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그는 생사가 판가름 난 노량해전에서 굳이 살려고 했으면 살 수도 있었다. 당시 왜군들은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철군 명령을 받고 도망가는 중이었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함대가 500척이 넘는 왜선을 대파하여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게 한 이 대첩에서 함께 참전했던 명군 제독 진린은 죽지 않았다.
전장에서 장수가 살아남아 끝까지 병사를 지휘해야 함을 몰랐을 공이 아니다. 후방에서 지휘하지 않고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맹렬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순국했다. 사학계에서는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1598년 11월 19일(양 12월 16일) 새벽―. 공의 죽음과 함께 지긋지긋한 7년 전쟁도 끝이 났다. 임진왜란을 막아내기 위해 태어났다가 나라를 구하고 홀연히 떠나 버린 신장(神將)이랄 수밖에 없다.
후세의 ‘영웅 대접’에 높이 뜬 충무공 같지만 그의 가계와 고난에 찬 인생 역정을 알고 나면 ‘죽어야 할 때’를 간파한 속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은 누구보다도 출세가 늦었다. 32세 무과 급제 이후 47세에 비로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됐다. 그것도 죽마고우인 서애 유성룡(1542∼1607·영의정)의 천거에 의해서다. 그는 출생부터가 조정의 옹호나 혜택은 기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조부(백록)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처형당한 후 부친(정)은 벼슬길조차 막혔다. 기묘사화는 중중 14년(1519) 조광조 등 지치(至治)주의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들이 훈구파 세력에 밀려 참화를 당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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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산(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을 주봉으로 용사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 순국한 지 108년 만에야 사당을 건립하는 등 빛나는 전공에 비해 국가적 예우가 늦었다. |
가세가 기울고 생계가 막막해지자 부친은 현재의 현충사(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00) 자리에 있는 처가에 와 살게 된다. 이래서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출생한 공의 고향이 아산으로 되는 것이다. 4형제 중 셋째다. 부친은 자식들 이름을 신(臣)자 항렬에 중국 삼황오제 중 복희, 요, 순, 우 임금을 시대 순으로 머리글자만 따 희(羲), 요(堯), 순(舜), 우(禹)로 지었다.
당시 조정 권력은 서인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서애와 함께 동인 계열이었던 공은 눈엣가시였다. 국가 운명이 걸린 위급한 전쟁 상황인데도 정파 명분이 우선이었고, 전시사령관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을 무자비하게 가했다. 두 번씩이나 무등병으로 강등당하고 삭탈관직도 여러 번 겪었다. 여기에다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어서 육군도원수 권율 장군, 경상도통제사 원균과의 충돌도 잦았다. 선조대왕이 내린 어명도 현지 전황과 맞지 않고 부당하다 하여 거역했다가 처형 직전 겨우 구명되고 백의종군도 몇 차례 했다.
전시에도 이러할진대 종전 후의 모함과 뒤집어씌우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이 살아남아 논공행상에 끼어들었다면 오늘날 그의 역사적 평가는 어떤 모습으로 둔갑되었을지도 모른다. 공이 순국한 지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에야 사당을 세우고 현충사(顯忠祠)라 사액을 내린 정국 판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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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내린 묘역 안의 어제신도비. |
이번에도 거봉 김혁규(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이 동행하여 해박한 역사 지식과 함께 수구(水口) 보는 법을 제자들에게 풀어 놓는다. 묘역에 올 때마다 공의 우국충정에 빚진 마음이라고 한다. 민족의 성웅으로 받들고 있는 그의 묘소(사적 제112호)는 풍수학적으로 어떤 자리일까.
“계입수(癸入首)에 계좌정향을 놓았어요. 서쪽으로 15도 기운 정남향에 가까운데 파구까지 정파(丁破)입니다. 좌향과 똑같은 방향으로 직사되어 물이 빠지는 것입니다. 복음이니 좋다 할 수야 없지요.”
복음(伏吟)이라는 용어가 생소하여 물었다.
“용맥이 북쪽에서 내려왔는데 좌향도 북쪽에서 남쪽(자좌오향)을 향하도록 놓는 것입니다. 입수와 좌향이 겹쳐 신음한다는 뜻으로 피해야 합니다. 혈이 돌아버릴 수밖에 없지요. 직손으로 계대 잇기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거봉을 따라 봉분을 뒤로하고 한참을 올라가니 주산으로 내려오는 어라산의 용세는 우렁차나 묘 위에서 결인하지 않고 과협으로 도주해 버린다. 혈처를 응결하기 위해 뭉치는 만두(巒頭)가 분명치 않고 용맥이 혈처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경사진 사지맥(斜地脈)이다. 역시 산은 위에서 내려다봐야 하는 법이다. 거봉이 가리키는 좌청룡 우백호를 바라보니 양 어깨 부분이 푹 꺼져 있다.
묘를 쓰면서 누구나 꺼리는 산세다. 청룡은 아들과 벼슬을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재물에 해당됨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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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경내에 있는 충무공의 옛집. 집 안에는 위패를 모신 가묘(家廟)가 있으며 양택지로 손색없는 좋은 자리다. |
충무공 묘의 우백호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덕수이씨 문중을 빛낸 인물들의 묘가 수십 기 자리하고 있다. 누가 봐도 살아 꿈틀대는 생룡 자락이다. 거봉이 결인목을 찾아 내더니 “바로 이 자리”라며 멈춰 선다. 위쪽에선 일견양수(一見兩水·물의 들어오는 곳과 나가는 곳이 한자리에서 보이는 것)여서 아무 말이 없더니 과연 양쪽의 물길이 관쇄(關鎖)되어 보이지 않는다. 정조대왕이 내린 어제신도비와 거북등에 얹혀진 비석을 뒤로하고 9㎞쯤 떨어진 현충사(사적 제155호)로 향하면서 “사실은 그곳이 명당 터”라며 상세히 살펴보잔다.
역사를 살다간 한 인물의 유적지치고 현충사보다 더 광활한 면적이 있을까 싶다. 국민관광지로 각광받는 온양읍과 가까운 거리여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경내에는 꼼꼼히 살펴봐야 할 곳이 여럿 있다. 집 뒤편에는 공의 가묘(家廟)에 위패를 모셔놓고 기일인 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영정이 봉안된 현충사에 올라서니 온양시내 건너편의 조산이 병풍처럼 옹위하고 있어 탄복이 절로 나온다. 역시 자좌오향으로 따사롭기 그지없다. 일제 탄압으로 퇴락하였던 현충사가 1932년 국민성금으로 사당을 중건하여 제 모습을 찾았다가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현충사는 개벽에 가까운 성역화 작업(1966년)이 이루어진다. 서울 광화문네거리에 공의 동상이 건립되고 통영의 충렬사와 여수의 충민사도 새롭게 단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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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입구의 소나무 길. 공의 충절처럼 사시사철 푸르다. |
거봉은 “이곳 방화산의 정기를 받고 자라 충무공 같은 큰 인물이 나왔을 것”이라며 좋은 자리임을 강조한다. 앞의 물길도 무지개처럼 포물선으로 감싸고 있어 흠 잡을 데 없는 양택지다. 덕수이씨 문중에서 율곡 이이(1536∼1584)는 문관으로 우뚝 섰고, 충무공 이순신은 무관으로 가문을 빛내 쌍벽을 이룬다. 충무공이 나이는 아래였으나 19촌 아저씨 항렬이었다.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수없는 외침과 국난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 특히 임진년 전쟁은 왜군들의 노략질과 짐승만도 못한 만행으로 치를 떨게 한 환란이었다. 그 자들은 배가 고프면 약탈이요 성욕이 불끈하면 겁탈이었다. 역사에 가정법이란 부질없는 탄식만 가져올 뿐이지만 만약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없어 제해권을 빼앗겼다면 삼천리 이 강토가 어찌되었을까 싶다. 또한 공이 천수를 누리면서 거북선을 만든 지혜로 해군력을 증강했더라면 당시 동아시아 세력 판도가 재편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도 앞선다.
“바닷가에 가을빛은 저물어 가는데(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떴구나(驚寒雁陣高)/ 나랏일 걱정스러워 잠 못 이루는 밤(憂心轉輾夜)/ 싸늘한 새벽 달빛은 칼과 활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충무공은 무예에만 걸출한 게 아니라 이토록 시서에도 능했다.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전쟁 중에도 난중일기(국보 제76호)를 작성하여 500여년 전 그때 일이 ‘어제 일’만 같이 느껴진다. 그가 쓰던 장검(보물 제326호) 두 자루에는 다음과 같은 친필이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한 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칼 하나의 길이는 197.5㎝이고 무게는 5.485㎏이다.
아산시에서는 공의 탄생일인 4월 28일 전후 5일간 ‘성웅 이순신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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