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동경 언저리만 돈 여행이지만 어쨌든 제일 많이 간 외국이 일본이다.
그것도 매번 전시와 관련이 돼서 간 곳이니 일본과의 인연이라면 역시 그림이 이지저리 끄나풀이 되어 주었다 하겠다.
일본이란 나라는 참으로 나에게는 묘한 느낌을 주는 나라다.
역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곳이지만 만나는 개개인이나 그 삶의 모습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고, 경외감 까지 자아내는 그런 모습의 이중적 모순으로 나를 늘 헛갈리게 하는 그런 나라다.
확실한 것은 아직 여러 면에서 우리는 아직 후진의 때를 못 벗었지만 그들은 확실히 선진국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로 하여금 늘 갈등으로 떠오르는 나라 일본을 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번에도 명목은 전시지만 사실은 일본의 오랜 역사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오랜 바람의 실현을 위한 여행이었다.
나와 친구는 인천공항에서 12시 30분에 떠나 생전 처음 가는 도시 히로시마에 도착을 했다.
히로시마하면 원자폭탄이 생각나고 폐허로 변한 도시 사진이 생각나는 그런 곳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자존심이 단 한방에 다 날라 가 버린 역사적 ‘제로 지대’인 것이다.
일본의 패망은 일본의 끝없는 야욕의 끝을 말하는 것이고 그 끝이 바로 이 도시에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의 시작은 히로시마지만 나는 그곳에는 별 볼일이 없는 관계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전시가 이루어 질 ‘이와꾸니’란 곳으로 향하려고 차편을 알아보니 막 버스가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 택시를 타려고 기사한테 물어 보니 그 곳에 가려면 굳이 비싼 택시를 탈 필요가 없이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가 있으니 그것을 타란다.
어느 나라 같으면 버스 손님도 끄집어내려 자기 택시에 태울 판인데 여기서는 자기 손님도 굳이 버스를 타라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좀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하는데 이번에는 버스 기사가 친절하게 일일이 버스 티켓까지 뽑아주고 짐까지 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로 말하면 마을버스나 일반 버스 같은 것인데도 서비스는 우등고속이상이었다.
이상하게도 일본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누구 한 텐가 나를 만나면 무조건 친절하게 대해주라는 밀령을 받은 사람들처럼 구는데 나는 늘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꾸니는 공항에서 히로시마 시내를 지나서 가야하는 도시이다 보니 의외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버스를 내려 비록 가까운 거리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우리는 화랑까지 가기위해 택시를 탔다. 그 시골 택시기사도 역시 친절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길을 이리 저리 확인해가며 갔지만 약간 길을 돌게 되었는데 자기 잘 못으로 그리 되었으니 그 부분은 제하고 택시비를 달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보편타당한 일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내가 뭔가 잘못이 있는 것이리라.
선생봉급의 거의 배를 받는 그들의 월급과 우리나라 기사의 월급을 생각하면 단순비교는 위험한 일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우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결과만 보면 일본에서의 내 몸이나 마음은 편하고 고향 같기만 하다.
이 먼 역사적인 원수의 나라 이국에서 그런 느낌을 느낀다는 것이 나는 이해가 안 갈 때가 많다.
화랑에 도착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지고 온 그림을 거니 그럭저럭 ‘오프닝’에 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다.
적당히 손님들과 담소를 즐기고 거기 현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그 기자가 인터뷰 끝에 이곳의 명물인 ‘긴따이’교를 꼭 보고 가란다.
사실 아래층의 전시장에는 그 곳을 주제로 그림도 몇 점 있을 정도였으니 유명하긴 한 다리인가 보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흔한 그 ‘에프터’란 것이 없는 모양인지 좀 있으니 택시가 오고 그 것을 타고 숙소로 가란다. 뭐든지 경제적인 나라이다 보니 우리나라 같으면 전시 후에 꼭 하는 행사 같은 후식도 생략이다.
땅땅하고 키가 자그마한 이 택시기사도 역시 친절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다리를 보려면 자기가 기다려 줄 테니 보고 가던지 아니면 직접 숙소로 가던지 맘대로 하란다.
우리는 요금도 걱정이 돼서 그냥 숙소로 갔더니 짐을 직접 내려 주면서 요금은 이미 지불이 되었단다.
조용한 길들을 지나 산 입구에 서있는 간판도 잘 안 보여 억지로 찾아야 보일 똥 말똥한 숙소 이와꾸니 유스호스텔에 그렇게 도착을 하고 짐을 풀었다.
카운터에서 일보는 이가 주인인 모양인데 어이없게도 자그마한 할머니다.
우리는 대충 짐을 부려놓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집들도 간간히 있고 신사도 있지만 주변은 사뭇 조용하기만 해서 적막감이 감도는 그런 곳이었다. 대체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를 않았다. 신사인 곳 같은 곳을 기웃거려 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한 적한 길을 걸어 내려오다 우리는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말을 거니 말도 잘 받아주고 역시 친절하기도 하고 마침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여인이라서인지 그 곳 안내를 자처한다.
우리가 내려 온 길을 안내해 다시 올라가 옆길로 살짝 빠지니 그곳에는 놀랍게도 완벽한 상태의 멋진 고려시대 무인상이 두 개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언제 어떤 경로로 이 무거운 돌들이 먼 이국 땅 이 시골 조그만 공원 구석에 와 있는 것일까? (나중에 안 일로 우리나라 초대 통독의 고향이 이와꾸니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옆길로 가니 한국 파주에서 가지고 왔다는 8각 정자가 거짓말처럼 조그만 인공연못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조그만 시골구석에 한 개도 아니고 작지도 않은 우리 문화재가 이처럼 처연히 장식품으로 놓여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니 일본 전역에는 얼마나 많은 한국 문화재가 산재해 있을 것이며 집속에 ‘짱박혀’ 있을 조그만 것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10만점의 청자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외국으로 나갔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어서 우리는 긴따이 교를 보러 가기로 하고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그 곳은 예전에는 번주가 살던 곳으로 이런 저런 유적지가 있었고 작은 도시에도 불구하고 미술관도 있었지만 시간관계상 못 들리고 다리로 가니 그 다리는 전에 일본의 ‘우끼요에’에서 자주 봤던 나무로 된 무지개다리 바로 그것이었다.
삼백년 묵었다는 이 다리는 나무로 여러 개의 무지개를 이루며 이루어진 것도 특이했지만 그 기단 부분이 특히 특이했다.
그 밑 부분은 교각 주변은 물론이고 물속 비교적 넓은 부분까지를 온통 커다란 돌로 바닥을 샅샅이 메운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일본인들의 철두철미한 장인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구조였다.
그리고 슬슬 날이 어두워지면서 무슨 배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가마우찌’ 새를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구가우’ 라는 것으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무형문화재 정도 되는 것인 모양으로 아주 유명한 것인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비행기 타고 오면서 우리 친구가 티브이에서 ‘가마우찌’ 새를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장면이 나왔는데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재미있더라고 하더니 그 곳이 바로 이곳인 모양이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별난 우연도 다 있다 싶었다.
그러잖아도 오면서 어느 집에 매달려 있는 특이한 철 구조물을 보았는데 그게 커다란 쇠 ‘망탱이’ 같은 것이어서 뭐에 쓰는 물건인가 했더니 그것이 바로 이 고기잡이배에 내 거는 물건이었다. 밤에 그 곳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뱃전에 내걸면 고기들이 불을 보고 몰려들고 어부들은 열 손가락의 끝에 새들이 달려 있는 끈을 쥐고는 그 놈들이 자맥질을 해서 잡아오는 물고기를 토하게 하는 이곳만의 독특한 고기잡이 방식인 것이다.
실제로 그런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의 문화재와 이국의 문화재와 무형 문화재가 참으로 묘하게 혼재해 있는 아름다우면서 특이하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드는 그런 도시였다.
다리를 건너서 조그만 게시판을 보니 누가 붙였는지 그 속에 내 이번 전시 그림엽서가 붙어 있었다.
그들의 꼼꼼함이 내 보이는 일단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안내하던 여인이 마침 낮에 그 엽서를 보았는데 그 주인공을 이처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데 할머니가 내오는 저녁 요리는 그야말로 음식이전에 예술이었다.
일본식으로 각 접시에 아주 조금씩 내오는 반찬은 할머니가 직접 산에서 채취해서 몇 년에 걸쳐 만든 매실주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무공해 음식들이 주종인데 그 색깔들이 갖가지이고 종류도 다양해서 정말로 정성 그 자체란 생각이 들고 젓가락을 대기가 민망했다.
보통 일본 밥상의 반찬 수는 적은 법인데 여기서는 예외였다. 아쉬운 것은 전체적으로 음식이 달착지근해서 ‘짭자름’하고 매운 맛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약간 불만이었지만 나중에 후식으로 나온 할머니가 직접 산에서 채취해서 담근 매실주를 한잔 주는 데는 정말 감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이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는다면 그 누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직도 가지 않고 우리와 즐거운 이야기와 시간을 준 그 여인과 그 친구의 담소를 남겨두고 나는 방에 올라가 샤워를 한 후에 귀를 틀어막고 잠을 청하니 이국의 첫날밤은 아무런 미련 없이 자연의 소리 속에 묻혀서 깊어만 갔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숙소 옆에 난 시멘트 산길을 타고 올라가며 산책을 했다.
산책길은 시골답게 한적하기만 해서 가끔씩 사람이 보일 뿐이었고 인공 길은 이끼가 끼고 묵은 때와 공기는 그 모든 것을 감싸서 이미 자연 그 자체였다. 아무리 훌륭한 자연도 인간의 발길과 숨결이 지나치면 텁텁한 맛으로 변하기 마련이지만 여기는 적당히 묻은 인간의 때가 오히려 자연스러움에 보탬이 된 것만 같다.
그처럼 그 곳은 조용하고 아늑하고 선선하고 눅눅하지만 상쾌하고 거닐기에 최적이었다.
암국(이와꾸니)산 정상에는 이와꾸니성 ‘천수각’이 버티고 서 있었다.
어제 밤에 다리위에서 올려다 볼 때 조명 때문에 하늘위에 떠 있는 것만 같이 보이던 성이 바로 이곳이다. 자세히 보니 근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원래 터는 그 옆이었는데 그 곳을 잘 보존하기위해 그 옆에 새로 지은 모양이다. 그 곳에 올라가 작은 도시를 내려다보니 신 이와꾸니와 구 이와꾸니의 구별이 어제의 긴다이교가 서있는 강을 사이에 두고 확연하다.
가보지 못한 부다페스트의 조망이 이 같지 않을까?
숙소가 있던 강 이쪽은 그 옛날 번주가 있던 성내이고 강 저쪽은 일반인이 살다 신도시가 형성된 곳인 모양이다. 이쪽은 나무들이 많고 집도 드문드문 이지만 강 저쪽은 빽빽하게 집들이 들어선 모습이 인간세상과 피안의 세계 같다고 할 정도로 그 분위기가 달랐고 조그만 강이지만 희뿌연 한 아침 안개 속에 그 두 도시 공간을 가르는 뱀 꼬리 같은 강의 모습도 아주 이색적이었다.
천수각 내부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 져 있으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지어진 일종의 요새로서 잘 짜인 모습이었다. 그 옛날 이런 구조 속에서 일본 사무라이들이 전쟁을 치렀을 모습이 눈에 삼삼 어리는 듯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사무라이 칼을 위시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긴다이교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일이 낱개를 구멍 뚫어 끈으로 묶은 지붕의 기와들의 배치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위에 누군가 실수로 떨어트리고 간 핸드폰 배터리가 갑자기 울린 핸드폰 소리처럼 여러 가지 나의 잔잔한 상념들을 다 몰아냈다.
이어서 하산을 하니 전화가 왔었다 하여 통화를 하니 화랑으로 나오란다.
조식 후 화랑에 나가려고 어쩌나 하고 갸우뚱할 즈음 할머니가 손수 데려다 준단다.
77살 노인이 모는 차를 탄다는 것이 좀 걱정이 안 되는 바는 아니었으나 웬걸 소형차지만 편안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운전 경력은 내 나이와 거의 비슷했다.
차를 몬다기보다는 그냥 차와 함께 자동으로 미끄러져간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화랑에 들려 잠시 업무를 보고나니 이번에는 역까지 우리를 데려다 준단다.
왜 이처럼 만나는 일본인마다 나한테 이처럼 감탄만을 주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나한테 무슨 빚이라도 있단 말인가? 참으로 기이하고 놀랍기만 한 일이다.
일본인 사기꾼 좀 한번 만나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역에서 우리는 일본 삼대 비경 중의 하나라는 ‘미야지마’로 가기위한 기차를 탔다.
오면서 어제 우리를 안내했던 그 여인이 학교 수업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안내를 부탁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친구가 되뇌였지만 세상일이 우리 생각처럼 호락호락하기만 하랴!
한 참을 시외를 달려 미야지마역에서 내려 우리는 다시 섬에 가는 배를 갈아타야 했다. 배는 한 숨을 “꼴깍!”하고 쉴만한 시간에 섬에 도착했다.
짐을 끌고 도착한 섬에서 우리를 반기는 것은 느릿느릿 거닐다가 다가 와서 시비를 거는 동물들이었는데 그것은 개도 아니고 고양이나 원숭이가 아닌 예쁘기만 한 꽃사슴들이었다.
그 놈들은 관광객을 뜯어먹고 사는 모양인지 그 품위에 어울리지 않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이곳저곳을 좀 들르다 주린 배를 달랠 겸해서 어는 식당에 들려 맛있는 볶음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다음에 들른 곳이 해변에 오뚝한 ‘오오도리’(커다란 ‘오도리’라 해서 오오도리라고 부른다 함)였다.
아니 해변이라기보다는 원래는 바다 속인데 지금은 물이 빠진 때라 해변처럼 보인 것이다.
그 놈의 오오도리는 정말이지 컸다. 높이가 16미터나 되고 기둥의 두께가 서너 아름이 넘으니 그렇다.
모르긴 해도 그 원형이 우리나라의 솟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그것들은 보통 일본의 신사 앞에 우리나라 일주문처럼 서 있다.
특이한 것은 주황색으로 칠해진 점이다. 아마는 귀신을 쫒는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 대 오도리는 일본 도처에 산재해 있는 신사에 있는 것인데 여기 것은 좀 특이한 것이 그 크기도 크기지만 물이 들어오면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세웠다는데 있다.
그 특이함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모양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커다란 기둥은 자연목 그대로 세워져서 그 모양이 우리나라 절간의 기둥들처럼 자연스런 모습 그 자체로 세워졌다.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인지 어는 부분은 여러 조각으로 기워지고 땜질이 된 부분도 있는데 그 사이로 동전들이 박혀있고 그 밑바닥으로는 그냥 떨어진 동전들도 많이 있었다.
이에 우리 친구는 그것을 열심히 주워서 나중에 그 것으로 물을 사 먹었다.
일본 여행 중에 물 한 모금도 신경 써서 먹어야 할 정도로 빈약한 주머니 사정을 볼 때 그것도 고마운 일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그 친구가 배탈이 나버렸는데 아무래도 일본 잡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남은 동전을 다 버려버렸다.
그런 기둥의 웅장함은 전에 바티칸에 가서 봤던 커다란 돌기둥의 느낌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돌도 같은 자연소재건만 그 갈고 닦은 모습에서 왠지 거부감을 느꼈다면 지금의 이 오도리 나무 기둥은 다듬어 지지 않은 자연스런 곡선미가 웅장함과 보태져서 그 태연한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것이 물 가운데 오뚝하게 서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특별한 느낌의 그 무엇이었다.
마치 그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거인의 모습 같아서 인간의 잡스런 바램들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그저 바람소리나 귀 기울이며 오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어서 그 앞에 역시 물이 들어오면 물 위의 집이 되는 ‘엄도 사원’에 갔다.
물위에 있는 사원이라서인지 태풍에 피해를 입은 건물을 수리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 나라가 버린, 긴 주랑위에 있는 시주자들 명단이 쓰여 있는 나무판을 새로 써서 걸어 놓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어느 절이나 사원을 가던 이런 시주자 명단의 도열 판이나 도열 석을 볼 수가 있다.
잡신이든 명신이든 그런 판때기나 돌 판이나 기왓장이 있어야만 일일이 기억을 하여서 복을 빌어 주는 모양이니 신들 치고는 효험은 신통한지 모르나 기억력은 영 ‘파이’인가 보다.
아니면 돈 낸 사람들 자신이 자신에게 거는 일종의 ‘최면판’이거나 ‘체면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복신앙의 근원은 깊고 넓고 영원한 것인가 보다.
이어서 그 섬 주변의 대성원이며 우리나라 탐의 명칭과 같은 다보탑 등을 둘러보다 우리는 해협도 볼 겸해서 그 섬의 정상인 ‘미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은 역시 깊고 울창하고 나무들은 여기 어디의 나무를 베서 저 밑의 ‘오오도리’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크고 굵었으며 여기 저기 정리한 통나무들이 뒹굴고 새소리 등이 너무도 오랜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고 지고 있어서 아름답고 정겹고 포근하며 ‘고향스러’웠다. 그 때 묻지 않음이 어제 들렸던 이와꾸니 산에서 느꼈던 느낌과 비슷했다. 특히 거의 산 정상까지 끊임없이 따라오는 계곡물소리는 신기할 정도였다.
정상에 오르니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반겼다.
아마 여기저기 사슴 똥이 지천인 것을 보면 사슴도 산 정상의 묘미를 알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어서 오랜 세월을 지내느라 허름하기 짝이 없는 정상의 관망대에 오르니 사방으로 오로지 그 유명하다는 ‘세토나이 까이’의 자잘한 섬들과 물 뿐이다.
그 옛날 여기 해협을 통해 조선의 사신들이 뱃길로 오간 길이리라.
사방으로 점점이 이어지는 섬들의 모습이 눈알이 굴러 갈 수 있는 그 마지막 끝까지 펼쳐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사방의 그 조그마한 섬들에 이름들이 새겨진 알루미늄 판이 놓여 있었으나 지금 서 있는 이 섬의 이름도 처음인 나로서는 단 한곳이라도 이름을 아는 곳이 있을 리가 없는 고로 자욱한 공기의 마지막까지를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 마시고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오사카 행 버스가 있는 히로시마까지 다시 가야 하는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오르던 길과 다른 길을 택했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그 울창함과 적적함이 어우러져 그저 감탄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산을 거의 내려와서는 ‘단풍의 계곡’이란 곳을 지나는데 그 푸른 단풍잎들을 눈을 감고 모두 단풍 색으로 물들여 상상을 하니 그 아름답기가 한량없었다. 내 생애 언제 다시 그것도 가을철을 택해 여기에 다시 있겠는가?
단풍은 그저 상상으로나 만족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에 도착하니 아직 심야버스 출발 시간으로는 이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늦었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버스 좌석이 없단다.
다시 길을 물어 사설버스터미널로 가니 거기도 마침 표가 한 장 밖에 없단다.
오늘이 금요일로서 주말인 것을 깜박했고 처음부터 사설터미널로 왔으면 혹시 두 장의 표는 건졌을지 모르나 길을 좀 헤매고 ‘제이알’에 먼저 들리는 바람에 우리는 난감한 처지가 되어 버렸고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심야버스를 타고 아침에 오사카 역에 도착해서 일본인 친구를 만나 교토지역 여행 안내를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냥 신간선을 타고 늦은 밤에 도착해서 숙소에 하루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얇은 주머니만 이중으로 더 얇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에도 없었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는 그 유명한 ‘신칸센’을 난생처음 타게 되었다.
버스로는 히로시마에서 오사카까지 7-8시간 걸리는 모양이나 신칸센으로는 겨우 한 시간 남짓.
비용은 한 배 반 정도인 구천사백사십 앵. 신칸센이 좋고 자시고 폼 잡고 생각할 짬도 없이 오사카에 도착해서 내리란다.
11시 반에 도착해서 겨우 막차 지하철을 타고 신오사카에서 ‘다이고쿠’로 가서 마지막으로 택시를 타고 ‘하나쪼노쪼’(화원의 마을이란 뜻)로 가서 한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겨우 도착하니 밤 12시가 훨씬 넘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이상한 이국적이랄까 뭔가 버무린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주인아주머니를 쫒아 들어 간 곳은 어느 아파트의 이층 집.
집안은 조그만 거실의 터진 공간을 방으로 개조한 듯한 조금은 협소하고 소음이 숨김없이 나다니는 그런 방이랄까 그냥 공간이랄까 하는 곳에 여장을 풀고 대충 닦고는 피곤한 잠을 귀마개와 함께 청하니 일본여행 이틀째의 오사카의 밤은 아주 깊고 깊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니 7월 9일 토요일이다.
우리는 준비해 온 컵라면과 봉지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교토로 가서 약속장소에 가기 전에 오사카 교토지역의 대중교통을 3일동안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인 ‘칸사이 스롯패스’를 어렵게 물어물어 사서 드디어 그것으로 약속장소인 오사카 역 중앙 홀에 갔는데 암만 기다려도 친구의 모습이 없다.
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인 친구가 자기가 말한 장소를 다른 곳으로 착각해서 한 시간 좀 더 기다렸지만 두 시간 먼저 온 그 친구는 무려 세 시간이나 우리를 기다렸단다.
그도 알고 보면 타지사람이니 여기서는 어찌 보면 촌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처럼 오사카 역은 복잡했다. 처음에 일본 갔을 때 일본은 후지 산만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에 바탕을 둔 내 생각으로는 당연히 일본은 동경만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사카도 엄청 큰 규모로 나 모르는 구석에 그처럼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교토의 밖은 질척거리는 비가 오사카처럼 여전했다.
근 20년 가까운 지기인 일본인 친구와 함께 우리 셋은 교토시내 관관에 나섰다.
우선 비가 질척이는 골목 사이를 택시로 요리조리 뚫고 도착한 곳은 무슨 도예가의 집이란 곳으로 일본에서는 유명한 도예가의 말하자면 생가라도 되는 곳인가 보다.
골목 속에 박혀있는 집 치고는 살던 모습대로 잘 정돈이 되어 있어서 일본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엿 볼 수가 있었다. 창가에서 새들어오는 불빛에 반사되는 마루나 고가구나 탁자들의 반짝임이 유별나게 인상적이고 문기어린 그런 공간이었다.
이어서 들린 곳은 식당.
그곳은 아주 조그만 규모의 말하자면 야채 뷔페식당 같은 곳으로 여기에서는 꽤 유명한 곳이란다.
사각형의 조그만 반찬 통에 여러 가지의 야채 반찬이 있어서 원하는 대로 가지고 가서 먹는 그런 재미난 곳인데 사실 통이 너무 작고 음식이 조금씩 밖에 없는 통에 우리나라처럼 많이 갔다 먹고 남길 수가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떨어지면 또 채워주고는 하지만 원래 적게 먹는 일본인들의 습성에 딱 맞는 뷔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 교토 전통양식이라는 음식은 깔끔하고 맛이 담백해서 먹기가 좋았다.
음식점을 나와 비를 맞으며 피하며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한국적 분위기가 완연한 ‘동사’란 절. 우선 입구의 연못에 떠 있는 연꽃들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작업실에 두고 온 연꽃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들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가꾸어 온 것들이라 그런지 그 느낌이 유별났다.
강당에는 만다라 상들이 있었는데 여기 불상들은 특이하게도 우리처럼 본존불이나 미륵불이나 비로나자불 등이 중요한 부분에 안치 된 것이 아니고 팔이 여럿인 불상이나 사천왕 상 등이 모셔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 불교 전래 경위가 우리와는 다른 모양이다.
그래도 건물의 외관은 한국적인 면이 많은 것을 보면 그 들의 불교미술 양식이 다소 ‘짬뽕’인 것 같다.
오층 목탑은 황룡사 9층탑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모습이다.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이 되어 있으련만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 갈 수도 없어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빗속에 한참을 서있게 하기에는 충분한 감동이었다. 언젠가 수리를 하였을 지도 모르지만 상륜부를 위시한 전체적인 모습이 너무도 완전한 모습이었다. 경주에는 웅장한 주춧돌만 애틋함을 전하지만 여기서는 그처럼 처연하게 서 있어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볼 뿐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서있다 다음 장소인 ‘삼십삼 간당’으로 갔다.
이름처럼 서른 세 칸이라나. 해서 우선 건물자체가 우리나라 종묘처럼 특이하게 긴 구조였다.
그 속에는 1001개의 실제 인물크기보다 좀 클 듯한 불상들이 대여섯 줄로 층층이 도열해 서있는 앞에 실제 인물크기 만한 정도의 스물여덟 개의 신상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너무도 특이하고 기이하기 까지 했다.
규모도 놀랍거니와 그 상 각자가 너무도 정교하고 사실적이고 인간적이어서 놀랍고 보존 상태의 완벽함이 놀랍고 천 년도 넘은 그 많은 작품들의 작가가 일일이 그 앞에 표기 되어 있다는 사실도 또한 놀라웠다.
그 모든 일 중에 한 가지도 대단한 것이거늘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이처럼 완벽함으로 내 눈앞에 서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이 일본인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문화의식 수준이고 그런 바탕을 잃지않고 일본이 오늘날 까지 온 것이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가지는 이 같은 문화에 대한 히스테리컬 할 만큼의 완벽함은 내가 가는 곳마다 처처에서 확인한 사항이니 그들의 문화의식의 뿌리에 새삼 재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징그러운 완벽성에 기가 질린 채로 우리는 빗속을 뚫고 일본인 친구의 지인인 ‘이케다 ’란 사람이 개인전을 하고 있는 ‘법련원’이란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곳은 아마도 절인 모양인데 주변의 수목이 울창한 곳으로 전혀 전시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곳에 위치한 공간이었다.
아마 절간의 한 구석을 전시장으로 개조한 듯 건물자체는 옛 기와집이건만 내부는 제대로 전시를 할 수 있게 벽면 처리를 한 그런 곳이었다.
그는 ‘물의 작가’라는 별명에 걸맞게 물에 관련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상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서랍장에 물을 담았다든지 전세게 일인당 물 소비량을 나열한 종이를 걸어 놨다든지 마치 환경운동가 같은 모습의 그런 전시였다. 어찌 보면 그런 외진 자연 환경 속에 파 묻혀 있는 전시장에 걸 맞는 그런 전시였다.
절간에서도 이런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인들의 현재의 문화의식 수준에 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우리는 ‘철학자의 길’이란 곳을 그 곳이 그런 유명한 길인지도 모르면서 잘 다듬어진 개울을 따라 벚나무 사이로 두 친구를 따라 쭉 올라갔다.
봄날에 그 나무들에서 꽃이 떨어져 개울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얼마나 장관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그런 길이었다.
길 좌우로 앉아 있는 집들의 모습도 다 제각각의 아름다운 감각으로 일부러 지은 것처럼 산뜻하면서도 적당히 고풍스러운 모습과 적당히 얼버무린 모습이 아름다웠다. 특히 ‘히노끼’라는 일본의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어떤 집에서는 그런 느낌의 절정을 맛볼 수 있었다.
따라서 아무 생각 없이 이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절말 철학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그런 길이었다.
그처럼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또는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봐 주는 이 볼 이 없이 앞에 친구들을 놓치며 다시 찾으며 어느 정도 걸어 올라가다 다시 도시 쪽인 듯한 곳으로 골목길을 타고 내려오다 일본 전통 ‘모찌’를 파는 간판이 조그만 집에 들렀다. 그곳은 가게처럼 생긴 곳이 아니고 일반 가정집 분위기였지만 간판이 걸려 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모찌 생각도 나서 들렀다.
그 집은 우선 입구에서 들어서면서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잘 가꾸어진 조그만 정원의 모습과 그 속에 있는 눈에 띨 듯 말 듯한 소품들과 현대 미술품의 감추어진 전시효과가 웬만한 감각이 아니다.
아니다 다를까 그 집 미닫이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니 조그만 마루가 있는데 그 전면으로는 두 폭 병풍이 펼쳐 있고 그 옆으로 우리나라 뒤주 비슷한 모양의 고가구가 있고 신발 벗는 곳 왼쪽으로는 현대 판화가 한 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뒤주는 티베트 제품이라는데 그 고풍스런 묵직한 맛이며 적당히 색이 어우러진 장식적인 효과가 묘하고 절묘하게 일치감을 자아내는 그런 고가구였다.
벽에 걸려 있는 판화는 현대판화로서 석판화로 보이는데 이집 주인의 작품이란다.
그런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구 두 폭 병풍의 그림이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에밀레종 비천상 탁본이었다. 오랜 세월을 감내하기에는 역부족의 두께였던 두 비천상의 얼굴은 뭉개져 그 형태만 어렴풋한 그 모습은 분명 슬프고 애틋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그 에밀레종의 비천상 분명 그것이었다.
에밀레종 탁본을 교토 구석의 한 민가에서 만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특별난 만남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그 집 주인인 듯 여인이 나오는데 나이는 우리 정도로 적당하게 안으로만 쌓은 의식의 무게로 안 밖을 치장하고 사는 여인의 풍미가 너무도 절절히 절어진 기운이 너무도 생생한 그런 모습의 여인이었다.
얼굴은 비교적 넓적하고 눈, 코, 입은 딱히 미인 형이랄 수는 없지만 나름의 미가 보일 듯 말 듯하고 옷은 흰색의 수수한 모습에 치렁치렁 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어찌 보면 괴기스럽게도 보일만하건만 일인으로는 다소 큰 키가 그런 느낌을 덮어씌우는 그런 흔하게 볼 수 없는 모습의 그런 여자였다.
약간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모습이지만 또 어찌 보면 병풍 속에서 술 따르다 나온 모습 같기도 하고 기이한 모습이었다.
거실 인 듯한 공간으로 들어서니 밖으로 잔돌이 깔리고 적당히 가꾼 들어 올 때 본 그 정원이 보이고 안으로는 약간은 휑하니 조금은 썰렁한 분위기지만 다다미 바닥과 조촐하게 놓여있는 자연미를 살린 나무 책장하며 구석에 놓여 있는 커다란 스피커와 벽장에 놓여 있는 진공관 앰프가 이색적이었으며 이집 주인의 문화적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 여주인과 더 문화적 깊이감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의 가정집에서 혼자 있는 여자와 외간 남자 셋이 마냥 얼쩡거리는 것도 볼 상 사나운 일이기도 하여서 원래의 목적인 모찌를 한통 사가지고 아쉬움으로 힐끔거리며 그 집을 나오면서 한입 깨문 모찌의 맛은 평생 입안에 남을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최상의 부드러움으로 씹히는 외피의 맛과 아주 적당한 당도의 맛을 가진 ‘앙꼬’의 그 맛과 좀 전의 입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절묘한 문화적 취향의 맛이 범벅이 되면서 입안의 맛을 더욱 고양시켰다.
적당히 교토 집들의 이국적이면서 고풍스러우면서 정렬감이 있으면서 또한 현대적이기도 한 한 없이 걸어도 별로 피곤함을 느낄 짬이 없는 그런 분위기의 주택가를 거닐며 내려 오다 우리는 자판기를 끼고 있는 조그만 동네 간이 휴게실 의자에 걸터앉아 가지고 온 소주를 꺼내 한 잔씩 기울였다.
안주는 눈에 뵈는 과자 부스러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안주인 과거와 현재를 버무리고 일본과 한국을 버무린 복잡한 생각이었다.
술이 약한 나는 적당한 취기를 느낄 때 쯤 자리를 털고 다음으로 간 곳이 ‘남선사’라는 단풍나무가 우람하고 엄청나게 큰 석등이 있는 절이다. 작은 절간으로 마치 절간의 일부만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이것저것의 ‘앙꼬’가 빠진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이어서 우리는 청수사(기요미즈테라)라는 절에 갔다.
그 절은 원래 8세기에 만들어 진 절이지만 16세기에 재건축된 절로서 약수로 유명한 절인 모양이다.
입구에는 구 탑과 신 탑의 삼층탑이 있고 본당으로 들어가니 특이한 구조다.
아마 낭떠러지 위에 건립된 절인 듯 본당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구조가 길면서 격자 식으로 난간을 이어 붙여서 그 깊이가 십여 미터는 됨직하니 깊기만 하다.
자연히 그런 곳에 지은 절이다 보니 맞은편으로 보이는 산간의 경치가 마치 커다란 숲의 병풍을 펼쳐 놓은 듯 빼어나게 아름답다. 가을철이면 그 아름다움이 어떨 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이런 곳이다 보니 실연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마지막으로 부처 앞에서 기도한 번 하고는 그 높은 난간 밑으로, 저 멀리 앞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몸을 내던져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는 단골 장소란다.
그 말은 들으니 참으로 사람이 죽기로 맘을 먹고 죽기에 적당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기로 말하면 이쯤은 되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런 절경에서 죽으면 남보다 짧게 살고 가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덜 아깝다는 생각이 들만도 할 것 같았다.
이어서 절간 우측의 약수터로 가서 별로 목도 안 말랐지만 먹어야 한다기에 나도 한 모금 마셨는데 그 약수터의 구조가 사뭇 특이하기만 하다.
위에 난 몇 개의 구멍에서 물이 나오는데 기다란 손자루의 끝에 작은 물통이 달린 조그만 양철 물바가지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는 특이한 구조인데 사람이 너도 나도 먹는 터라 줄을 서야 할 지경이다.
나는 별다른 물맛도 못 느끼면서 그냥 남처럼 한 모금 마시고 절을 내려오다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자들과 사진을 한방 찍고 그 절간을 나왔다.
이어서 택시를 타고 우리는 시내로 나와서 라면집에 들려 저녁을 먹었다.
말이 라면 집이지만 맥주 한 모금과 일본 소주를 시켜 마시면서 이것저것 한 가지씩 먹는 맛이 절묘하기만 했다.
사실 우리끼리 들어갔으면 그런 맛을 느끼기가 어려웠겠지만 일본인 친구가 워낙 나의 입맛을 잘 알아서 인지 유별나게 내 입에 맞는 것만으로 시켜서 맛이 더 좋았다.
적당히 흥건한 마음으로 ‘카라스마구찌’라는 이름도 특이한 곳을 지나 숙소로 돌아와 셋이서 번갈아 가며 샤워를 하고 잠을 잤다.
‘나라’지역을 여행하기로 한 날이 밝아 오자 우리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행장을 챙겨 나라 역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좀 걷다가 점심 도시락을 세 개 합해서 2700엔에 사서 또 다시 택시를 타고 시골길을 꼬불꼬불 한참을 달려 운전수가 건네는 우산을 두 개나 건네받고 도착한 곳은 ‘조루이지’란 절.
좀 길게 왔다 싶었고 요금도 오천 엥이 넘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일본인 친구 말이 일부러 뺑뺑 돌아서 바가지를 썼단다.
아니 일본에도 바가지를 씌우는 운전수가 있다니?
너무도 희한한 일이다.
‘지옥에도 부처가 있다’는 일본 속담의 정반대다.
‘천당에도 악마는 있다’랄까?
절간에 들어서니 연못이 아름답기만 한데 그것 자체가 국보란다.
말하자면 국보정원인데 일본에는 별 것을 다 국보로 지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보기도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우리기준으로 보면 굳이 국보라고 할 것까지야 있을까 싶었다.
그렇더라도 적당하게 흐린 날씨의 오전 햇살을 온통 덮어 쓰고 있는 그 연못과 연못 주변의 정취는 아름다웠다. 그 외곽선의 흐름이 알맞게 굴곡이 져 있으며 이렇게 저렇게 나고 자란 풀들이며 꽃들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수면의 잔잔함이나 잡풀이나 연들도 다 알맞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한쪽 구석으로 서있는 삼층 목탑과 그 주변을 싸고 있는 단풍나무들의 풍치가 굳이 가을이 아니라도 아름답고 그림 같기만 하다.
그 맞은편으로 그런 풍치에 참으로 적당한 크기로 알맞게 나지막한 단층짜리 절이 그런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버티고 서 있었고 그 한 중심에서 바라본다면 가히 일품 경관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조망할 수 있는 문은 닫혀 있어서 가운데에 있는 7개의 불상이 매일 누리는 그런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가 없었다.
옆에 붙어있는 요사채며 그 담장들이며 그 사이에 놓여있는 꽃들이며 하나하나가 눈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고 소박하기만 하지만 우리들 세사의 찌든 모든 때들을 아무리 들어부어도 그 끝이 없을 만큼 크고 깊은 그런 공간이었다.
이어서 절을 나오는데 무공해 야채 ‘무인판매대’가 있다.
나는 오이 한 덩어리를 사고 조금 내려오니 자잘한 도자기들을 파는 선물가게가 있어 몇 개를 고르니 일본인 친구가 자기 선물이라고 한 개를 더 골라 보란다.
나는 늘 그 친구한테 별로 해 주는 것이 없는데 그 친구는 늘 나한테 더 잘 해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이어서 우리는 조금 기다리니 마을버스 같은 것이 와서 올라탔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아까 올 적의 택시보다도 더 빨리 처음 택시를 탄 역까지 온다.
괘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는 ‘도다이지’(동대사)를 찾아 걸어갔다.
사슴들이 거닐고 관광객이 적당히 붐비는 길을 따라 가다보니 엄청나게 큰 대문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남대문보다 크면 컸지 적지가 않은 것 같고 그 이고 있는 세월도 엄청나게 긴 모양이다.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니 또한 엄청나게 큰 본당이 나온다.
맨 꼭대기의 두 개의 ‘치미’는 규모도 크지만 그 황금색이 특이하고 그 간격이 우리나라 절간의 그 것과는 달리 간격이 좁아서 지붕이 전체적으로 그 크기에서 오는 웅장미보다는 장식적인 느낌의 정돈감이랄까 단단한 느낌이 강조 되 보이는 느낌이고 안정감이 더 들어 보인다.
7세기 나라시대에 건축될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큰 규모였지만 세 번의 재건축을 거쳐서 처음의 크기의 삼분의 이정도로 줄어든 모습이라니 처음의 크기대로라면 정말 엄청난 규모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나라 시대의 모습이 지금의 절과 달리 지금보다 훨씬 한국적인 모습이었지만 12세기 에도시대에 재건축될 당시 그 시대의 건축양식인 에도양식을 따르다 보니 지금처럼 우리나라 절간의 모습과는 사뭇 달리 장식적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 안에 발을 들여놓으니 또한 무지막지하게 큰 불상이 나온다.
커다란 집의 지붕을 뚫고 나갈 것만 같이 근 팔백년의 세월을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불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들어오는 이들의 숨을 막히게 만든다. 좌대를 장식하고 있는 여러 장의 연꽃 입 중 그 한 장의 크기가 모르긴 해도 100호 캔버스크기보다 작지가 않으니 실로 엄청난 동상이라 할 수 있다.
하도 커서 불상의 인상이나 모습은 잘 감상이 안 될 정도이다.
그 불상도 화재로 처음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로지 연잎 몇 장만 처음의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800년의 세월이 작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뒤로 돌아 가보니 그 광배의 문양도 엄청나지만 특이하게도 그 뒷부분까지도 다 각이 되어 있어서 앞뒤가 제대로 장식이 된 완벽한 광배의 모습이었는데 그 두께도 두꺼워서 이런 저런 것들이 우리나라 불상과 달리 특이하기만 했다.
크고 높다란 기둥들도 인상적이었고 그 껍질을 나무로 깎아 덧붙인 모습도 특이하기만 했다.
어느 기둥은 아마 처음 건축당시의 기둥인 모양으로 홈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무슨 서커스 단원들이 그러하듯이 아이들이나 학생들이 구멍을 통과하면서 자신들의 날씬함을 자랑삼고 하는 모습이 또한 특이하기만 했다.
그 구멍주위는 그 덕에 어찌나 ‘맨질거리던지’ 그 또한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곳을 나와 사람들이 오가는 길 옆 벤치에 자리를 잡고 사온 도시락을 펼쳤다.
도시락은 일본의 모든 상품이 그렇듯이 정말이지 그 포장 자체가 예술이었다.
나무 상자로 포장이 되어 있고 그 것을 붙들어 맨 고무줄로 맨 모습이 간단하면서도 멋스럽게 디자인 되어 있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회 초밥을 싸고 있는 감나무 잎이었다(가끼노 합바 스시).
감잎과 함께 먹는 회 초밥의 맛이란 말로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우리의 음식은 대부분 입으로 들어가서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일본의 그것은 먹기 전에 이미 그 포장에서부터 음식 맛의 반은 먹고 들어가는 통에 정작 그 알맹이인 음식은 맛을 반만 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가는 곳마다 그랬다.
뭐든지 입으로 가지고 가서 부수기가 아까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음식 문화가 중요한 국민성의 판단기준의 하나라고 본다면 확실히 일본인들은 속보다는 겉에 신경을 많이 쓰는 민족인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그 속도 정작 알기가 어려운 그런 민족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도 속보다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뭔가 우리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체면은 과시용이라면 그들의 그런 집착은 뛰어난 상술에 기인한 것이고 내면에 대한 보호의식은 삶의 한 방식일 것이다.
사실 살기에는 그런 ‘포커페이스’가 훨씬 이로울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거리 든 말 든 도시락에 가지고 온 소주까지 한잔씩 기울이니 천년의 역사와 혼합으로 먹는 맛이 참으로 기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얼큰한 버무림을 안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잘 정돈 된 화장실을 거쳐 고풍스런 일본 집들을 지나 동대사 부속건물인 ‘수계당’이란 곳에 들렀다.
우선 거기도 내부에 정원이 역시 일본식으로 하얀 잔돌들을 깔아 놓고 줄이 둥그렇게 써레질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일본 절이나 신사에는 이처럼 잔 돌을 깔아 놓고 빗살무늬거나 달리기 트랙 같은 형의 원형자국이거나 일자형의 줄 자국이거나 한 것이 특징이다.
두무지 알 수 없는 현상으로서 일단 실용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요즈음 땅바닥에 잔돌을 까는 이유는 풀이 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그랬을까?
그러다가 그것을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참선 문화로 변환 시킨 것일까?
아니면 국토 여기저기에 그런 잔돌이 전부터 많이 있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본시부터의 돌이 아니고 기계로 깬 돌일진대 참으로 이런 문화가 오랫동안 존재해 오고 있다는 것이 기이할 뿐이다.
그런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본존불 자리에는 작은 목탑이 있고 그 둘레 모서리에는 흙으로 만든 사천왕상들이 서 있는데 그 형태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보존 상태나 형태가 완벽하고 균형미나 조각적 테크닉이 뛰어나기만 하다.
아무튼 이들의 보존 정신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곳을 나와 길을 걷는데 일부러 그랬는지 원래가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고궁이나 가야 볼 수 있는 흙벽으로 되어 있는 민가의 담들이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특이하다.
어는 한 곳은 거기에 낙서로 각이 되어 있는데 좀 인위적인 것 같고, 우리나라 금산사 대웅전의 외부 벽에서 본 낙서만큼은 어림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보기가 좋았다.
또 지나가면서는 이런 저런 가정집의 모습들이 다 그 나름으로 특징이 있고 보기도 다정하기만 하다.
나무껍질과 ‘스기’로 만들어서 한껏 예스런 멋을 부린 대문이 있는 집을 지나 길옆 연못에 다다르니 그 곳에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가 수면에 떠있는 녹색 띠와 함께 한껏 내 마음을 가라앉히기만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가라앉은 분위기로 버스를 타니 졸음이 찾아왔다.
한참을 가다 들르고 싶었던 ‘약사사’의 탑이 저 멀리 보인다.
그 탑은 참으로 절묘하게도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목탑형식이면서도 중간 지붕이 위 칸 지붕보다 작은 것이었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불안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전혀 그런 느낌 없이 파격적인 균형미와 조화미로 너무도 시선을 끄는 것이었지만 우리 일행은 정해진 시간의 한계로 그 탑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밖에 없었다.
그 탑의 설계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이지 고도의 미학적 감각을 지닌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교과서에서 많이 보던 이름의 절인 ‘호오류지’(법륭사)에 들렸다.
비스듬히 기울어지게 세운 흙 담 너머로 그 유명한 세계 최고의 오층 목탑이 위풍도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소나무들의 윗부분이 댕강 잘려진 모습들이 인상적이고 옆에 있는 요사채의 건물이 우람하게 큰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절간의 새로 지은 커다란 요사채에 눌려서 본당이 기를 못 펴는 모습과는 달리 나름으로 상호 보완적인 모습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저해하지 않는 모습이다.
분명 지어진 지가 오래지 않을 것이지만 적당히 고풍스런 모습으로 어우러져 있는 가람의 배치가 특히 나의 부러움을 샀다.
오층탑은 역시 그 옛날 우리나라의 황룡사 탑이 저랬을 것이란 상상을 자아낼 만큼 한국적인 친근감과 웅장함을 자아냈다. 비록 일본에 왔지만 마치 내가 삼국시대의 경주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 옛 선인들의 기상이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주춧돌로만 아로새겨져 있지만 먼 이국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기쁨이었다.
탑의 뒤를 돌아가 보니 쇠창살 속에 석가의 열반상이라는 것이 조그맣게 흙으로 조상되어 있었는데 정말 그런 자세로 누워서 죽었는지 모르지만 정작 죽어가는 석가상의 모습은 태연하기만 한데 그 옆에 조상되어 있는 제자들의, 고개 젖히고 우는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이고 이색적이고 또한 사실적이어서 재미있었다.
그 모든 것이 흙으로 만들어져 있고 천 삼백년 전의 상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보존 상태가 완벽한 것에 또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금당을 보니 석가 삼존불이 있다. 도쿄의 절이 많은 경우 석가모니보다는 다른 불상들이 조성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나라 지역은 대개 본당에 여기나 동대사처럼 석가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 그 만큼 건물외관의 한국적인 면과 함께 불상에 있어서도 ‘나라’지역이 우리나라 불교 영향을 더 받은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금당에는 벽화가 있었는데 오십년 전에 대학생들이 모사를 하다 전기방석에 불이 나서 그 것을 태워 버렸다니 보존 정신이 뛰어난 일인들도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간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그 ‘쇼오토쿠 태자 상을 고구려 화가 담징이 그렸다고 했고 그것을 통해 고구려의 그림양식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기만 했다.
나무 문짝이 우람하기만 한 그 쇼오토쿠 태자상이 조성되어 있는 법당에 무슨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적 바람에 나도 남들처럼 얼떨결에 빨려 들어가 절을 했다.
여행이란 것은 사람의 마음을 쓸데없는 것에도 흔들리게 만드나보다.
이어서 우리는 헤매다 겨우 박물관을 찾아 갔는데 그 옆의 절간 식당이 근 천년은 된 것으로 일본 최고의 식당이란다.
그곳을 지나 박물관에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후질구레한’ 윗옷 재킷을 벗어 우산대 꽂이에 우산과 함께 꽂아 놓고 들어가는데 좀 있으니 경비 아저씨가 와서 손가락의 방향을 쳐다보니 입구에다 옷걸이를 해서 얌전히 걸어 놓고 나갈 때 가져가란다. 참으로 친절 빼고 무엇으로 살까 궁금한 일본인들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에 있는 모든 상들이 모두 한 결 같이 7세기경에 조성되어서 오랜 시간의 때들을 오롯이 뒤집어쓰고 있는 것들이고 금동상도 아니고 목각이거나 흙으로 만들은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보존 상태들도 역시 완벽하기만 해서 참으로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들도 여간 정밀하고 표정들이 다른 곳에서 본 불상들처럼 생동감이 넘쳐서 또한 놀랄 뿐이다.
상들 말고도 8세기경의 궤짝이나 나무 탑 등과 함께 그 많은 상들이 하나하나가 참으로 놀랄만한 시간과 완벽한 ‘장인정신’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백제관음상’이라는 목각입상불상이었다.
깡마른 그 모습도 특이하지만 표정이나 모습이며 그 약병을 들고 있는 손의 자태 등이 우리가 흔히 보아 왔던 불상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고 사뭇 인간적인 모습이라서 숭고함보다는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더 드는 그런 상이었다.
크기도 실물대 보다 조금 더한 크기(210cm)라서 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역시 표정이나 모습들이 가늘고 정교하다 보니 내가 봐왔던 대부분의 두루뭉술한 느낌의 비인간적인 신상과는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오래 전에 이탈리아의 박물관에 서 있던 대리석 여신상에서 느꼈던 그런 감정적 이입에 일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을 백제의 위덕왕이 일본에 선물했다는 것이 더욱 신기하기만 했다.
일본의 불상들은 엄청나게 정교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사실적인 측면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대개의 불상은 석굴암의 불상처럼 비현실적인 신성의 이미지만을 강조한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백세관음상의 경우는 그런 두 특징의 중간이라고 할까 아니면 오히려 일본의 사실적 표현에 더 가깝다고 할 만하다.
삼십삼간당의 일본식 불상들도 그랬다.
원래 우리나의 불상들도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후에 비인간적인 시상의 모습으로 변하고 일본은 그런 면을 잘 전수 받아서 정교함과 사실성을 유지한 것이 아닐까?
전문적인 공부가 없어서 정확하지가 않다.
‘금동 반가 사유상’이 있다는 한군데를 더 들리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마감시간이 지난지라 포기하고 가까스로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고 오사카 ‘도돔부리’에 도착을 했다.
일본의 지명은 대부분 나에게는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준다.
외우기는 어렵고 그 뜻을 알면 어떤 것은 별 것도 아니고 때로는 고풍스런 것도 있고 재미난 이름도 있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언젠가 다시 그 이름을 들으면 그렇게 향수에 젖게 만들 수가 없는 그런 것들이다.
한번 갔다 온 외국의 다른 도시들도 후에 회상을 하노라면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다반사지만 일본의 그것은 더한 사무침으로 다가 온다.
어디 지명뿐이랴 사람의 그 괴상한 이름들도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인지 내가 유별나게 친일적인 감정을 가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식이 빈약해서 그런지 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실로 감정이란 나를 뛰어넘어 만들어지는 몸의 혹 같은 것인가 보다.
그런 도시이름 중의 하나인 ‘도돔부리’의 어느 ‘이자까야’(선술집 같은 것의 통칭)에서 우리는 오천 엥 이란 거금을 들여 저녁을 먹었다.
별스런 음식들을 역시 일본인 친구 덕에 배불리 먹고 오사카의 야경을 즐기다 돼지고기 뼈로 국물을 만들었다는 유명한 사십 여년 되었다는 ‘사스마 라멘’ 집에 들려 부른 배를 다시 채우고 ‘남바’지역을 돌며 또한 야경을 즐기다 유명하다고 한국 텔레비젼에도 나왔고 일종의 만두 같은 것으로 속에 낚지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다꼬야끼’집에 들려 부른 배를 더 불리고는 아파트 집에 들어 와서 낮에 간단히 소주파티를 한 후에 잠에 드니 12시 인지 1시인지 기억에 없다.
오늘의 여행으로 말하면 역시 ‘원주민’ 덕에 볼거리와 먹거리를 ‘엑기스’만 골라 즐긴 셈이니 참으로 여행치고는 완벽하다 할 만하다.
오늘도 여자 잔소리 같은 비가 끈질기게 내린다. 꼭 우리를 따라 다니면서 흩뿌리는 것만 같다. ‘결혼식 날 비오면 잘 산다’는 말처럼 뭐든지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장기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우리가 아닌가 싶다.
벌써 여러 날을 비와 같이 움직이니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지만 또 한편 생각하면 일본의 여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끈적거리는가? 그러니 당연히 목욕문화가 발전하고 보편화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도 비 덕분에 그런 찐득거림은 면할 수 있으니 비교적 큰 비도 아니어서 머리통만 적시는 정도니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다.
8시에 우메다(메실 밭이란 뜻이란다)역에서 급행을 타고 교토 카스라란 곳에서 또 다른 일본인 화가친구 ‘나오끼’가 다니는 대학교에 가려고 학교버스를 탔는데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젊은 기사의 친절함이 역시 돋보였다. 버스를 내려서 한참 가는데 그 친구가 달려오면서 바가지 쓴 택시기사(지금도 정말 바가지 썼나 의구심이 가는 일)가 준 비닐우산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닌가? 친절한 일본에서는 건망증도 다 ‘카바’가 된다. 우리도 일본만큼만 살게 되면 다 그런 식으로 바뀔까?
실기실을 이리 저리 둘러보니 여기나 저기나 묻어 나오는 작가정신의 예행연습의 흔적들이 나의 발을 자꾸 주춤거리게 만든다. 내가 가리키는 학교의 할생들의 숨결이나 미국대학에서 봤던 몸짓이나 여기 일본 학생들의 흔적들은 다 하나로 돌돌 뭉쳐서 내 어린 날의 몸짓과 혼합이 되니 묘한 감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그처럼 한길을 가기위해 애쓰지만 갈 길도 멀고 도대체 길이 어딘지도 알기가 힘드니 정말로 예술에의 길이란 험난하기만 한 것이고 그런 출발 선상에 선 그 들의 손길에 나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충 실기실을 둘러 본 느낌으로는 일본도 여전히 고답적인 미술 교육방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대상을 닮게 그리는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밀묘사, 전통회화 베끼기나 정물 그리기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실기실에서 찾기가 어려웠었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운다기보다는 그냥 입학하자마자부터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어떤 기초과정이 따로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실기실만 둘러본 피상적인 느낌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현장 확인 같은 것이기에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어서 나는 학교 화방에 들려서 물감을 사려고 했지만 의외로 물감이 없어 포기하고 옆에 있는 서점에 들려 가우디 작품의 사진첩을 사고 인도의 그림첩 해서 손바닥만한 책을 세권 사고 나서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으로 학교 앞 식당으로 갔다.
우리 식의 도시락이었는데 삼치구이도 들어 가 있었으며 반찬이 이것저것 오밀조밀하게 구석구석에 박혀 있고 처음 보기에는 요기가 될까 싶을 정도로 조촐하였지만 먹고 나니 제법 배가 찼다.
이어서 우리는 길가에 거짓말처럼 서 있는 고류지(광륭사)에 갔다.
그곳에서 나는 일본에서 꼭 보고 싶었던 그 유명한 목각미륵반가사유상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우리나라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그 크기와 재료만 다를 뿐 거의 쌍둥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의 크기에 비하면 훤칠해서 거의 실물대 크기인 그 상은 역시 아름답기가 그지없었다.
실물대여서인지 작은 우리나라의 금동상보다 더 인간적이고 친근감이 들었으며 그 만큼 신적인 장중함이나 엄격성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것은 우리의 반가사유상과 분명 ‘짝퉁’ 임이 분명하건만 일인들은 그 어떤 안내 글에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연관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백제 관음상’ 에나 그 옆의 조그만 금동반가사유상에는 ‘백제’라는 말을 넣었음에도 정작 목각 반가 사유상에서는 그런 내색을 감춘 것은 실로 일본적인 자존심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도 개인적인 그들과의 만남에서 보면 무슨 역사적인 맹점이나 약점이 들어나면 마치 못 보고 못 들은 것처럼 하는 것이 일본인 특유의 기질이고 방편인 것을 가끔 느끼는데 이도 그런 단면이 아닐까?
일본 국보 일호에 대한 ‘자존심 지키기’ 같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서로가 암묵적으로 지키려 드는 일본인 공통의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그런 국민적 묵시적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면 그 들의 단결력은 역시 참으로 무서운 것이고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하나의 초석일 것이다.
그 사유 상 앞에는 커다랗고 팔이 여러 개 달린 남방식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의 나무 다루는 감각은 남다른 것이 있음에 분명하다. 그것은 일본의 일반 집의 구조나 모양에서도 알 수가 있다. 같은 목조문화권의 민족이지만 그들의 나무 다루는 기술은 우리와 차이가 남에 틀림없다. 우선 정원석만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자연으로 내버려둠이 없다.
그냥 비비꼬고 틀어서 유별나게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나 보다.
나무도 그냥 쓰기보다는 갈고 다듬어서 씀이 보편적이라고 할만하다. 따라서 나무 다루는 기술이 예부터 유별난 민족이었던가 보다. 지금도 하다못해 간판을 보더라고 그 다루어진 나무의 느낌이 아주 감각적인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정원을 자연적인 환경에 의존해서 가꾼다던지 절간의 기둥이나 서까래 등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한 채로 세운다던지 마루도 거칠게 다듬어서 깐다던지 하는 우리의 방식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
그런 그들이다 보니 예배의 대상인 불상도 나무를 많이 사용한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그 연한 재료로 만든 것을 천년이 훨씬 넘게 보존하는 정신은 정말이지 거듭 감탄을 자아낸다.
고류지에는 그 외에도 당삼채 불상, 리얼한 사천왕상, 오랜 퇴화로 색깔이 절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묵상 등이 있었다.
그런 많은 불상들이 교토 나라외의 불상에서 발견한 박힌 눈알이 없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대체로 일본의 불상이나 동물상이나 심지어 기둥의 용상에도 꼭 눈알이 박혀 있는 것이 특징 중의 하나이나 교토 나라 지역의 불상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여간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 눈알이 늘 날 섬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 이처럼 불상 전래 당시에는 그냥 우리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처리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눈에다 플라스틱 눈 같은 박기 시작한 것 같다.
그것을 박기위에 머리통 뒤통수부터 구멍을 뚫어서 넣었다니 그 기술도 만만한 것이 아닐 테지만 일본의 불상들에는 한사코 보여 지는 것이라 볼 때마다 께름칙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본 사찰의 건물들도 한국식에서 차츰 일본화 되어 가듯이 불상도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이어서 우리는 이상한 정원이 있는 료안지(용안사)를 향했다.
그 곳은 밖으로는 토담으로 막혀있고 안으로는 툇마루 앞의 전돌이 박혀있는 땅과 연하여 있는 사방 50평 정도의 크기나 될까 한 직사각형의 인조 정원으로 잘게 깬 돌 위에 돌을 14개인지 15개 인지를 놓고 바다위의 섬을 연출한 말하자면 무슨 무대 같은 곳이다.
어느 곳에서 봐도 그 돌이 다 보이지를 않아서 인간의 다 가지려는 욕심을 경계하는 암시를 주는 곳으로 일종의 참선 장소 같은 곳으로 일본의 국보라고도 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란다. 일본은 별 이상한 것도 국보로 지정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또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니 내 생각이 원시적인 아닌가하고 의심이 갔다.
일단 거기 온 사람들은 그 툇마루에 앉아서 이리 저리 머리를 조아리고는 폼을 잡아서 무념의 경지에 들어가려고 몸부림들을 친다. 그러면 갑자기 도라도 주울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 그 툇마루는 반질반질 한 것은 기본이고 옹이 부분을 뺀 다른 부분들은 움푹 패여 들어가서 인간들의 쓸데없는 잡시간 죽이기의 흔적들을 아로새기고 있다.
나는 대충 각도를 잡아 정원의 돌들과 그 깬 돌의 원으로 빗살 그은 자국을 찍고 또 그 토담을 찍었다. 그 정겨운 토담은 이끼들을 군데군데 붙이고 있어서 더 정겹고 그 ‘돌팍’들을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지만 같이 간 일본인 친구 나오끼 만이 그 맛을 아는 듯 했다.
나는 이어 붙어 있는 쪽마루를 돌아드니 거기는 바닥이 온통 이끼류로 덕지덕지해서 갑자기
원시림에라도 들어온 듯한 착각을 유발시키니 무슨 꿈의 양탄자라도 타고 노니는 것만 같았다.
다시 돌아가니 ‘오유자적’이란 한자를 동전모양으로 파서 만든 물통이 보였다.
그 위로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데 입구 자가 그 네 글자에 모두 들어가서 가운데는 입 구자를 파 넣고 나머지 글자를 사방으로 돌려 파서 엽전처럼 보이는 것이고 풍신수길이 와서 그런 말을 했다나 해서 기념으로 만들었다는데 무엇이든지 넘치지 말게 가지라는 뜻이란다.
넘치지 않을 정도로 갖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아주 아무것도 안 갖기로 맘먹기나 한다면 모를까.
다시 돌아서니 역시 계속되는 숲의 정원인데 한 구석에 나무가 한 그루 있고 거기에 조선 어쩌고 하는 문구가 있어 알아보니 ‘풍신수길’ 때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적색과 흰색이 같이 피는 동백꽃이란다. 그런 것이 일본에는 없는 것이라 기념으로 가지고 온 것인가 본데 참으로 인진란 때 한국 사람들의 귀를 잘라오게 한 사람들의 수장치고는 ‘오유지족’도 그렇고 별 희한한 취미도 다 있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별난 사람들의 별난 절이다 싶은 느낌으로 다시 돌아서 그 툇마루로 돌아 올 즈음 그 돌아온 건물의 안쪽이 말하자면 우리가 일본영화에서 봤던 무슨 강당 같은 곳으로 방이 여러 개 연달아 있어서 문을 양쪽으로 쫙 열면서 사람이 쭉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곳이었다.
방은 세 개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방마다 미닫이문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어둑한 중에 자세히 보니 그 문짝마다 앞뒤로 동양화가 그려져 있고 온 벽도 핑 둘러 동양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은 출입금지 구역이라서 대충 문 안을 들여다보니 그 그림들은 산수화들인데 모두가 예사롭지가 않게 보여서 그 그림이 들어간 그림엽서가 없냐고 물으니 누군가 건물 안쪽에서 나오더니 엽서는 없고 돈을 일인당 300엔을 더 내면 안까지 특별히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술인지 친절인지 잘 구별이 안가는 노릇이었지만 우리는 쾌재를 부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가니 놀랍게도 적당히 운무가 낀 산들을 그린 동양화 그림으로 그 깊이가 잔잔하게 울어 나오고 어떤 폭은 거의 그림이 없을 정도고 어는 것은 산새가 깊은 것이 그 연작의 솜씨가 자못 놀랍기만 한 훌륭한 그림들이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모두 금강산 그림이었다.
‘삼일포’니 ‘만물상’이니 ‘해금강’이니 하는 우리가 흔히 듣던 화제들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아니 이런 곳에 금강산 전도가 도배가 되어 있다니 참으로 믿어지지가 않아 아예 사무실로 들어가 설명을 들으니 원래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찌해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가고 없었단다.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빼앗아 가듯이 미국인들도 전란 중에 빼앗아 간 것이 아닌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벽화가 없어서 1950년쯤에 다시 그려 넣으려던 참에 마침 그 주변에 대전 전에 한국의 금강산에 미쳐서 오랫동안 거기서 살다시피 하며 금강산도를 그린 동양화가가 있어서 청하여 그린 그림이란다.
그런 연유로 일본 교토 한 절간에 금강산도가 그려졌고 그것을 오늘 내가 와서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일본 안내자가 잡지를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은 그 금강산도를 취재해서 특집을 낸 것으로 1992년도 조총련계 잡지 같았다.
기자는 북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남한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니 혹시 남한사람으로는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의 그 곳을 이끼가 덕지덕지 껴서 그 고풍스런 맛이 돋보이는 쪽 지붕을 사진에 담고 밖으로 나와 연못을 둘러보니 꽃이 진 것인지 안 핀 것인지 잘 모를 수련이 수면을 채운 모습이며 주변의 단풍나무들이며 물가의 잡풀들이 그렇게 고즈넉한 풍치를 풍길 수가 없다. 둘러보며 이런 저런 상념에 잡긴 속에 다음 목적지인 ‘긴카쿠지’(금각사)로 향했다.
금각사는 연못 한 가운데에 있는 작고 단조로운 모습의 절이지만 글자 그대로 온통 금칠로 도배를 한 그런 특이한 절이다.
절 안은 들어 갈 수가 없었으나 무슨 보석함 같은 그 절은 모습은 너무도 특이해서 평생 잊기가 힘들 것만 같고 세계 그 어떤 절과도 혼동이 될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처럼 금칠을 하기로 작정을 한 이가 도대체 누구였을까?
또 왜 그랬을까?
우리도 금을 입히기는 한다. 부처에는 다반사로 하는 일이지만 건물에 한다는 것은 여간한 생각이나 재력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암튼 오래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그 무엇이다.
엄청나게 미친 짓이거나 기발한 창의력이거나 또한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불심이거나 잘 감이 안 잡히는 그런 덩어리였다.
그렇지만 그 절이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질 적에 수면에 비치는 모습은 ‘어디가 절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환상적이라니 그 곳은 절을 건물로 보지 말고 풍경으로 봐야 제대로 보이는 곳인 모양이지만 속세에 찌든 나로서는 역시 금색만 눈에 들어오니 한심한 노릇이다.
대부분의 일본 절간 연못이 아름답지만 역시 그 곳도 그 주변의 작은 연못이 너무도 아름답고 또한 산책로는 두 연인이 같이 돈다면 헤어질 맘을 먹다가도 금방 마음을 고쳐먹을 만큼 그렇게 환상적인 코스였다. 초가지붕을 두껍게 얹고 있는 찻집이며 길가의 우거진 숲이나 잡풀이며 이끼 낀 모습들이며 모든 것이 이미 인위성을 넘어 아름다운 자연이 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뭐든지 자꾸 주물럭거려 결국은 그것을 자연스런 경지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일종의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아닐까?
우리는 절간을 나와 교토의 인사동이란 곳으로 가서 이런 저런 가게를 구경하는데 정말로 한국 문화재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것은 가격도 적당해서 사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여행자 주머니가 그렇게 두껍겠는가?
우리를 위해서 일본인 친구들이 각자 일본 골동품 도자기를 구입해 선물해 주니 잘한 구경에 마음까지 담으니 더욱 산뜻한 기분이다.
이제 일본에서의 일본인 친구들과의 마지막 저녁을 위해 식당에 들어가서 우리는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다.
소주 맥주에 네덜란드식 ‘채소마끼’에 도가니에 회는 기본이고 비빕밥 같은 밥에 메추리 튀김 등에 우리는 완전히 맛이 갈 정도로 정신없이 먹다보니 짠 정도의 조절이 안 되서 나중에는 물을 엄청 들이켜야 할 정도였다.
교토가 친구인 나오끼는 거기서 곧바로 교토의 집으로 가고 지바가 집인 친구인 다께우찌는 야간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가고 우리는 민박집 잠을 위해 아파트로 어기적거리며 이런 저런 차를 타고 갔다.
다음 날은 12일로 아침에 우리는 칸사이 스롯패스를 가지고 고베로 가서 그 유명한 ‘히메지 성’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친구가 어제 취중 얼떨결에 그 표를 한번 사용하는 바람에 어제 안 쓰고 오늘 하루 종일 쓰기로 한 표의 마지막 하루사용권을 이미 날려버려 난감한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루짜리 표라도 사는 것이 이득이어서 그 친구 것으로 한 장 더 사서 히메지 성을 향했다.
그곳은 호오류지와 함께 일본에서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크기도 큰 곳이지만 다른 일본의 성들과 다른 것은 다른 곳은 대부분 새로 지은 것이지만 히메지성만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란다.
일본이 내란이 많은 나라였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을 해 봤다.
그 곳은 역에서 내려서 걸어갈 만 한 거리에 있었다.
멀리서도 ‘상제리제’ 거리의 에펠탑처럼 그 윤곽이 확연해서 묻고 헤매고 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가 길안내 표시처럼 그렇게 우뚝했다.
백조처럼 희고 아름다워서 그런 이름과 별명을 가졌다는데 특별히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그저 커다란 성이란 이미지 이상을 주지는 못했다.
여러 개를 본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성들을 보다 보면 유럽의 성당을 둘러보는 것처럼 나중에 그게 그것 같아서 혼동이 될 정도다.
그 성이 자리하고 있는 부지가 엄청 큰데 우리는 처음에 안내판을 착각하는 바람에 더 뺑 돌기만 해서 더욱더 그 느낌만 감소해 버렸다.
건축적인 안목이 적어서인지 시큰둥한 감정으로 거기를 빠져나오니 배가 몹시 고팠다.
적당한 곳에 들어가 닭 고치구이에 밥을 먹으니 그런대로 맛도 나고 허기도 채워져서 우리는 다시 나와서 고베시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베를린 뮤지엄 전을 보기로 하고 그곳에 도착해서 막상 들어가려니 친구는 밖에 있을 테니 혼자 보고 나오란다.
할 수 없이 혼자만 둘러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유물들이 별달리 눈에 들어오지를 안했다. 정작 내가 전공한 영역에는 실물이 났나보다.
남은 시간을 알뜰히 써야 하는 것이 여행이 기본이지라 우리는 교토에 가기에 앞서 ‘비파호(비와꼬)’를 보기로 하고 또 바로 그 옆의 일본 전통마을인 ‘사까모또’에 들리기로 하고 비파호 근처의 역인 ‘하마오오츠’행 전철을 탔다.
바로 오 분 거리의 비파호를 먼저 봐야지만 그곳은 야경이 멋있다니 먼저 전통마을을 들르기로 했다.
전통 마을로 가는 기차는 지금은 없어진 우리나라 수인선 협궤열차 같았다.
작고 조용하고 한적하고 여유로운 기차였다.
우리가 탄 칸에는 맞은편 자리에 여자 하나뿐이었다.
나는 차 안에서 여자를 만나면 그 얼굴이나 몸매를 빤히 처다 볼 만큼 뻔뻔스런 성격이 아니다 보니 보통 중요 부분은 대충 건너뛰고 보기에 만만한 손이나 발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 주인공에 대한 온갖 상상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날은 여자가 자리에 앉아 있는 터라 손도 접근하기만 만만치 않은 위치에 놓여 있는 터라 오로지 하나 남은 발을 가지고 씨름하기로 했다.
그런데 옷차림은 별 특징 없이 수수하기만 한데 유독 발만 튀었다. 신발이 악어가죽무늬였다. 엄청 돌발적인 상황이라 나의 평상적인 감에 의한 ‘센서’가 제대로 작동이 안 되고 다 망가져 버렸다. 하지만 친구는 나의 그런 먼발치 느낌은 아는지 모르는지 옆자리로 옮겨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야자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교토에서 의상디자인을 하고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단도직입으로 나이를 묻던 친구는 같은 나이니 친구라는 둥 하면서 적극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금방 그 여자가 내려야 할 지점이 되 버리고 그 짧은 순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 친구나 우리는 닭 쫒던 거시기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순발력 좋은 친구가 내 전시 엽서를 건넨다.
곧 종착역이고 너무나 한적하기만 한 그런 풍경의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이곳의 ‘이히쯔쯔미’라는 돌 축대가 옛날 일본식으로 만들어져서 유별나게 재미난 곳이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날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잰 걸음을 날리며 길을 따라 올라 갔지만 달아나는 낮 그림자를 쫒기에는 발걸음은 너무 느렸고 그걸 카메라로 잡기에도 셔터가 너무 느렸다.
대충 고즈넉한 마을을 어디가 어딘 지도 잘 모르면서 훑어보고 우리는 아까의 그 정거장으로 가서 혹시 우리가 타고 온 기차가 아닐까 하면서 자리에 앉아 비파호가 있는 하마오오츠 역으로 향했다.
거기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둡고 조그만 시골 광장 같은 공간을 가로 질러 호수 쪽으로 가니 호수 한 가운데로 분수가 이런 저런 모습으로 분출되며 무지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여러 개의 분수가 여러 갈래로 각도를 수시로 달리하며 물이 뿜어져 나오면 밑에 있는 오색의 서치라이트에 비추어져서 무지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모습이고 또한 그것은 도시 야경을 배경삼아 여러 가지 형태로 자동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는 물가 계단에 앉아 물끄러미 그 인조 분수의 ‘일본적’ 연출미에 약간은 젖은 듯 한 기분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로서는 처음 보는 볼거리이고 어찌 보면 신기하기도 하련만 덩그런 한 광장이나 콘크리트 계단 의자에는 빈 캔 맥주병과 함께 하염없이 혼자 호수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 하나와 좀 더 으슥한 계단 쪽에 남녀가 ‘코멩멩이’ 소리를 하며 쏙닥거리는 관객이 전부였다.
분명 년 중 언젠가는 여기 자리들이 꽉 메어져서 무지개 분수들이 신나게 흔들어 낼 때도 있을 법하건만 지금은 그저 맥없이 엉덩이를 흔드는 라이트 클럽의 꾸어 온 러시아 미회 같기만 할 뿐이다.
우리도 다분히 풀 죽은 모습이 되어서 다시 돌아 나와 역 주변에서 먹거리를 찾았지만 식당도 거의 눈에 안 띄고 어렵게 찾아간 식당도 우리의 주린 배하고는 거리가 멀기만 해서 결국 교토로 향하기로 했다.
교토에 도착하니 밤은 깊기만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처럼 밤을 가끔 만난다. 밤만 되면 잠만 잔다던지 하거나 하는 식으로 밤을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지에서 밤에 얼쩡거린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고 또 잘 알지도 모르는 낯선 곳을 잘 못 들어서면 고생도 할 지 모르는데다가 내 개인적으로는 술을 별로 좋아 하지를 않기에 이재 저래 밤에는 그저 이동시간으로나 활용하거나 일찍 들어가 쉬었다가 잠이나 자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여행 중에 맞는 밤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생각하면 내 여행은 다분히 속빈 강정일 지도 모르겠다.
특히 유렵이나 미국 같은 곳을 여행할 때는 특히 조심하는 마음이 앞서서 통 밤문화를 접하기가 힘들다.
그런 저런 이유로 이번 여행 중에도 밤문화는 딱히 접해 본 적이 없다.
어제만 해도 교토 ‘기온’에 기생구경을 가자는 친구의 의견이 있었지만 나도 좀 꺼림칙한데다가 일본인 친구들이 “거기 가서 무슨 총 맞을 일 있냐?”는 말에 그냥 꼬리를 내린 마당이다.
따라서 대부분 밤은 그저 스치기만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늘은 마침 지하철 갈아타는 곳이 교토 복판이기도 하고 오늘이 이번 일본여행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일종의 객기도 좀 일어서 우리는 야간비행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은 주린 배를 달래야 하겠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중국집에 들어갔다.
이 중국집이란 데는 세계 어디를 가나 있다. 아프리카나 남미에는 없을라나?
그리고 이제껏 우리나라 중국집 빼고 그런 각국에 흩어져 있는 중국집에 들어가서 단 한 번도 실망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디를 가나 중국인들은 현지인들 입맛에 맞게 음식을 개발하는 선수들 인가 보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현지화시켜서 변형시킨 음식이라도 내 맛에는 어디든지 한결같이 맛이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 벗어나려고 해도 내 입맛을 벗어나지를 못하거나 그들 특유의 그 어떤 맛인가는 절대 바꿀 수가 없고 그 것이 내입에는 딱 들어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꼭 중국본토에 가보고 싶다.
그곳 음식이 우리나라 여행객들은 입에 안 맞는다고 다 난리인데 내 입에도 과연 그런지 꼭 가서 확인을 하고 싶은데 아직도 기회를 못 찾고 있다.
언젠가 ‘황산’과 ‘장가계’를 묶어서 가보고 싶다.
이번 교토의 구석 허름한 중국집에서도 비록 간단한 볶음밥 종류였지만 나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안했다. 역시 값도 350엔 정도로 쌌고 맛도 있고 양도 많아서 배도 불렀다. 세계 곳곳의 중국집은 꼭 날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이어서 교토의 야경을 훑어보니 역시 그들은 밤에도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했다.
술주정꾼이나 시끄러운 사람이나 무질서 같은 것은 없고 그저 낮보다는 뭔가 음직임이 좀 느리고 남녀가 같이 있는 경우가 좀 더 많다는 것을 빼고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가 보는 시선이 피상적인 것이기에 그렇지도 모르겠지만 .밤도 낮처럼 여행객이 이 구석 저 구석 호기심을 달래며 거닐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람들의 움직임자체도 공기의 흐름이나 물의 흐름이나 강가의 버드나무처럼 그저 흐르거나 그 위치를 지키면서 자연의 일부임을 나타낼 뿐 특별하게 재미있게 사는 척을 안 하는 민족인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우메다 역에 들어가 지하철을 탔는데 그게 이층전철이었다.
우리는 이층에 앉아 도시를 한가히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밤 12시가 다 되서 ‘하나쪼노쪼’역에 도착을 해서 휘청휘청 오사카의 거리를 걸어 아파트 숙소를 빨려들어 갔다.
다음 날이 밝아오니 우리가 오사카를 떠나야 할 날이다.
시내 구경을 하자는 내 의견과 기어코 낮이라도 교토의 그 유명한 ‘기온’거리를 보고 그가 잡지에서 본 그 유명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기생전용 미용실도 보겠다는 친구의 의견이 갈렸다.
딱히 주머니가 넉넉해서 쇼핑을 왕창 할 시내구경도 아닌 바에야 친구 바람이나 들어 줄 속셈으로 우리는 기차를 타고 그 유명한 기온거리를 향했다.
사실 우리 친구는 밤에 가고 싶어 했지만 그건 너무 겁 없는 생각이라는 교토에 사는 일본 친구의 만류로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낮이니 꼭 가보고 싶어 했다.
역시 낮이라 그런지 그 거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오밀조밀 집들은 잘 정돈되고 멋스러웠지만 너무 적막해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먼지바람만 인다면 서부극의 세트장 같았다.
그래도 가끔은 일본 우산을 든 여름 기모노 차림의 여인이, 정식에 앞서 나오는 전식의 두 어 점 나오는 회 조각처럼 아주 맛 뵈기로 한두 명 세트장 같은 골목을 휙 지나가곤 했다.
그러면 그게 어디냐는 듯이 친구가 쫒아가면서 사진을 찍어 대곤 했지만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처럼 온 골목을 돌아 다녀도 사방은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해서 여기가 그런 흥청거리는 곳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우리 친구는 어찌해서 기생 머리를 옛 식으로 틀어 준다는 할머니가 있는 미용실을 찾아 갔지만 그 할머니는 죽었다고 하면서 무척 아쉬운 표정으로 나왔다. 그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무슨 장모 만나는 것도 아닐 터인데 그처럼 아쉬워하나 궁금했지만 사람마다 사는 방식의 중요점이 다르니 누가 말리겠는가?
대충 훑어보고 큰 길 가로 나와 이것저것 군것질로 점심을 때우는데 마침 오늘이 ‘기온마쯔리’ 첫날이라서 길가에 행렬이 쭉 이어진다.
전통복장의 남녀노소가 말 탄 사람 하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신사’쪽으로 향하는데 이들이 아마 ‘마쯔리’신고식 같은 것을 하러 가는 모양인데 그 중에 가만히 보니 말 탄 사람은 짙은 화장을 했고 칼도 찼지만 10살 안팎의 애다. 그리고 그 옆에 비슷한 복장의 애도 있는데 그는 말이 없이 어른들과 같이 걸어가는데 더운 날 복장을 하고 화장을 했으니 여간 덥고 힘든 일이 아니어서 어려워하고 옆에 있는 어른이 쩔쩔매며 달래는 표정이 역력했다.
같이 행사에 참여하는 마당에 어떤 놈은 말 타고 어떤 놈은 걸어 가야하니 언뜻 봐서 이해가 안 갔다.
말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인지 하나는 중요역이고 하나는 머슴 같은 역이라도 되는 것인지 내용을 모르는 나로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그 어려워하는 애가 안쓰럽게도 보였다.
신사까지 행사를 쫓아가서 기웃거려 봤지만 집 제사 참석하기도 귀찮아하는 나로서는 그런 남의 동네의 그런 묘한 제사에 관심이 붙을 턱이 없는지라 친구를 잡아당겨 좀 일찍 부둣가로 가기로 했다.
다시 전철을 타고 부둣가에 도착하니 도통 잘 못 온 것만 같다.
모름지기 부둣가하면 사람도 많고 쇼핑센터도 있고 식당도 많고 그래야 하거늘 이건 아예 부둣가 찾는데도 한참 걸리고 막상 부둣가라고 가보니 그냥 시골 창고만 같아서 그나마 우리를 싣고 갈 배마저 없었다면 그냥 돌아 올 판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인가 한국 가는 배가 있고 중국 가는 배가 한 번 있을 정도라니 그것이 당연한 것이 인천항이며 부산항을 생각한 내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수산물을 싣느라 원래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출발한 배를 타고 부산을 향해 장장 19시간이나 갈 판이다.
거의 하루를 배를 타고 가야 할 시간이 얼마나 지루할까 생각만 해도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의외로 배는 그렇게 지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얼쩡거리며 배 구경도 하고 바도 보고 때가 되면 컵라면이라 사먹고 과자 부스러기도 사 먹을 수가 있고 낮에는 일본 내해의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이런 저런 풍경도 볼 수 있어서 지루함을 달해 수가 있었다.
사실 일본의 최장다리며 좁은 해협을 지날 때의 좌우 해변을 구경하는 맛도 좋았고 지나가는 배를 아는 척하는 것도 재미난 일이었다.
그도 저도 싫증 날 때 쯤 해서는 끝없이 계속해서 배를 따라오는 바다물결을 자살이라도 할 사람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는 맛도 나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다 보면 밤이 왔다.
우리는 아직도 남은 햇반 한 통과 배에서 산 컵라면을 참치 캔과 함께 뒤범벅으로 먹으니 무슨 크루즈 호화여행처럼 ‘기깔’나는 맛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즐거움은 마음 가득이었다.
밤이 돼서 방에 드니 작년에 중국여행을 다녀 온 친구 말이 그 정도면 인천천진 간의 카페리보다는 훨씬 호화판이란다.
날이 밝아 밖을 보니 날이 흐려서 해돋이는 다 물 건너가고 끝없는 일본 내해의 연속이다.
아침은 역시 200엔짜리 컵라면으로 때우고 이리 저리 얼쩡거리다 보니 그 유명한 현해탄이다.
정말로 바다는 글자그대로 검은색이었고 갑자기 그 옛날로 돌아가 무슨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지난 내 삶도 오버랩 되며 바다를 가르고 저 멀리 눈에 익은 성냥갑들이 보이니 부산이고 그 앞에 작은 섬들이 오륙도다.
간단한 검사와 함께 내가 사는 땅덩어리의 끝단에 도착하니 이번 여행의 끝에 닿았지만 나의 여행에 대한 설렘은 그 바닥이 없으니 이것도 일종의 병이라면 병일 것이다.
시간이 남아 있었고
첫댓글 일본에 있을동안에 경험했던글 ,,재미 있게 잘읽었어요,,,고마워요,,,
미시마 유끼오(三島由己夫)가 젊었을때 쓴 금각사란 소설의 무대가 거기군요.잘읽고 도움이 됐습니다.
일본에서는 미지마 유끼오라고 안부르고 미지마 유끼오라고 부르는것같군요, 아마 두번째에 올때는 발음이 변하게 쓰는경우가 가끔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