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Ⅲ. 남해경교수 순례이야기
중앙주교좌성당이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모두의 바람이 담겼다. 그것은 천주교 신앙인이 아닌 남해경 교수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찰건축, 서원건축, 교회건축, 성당건축 등 종교건축의 여러 면모들을 두루 살펴보고 심사하던 남해경교수는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는 않았지만 종교건축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아는 지경에 다다랐다. 종합예술인 종교건축이 담고 있는 음악과 미술은 물론, 거기에서 펼쳐지는 기도와 예식과 함께, 때로는 보다 더 깊이에서의 심성과 영성을 보며, 루돌프오토가 말하는 '거룩함[DasHeilige]'을 느끼기도 한다. 중앙주교좌성당의 경우 남해경교수는 무엇을 느껐을까. 일반인이라면 기둥이 없는 탁 트인 공간을 볼 것이다. 그런 점은 건축공학자인 남해경교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연유로 그렇게 한 것일까. 여기까지 다가가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인 바닥 너머와 벽면 너머와 천장 너머를 꿰뚫어보고 '그것이 그래서 그랬군.' 하고, 성당을 짓던 시절부터의 얘기들을 담아 퍼즐을 맞춰 사연들을 꿴 후 '그것이 그렇게 그렇군.' 하며 깊은 이해로 다가간다. 홀로로서의 인루[Human]를 넘어 더불어의 인류[HumanE]로 가되, 동물과 식물은 물론 미물, 그리고 바람과 햇빛도 오감을 열어 받아들이며 '그래서 그것이 그거다.' 하는 지경으로 나아간다. 중앙주교좌성당을 시작으로 펼쳐내는 남해경교수의 순례이야기는 이제 영점[ZeroPoint]인 중앙으로부터 전북으로까지, 그리고 전국으로까지, 덧붙여 세상으로까지 나가며 종교건축의 진면모를 이렇게저렇게 비교하고 넘나들며 풀어낼 것이다. 물론 문학가도 예술인도 그렇듯 설계자와 건축가가 말하며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해석은 자유롭고 영감은 신비롭다.
전북지역의 성당건축은 동굴서부터 오늘에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미사굴, 블랑굴, 성지굴 등 박해시대에는 크고작은 굴이 은신처이자 생활처였다. 그러다가 점차 돌담의 움집 형태를 띠게 됐다. 비교적 최근까지 천호의 어름골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아직 종교의 자유가 있기 전까지는 공소가 신앙공동체의 기도공간이었다. 옹기가마, 한지지소 등 작업공간에 이동식 십자가만 놓으면 신앙공간이 된 것이다. 이는 일본 가쿠레기리스탄 시절의 작업공간이라든지 시츠공동작업공간 등에서 살필 수 있는 양상과 비슷하다. 종교의 자유 직후에도 언제 다시 박해의 시절로 회귀될지 모르는 까닭에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공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초가, 기와 등에 많은 경우 공소회장이 내놓은 공소회장댁 정도가 공소로서의 구실을 한 것이다. 능교, 어은, 수분, 신성, 천호, 태인, 두동, 구장, 황금 등의 공소가 그러하다. 점차 어은, 되재 등에서처럼 예비공간과 신자공간의 구분이 나타나고, 차츰 용마루 끝, 처마선 끝 등에 십자가와 십자기와 등이 성당임을 알리는 표시로 작용한다. 종교의 자유가 완연해지자 보다 뚜렷하게 용마루 끝에 십자가를 세우거나 첨탑을 세움으로써 성당임을 알리는 시대가 도래한다. 되재, 수류, 화산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기에는 비예모, 베모렐, 보두네 등 선교사에 의해 프와넬의 설계가 담긴 한국식, 동양식, 서양식 성당의 혼재된 양식이 드러난다. 전동성당과 수류성당과 화산성당이 대표적이다. 이후 일제강점을 지나 한국전쟁의 이후 김영구신부, 박성운신부, 김성근작가 등에 의한 구호물자시절 성당들이 나타난다. 안대성당과 둔율성당과 삼례성당과 중앙성당과 쌍교성당과 함열성당과 시기성당과 장계성당이 여기 해당한다. 비슷하거나 조금 늦은 시기의 여산성당과 황등성당과 상관성당도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로 자리한다.
근대[Modern]에서 현대[ConTemporain]로의 과도기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계기는 시멘트공법, 옥상구조화, 철근골조화 등 건축자재와 바우하우스, 실용화공간, 공간다양성 등 건축구조의 변화 등에 기인한다. 특별히 알빈슈미트의 고창성당과 복자성당과 노송성당이 대표적이다. 또한 신태인, 교구청[인보성체회/가톨릭센터], 구호처[성모병원], 교육처[해성학교/성심학교] 등이 그러하다. 서학성당도 비교적 그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김후영, 김후만, 김후철 등의 형제들이 거론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여기까지도 현대의 건축재료학, 건축기하학, 건축시공학 등의 발달 이전과의 구분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논할 수 있다. 현대는 앞선 언급에서처럼 어디라도 무엇이건 어떻게든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시대적 특색을 거론할 수 없을만큼 다채롭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내부의 공간, 공경의 대상 등의 변모로 시대의 조류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성당건축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차별요소와 더불어 면밀히 잇는 공통요소를 동시에 밝힘으로서 성당건축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다. 사제와 신자의 공동체적 취향이 특징으로 드러나면서도 유기체적 구조 안에서 조화를 갖춘디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색채를 띤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실험적인 그리고 도발적인 성당건축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원래 건축양식이 보존과 보전의 차원에서 살려진 채, 일정 부분의 리모델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붕과 바닥이 대표적이며 부벽과 통벽의 다소 큰 리모델링도 포함된다. 요촌성당과 서학성당이 여기 해당된다. 자재와 재질과 도구는 바뀐 사진과 기록과 설계에 따른 원형보전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모델로 되재와 신성과 어은과 같은 굥소가 여기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