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04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인자, 하나님의 아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제가 이런 말 드렸지요. 다니엘서를 보게 되면 짐승은 분명해요. 놀랍게도 짐승이 바벨론, 메대파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분명히 나와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어떤 환경이든 비유든 간에 하나의 개념이 정답이 나와 버리면, 그거와 상대하는 상식적 개념도 정답이 나오죠. 이건 빈틈이 없는 것 아닙니까?
짐승과 적이 있다 하면 짐승의 정체가 이미 성경에 나와 버렸잖아요. 심지어 왕까지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나왔다면 그 적은 백발백중 실제적 역사적 나라겠지요. 이쪽이 공격받는 건 누구냐? 이것은 바로 유다나라 밖에 없지요.
그리고 이 짐승 그냥 짐승이 놀랍게도 너무나 현실성이 강해서 바벨론하고 옛날 바벨론 그거 되새기는 게 아니고, 순서가 딱 정해져요. 메대파사. 딱 이렇게 예언대로 되니까 마지막에 로마거든요. 그럼 현재 로마한테 공격받는 자가 누구냐 말이죠. 조건이 여호와 믿고 로마한테 공격받는 거, 어느 나라입니까? 아니, 유다나라 밖에 더 있어요. 해석 너무 정확하잖아요. 정확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정확한 해석이 이걸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곡해로 인하여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였다는 거. 엉뚱한 생각으로 인한 엉뚱한 짓을 하는 거예요. 도둑놈이 제 발 저리다하는 말이 있잖아요. 혼자 상상해서 그렇게 되리라 라고 여겨서 엉뚱한 짓을 벌이는 것처럼 헤롯이 뭔가 켕기는 게 있고, 헤롯이 생각하는 메시야관이 따로 있고, 헤롯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혹시 이 메시야가 로마와 연루된 모든 정권을 교체시키는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할까 싶어서 베들레헴에 두 살 밑에 애들 다 죽였잖아요.
그래 어떤 교회 부교역자가 정석훈 목사님이 아주 새벽기도하면서 고군분투해요. 그 새벽기도 설교가 아빠방에 쭉 나와 있는데 언제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복음을 전하게 되면 원래 당회장이 복음에 관심이 없고 정치 쪽에만 관심이 있다면 복음을 전해도 그걸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정치적인 노림수로 다 왜곡해서 해석을 다 해버려요. 그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러한 해석에서 기존의 로마와 결탁된 것을 거부하고 로마와 결탁된 것은 일시적인 화해의 제스처고 질서는 로마가 잡아주고 진짜 유다나라의 핵심은 영적인 신앙적인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것이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인 구도였습니다. 분위기였습니다. 일본 순사가 와서 도둑놈은 잡아주고 실질적으로 모든 정신적인 통치는 영적으로 하는 그런 식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양발차기를 다 해야 될 판입니다.
어쨌든 양발차기를 다 하는데 어쨌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그리고 헤롯이나 저희들은 서로 적이라도 어쨌든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저쪽 편은 전부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야가 그게 구약의 일관된 흐름이 아닙니다, 아니올시다. 라고 하면서 들이대려면 다니엘부터 시작해요. 아까 다니엘 짐승부터 시작했으니까.
아까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바리새인들이 다니엘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다니엘의 그들이 고난 받지요. 고난 받으면 이사야 53장에 뭐가 나옵니까? 채찍 맞음으로 평안하다 이것이 누구한테 해요? 지금 이방나라한테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우리 유대나라가 당하는 고난을 여호와의 종으로 본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도 그렇게 봤거든요.
다니엘부터 출발한 개념을 가지고 야, 다니엘 해석 그리하는 게 아니야. 완전히 뒤집어놔야 돼요. 거기서 나온 용어가 무슨 용어냐 하면, 그게 바로 '인자' 용어입니다. 인자 같은 이, 인자의 용어 나와요. 이걸 이 책에서는 몰라요. 래드는 이걸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학자들은 방금 내가 한 이야기를 왜 모르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그 당시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오해를 합니다. '인자 같은 이'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사람아’ 하고 동일하게 보는 거예요. 인자를 사람아. 혈통으로 보는 거예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게 눈에 보여야 혈통이 나타나야 믿을 만 하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을만한 구석을 준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올 때 우리는 붙잡을 수 있고 믿습니다. 할 수 있고, 대화도 가능하다 이래 보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니까 하나님께서 괜찮은 건전한 분 보내셨는데 그분이 인자고 메시야다. 그래서 붙들 수 있다. 이래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오시니까 사람들이 종려나무 흔들면서 뭡니까? 호산나 부르듯이 말이죠. 보이니까. 그걸 가지고 무슨 주일이라 합니까? 종려주일. 참, 미친 얼마나 사기를 쳤으면 종려주일까지 다. 종려주일 다음에 고난주일. 제가 여담에 사설에 이래 했어요. 현재 우리교회에서 고난주일 딱 한 분밖에 없다 했어요. 누구냐 하면, 지금 금식하고 있어요. 그분이. 왜? 위암수술해서. 대구 동산병원에서 수술해서 지금 회복해서 금식, 어제 가보니까 금식. 아이고, 장로님 혼자 금식하고. 전부다 정치적이죠.
인자라는 게 눈으로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하는 거예요.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으로 왔다. 그래서 인자 개념에 무슨 개념으로 왔느냐 하면, 인자-사람, 사람-인자, 사람으로서 오신 하나님, 그래서 이 용어가 인자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속임수에요. 하나님의 속임수에 넘어간 겁니다.
'인자 같은 이'라고 그래요. 인자 같은 이라는 것은 인간아 라고 보일 수밖에 없는 오해를 살만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거예요. 물론 예수님이 사람 아니란 뜻은 아니고, 실제로 육신을 가지고 오셨는데 평소에 사람들이 메시야를 어떤 식으로 고대했었는가를 다 간파하시고 인자 같은 이로 와버려요.
그런데 인자 같은 이는 선재하는 분. ‘선재’라 하는 것은 모든 역사보다 먼저 존재하시는 것, 그걸 선재라 합니다. 선재하는 장소가 어디냐?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에 누가 있는가? 천군천사가 있고 거기에 성도들이 있어요. 거기서 성도들과 관리합니다.
이것은 한번 보세요. 선재하신 분이죠. 선재하신 인자죠. 그럼 기존의 정치적 인물들은 무슨 메시야를 원한다? 로마를 때려 부수는 아주 선봉장 되는 위대한 장군, 주몽 같은 그러한 인자를 원하죠. 선재하신 인자와 인자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분류작업, 가려내는 작업에 돌입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자 같으신 분으로 행동하면 그들은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관에 의해서 그 해석을 그 기적들 지 멋대로 다 해석해 버려요.
이상한 동거지요. 뭔가 불편한 동거생활이 3년 동안 계속 됩니다. 불편한 동거생활. 예수님께서 인자가 뭐 했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줬지요. 난리 났습니다. 떴다! 이제. 드디어 우리 신학이 맞잖아! 자기 신학이 맞다하는 틀이 있는데 그 틀에 예수님께서 트릭을 써서 맞춰 주는 척 하면서 다가서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덥석 물지요. 우리의 왕이 되소서. 다른 말로 하면 메시야가 되소서. 왕은 메시야입니다.
원래 기름 부은 자가 제사장이잖아요. 선지자. 그런데 나중에 다윗언약 되면 이게 하나로 최종적으로 궁극적 의미로 왕으로 뭉쳐지고 나중에는 왕이 개판될 때는 선지자로 나가요. 선지자로 되는 겁니다. 하여튼 왕, 선지자, 제사장 기름 부은 자라 하는데. 우리의 왕으로 삼아야 됩니다. 하고 덥석 물지요. 왕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로마 너희들 끝났다. 로마 너거들 죽었다. 로마와 결탁해서 정권질 해먹는 헤롯 너거들 작살났다.
지금 정계 개편이 안티오크스 4세 개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아들들이 죽고 난 뒤에 분열했는데 그중에 안티파네스 4세인가 거기서 안디옥이라고 나와요. 아주 나쁜 성질 더러운 그 놈이 아주 구박을 많이 했어요. 그게 다니엘서에 그대로 예언 되어 있다니까. 남방 왕, 북방 왕 해서.
그러니까 이미 성경과 성경이라는 신비적인 용어와 실제 역사와 통할 수 있는 통하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그걸 근거로 해서 나머지 모든 성경해석을 그걸로 파고 들어가 버리면 결국 오케이, 진리로서 다 밝혀질 수 있는 예언서가 돼버리죠. 숨겨진 예언서가 아니고 밝혀진 예언서.
그렇다면 1260일, 1290일 이거는 뭡니까? 한 때 두 때 전부다 이거는 뭐냐 하면, 그 자체는 상징이지만 그걸 역사적 기간으로 전부다 번역이 가능하다 말이죠. 그래서 여호와증인부터 해서 통일교부터 해서 안식일부터 해서 전부다 뭐 계산합니까? 역사 계산하잖아요. 그거 또 말려들었어.
현재 통합과 우리 보수신학이 또 말려든 게 뭐냐? 천년왕국하니까 이 '천'자에 또 말려들어버렸어요. 3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 3년 반, 7년 대환난, 전부다 말려든 거예요. 평소에 얼마나 정치적으로 해석해 왔는가? 바리새인처럼. 복음은 관심 하나도 없어요.
복음은 없고 현재 내가 믿는 여기에 힘을 모아 달라 말이죠. 내가 지금 신학 바른 해석했기 때문에 힘 모아 달라. 그렇다면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살아보자. 언제까지 실패할 거냐? 나도 유명해져서 떠보자. 이런 것들이 꽉 차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니 속 다 내 안다 해서 에라, 물어라 하니까 덥석 물은 거예요. 천년왕국, 7년 반, 지금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러면서 선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치적인 인자 개념으로 왔을 때 이 선재하는 인자와 평소 인간들이 기다렸던 메시야개념, 그 메시야개념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영웅으로 옵니다. 영웅으로 오기 때문에 인자 개념을 이 둘로 나누어서 해석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숙제 했다시피 이상원 목사님 숙제 했는지 모르겠네.
여기 그 뒤에 나오는 인자개념을 보면, 이 둘로 나눠서 해석할 줄 모르고 인자 개념을 세 개로 나눠요. 뭐냐? 일번, 사람으로 오신 인자. 두 번, 고난 받으신 인자. 세 번, 영광 받으신 인자. 이렇게 나눈다고. 이건 김세윤 교수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전부다. 총신도 지금 이렇게 가르쳐요. 총신도 이래 본 거예요. 선재하신 인자가 오히려 이 세 가지를 공격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 이게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짐승 네 마리. 연달아 나오는 짐승 앞에서 핍박 받는 피해자 입장이 누구에요? 자기 말고 누가 있습니까? 피해자, 고난 받는 자 그러니까 주여, 우리 편이 되소서. 라고 오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인 거잖아요. 그 말은 뭐냐? 뭔가 잘못됐다는 거죠. 뭔가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정치세력한테 당하면 그 사람은 비정치가가 됩니까? 아닙니다. 못지않게 정치가가 됩니다. 나중에는. 노무현 바뀌고 또 한나라 되면 한나라 또 정치적이 되죠. 뭐, 국민을 위하여는 순 거짓말이고 지 밖에 모르잖아요. 하여튼 권력의 맛을 봤잖아요.
사람이 소유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한테 당할 구석이 많다는 뜻입니다. 소유가 있더라도 항상 내 꺼 아닙니다. 없음 위에 있어야 돼요. 광야라는 것이 없음 위에 놓여 있다는 뜻이 광야거든요. 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나는 말씀 없으면 못 살겠습니다. 집이 세 채 있어도 괜찮아요. 그거 자체가 내 것이 아니라고 등기이전을 주님 앞으로 해버리면 되는데 사람이 자기는 비웠다, 비웠다 하지만 누구 한번 건드리면 분명히 비웠는데도 불구하고 성질 팍 나요. 확 납니다.
어제 밤에 잠이 안 와서 성경에 보면 잠이 안 와서 무슨 일들이 있어요. 에스더 같은 경우에 아하수에로 왕이 잠 안 와서 보다가 모르드개 하고 ( ) 나도 잠이 안 와서 봤는데 그 여자의 남자인가 하는 드라마 새로 시작하는 있더만 김희애 나오고 하는 거. 보니까 예, 그게 어디서 합니까? MBC에서 하는지 어디서 하는지 모르겠어요. 봤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남자의 여자인가 새로 시작하는 거 있어요.
사이좋은 자매 여동생의 남편이 그 여동생의 친구하고 바람이 났을 때 언니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화를 낼 때 그 화내는 연기자의 분노 있잖아요. 저저, 성질 대단하네. 라고 제가 생각하기를 그걸 보면서 그 여자 성질 대단하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당했을 때 그 못지않은 성질 우리가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성질을 왜 냅니까? 평소에 없음 위에서 내 건 없다. 남편도 내 아내가 아니고 아내도 내거 아니다. 평소에 분명히 등기이전하고 퍼 댔는데 실컷 퍼 댔는데 막상 당하면 퍼 댄 게 언제 다가와서 어딜 내걸 건드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딜 내걸 건드려.
개척교회 제일 약 오르는 것이 교인 안 오는 게 제일 약 오르는 게 아닙니다. 왔다가 간 사람이 제일 약 올라요. 차라리 오지를 말지, 왔다가 간사람 이거는 사람 성질 다 건드립니다. 복음 안다 싶고 오셔도 가셔도 오신 것도 주님이고 말은 하지요. 막상 가고 나면 오늘 목회 때려치워버리자. 설교 안 한다. 다 때려치워버리고 어디 취직하자. 어디 파나 심자. 이래 나옵니다. 아아, 성질 되게 그러죠.
이게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선민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믿을 구석은 로마가 아닙니다. 성경 밖에 안 믿어요.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민중들이 성경만 바라봅니다. 성경 바라보면서 보니까 피해자가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에요. 그럼 메시야는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어떤 메시야도 자기를 위해서 온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게 철떡 같이 믿을 때 인자가 나타날 때 야, 다니엘 인자구나. 그 인자구나. 아, 하나님 아들이시구나.
유대신학의 인자라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묵시문학이라 하는 게 있거든요. 그 당시 고난 받을 때 나오는 외경 같은데 보면, 인자 안에 하나님의 아들 개념, 하나님 개념, 메시야 개념, 인자에 다 쏟아져요. 여기에. 인자가 움직이면 그 안에 뜯어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개념, 다윗의 자손 개념, 메시야 개념,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다윗의 자손이여. 문둥이가 와서. 문둥이가 무슨 박사입니까? 다 들은 풍월이 있어서 그래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는 메시야의 당신이 그리스도냐? 이런 것도. 다 얼마나 고대했겠어요. 메시야를. 믿을 것은 그것 밖에 없는데. 학수고대하고 기다렸거든요. 만약에 메시야 나라만 되면, 이거 좀 어려운데 한번 들어보세요.
지금 다니엘에서 네 짐승이 각각 하나가 지금 실제 역사와 일치됐지요. 그럼 이사야에 아기가 사자 굴에서 놀고, 이거 뭐예요? 이미 다니엘에서 역사적으로 됐다면, 그러면 이사야에서 말한 묵시적 개념도 실제로 어린아이가 사자 굴에서 노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사야를 철떡 같이 믿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메시야가 와 입혀 버리면 지금도 유대인이 그렇게 생각해요. 완전히 골프장이에요. 에버랜드에요. 정말 여호와적인 생각 그 이상으로 이상 세계가 펼쳐져요. 지금 유대인은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따뜻하고 사철 따뜻하고 꽃피고. 어떤 영적 세계라 하는데 지금도 그래 생각해요. 그리고 다니엘에 보면 그분은 뭐 타고 옵니까? 구름타고 와요. 다니엘서뿐만 아니고 바룩이라든지 에스라든지 이런 많은 묵시문학에서 구름타도 온다는 거예요. 구름타고 온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만큼 시련이 많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속 시원하게 풀려면 화끈하게 와야지, 시시하게 몇 명 죽이고 또 몇 명, 이거 치우고 한꺼번에 와서 한꺼번에 조져 버려요. 그만큼 시련이 크면 소망도 크고, 환상도 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인데 그 인자가 자꾸 예수님은 자기를 뭐라고 합니까? 인자가, 인자의 때가, 인자가 와서 될 텐데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그 대목을 한번 봐야 돼요. 그 [인자]라 하는 대목. [공관복음에서의 인자] 하는 대목인데 그거는 성경구절을 딱딱 묶어놨기 때문에. 책 한권 드리세요.
공관복음 찾았습니까? A. 세상의 인자 있지요. 거기에 보면, 인자가 죄를 사하시는 권위지요. 이 말은 뭐냐?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어떤 일들을 하셨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죄를 사해주는 권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먹고 마시는 인자, 새번역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 다음에 머리 둘 곳도 없는 인자.
그 다음에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 예수님 따르는 열두 제자가 뭘 생각했습니까? 열두 제자도 뭘 생각해요? 로마를 박살내자, 로마 박살내자.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많이 봐주고 있는 거란 거예요. 고난 받은 인자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 받고, 언젠가는 너거 한번 당한다. 라는 식의 인자. 현재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인자를 그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런 거.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좋은 씨를 뿌리는 인자. 인자는 핍박. 인자는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심. 이런 인자 개념에 어떤 개념도 십자가 개념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 내가 알아서 내가 처리할 게. 그러니까 너희들이 납득할만한 너희들이 이해할 만한 고난 받고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개념이지 십자가 개념, 사도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십자가 개념이 없습니다.
죄의 개념과 결부된 생각해 보세요. 인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죄인 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개념이 필요 없잖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으니 이런 개념이 필요 없다 하니까. 죽어서 기다리고 살아서 인자하신 걸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혈통적 개념을 유지해도 상관없는 인자처럼 그렇게 이해되잖아요. 이런 용어들이.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고, 고난을 당하리라.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 인자가 사람들에게 넘겨지리라. 그 당시 사람들은 전부다 특히 그 당시 사람들 다가 아니지만 제자들은 이게 납득이 되었지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하고 제자들은 어디 갔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하고 몇 명은 예수님이 이미 그 시체 달라고 가셨지요.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이런 걸 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들의 영안을 열게 하지 않고서는 식사하다가 영안을 열게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봅니까? 볼 수 없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육적으로 이런 인자 신학에 충실하고 안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부활의 영,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성령세례인데 실제로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천국의 문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에요. 육으로 아무리 인자신학, 고난, 부활 이야기해도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가는 겁니다.
그것도 바람 같이 택한, 바람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바람의 특징은 원인이 없어요. 그리고 결과도 보장을 못합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왔다가 가버리면, 분명히 나무는 쓰러졌지만 그 경로를 그 나무 쓰러진 바람을 내 손으로 어떻게 포대기에 담을 수 없어요. 공기는 담을 수 있어도 바람은 못 담거든요. 공기는 고정되어 있지만 바람은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고정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 오셔서 성령 받지 아니하면 이것이 나중에 예수님의 모든 공관복음이 어디로 쏟아지느냐 하면, 결국은 이것은 특정 사람은 괜찮고 특정 사람은 주님을 이해했고 못했다 이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세상신의 지배를 받는다. 세상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그쪽으로 가버려요.
에베소서 2장 1절에 있잖아요. 뭡니까? 공중 권세 잡은 자의 권력 아래 있다 이래 봅니다. 용어는 정치적인데 그 사도 바울의 내용을 보게 되면 정치적이 아니고 영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했어요.
지금도 교회를 볼 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많습니다. 목사님, 그때 교회가 흩어져서 몇 명 모였습니까? 다시 해서 교회가 몇 개 생겼습니까? 전부다 정치적이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 생겨도 날아가 버립니다. 교회가 정치적인 게 아니에요.
모든 것을 이렇게 십자가로 다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 율법 아래 저주밖에 없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모든 걸 해석한다고 여기는 그 율법이 오히려 자기로 하여금 갇혀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임금님이 죽으라고 사약을 보냈는데 임금님이 주신 사약이라고 찬장에다 모셔 놓고 자랑하는 거예요. 여보게, 이 사약이 임금님이 주신 것, 우리 가문 보통 가문이 아니지. 화가 나서 한 병 더 보내줘요. 더 진한 것. 그것도 찬장에 모셔 놓아서 임금님이 곱빼기로 사랑해서 이거 보내줬다. 그거 뭔데? 사약.
세상에 사약을 그거 모시라고 준 약이 아니고, 먹고 죽으라고 약인데 우리는 율법 받았다고 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한 백성 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고. 현재 이 말씀은 우리보고 날마다 메시야한테 성령세례 안에서 메시야 갉혀서 먹고 죽으라는 말씀이에요. 이거 먹고 죽으라고.
그러니까 누가 바람 피워도 화내지 말고. 그 연속극처럼 부인이 화가 나서 니 오늘 둘 다 죽이고 싶다 할 정도로 극도의 화를 낼 때 심하다 하지요. 막상 당하면 그것보다 더 나옵니다. 머리카락 다 쥐 뜯고 난리 칩니다. 목사님은 내 아내가, 아내가 아니고 그건 그거고 왜 날 건드리노. 인간이 그렇게 되지요.
선지사역 인자에서 여기 세상 인자와 접촉점이 없습니다. 없고 몽땅 다 죽여 버립니다. 모든 것을. 그러니까 네 가지 짐승 속에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네 마리에 짐승에 지배받는 유다나라도 짐승나라로 포함시키겠다는 게 마태복음의 동방박사 이야기고, 이방인 백부장이 현재 아브라함 자손이 간다는 천국에 이방인 백부장이 가고, 자칭 간다는 아브라함 자손들은 바깥 쫓겨나서 이를 갈며 울고 있어요. 이거는 상상도 못하는 인자입니다.
지금 이 책에서 인자라 하면 예수님이 어떻게 와서 어떤 보상 받나 이렇게 하지, 그걸 누굴 겨냥하는 말을 이야기 안 해요. 마땅히 이 땅에서 불쌍하고 가난한 자, 고난 받는 자, 절뚝발이, 귀신 들린 자, 피해 입은 우리겠지,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비권력적이고. 이런 사람이에요. 그것마저 몽땅 마귀에 속했다는 게 사도 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문둥병에 나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받지요. 실로암에 눈 떴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눈 뜬 걸 통해서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지요. 죽은 오빠 나사로가 살아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오빠 살아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빠 살게 한 분이 과연 누구냐? 나의 그동안 믿었던 믿음. 마리아, 마르다가 뭐라 합니까?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니까, 그거 마지막 때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이미 유대신학, 인자신학을 다 안다는 거예요. 그것이 갉아 먹어야 돼요. 그게 예수님한테 먹혀야 돼요. 그게 예수님한테 전부다 박살나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운 이유가 그 사람보고 운 게 아니고 니보고 운 거예요. 마리아, 마르다가 믿음이 있다 했는데 믿음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해 주고 잡채해주고 팔보채 해주고 대접했는데도 믿음이 없는 거예요. 막상 누구 죽으니까 화납니까? 누구 죽으니까. 자기 오빠 죽으니까 대들잖아요.
차범근이 한 골 넣고 기도하고, 박태환이 일등하고 기도하고, 박세리 기도하고 백날 해 보세요. 그렇게 기도한다는 자체가 그것마저 바뀌어야 돼요. 전부다 그런 거 박살나야 됩니다. 그건 성령의 몫이에요. 십자가만 갖다 십자가에만 뒤집어씌우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하는 성령의 몫이고, 그 성령은 놀랍게도 유대인이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에게로 감으로 말미암아 저쪽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요.
메시야를 고대했다. 메시야가 이렇게 올 걸. 인자신학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 것 철저히 알면 뭐합니까? 성령세례 안 받으니, 오히려 성령세례 받은 쪽은 지금 주의 이름 부르고 구원받고 있고. 지금 메시아 기다린다고 바짝 정신 차리고 있는 놈들은, 주님 저쪽으로 가고 이쪽으로 오지도 않고.
그래서 지금 선재 인자와 기존 인자에서 지금 설명한 것은 뭐냐 하면, 인자신학이 나왔던 그 모든 것이 정치적인 해석이 쫘~악 깔려 있다 했습니다. 여기 그 다음에 뒤에 아까 보던 것, 인자의 고난 받은 것, 인자의 묵시라고 되어 있는데 인자의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거룩한 천사로 온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걸 그들은 이해한다 했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묵시문학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문제가 뭐라 했습니까? 문제가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날 데리러 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잘못을 수정하는 것이, 이것 약간 잘 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뒤 부분에 12장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자 설명했습니다. 메시야 설명하고. 메시야는 왕 정치적 개념이고, 인자 개념에 와서 선재하는 인자와 정치적 인자가 갈라지지요. 세 번째 하나님 아들이라고 호칭을 쓸 때 이것은 바로 세 번째 이거 그러면 선재하는 인자 안에 어떤 신학이 들어있는가? 그걸 지금 설명하면서 하나님 아들 개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경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1장.
마태복음 11장 26절, 27절. 다같이 읽어 봅시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야, 이거 멋지다. 선재하신 인자 안에 품고 있는 그 개념은 지상의 메시야여, 인자여 기다리는 사람하고 전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전혀 맞지 않고, 이 세상에 딱 누구만 알아요? 딱 두 분만 알아요. 아버지 알고, 누가 알고? 아들 본인 밖에 몰라요. 아무도 저들도 몰라요. 며느리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아까 시편 110편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가 둘로 쪼개지지요.
그러면 지상에 있는 사람, 인간은 개뿔도 아무것도 안 되고, 진짜 원수는 누가 알아요? 진짜 원수는 그 두 분만 알아요. 누가 인자로부터 구원을 받을 거냐 하는 것은 내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동으로 능력이 나갈 때 그 능력이 도착된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문제지, 메시야여, 메시야여, 인자여, 인자여 외친다고 구원받은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구원되고 안 되고 리스트는, 너희들이 간여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왜? 너희들은 아들이 아니거든. 아버지 아는 놈이 누가? 너거 아버지 알아? 아버지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아들이 됩니까? 아들 개념은 아버지 것을 몽땅 알고,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일을 맡기신 분을 아들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개념이 이게 약간 쉬우면서 어려워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는 자를 아들이라 합니다. 아버지 있고 아들 아는 게 아니고 그거는 일반 부자관계고요. 유일하게 그러니까 성경에서 아들 개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모른다는 개념이에요. 유일하게. 지나 개나 다 아는 여호와는 여호와 아니라는 거예요. 지나 개나 다 아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신을 전도한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전도한 게 아니죠. 누구를 전도했습니까? 복음을 전도했죠. 그 복음은 뭐냐? 로마서 1장에 복음은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받은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을 받았다 하니까 아, 아버지는 미리 알고, 이제 추가적으로 아들만 알면 되네. 그런 뜻이 아니고.
요한복음에 보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 외에는 알 자가 없어요. 이거는 폐쇄되어 있어요. 감추어져 있어요. 은닉되어 있는 겁니다. 아들이 아니기에 아버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게 중요해요. 아들이 아니기에 아버지를 모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들이 알려 줄 때만 뭐가 안다? 아버지를 안다. 그런데 아들을 알려주는 그 사람은 누가 정한다? 아버지하고 아들 둘이 의논해서 정해요. 우리가 손들고 개입 못합니다. 저 좀 알게 해주세요. 부르짖고 달려가고 해도 안 돼요. 이미 사전에 생명책에 아버지, 아들하고 리스트가 끝났어요. 그 명단은 이미 확정된 명단입니다. 그 명단대로 성령세례를 줘요. 그래서 여기에 어긋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자가 없습니다.
성령세례 받게 되면 평소에 메시야, 메시야, 인자, 인자, 오소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구름 타고 올 겁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그 모두가 마귀한테 속했던 사고방식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에요. 주님이 찾아오니까 내가 문 열려서 구원받았지. 내가 무슨 수로 율법 연구해서 구원받겠느냐 이 말이죠.
따라서 율법은 뭐냐? 율법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저주 받아서 모두 죽어야 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로마서 3장 21절, 19절 나옵니다. 전부다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그러면 복음은 뭐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된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는 오직 행함이 아니고, 선물로 준 아들을 믿는 당신만이 아들입니다. 다른 말로 당신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고, 우리는 개뿔도 몰랐습니다. 왜? 감추어졌으니까. 오직 아들만 통해서만 아버지가 나타났으니까. 이게 누가복음의 복음이죠. 누가복음 설교하고 계신데.
복음은 아들로 통해서죠.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 못해요. 아버지는 아마 아는 기고, 아들에게서 복음, 이게 무슨 소리고? 아버지는 이미 신은 우리가 믿잖아요. 아는 거고, 아 추가적으로 이거 하나 보태시면 도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뭐냐?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 당시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들, 예수님을 자빠뜨리고 넘어뜨리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그겁니다.
그러니 이 복음을 아는 목사가 설교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경상도 말로 디벼야 돼요. 전부다 포크레인 가지고 신 개념부터 다 뒤집어야. 당신의 신 때문에 진짜 신이 죽었습니다. 당신의 신은 정치적 개념입니다. 정치적 개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다 뒤집어야 돼요.
뒤집어서 진짜 아버지, 아들의 계시대로 소원대로 이렇게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가신 코스대로 그대로 그 길을 가게 됩니다. 가면서 이제 예수님이 성지 순례하면서 애야 여기서 내가 물고기입 쫙 벌려서 성전세 낸 그 장소야. 아, 그렇구나. 여기서 내가 오병이어 했는데 내가 오병이어 베풀고 도망간 장소 아이가. 니도 그러고 있지 그지. 정신 차려 임마. 어. 안 그러면. 여기가 니가 날 버리고 고기 잡은 장소라고. 니 지금 날 버렸잖아. 봐라. 세 번째 찾아와서 한번 더 해 볼까? 날 사랑하느냐? 그 장소야.
진짜 성도는 성경 말씀 말씀마다 주님이 날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경험을 성령을 통해서 줍니다. 그건 뭐냐? 말씀을 통해서 줘요. 오늘날 교인들이 말씀을 멀리 합니다. 그냥 지식만 확보하고 손 털고 다시 자기 일에 종사하는데 말씀을 거부해놓고 신자다? 나는 ( ) 수긍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데 말씀을 덮어버리면 계속 자기 생각 밖에 안 해요. 그러니까 예수도 자꾸 소유화시킨다고. 소유화시키면 건드리면 화내잖아요. 그건 딴 이야기고.
하나님의 아들 계속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에서 정리한다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우리 아들에게만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들 아니면 다른 사람은 일을 안 해요. 다른 사람하고는 일을 안 합니다. 아들하고만 일해요. 요한복음에 보면, 오직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만 일하고 내가 길이요, 내가 진리요, 내가 생명이고 다른 길로는 아버지께로 갈 자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도 기적 베풀면 안 됩니까? 하는데 그것도 오해. 아들만이 처소를 만든다. 아들만이 처소를 만들어요. 예수님이 기적 행했다고 지도 기적 행하고, 예수님이 병 고쳤다고 지 병 고치고. 백날 해보세요. 지옥 가지. 왜? 하늘나라에 처소가 없는데 뭐. 베드로가 지가 죽어서 따라가도 처소 없어요. 우리 목숨 바쳐도 처소 없습니다.
처소가 예수님이 만들어내야 됩니다. 그래야 내 처소가 아니기 때문에. 천국 가봐야 주님의 처소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지, 내가 이 땅에서 고생해서 성과급 거둬서 따로 지분하나 얻어서 하늘나라에 두 평, 세 평, 열댓 평 따로 하늘나라 상급으로 받는 내 땅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처소가 아니고 주님의 처소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노력해서 만든 처소가 아니라니까요. 내가 예수님 따라 다녀서 만든 처소가 아니고, 내가 예수님 기적을 흉내 내서 만든 처소가 아니에요. 베드로 아무리 순교해도 처소 안 만들어집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배제되어 있었어요. 왜? 뭐 보고? 처소 만들기는 예수님만 만들 수 있다. 그거에요. 왜 그래야 되는가? 주께서 내 주에게 그 말씀 이루기 위해서. 또 다른 식으로 하면, 멜기세덱 반열. 우리는 무슨 반열? 우리는 유다 반열, 레위 반열. 혈통 반열이고, 예수님만이 유다 반열.
그래서 성도는 뭐냐? 애비도 없고 엄마도 없고 진짜 성도는 애비도 없고 엄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이 땅에 근거지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혈통 난 거, 육으로 난 거,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하늘나라에 간다 말이에요. 이걸 성경에 있는데 이 성경을 만약에 소홀히 해버리면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성경을 덮어버리면 남는 것은 자기 몸뚱아리 귀하게 생각하는 그것 밖에 안 남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힘든 게 뭐냐 하면, 초반에 설교 초반에 디벼버려야 돼요. 설교 초반에 디벼버려야 되는데 안 디비면 오늘도 그 다음에 진도 나가이소. 지식 줘, 지식 줘, 풍성하니 지식 받아가자. 이러거든요. 있는 지식 뒤집어져야 되는데 그건 누굴 위한 지식입니까? 다 자기를 위한 지식 아닙니까. 그럼 알거든요.
난 없다고 이래 시작해야 되는데. 말씀 또 해 보세요. 이래 설교하니까 저 개척교회 한 육 개월하고 난 뒤에는 목사님, 또 내놓을 거 없습니까? 또 어디 딴 데서 배운 거 내놔요. 이제 안 나와도 되겠네. 학원이에요, 학원. 육 개월 떼고 다 떼버렸어 그만. 그 다음부터는 거 아는 소리고 딴 소리 하랍니다. 그거 아는 거고 딴 소리하라고.
그러면 이건 도대체 수준은 높여 놨지, 최전선까지는 쉽게 올라가는데 한번 올라가면 힘들어요. 옛날처럼 퍽퍽 올라가지 않아요. 기록단축이 어렵다 이 말입니다. 나중에는. 나중에는 목사가 힘들어서 나자빠져버려요.
그것은 목사 자체가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안다는 것이 이렇게 잘못되게 변질됐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설교시간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 이 본문 은혜 받았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한두 달 지나니까 내 창고에 무의식 창고에 이렇게 변질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데 여러분 몰라. 여러분은 안 그럴 거야. 하면서 쓱 끄집어내서 그거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십자가 안다고 했는데 십자가 안다는 그것이 이렇게 변질 되었습니다. 다 내인 줄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말씀에 비춰보면 이게 바로 개떡입니다. 하고 뒤집어버립니다. 안다 하는 것이 얼마나 손쉽게 쉬는지, 음식 쉬듯이 얼마나 이게 변질되는지, 이게 차곡차곡 내 지식으로 하여튼 자아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호화찬란해져버리고 자아가 무디어지기는커녕 자아가 더 광을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이근호 목사 20년 따라다니며 배웠다. 백날 20년 배워도 무슨 소용 있어요. 광내고 있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니까 뒤집어지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드리면 확 하고 똥개처럼 확 달려드는 거예요. 세퍼트처럼. 건드리면 달려드는 거예요. 뭐 안다, 안다 하면서. 자기가 안다는 것은 어떤 좋은 것도 내 안에 들어오면 질질질질 죄가 쏟아진다. 그걸 알아야 아는 거예요. 얼마나 좋은 것도 내 속에 가면 죄로 변해서 질질 흘리고 다녔다는 그걸 아는 게 아는 거지.
그래서 성도가 교회 오면 맨 날 목사님, 복음만 전해 주이소. 오늘도 회개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건데 내가 뭘 회개할 줄 모를 텐데 말씀을 주시면 이런 것 때문에 한 주 동안 질질 흘리고 다녔구나. 하고 깨닫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으로 그저 복음만 주셔서 그 복음으로 또다시 깨지기 위해서 그렇게 와야 성도입니다. 뭐, 지식 하나 더 알아서 진도 나갑시다. 그러면 우에 되는데. 알아서 뭐 할 건데. 성경공부하면 다 나오는데.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폐쇄적 개념입니다. 다른 것은 아들 개념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폐쇄적 개념이냐 그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그게 여기서 잘 나와 있어요. 이 책에. 그 점은 잘 나와 있습니다. 이걸 다 설명할 순 없고요. 하나님의 아들 개념에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한 대로 하면, 게르할더스 보스의 하나님 아들 개념은 구약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첫째, 피조물 개념이었다. 두 번째가 택한 백성이다. 택한 백성 나오죠. 내 아들이라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또 출애굽 4장에 보면, 모세야 가거라. 현재 내 아들들이 고생하고 있다. 건져라. 택한 백성.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메시야가 내 아들이에요. 메시야가 내 아들.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아들 하는 거예요.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이 아들 개념, 이게 바로 다 구약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아들 개념입니다. 메시야 개념이고, 메시야는 뭐 이거 예수님이니까. 구약 개념에서 이게 다 나오거든요. 이 다 나온 아들 개념이 결국은 나도 아들 넣어주세요. 하는 오만함 때문에 구약에서 백날 끄집어내도 예수 죽인다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밖에 없어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걸 알았어요. 아브라함은 자손은 한 명 밖에 없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들 되게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만 아들인데 우린 아들 아니에요. 그런데 아들 되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뭘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기존의 자기가 자기 구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오는 건데 그건 다 엉터리고, 성령을 아들의 영을 받아야 아들 된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4장 이야기입니다.
3장 이야기는 아브라함 자손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4장 이야기는 아들의 영을 받을 때는 더 이상 종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종은요, 종과 아들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종은 처음부터 종이었고, 아들은 아들도 처음부터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종은 아들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 종이에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아들은 지가 종으로 살아도 나중에 아들 되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난 처음부터 아들이었구나. 씨, 처음부터 아들이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종은 아들 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할 필요가 있지만 아들은 아들 되려고 노력을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고, 한 아버지가 영이 오게 되면 자기 본색을 그냥 공개할 뿐이죠. 너는 처음부터 아들이었다고 공개될 뿐이죠. 그렇다면 그렇게 되면 그 아들은 종노릇을 안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종에서 아들하면 아들 되고 난 뒤에 종으로 안 떨어지기 위해서 열심히 성화해야 돼요. 이렇게 하다 종 되지, 안 돼. 그런데 애초부터 내가 노력해서 아들 된 게 아니고, 애초부터 아들인 것을 느낀 사람은 두 번 다시 세상 학문의 종이 안 됩니다. 세상 절기라든지 십일조라든지 안식일이라든지 그런 율법의 종이 안 되지요. 아들인데. 아들의 그 느긋함.
그래서 모든 심판은 법조항이 있기 때문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조항이 아들 앞에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찢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두려움이 없나니. 왜? 두려움을 유발할 수 있는 그걸 찢어버렸으니까. 누군 두려워합니까? 종일 때 두려워하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안에서. 제발 말씀 보고 당신은 아들 맞습니다. 그걸 좀 보라고.
그런데 일반교인들은 교회 안 나오고 성경을 덮어버리니까 성경 덮어버리니까 아들 있는 것도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옛날 종하던 행세 때문에 종에서 아들 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기도 좀 더 하고 뭐 좀 더 해서 자꾸 아들 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뭐 보고? 가끔은 성경 보고. 그런데 돈도 벌고 성경 보려고 하니까 지금 저 혼자 바빠요. 그러니까 주일날 되면 아들 되었다가 그 다음부터 종 됐다 저 혼자 바쁜 기라. 부질없는 짓들을 하고 있어요. 아들 맞습니다. 아들 줄 테니까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하면 참석 안 하고. 세상에 가서 고개 숙이고.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폐쇄적입니데이. 혼자만 아들이에요. 혼자만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아들 없습니다. 특히 세 번째 메시야 개념, 택한 백성에서 메시야 개념 할 때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메시야 개념은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 때 여기 번역대로 한다면 뭐로 되어 있어요? 번역대로 하면 니가 택한 백성이다. 택한 아들이다. 유일하게 택한 아들이다. 다른 사람은 안 택했다 이 말이죠.
그럼 다른 사람은 여기 아들이라 하는 이스라엘 보고 아들이라는 개념은 너희들은 아들이라는 개념은 어떤 조건이 빠진 상태지요. 영적인 조건이죠. 묵시적 조건. 예수님을 믿을 때 아들이란 조건을 빠진 상태에서 이야기해버리니까 이 사람들은 뭘 봤습니까? 빠진 건 안 보고, 나는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들 맞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룰 때 그 안에 아들이라는 언약 보고 다루는 거예요. 언약적인 요소를 잉태하고 있기 때문에 그거 보고 다룬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마치 내가 아들이라고 여기고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다루는 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언약 백성이 뭡니까? 언약 없으면 언약 백성 아닙니다. 언약 보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그걸 나중에 알았지만 언약 보고 이야기하는데 언약 빼놓고 자기가 나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지켜준다. 거짓 선지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여호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다 망했잖아요.
언약을 빼놓고 언약의 핵심 되는 예수님을 빼놓고 이야기한다고. 예수님 때문에 아들 됐는데 마치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주는 것처럼 된다 이 말이죠. 그거 아시겠어요? 그 차이를.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분하고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성령이 옴으로서 아들 되었음을 확인됩니다. 확인되거든요. 그렇다면 우리의 아들 됨은 예수님에게 종속된 아들이죠. 그것을 '양자'라 하지요. 양자의 영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부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아버지를 부를 때 누구를 항상 생각해야 돼요?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들이라 부르지, 이제 예수님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세요. 하고 예수님 보내버리고 아들이다 이럴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뿌리 안에서 예수님 줄기 안에서 우리는 나무 안에서 줄기이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가 아들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은 아들 되고 난 뒤에 아들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아들입니다. 주 예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인자됨과 아들 됨과 메시야 됨을 보았습니다. 선재하신 인자셨고, 그분만이 아들이었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만 생각했습니다. 이는 성령이 임하셔서 이렇게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아들 되었사오니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삼아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