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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내용 : 성주 / 참회게
◆ 강연자 : <누구냐 넌 5단> 박윤호 교우님
◆ 설법 : 김제원 교무님
▶박윤호 교우님 강연모습◀
▶교무님 설법◀
익산 중도 훈련원에서 일주일 동안 훈련을 하고 왔습니다.
퀴즈> 한 환자가 정신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도대체 입원의 기준이 뭐냐?
의사가 다음과 같은 퀴즈를 냈습니다.
[욕조에 물을 받아서 숟가락, 컵, 밥그릇, 세수대야를 넣어 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욕조의 물을 가장 빨리 비울수 있겠느냐 ]
답 : 욕조의 마개를 뽑아버리면 된다. ^^
그런데 저 주어진 물품 네 개 안에서만 우선 생각을 하려면 입원의 후보가 된다지요? ^^;
1. 성주
성주는 천도제때 쓰입니다.
(곡조를 해 주셨습니다.)
“영천영지 영보장생 만세멸도 상독로 거래각도 무궁화 보보일체 대성경”
3번을 성주 삼편으로 합니다. 성주라는 것은 성스러운 주문 또는 성현이 되는 주문을 말합니다.
1926년 창신동에서 대종사님이 구타원님께 제가의 선법 고락의 선법 염불과 좌선을 많이 하라. 특히 염불 공부를 많이 하라고 하셨지요. 그때 구타원님이 짧은 글 한귀를 주시라고 하자, 대종사님께서 구타원님께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한 처자가 시집을 갈 때 몸종을 데리고 시집을 갔다. 그러다보니 가서 시집을 가서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겨서 시어머니께 여유시간을 자유대로 쓰고자 허락을 받고, 그 시간에 틈틈이 염불을 했다. 그 후로 시어머니와 종들, 그리고 남편까지 염불을 해서 모두 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맑씀하십니다. “염불을 하는 것은 쑥스럽고 공덕이 가벼운 그런 일이 아니라 도인이 되는 길이다.”
그후에 대종사님이 <거래각도 무궁화 보보일체 대성경>이라는 글귀를 주셨습니다.
그후에 성성원님 또한 대종사님께 ‘제게도 한귀 주시라’고 해서 대종사님께서 <영천영지 영보장생 만세멸도 상독로>를 주셨습니다. 그후에 모두 성주를 외우자 서기가 감돌았고 대종사님께서 이것을 천도제때 쓰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라는 것은 아무 곳에나 붙여주는 글자가 아닙니다. 대자 대비는 자비와는 다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챙기는 것은 그냥 자비입니다. 대자 대비는 항마위 이상 도인들의 자비를 말합니다.
성자의 반열에 드는 사람의 글귀에 ‘주’라는 글귀를 붙일 수 있습니다. 성자들의 법문에는 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자가 나기 전에는 천지에 위력이 있고 성자가 태어나서는 성자에 위력이 있고, 성자가 가신후에는 남긴 경에 위력이 있습니다. 삼학팔조 사은 사요에 잘 따라도 위력이 나고, 못지켜도 위력이 납니다. 신앙하지 않으면 어김에 따른 위력을 받고 지키면 지킴에서오는 위력을 받습니다. ‘주’라는 것은 그 자체에 위력이 있습니다. ‘주’는 해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 해석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대산 종사님은 30년만에 풀이를 해주셨습니다.
과거에는 어두운 시대여서 신앙에 따른 위력을 받습니다.
짚신 세벌 이라는 법문을 잘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짚신 장수가 즉심시불이라는 법문을 잘못알고 있었던...)
본래의 참마음이 부처님입니다. 비록 즉심시불을 짚신 세벌로 외우기는 하였으나 그 사람은 그 짚신 세벌을 계속 외우다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성주라는 것은 새세상 새부처님이 내주신 법문이라서 많이 외우고 많이 읊으면 많은 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도제때 외우면 많은 위력이 있습니다. 이제는 주문도 뜻을 알고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뜻풀이보다도 먼저 신앙심에 바탕한 염불이 되어야 하고 그후에 뜻을 알고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뜻을 모르고 외워도 성자가 되는 엄청난 위력의 법문이라는 신앙심을 가져야 합니다.
□ 영천 영지 영보 장생
천지는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이 글귀를 제일 앞과 제일 뒤의 두 글자로 줄이면 영생이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 바뀝니다.
영천 영지는 천지의 일이고 영보 장생은 나의 일입니다.
마음이 영천 영지 하여야 하는데 우리들의 마음은 늘 온갖 합리화만 하고 핑계만 대고 그러지요? 한결같은 마음이 아니라 어느새 또 옛 마음을 그리워하고 있지요? (좌중 웃음)
우리의 수많은 희노애락에 영보 장생이 있습니다. 우리의 변화하는 마음 이면에 있는 바탕되는 마음이 영보 장생의 마음입니다. 맹자께서 토끼와 닭을 잃고 그것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한 사람을 보시며 “토끼와 닭은 찾아 다니는구나. 마음은 잃어버려도 저리 애타게 찾지는 않건마는 재물은 저리 찾는구나” 하시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대에도 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그것을 안타까워하자, 소를 잃은 사람에게 “소는 다시 찾으면 되지만 마음 잃어버린 것은 못찾는다” 라고 하셨습니다. 조변석개로 변하는 마음의 바탕에 영보장생 하는 하나 되는 마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두개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마음을 찾아서 알아야 합니다. 필부의 중생은 그 세계에서만 요란하게 삽니다. 변화하는 세상 안에 변화하지 않는 일원세계가 있는 데 그게 바로 자성이고 성품이고 부처의 마음입니다.
이 자성의 자리는 돈으로 살수 없고 욕심으로 구할 수 없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어야만 찾아집니다.
진짜 돈을 잘 버는 사람은 돈을 쫓아다니지 않고 돈이 오게 합니다. 능력있는 남자들은 여자를 ?i아다니지 않고 여자를 오게 합니다.(^^) 본래의 영보장생의 마음은 영원한 마음입니다. 장생은 단지 ‘단명하다’ 라는 말에 상대하는 뜻이 아닙니다.
□ 만세멸도 상독로
온갖 탐진치와 번뇌 망상을 만세를 통해서 소멸 시킨다. 혼자 드러난다. 라는 뜻이지요.
기독교에서는 이 상독로를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 예수로 표현을 합니다.
‘천상 천하 유아 독존’ 이 말은 나만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온 일류가 다 한 가족인것이지 나 혼자만일 수 없는거죠. 전체를 하나로 묶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만세멸도 상독로란 나의 번뇌망상을 소멸시켜서 제도 시킨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삼학으로써 본래의 참마음이 드러나서 확인하고 참마음을 쓸자리 안 쓸자리를 구분해서 써야 상독로가 됩니다. 참마음이 홀로 드러난다. 드러난 것은 이미 원래부터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해가 드러난 것을 구름이 가렸다고 하여 해가 없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자성은 본래 밝게 드러나 있으나 번뇌망상이 가리고 있어서 드러나 있지 못한것 뿐입니다. 훈련 다녀온 후에는 다들 이 자성이 좀 드러나는 듯 하더니만 도로 제자리지요? 만세멸도가 아니라 ‘이삼일 멸도’정도 되나요? (좌중 웃음)
그런건 상독로가 아니라 반독로도 안되죠.
하나를 독자로 쓰는데,
우리는 짝을 지어서 사는데, 보라는 것은 평상심즉도라 한다.
이 자리는 깨쳐야 안다. 못 깨친 사람은 하루 일과를 지켜야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 대자리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이 자리는 함께하는 자리, 도심 있는 자리입니다. 텅빈 자리입니다. 텅비우고 고요하고 밝은 자리에서 만세의 업이 멸한다.
□ 거래각도 무궁화
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일원화가 피어야 한다.
중생은 ‘거’에서 끝나고 ‘래’에서 끝납니다. 거래하는 길에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까닭이 있어야 합니다.
대종사님이 공원에서 “영혼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걸어 갈수가 없다”고 하셨었습니다.
영혼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 몸 안에도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물속에서도 영혼이 엄청나고. 땅위에 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 영혼들이 거래를 합니다. 한 번 사람 몸을 받았다가 축생의 몸을 받으면 몇억년만이 지나야 다시 사람 몸을 받게 될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거래할 때 그 길에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를 왔다 갔다 할때 까닭이 있고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끝날 때 성인은 대성경을 남기지만 중생은 원망과 미움을 남기고 질투를 남깁니다. 중생은 자리이타가 안되서 그렇습니다. 상대에게 불공을 안해서 그런 것입니다.
서로 거래 관계가 자리이타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잘되고 너는 손해보라는 생각뿐이니 걸음걸음이 악연만 남게 됩니다. 관계가 끝나면 늘 악연만 남는 것이지요. 대산 종사님은 무궁화를 ‘일원화’다 ‘중도화’다고 하셨습니다. 미워할 때 반만 미워하고 이쁠때 반만 이뻐하는 중도화를 해야 합니다.
올때 갈 때 마음이 다르면 안됩니다. 거래할 때 각도가 있어야 무궁화가 됩니다. 안그러면 절단화가 핍니다.
□ 보보일체 대성경
경전은 책으로 된 것을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 사람이 모두 경전이 될 수 있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자기를 챙길때, 그때에는 자기가 자기를 경전 삼기도 합니다. 세상의 일순간이 다 화하게 됩니다.
자성자리를 여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곳에서나 경전을 발견합니다.
비우고 채우고 하는 중도가 맞아야 합니다.
생각도 비워야 밝아진다. 채워서 밝아 지지는 않습니다. 진리도 비워야 밝아집니다.
우리의 하루 일과도 아침 저녁으로 비우고 오후에 채우고, 또 한주의 일과는 주중에 채우고 주말에 비워야 합니다. 마음병과 정신병은 다릅니다.
2. 참회게
참회게는 천도제때 쓰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는데 그 많은 죄업을 어떻게 참회를 할지를 모릅니다.
참회 하는 것 자체로도 사실 대단합니다. 중생은 양심만 지키면서 살다가 어느새 또 다시 죄업을 짓습니다.
참회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원망병이 생깁니다. 죄업을 지은줄 모르니깐 우연한 고를 당하면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아이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그 나이까지 지은 죄업이 고작 얼마나 될까 싶지 않으신가요? 그러나 여러 가지 사항으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벌레나 곤충과 같은 미물에게 알게 모르게 살생을 하기도 하고, 동물을 괴롭히고 학대하기도 하지요.
낚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 줄도 모르고 짓고 있습니다.
< 아석소조 제악업 개유무시 탐진치 종신구이 지소생 일체아금 개참회>
여기까지는 외적인 참회에 대해 설명합니다.
종교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외적인 현실 참회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참인 것이지요. 사실불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원불교는 내적인 진리 참회까지를 요구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참이라고 합니다. 진리 불공이라고 할수 있구요.
일반인들은 현실적으로만 참회하고 기독교인들은 진리적으로만 참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생을 다음에 잘해야 겠다고만 해서는 안되겠지요. 내적인 참회가 없이 현실적으로만 참회하고 살면 진정한 참회가 아닙니다.
참회와 후회는 다릅니다. 참회는 깨달음이 들어가 있지만 후회에는 자기 학대가 들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참회는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걸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참회는 새 생활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참회는 근원을 생각하고 방향을 제시하면서 깨달음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회와는 절대적으로 다릅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수행편에 무시선과 불공법을 주시면서 그보다 앞서 내주신 것이 참회문 이었습니다. 참회라는 것은 마치 음식점에서 장사를 계속해서 하기 위해서는 그릇을 다시 씻어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다시 깨끗이 담을 수 있다. 나를 새롭게 담는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실수와 실패의 차이를 아시나요? 큰 사업을 하면서 한번도 잘못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작은 실수는 큰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실수를 실패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실수를 너무 용납을 잘하는 사람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너무 실수와 실패를 용납을 안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살다 보면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에 끌리어 죄를 짓고 전생의 업으로 짓기도 합니다. 이것을 참회라는 방법으로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학문적으로 달라 든다거나. 지적 호기심만으로 공부에 매달리면 안됩니다.
자기 자랑만 일삼으면 중근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중근병은 조금 안다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시기입니다.
법신불앞에서의 진실한 참회의 눈물이 없이는 종교의 맛을 모릅니다.
훈련중에 뮤지컬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종교가에 들어오면 참회를 하면서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 하기도 합니다. 참회를 할때나 해탈을 할때는 통쾌한 마음이 듭니다. 공부방에 와서 공부를 하다가 순간순간 느끼는 것이나, 법회를 보면서 대종사님 얼굴 보기 조금 죄송함을 느끼는 순간. 이런 때에는 순가적인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자기가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내적 참회와 외적 자극으로 참회를 해야 합니다. 일원상 앞에서 우리는 늘 참회를 해야 합니다. 사은님 앞에서 은혜와 속죄의 마음으로 참회와 헌공을 해야 합니다. 자기 한주일의 업을 녹이는 것이 신앙 수행입니다. 참회는 수행과 신앙의 시작입니다.
□ 아석소조 제악업 개유무시 탐진치
[내가 지은 모든 악업은 처음엔 존재하지 않았으나 탐진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탐진치는 독약과 같습니다.
무시 : 시작이 없다. 무시다. 본래 없다. 출발지가 없다.
□ 종신구의 지소생 : 쫓아서 지은바 만든바 몸과 뜻과 입으로 . 업을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생각으로 짓는다는 뜻입니다. 이중에 제일 큰 것이 말로 짓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에 비수를 꽂기도 합니다. ‘의’가 쌓여서 입과 몸으로 튀어 나옵니다. 죄는 신구의로 다 짓습니다.
□ 일체아금 개참회 : 참회를 한다. 순간 순간 참회하는 능력을 가진 능력자가 되라. 큰 죄업에는 일정 기간의 참회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참회를 하면 영혼이 맑아지고 업이 가벼워집니다. 참회를 할 때 삼고전에 참회하라. 삼고란 일원상, 스승님, 정전 불법에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 하면 사참이 아닙니다.
□ 죄무자성 종심기 : 죄라는 것은 자성에 없고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죄라는 것은 본래 없습니다. 마음을 따라서 있게 됩니다 . 이때의 마음이란 욕심과 분별성 주착심 입니다. 죄업은 욕심에 따라서 생깁니다. 수양을 통해서 욕심이 없는 본래 그 성품 자리에 자꾸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근원적인 이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참을 해야만 죄업이 녹아나는 것입니다.
□ 심약멸시 죄역망 : 마음이 멸해버리면 죄도 또한 없어진다.
자성반조로써 지혜로서 비춰보는 것이 업을 녹이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방법으로 자성반조와 수양을 해야 합니다.
□ 죄망심멸 양구공 시즉명위 진참회: 죄도 없고 마음도 없고 다 비워진다.
욕심의 마음이 다 녹아나고 자기를 억압하는 마음도 녹여서 비운다는 뜻입니다.
사참은 뜨거운 물을 식히기 위해서 위에서 찬물을 붓는 것과 같고
이참은 그 뜨거운 물을 펄펄 끓게 했던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과 같습니다.
이참과 사참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참 사참을 순간순간 함께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