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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7일 하나님만 나의 버팀목이 되자 창세기22장1-2절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아이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쁜 소식은 ‘옆집 아이도 학교에서 상장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황당한 소식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격려하려고 전체학생에게 상장을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어머니와 사별한 선배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때 산격동에서 목회하시는 선배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어떤 남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가 수십 명이라고 자랑하고, 어떤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가 수 십 명이라고 떠벌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의지할 버팀목이 많은 것을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돈, 학벌, 권력이 있으면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세상을 지배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우물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세상살이가 두려워서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버팀목으로 의지했습니다. 남자들은 여인을 보호해주는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렸습니다. 다시 다른 남자를 버팀목으로 의지했습니다. 버팀목으로 의지 했던 남자가 여섯 명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리석은 생각으로 나쁜 선택을 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욕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은 대낮에 물 길러 나왔습니다. 누구나 물에 빠지면 다급해져 지푸라기라고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붙잡았던 지푸라기는 물에서 건져주지 못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만 버팀목으로 생각하고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믿음이 성숙한 학생은 생활이 단순하게 학교와 집과 교회밖에 모릅니다. 공부를 할 때는 성령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고, 힘든 일이 생길 때 기도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용돈이라도 생기면 하나님께 먼저 헌금합니다. 어떤 일보다 먼저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생활이 재미없는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는 온몸을 불살라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붙잡고 있는 버팀목이 많은 사람은 교회 있으면 집 생각을 하고, 집에 있으면 교회 색각을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릴 때 손에서 오지도 않는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주일만 되면 ‘어디서 오라는 곳이 없나?’ 두리번거립니다. 시간이 나고 돈만 생기면 자신을 만족시켜줄 것을 찾아서 펑펑 써댑니다. 하지만 헌금은 천 원 하는 것도 바들바들 떱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은 대강하고, 자신은 이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 불평하고, 핑계를 댑니다.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때는 두 발, 저녁에는 세 개로 다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입니다. 건강하면 어떤 것에도 의지 하지 않고 두 다리로 다닙니다. 묘목을 심은 뒤 뿌리가 땅에 내리지 않아서 버팀목을 여러 개 세웁니다. 뿌리가 땅에 깊이 박히면 버팀목을 치워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만을 버팀목으로 하고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버팀목으로 할 때 땅에서 충만하고 영생을 누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란 버팀목을 치워버리고, 불안하여 수많은 버팀목을 붙듭니다. 어떤 일에서든 성공한 사람은 단순하게 삽니다. 그런데 실패한 사람은 복잡하여 굿을 하고, 정신없습니다. 현대사회에는 의지하는 버팀목이 너무 많아 과잉행동장애자가 늘어갑니다. 하나님같이 여기는 대상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나 중심적인 생각을 할 때부터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본능적으로 하나님 아닌 것을 버팀목으로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만났습니다. 38년 동안 사람들을 의지하여 병을 고쳐보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했습니다. 38년 동안 운이 없어서 실패했다는 자기연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버팀목으로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버팀목으로 믿고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집착했던 이스마엘을 이삭을 괴롭힌다고 하갈과 함께 들로 내쫓아버렸습니다. 아쉬웠지만 가정은 평안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어 부족이 평화로웠습니다. 또한 가축을 많이 키워서 돈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경제, 정치, 가정이 평화롭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버팀목으로 여길 것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황금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서 7장1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라 보아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지요. 부유하고, 건강하고, 권력과 명성을 누릴 때 하나님의 은총 위에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시험을 하셨습니까?
2절에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만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던 이스마엘을 포기한 뒤 쓸쓸하여 이삭을 통해 낙을 누렸습니다. 이삭을 통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게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뜻입니다. 이삭을 버팀목으로 여겨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아브라함의 행복을 빼앗고, 이삭을 죽이려고 하셨을까요? 아브라함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37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땅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하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C.S루이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귀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지금보다 더 잘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감해지거나 하나님 대신 가장 귀한 사람을 사랑할 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게 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삭을 하나님께 맡길 때 약속한 대로 복 받는 존귀한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원하는 자식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다. 내가 하나님만큼 자식을 잘 알고, 사랑으로 키울 수 있습니까? 지나친 집착으로 자식을 귀찮게 만들고, 욕심으로 압력을 불어넣어 만사가 귀찮게 만듭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식을 버팀목으로 여기고 과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어떤 교회의 권사님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 석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둘째도 군 문제를 해결한 뒤 박사과정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큰 아들은 사람을 좋아해서 돈만 생기면 술을 사주고 교회로 데리고 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큰 아들이 세례교육을 받고 거듭났습니다. 권사님은 큰 아들이 세례를 받고, 정신 차린 것이 기뻐서 그 교회 목사님한테 선물을 사주고, 아들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주변에서 큰 아들에게 좋은 조건의 아가씨를 소개할 때 권사님은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은 아직 세상에 물든 오염된 것을 빼내려면 멀었어요.”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공부를 잘하고, 큐티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들을 마음에 들지 않아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너밖에 몰라서 아직 멀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다.” 권사님은 아들에게 하나님만 버팀목으로 삼게 하니, 자신의 일도 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크게 쓰시려고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본토 친척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변사람들이 버팀목으로 의지했던 학연, 지연, 혈연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미래의 희망으로 붙들고 있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십니다. 한 번 더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일을 예비하고 기대가 컸습니다.
독수리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품고 절벽으로 가서 밑으로 사정없이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죽지 않고 살려고 버둥거리다가 낭떠러지에 닿을 정도가 되면 독수리는 새끼를 잽싸게 낚아챕니다. 독수리는 사랑하는 새끼를 스스로 날 수 있도록 냉혹한 훈련을 시킵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복을 주기 위해 냉혹한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과 세상의 것을 버팀목으로 여기고 있다가 약속하신 복을 놓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을 심청전과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심청전은 효를 강조하려고 딸의 목숨을 빼앗는 나쁜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목숨을 빼앗는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대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신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세상의 여러 복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만 버팀목으로 여기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무슨 일을 시키든 제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씀만 하세요.’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 시키라는 멋진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만 버팀목을 의지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고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버팀목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니오.’라고 거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처럼 여겼던 하찮은 버팀목을 하나씩 치웁시다. 그리고 하나님만 버팀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는 동서교회 교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말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