에이, 이제 나는 늦었지, 클만큼 다 컸는데 뭘 더 크기를 바래..' 여러분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인물이 되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그런 여러분을 본받아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큰 인물로 인정받는 것도 좋지만 천국에서 큰 인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하고 훨씬 좋습니다. 모두 그렇게 믿으십니까? "여러분 모두 큰 사람되세요." 서로 인사합시다. "천국에서 큰 인물되세요."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교회를 많이 세우고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이다. 다음은 복음을 위한 헌신과 열정이 특별한 사람이다. 그리고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한 사람이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곁에 있던 어린이 하나를 불러 앞에 세우고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절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어린이를 잘 대하는 사람이 주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됨을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어린이에게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치십니까? 어떤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 자라고 가르치십니까?
1.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이를 영접하는 사람입니다(5)
여러분은 어린이를 영접하십니까? 박대하고 쫓아 버리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어린 아이가 힘이 없다고 업신여깁니까? 어린 아이는 돈이 없다고 지식이 없다고 업신여깁니까? 마음대로 해도 보복하지 못할거라고 업신여깁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를 잊고 있습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앞에서 날마다 뵙고 그 억울함을 아뢴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어린이를 학대한 것을 갚으십니다.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갚아 주십니다. 어린이를 속여 슬프게 한 것을 갚아 주십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의 반대는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존중해 줄 수 있습니까? 실수를 많이 하고 생각이 짧고 잘 참지 못하고 하는 어린이를 어떻게 존중해 줄 수 있습니까? 어린이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작고 힘도 없으며 골치덩어리같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천국에 살기에 가장 합당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어린이를 바라보고 존귀히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의 자녀를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어린이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를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찾아 온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만큼 축복된 일은 또 다시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앞에서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너는 수없이 나를 거부하고 영접하지 않았다. 매우 섭섭하구나!" "제가 주님을 거부했다구요? 아닙니다. 전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너는 내가 보낸 어린아이를 수없이 거부하지 않았니?"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영접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러시아 정균오 선교사에 의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참으로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한답니다. 내 아이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내 아이같이 아끼고 사랑한답니다.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은 어린이 병원이나, 공항, 교통편, 일상 생활 구석구석에서 드러난답니다.
어린이 병원! 러시아에는 지역별로 어린이 병원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어린이들의 예방 검사와 정기 검진은 물론 아이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 주거나 아이들에게 이상이 있을 때는 가정을 방문하여 진료를 해줍니다. 만약 시간이 없어 병원엘 못 가거나, 예방 접종 시기를 놓치면 그 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은 집까지 찾아와 예방 접종을 해주고 갑니다. 인상 하나 찡그림 없이 밝은 모습으로, 그리고 예방접종을 한 그 다음날에는 다시 집에 와서 열은 없는지, 다른 이상은 없는지 확인까지 합니다.
러시아의 공항에 들어서면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경비를 하고 사무를 보기때문에 왠지 겁부터 난답니다. 그러나 공항에서도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의 배려만큼은 대단하여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부모는 비행기를 탈 때나 내릴 때 가장 우선권이 주어지고, 세관을 통과 할 때도 거의 무사 통과합니다.
러시아에는 육교나 지하도, 횡단 보도가 너무 적어 대개 횡단 보도가 없는 길을 건널 때, 난폭하고 사나운 운전자들까지도 아이가 있을 때는 차를 세워준답니다.
심지어 마피아들 사이의 불문률로 정해져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가족, 특별히 어린아이와 동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선교사님은 밤늦게까지 볼일이 있으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동행한답니다. 한 번은 밤늦게 일을 마치고 잠에 곯아 떨어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건장한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려다가 안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오히려 "미안하다"며 피해갔습니다.
선진국을 여행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은 어린이의 천국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미래의 희망이자 소망인 어린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매년 어린이 교통사고율이 높습니다. 그것도 하교길 학교앞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동의 사고, 폭력 방임, 성적 학대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호주나 뉴질랜드같은 나라가 어린이를 향한 특별한 사랑을 중시하는 이유가 기독교문명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린이를 중요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나라도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25%을 넘어서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어린이를 다치게하는 모든 위험을 몰아내는 운동을 벌려야 합니다.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대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2.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같은 사람입니다.(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같아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른들은 자기를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은근히 과시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깔보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랑은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교만하여 힘이 없는 사람을 짓누르고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조선시대 중엽 이성구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다.그는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젊은 선비가 반말로 "여보게 늙은이, 나를 업어 개울을 건네주겠나"라고 말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자 젊은이는 "상놈이 양반의 말을 무시하는가"라며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
이성구는 젊은 선비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를 업어주었습니다. 고함에도 도무지 두려운 기색이 없는 노인의 의연한 태도가 이상해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가 바로 이성구대감이었습니다. 젊은이는 그를 찾아가 사죄했습니다 마음이 강한 사람은 어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부자는 남들이 자신을 가난하다고 말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캐딜락 승용차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부류는 흑인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속이 큰 사람은 성급하게 화를 내거나 과시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지위가 높아도 마음은 언제나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은 더욱 높여 주십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 보지만 참으로 큰 인물은 어린 아이같이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작은 사람은 머리가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술수와 협잡, 온갖 거짓된 수단을 총동원해서 자기를 지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큰 인물은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정말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기품이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이 가득하지만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탐욕이 가득한 이도, 거짓으로 자기를 꾸며 위선으로 포장한 이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이도 그 자리에서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겸손한 이들만이 절대로 큰 인물로 인정받게 됩니다.
성경은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성경의 원리는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낮추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우리 인격을 높여 주십니다. 우리의 자리도 높여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높여 주십니다. 우리의 인기도 높여 주십니다.
깊은 산 속에 고요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려올 때 많은 짐승들은 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왔습니다. 저마다의 몸짓을 해가며 그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슴 한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 그림자를 보면서 자기 뿔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잘생긴 사슴뿔을 딱 비추고 이리저리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했습니다. 다른 짐승들,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는 그 머리를 보면서 저것들은 참 불쌍하다 생각하고, 봐라 내 뿔이 얼마나 근사한가. 그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 그 뿔을 물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서 자기 모습에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숲에서 사자가 나왔습니다. 으르릉 할 때에 모든 짐승들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 도망을 했지마는 이 사슴도 도망하다가 그 뿔이 수풀에 걸려가지고 그는 더 도망가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슴은 뿔 때문에 죽었습니다. 저가 자랑하던 그 뿔 때문에 그는 그 아침에 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그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포춘(Fortune)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2001년 100대기업이 채택한 21세기 리더쉽이라고 하는 지도력을 제시했습니다. 그 제시한 리더쉽은 바로 써번트 리더쉽(Servent Leadership)입니다. 사실은 1977년에 로버트 케이 그린리브(Rober K. Greenleaf)라고 하는 분이 AT&T라고 하는 회사에서 38년 동안을 근무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지혜를 얻고 경험을 하고 또 배웠습니다. 그 배운 바를 집약해서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써번트 리더쉽, 2001년 신년특집으로 이 책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섬기는 지도력, 지도자는 지도자이기 전에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하고 섬기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지도자의 위치를 지킬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섬기기를 포기할 때에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대단한 이론도 아닙니다마는 이게 기본적인 것입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섬김이 문제입니다. 아내를 섬기십니까? 남편을 섬기십니까? 목원을 섬기십니까? 새 가족을 섬기십니까? 태신자를 섬기십니까? 문제는 섬김을 받으려할 때 문제가 많고 섬기려할 때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출발하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얼마만의 섬김의 마음이 있습니까? 만일에 고민이 있고 문제가 있다면 그 섬기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이요 바로 그 자세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밑을 내려다보는데 급급한 나머지 위에 계신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밑에 것만 내려다보면서 바로 위에 계신 분을 못 본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그게 망조가 든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 그는 그 옛날에 타자기가 없을 때니까 편지를 꼭 직접 손으로 써야되는데 친필로 편지를 쓰고 편지의 마지막 글은 꼭 이렇게 맺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으로부터'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이 이 편지를 씁니다.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충직한 하인일 뿐입니다. 언제나 이 자세를 잃어버림으로 해서 사회는 시끄러워집니다 본인도 불행해집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3. 천국에서 큰 자는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6)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슴은 어린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어린 사람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실제로 실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교회도 나오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들어 믿음생활을 중단한 동기가 본인의 책임인 경우도 있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잘못인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 전도하여 교회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나오는 아이를 마음에 안든다고 불러서 두들겨 패주어 무서워서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왔더니 먼저 나와 믿음이 좋아 보이는 교인들이 아무도 아는체도 안하고 쌀쌀하게 대해 교회에 실망하여 안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나가며 한참 믿음이 들어가는데 친절하게 잘 해주어 고맙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찾아와 돈꿔달라고 하더니 떼먹고 안 갚아 뭐 이런게 다 있나 싶어 교회 안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부모님이 위선된 모습에 실망하여 믿음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한참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아 시험이 들게 하고 믿음을 떠나게 하는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 먼저 믿은 이들의 말과 행동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이 크냐?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런 경우에 천국에서 묻게 될 문책이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성격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하셨습니다. 아울러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손을 잘라 버리듯 단호하게 결단하고 실족을 하게 하는 자세와 습관을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에 어린이들이 많이 전도되어 잘 나오다가는 어느날 사라집니다. 왜 그런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 보아야 합니다. 교사들이 어떻게든지 자기 반의 어린이들을 책임지고 인도해야 합니다. 교사들이 왜 어린이들이 믿음을 중단하였는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교회안에 약한 아이를 두둘겨 패서 쫓아버리는 아이가 없는가? 집안에 부모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이혼직전에 있어서 마음이 괴로와 교회를 멀리하는가? 알고 적절하게 조치를 해 주어야 합니다. 무관심하면 우리가 어린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작은 소자 중에는 겉으로는 클만큼 다 큰 어른이나 이제 교회 나오기 시작하여 믿음이 작아 작은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그들도 쉽게 실족할 수 있습니다. 실족하지 않도록 가까운 사람이 잘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족하여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켜야 합니다. 실족한 사람도 잘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여러분 어린이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기울이십시다. 그리고 믿음이 어린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입시다. 예수님께서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와 같이 마음을 낮추기 시작하며 실족한 어린이를 붙들어 일으켜 세우려고 힘쓰는 사람이 되면 천국에서 위대한 인물로 인정을 받습니다. 주님께 칭찬을 듣습니다. 천사들과 성도들에게 존경받습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시시한 인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존경스런 큰 인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자
마 18:10 ~ / 최승윤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자”, 즉 “어린아이”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어린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둘째는 “어린아이”와 같이 신앙이 연약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하든 본문 말씀이 가르쳐주는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어린아이,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쉽게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카운트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자만 5000명이 먹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 “어린아이는 몇 명이요, 여자는 몇 명이다” 이런 식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실제적으로도 무시를 당하고 소외를 당했던 계층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서구사회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경우 1928년, 미국의 경우 1920년, 우리 나라의 경우 1948년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무시를 당하면서 살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도 그런 잘못에 대한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사내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이런 저런 수단을 쓴다든지, 여자 아이를 임신하면 낙태를 한다든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 당하는 수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어른 중심으로 운영된다든지, 교회 재정이 어려우면 주일학교, 중, 고등부 예산부터 삭감된다든지, 교회 건물을 지을 때 본당부터 짓고 교육관은 돈이 있으면 짓고, 없으면 짓지 않고. 이런 일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만 있겠습니까? 이런 저런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선, 그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영혼의 무게와 어른들의 영혼의 무게는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고귀한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신묘막측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가 깊숙하게 들어오게 되면서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가치도 모두 돈으로 환산을 하고 있습니다. 연봉 1억을 받는 사람과 5000만원을 받는 사람의 가치는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르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공동의 선과 목표를 위해서 함께 노력하고, 함께 생활하지 않습니다. 그들만 따로 놉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수단이요 도구가 되는 사회도 타락한 사회입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사람이 필요할 때는 이런 저런 말로 칭찬을 하고, 관심도 갖고, 대단한 사람인양 부츠기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하지 못할 경우에는 냉정하게 잘라버리는 그런 분위기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은 불안함과 강퍅함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든지 자신도 잘려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잘라내야 한다는 강퍅함.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문을 펴서 읽으면 가슴 아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소중한 것이요, 사람 자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다른 것을 위해서 사람들이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는 것이지만 기능이 중시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고, 할 수 없는 것이 별로 없고,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라고 여겨질 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면 그 사회는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 장애우들, 노인들, 병약한 사람들, 돈이 없는 사람들,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그들을 섬겨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사회에 요구하기 이전에 교회 안에서부터 그런 정신과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은 큰 소리를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주눅이 들어서 할 말도 못하고 살도록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가 만들겠습니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의 짐을 지고, 그들이 힘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도와야 합니다.
어린아이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그런 차원에서 소자들이고,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그들은 의존적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존적이라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 말하면 부모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인격과 자유를 부모가 무시하고 부모 마음대로 아이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부모가 다 결정합니다. 물론 갓난아이 때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감에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도 있고, 취향도 있고, 목표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부모가 모든 것을 강요합니다. 강요해서 안되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합니다.
대학 전공을 부모가 결정합니다. 법대, 경영대, 의대 아니면 공대. 자녀가 갖고 있는 성향과 기질과 은사는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는 것이요, 그에게 주신 은사와 재주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라는 것인데 그런 것들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부모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면 처음에는 좋은 말로 타이릅니다. 왜 그 여자는 안 되는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아이를 설득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잠자는 아들을 깨워서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습니다. 아파트 rent를 못 내고, 밥을 못 사먹어요. 아이의 마음에 병이 듭니다. 성적은 곤두박질칩니다. 부모가 자신의 지위와 갖고 있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아이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써 조언을 할 수 있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듣지 않으면 못살게 굴고, 억압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하는 “어린아이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 가운데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갑작스럽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야 지식도 부족하고, 힘도 없으니까 부모가 하라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온 것입니다. 따라 오지 않으면 매맞고, 밥을 굶어야 하니까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가면서 지식도 생기고, 판단력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말하게 되고, 자기 뜻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여전히 아이를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섭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가 변했다고 슬퍼합니다. 화를 내고, 아이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물리적인 힘을 사용합니다. 아이와 부모가 모두 힘들어서 허덕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평생을 여러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에게 기대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주신 고유한 인생이 있는 것이요, 그만이 하나님 앞에서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고유한 삶이 있고,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라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뜻과 부모의 생각보다 우선하는 것은 여러분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따라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녀들로 여러분들의 자녀를 키워야 할 의무가 부모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를 존중하는 것이요, 아이를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 힘과 역량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성장 과정 가운데서 부모와 함께 배우고 익히는 것이요, 부모가 어린아이의 성장 단계에 따라서 자녀들을 도와서 그런 존재로 세워야 합니다. 마마보이로 만들어서 엄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로 살아간다면 결혼해서도 부모의 그늘을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내 치마 폭에서 휩싸여서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힘들고, 부모도 힘들고,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도 힘들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식들에게 성숙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고,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상적으로 성숙하게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어린아이들은 지식이 부족합니다.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고급하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교육을 교회에게 맡기지 말라고 제가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 내내 함께 생활하는 여러분들보다 누가 더 많은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여러분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읽히십시오.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읽어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십시오. 마음이 동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머리가 부드러울 때 부지런히 읽혀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되어서 풍성한 말씀의 내용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장르의 책이 있습니다. 역사가 있고, 시가 있고, 소설이 있고, 법률이 있고, 철학이 있고, 윤리가 있고, 서신이 있습니다. 기록 연대만 1400년의 세월 동안 흘러오면서 온갖 사건과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고급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쓴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고전을 줄기차게 읽었습니다. 그들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읽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고, 단테의 [[신곡]]을 읽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책 제목을 나열하는 것은 제가 이런 책들을 모두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젊었을 때, 한창 머리가 부드러울 때 나를 지도했던 분들이 이런 책들을 읽으라고 권유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읽으려고 하니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 30대 젊은 분들은 여러분들의 전공이 무엇이 되었든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고전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힘들어도 차근차근 읽어가다 보면 문리가 터지고, 그 안에서 수없이 값진 교훈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의 풍성한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 만큼 역사에 집착한 민족도 없습니다. 자녀들이 유월절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부모들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유월절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역사를 배웠고, 구약 성경을 통해서 법률을 배웠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오랜 세월 동안을 힘겹게 살아온 고난의 역사이지만 인간적인 차원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성경이라는 고전을 통해서 인문학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그들 가운데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수없이 나온 것도 그와 같은 고전을 통한 인문학을 몸으로 배워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십여년 전에 한국에서는 왜 우리나라에서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것을 못 만드냐?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미국에서 뉴미디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어떤 한국 분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애플사의 모토가 “Think different” (“다르게 생각하라”) 입니다. 창조적인 사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지난 번 애플사의 회장인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애플사의 창조적인 사고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교차로를 보여주는 그림이었는데 한 쪽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판에는 Liberal arts라고 적혀 있고, 다른 쪽 방향을 가리키는 거리 표시판에는 Technology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애플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인문학과 기술이 만나는 그 중간지점에 애플사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애플의 표어 “다르게 생각하라”에서 그 다름, 창조적인 사고는 바로 인문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는 오레곤 주에 있는 인문학을 가르치는 리드 칼리지에서 한 학기 공부도 하고, 그 때 붓글씨도 배웠는데 그게 애플 컴퓨터의 폰트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인문학은 점점 퇴보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라 선택 과목으로 되었습니다. 세계사는 마니아들만 선택하는 과목이 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역사에 대한 감각도 없고, 역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통계에 의하면 초등학교 학생들 가운데 6.25 전쟁이 한국과 일본의 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아이들이 꽤 된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있으며, 고급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불거져 나온 “검사와 스폰서의 관계”도 공부만 잘해서 사법고시에 붙고, 검사하고 판사하고 변호사가 된 사람들 가운데 부정한 돈을 받고, 성 상납도 받고, 불의한 삶을 살면서 자신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수치스러운 사건입니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앞으로 20년 뒤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무슨 직업을 갖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게 될 것인가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입니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노력한 만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나라의 시민으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면 에베소서 2: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모두 독립된 개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유한 삶이 있는 것이고, 고유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대신해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꿈과 목표와 사명을 위해서 여러분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살아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고유한 삶을 위해서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서로의 삶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사명을 위해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분들이 없겠지만 그들에게 고유하고 독특한 인격이 있고, 고유한 삶이 있고, 고유한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여러분의 돌봄 아래에 있을 때 그들의 삶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디딤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고, 천방지축처럼 앞뒤 못 가리며 산다고 하여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 믿음이 연약한 소자라고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서 언제든지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천사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성도들을 도와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고 지혜롭게, 올바르고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해서 그들을 돕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모로써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부모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녀들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짜증내지 말고, 말 안 듣는다고 신경질 내지 말고 오래 참음으로 그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서 적절하게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특히 알아야 할 것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니 인내심을 갖고 그들이 알 수 있도록 지혜롭게 잘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잠언 22:6절 말씀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역사책을 많이 익혀야 합니다. 요즈음 나오는 해리 포터 같은 책들 말고, 명작들, 고전들, 백과사전들, 과학전집들을 읽혀야 합니다. 미국처럼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도서관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습니까? 잘 이용하면 돈 안들이고 얼마든지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습니다. 티브이나 컴퓨터 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것은 부모가 통제를 해야 합니다. 볼 것,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부모가 통제를 해서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 하고, 책들을 많이 읽혀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부모와 함께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이가 하지 않더라도 부모는 스스로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배웁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20년쯤 지나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 고급하고 성숙하며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고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에도 구속 받지 아니하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런 것들이 자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부모가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날 하루 선물 주고 때우는 것으로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며, 성경을 가르치며, 고급하고 아름다운 것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10년, 20년을 자녀들과 함께 그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들은 물론 자녀들도 고상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이 귀한 은총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한 사람의 소중함
마 18:10-14 / 이종철 목사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꿉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는데 이렇습니다. 한 큰 신상을 보았는데 그 상이 심히 크고 광채가 나며 두려운 모습입니다.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본 이 우상은 바벨론 이후 세상을 다스릴 나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제국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뜨인 돌 하나가 날아오더니 이 우상을 쳐서 산산조각을 내어버립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정신이 있습니다. 경쟁주의, 물신주의라는 거대한 가치관들입니다. 이 세상 가치관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뜨인 돌과 같은 가치관이 있습니다. 바로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치관입니다. 세상은 크고 가치 있는 것만 봅니다. 작고 연약한 것은 소외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1등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들러리가 됩니다.
큰 집, 큰 교회, 대형 마트. 큰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더 싸고 경제적일 수는 있지요. 많이 모이면 장사가 되지요. 그러나 문제는 큰 것을 좋아하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잃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다 구멍가게였지요. 비록 물건은 좀 비쌌을는지도 모르지만 사람 사는 정은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갔다가 날씨도 묻고, 동네 사정도 나누다가, 또 힘들면 외상도 하기도 하지요. 물건만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정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형 할인마트로 가면서 그런 정은 사라졌습니다. 특히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이 발달하면서 더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물질문명이 발달될수록 인간의 영성은 메말라 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커질수록 사람은 사라집니다. 조직과 시스템만 남습니다.
큰 교회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큰 교회를 꿈꾸지만 막상 큰 교회를 이루면 목회자의 영성은 고갈됩니다. 사람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목회라는 게 마치 젖먹이는 엄마와 같습니다. 아이가 있어야 젖이 나오고, 젖을 빨아 먹어야 새 젖이 나옵니다. 그런데 먹일 아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영성이 뿜어져 나오지 않습니다. 저도 비록 부목사 시절이었지만 그런 경험들을 가끔 했습니다. 설교가 언제 나오느냐 하면 작은 소자를 보았을 때입니다. 내가 말씀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될 사람이 보일 때는 설교가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상대로 설교해야 될 때는 사람이 안 보이고, 어떻게 하면 잘 전할까 하는 마치 연설가나 탤런트처럼 됩니다.
제가 부목사를 사임하고 몇 달 쉬다가 외국인노동자 병원에 가서 환자들 앞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먼 타국에 와서 고생이 심한데 육신의 질병까지 얻었으니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제 심령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데 막혔던 수도관이 터지듯이 설교가 나왔습니다. 설교하고 나서 그렇게 시원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설교도 못 해 답답했는데 마침 젖을 심 차게 빨아주니까 가슴이 다 시원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진리를 알면서도 자꾸 큰 것만 바랍니다.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큰 것 때문에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잃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커질수록 사람이 자꾸 수단화됩니다. 큰 사람이 어디 있고, 작은 소자가 어디 있습니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다 소중하지요. 그러나 자본주의 경쟁사회에 살다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입니다. 경쟁대상입니다. 가치 있는 것만 좋아보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고, 부자는 존귀하고 가난한 자는 외면해도 좋은 존재처럼 되어버립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와 길 잃은 양 한 마리 어떤 게 큽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99가 크다고 하지요. 더구나 잃어버린 한 마리는 무리에서 도태될 정도로 건강하지 못한 양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하게 99에 손을 들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 때문에 나머지 99 마리는 산에다 그대로 놔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도마복음서라는 위경에서는 그 내용을 살짝 바꿉니다. 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마침 크고 소중하며 목자가 가장 아끼던 양이었다고요.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주석을 붙이기를 나머지 99마리 양은 다른 목자의 손에 맡겨두었다거나, 가까이 있는 동굴에 가두어두고 찾으러 갔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12절에서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라고 무관심한 듯 표현합니다. 목자의 관심은 오로지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만 관심이 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맹목적 사랑이란 말이 있습니다. 맹목, 즉 눈이 멀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먼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런 것 같습니다. 자녀가 전쟁터에 있으면 전쟁터에라도 달려가는 사랑입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전쟁터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사람들은 다시 인간성이 회복됩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죄악에 신음하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어 이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뛰어들었습니다. 상대방의 고통만 보였지 하늘 보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작은 소자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18장은 교회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모세오경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묶음으로 구분했습니다. 그 구분하는 틀이 18장 1절의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가 시작하는 사인이고, 19장 1절의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가 끝나는 사인입니다. 첫 번째는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선포하시듯 산에서 예수님이 새율법을 선포하십니다. 10장은 선교의 말씀입니다. 복음전도자의 자세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13장은 천국비유 말씀입니다. 7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읽은 18장은 교회론입니다. 교회공동체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장과 25장은 종말론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합니다.
다섯 개의 말씀의 산 중에서 18장은 교회론입니다. 18장 교회론의 핵심은 작은 소자에 대한 관심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작은 소자를 외면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자를 사랑하는 바로 이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 번에 걸쳐 이것을 강조합니다.
한 번 보십시오. 18장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 아이 같은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지는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우리의 무심코 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죄가 이만큼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는 시간이 가면 잊혀질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습니다.
10절 말씀 보십시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작은 소자 한 사람마다 담당 천사, 곧 수호 천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보고합니다. “오늘 아무개가 어떻게 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인 것을 알겠는데 부자의 이름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하나님의 레이더는 부유한 나라나 사람을 향하지 않고 가난하며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14절 보십시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뜻’은 만족, 기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작은 소자가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어떤 부모가 열 자식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소중한데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속에 담고 있는 자식은 제일 못난 자식입니다. 못난 자식이 행복해야 부모마음이 행복해요. 못난 자식이 못살면 그것처럼 마음 아픈 게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그 유명한 최후심판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보상받는 양의 무리와 영벌을 받는 염소의 무리로 나눕니다. 그런데 그 판결 기준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입니다.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 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주님은 우리 주변의 작은 소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작은 소자가 누구인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가나한 이웃이 작은 소자입니다. 자녀를 잃거나 병 가운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작은 소자입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삶의 희망이 상실된 사람들이 작은 소자입니다. 살고는 싶은데 모든 것이 막혀 무기력해진 인생이 작은 소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작은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노크하고 계십니다.
테레사 수녀 아시지요. 인도의 캘커타에서 고아와 병든 자들을 돌보며 20세기의 성녀로 추앙받았던 분입니다. 사실 빈민촌에서 이런 일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냄새나고 불결하죠. 또 치료해주었다고 해서 다 고마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치고 사람에게 치이기 쉽습니다. 이런 일을 일처리 하듯이 하면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이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을 마치 주님을 대하는 것처럼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손동작이 있습니다. 손을 쫙 폈다가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오므립니다. 이 의미는 영어로 “You did it to me”의 다섯 글자입니다. 아까 읽어 드린 마태복음 25절 40절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의 의미입니다. 사람을 본 게 아니라 사람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봉사가 곧 예배가 되었습니다.
사실 사람처럼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단 그런 풍요함을 맛보려면 모든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경쟁자로 대하고, 무언가 이용하려 하고, 나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움의 시선으로 사람을 대하니까 인간관계가 힘들어지고 지옥이 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만 명을 상대 했지만 그 사람들을 대중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했습니다. 마더 테레사 가 쓴 ‘한 번에 한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작은 소자를 소중히 한다는 것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장차 주어질 상급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해서 망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하고 나서 평화나 행복을 얻지 않은 사람 또한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헨리 나우엔 이라는 분은 『상처받은 치유자』란 책을 쓰고 하바드와 예일 대학 교수를 지낸 현대의 대표적 영성가입니다. 이 분이 노년에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라는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공동체는 6명의 장애인과 4명의 봉사자가 함께 사는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나우엔은 아담 이란 장애인을 돌봅니다. 아담은 지체 장애에 정신 장애 청년이었습니다. 간질 발작도 일으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엔이 하는 일은 밥을 떠먹여 주고, 옷을 입히고, 이를 닦아 주고, 목욕을 시키는 일들을 합니다. 아담은 전적으로 무력하고 연약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아담이 나우엔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우엔이 아담 부모에게 “아담이 당신에게 해준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의 부모는 “그 애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었지요. 우리의 평안의 아들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무기력한 아담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이해관계에 덮인 시선을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의 시선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기대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무기력한 아담은 경쟁 대상도 아닙니다. 복잡한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밥 한 숟가락 떠먹여 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 결과 우리 마음이 단순해지고 그 상태가 곧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연약한 사람 앞에서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사랑의 본성, 조건 없는 사랑의 본성이 깨어납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할 때 행복합니다. 제 집사람하고 우스개 소리로 아이들은 7살까지 효도를 다한다고 말합니다. 애들이 무엇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스럽잖아요! 밤잠을 못자며 사랑할 때 그것이 행복입니다. 아이들이 이제 조금 크면 생각이 생기고 그래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그 사랑의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나 사회나 교회가 건강할 때는 그 곁에 작은 소자가 있을 때입니다. 그 작은 소자가 곁에 있으면 정신이 번득 납니다. 물질에 취해 부유해져 있고 불평이 입에 배어 살다가도 작은 소자가 우리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납니다. 작은 소자를 잃어버린 교회는 불행한 교회입니다. 작은 소자를 돌아보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우리에게 가난한 북한 형제가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어요. 요즘 대학가나 청년이 죽은 이유는 작은 소자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미래만 계획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류를 생각하고 한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 건강한 사람입니다.
작은 소자를 잃어버린 교회는 불행한 교회입니다. 작은 소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교회가 자기만족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없는 사교모임이 됩니다. 작은 소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작은 소자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영적 만족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부지런히 작은 소자를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주님이 살아 역사하는 현장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소자를 향한 눈,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만 끝까지 견지 한다면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적으로 부흥한다 할지라도 이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작은 소 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마치 뜨인 돌과 같습니다. 물신숭배와 경쟁의 논리로 무장한 우상의 가치관을 깨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작은 소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가정에서 작은 소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다니는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작은 소자가 누구입니까? 항상 그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찾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런 인생으로 결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수호천사와 왕따 당한 양
마 18:10-14 / 이정선목사
현대인들처럼 영적 세계에 무관심한 세대도 없을 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과 기술은 눈부신 발달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가 한 세대를 풍미하면서 유물론이 크게 관심을 끌었습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19세기의 진화론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20세기의 유물론은 홀로 남겨진 인간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발버둥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상적 흐름이 과학의 발달을 발판으로 삼아서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을 거두어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호천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사춘기 소녀들이나 감성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정도라고 할까요? 나만을 위한 어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있고,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는 것은 매우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믿거나 실제 생활 속에서 인지하고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동화에나 나옴직한 아이디어로 치부하고 사는 것이 현대인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만 해도 이런 사상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다시피 했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서 시행하는 성인 숭상 관습과 맞물려서 우리의 삶이 항상 영적 세계와 접촉점을 갖고 있다는 사고체계를 형성했습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에서도 유사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두 명의 천사가 늘 따라다닌다고 말합니다. 한 천사는 그 사람의 선행을 기록하고, 다른 천사는 악행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두 천사의 기록을 저울에 달아봅니다. 그래서 선행이 더 많으면 천국으로 가고, 악행이 더 무거우면 지옥으로 갑니다. 전형적인 행위에 의한 구원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천사들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삶이 영적 세계에 늘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는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들이 존재한다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수호천사라는 이름 그대로 우리를 모든 위험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걸까요? 아니면 이슬람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들을 감시하고 기록하는 걸까요?
호머의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을 그린 장편 서사시인데, 인간의 전쟁 배후에 그 인간들을 편드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 신들이 마치 영웅들의 수호천사처럼 행동하고, 인간의 이해에 따라서 신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면, 인간 사이의 갈등이나 충돌에 따라 천사들도 다투게 되는 걸까요? 이처럼 수호천사의 개념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는 우리 뒤를 항상 따라다니는 그런 식의 수호천사는 필요하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분입니다. 편재라는 말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무소부재입니다.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 함께 계실 수 있고, 여기 뉴질랜드에 사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동시에 한국에 있는 성도들과도 함께 계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돌보실 수가 없어서 대신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늘 따라다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호천사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의도나 희망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현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고나 위험으로부터 항상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호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요? 누구는 교통사고가 나서 자동차가 박살났는데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살아난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모든 위험과 전쟁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하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거룩함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모두 그 목적에 따라 합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고,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도 잘못 사용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잘 풀린다는 의미로 그렇게들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궁극적인 선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선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도 하고,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기도 하시는데, 그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조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수호천사는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소자라도 저희 천사가 있다는 말씀 아니에요? 그런데 천사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배알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맡은 사람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처럼 편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천사들은 하늘에 있으면서 각자 한 사람씩 맡아 관리하는 걸까요? 학자들도 이 말씀을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 사람을 위해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렇게 말합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우실 때 천사를 보내셔서 돕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기도를 하실 때도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하실 때 동원되는 것은 당연히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사의 도움을 받는 경험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또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35년 전쯤 일입니다. 제가 한번은 저의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다가 어떤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그 할머니가 아는 사이인데 오랜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어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렸답니다. 옛날에는 시내버스에 안내양이 있었어요. 승객이 내리면 안내양이 문을 닫고 ‘오라이!’를 외칩니다. 그러면 기사가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아무래도 동작이 느리지 않았겠어요? 버스에서 내리면서 아직 한 손으로 문을 잡고 있는데, 마음이 급한 안내양이 문을 닫고 ‘오라이!’를 외쳤습니다. 그 사이에 할머니의 손이 문에 끼어버렸습니다. 버스는 달리는데 할머니가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나타나서 할머니의 다른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달리다가 밖에 할머니가 매달린 것을 알아차리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버스가 멈췄고, 사람들이 막 모여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고 그 하얀 옷 입은 청년이 어디 있느냐고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청년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버스 문에 끼어 다쳤던 손가락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그 하얀 옷 입은 청년이 천사였다고 믿습니다. 그 천사가 꼭 그 할머니의 수호천사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위급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기 딸을 도우시려고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고대 절대군주의 왕궁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누가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까? 왕이 신임하고 사랑하는 신하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만큼 영광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소자들을 돕고 지키는 일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그 소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챙기신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수호천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알려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소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는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양을 잃어버린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백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가 사라졌습니다. 길을 잃고 엉뚱한 데로 가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분명 크고 힘센 양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양들로부터 사랑받는 인기 많은 양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좀 어리버리한 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양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양일 수도 있습니다. 어디 가면 늘 늦고 뭘 해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다른 양들에게 구박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해서, 길을 잃고 제대로 찾아오지 못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이 양은 다른 양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힘들어서 일부러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그렇게 구박받으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외롭게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양이 없어지자 다른 양들은 속이 시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마음 맞는 우리끼리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골칫거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주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내버려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그 양을 찾아냈습니다. 너무 기뻐서 길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 한 마리를 더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양 일백 마리는 교회입니다. 일백이라는 수는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원 받은 백성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 온전한 수가 차기까지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교회 안에서 소자들이 무시당하고 믿는 자들의 무리 가운데 적응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실 일이지요.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소자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신뢰받고 충성스러운 천사를 보내어 지키게 할 만큼 소중한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그의 천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귀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영이 우리 모두를 붙잡으셔서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 영혼이 곧 교회입니다
마 18:10-14 / 최창훈 목사
일본 작가 중에 “길은 여기에”, “빙점”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라고 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는가를 밑바닥에 깔면서 작품을 그려나갑니다.
그래서 그분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연히 인정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일본만해도 수백만 권이나 팔렸고,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미우라 아야꼬를 전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가 어떤 환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수용소에서 각혈을 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은 당신의 구주입니다. 예수 믿으면 당신은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며 전도했습니다.
아마 그 청년은 이 여인이 나중에 일본열도를 후끈하게 데울 수 있는 엄청난 작가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그 청년은 각혈을 하며 죽어 가는 여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수백 명이 나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만큼 한 사람의 가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요3: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묶어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전 인류를 가리키지만 그 세상 안에는 “나”라는 한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통합적인 용어 속에 전부 묶어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 전체 속에 묻혀버리고 드러나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기 때문에 나 하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겠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2:2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나 하나가 세상이요, 세상은 바로 나 하나다”라는 말로 세상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처럼 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대부분 사람들이 일단 중요한 일에 있어서 “너는 저만큼 가 있어” 하고 옆으로 제쳐놓은 어린아이 하나를 예수님께서 가운데 세우시고 교훈 하시는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2가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한 명의 이 어린아이를 자기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어린아이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어린아이에게 제대로 인격적 대우를 하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 대우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확대해서 예수님께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이 세상 인류는 두 부류로 갈리는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양, 왼쪽에 있는 사람은 염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염소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예수님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갖다 드렸고, 예수님이 옥에 갇혔을 때 우리가 찾아가서 뵙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들이 언제 나에게 옷을 주었는지, 언제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언제 찾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묻습니다.
“예수님, 왜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바로 옆에 있는 어린 아이 하나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오른쪽에 있는 양에 해당하는 성도들이 찾아와서 “예수님, 우리는 세상에 있을 동안 주님께 옷 한벌 갖다 드린 일도 없고, 먹을 것 하나 갖다 드린 적도 없습니다” 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너희들은 진짜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가져 왔고, 입지 못할 때 너희들이 입을 것을 가져다주었느니라.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가 찾아 왔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그들이 묻습니다.
“예수님, 언제 우리가 그랬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곁에 있는 이웃, 어린 소자가 목말라 할 때 마실 것을 준 것이 나에게 준 것이니라. 또 그에게 먹을 것 준 것이 나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이니라.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40절과 4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어린 소자 하나를 자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린 소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게 되는 것이며, 어린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어린 소자 하나를 멸시하면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처럼 세상에서 흔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생명 하나 하나가 예수님 자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사람을 대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살고 있던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에는 좋지 못한 풍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너무 차별대우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 안내하는 분들이 뒤에 섰다가 화려한 옷에 값나가는 반지를 끼고, 요란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허리가 90도 되도록 인사하면서 안내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옷을 남루하게 입고 냄새가 나고, 어느 모로 보나 배운데도 없는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들어오면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이런 풍토가 교회 안에 만연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약2:9절을 보면 야고보 사도는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하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하찮은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만큼 예수님은 어린 소자 하나, 한 생명 하나 하나를 자기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한 명의 어린 소자를 교회와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양 100마리를 가지고 목축업을 하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하루해가 져서 자기의 우리 안으로 돌아온 양들을 세어보니 99마리는 잘 돌아왔는데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어떻게 할까?”하고 고심을 하다가 99마리를 우리 속에 안전하게 넣어놓고는 한마리를 찾기 위해 저녁도 먹지 않고 지팡이를 들고는 험한 산을 향해 올라가서 한 마리를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99마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십니까?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우리 모두가 99마리 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와서 매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99마리의 양이며,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마리 양은 무엇입니까?
아직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고,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99마리로 만족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족하시지 아니하시고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해 험한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눈에는 한생명이 교회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영혼이 교회이며, 교회가 한영혼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한영혼을 귀하게 값진 존재로 생각하십니다.
여러분들께서도 20세기에 성자라고 흔히 불리우는 테레사 수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극빈자, 병자, 고아, 죽어 가는 사람, 노인들을 불러서 모아놓고 자선을 베풀었는데,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당시, 그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126개국에 600여 곳이 넘는 사랑의 집을 만들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분의 말을 읽으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나의 임무가 대중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개인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한번에 한사람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나는 한번에 한사람 밖에 거둘 줄을 모릅니다. 나는 단 한사람만 인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2,000명이 넘는 사람을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바다의 물 한방울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방울을 보태지 않는다면 바다는 물 한방울이 모자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당신 자신, 당신의 가정, 당신이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그 하나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그 한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도록 합시다.
그 한 생명을 얻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생명을 얻으면 우리는 교회를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린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하시고, 교회를 자기와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영혼 한영혼을 소중히 다루면서 전도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셔서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잔치가 풍성한 고현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우리는 서울 강남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송태근목사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찾으시는 그 한영혼을 얻기 위해 먼저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은혜받기 위해 귀한 집회를 갖습니다.
우리 모두 갈망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여 큰 은혜를 경험하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영혼의 소중함
마 18:10-14 / 옥한흠 목사
지금처럼 한 사람의 인격이 도매급 취급을 당하는 시대가 과거에도 더러 있었는지 모르겠습
니다. 점점 인간을 경시하는 풍조가 이 시대에 만연되는 듯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어느 조
사에서 응답자의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위기라는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인간 경시풍조는 인간 존엄 사상이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역에 대해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런 저런 분석을 내놓는 것을 봅니다.
한 예로 '왜 사람들이 이 모양이 되어갈까?'에 대해서 인터넷 상에서 즐기는 온라인 게임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리니지'(lineage)라는 게임이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PK'라는 게임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은 'Player Killing'의 약자로, 게임 속에서 상대측 가
상 전사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런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연히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이 다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난 아이들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사람
죽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하는 말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데 재미를 붙인 세대가 점점 이 사회에 늘어나고 이런 자녀들과 젊은이들의
영향을 받아 기성세대까지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가 보면, 자연히 인간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고 인격 하나 하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둔감한 세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인터넷 게임만이 모든 원인은 아닐 것입니다. 좁은 땅에 폭발할 정도로 높은 인구 밀
도, 또 도시화 현상의 가속화 때문에 사람이 귀하지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발에 걸
리는 것이 사람 아닙니까? 뭐든지 흔하면 천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자
연히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못하는 경향으로 자꾸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학교나 공공시설에 가보면 분실물 신고 센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습득한 분실물을 맡기고, 또 분실물을 찾기 위해 조회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분실
물 신고 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찾아가는 사람
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관된 물건 중에는 값이 꽤 나가는 것도 있는데,
안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또 사면 될 텐데, 뭘 귀찮게 찾으러 가냐는 것입니다.
부모 역시 다시 사주면 되지, 굳이 그것을 찾아오라고 아이들을 채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흔하게 보고 천하게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물건에 대한 가치관이 결국은 사람을 대하는 가치관에도 영
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 죽었다. 열 사람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놀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인간을 경시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사상에 오염되어 가고 있
습니다.
뉴욕에 가면 인형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에게 인형을 사줍니다. 아이들이
그 인형을 가지고 놀다 보면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목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 고장난 인형을 아이에게 들려서 인형병원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네가 가서 고쳐와라."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들고 가서 "선생님, 고쳐주세요." 하고 맡기고는, 나중에 고쳐오면 "
야, 우리 인형이 이제 건강해졌다." 하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고치는 값이 사는
값보다 더 들기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고장난 인형을 아이에게 들려서 병원
으로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건 하나라도 아껴라. 귀하게 써라. 소
중하게 다루어라.' 하는 가치관을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인형은 인격을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인형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가짐이 나중에 커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자리잡는 것입니다. 만일 인형이 조금 고장 났다고
해서 발로 밟거나 집어 던지는 습관을 키웠다면 나중에 한두 사람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
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교육이 없습니다. 인격을 중시할 수 있도
록 가르치는 교육이 점점 희박해집니다.
게다가 교회를 다니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까지도 사람을 보는 태도에 변화가 있지는 않은
가, 세상 사람들처럼 인격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한 사람의 영혼
이 지니는 가치는 절대로 양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질로 따져야 합니다. 하나라도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한 인격, 한 생명을 질로써 보아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그것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헤아릴 때도 '몇 명이냐? 얼
마냐? 얼마나 크냐?'라는 양적인 것만 따지려 들지 한명의 중요성에 눈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등한히 여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속
에 되새겨보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태신자가 몇 명이냐?' 이것도 중요합니다. '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서 결신하는 사람이 전체 몇 명이냐?' 하고 숫자를 따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양이 없는 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에만
마음을 쓰다 보면 한 영혼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오늘 저녁부터 대각성 전도집회에 임해야
되겠습니다.
일본 작가 중에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다. 제가 홋카이도(北海道)에 들
렸을 때 그분의 기념관을 미처 방문하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아직도 일본 사람들에게 굉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라고 하는 작가입니다. '길
은 여기에', '빙점'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분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간증적인 작품
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는가를 밑바
닥에 깔면서 작품을 그려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연히 인정
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생기데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일본만해도 수백만 권이나 팔렸고, 우리나라에도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읽는 사람마다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마음에 복음
을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꼬를 전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가 어떤 환경에서 예수
님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매일매일 각혈을 하며 투병해야만 하는 수용소 안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그
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했습니다. 각혈을 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을 확률이 큰 초
라한 여자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겉으로 볼 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동정하고 지나가
면 끝인, 그저 한번 쳐다보고 눈물을 흘려주면 그것으로 끝인 존재, 죽으면 더 이상 찾아갈
필요도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찾아온 청년은 그 여인을 어떻게 보았는지, 각혈을 하면서 파리하게 말라있는
그녀를 붙들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믿으면 당신은 이 모든 고통에
서 벗어나서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며 전도했습니다. 아마 그 청년은
이 여인이 나중에 일본 열도를 후끈하게 데울 수 있는 엄청난 작가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못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여
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수백 명이 나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지 않습니까? 이만큼 한 사람의 가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묶어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이 세상은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 '
나'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통합적인 용어 속에 전
부 묶어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조금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
껴집니다. '나'라는 개인은 그 전체 속에 묻혀버리고 드러나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
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지? 그러면 나 하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게 보십니다. 넓게 보십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십니
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신서를 통해서, 특별히 사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가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가면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세상을 자기자신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
하신다. 인류를 귀히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귀히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나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나 하나가 세상이요, 세상은 바로 나 하
나다.'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는 개인이 절대 실종당 할 수가 없음을 이야기합
니다. 그만큼 세상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처럼 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하나님꼐서 한 생명에 대해 웅변적으로 교훈하고 계십니다. 일
단 중요한 일에는 어린아이를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너는 저만큼 가 있어. 너는 여기에 끼
여들지마.' 하고 옆으로 제쳐놓은 어린아이를, 예수님께서 가운데 세우시고 교훈하시는 말씀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한 2가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한 명의 이 어린 소자, 이 어린아이를 자기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자신이 바로 어린 아이라는 말입니다. 5절
을 보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나를 영접한다는 말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어린아이는 다른 존재가 아
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제대로 인격적
대우를 하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 대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확대해서 예수님께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 인류는 두 부류로 갈린다고 말씀합니다. 이 가운데서 예수
믿지 않고 나오신 분이 있다면 잘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 종말이 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때 인류가 두 부류로 갈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부류를 비유로 말씀
하셨는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양, 왼쪽에 있는 사람은 염소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상하게 양은 하나님 앞에 참 사랑 받는 짐승으로, 염소는 어디서 잘못 보였는지 항상 악
역을 담당하는 짐승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염소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세상
에 있을 때 예수님께 먹을 것 드렸죠? 입을 것도 갖다 드리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옥에 갇
혔을 때 우리가 찾아가서 뵙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들이 언제 나에게 옷을 주었는지, 먹을 것을 주었는지, 찾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
이 묻습니다. "아이고, 왜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바로 옆에 있는
어린 소자, 어린 아이 하나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
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과 같으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오른쪽에 있는 양에 해당하는 성도들이 찾아와서 "예수님, 우리는 세상에 있을 동안 주
님께 옷 한 벌 갖다 드린 일도 없고, 먹을 것 하나 갖다 드린 적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진짜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가져 왔고, 입지
못할 때 너희들이 입을 것을 가져다 주었느니라.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가 찾아 왔지 않
느냐?" 그들이 묻습니다. "아이고, 언제 우리가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 곁에 있는
이웃, 어린 소자가 목말라 할 때 마실 것을 준 것이 나에게 준 것이니라. 또 그에게 먹을 것
준 것이 나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이니라.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그래서 40절과 45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어린 소자 하나를 자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래서 우리가 그 어린 소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어
린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린 소자 하나를 멸시하면 예
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흔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생명 하나 하나
가 예수님 자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만큼 깊이 인식하고 사람을 대합니까? 우
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가 살고 있던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에는 좋지 못한 풍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을 너무 차별대우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 교인들이 교
회에 나오면, 안내하는 분들이 뒤에 섰다가 화려한 옷에 값나가는 반지를 끼고 요란하게 치
장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허리가 90도 되도록 인사하면서 안내를 합니다. 가장 좋은 자리나
앞자리, 또는 특별한 분이 오시면 앉히는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옷을 남루하게
입고 냄새가 나고 어느 모로 보나 배운데도 없는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예배 드리
려고 교회에 들어오면 대우가 다릅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이리 오세요."하고 데
리고 가서는 저 뒤에 자리가 있으면 앉으라고 말합니다. 만일 자리가 없으면 '여기 서서 예
배 드리시지요.' 하고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이런 풍토가 교회 안에 만연했습니다.
이것을 놓고 야고보는 아주 엄하게 꾸짖습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2:9)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하찮은
그 한 인간,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영접하면 바로 예수님을 영
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무시하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죄
가 안되겠습니까? 이만큼 예수님은 어린 소자 하나, 한 생명 하나 하나를 자기 자신처럼 소
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여름, 잠깐 일본에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일본 동경에서 개업하시 일본인
의사 한 분이 저에게 홋카이도에 있는 별장을 쓰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1주일 정
도 홋카이도에 갔습니다. 참 좋은 별장이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를 동안 주일이 끼어 있었습
니다. 마침 제가 거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푸라노(富良野) 메노나이트 소망교회 목사님이
제게 설교 부탁했습니다. 홋카이도에 푸라노라는 도시는 약 2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천주교 1개와 신교 2개를 합해서 3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어 통역할 선교사 사모님을 모시고 예배에 참석했는데 큰 일본 신사 바로 앞에 아
담하게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그래도 이 교회에 꽤 모이겠구나!' 하고 들어갔더니 예배실이
라고 해야 불과 10평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강대상이 따로 없고 설교자고 성
도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의자에 둘러앉아 예배를 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마침 의자가
12~13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아, 오늘 참석하는 예배는 아마 10명 정도 밖에 안되나 보
다.' 생각하고는, 제가 제일 먼저 갔기 때문에 저와 통역하실 분이 앉았습니다. 조금 후에
그 교회 목사님 내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미국에 유학도 갔다 오신 아주 유능한 분이셨
는데, 70가까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그 지역에 와서 40년 가량 선교하다가 세
상을 떠나신 미국 선교사 부인이 방문차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인
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데 한 4, 50대 부인 몇 분과 남자 두 분, 그리고 나중에 30대 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는 있는데, 피아노 칠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
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40대 중년 부인이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했
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피아노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과 10명 내외로 모인
가운데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그 예배를 드리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예배다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첫 예배에 10명 내외가 둘러 앉아서 예배를 드렸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
때 생각도 났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작은 규모로 둘러 앉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에 그대
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제 눈에 가득차게 들어오는 것이었습
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가득하게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제 통역을 맡은 선교사 부인
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 오늘 놀랬어요. 왜냐하면 목사님은 수만 명이 되
는 큰 교회 담임 목사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작은 규모의 예배를 어떻게 인도하실
까?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설교도 한 10분이나 5분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목사님 그
렇게 안 하셔서 제가 참 놀랐습니다." 그 날 예배는 얼마나 은혜스러운 예배였는지 모릅니
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설교할 말이 샘처럼 계속, 계속 스며 나오는 것이었습
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설교하는데, 그 가운데 30대 부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아이
둘을 장난감이 있는 방에 들어놓고는 예배를 드리다가, 오래 못되어 엄마 곁으로 오자 아이
들을 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처음에는 새로운 강사가 오자 호기심 에
10, 15분 동안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아이 하나
를 앉고는 계속 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설교 끝날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를 앉고 있는 부인을 보면서 얼마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교인
이 귀한 일본인데 30대 부인이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졸까? 아이도 맡길 때가 없어서 데
리고 나와 예배 드리겠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리고는 제 앞에 있는 부인 하나가 천하로 여
겨졌습니다. '비록 조느라 말씀을 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전한다.' 그 부
인만 쳐다보고 계속 설교했습니다. 아마 4, 50분 동안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
이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해왔
지만 아직도 제 마음이 병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한 분 한 분을 제가 알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름도 잘 모르고, 한번 만나도 도장이 찍히지 않습니다. 두 번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서 어떻게 보면 저는 한 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한편으론 병든 목회를 하고 있진 않나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푸라노에 있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알게 됐습니다. 아직 제 마음에 병이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의 얼굴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놓고
설교하지, 수만 명을 상대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분이 중요합니다. 한 분은 예수
님 자신입니다. 이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이 정신을 잃어버렸다면 저는 삯꾼이지, 목사
는 아닙니다. 우리가 대각성전도집회를 앞에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에도 이런 자
세를 다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명의 어린 소자를
교회와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에 관한 비유를 한 가지 드셨습니다. 양 100마리
를 가지고 목축업을 하는 주인이 있는데, 해가 져서 양들을 세어보니 99마리는 우리로 돌아
왔는데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하고 고심을 하다가 99마리를 우리
속에 안전하게 넣어놓고는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저녁도 먹지 않고 지팡이를 들고는 험한 산
을 향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를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99마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십니까?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99마리 양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에 와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99마리의 양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러면 한 마리 양은 무엇입니까? 아직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고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
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99마리로 만족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족하시지 않
습니다. 그리고는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험한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은다. 이것이 무엇
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눈에는 한 생명이 교회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한 영혼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한 영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얼마나 값진 존재로 생각하는
지 모릅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태신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닌가요? 청소하러 다니는 분이 아닌가요? 병들어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
닌가요? 전도하기가 쉬워서 접근을 했는데, 따지고 보니 아무 신분도 없고,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래서 은근히 마음으로 멸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죄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보잘 것 없는 한 생명을 자기 교회와 동일하
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우리 모두와 똑같이 본다는 말입니다.
20세기에 성자라고 흔히 불리 우는 테레사 수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
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극빈자, 병자, 고아, 죽어가는
사람, 노인들을 불러서 모아놓고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당시, 그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펴졌습니다. 126개국에 600여 곳 이상 되는 사랑의 집을 만들어 세상
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적인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굉장히 탁월한 어떤 CEO의 경
영방법을 가지고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
은 도무지 화두가 되지 않고, 큰 기업체를 움직이는 사고를 가지고 그런 일을 했다고 우리
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분의 말을 읽으면서 오늘 설교를 마
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전도를 해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태신자를 찾아 갈 때 우리 마음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깊이 돌
이켜보면서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테레사의 말입니다.
"나의 임무가 대중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개인을 돌보
고 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거둘 줄을 모릅니다. 단 한 사람...당신도 내가 하듯 그렇게 한번 시작해보세요. 나는 단 한
사람만 인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2,000명이 넘는 사람을 인도하지 못했
을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바다의 물 한 방울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 방울을 보태지 않는다면 바다는 물 한 방울이 모자랄 것입니다. 당신 자신, 당신
의 가정, 당신이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몇 일 동안 몇 명을 전도하느냐 보다 누구를 전도하느
냐에 눈을 집중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썩는 밀알
이 되도록 합시다. 그 한 생명을 얻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 한 생명을 얻으
면 우리는 교회를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린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하시고, 교
회를 자기와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다루면서 이번 대
각성전도집회에 임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셔서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생명의 역사
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잔치가 이 가운데서 연일 연야 계속될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을 전
도하려고 하는 욕심을 부리다가 나도 모르게 한 영혼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기 쉬웠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위치를 제자리로 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내 곁에 있는 저 보잘 것 없는 한 생명, 그저 날마다 스쳐 지나가면서 잘 주목도
하지 않는 저 한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 배웠사오니 이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소자 하나가 주님 자신입니다. 소자 하나가 교회입니다. 주님. 그러므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한 영혼의 중요
성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천하를 구원하
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심령 심령이 주님을 만나 주안에서 새생명을 얻는 잔치가 이번 기회에 연일 연야 계속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잃은 양에 대한 집념
마 18:12-15 / 노경모 목사
2006년도에 개봉되어 13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 '괴물'이라는 영화는 한강변에 나타난 괴물에 의해 사라진 '현서'라는 중학생 여자 아이를 칮기 위해서 나서는 일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오로지 현서를 찾기 위한 집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섭니다.
그 영화에 전반에 흐르는 강력한 느낌은 한 아이를 찾기 위한 일가족의 집념입니다. 그 집념으로 결국 '현서'를 괴물에게서 찾아 냅니다. 한 아이를 찾기 위해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의 집념, 삼촌의 집념, 고모의 집념, 할아버지의 집념이 너무나 강렬하게 관객의 마음에 깊이 박히는 영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양 일백 마리가 있는 어떤 사람이 그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위해서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1대 99입니다. 한 마리보다는 아흔 아홉 마리가 더 가치가 나갑니다. 우리는 흔히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대답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목자는 나선 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목자는 한 마리의 잃은 양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이고 있을까요? 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한 집념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이 예수님께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세지입니다.
첫째, 바로 그것이 '목자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너희라는 어떨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다음에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는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잃을 양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두 말할 필요없이, 더 이상 생각하거나 지체할 필요없이 바로 찾아 나선다는 것이지요.
100마리의 양의 주인인 목자가 '나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반드기 찾겠다.'고 말한다면 그 누구도 그 말에 대해 시비를 걸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주인인 목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한 마리의 잃은 양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리의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마리의 길을 잃은 양과도 같았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들짐승에게 물려 죽든지 아니면 굶어 죽든지 해메다가 지쳐 죽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53:6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 행하여 다 자기 길로 갔었습니다. 그 길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영적인 사망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쓸모가 있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목자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이 길을 잃은 양인 우리들을 찾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에스겔서 34:12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말씀처럼 하나님이 잃은 양을 찾아서 구원하시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 마음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다는데 그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잃어 버린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잃어 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마가복음 2:1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잃어 버린 한 영혼이 아닙니까!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도, 과거의 우리와 같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섭시다. 우리의 주변에 길 잃은 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목자의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3절을 볼까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길을 잃은 양을 찾으면 목자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합니다. 얼마나 기뻐하냐 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 15:7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기라성과 같은 믿음의 위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위인들 99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것 즉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잃은 것을 찾았을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셨지요? 어릴 때 잃어버린 아들을 30년 만에 찾은 부모님을 보셨지요?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괴물에게서 '현서'라는 아이를 찾은 가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영화를 보신 분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분들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잃었다가 찾은 사람들은 너무 기뻐서 한결 같이 잔치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6절을 보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엽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합니다. 잃었던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너무 기뻐서 이웃을 불러 모으로 함께 즐기자고 잔치를 베풉니다.
우리가 일었던 한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면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서 찾은 영혼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을 찾은 우리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 잔치의 주역으로 우리들이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얻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잃은 한 영혼을 찾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그 고통이 인간적으로 너무나 크고 힘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여 나에게서 십자가의 고통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하셨지만 그러나 곧바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잃은 영혼을 찾는데 강한 열정과 집념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셨습니다.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뜻일진데 우리도 기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한 영혼을 찾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집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집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십니까? 그 집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까요?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시 위한 예수님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십니까? 그 집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셨을까요?
우리도 길잃고 방황하는 우리 주변의 한 영혼에 대해 안타카운 마음과 사랑의 마음과 강한 집념을 가집시다. 그리고 그들에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 냅시다.
19세기 미국의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는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특히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잠 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밤중에 거리에 서서 말씀을 전할 대상자를 찾는데, 한 술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가가서 다가가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술 주정꾼은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부터 벌컥 내었습니다. 무디는 너무나 낙심이 되어 기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는데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렸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예전의 그 술 주정꾼이었습니. 그 술 주정꾼이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느냐는 말에 크게 화를 냈으나 그뒤로 부터 그 말이 내내 계속해서 귓전에서 떠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잊을려고 해도 잊어지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씨는 무디가 뿌렸으나 씨가 자랄 텃밭인 그 분의 마음을 성령께서 내내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형체도 없는 작은 씨가 그 사람은 굳은 마음의 밭에 뿌려져 묻히고 뿌리를 내려 계속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역사를 합니다. 그러므로 잃은 영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시편 126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강한 집념을 가지시고 우리를 기필코 구원하셨는데,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처럼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그러한 충성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