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림
용문석굴
연운에서 서안까지(4)용문석굴, 백림,관림(8.20)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모닝콜 덕분에 시간에 늦지 않게 일어났다. 빵 종류와 주스 한잔으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체크아웃을 하고 8시쯤에 호텔을 출발해서 용문석굴(龍門石窟)을 관광하기 위해서 출발했다. 낙양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약1시간 거리였는데 주차장에 내이자 비가 굵어져 우산을 사야만 했다.
우산을 파는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8원을 말하다가 10원을 주니 2원을 거슬러주지 않아 거스름돈을 요구했으나 금방 내 우산 가격이 10원으로 올랐다는 말을 하여 실소를 자아냈다.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우리들은 용문석굴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용문석굴은 이하(伊河)의 양안 절벽에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크고 작은 굴을 파고 거기에 부처님등을 조각한 곳으로 유목민인 선비족의 일족인 북위가 산서성의 대동(중국3대석굴 중에 하나인 운강석굴이 있음)에서 494년 이곳 낙양으로 천도 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대동의 운강석굴이후의 작품에 해당되며 북위에서부터 수, 당에 걸처 약 40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부처의 머리부분이 대부분 훼손이 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석굴암의 부처님이 정교하게 조각되고 우아한 멋이 있다면 용문석굴은 수 많은 석굴이 떼 지어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특히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한때 당태종 이세민의 비이자 고종의 후궁이었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 황제로서 10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측천무후(중국에서는 무측천이라 부름)를 나타냈다는 봉선사(奉先寺)가 규모면에서나 조각의 아름다움 등 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석굴의 입구에 이하(伊河)를 연결하는 아치형 다리가 설치되어 주위 석굴들과 조화가 잘되고 있어서 더 많은 즐거움을 선사래 주었다. 바위산의 각 부분에 각각의 석굴을 파고 그 곳에 부처를 조각했는데 아파트처럼 연결되어있어 신비로움을 더해 주었다.
백림으로 가기 위해서 건너편으로 갔을 때 석굴 전체가 눈에 들어왔고 그 모습이 굉장하다는 생각을 하도록 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 유산의 하나인 용문석굴을 보면서 깊은 문화적인 감동이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사진 촬영을 한 후에 우리들은 백림으로 향했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백림 즉 백거이의 묘(白居易墓)로 향했는데 용문석굴 티킷으로 그 곳도 관람할 수 있었다. 향산, 용문교 왼쪽 산기슭에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 중 한 명인 백거이의 묘가 있다. 백거이의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향산에 은거하면서 수많은 명시를 남겼다고 한다. 대표적인 풍유시인이자 민중시인인 백거이는 하층민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의 불공평을 노래한 내용의 시가 주를 이룬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장한가'가 있다고 한다.
그 곳을 관람하고 주차장으로 갈 때 다시 전동차를 이용했다. 다시 버스에 오른 우리들은 관림으로 향했다. 관림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의형제 관우장군의 머리가 묻힌 곳이다.
관림에는 붉은 얼굴에 검은 수염을 휘날리는 관우상이 있었다. 바로 그 앞에는 관우가 휘두르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세워 놓았다. 관우상은 3m 가까이 되고 청룡언월도는 무게가 80근이나 된다고 하니 그 칼을 보는 순간 관우가 말을 타고 달리며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삼국지 소설 속의 모습이 떠올랐다.
관림은 마치 작은 언덕처럼 생겨 있으며 주위의 나무가 무성하여 언뜻 보면 작은 숲처럼 보인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관우를 시대의 영웅과 도덕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관우를 신으로 숭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219년 겨울 오나라 손권의 부하 장수 여몽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손권은 위나라 조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낸다. 하지만 조조는 관우를 의사라 하여 극진히 장사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 곳을 관람한 후에 용천각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거의 비슷한 메뉴인지라 몸에 거의 적응이 되는 것 같았지만 아직은 김치가 많이 먹고싶어진다. 식사를 한 후에 음식점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에 들렸다. 사과, 복숭아, 포도 등의 과일을 팔고 있는 그들의 얼굴엔 순박하고 밝은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식사를 한 후에 서안으로 가기 위해서 낙양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중국인 가이드의 작별 인사가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것은 늘 아쉬운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중국 노래인 '철밀밀'을 불러 우리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한글을 배울 정도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누군가 만만디를 말하자 중국의 젊은이들은 그 단어를 싫어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인간적으로 따스함을 가진 그와의 며칠 동안의 여행을 마치며 그는 나에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물론 다시 만날 일이 있을 지 모르지만 다시 낙양에 가면 틀림없이 그를 만날 것이다.
낙양역에서 잠시 기다리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소수 민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보습이 보였다. 여름인데 늦가을이나 겨울에 입는 옷을 입은 것을 보면서 지난겨울 천안문 광장에서 만났던 사진을 찍는데 옷을 빌려주고 돈을 버는 소수 민족이 생각이 났다. 역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외국인 전용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기차가 역에 들어왔고 우리들은 기차에 탔다. 기차는 서안행으로 우리들은 4호실 2층이었고 1번부터 18번까지 우리들의 자리였다.
나는 가방을 선반 위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탄다는 설렘으로 자리를 잡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좌석은 4명이 마주 앉도록 배치를 했고 작은 테이블이 창가 중간에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쟁반 하나가 놓여있었다. 열차는 천천히 플랫홈을 빠져나갔고 우리들의 긴 기차여행의 막이 올랐다. 자리가 안정되자 일행 중 누군가 가방에서 소주를 꺼냈고 준비한 안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맥주를 마셨다.
기차가 낙양역을 벗어나 십 분 정도 지나자 물건을 파는 역무원들이 오고 갔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물건도 팔고 청소까지 했다. 그들이 주로 파는 것은 과일,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맥주, 우유, 커피와 실크 제품도 팔았다. 나중에 일행중 한 명이 실크 머플러에 관심을 가져 가격 흥정을 시작했는데 그들이 부른 가격의 반에 물건을 살수 있었다.
우리들이 탑승한 열차에는 스페인 사람들도 단체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도 교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열차 안에서의 풍경인데 한국의 여행객들은 고스톱을 치거나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스페인 사람들은 독서를 하거나 몇 명이 둘러앉아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만 우리 한국사람들도 놀이 문화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 창문을 통해서 산악지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굴집을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사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그들은 개간을 해서 옥수수 등 농작물을 심어 재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힘겨워 하는 것 같았다. 전기의 힘으로 달리는 기차는 힘겨워서 가끔 멈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해바라기를 재배하는 밭, 언덕 위의 염소와 양들, 그리고 묘비 등을 볼 수 있었고 가끔 기차가 설 때마다 기차에서 내려 역구내에서 서성대기도 했다. 낙양에서 서안까지는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우리들이 기차에서 내리자 깃발을 든 예쁜(?) 조선족 여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서 밖에 나갔을 때 해가 지고 있었고 우리들은 가방을 들고 오 분은 걸어서 버스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그녀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조선족이고 이름은 김금연이며 연변에서 와서 동생과 함께 서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들은 배가 고파하자 그녀는 우리를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버스 안에서 그녀는 서안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서안은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며 고대중국의 200년 도읍지로 진시황, 당현종과 양귀비 등 3000년 역사가 숨쉬는 고도이고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릉 과 진시황의 사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8000구의 병마용이 있으며, 당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 대안탑(大雁塔) 등 고대중국의 향수 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이고
황하 중류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비교적 경제적 으로 낙후된 섬서성의 중부에 위치해 있고 인구가 약 2백만 명 정도 되며, 한국인들에게는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해져 있다고 한다.
편안한 것은 그 식당에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농담까지 건네는 모습에 웃고 말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중국 그림을 팔러온 사람들이 그림을 보여 주었으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그 곳에서 권하는 매실 열매 말린 것을 사는 사람은 몇 명이 있었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식당 주인은 음식에 향신료를 넣지 않았다고 하며 나중에 향신료로 쓰이는 야채를 가져다 주어서 조금 떼어서 입안에 넣었는데 금방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들은 Diamond International Hotel에 짐을 풀었는데 그 호텔은 지난 4월에 문을 열었다고 했다. 호텔은 정말로 모든 면에서 나무랄 곳이 없었다. 하루 동안에 여행한 곳을 메모한 후에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