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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신명기 32:20-25
(32: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32:22)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32:23)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32:24)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32: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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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자신이 친히 사랑하신다는 자기 백성에게 처참한 저주를 예언하십니다.
선언해버리십니다.
결국 저주받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형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예상 못할 다른 하나님이
인간들 내부에 벌써 자리잡고 있음을 간파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려 오시기는 오시기만 결코 인간을 긍정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 입장에서,
가혹한 하나님의 예언에 어리둥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정말 종말이 주어진다면
그동안 인간이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 퍼부은 모든 시도가 다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못 견디고 분노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하는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어쨌거나 내 것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내재된 성질을
이스라엘이 대표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말 과업에 부정적으로 기여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은 곧 모든 인류는 군말없이 당연히 망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망할 것, 왜 천지를 만들기는 만들었느냐?”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이왕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 때
하자없이 공사를 하지 무너지게 만든 이유가 뭔가?”라는 겁니다.
이는 천지 창조가 그 창조된 피조세계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란 이 세상에서 ‘망하는 하나님의 경험’을 가져야
비로소 성사되시는 직위입니다.
즉 하나님마저 ‘망하는 내력’을 지녀야
만유의 주가 될 자격을 갖추는 겁니다.
망하는 역할을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들었고,
그래서 해서 최종 완성된 세상은,
그 완성됨을 축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생겨난 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업적을 함유된 세상이 최종 완성된 세상입니다.
즉 ‘불완전한 있음’에서 ‘완전한 있음’으로 최종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에서 온전함’에서 ‘주님의 온전하심’으로 관심사가 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종말 과업 안에서 비로소 주가 되십니다.
오늘 본문에 그 작업의 시작이 ‘하나님 얼굴’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이스라엘 구원’이란
그 원칙이 그 전에 수립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 사건입니다.
그곳 지명 이름이 ‘브니엘’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했다’입니다.(창 32:30)
즉 구원이란 하나님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는 얼굴을 가지는 겁니다.
시편 80:3에 보면,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돌이키시고’라는 말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쪽으로 얼굴을 안 돌리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돌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보고 싶지도 않다는 겁니다.
따라서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살 관계가 못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릴만한 요건이 못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있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요건을
어떻게 총족되는 겁니까?
바로 이를 위하여 미리 종말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즉 미리 온 종말에 삼켜버림을 당하는 겁니다.
멸망당함을 도리어 복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끔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망하는데 그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미친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심보를 제거하는 작업에 먼저 나섭니다.
즉 인간의 모든 얼굴을 무용지물로 여겨 지워버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십니다.
이사야 53:3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본얼굴을 보고서 싫어서 외면해버립니다.
이는 곧 이들 인간들이 다른 얼굴상을 한 가짜 하나님을 평소에 신봉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왜 인간 세계가 하나님에게 이토록 혹독하게 당해도 마땅한지를 드러납니다.
인간의 얼굴에 문제가 있습니다.
야곱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현장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은
야곱이 다른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려 가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은 그 누구라도 자기 것에 위협이 되면 모조리 이겨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가득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얻은 축복’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대결구조로 잡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마저 이긴 바로 순간이,
자신이 복이 아는 것이 복이 아님을 압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 대면해도 살아남을 있을 존재가 되는
바로 그것이 복이었던 겁니다.
이러한 야곱의 변화를 위해
‘져 주시는 하나님상’으로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원리가 이스라엘 나라 내부에 여전히 흐리고 살아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리에 따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십니다.
즉 안 망하고자 하기에 망하는 겁니다.
버티려고 하니 저주 사태를 더욱 키우게 됩니다.
저주없이는 복도 없음을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얼굴에 대해서
그들은 ‘인간에게 매맞는 얼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몰이해가 있어주어야
이 세상이 멸망하는 이유에 충족됩니다.
하지만 이 멸망 소식으로도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구원 계획이
차질이 나는 것이 도리어 마땅한 겁니다.
그 내용이 고린도후서 3:14-18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수건이 나옵니다.
수건이란 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받았던 그 영광성으로 인해
지상의 인간과 대면할 수가 없는 모세는
수건을 가지고 ‘영광차단막’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차단작업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대면할 상대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바로 이 차단막을 해소하는 겁니다.
수건을 어떤 식으로 벗겨내어야 합니다.
이 방식에 대해서 인간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시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마치 야곱에게 당해서 야곱을 이겨내지 못한 하나님의 처신처럼 말입니다.
이 방식은 인간의 죄성을 극대로 높이는 방식이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스스로 낮아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든 자신을 건드리면서 가만있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곳은 인간 내부에 수상한 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결코 자기 영광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가치를 계속 지켜내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노고의 결과가 인간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얼굴이란 영광의 진열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로부터 고난 받은 주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멸망당해도 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집의 피해자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은 바로 인간들의 행패의 흔적으로 구성되게 됩니다.
‘사람에게 버림받게 된’ 그 자국이 있기에
비로소 예수님은 만유가 주가 되실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종말의 성격을 미리 이스라엘을 통해서 표현되게 하십니다.
종말이란 인간들이 살기 힘든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인간에게 수모를 당한 바로 그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종말 작업에 인간은 긍정적으로 참여될 수 없습니다.
종말의 육중한 무게를 인간들은 온 몸으로, 평생을 다해 받아내어야 합니다.
그것도 마땅하고 당연한 하나님의 조치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이러한 종말 현상을 억지로 외면하거나 달리 해석할 자격없습니다.
견뎌내지 말고, 버티지 말고 그냥 순하게 당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더 심하게 다루어주어서 아예 목숨을 끊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리 종말을 주시는 그 종말 안에,
죄인에게 주시는 값없는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172강-신 32장 20–25절(종말)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20–25절입니다. 구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이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노인까지 그러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상대로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상대로 하여 있는 저주를 다 퍼붓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종말의 어떠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종말을 종말답게 마지막을 마지막답게 장식하는데 있어서 너희가 기여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망할 때 그냥 망해버리면 망하는 정당성이 확보가 안돼요. 그러면 망할 때라도 망하는 이유가 확보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래서 망해야 마땅하구나 하는 것을 누가 이렇게 만들어 내고 생산해 내야 되는데 그 역할을 이스라엘 백성들, 내 백성들이 해줘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 듯 동의가 안 되죠. 납득이 안 되는 거죠. 이게 무슨 사랑이냐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약간 억지가 섞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공장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아들에게 “야, 네가 취직이 안 되는데 우리공장에서 일 해라”해서 일 했습니다. 일 했으면 삯을 줘야 되는데 다른 일꾼들은 퇴근해도 자기 자식은 계속 일 시키면서, “늙은 아버지도 이 만큼 일하는데 젊은 네가 놀아야 되겠느냐? 젊다는 게 뭐냐? 밤새면서 일하는 거잖아.”
이러면서 일 시켜 놓고 기껏 용돈은 한 달에 10만원. 여러분 한 달에 용돈 10만원 준다고 이혼한 가정도 있습니다. 나 같으면 10만원 줘도 살겠는데. 아무튼 한 달에 용돈을 10만원만 줬는데 그래서 그 공장이 잘 되었느냐, 망했어요. 망하고, 망했을 때 그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청춘을 다 바치고 심지어 결혼한 자기 아내까지 전부다 그야말로 무임금으로 노동을 다 바쳤는데 이건 망한 정도가 아니고 빚까지 짊어지게 되었을 때에 그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 이게 사랑입니까?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가 기껏 이정도 밖에 안 됩니까?”
그러면 아버지가 “나 혼자 망하지 않고 같이 망하려고 내가 일 시켰다.”하면 그걸 누가 흔쾌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너는 내가 망하니까 즐겁지 아니하냐?” 이렇게 나온다면 이상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 때 망하라고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왜 세상을 만들 때 안 망하도록, 그걸 경상도 말로 ‘단디’라고 하는데, 단단히 망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고 한번 만들었으면 영원토록 계속 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지, 왜 세상 만들어 놓고 무너지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대들지요.
성경을 자기 딴에 순진하다고 여기고, 순진한 마음으로 순덕한 마음으로 성경을 누가 억지로 읽으라고 해서 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었다고 합시다.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납득이 알죠? 납득이.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창세기 1장으로 그만 그걸로 그쳐야 돼요. “그래서 복이 있다. 끝” 그런 하나님을 왜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복주시고, 번창하고, 아무 하자 없게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 만들었으면 하자가 없는데, 2장부터 이야기가 이상하게 꼬여 나갑니다. 선악과, 뱀 이야기, 그 뱀 오는 거 밟아 버리지 왜 그렇게 뱀 말대로 해가지고 일이 꼬여서 이상해요.
거기에다가 오늘 본문 신명기 32장 보면 무슨 날벼락이 이런 날벼락이 다 있습니까? 진짜 이러려고 하나님 믿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기 위해서? 거기 쭉 나오지요, 망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으로 멸망하고”
칼에 죽지 않고도 자기가 칼에 스스로 놀라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핏줄 터져서 죽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노인까지 저주로 다 죽인다.”는 이야기예요. 이러려고 하나님 믿었어요? 이러려고 이스라엘 백성 만들었습니까? 이게 지금 대상이 누구예요? 여수룬이에요. 이스라엘입니다.
해석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왜 이렇게 단디 안 만들고, 단단하게 하자 없도록 설계해 놓았으면 건축업자가 하자 없이 해 놓고 만들어 놓았는데 와르르 무너졌다면, “왜 무너졌습니까?” 물으니까 “설계도가 한 달 뒤에 무너지게 되도록 되어 있다.”하면 무슨 이런 설계도가 다 있어요. 무너지게 하는 그런 건축이 있습니까?
이거 잘 이해 안 되죠? 이게 이해 안 되면 여러분 하나님 모르는 거예요. 다른 하나님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따지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네가 망해도 싸잖아.” 이렇게 이야기해요. 질문을 순수하게 진지하게 한 거예요.
“하나님이 만드실 때는 안 망하도록 만들면 어떻습니까?” 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답변이 “그러니까 너 같은 인간은 내가 꼭 필히 망하게 하고야, 지옥 보내고야 말리라.” 이렇게 나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질문과 답변을 가지고 집에 가서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답변 외에 다른 답변을 내 놓을 수 없는가? 아, 우리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하는 그런 바탕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이어야 하나님답다는 것이 깔려있어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다른 신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여기 21절에 나와요.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이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질투를 격발하였으니, 너희들이 진짜 하나님을 외면하고 너의 성깔대로 너의 욕구에 맞는 너의 욕망에 부합된 잠재된 그런 희망에 부합된 신을 얻었느니, 그래서 내가 화가 났으니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백성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로 시기가 나서 우둔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라”
“내가 내 백성 아닌 사람을 내 백성 만들어서 너희로 하여금 ‘우리는 뭐야?’하며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배신당했다는 분노를 유발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 만든 것은 이건 뭐 싸우겠다는 거죠. 다투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되, 다투는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문제 있음을, 그런 것들을 다 밖으로 들춰내는 그런 방식의 사랑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이런 이야기 했죠. 사랑보다 더 깊은 상처. 사랑보다 깊은 상처. 임재범이 부른 노래 보면 나와요. 사랑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실망하고 내가 나에게 실망해야 되요. 실망할 때 견디다, 견디다, 참다, 참다, ‘내가 인간이 좋아서 하나님 믿습니다.’하는 거 그거 바닥나야 됩니다.
바닥이 뭡니까? 점잖은 체 하는 거 다 뒤집어 지는 거예요. ‘더는 못 참는다.’가 이 바닥이에요. 더는 못 참는다. 참을 수 없다. 억누르고 억눌러 봐야 결국엔 스프링처럼 그 바닥을 드러낼 걸.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본색을 드러내는 방법을 쓰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망해야 되는 이유를 너희에게서 찾아내는 것으로 우리가 파트너가 되자”는 겁니다. 종말을 먼저 맛본 민족이기에 너는 나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다.
근데 이 파트너는 참 이상한 파트너예요. 상대방을 망하게 하는 파트너가 왜 생깁니까? 그거는 하나님 자신도 이 땅에 하나님 자신이 망하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드러내는 그것이 이미 악마의 술책에 넘어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파악이 될 수 없는 인간의 파악 그 너머에 진짜로 계신 하나님의 진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낯짝 가지고” 네가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한쪽 얼굴을 숨어서 본다는 게 아니에요. “네 얼굴 내 놓고 나의 얼굴 같이 내어 놓았을 때 이게 과연 성사 되겠느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할 때 반드시 여러분이 생각해야 돼요. 이스라엘 구원은 사건으로 보여 준 이스라엘 구원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건이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야곱입니다)에게의 구원이 진짜 구원이에요. 그게 이스라엘 구원이에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안 되시죠? 창세기 32장 보시기 전에 잠시 오늘 본문 20절 읽어 볼게요.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를 저주하고 너희를 망하게 한다.” 할 때 “망한다.”라고 해도 되는데 “나는 너희에게 내 얼굴을 숨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너는 망한다, 종말이다, 끝장났어, 저주 받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내 얼굴을 너희에게서 숨긴다. 무섭지 아니하냐?”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게 우리 이방인 쪽에서는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런데 처음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야곱이라는 사람.
야곱을 만나신 그 하나님이 야곱과 맺은 약속을 야곱 언약이라고 하고 그 언약에 준해서 그 동일한 질이 일관성 있게 통일성 있게 그 뒤에 계속해서 끌어서 전개 되는 겁니다. 야곱에게 준 언약이 계속해서 마지막 때 까지 전개되면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야곱과 하나님의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브니엘, 브니엘이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이 말은 브니엘, 저 부산에 브니엘이라는 여고 있어요, 브니엘이 하나님과 대면했는데 내가 안 죽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얼굴을 같이 하게 되면 죽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얼굴을 같이 하면 죽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만날 때, 막상 만날 때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낯짝, 그 저주 받을 낯짝을 지녔다는 말은 이런 얼굴 가지고는 가고 싶어도 못가는 나라가 천국이라는 사실을 야곱과 하나님의 만남을 통해서 최초로 알려지고 그 원리 원칙이 계속 이스라엘 내에 줄줄 계속 전개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얼굴과 너의 얼굴이 같이 대면해서 브니엘처럼, 야곱처럼만 그렇게 얼굴을 대면했는데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게 성공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시편 80편 3절과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시고” 그러니까 구원 문제가 뭐냐 하면 주님의 조명발만 딱 비추면 구원돼요.
주님의 얼굴만 비춰서 주님의 얼굴에 우리가 발각만 된다면 이 자체가 주께서 살려 주기 위해서 얼굴빛을 비췄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서 주님의 얼굴 앞에 노출되면 이미 그것은 구원이 우리에게 당도한 거예요. 시편 80편 19절에도 마찬가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에게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돌이키라는 말은 지금 얼굴이 안 비추고 있다는 거예요. 얼굴이 지금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 자기 백성이 더러워서. 이 말이 뭐냐 하면 종말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구원이 구원의 의미가 발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종말, 다시 말해 인간의 낯짝들만 설치고, 피겨하고, 모글하고, 스키하고, 아이스하키하고, 스피드 스케이팅에다가 전부다 인간의 얼굴 보고 있는 거예요. 뭐, 얼굴 가리고 스케이트 합니까? 자기가 하나님인데.
이 세상에 얼굴 가리고 오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사실은 예수님이 얼굴을 안 가렸지요. 안 가렸는데 인간 쪽에서 얼굴을 회피했습니다. 그게 이사야 53편 3절에 나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오셨는데 사람들은 전부다 얼굴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건 같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에요. 왜 부부가 오래 살면 각방 씁니까? 얼굴을 대하기 싫어서 그래요. 저쪽에서 ‘아멘’ 하나 나왔습니다. 너무 봐서 식상해요. 그리고 자기 얼굴은 안 보이는데 상대방 얼굴이 늙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 얼굴은 안보여. 자기 얼굴은 30대로 스톱되어있어요.
내가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요. 외손녀한테 내 아내를 소개하는데 “아민아, 할므이 여기 있다” 하니까 “제발, 할므이라고 하지 마라. 할머니라고 해라.” 저는 생각을 하는 거죠. ‘할므이와 할머니의 차이점은...’ 할므이는 팍삭 늙었고, 할머니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고. “당신은 그래, 할배라고 하면 좋겠나?”하는데... 할배와 할아버지의 차이점도 마찬가지거든요.
이 땅에 살면서 얼굴을 미리 함께 할 수 없다면 그거는 꽝입니다. 천국 못갑니다. 지금 왜 얼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실제로 장차오실 메시아가 얼굴을 들이 밀었거든요. 우리에게. 우리는 얼굴 치우고 ‘하나님이여’ 하면서 상상하고, 상상하다 보면 부처 얼굴도 나오고 그 KFC 할아버지 얼굴도 보이고, 산타크로스 얼굴도 보이고, 하여튼 점잖고, 인자하고, 어질고, 대성 불교처럼 세상의 모든 것도 용납할 것 같은 얼굴이지만 막상 진짜로 코앞에 등장한 하나님의 얼굴은 싫어 버린바 돼서 모든 인간이 기겁을 하고 “안 봤다고 칩시다.”하고 외면해 버리는 질겁을하는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얼굴을 상상했습니까? 새벽기도 앉아서 기도하면서 얼굴 그림 그리잖아요. 사람이 뭔가 상상을 할 때는 그림부터 먼저 그리게 되어 있어요. 그 그림에 나오는 얼굴이 어떤 얼굴입니까? 그 예수님의 얼굴이 어떤 얼굴이에요? 뭐, 조인성, 장동건 얼굴입니까? 방탄소년단 얼굴이에요? 우리는 방탄소년단 하면 방탄업체인 줄 알겠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무슨 얼굴입니까? 네가 싫어 버린바 된 얼굴이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맨날 내 얼굴을 지키고 사수하는데 인생을 다 걸었기 때문이에요. 내 얼굴을 자랑 질 하는데 우리는 모든 투자를 다 한 겁니다. 싫어 버린바 된 얼굴.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외면을 해버리죠.
이거는 인간 쪽에 배후에 수상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도 그걸 아세요. 그래서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해도 지장 없도록 주께서 조치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종말에 종말 이후에 상황을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마중을 나와 주지요. 마중 나오는 겁니다.
수퍼 마리오라는 옛날 고전적 컴퓨터 게임이 있고, 또 픽셀이라는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그 공처럼 동그랗게 생긴 어떤 물체가 반 토막 나가지고 입이 돼요. 입이 되면 돌아다니면서 다 삼키는 게임이 있어요. 삼키는 거. 좋은 거 삼키면 30점, 큰 거 삼키면 50점, 점프에서 높이 있는 거 삼키면 100점, 옛날에 컴퓨터 좀 한 사람은 다 기억 날거예요.
그런 게임처럼 미리 종말이 와서 삼킴을 당해 버렸어요. 주님한테. 성령에 의해서 삼킴을 당할 때 왜 삼킴을 당했냐 하면 이 낯짝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요. 그래서 우리 낯짝을 종말에 합당한 낯짝으로, 지옥 갈 얼굴로 분명하게 만들면서 이걸 없애 버립니다.
이 방법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주님과 씨름했던 그 원리 원칙이에요. 야곱이 자기 얼굴은 아는데 주님 얼굴은 못 봤잖아요. 자기가 굉장히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얼굴과 붙었어요. 그 얼굴이 어두컴컴해서 안보이지만 무조건 내 축복 못 가져간다고 싸웠어요. 싸우고 보니까 이겼어요. 이겼다는 게 문제예요.
제가 지난 금요일 날 모임에서 질문을 받았어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이겨서 울며 통곡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설명해 달라 해서 제가 설명해 줬습니다. 이기는데 왜 통곡합니까? 이 이긴 것이 내가 하나님의 천사를 이김으로써 내 본색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마지막 지점까지 다 노출 된 겁니다.
나는 이기는 것이 성공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내 것을 스스로 지키려고 이겨내는 것이 이게 복의 근원이고 하나님의 복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싸움의 요건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싸워야 될 요건.
서로 좋게 지내는 요건이 아니고 서로 티격태격해야 되는 요건을 내가 장착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한다.’는 이것이 하나님과 적이 되고 원수가 되어서 한판 싸워야 될 그런 요소가 내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냥 야곱을 구원하지 않고 야곱으로 하여금 그런 성격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그 야곱의 성격과 더불어 야곱을 종말을 마지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야곱의 끝을 보게 하여 야곱의 끝 사이에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낮아진 모습으로, 야곱에게 져버린 그런 나약한 하나님으로서 복을 줘 버릴 때 그 다음부터 야곱은 나약한 모습으로 거듭날 때 그게 진정 야곱의 복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 순서가 필요해요. 그런 순서가. 이걸 다시 이야기 하면 종말이 종말답게 우리가, 이스라엘이 기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타고난 죄가 있고 그 죄가 죄답게 까발리는 그 죄 속에서 종말은 정당하고 합당하다는 겁니다. 아까 했던 말 다시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것 같으면 단디 만들지, 왜, 얼마나 어설펐으면 그 뱀 하나 들어와서 세상이 작살나도록 그렇게 어설프게 하늘나라를 건축하십니까?”에 대한 답은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무너짐을 통해서 세상은 온전해 지는 겁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악한 것도 없고 마귀도 없고 이제는 선악과도 없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있어요. 그러한 온전한 것을 위해서 필요한 준비 절차가 한번은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안 망하려고 하지 말고 망하는 것을 주 앞에 드리세요. 망하게 해 달라고 내 놓으세요. 망하면 인생 망하면 됩니다. 버티지 마세요. 정말, 버텨서 사단 나는 거예요.
밟을 때 밟히면 되는데 뭐, 안 밟힐 자격이 된다고 자꾸 안 밟히려고 합니까? 자근자근 밟힐 때 ‘마사지 받는다.’ 생각하면서 “여기도 눌러주고 저기도 눌러 주세요.”라고 하세요. 중국의 짝퉁 시계, 짝퉁 가방들 각 나라 세관에서 어떻게 합니까? 아예 불도저 동원해요. 태국에서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불도저 가지고 짝퉁시계 그 얼마나 비싸냐 그런 거 따지지 않고 불도저의 육중한 무게로 그냥 밀어 버려요.
주께서 종말의 육중한 무게로 두꺼운 종말의 무게로 그냥 밀어 버립니다. 내일 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밤 잘 때 그냥 밀어 버립니다. 물론 또 새벽 5시 되면 지진 나거나 여진 나겠지만 또 그때 깨어나겠지만 세상은 그냥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처음부터 무너지는 절차가 꼭 필요해요. 무너지는 절차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주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 보면, 3장 16절에 중요한 거 많아요, 거기 보면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얼굴을 가렸던 수건을 벗어요) 그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우리는 “저 죽어도 마땅합니다.”하는 그런 세리와 창기와 강도 그 사람은 오늘밤에 낙원에서 얼굴 마음대로 보고 살 수 있습니다. 다~ 하나님이 단디 내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한 번 만들어 진 거, 한 번은 불도저에 밀려서 망하고, 망하고 난 뒤에 다시 이제는 내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구원해 줄 때 그게 아들의 나라고 그게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