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1950년대까지 국악계에는 연극소리라는 것이 유행했었다. 창극뿐 만 아니라 여성국극이 성행하면서 판소리와 다른 연극 중심의 소리가 발달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배우들은 대개 판소리를 배웠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극소리를 배워 여성국극단에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극소리는 대사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곡조는 훨씬 쉽고 성음도 대사를 과장하는 듯이 하는 그런 식으로 발달한 소리다. 판소리와 다른 소리 장르가 발달한 것이었지만 여성국극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 판소리하는 집단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여성국극이 쇠퇴한 후에는 판소리에서 그런 여성국극의 소리를 걷어 내는 것이 큰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연극소리는 여성국극의 배우들이나 쓰는 소리지 판소리에서 사용하면 안 되는 소리가 된 것이다. 임춘앵 김경수 김진진 같은 국극의 스타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 소리는 계속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성국극은 1960년대에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여성국극이 1990년대 들어와 재현될 때 김금미는 햇님달님의 가연역을 맡아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 후 춘향전이나 황진이 같은 작품에서는 춘향이나 황진이 같은 주역을 맡아 호주, 미국, 러시아, 독일 등 해외공연도 많이 다니고 큰 성과를 거두며 여성국극의 배우로 활동했다. 김금미가 여성국극의 배우로 활동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홍성덕의 영향이 크다. 홍성덕은 전북 부안의 음악가문 출신으로 강도근 오정숙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남원 춘향제에서 판소리로 1등을 했던 명창이다. 지금은 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으로 있고 광주시립국극단의 단장과 전주대사습놀이 이사장을 역임한 국악계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 홍성덕이 ‘90년대에 여성국극을 되살리기 위해 직접 작품을 제작하고 단체를 이끌어갔기 때문에 김금미는 자연스레 배우가 되었다. 처음으로 하는 배우였지만 김금미는 여성국극에서 상당한 재능을 발휘하며 주연배우를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임이조 같은 무용가에게 무용을 배웠고 무용으로 전주대사습이나 KBS국악대경연대회에 나가 입상한 경험도 있는데다 성창순 같은 큰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도 배워서 소리의 기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소리를 했고 늘 국악과 접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여성국극의 배우가 되는 것에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냥 바로 배우가 되었고 연기나 춤이나 소리를 거침없이 해 낼 수 있었다. 배우를 하는 김금미는 상당한 재미를 느꼈다. 어머니가 하는 작품에서는 주연을 하고 외부의 뮤지컬이나 모노드라마도 하고 국악 악극에도 출연했다. ’65년생인 김금미가 그렇게 30대 초반을 지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연극소리를 하고 여자들만 출연하는 여성국극에서 ‘99년 판소리를 주로 하고 남녀가 함께 출연하는 국립창극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김금미는 국립창극단에서도 중요한 배역을 많이 했다. 창극수궁가에서 제일 어렵다는 토끼 역을 맡아 잘 해내었고 춘향전의 월매 역이나 심청가의 곽씨부인 역도 잘 해내었다. 금년에 공연한 창극 <청>에서는 사람들을 많이 웃기는 뺑파 역을 했는데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김금미는 창극배우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앞으로도 국립창극단의 창극공연에서는 늘 중요한 배역을 할 것이 거의 틀림없기 때문이다. 무용으로 출발한 예인의 길이 여성국극에서 창극으로 옮겨왔으니 가던 길을 그냥 계속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내면은 굉장히 큰 변화를 겪었고 계속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의 김금미는 연극소리를 하는 여성국극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홍성덕은 지금도 여성국극 운동을 하고 여성국극 작품을 만들어 공연하지만 김금미는 전혀 출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전 같으면 어머니가 하는 일이라 당연히 김금미가 출연하겠지만 연극소리를 하지 않기로 한 김금미이기 때문에 여성국극을 하지 않는 것이다. 김금미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은 김영자명창이다. 김영자명창은 연극소리하던 김금미를 판소리명창이 되게 한 선생님이다.
김금미는 2007년 판소리 공부하는 사람 누구나가 선망하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명창대회 대상인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여러 차례 도전한 것도 아니고 한 칼에 쟁취한 것이다. 전주대사습대회 승리는 김금미의 예술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김금미에게 인생의 목표 아니 예술인생의 목표가 분명하게 떠오르게 된 것이다. 연극하는 남편 박정곤과의 사이에 딸 둘(9세 7세)을 둔 김금미는 금년 봄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의 폭을 넓히는 한편 집에 마련해 둔 공부방에서 꾸준히 독공을 계속하고 있다. 김금미가 방음된 연습실을 만들어 놓고 밤 10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판소리연습을 하게 된 것도 김영자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고 인생의 목표를 판소리로 세우게 된 것도 다 김영자선생님의 영향이다.
김금미가 김영자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95년경이다. 수궁가를 가르치면서 김금미에게 “연극소리를 했기 때문에 너무 곱고 얇은 소리를 낸다.”며 통성을 내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가르치는 도중 옛날 버릇을 못 고친다하여 엄청나게 혼내 줄 경우가 많았다. 말도 막 거칠게 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모욕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잘 가르쳐 주고 애정을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라 곧 속을 풀고 또 배우고 또 배우고 또 혼나고 하면서 십여 년이 지났을 때 어떤 후배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질문내용은 “언니! 소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김영자선생님이 강조하던 내용들이었다. 그렇게 욕먹으면서 배웠던 소리 내는 방법을 김금미는 후배에게 설명해 주기도 하고 직접 소리 내 주면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김금미는 스승의 소리를 흉내 내게 되고 제대로 된 통성 내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그렇게 욕먹으며 배우면서도 건성으로 공부했던지 목이 별로 쉬지도 않고 그랬는데 후배의 질문을 받고 선생님에게 배웠던 것을 생각하면서 혼자 연습하니까 목이 쉬기도 하고 목에 변화가 오는 것이었다. 갈라지던 목이 두세 시간 목 푸는 과정을 지나면 소리가 모아지기도 하고 차츰 소리 내는 요령을 조금씩 터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인의 목을 단련하면서 진정한 목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한 2년 지나니까 ’아 이것이 내 목이구나‘하는 그런 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자기 목을 찾고 소리를 이렇게 저렇게 구사하는 시도를 해보니까 소리 연습하는 것이 재미도 나고 오래 연습해도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노력한 지 수년 지나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고 또 2008년에는 국립극장에서 완창판소리로 수궁가를 발표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무용을 시작한 것으로 따지면 더 오래 되었지만 배우를 하기 시작한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 지금 김금미의 목표는 판소리 5바탕을 다 완창하는 소리꾼이 되는 것이다. 소리는 그 자체가 무궁무진하여 인생을 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야말로 판소리를 할 만한 자질이 있는가를 평가받은 것쯤으로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진정한 명창, 5대가를 다 감동적으로 부를 수 있는 명창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김금미를 이런 소리꾼으로 바꾸어 놓은 것도 김영자명창이다. 김영자선생은 끊임없이 강조해 말했었다.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었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된다.”고 수 없이 말해 주었었다. 그러기 위해 여성국극이나 무용 등은 빨리 때려치울수록 좋다고 말해 주었었다. 김금미는 그런 김영자선생님을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본인 인생의 진정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그런 스승 덕택에 김금미는 배우에서 판소리 명창으로 변신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상을 받았고 더 큰 명창의 길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었으니 늘 감사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소리꾼이 되길 바란다.
첫댓글 잘 읽었네^^ 지금도 김영자 선생께 늘 공부하는 김금미씨의 모습에서 겸손과 예인의 진정한 모습을 본다네. 얼마전 여수에 김영자선생님 병문안을 금미씨와 고속버스로 다녀왔는데 눅은목으로 수궁가 한바탕을 다하더군~~
형님 언제 김금미선생 한번 소개해 주세요 제가 밥 한번 쏠께요~~
기회 만들어 봄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요? 본 받을 접이 많은 분이네요.....평소에 제가 좋아하는 분이기도 하구요.....
예술가는 실력만큼 겸손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하죠 멋진 소리꾼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