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실이야기 2부>
'배워서 남 주자'는 벽에 붙은 작은 인쇄물은 나에게 콰광 하고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배워서 남 주자니...
'배워서 남 주나' 하고 벼르며 그것 하나에 희망을 걸고 그나마 온 것인데...
그리고 배워서 남 주자는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배운것을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는가.
머리를 뽀개 골수를 나눠 가지거나 서로 호스를 연결해 나눠 가질수도 없는데 배운 지식을 어떻게 남에게 줄수가 있을까?
힐끗 보고는 착잡하고 복잡한 마음을 안은채 나는 그날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교육은 초급반으로 3개월이었다.
3개월동안 다니면서 처음에 계획했던 몇번 가는척 하고 그만둘 요량은 조금씩 사라졌다.
새로운 세계에 얼굴을 쏘옥 디밀고 보니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것에 무엇이 있을까 궁굼하기도 했다.
또 각자 직업과 나이도 다 틀리는 남녀 30명의 동기들과 오전10시부터 오후1시까지 수업이 끝나면 같이 어울리는 시간도 마냥 즐겁고 각 과목마다 교수가 달랐는데 새로운 교수가 들어올 때마다 여인천하로 불리는 우리반은 극성쟁이 여고 3학년반이나 다를바 없었다.
오늘교수는 미남일까 아닐까? 젊었을까 늙었을까?
우리는 새로운 교수가 들어올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펴보며 우리의 관심사는 공부보다는 여러가지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어떤 여선생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게 강의를 할때면 나는 두통이 와서 복도에 나가 바람을 쏘이곤 했다.
다른 학생들은 그래도 침에 대해 대충 알고 있고 어디선가 조금씩은 공부를 하고 왔는데 나는 새하얀 백지나 다름 없어서 완전히 왕초보였다.
가뜩이나 전날밤 야근을 한 날이면 얼굴은 하얗게 되고 피곤에 지쳐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다.
그런 가운데 일주일에 두번 수요일과 금요일 3시간씩 강의가 이루어졌다.
우리반 학생중에는 한의대생 2명이 있었고 전주에서 수업이 있을 때마다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첫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30대 여학생이 있었다.
모두들 대단한 열정들이고 또한 재미있어 했다.
특히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전율했다.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지, 또 봄 여름 가을 겨울과 우리의 삶의 연결에 대해 배우면서 기절초풍할 정도로 나는 감격하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밤에 야근하거나 다른일로 잠 안자기를 당연히 생각했고 계절에 대해서는 완전 무식하게 살았는데 완전100%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학생들중에 그래도 건강한 편이었다.
이미 병을 갖고 있는 환자가 병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끝에가서는 침술원에서 침뜸치료를 받고 효과가 있어 침을 배우려고 온 아저씨도 있었다. 물론 그런분들은 끝까지 같이 배우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게 된다.
공부는 만만치 않고 어려웠다.
'수태음폐경' 하면서 한문으로 12경락 이름을 외우는데도 나는 글자를 나열하면서 그 글자 자체를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다섯글자를 외우는 것도 나에겐 글자의 나열 자체부터 외우는 것이니 12경락에 딸린 365개 혈자리를 외우는 것은 하늘에 가득찬 별을 외우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1년은 12달, 우리몸은 12경락
1년은 365일, 우리의 혈은 365개
나는 우리몸에 혈자리가 있다는 것은 중국만화책에 나오는 무협소설에서나 간간이 보았을 뿐이어서 그것을 외우는데는 머리가 지근지근 어지럽고 뱅뱅 돌았다.
초급공부를 하면서 평생 앓아오던 생리통을 뜸몇장 침몇번으로 통증이 없어진 나는 눈이 확 뜨이면서 과연 여기에 무언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초급과정은 마치기로 하였다.
혈자리 잡는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1조에 7명씩 조를 짜 네개의 조가 각각 혈자리 잡는 연습을 하게 된다.
7명이 한덩어리가 되어 1명이 모델이 되고 6명이 의논을 하면서 중요한 혈자리를 잡아 나가는데 그때마다 교수에게 잘 잡았나 검사를 맡고 또 다른사람 혈자리 잡고 검사받고 그렇게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 수업이 있던날 나는 넓고 편한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7명 중에 제일먼저 모델이 되어 혈자리 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긴 책상으로 제단이 만들어진 가운데 나는 제단 위에 눕혀졌다.
바지가 아슬아슬 불두덩근처까지 내려지고 윗옷은 가슴아래가지 쭉 올려졌다.
으악! 천정을 보고 누워 이게 무슨일인가 아득한데 12개의 눈동자가 내 배 위로 쏟아지고 12개의 손에 딸린 60개의 손가락들이 내 배위와 가슴에서 꼬물꼬물 기며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손가락을 쫙 펴 배꼽과 불두덩사이를 5등분하여 점들을 찍고 배꼽과 가슴사이 중간에 점을 꾹 찍어가며 제대로 잘 간격을 맞추었나 다시 해보고 또 해보고 정신없이 연습들을 해 보느라 내 배위에서는 계속 손들이 주물주물 하였다.
혈자리를 다 잡으면 교수께 보여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오늘 교수는 턱에 잔뜩 수염달린 정체모를 커다란 중년남자인데 어쨌든 보이며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는 아직 누구랑 사우나 한번 가본일 없고 수영복 입고 햇빛에 나가본 일 없고 완전 순수 100% 보존 상태였다. 동기생들과는 친해져서 그런대로 참을만 한데 교수가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런데 어느새 교수는 우리들 곁으로 와 내 배 위로 시선을 주더니 '잘했어요' 한다.
나는 누워 내 배를 눈으로 검사하는 교수의 얼굴을 보고 감출수도 없고 아예 감추기를 다 포기하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모르겠다 이젠 되는대로 해보는 거다' 하면서도 배를 다 보여 준것에 대해 두고두고 아까왔다.
누구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았던 아까운 것을 잃은듯 했다.
그날 내 배에는 네임펜으로 점이 몇개 찍히고 즉석에서 뜸을 떠 아예 지워지지 않는 불고문 흔적을 남겨 버렸다. 그렇게 수업은 진행되었고 우리는 열심히 배웠다.
또 다른날 수업시간에 잔등에 혈자리 잡는 연습을 할때면 똑같이 7명이 한조가 되어 한사람씩 모델이 되는데 앉아서 내잔등을 쭉 까고 등을 내밀때는 정말 아까왔다.
60개 손가락들이 꼭꼭 눌러대며 혈자리 잡고 네임펜으로 점 찍어가며 다 잡고 나면 지난시간 털북숭이 교수가 다가와 검사를 하는데 그때는 자존심이 막 상했다.
보이고 싶지않은 성역을 침범 당한것 같아 씁쓸했다.
이것은 처음에 공부 시작할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었다.
우리는 털북숭이 교수에게 많은 수업을 받았다.
처음으로 침을 잡고 무릎아래에 있는 중요 혈자리인 족삼리에 직접 침놓는 방법을 배웠다.
각자 자신의 족삼리에 침을 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을때는 부들부들 떨며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나는 진땀을 쏟으며 처음으로 내 몸에 침을 꽂았다.
그날은 집에 가서 족삼리에 침꽂는 연습을 한번 더 해보고 나는 촬영을 해 놓으라고 했다.
내 가족은 침꽂힌 족삼리를 사진 찍었다. 기념사진이다.
그렇게 초급반 수업은 매 수업때마다 새로운 체험으로 가득차며 전율과 환희와 탄성으로 이어졌다.
초급수료시험이 공고 되었을때 나는 집에다 협박에 가까운 큰소리를 쾅 쳤다.
'나는 이번 시험에 떨어져 수료를 못할지도 몰라.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른데서 웬만큼 알고와서 잘 하는데 나는 하얀 백지라 나만 떨어질 것 같애. 내가 떨어지면 굉장히 창피할것 같아'
나는 시침을 뚝 따고 만약을 대비해서 배수진을 쳤다.
식구들은 긴장했다.
그러더니 '이제부터는 밥 사먹고 그럴 테니까 며칠간 열심히 공부만 하라구. 떨어지지말구'
그때부터 나는 공부하는척 했다. 식구들은 집안에서 조용히 걸어다니고 나를 멀리 피해다니며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뱅뱅도는 머리를 간신히 진정 시켜가며 겨우겨우 한가지씩 익혀 초급수료시험은 간신히 통과했다.
이론과 실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것이 그때는 그렇게 어렵게 생각이 들었었다.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한 나는 2001년 9.11테러 다음날인 9월 12일 마침내 초급반 수료식을 가졌다.
수료식때는 털북숭이 교수가 우리를 특별히 축하해주고 식당에도 같이 가주고 노래도 불러주며 그날 끝까지 자리를 같이해 주었다.
초급공부는 그렇게 끝났다.
봉사실이야기 - 2부 끝
2004.1.20
후궁
첫댓글 설날아침이어도 후궁처소엔 아무도 근접을 안하는구료... 떡국 많이 잡숫고 회원분들과 카페 다녀가시는 손님 모두 건강하세요...
잔잔하게 펼친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그 털북숭이 교수가 혹시?????
거 어려운 공부네요.근데,털복숭이가 몇명있나요?후궁님 새해 인사받으소서 ,철퍼덕~
이마 안 깨졌어요? 봄님! 후궁 절 받으시고...
측전님이 말씀하시는 그 덜북숭이 교수님이 그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저도 한 분 알고 있는데... 침과 뜸으로 생리통을 치료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저도 생리통 치료하는 침술을 배우고 싶네요.. 고생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