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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1.
오늘은 유소년 테니스 선수들을 데리고 방글라데시로 여행을 떠나는 날.
새벽 5시의 알람시간이 나의 다분히 심리적인 이유로 길다고 느껴지는 여행의 시작을 알렸다.
그 전날의 늦은 잠으로 몸이 무거웠지만 긴장감 때문인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잠이 덜 깨서 ‘부스스한’ 와이프의 운전에 몸과 마음을 기대어 공항 가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일분도 안되어 버스가 도착하여 급한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이른 시간인데도 빈 좌석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제 정말 외국이 건너 방 드나들 듯이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을 실감하겠다.
가끔씩 하는 차멀미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적은 잠, 이른 아침, 뒷자리, 히터 등이 바로 그것인데 오늘은 딱 그런 날이라 긴장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속이 이상하다.
억지로 눈을 붙였다 눈을 떼니 속이 거북하고 진땀이 다 나는 최악의 상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른 시간이고 고속도로다 보니 차가 멈춤이 없는 것이고 그러던 중 공항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따라서 그나마 멀미를 그런 대로 잠재울 수가 있었다.
마침 먼저 도착들을 해서 전화벨이 울린다.
공항은 이른 시간인데도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이상한 복장의 아저씨들이 단체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짐작으로는 아마 동남에 해일피해에 지원 나가는 119대원이 아닌가 싶다.
그 무서운 해일이 거의 코앞인데도 물이 많고 낮은 곳인 방글라데시에는 거의 피해를 안주고 지나간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 덕에 여행은 지워지지 않고 시합도 가능하게 되었으니 신의 조화치고는 기묘하다.
약속장소에 가니 이미 선수들하고 학부모님이 계신다.
이런 저런 상황이 확실치가 않아서 나도 걱정되는 바가 많은데 당사자인 학부모는 얼마나 걱정이 되겠째?
이것저것 상황을 물어보며 답답하고 걱정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나도 통 아는 바가 적어서 시원한 마음을 못 주어 미안했다.
특히 다카 공항에서의 픽업문제가 제일 걱정이 되었다.
정확한 숙소이름도 모르고 거기는 택시 잡기도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하는 데다 영어도 몽당연필 실력이니 걱정이다.
거기다가 이상하게도 선수들도 일부 대회만 등록이 되고 누락이 되었다니 그 또한 내가 가서 해야 할 일인지라 이 계통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해서 선수들한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될까봐 걱정되는 마음이 컸다.
그런 마음들과 무거운 짐을 비행기에 싣고 하늘을 나르니 그래도 기내의 쾌적한 공기와 파일럿의 완벽한 비행술 덕분에 차멀미와 심난한 마음을 가라 앉일 수가 있었다.
보통은 고도를 오를 때 귀가 아파서 입을 쓸데없이 크게 벌려서 아픔을 줄이려고 애쓰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내 생각에는 자연적인 현상도 있겠지만 기장의 비행술이 워낙 뛰어나서 고도 올리기를 부드럽게 하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나라 기장들도 전투기로 단련된 비행술이라서 세계적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싱가폴 파일럿의 기술만은 못한 것인가?
다음에 파일럿인 친구를 만나면 한번 물어 볼 노릇이다.
나는 싱가폴 에어는 처음인데 역시 유명도 대로 기내 서비스도 일품이다.
귀찮고 성가실 정도로 들 락이면서 서비스에 열심이다.
무엇보다도 그 몸에 착 ‘앵기는’ 스튜어디스의 복장이 매혹적이다.
그리고 처음 면접을 볼 때 꼭 허리 사이즈를 보는지 다들 가느다란 허리가 특색이다.
가는 허리가 일하기는 힘들지 모르지만 보기는 좋으니 다 상술일까?
얼굴을 맞대려고 허리를 깊이 숙이거나 아예 무릎을 꿇고 말하거나 시중을 드는 모습도 이채롭고 피곤한 기색 없이 한결같이 보내는 미소 띈 얼굴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결코 지어내기 힘든 표정인지라 그저 감탄스럽기만 할뿐이다.
그렇더라도 긴 여행이고, 비행기 소음이 계속되고, 눈을 붙였다 뗐다 하면서 하는 것이고, 좁은 좌석에 앉아만 있어야 하니 답답하고 멍하기만 하고, 이어폰에서 나는 음악소리도 어정쩡한 소리 덕분에 피곤함은 가중되어만 갔다.
그래도 여섯 시간이 흐르니 착륙한단다.
역시 귀아픔 하나 느낄 짬이 없이 부드럽게 착륙을 한다.
분명 ‘기술’이란 생각에 확신을 같게 된다.
그 기장아저씨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엄지손가락을 세워 주고 싶은데 승무원들만 ‘해피 뉴이어“를 외친다.
몇 년을 윗집 앞집 우리 집이 모여서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합창에 맞추어 그 소리를 외쳤는데 올해는 그 행사에 나만 빠지고 이상한 곳, 이상한 상황에서 새해를 맞는 꼴이 되어 버렸고 아직은 ‘해피’일지 ‘언해피’일지도 모르는 기묘한 상황에서 얼떨결에 듣는 소리다 보니 전혀 실감이 안 났다.
그렇게 해서 생전 처음의 싱가폴에 현지시각 2시 45경에 도착을 했고 시내버스투어하자는 나의 제안은 묵살돼서 우리는 장장 4시간 여를 공항 면세점 안에서만 보내야 했다.
인터넷은 그래도 선진국이라는데 왜 그리 늦은지 역시 우리 나라가 아이티 강국은 맞나보다 싶었다. 그나마도 한글이 안되니 답답하기만 했다.
밥 먹자는 말은 의기 투합이 되어서 식당 가에 들르니 바로 초입에 ‘버거킹’이 눈에 띈다.
나는 바로 옆의 ‘회초밥’ 집도 눈에 번뜩 들어오는데 애들이야 다른 데는 눈에도 안 띄는지
직방으로 버거킹이다. 하긴 우리 애들이라도 그럴 것이다.
전에 큰 놈 어릴 적에 여행 갔을 때가 그랬고 햄버거 하면 침을 흘리는 둘 째 놈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 것은 세계화가 왜 그리 빨리 되는지 모르겠다.
하긴 ‘세계화’란 말 대신에 ‘초토화’란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보편성이 편리하기도 하고 특이성이나 개별성이 불편하기도 한 것이지만 늘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나의 직업정신에 비추어 보면 찜찜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도 콜라는 김이 빠져서 맛이 없었지만 햄버거는 톡톡 씹히는 맛이 있어서 먹기가 좋았다.
애들도 순식간에 비우고는 오락실에 자리를 잡고 나는 할 일이 없어 얼쩡거리다 테니스 중계에 못을 박고 쪼그리고 앉았다.
여자들의 국가 대항전이다.
호주선수라는데 보기 드물게 백핸드고 원핸드고 모습도 멋지지만 폼도 어찌나 깨끗하고 멋진지 한참을 침을 흘리며 봤다. 미끈함에서 품어져 나오는 라이징 볼 처리나 후려치기 폼이 너무도 공격적이고 각이 좋아서 예술의 경지였다.
특히 발리는 그 폼의 멋진 완벽함 때문에 수십 년을 ‘목간통’에 갔어도 못 찾아서 남겨두었던 부분을 남이 찾아서 닦아주는 그런 기분이었다.
정신을 팔아먹다 보니 만날 시간이 다 되어서 불이 나게 가방을 찾아 들고 애들을 찾아 게임 방에 가니 한산하기만 하다. 이어서 처음 내린 곳과 게이트를 가도 없어 왔다갔다하다 다시 처음 장소로 오니 거기에 얌전히 앉아 있다.
약간의 어긋남이 긴장감을 만들었지만 그런 대로 다시 비행기에 올라 드디어 다카로 향하게 되었다.
또 다시 지루한 세 시간 여의 시간을 좁은 공간에서 ‘곱창’ 한번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답답하게 지내며 우리 일행은 드디어 다카라는 곳에 도착을 했다.
다행히 우리가 갈 곳의 영어 약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종이판을 품안에 감추듯이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너무도 반가웠다 의외라서 더욱 고맙고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꼭 남대문 암달러상의 그런 은밀한 동작으로 거기에 있어서, 지친 내 눈의 초점일 망정 잡혔으니 망정이지 잘 못 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렇게 해서 일단 다카 행 일차 커다란 난관은 무사히 통과한 셈이다.
그 다음 우리는 입국서류를 써야 했는데 세상의 최빈국이라는 나라의 입국서류에 왜 그리
쓸 것이 많은 지, 심지어 나는 기가 막히게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성함까지 써야 했다.
그것도 같은 것을 두 번이나 쓰게 되어 있었고 거기다 물품 목록인지 하는 것도 쓰게 되어 있었는데 다른 애 것을 같이 써 주느라고 우리는 결국 그것은 포기했다.
그 덕에 입국 심사 대를 제일 나중으로 나왔다.
짐을 찾고 나니 비로소 사방이 눈에 들어 왔다.
듣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공항은 컸고 그런 대로 기본적인 구색은 갖추어서 우리 나라 시골 완행 버스 터미널 여러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았다.
털털거리며 마중 나온 분을 쫓아가니 주차장이 나온다.
어찌나 길이 거칠던지 턱에 걸려서 카트의 바퀴가 빠져 버렸다. 원래가 빠진 것인데 거기서 완전히 빠진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건물 안에 있는 길이 그런 식이었다.
차보다 얼쩡거리는 사람이 더 많은 장터 같은 공간을 뚫고 나아가니 거기 한 조그맣고 낚은 픽업트럭에 짐을 실으란다. 짐칸에 커다란 둥근 탱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가스차인 모양이다.
아무튼 그 사이에 짐들을 구겨 싣고 사람도 운전사 포함해서 일곱이 그 차에 구겨진 채로 올려져 나오는데 그것도 국제공항 주차장이라고 주차요금을 받는다.
어딘지 밤길을 달리는데 사방은 어둠이고 라이트에 반사되는 희뿌연 한 모습이 멋이 있어서 ‘포그’야니까 ‘더스트’란다.
모르는 이 눈에는 먼지도 멋있게 보이니 확실히 세상은 아는 만큼 사는 건가 보다.
길은 진흙덩어리인지 동물의 오물덩어리인지로 덕지덕지 해서 그러잖아도 한 삼십 년은 족히 묶었을 법한 차는 덜커덩거리고 가로등은 전혀 없고 사람이나 이상한 자전거와 차는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 나와 나는 깜짝깜짝 놀래기나 하고 상상의 안개는 뿌옇기만 한데 운전사는 천하 태평이고 심지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니 참으로 신묘할 뿐이다.
한 참을 가도 그런 길은 계속되고 인도와 차도의 구별은 물론이고 아예 선 자체가 없는 그런 길의 연속에 그 이상하게 생겨서 사람 싣고 다니는 자전거도 도통 불빛이 없어서 위험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길을 한참 지나는 중에 기관총을 든 민병 대 같은 사람들이 검문도 한다.
이런 한가한 나라에 검문소가 있고 검문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고 그 총이 혹시 장난감 총이 아닐까 싶었지만 분명 총구는 내 쪽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또 더 가니 이번에는 돈을 받는다.
그 길이 우리로 말하자면 인천공항 가는 고속도로인 외통수 길 같은 곳인가 보다.
그런 자갈길 같은 곳에서 돈을 받는 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지만 이방인인 내가 그들의 속사정을 알 수가 있겠는가?
사방은 역시 어둡기만 하고 어둠 속에 사람들은 오가고 튀어나오는 중에 대나무로 만든 검문 대를 지나 얼마를 가니 이제 제법 길다운 길이 나온다.
비록 흰색이고 가느다란 점선일 망정 중앙선도 나오고 인도 구별선도 나오고 길바닥도 흙 같은 것이 엉겨 붙음이 없이 말끔하고 여기서부터는 한결같
이 그 이상한 자전거들도 오른 쪽 밑에 별똥 별 같은 아주 작은 불을 달고 다닌다.
여기도 비록 길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가로등이 없다보니 그리 보인다.
여기는 운전석이 오른 쪽이고 차는 왼쪽으로 달려서 영국 문화권영향을 실감하게 되는데 그 자전거는 바깥쪽으로 붙어서 다님으로 꼭 그 라이트가 자전거의 오른쪽에서 반짝거린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무슨 후미등 같은 전기 시설이나 반사장치가 아니고 램프다.
자전거의 뒷좌석 사람 타는 공간 밑에 두 바퀴사이에 걸쳐 있는 차 축 오른 쪽에 램프를 매달고 다니는 것이다. 그 착상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장식으로나 쓰는 램프를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생활용품으로 사용하다니 기이하고 놀랍고 심지어 반갑기까지 했다.
그 조그만 시골 오두막 집 창이나 비추는 작은 불빛이 한나라의 수도에서 어둠에 생명을 걸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유일한 안전장치라는 것이 또한 놀라울 뿐이다.
우리의 안전 불감증은 여기에 비하면 할아비다.
그러더니 이윽고 우리가 묶을 방글라데시 스포츠 학교인 ‘비 케이 에스 피’다.
짐을 내리고 가방을 푸는데 손가락 반도막 만한 바퀴벌레가 튀어나온다.
그래도 화장실도 있어 안에 들어가 보니 냉 온수기 샤워 꼭지도 있고 여기가 물은 넉넉한 곳이라 그런지 물통이 커다란 좌변기도 있고(물 내릴 때는 거의 ‘나이아가라’ 같음) 그 옆으로는 핑크 색의 화장지도 ‘이쁘게’ 매달려 있다.
핑크색 화장지는 난생처음이라서 반가움이 작지 않았다.
벽도 비교적 깨끗하고 그런 대로 우리 나라 여인숙 수준은 되는 지라 생각했던 것보다 최악이 아니라서 안도되는 마음이 컸다.
나는 샤워를 하고 바퀴벌레와 동침을 할 각오를 하고 피곤한 몸을 누이니 찻길이 가까운지 차 소리가 시끄럽다.
나는 역시 나의 애용품 귀마개를 찾아 귀에 꽂고 잠을 청하니 그런 대로 하루 마감이 된다.
방글라데시 2
잠 잘 때와는 달리 새벽에는 추위가 느껴졌지만 내쳐 잠을 자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은 아직도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깊은 잠을 자서인지 마음이 산뜻하다.
밖을 나서보니 주변에 스모그인지 안개인지 쫙 깔려 있는데 약간 푸르스름한 색이어서 나는 이곳은 아침 일찍 소독을 해 주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지만 결국 주변 전체가 똑 고르게 그런 것을 보면 소독은 아니고 아침수증기와 먼지가 만나서 그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보다.
그 위로 해가 비치니 그런 대로 풍경이 ‘보카시’가 되어서 아름답다.
특히 높다란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풍경들이 조금은 남국의 분위기를 풍기니 운치가 나 보인다.
우리가 묵고 있는 곳이 방글라데시에서는 꽤 유명한 스포츠 학교 인가보다.
그래서 인지 주변이 넓고 건물들도 큼직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낚아서 어찌 보면 버려진 시설물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횡한 건물 사이로 그래도 움직이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어서 사람들이 아직은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는 아침인사가 그래도 정겹다.
누군가 “해피 뉴이어!”를 말하기에 생각해보니 오늘이 새해 첫날이다.
어쩌다 테니스에 인연을 갖다보니 이렇게 먼 곳에 와서 이처럼 조금은 황당한 곳에서 가족없이 새해를 맞는 다는 것이 참으로 내가 제 정신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대시험을 앞두고 있는 ‘딸래미’ 일도 내 팽개치고 이처럼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일에 전적으로 뛰어 들었다는 사실이 잘 납득도 안가고 믿겨지지도 않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떠나 나를 위안하는 것은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이 먼 이국 땅에 올 일도 없고 또 생전에 언제 여기 올 일이 또 있겠는가? 뭐든지 새로운 것에 의미를 두는 나로서는 이처럼 처음 와보는 공간에 놓여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새해 첫날의 의미를 되 새김으로 그 모든 난처함에 대한 핑계거리로 삼으리란 생각으로 마음에 도장을 꾹 찍었다.
그러면서 돌아다니는데 같이 간 애들이 아침 운동을 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켓을 가지고 나온다. 이 어려운 일을 택한 그들이 한편 동정심도 가면서도 또 한편 이처럼 그 길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에 그들의 인생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본다.
어차피 인생에 길은 많은 것이고 그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고 그 것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고 또 그 길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비록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이 아닐지라도 그 인생은 보람된 것이 아닐까?
그저 그 들이 이 아침 하나의 희망을 향해 라켓을 흩뿌릴 때에 그런 순수한 마음이나 또한 한 목표를 흔들림 없이 가려는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런 바램이 구김살 없이 이어져서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여 마음에 훈장처럼 가지고 살면서 어려운 인생을 삶에 있어서 하나의 구심점이 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런 그네들의 테니스에 거는 기대감이 오래 오래 즐거움으로 거듭나길 거듭 바래본다.
이어서 우리는 첫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갔다. 아직은 선수들이 덜 와서인지 우리 한국 선수들만 식당을 독차지하고 아침을 먹는데 걱정과는 달리 아침메뉴도 괜찮고 맛도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애들은 영 ‘마뜩치가’ 않은지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특히 우리 둘째 놈 학년인 제일 어린애하고 혼자 온 여자선수애가 잘 먹지를 못한다.
운동은 ‘밥심’이 중요한데 은근히 걱정이 되지만 억지로 먹일 수도 없고 그저 빈말 같은 많이 먹어두란 말로 마음속의 의무감을 헛되이 채워보지만 딱히 방법이 없다.
그도 다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이고 또 꼭 넘어야 할 산이려니 하면서 나만 코 박고 열심히 먹으니 정작 시합할 일없는 내배는 든든하였다.
이어서 쉬었다가 아침운동이 시작되었고 나는 가지고 온 고물 노트북을 꺼내 또닥여 보다가 테니스장에 나가서 운동장을 자세히 보니 그런 대로 언뜻 보면 그럴 듯한데 가까이 보니 시멘트 바닥에 페인트 칠만 새롭게 한 그런 코트다.
갈라진 곳도 군데군데 보이고 관중석이나 붙박이 의자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그냥 우리로 말하면 동네 코트 같은 면이 대여섯 개 된다.
이런 곳에서 국제 대회를 치른다니 잘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나라는 이런 대회조차도 없다고 한다.
이처럼 가난한 나라에 이처럼 빈약한 시설로 국제대회가 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들이 테니스에 갖는 열정이 좀 남다른 모양이다. 아마 영국 문화권의 영향이겠지만 특이하다면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는 아직 못 들어 봤지만 이런 열정으로 말미암아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문화는 결국 그 주변을 먹고사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저버릴 때 화분의 난초처럼 서서히 시들다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물론 버려야할 군사 문화 같은 것도 있지만 우리 삶을 더욱 값지고 기름지게 하는 것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따질 것이 아니고 부단히 물을 주고 관심을 기울여서 가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멸종해 가는 동식물에 관심을 기울여하 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또한 그들은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점심을 먹는데 아침과는 달리 점심 뷔페는 메뉴도 많고 다 먹을 만 했다.
닭고기며 쇠고기도 고소하니 나는 특별히 먹는데 불편함이 없었는데 애들은 벌써부터 고추장을 풀어놓고 난리를 부리면서 밥 먹기 전쟁을 벌인다.
그래도 경험이 많은 애들은 나름으로 적응을 해서 열심히 먹지만 역시 아침의 두 애들은 숟가락질이 시큰둥하기만 하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면서 역시 나는 열심히 음식을 밀어 넣었다.
낮잠을 좀 ‘땡기고’ 운동장에 나가니 애들이 한참 연습에 열중이다.
다른 나라 애들도 다들 나름으로 애를 쓰면서 운동에 여념이 없다.
청운의 뜻을 품고 여기 까지 날라 온 선수들이니 그 애씀이 사뭇 감동스럽기만하다.
이어서 우리는 선수등록을 하는데 이리저리해서 애들 등록 문제가 겨우 해결이 되고 만족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었다.
답답하기는 인터넷이 안되고 어디 마땅히 들릴 곳도 없는 외진 곳이고 딱히 시간 보낼 일이 없는 것이다.
그저 시간이 나면 책이나 보거나 이처럼 글이나 토닥이는 일 밖에는 별 일이 없다.
국제전화나 할 요량으로 사무실에 들리니 전화만 담당하는 직원이 따로 있다.
여기는 선수는 몇 명 안 되는 데 어딜 가나 직원은 남아돈다.
원래 오기로 한 선수들이 덜 와서 인지 여기 사람들이 남아돌아서인지 식당을 가도 그렇고
코트를 가도 그렇고 어디든지 담당이 있고 또한 필요이상으로 많다는 느낌이다.
그 전화 걸어 주는 이의 나이가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통 감이 안 와서 한번 나이를 물어 보고 싶었지만 워낙 전화 걸어 주는 일에 열중이라서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 적당히 느슨하면서 꼼꼼하고 또한 적당히 순발력이 있어 느린 것 같으면서도 철저하고 또한 우수리가 없는 일 매무새로 보아 나이가 우리보다는 많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직도 더 나이를 먹어야 그처럼 일에 매무새가 붙을 것이다.
집에는 별일이 없단다.
다들 나 없이도 잘들 지낸단다.
전이나 지금이나 식구들은 나 없이도 잘 지낼 것이다.
언젠가 조금은 먼 미래에도 식구들은 그럴 것이다. 나 없이도 잘 지내는 그들의 마음에 나는 무엇을 심어 주어야 내 허전함이 찐 계란 노란 속처럼 퍽퍽하고 알차게 채워질까?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들은 그저 그 계란 희자위 같은 내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 가지 않을까?
그러려면 나는 내 안의 나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이다.
올해에는 말이다.
낮잠으로 잠은 쉬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내일 아침 일찍 나는 어쩌던지 시간을 내서 백보드라도 쳐서 오늘 본 선수애들의 폼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새겨 두려면 일찍 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침 7시에 맞춰져 있는 애들 연습시간에 물이라도 나르려면 일찍 눈을 부쳐야 할 것이다.
먼 이국이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떠서 이런 열정으로 말미암아 작지만 분명한 의미로
나한테 다가올 것이다.
방글라데시 3
오늘은 애들 중에 제일 어린 선수 한 명의 예선 시합이 있는 날이다.
그래서 인지 옆에서 자던 애도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한다고 나간다.
나도 좀 뭉그적거리다 운동화와 트레이닝 차림에 라켓을 들고 코트로 나가니 빈 코트가 없이 열심히 연습들을 하고 있다.
다들 청운의 꿈을 품고 이 멀리 까지 온 선수들이니 너나 할 것 없이 연습에 열중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어차피 우리 선수들 연습하는데 끼어 들어서 이러니 저러니 말할 처지도 아니고 또한
같이 연습을 할 처지도 아니어서 바로 그 옆의 백보드로 갔다.
그 옆은 말하자면 잔디코트다.
난생처음 천연 잔디 코트에 선 것이다. 이런 ‘꼬질꼬질한’ 나라에 잔디 코트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지만 잔디보다는 잡초가 더 많은 죽은 코트다.
그래도 잔디 코트에서 백보드 치기는 난생 처음인지라 그런 대로 흥이 났고 또한 몇 일을 운동을 못한 처지라서 백보드를 토닥여 봤다.
다들 선수들뿐인 곳에서 나만 혼자 외롭게 백보드를 토닥인다는 것이 약간은 창피한 노릇이기도 했지만 나야 뭐 그런 것에 애당초 관심이 없는 놈인지라 열심히 두드려 댔다.
하지만 잔디에 아침 이슬이 아직 맺혀 있어서 운동화가 엉망이 되게 풀들이 난리로 붙어 다린다.
거기다가 물이 묻어서 불편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공에 묻은 물이 날아갈 때 물방울을 퉁기면서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아름다움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고 아직 여독이 안 풀린 찌푸둥한 상태의 몸이라 그런지 금방 땀이 났고 숨도 차왔다.
적당히 발리 연습과 서브 연습을 끝내고 나는 운동화를 털면서 어설픈 아침운동을 마치고는 애들하고 식당으로 갔다.
여기는 식당이 우선 우리처럼 조리대가 적당한 높이의 싱크대가 가장자리에 몰려 있어서 허리를 펴고 일하게 되어 있지를 않고 그냥 휑한 바닥 한 가운데에 어릴 적 우리 나라 부뚜막 만한 그런 높이의 3-40센티미터로 줄을 지어 조리대가 있는 통에 다들 쪼그리고 요리를 해야 한다.
식당 메뉴는 늘 같다.
아침에는 식빵하고 ‘계란 후라이’ 하고 계란 ‘부칭개’가 있고 우유하고 바나나가 있다.
한국서도 먹는 식이니 특별히 못 먹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난 소금을 굳이 찾아서 뿌려먹으니 어제 아침보다는 훨씬 먹을 맛이 났다.
메뉴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아침만 다르고 점심 저녁은 거의 비슷하고 그나마 그것이 매일 똑같은 ‘고정식’인가보다.
음식은 비교적 내 입에 맞는 편이긴 하지만 열흘을 같은 메뉴로 버티기가 만만한 일이 아닐 듯 싶다.
아침을 먹고는 첫 번 째게임이 있었는데 상대는 방글라데시 선수였고 우리 애보다 덩치도 크고 나이도 많은 것 같았지만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다들 자기 인생을 걸고 공 한 개 한 개를 치는 것이니 이긴 기쁨도 있지만 패자에 대한 안쓰러움도 없지 않았다.
우리 나라 애들은 모두 예선 일회전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긴 이렇게 멀리 와서 예선 일회전도 통과 못하고 일주일은 빈둥대는 것도 말이 아닌 노릇일 것이다.
다들 본선에도 들어서 좋은 성적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어제와 똑 같은 메뉴로 점심을 먹고는 뒹굴렁거리다 낮잠도 좀 잤지만 여전히 ‘찌푸둥한’ 것이 아직도 몸 상태가 개운치를 않다.
하지만 오후 운동을 나간 애들을 쫓아가 예의 그 백보드를 창피함을 무릎 쓰고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쳐 댔지만 여전히 몸은 개운치가 않다.
아마 몇 일 더 걸려야 몸이 제 상태를 유지하리라.
이제까지는 우리 선수들만이 주로 식당을 이용했는데 내일이면 본선 ‘싸인인’이 시작되어서인지 저녁 식당은 그런 대로 붐볐다.
이제 애들한테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무 탈없이 좋은 성적을 내야 할텐데 걱정이 드는 마음을 베개에 포개서 잠을 청해본다.
방글라데시 4
B.K.S.P.
내가 묵고 있고 선수들이 시합하는 이곳의 이름.
여기서 ‘비’는 방글라데시의 약자지만 다른 것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단어의 약자다. 지명 이름인지 뭔지 나로서는 알지도 못하고 딱히 알고도 싶지 않은 단어들의 약자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스포츠 학교 같은 곳이다.
(Bangladesh Krira Shikkha Prothista 이러니 내가 알 수가 있나?)
그래서인지 그래도 언뜻 보면 그럴 듯한 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건물들이 3-4층 정도로 그 규모도 비교적 크고 또한 탄탄하게 지어 졌다.
부분적으로 아치 형태나 원형의 구멍이 순전히 장식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어 있고 콘크리트 건물이면서도 어느 부분은 붉은 벽돌로 외벽을 마감하여 단순한 건물의 외관을 커버한 노력이 역력한, 그런 대로 운치가 있다. 거기다가 야자수 나무들이 군데군데 높다랗고 훤칠하고 시원한 느낌을 가중시키니 나름의 멋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처음에 지어 졌을 때는 그런 대로 봐 줄만한 건물이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외벽이 낚아서 전체적으로 음침한 느낌만 보일 뿐이다.
아마 이 대회를 위해 부분적으로 내외 벽을 도색을 했지만 그것도 안 한 곳이 더 많아서 그런 곳은 ‘검으죽죽’한 ‘때 꼬장물’이 흘러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통에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그런데다가 비교적 휑댕그러 할 정도로 널따란 이 곳은 사방이 높다란 담으로 둘러 쳐져 있어서 우리는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는데다가 우리도 밖을 나갈 수가 없다. 아니 나가면 못 나가지는 않겠지만 딱히 나갈 이유도 어렵고 나간다니 경窩?있는 일행이 한사코 무턱대고 말리는 통에 그리 되었다.
한 밤중에 여기로 덜덜거리는 차에 졸면서 실려 온 이래로 단 한 자국도 밖을 나가본 적이 없으니 자의든 타의든 감옥처럼 되어 버렸다.
도대체 밖이 어떻게 생겨 먹었을 지 궁금하기만 하지만 이층 내가 묵고 있는 방에서는 담 너머 밖의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나 소롯길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담 너머로 하루 종일, 밤낮으로 울려 대는 크랙션 소리며 오가는 사람들의 물결이나 정기적으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기도소리 등을 감안하면 분명 거기도 나와 다른 인생들이 나와 다른 원을 그려가며 돌고 있으련만 나갈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 안은 도대체 시설이라고는 딱 하나 ‘카페테리아’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가 유일한 이 감옥을 ‘피엑스’ 같은 곳이다.
널따랗고 붉은 벽돌의 일층 집이어서 언뜻 보면 아주 폼이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파는 것이라고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범위도 아니다.
냉수, 콜라, 사이다, 무슨 감자 칩 같은 거 이것이 전부다. 모르겠다 혹시 커피를 파는지.
아마 이름이 있으니 커피를 팔을 지 모르겠다.
나는 거기를 오로지 물이나 사기 위해서 들린다.
내가 데리고 온 어린 선수들을 위해서 할 일이라고는 유일한 일이다. 물 배달.
맥주집이나 호프집?
그런 것이 있으면 감옥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여기 와서 술이라는 것은 빈 병일지언정 본 적이 없다.
여기가 아랍도 아닌데 거참 이상한 노릇이다.
어차피 나야 술에 별 관심이 없으니 그런 대로 버티지만 고등학교 선수를 데리고 온 우리나
라 코치는 무슨 맛으로 버티는지 궁금하다.
그저 감옥 기분이 안 난다면 어찌 되었든 여자들이 눈에 띄고 말도 걸 수 있다는 것 빼고는 영락없는 감옥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건 방글라데시 인들한테 부탁을 해야 하는데 꼭 웃돈이 들 각오를 해야 한다. 아마 감옥서도 그렇지 않을까?
여기서는 내 자신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또한 맨입으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감옥에서처럼 아주 기초적인 것은 준다. 휴지나 전등 이런 것들뿐이다.
이 곳에서의 삶은 전적으로 그들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공치는 일 이외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뭐든지 부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뭘 부탁해야 할 지 몰라서도 못하는 면도 있고 아예 감수하는 것이 낫고 웬만하면 그냥 참고 지내는 것이 장땡이다.
인터넷도 한번 시도해 봤지만 미치도록 늦다. 그 사이에 화장실에 가서 ‘넘버 1’을 치러도 될 정도가 지나야 겨우 홈에 들어 갈 수가 있고 들어갔어도 한글은 다 깨지고 겨우 이 메일 주소만 베껴 나와서 방글라데시인 조력자(노인이었다.)의 홈에서 되지 않은 영어로 열심히 쳐서 ‘보내기’를 누르니 먹통이 되 버리고.....
전화도 걸기가 만만하지가 않다. 그것도 자치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교환에게 이야기해서 하는데 그나마도 한참만에 재수 좋게 연결이 되어서 두어 마디만 하고 끊어도 ‘삼분’이다. 연결하는 시간까지 다 돈으로 친다.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여기에 적응하면 오히려 편한 면도 있고 생전 있어봐야 돈 쓸 구멍이 없어서 좋다.
특별히 시비 걸 일도 거는 사람도 없어서 좋고 그냥 수양 삼아서 산 속 오지에 들어 왔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편한 점이 많다.
밥을 안 해서 좋고(빨래는 해서 널면 양말이 꼭 이틀 걸리므로 역시 돈을 주고 맡기면 편하다) 자잘하게 신경 쓸 일이나 걱정거리가 특별히 생길 일이 없어서 좋다.
애들 시합에 응원이나 나가면 되고 나머지는 그저 도닦는 기분으로 지내면 특별히 지내기에 어려움은 없다.
모든 일은 맘먹기 달린 것이니 여기도 천국이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사실 여기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낀다잖은가?
나도 좀 멀리 와서 도 인생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결코 작지만은 않은 행복이 아닐까?
방글라데시 5-테니스 백보드
몇 일 째 몸이 무거워서 여독이 아직 안 풀렸나 했더니 코도 맹맹한 것이 조금씩 정도가 심해져 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코감기에 걸린 것 같다. 거기다가 가끔씩 재채기도 나오는 것을 보니 더욱 수상쩍다.
다른 몇 사람들도 그런 비슷한 증상이 있어서 여기의 나쁜 공기 때문에 생긴 알레르기 현상 같기도 하지만 감기 쪽에 더 무게가 간다.
멀리서 감기에 걸렸다면 태생이 코가 나쁜 나로서는 걱정이다.
아무래도 코감기 약을 일행 중에 찾아서 먹어야 할 것만 같다.
오늘도 몸은 좀 무거웠지만 아침에 일어나 백보드에 갔다.
여전히 조금만 공을 쳐도 땀이 난다.
코도 맹맹한 것을 보면 몸이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것도 같고 빨래가 엄청 늦게 마르는 것을 보면 여기가 워낙 습도가 많아서 그런 것도 같고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지만 아무튼 한국에서보다는 공치기가 힘들다. 여독이 아직 안 풀렸다고 하기에는 세시간의 시차뿐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하긴 비행기가 내 몸의 여러 가지 기초적인 신진대사의 기능들을 뿌리 채 흔들어 놓고 그것들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흐트러져서 생긴 흙탕물에서 흙가루들이 가라앉아 물이 깨끗해지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상태로 일생을 테니스에 걸고서 청운의 꿈을 안고 대회에 참석한 어린 선수들의 토닥거리는 아침 훈련의 연습공 소리 속에서 이제는 열심히 해봐야 별 볼일 없는 중 늙은 이 하나가 알아주고 관심 가져 주는 이 아무도 없는 백보드 공을 혼자 씩씩거리면서 열심히 공을 치고 있다.
약간은 코미디 같기도 하고 무슨 극단적인 대조 감을 연출하기 위한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는 무지하게 창피하기도 한 그런 미련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저런 것 관계없이 열심히 백보드를 때렸다.
그런 것을 보면 나도 얼굴이 꽤나 두꺼운 편이고 선조가 멀고 먼 그 옛날에는 왕족이었다고 하지만 다 공염불이고 그저 흔하고 흔해빠진 머슴의 후예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휑한 일을 10시간이나 비행기 타고 날라 와서 혼자 열심히 씩씩거릴 일이 있겠는가?
내가 나를 봐도 그런 일은 좀 불가사의 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운동을 해야하고 또 이 아침 다른 할 일이라고는 이 감옥 같지 않은 감옥에서는 달리 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 ‘휑뎅그레한’ 속에서는 하다 못해 산책마저도 하나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그 만큼 여기는 그냥 황당한 그런 곳이다.
높은 곳이 있어 조망을 할 수도 없고 물이 있어서 넋 놓고 지난 시간을 반추 할 수도 없고 말이 짧으니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그렇다고 같이 온 어린애들 모아놓고 훈계를 할 일도 없고 더군다나 그들과 무슨 연습공을 칠 상황도 아니고 그저 그 알량한 아침식사 전에 내가 할 일이라고는 이 백보드 치기 말고는 다른 그 무엇도 없다.
벌써 몇 일 째 두드린 일이니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제는 어지간히 눈에 익어서 “어 저 이상한 인간 또 나왔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인지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나야 바라던 바다.
그러 건 말건 ‘벽 때리기’ 하는데 뭐 별로 지장이 있는 일도 아니니 그저 나는 열심히 벽을 칠 뿐이다.
아침 공기를 가르는 어린 선수들의 외마치 외침 의 난무 속에서 이처럼 미련스레 약간은 무아지경에 몰입해서 벽에 공을 끊임없이 보내는 것도 남다른 맛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그들의 외침과 나의 외침은 질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다른 것일 지라도 말이다.
그들의 그것은 그들의 미래가 달린 외마디라면 나의 이것은 현실의 지우개 같은 것이다.
사람은 살다보면 간직하고 싶은 나보다 버리고 싶은 나가 더 많은가 보다.
나도 오늘 이 멀리까지 와서도 굳이 뭔가 버리려고만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면 내 인생도 가히 한심한 경지 이상은 아니란 생각이다.
‘그러고로’ 한참을 휘두르고 있는데 옆의 코트에서 내가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인도인 부녀가 날 부른다. 금방 까지 같이 연습공을 쳤던 방글라데시 여자선수 애들이 들어가는 바람에 연습파트너가 필요한 모양이다. 나야 그저 “베리 굿!“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멀리까지 와서 비록 어리지만 외국 여자 선수하고 연습공을 같이 치는 경사스런 사태가 발생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지는 않고 ‘지옥에도 부처가 있다’는 내 인생의 ‘마지노 선 위로의 격언’은 오늘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의사인 아버지하고 단 둘이 인도에서 온 상태라 그러잖아도 연습 파트너가 늘 아쉬워서 이리저리 파트너 찾느라고 애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상대가 자기들 스케줄대로 움직이기 위해 빠져나가면 ‘닭 좇던 개 신세’가 되곤 하는 모양이고 오늘 아침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저께인가는 나와 같이 온 여자선수에게도 넌지시 다가와 그녀와 연습공을 같이 치자고 했고 또 그렇게 했었다.
그래서 나는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어 열심히 같이 공을 쳤다.
오랜만에 치는 하드코트고 공이 바람이 팽팽해서 아웃이 나오곤 했지만 그런 대로 길이 들어가면서 그녀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만큼은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이는 솔직한 것인지 기후 탓인지 나는 땀을 뻘뻘 흘렸고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마는 얼굴 색이 검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얼굴로 말하면 전체적으로 작고 길고 측면으로는 우리처럼 납작한 것이 아니고 둥그스름한 전형적이 코가 뾰족하고 오뚝하며 눈은 쑥 들어가 있으면서도 빛이 났다.
그런 모습이 전형적인 인도인의 얼굴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동양과 서양이 만나서 생긴 간다라 미술의 전형적인 얼굴 양식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나로서는 그림책 속에서 많이 본 것 같은 그런 얼굴인상의 소녀였다.
약간은 이지적이고 조금은 보수적인 것도 같고 쓸데없이 선민의식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녀의 아버지도 전에는 테니스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열심히 옆에서 이래서 저래라 코치를 한다.
나는 그저 열심히 그녀 근처로 공을 보내주기만 하니 나로서는 커다란 부담도 없고 그전 단순한 마음만 유지하면서 휘두르기만 하면 되었다.
힘은 들었지만 여기서 공연히 혀를 내밀며 헉헉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도 난처한 노릇이라서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일치고는 더 이상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한참을 쳤나보다.
땀이 눈에 박히고 얼굴에 흘러내려 소매로 걷어내며 휘둘렸다.
마지막으로 서브에 스매시 연습까지 하고 나니 이제 그만 하잖다. 행여 그 말이 안 나올까봐 걱정이 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오우케이!”하고 다음을 약속했다.
“애니 타임 콜미 프리스”하니 아주 좋단다.
해서 오후까지 약속을 했지만 내 몸이 배겨날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부녀는 내가 연습 스파링 파트너 해 준 것에 흡족해 하는 모습이었고 그 아버지는 나보고 코치냐고 묻는다.
언젠가 캐나다에서 어는 아줌마한테 선수 출신이냐고 물음을 받아서 테니스 배우고 나서 생전처음 대접 아닌 대접을 받아 우쭐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코치냐고 물어오니 뭐든지 오래하면 안 들을 소리도 듣고 이변도 생기나 싶었다. 복권도 열심히 사다보니 언젠가 터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을까?
뭐 대단치도 않은 착각에 우쭐한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없는 일보다는 나은 일이니 보람 같지 않은 보람이지만 추수 끝에 줍는 씨 나락 같은 것일 망정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심정을 싸매 가지고 들어와 역시 그 잘난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니 오늘 하루의 출발치고는 방글라데시 와서 처음으로 산뜻하다.
방글라데시 6-식당
식당은 그렇고 그렇다.
특별히 먹잘 것도 없고 그저 그런 메뉴다.
그래도 그중 제일 우리 식에 맞는 것은 아침식사다.
다른 끼니도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침은 간단하다.
식빵하고 계란 말이 비슷한 부침개하고 계란 후라이에다 우유하고 홍차다.
거기에다 바나나도 있다.
나는 우선 빵에다 부침개를 포개서 소금을 뿌려서 삼층으로 만들고 우유를 한 사발 따른 후에 설탕을 쳐 넣는다.
그리고 후라이 한 개를 역시 소금을 쳐서 접시에 담아와서는 홍차와 함께 먹는 맛이 그런 대로 괜찮다.
처음에는 소금이 없어 밋밋했지만 두 번 째 날부터는 나만 특별히 소금을 주문해서 매 아침마다 그 소금을 독식했다.
포개져 있는 빵과 부침개를 야금야금 입으로 버무려 가는 맛이 그런 대로 좋다.
우리 나라 샐러리맨들이 아침에 일찍 나와서 포장마차에서 아침을 때울 때 먹는 그 샌드위치다. 나는 어릴 적에 학원 가 근처를 들락거릴 적에 포장마차에서 이 샌드위치를 잘 먹곤 했다.
그 뒤로도 가끔 종로를 지날 때마다 가끔씩 먹곤 했고 지금도 어디 길가다 포장마차에 그 것을 하고 있으면 기웃거리곤 한다.
그 ‘빠다’를 휘휘 저으면서 녹이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거기다 식빵 두 장을 팍 펼쳐서 넙적한 주걱으로 넙적넙적 누르면 지그르 타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도 듣기가 좋았다.
그리고 솜씨 있게 그 주걱을 빵 밑으로 집어넣어 재빨리 뒤집는 모습도 눈에 선하고 계란을 컵에다 딱 깨서 넣고 야채를 대충 넣어서 저은 다음 그것을 후라이 팬에다 흩뿌려서 적당히 ‘몽치몽치’ 하다 알맞게 익으면 노릇노릇해진 식빵을 포개서 쑥 밀어 내 놓고 오뎅 국물도 한 사발 준다.
적당히 식혀 가며 후르룩 거리면서 베어 무는 샌드㎵÷?맛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것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가격이 싸다는 것이고 또한 창자가 유독 짧은 나로서는 그 이층 짜리 한 장에다 우유 한 잔이면 아침식사로서 넉근하기에 더욱 좋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뒤로는 그 맛을 느끼기가 힘들어졌다.
아마 계란도 그 때처럼 맛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 야채의 가짓수가 전 같이 않게 그저 시늉만 내는 정도여서 인지 그 맛이 안 난다.
그래도 아직 나의 좋아하는 메뉴 중에 하나지만 집에서는 통 그런 것을 먹을 수가 없다.
원래가 입만 가지고 사는 놈인 내가 직접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와이프도 딱히 즐겨 만드는 메뉴도 아니다보니 내가 우겨서 만들어 달랄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길가에서 용케 끼니때가 되어 포장마차를 만나고 그런 메뉴가 있으면 먹게나 되지 여간해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그런 것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시골 생활을 주로 하는 입장에서는 도회지 사무실 근처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보니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렇다고 대단한 메뉴도 아닌 것을 찾아 다니면서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하고는 천생연분인 식사 메뉴지만 못 만나서 아쉬워하던 차에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매일 아침에 먹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맛이야 예전의 그 맛하고는 비교가 안되지만 아쉬운 대로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런 이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단이다.
하긴 점심 저녁은 거의 같은 메뉴니까 특별히 고르고 말 것도 없다.
거기다가 매일 늘 똑같다 보니 선택의 여지도 없다.
맨밥, 볶은 ‘알람미’ 밥, 쇠고기 찜, 닭튀김, 노란 카레, 야채 버무려서 찐 거, 과일이라고 해야 애 주먹만한 ‘지질이도’ 못난 사과와 씨 들어간 귤이 가끔 나오고 바나나는 매번 나오지만 나는 바나나는 한번도 먹지를 안 했다. 거기다 오이하고 또 자라다 만 것 같은 토마토가 늘 나온다.
아랍사람들의 주식인 둥근 접시 모양의 밀가루 판떼기인 ‘스파티’(이 이름은 스파게티의 ‘게’자만 빠진 것이라 머리 나쁜 나도 쉽게 외웠다.)가 있다.
이렇게 쓰면 많아 보이지만 정작 뷔페탁자에 서면 젓가락을 가져 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이중에서 나는 밥, 쇠고기, 닭고기하고 스파티에 토마토와 홍차가 나의 선택이 된다.
그 중에 토마토하고 스파티에는 꼭 설탕을 친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기 먹기가 힘든 가정에서 자라다 보니 아직도 고기라면 기름기로 핏줄이 막히는 한이 있어도 그냥 사족을 못 쓰는 편인데 좀 퍽퍽하기는 하지만 거기다 쇠고기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느끼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적당히 약간 질긴 기름 층도 간간이 있어 먹을 만하다.
그 다음이 ‘스파티’다.
납작하게 구운 밀가루 판인데 이것의 특징은 쫄깃한데다 아무 맛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꼭 거기다 설탕을 뿌려서 설탕 맛으로 씹는다. 설탕을 쳐서 돌돌 말아서 먹으면 그 또한 그런 대로 잘 넘어 간다.
그런 것들을 먹고 나서 그 사이 식은 홍차를 홀짝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늘어놓으면 딱히 멋스럽다 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억지 폼일지언정 턱을 괴고 멍청해질 만하다.
그런데 그 스파티가 그저께부터 어쩐 일인지 나오질 않아서 섭섭하다.
비교적 나는 매일 같은 메뉴라서 약간 질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대로 잘 적응을 하고 있는 편이다.
입이 까다롭지만 신기하게 김치가 없어도 버티는데 특별히 어려운 것이 없다.
거기다가 맛나게 정신없이 먹는 식단이 아니고 먹어야 산다는 식의 개념론 적인 식사를 하다 보니 우리 나라 구내 식당처럼 과식할 일이 없고 주식인 밥이 하도 기름기가 없어서 이래저래 소화가 안 될 일이 없는지라 속은 무지하게 편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창자가 아래위로 모두 시원찮은 나로서는 여간 다행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애들은 뻔질나게 컵 라면들을 먹고 끄덕하면 음식을 남기는 것을 보면 뭔가 입에 잘 안 맞는 모양이다.
오늘은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시간이 지나도 음식을 못 먹게 하더니 한참만에 넥타이 맨 사람이 오니 먹으란다.
오늘이 디너파티란다.
말이 파티지 오히려 반찬도 적고 내가 좋아하는 쇠고기도 스파티도 없고 밥도 평소의 두 종류에서 한 종류이고 그것도 이상하게 버무려서 전체적으로 그나마 다른 때만도 못했다. 거기다 닭도 한 조각만 가져가란다.
특별히 표시 나는 것이라고는 사이다 캔을 한 개씩 나누어 준 것뿐이다.
세상의 디너 파티 치고 이보다 더 간단 명료한 것이 또 있을까?
아마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이 정도였을까?
평소에도 늘 절약으로 찌그러진 삶을 사는 나로서는 이제 돌아가면 아예 형체도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게 도인이 되어서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방글라데시 7-라샤이에서1
라샤이는 인도와 접경의 도시이다.
여기는 다카보다는 기온이 약간 낮고 공기는 훨씬 맑다.
습도도 적고 바람도 약간은 부는 편이라서 빨래도 비교적 다카보다는 잘 마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역시 평지인 것은 다카나 마찬가지이다.
왜 그렇게 ‘릭샤’라는 교통 수단이 일반화되었는지 처음에는 궁금했었다.
우리 나라 같은 표고의 차가 심한 나라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반복이 심해서 절대로 이런 교통수단이 존재 할 수 없지만 여기는 어디를 가나 평지이다 보니 완만하기만 함으로 그런 교통수단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그 릭샤라는 것이 뒤에는 바퀴가 둘인데다가 심지어 뒷자리에 세 사람이 타기도 하니 여기 같은 평지가 아니라면 여기 사람들의 다리통이 아무리 굵고 장사라도 도저히 교통수단으로서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런데 릭샤 운전사들이 지천인데 왜 세계적인 자전거 선수는 없는 지 궁금하기만 하다.
누군가 노동은 운동이 아니라고 하더니 그래서 인가?
생업으로 하는 노동이다 보니 운동하고는 거리가 멀기만 한가보다.
아무튼 그런 이곳에 와서 역시 나는 백보드를 안 칠 수 없는 노릇이라서 테니스장에 처음 갔을 때 무엇보다도 백보드를 먼저 찾아 봤다.
여기의 테니스 코트는 8면으로 의외로 많다. 그리고 각 코트마다 여유공간이 넉넉해서 답답한 구석이 전혀 없고 스탠드도 널따랗게 차지하고 있고 두 면에 라이트 시설도 높다랗게 설치되어 있어서 그런 대로 구색을 갖춘 곳이다.
당연히 백보드도 있다.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웬만해서는 공이 밖으로 나가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여기 방글라데시는 백보드를 만들 때 양쪽?안쪽으로 1미터 정도 구부려서 아늑한 느낌이랄까 공이 튀어 나가 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리고 이곳 라샤이 ‘자파 이맘 테니스 콤플렉스’에 있는 백보드는 유별나게 줄을 두 줄로 그어놔서 네트의 높이를 나타내는 아랫줄과 윗줄 사이로 공이 치게 함으로서 네트에 걸리는 것과 아웃되지 않게 치는 연습을 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돋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백보드가 코트 면에 걸쳐 있어서 시합 할 때나 다른 선수들이 연습할 때는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천상 다른 선수들이 안 칠 때나 나 같은 놈이 붙어 다려서 공을 칠 수 있는 곳이다.
이른 아침에는 그래도 그 곳이 구석에 있는 코트다 보니 가끔씩 비는 지라 나는 역시 몇 번을 애용했다.
백 보드 한 가운데가 금이 가 있지만 공치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다.
열심히 치다보면 이미 솟은 해가 백보드 옆으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어 붉은 색깔을 한껏 뽐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보는 아침해는 왜 그리 윤곽선이 뚜렷한 지 모르겠다.
아무리 컴퍼스로 정확히 그린다고 해도 저처럼 완벽한 원을 만들 수 있을까 싶다.
조물주의 조화는 세상 구석이 라고 해도 소홀함이 없다.
하지만 역시 이십 분 이상 두드리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감기 기운이 남아 있고 여기 기온에 몸이 적응이 안되어서 그런 모양이다.
세상 상 끝에서 두드리는 백보드라고 해서 특별날 것도 없으련만 몸은 기온과 풍토에 민감한 것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노후 된 몸이라서 적응이 더디기만 한 것인지 벌써 여기 온 지도 열흘이 넘었는데 제 컨디션이 아니니 매일같이 한 운동도 다 공염불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인지 같이 온 선수들도 영 성적이 안 좋아서 괜 실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의 백보드 인생은 지구를 돌아서도 여전한 것처럼 내 삶의 허전함도 여전히 쫓아다니는 귀신인 듯 싶다.
공을 자꾸 쳐내도 나한테로 다시 돌아오듯이 내가 가지는 삶의 태도도 끌어안고 뒹굴지 않는 한 이처럼 끈질기게 날 쫓아다니면서 마음의 무게만 더 지울 것만 같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더 힘껏 백보드를 두드려 보고 싶다.
방글라데시 8-라샤이 2
어제는 이런 저런 꿈을 꾸면서 잠을 설쳤다.
아마 처음으로 방글라데시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싶다.
약은 엄청 작은 것이지만 체질이 달라서 인지 몸이 잘 배기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덥기도 한 것을 보니 확실한 해열제를 준 모양이다.
다시 뒤척이다 다시 집에 관한 꿈을 꾸고는 깨보니 사자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놈의 사자 울음소리가 별로 큰 것 같지도 않게 ‘컥컥’거리고 동물원과의 거리도 거리가 있는 데도 가끔씩 잠을 깨는 것을 보면 그 나름의 주파수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 먼 옛날 원시시대의 선조부터 내재되어 있던 ‘동물적인 본능’으로는 꽤 크게 들리는가 보다.
그렇다고 박차고 일어날 나도 아니어서 다시 잠을 청해서 무슨 꿈인가를 꾸다 잠을 깨니 이번에는 ‘모슬렘’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그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을 꼭 시간을 정해서 기도를 하는 통에 여간 깊이 잠이 들지 안 했으면 깨지 않고는 뱃길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전에 우리 나라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새벽 종 소리 같은 것이다.
그냥 조용히 자기들끼리 기도하면 누가 말리련만 이건 아예 마이크로 떠들어대는 통에 잠을 설치거나 깨지 않을 수가 없다. 모슬렘이 전체 인구의 80%라지만 이렇게 무슨 민방공 훈련 ‘사이렌’처럼 거국적으로 ‘쏼라대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없다.
여기서도 그 알량한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인가?
정오 같은 시간이나 저녁의 한가한 시간에 들으면 그것도 들을 만 한 운치가 있지만 새벽에 들리는 마이크의 기도소리는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시골 작업실에서 가끔씩 듣는 새벽녘의 이장 마이크 소리와 비슷하지만 이것은 그것보다 크고 낭랑하며 길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무조건 귀마개를 하고 잠을 잤지만 이제 여기 생황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서 그것이 없어도 잠을 자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건만 오늘은 하도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의 잠을 가로막는 요소들의 난무였다 보니 그것도 한 역할을 했나보다.
그래도 다시 잠을 또 억지로 청하고는 창문이 어슴푸레하기에 결국 이불을 차고 일어나니 시간이 꽤 되었다.
결국 ‘개갈 안 나게’ 잔 잠이지만 시간으로는 꽤 오래 잔 셈이 되었다.
나는 이 닦고 고양이 세수에 아침 볼일도 보았다.
내가 묶고 있는 이 모텔의 이 방은 그래도 다른 방보다는 고급이라서 가격도 하루 15000원 정도로 배가 넘는다.
말하자면 특실인 셈이지만 뭐 별로 다른 방과 별 다른 것은 없고 있다면 ‘코딱지’만한 텔레비전이 하나 있고 구내 통화밖에 안 되는 전화가 하나 있다는 것이 다른 방과 다를 뿐이다.
그리고 화장실도 다카에서 묵었던 스포츠 학교 기숙사보다는 조금 크지만 더운물은 전기 온수기라서 애 오줌만큼 찔끔거리는 통에 내 긴 머리카락을 빨려면 그야말로 보통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가 뭐가 특실이라는 지 알 수가 없지만 요금은 꼬박꼬박 챙기니 울화통이 날 정도다.
아무튼 그런 화장실에 앉아서 아침 볼일을 보려니 조금은 약이 오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제 이 모텔도 묶은 지가 여러 날이 지났고 이제 한 밤만 지나면 그 것도 끝이니 그저 덤덤함으로 볼일을 볼뿐이다.
그런데 그 화장실 옆의 용도를 알 수 없었던 주전자 같은 플라스틱 병의 용도를 드디어 알았다.
그것은 여기 사람들이 볼일보고 나서 휴지대신 물로 닦을 때 사용하는 것이란다.
말하자면 여기 식의 ‘비데’인 셈이라고나 할까.
여기 사람들은 오른 손으로는 밥을 몽실몽실 뭉쳐서 한입거리로 만들어 먹고 왼 손은 화장실에서 사용한단다.
우리 같으면 그 용도를 혼동할 것도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단지 여기도 좀 젊은 층이나 배운 층 중에서는 숟가락과 포크로 식사를 하기도 하는 말하자면 절충식이 있기는 하다.
그런 사람들과 옆에서 같이 식사를 하려면 껄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주먹밥이나 김밥이 그런 ‘손으로 먹기’의 연장선이고 우리 어릴 적에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손으로도 먹기도 하고 보쌈이나 상추 쌈 싸먹기 같은 범주에 속하는 생활습관이란 생각이다.
오히려 오른 손 왼손을 안 가리는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는 미개한 측면도 있지 않을까?
특히 여기에 와서는 아침 빼고는 매번 닭고기가 나오는데 그거야말로 그들 식의 식사 습관이 ‘딱이다’.
그것을 포크로만 발라먹으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음식은 손으로 먹는 것이 사실 편리한 것이란 생각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수저나 포크를 사용하여 폼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편리성은 사라지고 격식만 남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을 인도와 같은 문화권인 이들은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옷도 그렇다. 한국에서 불상을 볼 때 늘 가졌던 의문이 양식화 되어있는 ‘유’자형의 그 옷 주름 무늬였다.
하지만 여기 와서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들의 전통적인 옷차림이 그랬다. 전통적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날이나 장소에서나 입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일상적인 옷일 뿐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렇다.
옷이 넓고 긴 천 중심으로 되어 있다보니 그냥 치렁치렁하고 그것을 한 손에 말아 올리면 딱 그 부처의 옷차림처럼 소매가 만들어지고 앞으로는 그 유자형의 주름이 생긴다.
그러니 이들은 그 옛날 부처가 살던 때의 옷차림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경우 머리에 걸치는 모습은 그 때와 또한 장소에 따라 변화가 있었을 지 모르지만 이 기본적인 ‘폼’은 변화가 있었더라도 아주 적은 한계 안의 일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이런 복장의 흐름은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니 걸친 정도의 크기의 차이는 있으나 이집트의 벽화에서도 감지되는 바이니 참으로 그 옷 입는 방식의 뿌리 깊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이런 문화양식이 우리 눈에는 원시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 생활양식 자체가 하나의 문화 유산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실 방글라데시는 외부 인이 주로 영입된 영토라서 그런지 소규모의 원시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거국적인 힘의 발현이나 문화적 표현이 불가능해서 이었던지 특별히 내세울 문화적 유산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무형의 언뜻 보면 눈에 잘 들어 나지 않는 개인적으로 향유되고 있는 이 문화 양식의 유구함이야말로 진정한 또 다른 가치가 아닐까 싶다.
단지 그것이 희소성의 가치기준으로만 보면 나약한 것이다 보니 사람들이 등한시 할 뿐이라서 아쉽지만 말이다.
그런 잡념과 아울러 아침 백보드를 치려고 밖에 나서니 안개가 자욱하다.
방글라데시에 와서 먼지를 보고 안개인 것처럼 착각을 한 적이 두어 번 있었지만 이번만은 안개인 것이 확실하다.
마침 백보드가 있는 코트를 선수들이 연습을 하고 있기에 나는 아침 운동을 포기하고 잽싸게 카메라를 챙겨 다시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몇 번 누르니 어디를 가나 그 풍경이 그 풍경이다. 그렇다고 릭샤를 타고 별다른 경치를 찾아서 어디를 간 들 여기는 산이 없어서 그 안개의 멋이 산의 중첩 미에 있다면 매 한가지 일 뿐이다.
그래 할 수 없이 어제 밤 나의 잠을 깨운 사자가 있는 모텔 앞의 동물원을 들어갔다.
거기는 그래도 여기의 대표적인 수종인 야자수를 비롯한 각종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작은 호수며 내가 있어서 그런 대로 사진 감으로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안개들이 만들어 낸 나름의 원근감은 특별히 보잘 것 없는 동물원이지만 그런 대로 운치를 자아낸다.
하지만 여기는 어디나 평지다 보니 먼 거리의 조망이 안 되는 통에 역시 사진의 깊이감은 적을 수밖에 없다 높낮이의 변화감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
어디를 가나 사방이 평지이기만 하다는 것이 도대체가 산악지대인 우리 나라에 비하면 도통
이해가 잘 안 된다.
아마 우리 나라가 이런 곳이라면 골프장 설치 업자들은 신날 법한 일이다.
오늘은 늦은 아침을 먹고 선수들이 모두 경기에서 진 관계로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밀린 빨래나 하던가 글이나 쓰던가 책이나 볼 수밖에 없다.
기왕에 선수들을 인솔하고 왔으니 마지막 남은 다카에서의 경기나 잘 했으면 좋겠다.
방글라데시9-방글라데시를 떠나면서
방글라데시는 역시 먼지와 거지와 낚은 건물과 낚은 차가 많은 나라이다.
또한 평지가 많은 나라이고 릭샤나 오토바이 릭샤가 많은 나라이고 교통이 혼잡하고 무질서한 나라다.
한 마디로 최빈국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 나라다.
어느 면으로는 아마 우리나라 60년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도시는 특히 건기라서 더 그런 것인지 먼지와 매연으로 가득 차서 모르긴 해도 병원은 호흡기 환자로 차고 넘칠 것 같다. 아니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일 테니 평균수명을 엄청 단축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다니지 않으면 곤란할 만큼 고약한 정도지만 안전장치를 한 사람이라고는 코만 걸친 마스크를 착용한 교통경찰이 가끔씩 보이는 것이 전부다.
한 3-40년은 묵었을 것 같은 버스나 트럭이 지날 때면 어릴 적에 검은 연기가 나는 트럭 뒤를 애들과 신나서 쫓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피부가 검은 것이 마치 매연으로 도배가 되어서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날라 다니는 먼지도 온통 공간을 메우고 있지만 가라앉아 있는 먼지도 사방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다.
그것은 바다 속에 물이 없는 곳이 없는 이치와 같다.
내가 처음에 일본이나 독일에 갔을 때 도대체 먼지들은 다 어디에 갔나하고 신기해 하던 것과는 정반대여서 그런 곳에 없던 먼지들이 다 여기로 날라 온 것 같다.
길거리나 나뭇잎 위나 창문 틈이나 어디를 봐도 먼지와 인간은 하나다. 절대로 분리 될 수 없는 한 식구다.
바위가 부서지다 부서지다 더 이상 부서질 수 없는 최소한의 입자로 고스란치 남아 있다가 인간들의 움직임에 의해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온 천지에 날리면서 마음껏 그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런 갈망을 수십 억 년을 참고 참아 오던 중 풍화작용에 의해 부서져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용히 가라앉아서 있다가 인간들에 의해 그 억눌리고 억눌렸던 애초의 한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고나 할까?
먼지는 이들의 일상이고 생활이고 아무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의 세계 바로 그 첨단에 서 있는 것이다.
공기가 인간에 꼭 필요한 것이듯이 여기서는 먼지도 인간에 꼭 필요한 그 어떤 요소인 것처럼 착각이 될 정도다.
이 나라도 분명 어딘가는 먼지가 없는 곳이 있기는 할 테지만 하필 나는 먼지가 있는 곳만을 다녀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먼지만큼은 아니지만 거지도 많다.
아니 어쩌면 ‘거지같은’ 마음들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남한테 구걸하는 것이 특별히 내 자존심을 깎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자존을 더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초등학교 때 지나가던 미군 차에 손을 흔들어 깡통 한 개를 던져 받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여기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다.
어른과 애들 구별 없이 ‘난타적’이고, 구걸하다 안 주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다.
건네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대부분 없다.
더 받아야 되는 데 덜 받아 주는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마치 ‘구걸 노동행위’나 ‘요구 노동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게눈 감추듯이 할뿐이다.
이런 모습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이들의 역사나 민족성을 모르니 더더욱 짐작하기가 힘들다.
단순히 오랜 가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간단 할 것도 같다.
그렇다면 여기와 비슷한 다른 나라들도 그래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니 ‘한비아’한테 한번 물어봐야 할 노릇이다.
도시 빈민 한 가족의 생활비가 10000원에서 15000원 정도라 하니 빈민의 정도를 짐작을 할 수 있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나 그 직후의 보릿고개나 피죽으로 연명하던 그런 죽을 만큼의 가난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란 것이다.
여기는 평지와 물이 많은 지대이고 일 년 내내 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라서 최소한의 주식인 쌀만은 쉽게 확보할 수가 있는 곳이기에 춘궁기 같은 개념은 없고 굶어 죽을 만큼의 정도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하기는 도시화 속의 한 현상으로서 간단히 진단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그런 일상화된 ‘구걸의식의 무감각화’는 잘 납득이 안가는 측면이 있다.
수도와 비교적 큰 도시인 ‘라샤이’만을 스쳐 지나온 내가 느낀 것이 장님 코끼리 넓적다리 만지기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에서 만난 멀쩡하게 생기고 영어도 어느 정도 구사 할 줄 아는 처녀가 말 중에 돈을 요구할 때는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고 잔돈은 웬만하면 없다면서 어물쩍 넘어갈려는 택시기사가 대부분이라 던지 작건 크건 부탁은 무조건 수고비가 챙겨져야 하고 아니면 자기 식만의 계산을 적용한다던지 하는 행위들과 그런 일들을 아주 당연시하는 모습들은 도저히 납득이 잘 안 갔다.
특히 나는 ‘팁 문화’에 젖어 있지 않은 경우라서 그런 것이 더 강조 되 보이는지 모르겠다.
양보를 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을 하려고 해도 잘 납득이 안 간다.
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공짜정신 내지는 거지 근성이 있다고들 한다.
모르긴 해도 그것은 역시 오랜 역사적인 궁핍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낚은 건물은 가난과 어쩔 수 없는 한 통속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판잣집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잘 사는 미국도 ‘할렘가‘가 있으니 사람 사는 곳이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는 집이란 집은 대부분 낚았다.
마치 집이란 집은 일단 지어놓고 낚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사는 것 같다.
생명이 드나드는 공간은 낚았어도 나름의 흔적과 질서가 있게 마련일 텐데 여기는 그게 아니고 사람이 예전에는 살았지만 지금은 안 살 것 같은 그런 집에 사람들이 들락이며 산다.
창문에 삐죽이 널려있는 빨래만이 그 집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란 것은 가르쳐 줄 뿐이다. 마치 외부를 향한 삶의 꿈을 포기한 백기인양 걸려 있다.
간간히 보이는 여자가 입고 있는 화려한 옷 색깔만이 살아 있고 나머지, 그 옷이 덥고 있는 살과 옷을 덮고 있는 집과 또 집을 덮고 있는 공기 그 모두는 죽어 있는 것 같다.
오늘 들른 ‘피자헛’ 막 오픈 한 듯한 커다란 백화점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겉으로만 본 도시대부분의 분위기는 그랬다.
심지어 길도 대부분 그 갈라진 틈으로 헐떡이며 가쁜 숨을 내 딛는 듯 하고 택시 기사의 가래도 계속 끓기만 했다.
이 도시는 모든 것이 살아있어도 죽어 가고 있는 것이 확연하다.
심지어 건설하고 있는 현장도 새로 짓고 있는 건지 헐고 있는 것인지 언뜻 보면 잘 구별이 안 간다.
우리도 다 죽어 가고는 있지만 죽어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한테 일부러 죽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하지는 않지 않는가?
내일 죽더라도 폼은 메기고 죽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 일반적인 생각인데 그들은 그냥 도시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죽도록’ 열심히 일만 하는 것 같다.
새 건물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새 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새 차를 파는 곳이 없이 중고차만 매매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거리의 차는 대부분이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폐차되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의 정비공장이나 ‘카센터’는 모두 부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낚은 차들을 끌고 다니려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장에 들려야 할 테니 그렇다.
하지만 공장이나 카센터가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 모두가 ‘자동차 독학 정비사’인가보다.
그렇게 낚은 차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멀쩡하게 싣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하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밀고 끌고 다니는 차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이처럼 차들이 장수하는 비결을 알 수가 없다.
물이 많은 곳이고 그 물이 좋아서 그런가보다.
방글라데시에 가면 죽어도 현지 물은 먹지 말라고 말한 어떤 이의 말을 생각하면 그것도 의심이 가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차 살기에는 좋은 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난 너무도 터무니없고 어리석게 산이라고는 제주도처럼 후지산 하나만 오뚝하고 나머지는 다 평지거니 했다.
중세인도 아니고 토굴생활만 한 원시인도 아닌데 왜 그런 한심한 생각을 했나 모르겠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 와서 내가 간 곳으로는 산은 고사하고 도대체 언덕이나 고개 비슷한 것도 만난 적이 없다.
여기서는 수평자는 별로 필요치 않을 것이다.
어디고 그냥 땅이 수평자다. 마치 사람들의 삶도 수평처럼 보인다.
부자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이가 드물고 화장실에서 휴지를 사용하는 이가 드물 듯이(문화습관의 차이이지만) 그렇게 여기는 땅처럼 평평하게 사는 모양이다.
평평한 길이 걷고 달리기에 힘이 덜 들기에 이들도 자신의 삶이 모두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지구 전체가 모두 평평하고 나는 그래도 그 평평함 위에 키만큼 높으니 바로 그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평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번식하게 된 자전거이면서 뒤에 바퀴가 둘 달린 ‘릭샤’로 말하면 이건 또한 이들의 신발 그 자체고 삶 자체고 호흡자체다.
이들은 이것과 함께 아침을 열고 이들과 같이 가쁜 숨을 쉬면서 일하다 밤을 닫는다.
이들에게 릭샤가 없다면 그건 죽음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신발이 없이 사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이것 없이 살기가 아마 불가능 할 거다.
그걸 모는 이도 그렇지만 그걸 타고 다니는 이들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타고 다니는 것이 괴로운 측면이 있다.
그 자전거 운전수치고 건장한 사람이 없다.
아니 여기 사람치고 건장한 사람이 드물다. 오죽하면 죽어 가는 사람들 같이 느꼈겠는가?
릭샤 운전수 중에는 때로 어린애도 늙은이도 있게 마련이어서 그 들쭉이는 어깨를 쳐다보기가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기름 힘으로만 가는 탈것을 타고 다니던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만 가는 탈것을 타면 다 그럴 것이다. 하루 종일 일 년 열두 달을 그처럼 오로지 두발로 버텨서 삶을 지탱하는 그들에게 편하게만 앉아 있는 내가 죄인처럼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
그런 내면을 감추려는 듯이 릭샤는 엄청나게 촌스러움 치장의 극치를 달린다.
꼭 우리 옛날 영화선전 포스터 같은 것들을 그 좁은 뒷면 공간에 덕지덕지 붙이고 남은 공간도 원색으로 이리 저리 치장도 하고 반짝이도 달아서 그런 미안한 마음 가진 이들을 위로하고 그 알록달록함이나 사진 속의 싸구려 미소가 그들의 삶의 그늘을 반사광으로 비춘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허구에 찬 영광의 하소연일 뿐 낡을 대로 낡은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찌든 도시를 일견 핏줄처럼 움직이지만 그것은 매연과 먼지로 막히기 일보직전의 흐름이다.
‘오토바이 릭샤’에 오면 그래도 그 조그만 엔진이나 머플러처럼 타는 이나 모는 이나 작은 행복이다.
자동차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때로는 막힌 공간을 요리조리 ‘기름챙이’처럼 미끄러져 자동차보다 빠르니 기쁘고 그 문짝 없이 터진 공간으로 그 도시와 하나가 되면서 또 그 하나가 싫어 벗어나려고 내빼니 기쁨일 수도 있다.
모는 이도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니고 버는 것이니 기쁠 것이고 타는 이도 마음이 넉넉해지니 기쁘다.
무엇보다도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게 만만해서 기쁘고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서 여유가 있다.
교통의 혼잡과 무질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달리는 것은 모든 종류가 다 사람을 싣고 다니는 것으로 층을 이루어 존재한다.
둘이 기본이지만 셋까지 타기도 하는 릭샤, 다음으로 ‘툭툭이’하고 부르는(우리들만의 애칭인지도 모르지만) ‘오토바이 릭샤’, 티코 같은 소형차 크기의 택시, 일반 승용차 크기의 노란 택시, 열 명 남짓이 타는 사각형의 버스인지 택시인지 전혀 잘 모르겠는 엔진 부분이 트럭처럼 튀어나온 조그만 차(엔진 부분까지 그냥 사각형의 바보스런 모양과 크기도 큰 것 작은 것이 있다), 마을버스만 한 버스, 일반버스, 큰 버스, 마지막으로 이층버스 이렇게 줄줄이 형제가 열 댓 명인 옛날 우리 동네 어느 집처럼 일목요연한 층으로 섞여서 길을 싸다니는 통에 복잡한 것은 당연하고 거기서 어떤 질서를 찾는 다는 것은 박 모 씨가 살아나도 힘들고 전 모 씨가 죽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다가 사람들도 다른 탈것처럼 다리를 바퀴인양 착각을 하고 거리를 누비는 통에 질서란 단어 자체가 이 나라엔 없는 듯하다.
가끔씩 소들도 그 무리에 합세를 하는 통에 다른 나라에서는 안전을 위해서도 질서가 꼭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무질서를 위해 질서가 꼭 필요하고 사람은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깡통이나 무슨 쇠통처럼 착각될 정도로 차 사이를 마구 굴러다니는 통에 병원 응급실은 미어터질 것 같은데 잘은 몰라도 아마 가난이라는 병원의 응급실만 붐비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여기는 아직 과거가 숨 쉬는 나라다.
과거라는 옷을 아직도 입고서 과거라는 공기를 비록 그것이 먼지일망정 머리에 이고서 같이 숨 쉬고 있는 나라다.
그 자체가 벌써 하나의 골동품이 되어 회소가치가 인정되는 그런 나라다.
하지만 여기도 올라가는 건물의 높이로 그런 유산을 날려 버릴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지구상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언젠가 전설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늦게 까지 이곳이 기억에 남아서 인간이 사는데 밖의 변화나 발전보다 안의 잔잔함이나 고요함이나 정지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첫댓글 한꺼번에 읽으면 과식이 될것같아 하나씩 찬찬히 꺼내서 읽으려 합니다. 대리충족의 기쁨으로......
아~ 테니스실력이 보통이 아니신가 봅니다. 우리나라 꿈나무들의 인솔자도 되시고, 인도소녀의 연습파트너도 되어주시고요.방글라데시의 낙후한 모습들과 종교의식등에 이질감도 느끼며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여행가면 꼭 아쉬워하는 물건 중에 하나..님처럼 귀마개를 꼭 구입해야겠어요.긴 글에 감탄과 감사를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