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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으로 접어지는 나이의 제자들을 만났다.
84년, 초짜교사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 그 절벽의 시대에 이 벼랑인 선생이 저 낭떠러지의 꽃같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얼마나 아슬했는지... 매일같이 죽장을 짚고 복도를 쿵쿵거리며 ‘공부’를 때려잡던 시절. 작전명령에 가까운 야간학습에, 교련시범훈련을 진흙탕 속에서 온종일 구르는 날도 있었다. 교사들 입을 비트는 전두환의 '교지'를 교무실에서 읽어 내린 비참한 아침이며, 기안을 한자로 쓰면서 한 획 차이로 퇴짜 맞던 무참한 오후도 있었다. 어찌 그 시절을 입으로 다 욀까...
난 이십 수년을 거슬러 광주발 여천행 낯선 버스에 올랐다.
부끄러운 옛 자화상을 다시 들추는 공부가 조금 두려웠고, 미확인 사실이지만 내가 이태 만에 순천금당고로 빠져나가자 몇 날을 울었다는 미술부 종군이가 그립고, 당돌하고도 어여삐 늘 미술실 문 앞을 점령했던 차남이 삼남이가 보고 싶고, 거기서 거기인 곳에서 지금껏 살고 있는 승남이와 이름만 모르고 얼굴은 알 것 같은 그 먼 몇몇에 대한 기대를 품에 안고... 한편 그리도 보고 싶다던 정숙이(봄햇살)는 전날 전대병원에서 만났다. 별안간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는 "어여삐 보이고 싶었는데..." 내게 무척 아쉬워했다. 23년 만에 우리들의 소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적어도 세월이 이십 수년이고 우리는 얼마나 먼 길을 돌아 다시 이 교정에 섰는가! 생각했다. 교문을 나와 풀꽃을 함께 보자던 곳은 종군이가 학교 뒷산을 걸어 집으로 두 고개 넘어야 닿는다는 봉두리 꼴짝이였다. 종군이는 차도 꽤 놀랠만한 이 먼 길을 달밤 내내 걸어 몇 년을 다녔단다. 나는 허깨비고 그의 스승은 ‘달빛’ 이었음이 비로소 분명했다.
중간에 종군이가 배낭을 내리니 어서 그리 맛난 쌩김치가 나왔는지 막걸리 한 사발(패트병이 변신한)이 금세 얼큰해졌다. 그 옛적 누군가 심어놓고 여러 해 생채기를 낸 느릅나무 아래였다.
재천, 차남, 삼남, 종군, 일식, 회경 승남, 진수, 창규, 미숙, 윤미
초피나무도 있었고, 탱자도 땄다. 독활이 휘늘어지고, 짚신나물도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나는 이어서 쓸데없는 말들을 밤 11시 까지 늘어놓았다. 게다가 여천이 차가 일찍 끊기는 줄 알았으면 조금 일찍 서두를 걸 종군이는 받아 마신 척 한잔도 않고 우리를 순천터미널까지 바래다주었다. 민망한 선생이다.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그 시각에 서울을 올라가는 차남이는 미안하다. 으윽... 차남아 종군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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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흑백으로 보니 옛날 같고 새롭네요.제자인지 선생님인지 잘 모르겠네요.행복해 보입니다.
고맙습니다.. 참 착하고 믿음직스럽게 변한 이 친구들과의 들꽃산책은 그야말로 발에서 새소리가 났습니다. 이 친구들이 서로 주고받는 농이 막걸리 같은 우정으로 새콤달콤했지요. 행복이 익은 탱자처럼 똥그랗고 분분하고 샛노랬습니다.
창규의 귀여운 올챙이 배와, 삼남이 발톱의 연보라 매니큐어와 일식이 한턱 내는 구수한 실눈과, 영희 꼭 닮은 어여쁜 공주와, 은근히 웃기는 회경이, 은근히 힘센 미숙이 은근히 꼼꼼한 재천이, 감기도 잘 이기는 윤미,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는 태음인 승남이... 다음 볼 때까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해라~~
저희에게 무한이도 주고싶은..그 깊은사랑 깊은배려.. 언제쯤 저희가 다 헤하릴수 잊을련지요.. 선생님 앞에선 그저 철부지 고딩이고 싶었습니다..^^ 저희를 편하게 대해주신 우리선생님! 많이..감사 했습니다.
고딩, 고마해라^^ 내 어쩌다 얻은 호사인지 모른다만 다 네 덕이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머쓱하고 쑥스럽다..
큰발이 거슬려 발톱에 메니큐어 바른걸 언제 보셨는지...부끄럽습니다 ^^
중간에 도망치는 발은 어떻게 생겼나 봤지... 큰발과 메니큐어의 함수풀이는 내가 수학을 좀 못하는 것과 별 관련이 없겠지? 대관절 이 둘은 무슨 사이지? 설마 발에 쏠리는 시선을 돌리기 위한 메뉴큐어의 의사행동? 시선을 빼앗기 위한 연막술?
이차남씨가 여천학교 제자이시군요. 흑백이 주는 묘한 기분, 오랫만에 찾아본 귀한 느낌주심 감사합니다.
네~ 늘사랑님! 개명한 이름이 현금인데..^^울샘 그냥 차남이라 불러주신데요..^^
누가 제자인지 선생님인지 잘 모르겠네요,그린님 말씀 저희가 엄청시리 손해 아닌가요, 엄니가 일년 이면 간장 종지가 수십이라 혔는디요, 선생님 피부는 차나미보다 보드라서 ,,, 막차 떨라분거 작전 이였습니다, 가시네 또 삐지것네요.
종군이가 모처럼 세 줄짜리 댓글을 완성했구나^^ 애들 들꽃 코팅 시키면서 난 이리 논다. 맨 위 그린님 답글로 앉을걸 너무 아래서 놀았구나. 쉿, 차남이 삐지면 무섭다 조심해라...
ㅎㅎ..흥!~저 머슴아! 내 얼굴이라도 만져 본것처럼 얘길하네..ㅎㅎ 샘까지!~참말로~삐져부써요..^^ ...오유월에도 서리내린다죠?..ㅋㅋ
동창이 먼 세월을 돌아 곱게 다가오니 스스로에게 감사하는 맘이 이나보다. 농이 괜찮고 또 애틋하다...
날씨가 요즘 좀 추웠는데 여기는 따뜻해요 ^^
교단의 사랑은 만나는 매 순간일 뿐이라 정해놨는데, 걸 내가 배반했어요글쎄...
가을 소풍날 중간치기 하고 크게 후회 하고 있습니다...나두 선생님께 진맥 받고 싶고,막걸리도 한 사발 찐하게 나누고 싶고....봄 소풍땐 꼭 시간낼께여~~~
막걸리 찐한 걸 좋아하냐? ^^ 여전히 짖궂지? 네 일이 바쁘다는 걸 알겠고, 네가 같이 놀고 싶어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 네 발가락의 메뉴큐어는 보면서 그 맴은 못 보았겠냐? 그래 나중에 곧 진맥도 해주고 약도 가르쳐줄게.
흑백사진이 옛 사진을 보는 듯 하는군요! 친구들에게선 이십여년이 넘은 세월이 보이고, 선생님의 모습에선 그 세월이 정지한 듯 보여요! ^^에공.. 부러워라....^^ 정숙이는 어쩌자고 꾀병처럼 갑자기 쓰러져 병상에서 가을소풍날을 보냈는지....내년 봄소풍엔 진짜 봄햇살에 눈부셔하며 봄꽃들 사이를 걸어야 겠어요!^^
거의 좋아졌으니 다음을 기약 해야죠? 햇살이 비춰줬음 더 밝은 모습이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