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린트 Lovis Corinth (1858-1925), [눈먼 삼손] Samson Blinded, 1912
독일 분리파의 창시자요,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코린트는 삼손이 원수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다. 힘을 잃고 장님이 된 삼손은 어두운 감옥에서 맷돌을 가는 수모를 당하는 동안 그의 머리카락이 자란 것을 느낀다. 다시 옛 힘을 되찾은 삼손은 블레셋 人들이 축제 날, 신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을 흔들어 건물을 파괴하고 적들과 함께 최후를 맞는다. 지금 이 장면은 超人적인 힘이 되살아난 삼손이 온 몸을 비틀어 무쇠같은 두 팔로 기둥을 밀어내는 긴박한 순간을 표현했다. 복수의 화신이 된 그의 얼굴에서 소름끼칠 만큼 강한 분노와 울분이 뿜어져 나온다. 사랑을 저버린 여인에 대한 증오가 그를 저토록 미쳐 날뛰게 만든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出애굽(Exodus)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다가 모세(Moses)의 후계자인 여호수아(Joshua)의 지휘를 받으며 가나안(Canaan) 땅을 정복한다. 땅을 정복한 다음에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토지분배였다.
성막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레위 支派(Levites)를 제외하고 12지파에 땅을 골고루 나눠주는 과정이 여호수아書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書는 그야말로 토지분배 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은 강력한 리더십을 잃어버렸다. 그때 그때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모세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비하면 빈약한 편이었다. 이른바 리더십이 분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王이라는 강력한 통치체제가 세워지기 전의 시기를 사사(士師)시대라고 한다. 사사는 원래 中國 周나라 때 백성들을 재판하여 형벌을 주던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용어를 '쉐페트' 라고 하는 히브리語를 번역할 때 차용한 것이다. '쉐페트' 는 '심판', '선고'란 뜻으로 周나라의 사사가 그러했듯이 백성들을 재판하고 지도하는 일을 했다.
헬라語나 라틴語 번역에서는 재판관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사사라는 말 대신 '判官'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학자도 있다. 사사시대를 대략 BC 1390년에서 BC 1050년까지의 340년정도로 잡는다.
이 시대의 특징을 士師記(Judges) 맨 마지막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王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말하자면 사람들이 한 사람의 리더십 아래 모이지 않고 각기 자기 주관대로 살았다는 뜻이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Samuel)까지 모두 15여명의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사들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활동상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사사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인물은 삼손(Samson)이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작은 태양' 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큰 태양은 되지 못하고 작은 태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안겨주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Pelishte)의 통치권에 들어가 안주해 있는 상황에서 삼손이 단독으로 블레셋에 대항해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블레셋은 팔레스타인 人(Palestine)을 우리나라 식으로 부른 말인데, 士師時代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갈등과 쟁투가 시작된 셈이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민족의식을 일깨웠으나 달리 자기 생활에 대해 절제가 부족한 흠이 있다. 무엇보다 블레셋 異邦여자인 데릴라(Delilah)에 빠져 한때 분별력을 잃기도 했다.
루벤스Rubens,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 1609년 作)
바로크의 大家 루벤스는 드라마의 무대를 애욕의 흔적이 흥건히 배인 데릴라의 침실로 옮겼다. 데릴라가 넋이 빠진 얼굴로 자신의 무릎에 파묻혀 단잠에 빠진 삼손을 내려다본다. 여인의 몸이 지옥으로 이끄는 지름길인 줄도 모르고 삼손은 잠결에도 사랑하는 여인의 아랫배를 더듬는다. 방금 전까지 쾌락을 나눴던 잠든 연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데릴라의 미묘한 표정에는 연민이 드러나 있고, 그녀의 어루만지는 손길은 삼손의 어깨에 닿아 있다. 이런 데릴라의 감상과 미련을 밀쳐내듯 블레셋 人이 잠든 삼손의 머리카락에 서둘러 가위를 밀어 넣는다. 늙은 여인은 희한한 구경거리를 행여 놓칠세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춧불을 밝힌다. 노파는 돈을 탐하는 악의 화신이요, 창녀를 갈취하는 색주가의 여주인을 상징한다. 이 안타까운 광경을 차마 눈뜨고 보기가 괴로웠던가? 비너스 조각상은 비통한 표정이 역력하고 큐피트도 입을 막은 채 어머니의 다리에 안타까이 매달린다. 방문 밖에는 삼손을 잡아갈 병사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영웅의 파멸을 재촉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한 줄기 촛불이 앞가슴을 풀어 헤친 데릴라의 터질듯한 유방을 황홀하게 비춘다. 이 비단결 같은 육체에 홀려 삼손은 맹목적인 사랑에 빠졌으리라. 루벤스는 17세기 최고의 화가답게 빛과 어둠을 이용해 사랑과 배신, 성욕과 죽음, 죄와 벌이라는 영원한 테마를 걸작으로 승화시켰다.
처음에 삼손이 딤나(Timnah) 지역의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은 이유는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블레셋 사회로 들어가 그들 속에 섞여 살면서 복수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일부러 블레셋 여자를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손의 속마음을 모르는 그의 부모는 할례(割禮, circumcision)를 받지 않은 이방족속의 딸과 결혼한다 하여 삼손을 나무랐다.
그러나 결혼을 강행한 삼손은 딤나 지역의 처갓집으로 가서 수수께끼 놀이를 통해 블레셋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했다. 그 수수께끼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것이 나왔는데,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는 것이었다. 7일 만에 알아맞히지 못하면 블레셋 사람 30명이 삼손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어야만 했다. 반대로 그들이 알아맞히면 삼손이 그들에게 그만큼의 옷을 주기로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7일이 지나도 그 수수께끼를 알아맞히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가 된 여자를 협박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오도록 했다. 만약 알아오지 못하면 그 여자와 아비의 집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과 잠자리를 하면서 가련하게 우는 척하며 '당신은 나를 미워하기만 하고 사랑하지는 않는군요.' 라고 말했다. 여자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 삼손은 아내를 달래며 '내가 당신을 미워하다니요. 그랬다면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당신과 결혼했겠소?' 라고 말하자, 딤나의 여인은 '나를 사랑한다면 왜 나에게 수수께끼 답을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나한테만 살짝 알려주세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할게요. 궁금해 죽겠단 말이에요.' 라고 삼손을 유혹한다.
삼손은 아양까지 떠는 아내에게 그만 답을 말해주고 말았다. 아마도 삼손은 이때 술을 마셨을 것이고 자기가 블레셋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잠시 잊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와 몸을 섞으면서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말이오, 당신과 결혼하려고 딤나로 오는 도중에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새끼를 만났지 뭐요. 그 사자가 나한테 덤벼들기에 내가 그 입을 찢어 죽여버렸지요. 그리고 얼마 후에 부모님 집으로 가는 길에 그 포도원을 다시 들러보니 사자의 시체에 벌떼가 모여 있고 꿀이 가득 고여 있더란 말이오. 그래서 그 꿀을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 집에 도착하여 가져온 꿀을 부모님에게 드렸단 말이오'.라고 삼손이 말하자 딤나의 여인은 '그러니까 동물을 잡아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것이 나왔군요.' 라고 응수한다.
결국 그녀는 동족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 답을 알려주었고, 삼손은 그들에게 약속한 옷들을 주어야만 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이용해 答을 알아낸 사실을 눈치챈 삼손은 화가 나서 아내를 버려두고 혼자 부모의 집이 있는 소라(Zora) 지역으로 가버렸다. 여자의 부모는 삼손의 그런 행동을 서운하게 생각하여 자기 딸을 다른 남자의 아내로 주었다.
얼마 후에 화가 풀린 삼손이 염소새끼를 안고 딤나로 와 아내를 찾았다. 그런데 아내의 침실로 들어서려는 삼손을 丈人이 가로막으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했다. 삼손을 달래기 위해 다른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분쟁이 생기고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블레셋 군대가 유다(Judah)지역에 진을 치고 쳐들어올 기세를 보이자 유다 사람들은 전쟁의 화근인 삼손을 결박해 블레셋 군대에 넘김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삼손은 자기를 묶은 밧줄을 삼줄 끊듯이 풀어버리고, 唐나귀(ass)의 턱뼈를 주워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쳐죽인다.
아내를 내놓으라고 장인과 옥신각신한 일이 도화선이 되어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게 되었으니 원래 삼손이 마음먹었던 대로 된 셈이다. 그런데 삼손은 딤나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범하게 된다. 소렉(Sorek, 의미는 '포도 골짜기')으로 내려갔을 때 삼손은 데릴라라는 여자를 보고 반해버렸다. 딤나 여자와 결혼할 때는 블레셋을 친다는 전략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데릴라에게 반하여 욕정이 앞섰음이 틀림없다.
삼손이 데릴라에 빠져 지낸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 사람들이 데릴라를 통해 삼손이 가지고 있는 힘의 비결을 알아내려고 했다. 블레셋族 추장들이 은(銀) 1,100세겔(shekel)로 그녀를 꾀었고, 그녀는 삼손을 애무하며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어떻게 해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물었다. 딤나에서 이미 실수한 경험이 있는 삼손은 이번에는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았다.
세 차례나 엉뚱한 답을 하여 데릴라를 골탕 먹이자 데릴라도 딤나 여자처럼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않으면서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합니까. 당신이 나를 세 번이나 희롱하고서도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는군요.' 라고 쏘아댄다.
아마도 데릴라는 자기를 안으려는 삼손을 거부하며 눈물까지 흘렸을 것이다. 또다시 마음이 약해진 삼손은 데릴라에게 힘의 비결이 머리카락에 있음을 알려주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삼손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침실에서 여자에게 잘못 속삭이다가 패가망신한 남자들이 많다. 평소에는 强하다가도 침실에서는 여자에게 약해져서 분별력을 잃고 마는 심리를 '삼손 콤플렉스'(samson complex) 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만테냐Mantegna 의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500
이 극적인 사랑과 배신의 드라마는 예술가들의 창작욕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그중에서도 주제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알려진 르네상스의 巨匠 만테냐(Mantegna, Andrea, 1431-1506)의 '삼손과 데릴라'. 데릴라는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진 삼손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고 있다. 두 연인 곁에는 우람한 고목이 우뚝 서 있고 그 나무 둥치를 포도 덩쿨이 휘감는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포도 줄기와 탐스런 포도송이는 술의 위험을 상징한다. 삼손이 정신없이 잠에 취한 것도 여인의 농간에 빠져 과도하게 술을 마신 탓이다. 절단된 고목의 가지는 삼손의 거세를 암시한다. 정신 분석학에서 머리카락은 남성의 생식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넘쳐흐르는 물은 무절제한 정욕의 분출을 의미한다. 고목 밑둥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사악한 여자는 악마보다 세 배나 더 나쁘다' 는 뜻이다. 그림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초래한 삼손의 비극을 사실적이고 교훈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댓글 천천히 읽어보면
그림의 이해와 재미가
느껴질듯합니다
종교로나 스토리 적으로도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