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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중종 가계도
성종- 정현왕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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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던 세력이 모두 없어진 만큼 그가 못할 일을 없었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는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으며, 언론의 주축이 되던 사간원을 없애버렸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을 폐지시켰다.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배격하던 그는 조선 학문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을 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를 없애고 그곳에 장악원을 개칭하여 만든 연방원을 두고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하였다.
게다가 전국에 채청채홍사를 보내어 전국의 미녀들을 선발(이를 운평이라한다)하고 그 중에서 뽑힌 기녀들을 흥청이라 하여 궁중에 불러들여 연회를 거들게 하였다. 또한 사냥을 즐기기 위해 도성을 기준으로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기도 했다.
왕의 학정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한글 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는데, 연산군은 백성이 언문을 이용하여 왕을 욕되게 한다면서 훈민정음 사용을 금지하고, [언문구결]등 한글 관계 서적을 불태웠다.
연산군의 행동이 이렇듯 광적인 양상을 띠면서 민생과 국정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ㅇ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삭직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사실 이 거사가 있기 전에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성대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신수근을 거사에 가담시켜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박원종이 신수근을 만난 것은 그를 끌어들일 의향보다는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만약 신수근이 거사에 호응한다면 무혈 입궐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수근이 협조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원종은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냐고 돌려서 물었다. 머리회전이 빨랐던 신수근이 그 물음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신수근은 이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 된다'고 못박았다. 박원종은 신수근의 이 말을 듣고 거사 이전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희안, 박원종 등의 중심이 된 이 반정거사는 예상보다 쉽게 성공리에 끝났고, 이로써 12년 동안의 연산군과 궁증 세력의 독재 정치는 종식되었다. 학정은 끝나고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는 곧 조선의 정치 형태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했다.
2. 중종의 개혁 정책 실패와 정국의 혼란
(1488~1544, 재위 기간 1506년 9월 ~ 1544년 11월, 38년 2개월)
박원종 일파의 연산군 폐위 사건으로 중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 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 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였던 조광조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숙청시키고 만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그를 옹위하자 조선 제11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연산군의 폐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 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 세가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중종의 이 같은 정책은 왕도 정치를 앞세워 훈신과 척신들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최기에는 거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왕의 입지가 미약한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게다가 공신들 대부분이 기득권을 누리려는 훈신 세력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사림 성향의 왕도 정치 추구는 항상 그들의 저지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중종 즉위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 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한편에서는 반정 이후 지속된 개혁적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었다.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대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을 위주로 형성되었다. 당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는 무오사화로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10년 사미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인물로서 당시 급진 개혁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때부터 도학적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층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 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 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至治)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증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을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 중반기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각종 옥사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에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 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 정책에서도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성종, 연산군 대에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왜구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세력권을 넓혀 나가더니 기어코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한편 북방에서는 야인들의 내침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512년 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첫댓글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갖고도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