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무대
사람들이 모두 퇴장한 골목은
텅 빈 무대 같았다
길이 꺾어지는 곳마다 오렌지색 조명만 남아 있었다
분장을 지우고 머리를 풀고
오늘 입었던 의상을 벗고 느슨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을까
헐렁해진 지갑과 소품들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으며
대본과 다르게 튀어나왔던 말을 떠올리며
뉘우침에 머리를 파묻으며
무슨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을까
순정호프 목포세꼬시 생생노래타운 아리랑한정식
이런 세트들을 그냥 세워둔 채
연출도 극장장도 스탭들도 보이지 않는다
무대 감독은 내일 또 얼마나 소리를 지를까
나도 오늘은 여러 번 대사를 틀리게 던졌다
객석에선 눈치 채지 못했지만
순간순간 서늘한 어떤 것이 주르르 흘러내리곤 했다
이제 한물간 배우라고 말할까봐 두려웠다
배역을 맡았던 이들이 모두 퇴장한 거리를
오래된 세트와 긴 그림자가 지키고 있다
잠든 서울
한밤중에 깨어 잠든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산골에 물러나 살다가
누구를 심사하는 일에 연루되어 한 달 가까이
주최 측에서 마련한 고층 숙소에서 자다가
잠이 도시를 깊이 재운 밤에 깨어 내다보니
조각달 혼자 높고 고적한 곳으로 올라가
서울의 이면을 지켜주고 있었다
덩치만 컸지 잠든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서울이라고 어찌 쓸쓸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 포엠포엠 > 2012년가을호
* 도종환 약력
청주 출생
시집으로『접시꽃 당신』,『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등이 있음,
정지용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