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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준비 과정 이야기
산티아고 순례 길을 가게 된 사연
2019년 4월 11일부터 5월 20일까지 40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순례 길을 걸은 것은 신앙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산티아고 길을 같이 걷지 않겠느냐는 박동문 선생님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3년 전 스페인 일주 패키지여행을 할 때 ‘더 웨이’라는 영화를 감상했다. 순례 길을 걷던 아들이 조난으로 죽는다. 불화를 빚던 아버지는 아들 대신하여 순례 길을 걷는다. 그러면서 불화가 해소된다. 감명 깊은 영화였다. 그때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작년에 강화도 둘레길 코스를 며칠 간 걸은 적이 있었다. 둘레길 코스를 혼자 걸으면서 길을 걷는 재미를 느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체로 나 혼자서 여행하거나 산행한 일은 없었다. 누구와 함께했다. 그런데 강화도 나들길은 혼자 계획해서 다녀 보았다. 누구로부터 구애받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간다는 매력을 조금 느껴 보았다. 강화도 길 아닌 해외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박 선생님이 선택한 여행사는 혜초 여행사였다. 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했다. 어떤 방식으로 가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가기로 결정한 뒤 안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 안사람은 쉽게 동의해 주었다. 박 선생님에게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출발하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의 거리는 장장 800킬로나 된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고 메세타 고원 지대를 지나 산티아고까지 걷는다. 여행 기간이 전체 40일간이다. 순례 길을 걷는 기간만 따지면 34일간이다. 그 기간 동안 평균 잡아 매일 24킬로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길을 걷는 데 부담감은 처음부터 없었다. 20여 년 간 산행을 하면서 내 나름 튼튼한 하체를 갖고 있었다. 이번에 산을 타는 것도 아니고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있었다. 매일 걷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걷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또 산티아고 순례길이 내가 기대할 만한, 적어도 사진을 찍을 만한 승경은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로 치부했다.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참을성이 나에겐 있다고 믿고 있다. 또 그 길에 승경이 없었다면 천여 년의 순례길 역사가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걱정을 지워 버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2. 순례길 여행 준비 과정 이야기
먼저 혜초 여행사를 검색하여 이번 여행 계획의 포함/불포함 사항을 꼼꼼히 체크했다.
포함 사항
01: 국제선 왕복항공권 및 국내선 항공권(파리 – 비아리츠)
02: 전 일정 전문인솔자 동행
03; 도보순례 전문가이드(생장 – 부르고스 구간)
04: 일정표에 명시된 6개 주요지역의 숙박 및 조식
05: 도보순례 전 구간 전용 밴 차량 운용(짐 운반 및 도보 지원)
06: 육로 교통편: 비아리츠 – 생장(전용차량), 산티아고 –마드리드(열차)
07: 피니스떼레, 무씨아 방문(전용차량)
1억원 여행자 보험
이를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01: 순례길 출발 도시는 프랑스 생장이다. 에어 프랑스 항공편을 이용하여 파리 공항에 도착한 뒤 국내선 항공기로 환승하여 비아리츠 공항에서 내린다.
02: 인솔자가 2명이 있다. 1인은 전용 밴 차량을 운용하여 짐을 운반한다. 또 다른 1인은 순례자와 같이 걸으며 지원한다.
03: 전문가이드가 1명 있다. 통역 및 서류 처리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04: 생장(1,2일차), 산티아고(36,37일차), 마드리드(38일차)를 포함하여 도보 순례 기간 중 3차례 호텔에서 숙박한다.
05: 전용 밴을 이용하여 숙박지에서 다음 숙박지까지 캐리어 및 가방 등을 운반하여 준다.
06: 출국 시 비아리츠 공항에서 전용차량을 탑승하여 목적지 생장에 도착한다. 귀국 시 산티아고에서 열차로 마드리드로 간 뒤 숙박한다. 그 다음날 마드리드 공항에서 출발해서 파리공항을 거쳐 인천공항으로 온다.
07: 산티아고 순례 길을 마치고 숙박한 다음날 스페인 땅끝마을을 전용차량을 이용하여 관광한다.
불포함사항
01: 일정표에 명시된 날짜의 30개 지역 숙박
02: 식사비용(호텔 조식 8끼는 제공)과 생수, 간식 등 개인 경비(1일 25- 35유로 예상하면 됩니다.)
※ 전 일정 숙박비와 식비 등 개인 비용으로 1300 –1600유로 예상하시면 됩니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01: 호텔 숙박을 제외하면 30개 알베르게에서 숙박하게 된다. 알베르게는 순례자 숙박시설이다. 여기에는 시 또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와 민간 숙박업소인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 공립 알베르게는 숙박비가 대개 6유로 정도, 사립 알베르게는 10유로 정도다.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식사 제공이 없다. 사립 알베르게에 따라서 추가 부담으로 조식 또는 석식을 할 수 있다.
02: 호텔 조식을 제외하면 개인 비용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 생수, 간식비도 개인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알베르게는 대체로 주방 시설을 갖추고 있어 이용할 수 있다. 햇반과 라면, 밑반찬을 가져 오거나 현지에서 음식 재료를 구하여 식사하면 경비를 줄일 수 있다. 매식하려면 바르나 레스토랑에서 할 수 있다. 단품 메뉴를 사 먹을 수 있다. 순례자 메뉴라는 정식 코스도 있다. 10유로에서 14유로로 제공한다. 가격은 식당마다 다르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480만원을 여행사 측에 내야 했다. 나는 위의 조건을 따져 봤을 때 가격이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여행사에 대한 예약 신청은 거의 이루어진 상태였다. 다수 여행객이 신청했으면 그 비용이 적절하다고 다른 여행객들이 판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 고민 없이 신청했다.
12월 5일에 예약금 50만원을 보냈다. 이제 출발하는 4월 11일까지 5개월의 준비 기간이 남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준비 작업을 착실히 할 수 있었다. 우선 중단했던 스페인어 공부를 재개했다. 회화 중심으로 공부하려고 회화책을 샀다. 그간 해온 대로 산행 및 둘레길 트레킹을 꾸준히 했다. 그간 해어졌던 등산화를 새로 구입하여 길들였다. 그리고 박 선생님과 발 맞춰 보려고 강화도 나들길도 같이 걸어 보았다. 개인 비용은 여행사 권고대로 넉넉히 1,600유로를 준비했다.
2월 14일 여행사에 주관하는 미팅에 참석했다. 일정표 등 안내 유인물을 받고 여행사 측의 설명을 들었다. 여행사에서는 여행 책자, 손가방, 스카프 등을 선물로 주었다. 질의응답을 통해 이번 국제선 여행은 마일리지를 적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책자는 순례길 사전 공부에, 손가방은 순례길 걸을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3월 15일에 잔액 430만원을 송금했다. 3월 27일에는 ‘190411까미노’라는 단체 카톡방이 개설되었다. 이로써 여행에 대한 질의응답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순례 길에 챙길 물건 리스트를 작성했다. 복장, 배낭, 캐리어에 들어갈 물건을 따로따로 챙겼다. 이것저것 넣다 보니 캐리어에 들어갈 공간이 부족했다. 배낭은 매고 침낭은 들고 갔다. 내가 챙긴 물건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 챙긴 물건 리스트
복장(상의와 조끼)에 챙긴 물건
여권, 순례자 여권, 신분증, 지갑(여권 복사본, 사진), 유로화, 모자(캡) 휴대폰, 장갑, 수첩 및 필기도구 등
배낭에 넣은 물건
충전기(두 개), 연결선, 선글라스, 여행사에서 준 책자(분책1), 보온통과 물통, 수건(1), 무릎보호대, 의약품(지사제, 소화제, 아스피린, 밴드, 물집밴드, 티눈약, 침향, 후시딘, 연고, 파스 등), 양말(1), 티슈, 물티슈, 컵, 매트, 커피믹스(몇 개), 컵라면 1개, 티스푼, 젓가락, 머플러, 바람막이 옷 등
캐리어에 넣은 물건
스틱, 우산, 우비, 카메라, 실내화, 책자(분책), 회화책, 멀티캡, 손가방 등
의류에 양말(5), 반바지(1), 등산복(상의, 바지 두 벌씩), 티셔츠(2), 팬티(3), 장갑 등
세면도구에 치약, 칫솔, 비누, 세탁비누, 샴푸, 린스, 스킨, 빗, 선크림(2), 치간치솔, 면도기 등,
수건(2), 수저, 손톱깎이, 옷걸이(3), 챙 모자 등
음식물에 햇반(10개), 라면(5개), 컵라면(5개), 커피믹스(65개), 김치(8개), 볶은 고추장, 간식(사탕), 미숫가루 등
침낭(별도)
※ 침낭은 유용했다. 스틱과 우비도 꼭 가져가야 한다. 음식비를 줄이려면 햇반과 라면을 더 가져가야 했다. 옷은 더 줄여도 되었다. 지나친 감이 있다.
3. 기타 안내사항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본문은 일기 형식으로 썼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순례 길 날짜와 제목을 따로 붙였다. 서두에 준비 과정을 썼고 말미에는 전체적인 감상을 썼다. 본문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은 내가 쉽게 쓸 수 있어서였다. 길을 걸어가면서 그때그때 변화하는 길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기억하고 그 감상을 적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문화유산을 견학한 것도 아니고 순례 길을 그냥 걸어간 것이다. 과연 내가 쓸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그날그날 걸으면서 찍은 사진과 그날 일정을 정리한 메모는 있었다. 이것으로 일기를 쓰는 일은 가능했다. 전에 여행기를 썼던 방식대로 이번에도 그런 형식으로 썼다.
알베르게 벽에 붙여 있던 순례길 여행지도 사진을 첨부한다. 순례 길을 여기서는 까미노라고 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6개 코스가 있다. 그 중 우리가 걸은 길은 산티아고의 까미노다. 일명 프랑스 길이라고 한다. 천 년이 넘는 정통 코스다. 프랑스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간다. 그리고 스페인 북부 지방의 고원 지대를 걸어 산티아고까지 간다.
여행 지도를 보면 처음 출발지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우리가 간 첫 출발지는 위 코스, 즉 생장 피에 드 포르다. 종착지는 산티아고 데 콤뽀스텔라다. 도중에 0의 표시가 있는 곳은 통과 지점 명이다. 우리가 그 알베르게에서 숙박한 뒤 걸었다. 그 거리가 대략 800km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4월 11일(목) 출국하다
새벽 3시 반 알람이 울린 뒤 일어났다. 안사람도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 집을 나섰다. 안사람이 롯데백화점 앞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내가 4시 40분에 리무진을 타는 것을 본 뒤 안사람은 돌아갔다. 제2공항에 6시 20분에 하차했다. 박동문 선생님과 여행사 가이드 전일섭 부장을 만났다. 계약서 및 안내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발권을 했다. 박 선생님 캐리어 무게가 초과했다. 박 선생님이 가져 온 햇반 등 일부를 내 캐리어로 옮겼다. 그리고 로밍을 하러 SKT사에 찾아갔다. 한 달 간 5월 11일까지 39,000원에 약정했다. 이제 탑승하면 되었다. 면세점에서 특별히 물건을 구입하지 않았다.
오전 9시 5분에 에어프랑스 비행기는 이륙했다. 그리고 오후 2시 10분에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가 7시간이 난다. 두 끼 기내식을 했다. 프랑스
식과 한국식이 있는데 프랑스식으로 선택했다. 식사는 잘 나온 편이었다.
파리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니 ‘프랑스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한국어 팻말을 들고 인사하는 화면이 떴다. 이것도 기념이라고 생각하여 사진을 찍었다. 공항버스로 이동하여 국내선으로 환승했다. 4시 10분에 탑승하여 5시 35분에 바이리츠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윤익희 이사가 가져 온 차에 싣고 전용버스를 탔다. 가는 도중 구름이 희한하여 사진을 찍었다. 1시간 이동하여 7시 10분에 목적지인 생장에 도착했다.
생장의 열악한 숙소 사정으로 남녀 분산 투숙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라문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모텔 수준이다. 8시 10분에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 위해 식당에 모였다.
먼저 윤익희 이사, 전일섭 부장, 그리고 가이드 제니퍼 뤼의 인사가 있었다. 뤼는 우리나라 화교 출신으로 스페인 남자와 결혼한 뒤 스페인에서 사는 여자였다. 친절했고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그 뒤 단체 일원의 자기소개가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을 소개한 뒤 박 선생님과 같이 왔다고 말했다. 30명의 일행 중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다. 여자는 주로 50대, 남자는 주로 60대였다. 특이한 것은 7살 남자 어린이를 데리고 온 젊은 아버지가 있었다. 또 80살의 노인도 있었다. 그 다음이 70대 노인 그리고 나였다. 단체 중 내 나이가 세 번째로 많지만 내 아래로는 다 고만고만한 나이였다. 회식은 10시에 끝나고 숙소에 돌아왔다. 내일 조식이 7시 반이라고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탔다. 오늘 새로운 곳을 왔고 내일 당장에 순례를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람을 7시에 맞춰 놓았다.
4월 12일(금) 크레덴샬을 받다
푹 자고 5시 반에 기상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다. 거의 매년 그 날엔 안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 하지만 오늘은 타국에 와 있다. 안사람에게 전화 통화로 대신했다. 7시 반에 빵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9시 반에 다 같이 모였다.
숙소에서 가까운 순례자 사무소로 가서 끄레덴샬, 즉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그 첫 세요를 받았다. 기부금으로 3유로를 냈다. 기념으로 발급 받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거기 상자에 쌓여 있는 조가비도 기부금을 넣고 고른 뒤 내 배낭 뒤에 묶었다.
박 선생님과 함께 생장 마을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선 아랫동네로 가보았다. 내일 출발하는 곳을 미리 구경한 셈이었다. 풍경이 매우 좋았다. 돌아와 휴식을 취한 뒤 숙소에서 햇반과 컵라면으로 식사했다.
이번에는 윗동네를 돌아보기로 했다. 산성에 올라갔다. 하산해 인근 고등학교 교정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까르푸에 가서 내일 점심용으로 먹을 크로와상과 바나나를 구입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3시 반이었다. 쉬면서 휴대폰으로 국내 야구를 시청했다. 저녁도 햇반과 라면으로 식사했다. 내일 가져 갈 배낭을 꾸렸다.
밤에 문제가 발생했다. 샤워를 한 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그런데 드라이기가 불만 켜진 채 바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매캐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드라이기가 고장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또 하나의 드라이기가 놓여 있었던 것인데 나는 그것을 몰랐다. 박 선생님이 사장을 불렀다. 사장은 기구를 가져 와 연기 나는 드라이기를 빼내 수습했다.
4월 13일(토) 제1일차 피레네 산맥을 넘다
6시에 기상했다. 세면하고 보온병에 더운 물 넣은 뒤 배변까지 했다. 준비를 완료한 것이다. 이를 쓴 이유는 평소의 나의 습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7시 15분에 식사를 한 뒤 배낭과 캐리어의 짐을 꾸렸다. 캐리어와 침낭을 차에 실었다. 간단히 배낭만 맨 뒤 집합 장소로 떠났다. 8시였다. 34일간 대 장정의 출발 시점이었다. 마침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시계탑의 시계가 8시를 가리켰다. 나의 대장정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일행이 집합 장소에 모인 뒤 먼저 단체 준비 운동부터 시작했다. 시범은 원사 출신의 가이드 전일섭 부장이 보였다. 그분은 산티아고까지 우리와 함께 걸을 분이었다. 체조를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은 뒤 8시 반에 출발했다.
오늘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 첫 마을 론세스바예스까지 간다. 26킬로의 쉽지 않은 여정이다. 아침에 안개가 끼었지만 우리가 출발할 때는 밝고 맑은 날씨를 보여 주었다. 그 방향을 제시하는 첫 조가비 표지부터 사진을 찍었다. 동료인 박 선생님도 찍어 주었다. 기대가 찬 씩씩한 모습이었다. 산행 길은 아스팔트길로 완만했다. 이는 이미 책자를 통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가는 길에 주한미군이었던, 지금은 텍사스에 사는 미국인 부부를 만났다. 그는 한국을 잘 안다는 듯 우리나라 지명을 열거했다. 나이 70세라고 했다.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후 며칠 간 계속 여행지에서 그 부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도중에 아스팔트길이 흙길로 바뀌었다. 일행 사이 실력 차이가 나는 듯 선두와 뒤에 오는 사람들의 간격이 점차 벌어졌다. 박 선생님은 대화를 즐기기도 했지만 차차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가서 기다렸는데도 한참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선두와 거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혼자 가기로 마음먹었다.
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그리고 산 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10시 반에 오리송 대피소에 도착했다. 설산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도착해서 쉬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도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선두는 가버렸다. 나는 박 선생님을 기다렸다. 박 선생님이 40분 뒤에 왔다. 하지만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박 선생님도 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선두와는 1시간 이상 벌어졌다. 선두와 같이 가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그 이후는 박 선생님과 홍 교수라는 분과 함께 걸었다. 다시 아스팔트 길로 오른다. 길은 완만했지만 오리송 봉까지 거리가 상당히 길게 느껴졌다.
12시 40분에 오리송 봉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이 봉우리인 줄도 몰랐다. 그리 완만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이지만 여기서는 봉우리에 올라선다는 정복 개념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순례자가 걷는 순례길을 걷는 것. 그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오리송 봉 왼쪽 100미터 지점의 성모마리아 상 앞으로 갔다. 거기서 사진을 찍은 뒤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레이자 아테카 봉 옆을 돌아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흙길이었다.
2시 55분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르는 지점에 왔다. 눈길을 지났다. 내린 눈은 치웠나 보다. 눈은 한쪽에만 쌓여 있었다. 눈을 밟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흙길이 물기로 질척거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난데없이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전에 왼쪽 다리가 불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허벅지 부분과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왔다. 전에 없었던 현상이 나타났다. 내가 초반에 선두를 잡겠다고 오버한 것인가.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저 정상을 넘어야한다. 어쩔 수 없이 보폭을 줄였다. 천천히 올랐다. 그런데도 진땀이 났다. 드디어 정상인 콜 데 레푀데르(1450미터)에 올랐다. 4시 22분이었다. 역시 평범함. 그대로다.
하산 길은 가파르고 거칠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편하게 느껴졌다. 하산 길인데다 하산하면서 허리 통증이 완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웅대한 너도밤나무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동시몽의 언덕을 돌았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 론세스바예스가 보였다. 13세기에 지어진 산타마리아 콜레히아타 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났다. 지친 모습으로 관문을 열고 들어간 시각은 5시 35분이었다.
공립 알베르게 사무소 앞으로 찾아갔다. 여기서 숙박하려는 순례자들로 혼잡했다. 가이드 제니퍼 뤼가 와서 서류를 대행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여권과 끄레덴샬을 맡겼다. 그리고 먼저 미사 참석을 권유하기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숙박비 12유로는 이미 뤼에게 지불한 상태였다. 침대를 배정받았다. 호실에 들어가 보니 대 강당 같은 곳에 이층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묵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내 자리는 1층 침대였다. 일행들에게 내 허리 통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일행 중 약사 출신인 분이 약을 주셨다. 약의 효과를 믿으면 낫고 안 믿으면 낫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말을 했다.
오늘 무리한 것이 맞다. 9시간 걸었다. 걸음 수는 42,886보를 기록했다. 근간에 내가 9시간을 넘게 걷고 4만 보를 넘어 걸어본 적이 없었다. 기록적인 날이었다. 거기에다 초반에 오버 페이스를 했다. 이것이 허리 통증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렇게 허리가 아프면 순례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약에 의지하기보다는 걸어서 고친다는 생각을 갖자. 철저히 페이스 조절하면서 걷자. 그렇게 반성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8시부터라고 했다. 시장한데 식사 시간이 너무 늦다. 박 선생님이 식사 신청하지 말고 주방에서 밥을 해먹자고 했다. 나는 박 선생님 말에 따랐다. 박 선생님은 당신이 주방에서 준비할 터이니 나는 식당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다. 고마웠다. 햇반에 컵라면으로 식사했다.
여기는 오지다. 통신사도 연결이 안 되고 와이파이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할 일은 쉬는 것뿐이었다. 나도 누워서 허리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10시에 소등이 이루어지고 잠을 잤다.
4월 14일(일) 제2일차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다
5시 반에 기상했다. 준비를 한 뒤 7시에 출발했다. 알베르게를 나오면서 어제 제대로 찍지 못한 사무소 앞 알베르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오늘은 수비리까지 간다. 23킬로다.
박 선생님의 발걸음이 나에게는 빠르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어제 마음먹은 대로 내 페이스를 확실히 유지하며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확실히 허리가 아프니 통증이 다리로 내려갔다. 오른쪽 다리가 결 따라 아팠다. 디스크는 이런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바르에서 박동문 선생님이 기다려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출발했다. 산행에서 내가 늦게 올라갈 때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그리고 이내 같이 걸었다. 메스키리스봉을 지나 12시 50분에 에로봉(810미터)에 올랐다. 이 역시 평범한 봉우리였다. 오늘 길이 거칠지도 않고 완만했다. 오르내리막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론세스바예스(950미터)에서 수비리(540미터)까지는 내리막길이었다. 걷기 쉬었다. 페이스를 조절하고 허리를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2시에 수비리에 도착했다. 숙박지 찾는 데 중요한 표지인 다리를 먼저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우리는 목적지에 다 왔으니 점심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종업원이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한국어판 메뉴를 갖다 주었다. 한국 사람들이 근래 많이 온 효과인가. 주문이 쉬웠다. 돼지고기에 음료로 나는 콜라, 박 선생님은 맥주를 주문했다. 음식은 만족스러웠다. 내처 거기서 내일 먹을 빵도 구입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갔다. 숙박비, 저녁 식사비, 조식비 포함하여 29유로를 지불했다. 여전히 통신사 연결은 안 되었다. 와이파이로 안사람과 지인에게 사진 전송을 했다. 속도가 엄청 느렸다. 저녁에 먹은 식사는 점심 때 먹던 것보다는 못했다. 하지만 잘 먹었다. 허리 통증은 회복 조짐이 보였다. 왠지 약 효과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늘 내가 페이스를 잘 유지해서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왼쪽 어깨 통증이 시작되었다. 이는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방 차원에서 한의원도 다녔었지만 일종의 고질과 같았다. 어깨에 가져온 파스를 붙이고 잤다.
4월 15일(월) 제3일차 컨디션을 회복하다
6시에 기상했다. 카톡을 먼저 한 뒤 준비했다. 그리고 7시 반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빵과 우유, 커피 등등이다. 먹은 것 같지도 않지만 어제 잘 먹은 덕분에 괜찮았다. 식사한 후 출발하기 전의 모습이다.
8시에 출발했다. 마침 교회 종이 울린다. 우리의 장엄한 출발을 알리는 소리로 생각했다. 오늘도 페이스를 유지하며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목적지는 팜플로냐다. 거리는 20.5킬로다. 어제보다 거리가 짧다.
부르게테 마을을 지났다. 헤밍웨이가 여기 묵으면서 들렀다는 카페를 지났다. 오늘 구간의 반은 아르가 강과 교차되는 조용한 길이었다. 여기 흙빛도 어찌나 우리나라 흙빛과 같은지. 강둑에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어 그늘이 경관을 이루고 있다. 고향 어디 숲길을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중에 세요를 찍어주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가서 세요를 받았다.
세요란 우리말로 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면 순례증을 받을 수 있는데, 그간 경과 구간을 걸어왔다는 확인 도장이다. 보통 숙박지에 가면 세요를 찍어 준다. 그런데 세요는 숙박지에서만 찍어 주는 것은 아니다. 성당에서도, 식당에서도, 심지어 기념품 가게에서도 찍을 수 있다. 가게에서는 세요가 있다고 홍보하면서 장사하는 것이다. 사실 끄레덴샬에 세요 받을 칸이 많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숙박지 외에도 기념으로 세요를 많이 받으려고 한다. 나도 거기에 합류한 셈이었다.
이제는 걸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어제는 허리 통증이 오른쪽 다리를 타고 내려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허리뿐만 아니라 오른쪽 다리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회복이 되다니. 스스로도 놀랐다. 이로써 걸어서 고친다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용한 숲길을 지나 번잡한 팜플로나 도시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간 명확히 진로를 표시해 주던 까미노 표시가 도시에 들어오니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숙박지는 ‘알베르게 헤수스 이 마리아’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수와 (성모)마리아다. 공립 알베르게로 최근에 생겼다고 했다. 어제 공지에서 알베르게가 까떼드랄 맞은편 뒤쪽에서 찾으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까떼드랄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면서 걸었다. 도심을 한참 걸으니 멀리 까떼드랄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그곳을 향해 걸었다. 다리를 건너고 공원을 지났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알베르게 이름을 대면서 물어 찾아갔다. 우리가 찾는 알베르게는 장중한 벽돌 건물 안에 있었다. 숙박비는 9유로다.
자리를 배정 받은 뒤 식사하러 나갔다.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 거리를 돌다가 바르에 들어갔다. 정식 요리를 주문했다. 전채는 믹스 살라다, 메인 요리는 돼지고기, 후식으로는 콜라를 주문했다. 15유로였는데 식사가 잘 나왔다. 갈증이 나서 콜라 한 잔을 더 요청했다. 그런데 돈을 더 받지는 않았다. 단품 식사를 할 때와 달리 더 줄 수도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와 캐리어에서 햇반, 김치, 멸치를 꺼냈다. 저녁은 그것으로 식사했다. 가이드 뤼가 우리에게 먹어보라고 하몽 몇 조각을 잘라 주었다. 밤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피곤해서 까떼드랄에 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4월 16일(화) 제4일차 용서의 언덕에 올라서다
5시 반에 기상했다. 카톡 작업을 한 뒤 빵과 커피, 그리고 박 선생님이 가져온 마차를 마시고 출발했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로 간다. 25킬로다. 새벽에 출발하니 도심의 건물 사이로 불빛을 받아가며 걸었다. 어느덧 선두로 가는 순례자를 잃어버렸다. 우리가 선두가 되었다. 까미노 표지는 보이지 않는데 앞장서야 한다. 우리는 책임감을 느꼈다. 행인들에게 일차 목적지인 ‘용서의 언덕(alto de perdon)’의 위치를 물으며 걸어갔다.
마침 산책을 하는 노인 분을 만났다. 까미노 길을 물으니 따라 오라고 했다. 우리를 인도하면서 길 설명을 해 주었다. 옛 로마 길이라고 했다. 한참을 걸었다. 이렇게 오래 걸으면서 인도해 주시는 게 고마웠다. 노인이 우리 갈 길을 가리키면서 떠났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박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힐끗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었다. 행방을 물으니 사진을 찍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전에 뒤돌아보았던 곳까지 걸어갔다. 가보니 길 구조가 박 선생님이 길을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사잇길로 빠지지 않고 직진을 해도 우리가 갈 길과 만나기 때문이었다. 돌아와 보니 앞 언덕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박 선생님이었다. 추측건대 박 선생님은 직선 길로 앞질러 갔던 것이었다. 박 선생님 어깨엔 배낭이 없었다. 박 선생님은 박 선생님대로 나를 찾으러 배낭을 내려놓고 뒤돌아 왔던 것이었다.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페르돈 언덕으로 가는 길은 나무가 거의 없었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 시원한 하늘 보기 좋았다. 그 평원에 펼쳐지는 일자 구름 또한 멋있었다.
저 멀리 언덕에는 풍력 발전기들이 힘차게 풍차를 돌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대관령 풍력 발전기가 연상되었다. 도중에 가게를 만났다. 시장하여 사과 두 개를 샀다. 박 선생님과 하나씩 나눠 먹었다. 박 선생님도 시장했는지 나에게 잘 샀다고 했다. 박 선생님도 가게에 들어가 기념품을 사고 또 사과 두 개를 사서 그 중 하나를 돌려주었다.
드디어 페르돈 봉(790미터)에 올랐다. 힘든 길은 아니었다. 500미터에서 출발하여 300미터 정도 올라온 정도였다. 페르돈 봉은 조각가인 빈센테 갈베테가 철로 설치한 조각품으로 유명한 곳이다. 걷거나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순례하는 중세 순례자들 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한결같이 서풍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작품 중 한 곳에는 ‘별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가는 곳(Donde de cruza d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는 사전에 이를 알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전일섭 부장이 인증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제 우테르가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왼쪽 언덕에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받고 있지 않은 기념물이 있었다. 내려가기 전에 거기에 가보았다. ‘잊지 마시라(no os olvidaros)’라는 글씨가 새긴 비가 중앙에 서 있고 이름이 새겨진 비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순례자 비보다는 이 비가 용서의 언덕의 의미와 더 부합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느 책자나 글에서도 그 기념비에 대해서 관심을 표했거나 설명한 것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나중에 책자를 찾아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설명을 드리지 못해 아쉽다.
우테르가로 내려가는 길은 나에게 쉬운 길이었다. 나는 하산은 쉽게 생각한다. 우선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길은 조심해야 했다. 경사가 심하고 울퉁불퉁한 자갈로 꽉 찬 길이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여기서 무릎을 다치거나 발가락 부상을 입는다고 한다. 박 선생님도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내려올 때 입은 발가락 부상이 아물기도 전에 여기서 또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우리는 우테르가 마을에 내려와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순례자 메뉴 10유로로 식사했다. 그리고 길을 떠났다. 나는 컨디션이 완전 회복된 것 같았다. 더 이상 허리통증이 없고 오른쪽 다리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낮 최고 온도가 19도라고 했는데 더 더운 것 같았다. 맑은 날씨에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정말 여기 와서 미세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러운 것이 미세먼지 없는 푸른 하늘과 천변만화하는 구름 모습이었다. 볼 풍경이 없으면 그저 하늘만 바라보아도 좋았다.
그렇게 가는데 누가 뒤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옆에 난 까미노 길로 안 가고 똑바로 내려가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사실 여기 까미노 길 표지는 무척 잘 되어 있었다. 내가 표지를 못 본 것은 일단의 사람들이 까미노 표지 앞에 서있어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여기 순례 길에서는 동료든 모르는 사람이든 까미노 길을 잘못 든 사람들에게 길을 잘 지적해 준다. 고마움을 느꼈다.
다시 오르막길이었다. 더위를 느껴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졌다.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보니 한 소년이 순례자들에게 찬 음료를 제공하며 기부제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상에는 세요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음료 한 잔을 마시고 세요를 찍었다. 1유로를 기부했다.
숙소에 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렇게 늦은 것은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오르막길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초반에 길을 잃었고 서로 찾다가 지체한 영향이 컸다. 조식을 포함하여 숙소비로 13유로를 지불했다. 오늘 처음으로 2층 침대를 쓰게 되었다. 손빨래를 한 뒤 샤워했다. 안 사람에게 카톡을 하고 사진도 전송했다. 저녁은 햇반과 컵라면, 김치, 멸치로 먹었다.
4월 17일(수) 제5일차 미국인 부부와 사진을 찍다
5시에 기상했다. 일찍 자리에 누웠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출발하느라고 부산을 떤 것이 원인이 크다. 카톡 작업을 한 뒤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7시에 출발했다. 오늘은 에스떼야로 간다. 22킬로다. 아직도 길거리는 어두운데 새벽에 출발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며 걸을까. 박 선생님과 둘이 나오는데 어느 할머니가 스틱을 박 선생님에게 스틱을 건네주었다. 박 선생님은 키가 크다. 누가 스틱을 잃어버렸거나 놓고 간 것인데 그 할머니는 그 주인이 박 선생님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스틱이었다. 박 선생님은 이를 받았다. 기념물로 생각한 것 같았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여왕의 다리라는 뜻이다. 어제 이를 보지 못했으니 오늘은 보고 건너야 할 것이었다. 먼저 거리의 안내 지도를 보고 가는 방향을 정했다. 초입에 많은 사람들이 다리로 가는 길을 몰라 우리 뒤를 따라 왔다. 곧 다리 앞으로 왔다. 아름다웠다.
기록에 의하면, 레이나 다리의 원래 명칭은 아르가 다리였다. 산초 3세의 부인인 도냐 마요르를 기려 왕비의 다리로 개명되었다. 왕비는 점점 큰 폭으로 늘어나는 중세 순례자들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 동안 이 다리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주변 풍경도 찍었다. 다시 출발했다. 나무가 별로 없고 쉴만한 곳도 적은 길이었다. 완만한 경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운데 농지와 포도밭을 지났다.
마녜루 마을을 지나다가 미국인 부부를 또 만났다. 첫날 순례 길에서 만난 미국인 부부였다. 우리와 일정이 같은 듯 계속 하루에 한 번은 보았다. 멀리 지나가면 소리쳐서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했었다.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우리 일행이 같이 찍자고 사진 안으로 들어왔다. 얼결에 사진을 찍었다. 그분 사진기도 달라고 해서 찍어 드렸다. 박 선생님에게 나도 그분들과 같이 찍어 달라고 했다. 그런 내가 약간 멋쩍었다. 그런데 그분이 친근히 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각자 제 페이스로 순례 길을 떠났다.
시라우키 마을에 왔다. 이어 로마다리를 건너 로르카 쪽으로 걸어갔다. 이 길은 전형적인 로마 길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거의 자연적으로 생긴 오솔길이다. 도중에 돌멘으로 가는 길도 표시가 있는데 까미노 길이 아니어서 가지 않았다. 다시 걸어 이란수 작은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 비야투에르타에 왔다. 다리 건너편 14세기 건축물인 성모 승천 성당이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걸었다.
에스떼야는 스페인 말로 별이라는 뜻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별의 길’과 연관 지어 에스떼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안내 표지에는 에스떼야와 ‘리사라’라 병기되어 있었다. 리사라는 나바라주의 바스크어라고 한다.
1시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였다. 6유로를 냈다. 1층 침대를 잡았다. 점심은 햇반과 컵라면으로 때웠다. 휴식 후 시내 구경하러 나섰다. 다리를 건너 첨탑이 있는 웅장한 성당에 올라가 둘러보았다.
이어서 중앙광장에 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다. 정식을 주문했다. 모처럼 전채에 수프를 시켜 먹었다. 그리고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놀이기구를 타며 놀고 있는 소녀를 만났다. 예쁘다며 사진을 찍었다. 그 옆에 어머니가 있었다. 우리가 귀여워 하니까 좋아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쉬면서 며칠간의 걷기 성과로 통신비 할인 신청을 했다. 내일 우천 예보가 있었다. 그간 어깨 통증으로 배낭에는 최소한의 물건만 들어 있었다. 늘 갖고 다니던 약품과 충전기도 빼고 다녔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배낭에 우비를 챙겨 넣었다.
4월 18일(목) 제6일차 처음으로 비를 맞다
5시 반에 눈을 떴다. 햇반과 김치 등으로 아침을 먹은 뒤 7시 1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로스 아르꼬스까지 간다. 21.5킬로다. 가는 도중에 대장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들른 김에 거기서 조가비 목걸이를 샀다. 4유로나 했지만 기념으로 샀다. 세요도 찍었다.
이라체로 갔다. 여기서는 포도주를 공짜로 한 잔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은데 벽에 나와 있는 수도꼭지에서 포도주는 나오지 않았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사진만 찍고 길을 나섰다. 후문에 의하면, 9시 이후에 들른 순례자들은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것도 시간에 따라 나오는 모양이다.
도중에 순례길을 걷는 두 아가씨를 만났다. 둘이서 재잘거리며 걷고 있고 배낭 없이 가벼운 보따리만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서 집에 돌아가는 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상당히 먼 길을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그래서 말을 붙여 보았다. 대학생이라고 했다.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까미노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배낭도 없이 어떻게 산티아고까지 가느냐고 했더니 인근 도시까지만 간다고 했다.
예보대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비를 맞으니 난감했다. 박 선생님은 바로 우비로 갈아입는데 나는 그러기는 싫었다. 저편에 있는 나무 아래서 갈아입고자 했다. 빠른 걸음으로 나무 밑으로 가서 우비를 꺼냈다. 그런데 우비가 배낭에 걸려 팔이 잘 끼워지지 않았다. 지나가던 순례자가 재빨리 다가와 돕겠다고 했다. 그분의 도움으로 우비를 잘 입을 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는 했지만 그분은 할 도리는 했다는 듯이 바로 그 길을 떠났다.
차츰 이슬비는 그쳤다. 우비를 배낭에 도로 집어넣었다. 흐린 날씨 속에 걸었다. 1시 10분에 ‘카사 데 라 아부엘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할머니의 집이라는 뜻이다. 오늘은 남녀가 분산하여 숙소에 들었다. 마을 규모도 작고 숙소 규모도 작아서 그런 것 같았다. 조식을 포함하여 15.5유로를 냈다. 1층 침대를 차지했다. 비가 와서인지 숙소 안이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로비에 놀랍게도 미국인 부부가 와 있었다. 우리같이 다인실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같은 숙소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그 부부를 만나지 못하였다. 일정이 다르게 전개된 것 같았다. 연일 만나다가 갑자기 연이 끊어져 버렸다. 인생사에 그런 일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식으로 헤어진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점심은 햇반과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식후 카톡 작업도 하고 샤워도 하고 손빨래도 한 뒤 쉬었다. 6시 지나 둘이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작은 마을이었다. 광장에 있는 식당에 갔다. 식당에 손님이 많이 와 있었다. 소위 맛집인 곳이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빠에야 믹스타를 먹을 수 있었다. 12유로를 주었다. 가게에 들러 사과 한 개를 구입한 뒤 돌아왔다. 가이드가 내일 저녁 식사는 미리 신청해야 한다기에 신청했다.
4월 19일(금) 제7일차 부활절 행사를 보다
5시 반에 기상했다. 준비를 한 뒤 아침을 먹었다. 아침상이 초라했다. 오늘 로그로뇨까지 간다. 28.5킬로다. 비교적 먼 거리였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비를 착용한 뒤 출발했다. 이슬비 같은 비였다.
도중에 돌탑을 쌓아 놓은 곳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처음 보는 풍경이라 사진을 찍었다. 차츰 비가 그쳤다. 우비를 배낭에 넣었다. 12시에 비안나에 도착했다. 경찰관이 서있고 마을에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조금 번화한 거리였다. 여기는 유명한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는 곳이었다. 오전 부활절 행사 관계로 대통령이 여기 산타마리아 성당에 방문했다고 했다. 그래서 인파가 많았고 경찰관이 서있었나 보다. 우리는 늦게 도착해서 대통령은 보지 못했다. 일행이 보내 준 카톡 사진으로 그런 줄 알게 되었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은 후 산타마리아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세요를 받았다. 다시 출발하여 2시 20분에 주 경계를 넘었다. 이제 나바라 주와는 결별하고 리오하 주로 입경했다. 까미노 표지 디자인도 좀 달라진 것을 알겠다.
오늘 목적지인 로그로뇨 시에 도착했다. 큰 다리를 건너니 알베르게가 바로 골목길에 있었다. 3시 15분이었다. 저녁 식사 포함하여 27유로를 지불했다. 1층 침대를 사용했다.
내일 사설 숙박지에 2인실이 있다고 하여 신청했다. 그런데 회사 측에서 다시 차례를 정하겠다고 하여 신청을 취소했다. 물건 정리를 마친 뒤 박 선생님과 외출했다. 슈퍼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문 닫았다고 했다. 그 대신 가게에서 사과 두 개와 물 한 병을 구입했다.
오늘이 부활절이다. 숙소로 돌아오던 중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절 행사를 보았다. 엄숙한 분위기의 행사였다. 한참 동안 참관하고 사진을 찍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다리 앞으로 가서 산책하기로 했다. 다리가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은 뒤 숙소로 돌아 왔다. 숙소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닭조림이 메인 요리로 나왔지만, 우리나라와 조리법이 다른 탓인지 맛은 별로 없었다. 샤워한 뒤 일찍 자리에 누웠다.
4월 20일(토) 제8일차 박 선생님 분투하며 걷다
5시 15분에 기상했다. 카톡으로 오늘 윤기봉 선생님의 자제 결혼식에 축하 인사를 전했다. 아침은 햇반과 컵라면으로 먹었다. 6시 반 일찍 출발했다. 오늘 나헤라 공립 알베르게까지 간다. 거리가 29.5킬로다. 선착 순 자리 배정이라고 했다. 회사 측에서는 별도 숙소에 2인룸 세 개는 순번대로, 3인실과 4인실의 7명은 몸이 불편하신 분과 걸음이 느리신 여성분으로 정한다고 공지했었다. 우리는 빨리 가는 것이 수였다.야경을 뒤로 하고 교외로 나서니 저수지였다. 낚시하는 모습도 보였다.
언덕바지로 올라갔다. 멀리 저수지가 보였다. 박 선생님과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을 기다렸다가 같이 걸었다. 또 간격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박 선생님이 발가락을 다친 데 기인한 바 컸다. 나는 걸음 빠른 다른 분과 같이 걷게 되면서 간격은 다시 벌어졌다.
도중에 순례자 병원의 유적을 보았다. 중세에 순례 길을 걷는다는 것은 험악한 일이었다. 그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순례자들을 위하여 재우고 치유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병원의 유적이었다.
벤토사 입구에 도착했다. 이 지점은 마을로 돌아가는 길과 직접 나헤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박 선생님이 어느 길을 택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안내판 앞에서 한동안 기다렸다. 마을로 들어가기로 했다. 쉬기도 해야 했고 점심때가 되었기에 박 선생님이 식사하러 마을에 들어올 줄로 판단했다.
식당에 들어가 식사부터 했다. 윤 이사가 마을에 들어왔다. 박 선생님에 대해 물었더니 나에게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숙소로 갈 것을 권고했다. 그 권고를 받아 들여 출발했다.
한참을 걸어 나헤라 근교까지 왔다. 멀리 박 선생님과 홍 교수가 같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물어 보니 그 전 카페에서 쉬었고 너무 늦어져 지름길을 택했다고 했다. 더 기다리겠다는 내 생각이 틀렸고 윤 이사의 권고가 맞은 셈이었다. 박 선생님은 발가락이 아파서 한쪽의 등산화를 벗고 슬리퍼를 끌고 있었다. 분투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숙소는 나헤라 시내에 들어와서도 다 온 것이 아니었다.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내려가서 걸으면 숙소가 있다고 공지했었다. 행인들에게 다리 있는 곳을 물어 숙소에 찾아갔다. 오늘 더운 날씨에 그늘도 없어 힘들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을 기다리는 시간도 마음을 힘들게 했다. 숙소 입실이 선착순이라서 그랬다. 이제 숙소에 찾아 왔으니 되었다.
알베르게에 3시 15분에 도착했다. 나헤라 공립 알베르게 등록은 세 시부터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기다리니 2시 반부터 등록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 역시 긴 줄을 한참 기다리다가 등록했다. 5유로를 냈다. 숙소 상황은 강당 안에 이층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들어가서 둘러보니 1층 침대는 이미 다 차 있었다. 2층 침대에서 자야했다. 박 선생님과 2층 한자리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초콜릿과 차를 마시고 쉬었다. 카톡 작업을 하며 좀 쉰 뒤 외출했다. 먼저 슈퍼를 물어 찾아갔다. 규모가 큰 슈퍼였다. 거기서 빵, 사과, 자두, 음료수 등을 샀다.
오늘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아갔다. 어제 가이드 뤼가 잘하는 고깃집이 있다고 소개했다. 우리는 오늘 뒤늦게 신청했었다. 뤼는 우리가 그냥 식당에 와도 될 것이라고 했다. 7시 반 시간이 되어 식당 문이 열렸다. 우리 순례자만 20명이 넘는 것 같았다. 홀에 가득 찼다. 우선 세 테이블로 나눠 앉았다. 테이블 당 식사 주문하고 계산도 그리하기로 했다. 나는 윤 이사, 전 부장, 가이드 뤼, 이성헌 부자, 홍 교수와 박동문 선생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와인을 좋은 것을 시키고 쇠고기도 한 번 더 시켜 먹었다. 오랜 만에 소고기로 포식했다. 그 결과 우리 테이블은 30유로의 거금을 냈다.
4월 21일(일) 제9일차 여행자 단체도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6시 40분이 지나 일어났다. 짐 정리를 하고 어제 슈퍼에서 산 과일과 빵 그리고 커피로 아침을 대신했다. 7시 반에 출발했다. 오늘은 산토 도밍고로 가는 날이다. 예정대로 숙박지는 빠라도르 호텔이다. 거리도 21.5킬로에 불과했다. 빨리 걸을 필요가 없어 천천히 걸었다.
도중에 언덕받이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넓은 평야를 걷는 길이었다. 날씨가 흐려서 나무 그늘이 없었어도 그다지 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박 선생님과의 거리가 차츰 벌어져 한동안 홍 교수와 걷기도 했다. 이제 홍 교수와도 거리가 멀어졌다. 전일섭 부장과 한동안 같이 걸었다.
언덕받이에 올라 박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다시 출발했다. 도중에 골프장이 보였다. 어제 공지에서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한 뒤 호텔에 입실하기를 권고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내처 혼자 걸었다.
산토 도밍고에 12시 40분에 도착했다. 일찍 도착한 일행들이 물건을 들고 호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남아 먼저 슈퍼에 들른 듯하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다른 여행객들은 이런 일행들을 보고 일찍 자리를 선점하려는 욕심이라고 폄하들 하였다.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로서도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었다. 일찍 나서면 한적한 길을 걷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밤길에 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 역시 새벽에 플래시를 켜고 산행한 적은 있었다. 시간 단축의 의미도 있었지만 그것은 산에 올라가서 일출을 보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은 이런 행동에 자부심이 있는 듯 끝까지 똘똘 뭉쳐 그런 행동양식을 보였다.
마침 여기에서도 부활절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한참 행사를 지켜보았다. 행사가 끝난 뒤 호텔에 들어갔다.
오늘 우리가 묵을 빠라도르 호텔은 병원 유적지를 리모델링한 스페인 국영 고급호텔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웅장한 건물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방 청소가 다 되기를 기다려 입실했다.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그 시간에 카톡을 했다. 박 선생님이 왔다. 청소가 다 되었다고 하여 입실했다. 우선 캐리어를 꺼내 짐 정리부터 했다. 캐리어에서 라면을 꺼내 점심을 라면으로 때웠다. 그리고 그간 하지 않았던 빨래를 했다. 양말과 수건 그리고 상의도 손빨래했다. 새 옷을 꺼내고 빨래하기 힘든 옷은 캐리어에 그냥 집어넣었다. 확실히 호텔에서는 와이파이 속도가 빠르다. 어제 날짜의 동영상을 제작하여 가족, 뱀띠, 서초고, 동사모, 국어과 동기 등에 전송했다. 제목을 ‘4월 20일 순례길 스토리’라고 붙였다. 그 후에도 일관되게 동영상 제목을 그런 식으로 붙여 전송했다. 8시 20분에 다시 로비에 모였다. 식당에 들어가 오늘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만찬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첫날 생장 말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일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뒤 9시 50분에 입실했다.
간밤에 일행 중 한 분이 숙소에 대한 불만을 카페에 게시했다. 왜 빨리 숙소에 도착한 사람은 나쁜 숙소에 배정하고 걸음 느린 사람들에게 좋은 숙소에 배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어제 숙소에 대한 이야기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배려가 필요로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다 같이 사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식 카톡에 비난하는 글을 게시한 것이었다. 이것도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을 떠나서 일단 비난하는 글을 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단체 여행객 무리도 아웅다웅하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4월 22일(월) 제10일차 동영상을 까미노 카톡에 게시하다
7시 20분에 기상했다. 이렇게 늦게 일어난 것은 오랜 만이었다. 알람을 하지 않고 잤다. 둘이서 오랜 만에 안락한 침대에서 자다보니 시간이 늦어지게 된 것이었다. 7시 반부터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서둘러 내려갔다. 윤 이사를 식당에서 만났다. 개별적으로 따로 만난 것은 아니었다. 간밤에 윤 이사는 답변을 카톡에 점잖게 올렸다. 나는 굳이 윤 이사를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태도로 그를 대했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식사도 해야 했지만 짐도 잘 챙겨 가지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야 했다. 식사를 마친 뒤 부지런히 짐을 챙겨 가지고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거의 마지막에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8시 반에 출발했다.
오늘은 벨로라도까지 간다. 23킬로다. 박동문 선생님이 출발할 때 나는 어제 찍지 못한 호텔 등 성당 사진을 찍느라고 지체했다. 박 선생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박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다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싣고 있는 전 부장에게 갈 길을 물었다. 그 방향이었다. 그래서 박 선생님을 뒤좇아 가려고 뛰어갔다. 중간에 공사 중으로 길을 막은 곳이 있었지만 지나쳤다. 그리고 골목길을 나와서 둘레를 보고 뒤도 자주 돌아보았지만 박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가다가 여러 차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다.
그라뇬 마을에 도착해서 쉬었다. 나는 일행에게서 박 선생님이 뒤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 토마토를 얻어 시장기를 면했다. 박 선생님이 왔다. 그간 자초지종을 물으니 공사하는 곳에서 박 선생님은 좌회전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급히 뛰어가느라고 좌측 골목길을 살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이미 시간은 점심때가 되었다. 그런데 주변에 레스토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하려고 박 선생님과 레스토랑을 찾아 길 건너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식당은 폐점이 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숙소까지 주린 상태로 걸어가야 했다.
마을에 들어왔다. 숙소는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아가야 했다. 건물 벽에 멋진 벽화가 있었다. 2시 25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위의 해프닝이 있었고 그라뇬에서 많이 기다렸기에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
남은 것은 2층 침대뿐이었다. 알베르게 숙소는 초라한 편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뒷마당에 수영장이 있었다. 시장해서 점심부터 해결해야 했다. 밖으로 나가 순례자 메뉴로 식사했다. 11유로였다. 4월 20일자 동영상을 까미노 카톡에도 게시했다. 윤 이사가 멋진 영상이라고 화답해 주었다.
휴식 후 마을을 둘러보았다. 슈퍼에 들러 과일 등 간식을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오늘 날짜 동영상을 만들었다.
4월 23일(화) 제11일차 내 살찐 모습을 확인하다
5시 20분에 기상했다. 준비를 한 뒤 햇반과 멸치, 고추 등으로 식사했다. 고추가 추가되니 훨씬 먹기에 나았다. 마차, 커피를 마신 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아헤스에 간다. 거리는 28킬로다.
비가 올 수 있으니 우비를 준비하라고 했다. 도중에 일본인을 만났다. 대학생이냐고 물으니 금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일본인들은 사실 그리 보이지 않았다. 이미 많이 이곳을 다녀간 듯하고 이제 개별 여행 수준으로 다니는 듯하다. 다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인은 없었다. 타이완인, 인도인은 본 적이 있다. 여기서 본 아시아 사람이란 한국인들이었다. 우리 같은 50,60대 나이의 단체 여행객도 있지만 젊은이들도 꽤 많았다. 이렇게 된 요인으로는 산티아고 길 홍보 매스컴 영향, 한국인의 쏠림 현상, 기독교인이 많다는 등 여러 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우리 단체만 보면 30여 명 중 가톨릭 신자는 두 명, 신교는 열 명 정도였다. 그리고 각기 사연은 다르지만 산행 및 해외여행을 자주 한 사람들이 많았다. 겉으로 어수룩해 보여도 이미 해외 각지 여행을 이미 섭렵한 사람들이 많았다.
각설하고 박 선생님과 같이 걸었다. 박 선생님은 나보다 햇반을 많이 가져왔다. 김, 멸치, 고추장도 가져왔다. 무엇보다 전기솥과 그릇을 가져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햇반을 끓이고 식사한 뒤 설거지 하고 그릇을 챙겼다. 덕분에 나는 아침이나 저녁을 잘 챙겨 먹을 수 있었다. 박 선생님은 그런 당신의 수고에 대해 좌화자찬하면서 그 덕분에 내가 여기 와서 많이 살쪘다고 했다. 나는 박 선생님의 수고를 인정하면서도 과연 그럴까 생각했다. 그럼 한번 내 모습을 확인하게 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실 나는 내 자신의 사진은 잘 안 찍는 편이었다. 내 필요에 의해 한두 군데 인증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 사진을 보니 놀라웠다. 내가 봐도 얼굴이 포동포동해져 있었다. 20일 날 소고기 식사를 하긴 했지만 그날 식사로 된 얼굴이 아니었다. 햇반과 멸치, 라면 등으로도 이렇게 살찔 수가 있다니. 그것이 놀라웠다. 박 선생님의 수고를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단 세 끼 잘 먹고 잘 걷고 잘 잤다. 삼박자가 맞아서일까. 그간 오로지 걷는 데에만 집중하고 세사,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단순한 생활에서 온 것일까. 국내에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은 내가 타지에서 고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터인데 이런 나의 모습이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나 스스로도 신기했다.
어제 예보된 대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비를 착용했다. 길이 촉촉이 젖었다.
도중에 바르에 두 번 들르면서 커피를 서로 사주었다. 바르에서 어제 구입한 주스, 토마토, 사과를 먹었다. 비는 그쳤다. 12시 45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여기는 통신사 연결도 안 되고 와이파이도 잘 안 되었다. 사진 한 장 정도만 카톡에 겨우 올렸다.
잠시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하늘이 그리 청명할 수 없다. 구름이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림 같다는 표현이 맞다. 마을은 초라했지만 대자연은 위대했다. 저녁을 사먹은 뒤 숙소에 돌아왔다. 카톡은 하지 못하고 물건 정리하고 하루 일정을 메모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잤다.
4월 24일(수) 제12일차 엘시드 장군의 고향 부르고스에 오다
5시 반에 기상했다. 아침을 컵라면으로 가볍게 때우고 준비를 마친 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부르고스로 간다. 23.5킬로다.
평지를 한참 걷다가 오르막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출을 언덕에서 맞이할 수 있을 듯싶다. 언덕에 오르면서 굽이마다 쉬어가며 뒤를 돌아보며 일출 사진을 찍었다.
고원 평지를 지나 내리막길이었다. 바르에서 커피 한 잔 한 뒤 계속 걸었다. 예보대로 바람과 눈비가 내렸다. 우비를 착용했다. 이슬비지만 비는 지속적으로 내렸다. 두 번째 바르에서 잠시 쉬다 다시 출발했다. 이제 부르고스 도심지로 들어섰다.
부르고스는 엘시드 장군의 고향이다. 엘시드는 스페인 기독교 재정복 운동의 명장이다.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발렌시아를 정복했다. 부르고스는 산업단지가 형성돼 있는 대도시였다. 도시 입구로 들어와 어느 새 한 시간 정도를 걷고 있다.
오늘 숙소는 까떼드랄 뒤편에 있다고 했다. 목적지는 단순하고 방향도 분명했다. 거리에는 시내버스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행인들은 그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우리는 빗속에서 까떼드랄 표시가 있는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드디어 까떼드랄 표시가 보였다. 엘시드 장군 동상도 보았다. 비가 오고 주변에 버스와 자동차가 지나고 있어 동상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까떼드랄이 어디 있는지 표시가 안 보였다. 행인에게 물어보니 우리가 온 다리 반대편 쪽에 있다고 했다. 과연 그랬다. 그쪽으로 가는 가로수 길이 멋있었다. 까떼드랄 경관도 멋지게 보였다. 이윽고 까떼드랄의 웅장하고도 화려한 모습이 나타났다. 인근의 조각상 사진도 찍었다.
까떼드랄 뒤편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11시 50분이었다. 12시부터 등록을 시작한다고 했다. 알베르게 입구에는 등록을 하려는 순례객의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 긴 줄 속에서 상당 시간을 기다려 등록했다. 숙박비로 6유로를 냈다. 나헤라 숙소와는 달리 규모가 크고 시설도 훨씬 좋았다. 비 내리는 칩칩한 상황이 기분 괜찮은 쪽으로 바뀌었다. 나는 1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박 선생님은 내 2층 침대에 배정받았다.
박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웬 한국 젊은 처녀가 조용히 해 달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박 선생님이 저희들은 큰 소리로 이야기 해놓고 버릇없이 말하느냐고 나무랬다. 나중에는 박 선생님도 참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아 말싸움은 그만두게 되었다. 오늘 비가 내려 불쾌지수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참는 것이 최선이다.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어제 보내지 못한 사진 등을 보내느라고 카톡 작업을 열심히 했다. 어제 내 모습을 찍은 사진도 카톡으로 전송했다. 나는 내가 신기해서 전송한 것인데 상대방에게는 이런 나의 모습이 일종의 배신감으로 작용한 듯했다. 나의 살찐 모습과 며칠 전 쇠고기 영상을 연관지은 듯 비난하는 어조의 답글이 왔다. 나도 그 글을 읽으니 기분이 언짢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살찐 내 모습도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것이 가장 나의 건강에도 좋은 일일 터인데. 그래서일까. 점심은 먹지 않았다. 빵과 사과 그리고 바나나 등 간식으로 때웠다.
내가 카톡에 몰두하고 있을 때 박 선생님이 부르고스 성당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나는 나중에 가겠다고 했다. 가서 보고 온 박 선생님이 성당 안에 들어가 보기를 아주 잘했다고 말했다. 부르고스 성당에 언제 또 가보겠는가. 게으른 나의 생활 태도가 스스로 못마땅했다. 가이드 뤼는 부르고스 식당엔 어린 양고기 요리인 레츄가가 맛있다고 했었다. 저녁이 되어 박동문, 홍교수와 함께 레츄가를 맛보러 나갔다. 그런데 그런 요리 전문점이 따로 있는 듯. 레츄가를 파는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인근의 그럴듯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저녁 식사 시간인 7시 반에 개시한다고 했다. 그 시간이 될 때까지 거리를 다니며 아이쇼핑을 했다. 나는 약국에 가서 어깨 통증에 붙일 파스를 샀다. 5유로나 했다. 시간이 되어 그 레스토랑에 찾아갔다. 역시 레츄가는 없다고 했다. 정식 메뉴로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뒤 바르에 가서 내일 먹을 빵, 사과, 바나나 등을 구입했다.
숙소에 가이드 뤼가 이별 인사하러 왔다. 뤼는 까미노 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그간 우리에게 친절하고 상냥히 대했다. 내가 옆에서 듣기에도 부드러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더 같이 있고 싶은 분이었다. 사는 곳이 우리가 앞으로 지나갈 까미노 길에 있으니 순례 길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자기 전 오늘 약국에서 산 파스를 꺼냈다. 봉지 안에 예상과 다르게 단 한 매만 들어있었다. 약사는 작은 것이라고 했지만 양쪽 어깨를 감싸는 큰 파스였다. 등에 부착한 뒤에 잤다.<계속>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상세한 기록이 여행을 앞둔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을 통해서 더 느껴보실 수 있는데.
그 점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