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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어린 신남중학교 시절 사진들
우연히 중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게 되니, 내 머리 속에 그 동안 까마득하게 잊었던 중학생 시절의 온갖 기억들이 연무(煙霧)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강원도의 우리 고향 마을 ‘상수내리(上水內里)’에서 중학교를 가려면 매일 ‘십 리(十里) 고개’를 걸어 넘어가야 했다. 그 고개의 고유명사(固有名詞)는 ‘더수러니 고개’였다. 대충 어림잡아 직선거리(直線距離)로 ‘십 리 고개’라고들 했을 뿐, 지금 생각하면 그 길은 이십 리(二十里)도 훨씬 넘는 산길로서 ‘5.16 군사 정변(軍事政變)’ 이전까지는 자동차(自動車)가 전혀 다닐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비좁고 위험한 애로(隘路)였다. 한 시간이 넘게 구불구불 오솔길과 산골짜기 시냇물을 건너 다시 험준한 산등성마루를 넘어가야 겨우 산기슭 아래에 있는 학교가 빼죽이 내려다보이곤 했는데, 산을 내려가는데도 삼사십 분(分)은 족(足)히 걸렸다. 서울의 남산(南山)보다도 더 높고 험준한 오솔길로만 이어지는 ‘이십 리 고개’를 넘나들며 학교를 다녀야 한 나는 독서광(讀書狂)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매일 하교(下校) 길에 쉬엄쉬엄 고개를 넘으며 책을 읽는 버릇을 길렀다. 천천히 걸으며 읽기도 하고, 산등성이 굽이굽이를 돌 때마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쉬며 큰소리로 책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그 때 겨우 중학교 일학년(一學年) 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영문학자(英文學者) 최재서(崔載瑞) 선생이 번역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햄릿(Hamlet)』을 의미도 잘 모른 채 무조건 낭독을 하였고, 대사(臺詞)의 상당 부분을 암기하여 친구들 앞에서 신파조(新派調)로 읊조리기도 하였다. 당시까지 정통 연극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어렵사리 구경한 연극이라고는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의 ‘신남(新南) 장터’에 가끔 찾아온 유랑극단 공연물(公演物)인 ‘신파극(新派劇)’ 따위가 고작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나의 모교(母校)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는 원래 지금 자리가 아니고, 신남리(新南里) 평지(平地), 그러니까 현재의 중학교 맞은편 산기슭에 있던 감리교회(監理敎會) 밑 평지에 있었다. 신남중학교 초대 교장이셨던 권교장(權校長) 선생님께서 ‘더수러니 고개[양구행(楊口行) 상수내리 고개]’ 기슭에 터를 닦아, 당시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관대리(冠垈里)에 주둔해 있던 ‘육군(陸軍) 제3군단(第三軍團)’의 군단장(軍團長) 오덕준(吳德俊) 장군(5.16 군사 정변 이후 초대 농협중앙회 회장 역임)의 지원(支援)을 받아 ‘신풍리(新豊里)’ 마을에 주둔해 있던 야전공병단(野戰工兵團)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새로 석조 건물(石造建物)을 짓고, 학교 전체가 단계별(段階別)로 이사(移徙)를 하였다. 돌과 바위가 많은 악산(惡山)의 산기슭을 공병부대(工兵部隊)의 장병(將兵)들이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깎아내린 후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학교 운동장(運動場)은 흙보다 돌이 더 많아 차라리 ‘돌밭’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입학하자마자 다음 날부터 운동장에 동원되어, 돌을 호미나 괭이로 캐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 두 손으로 옮기기엔 너무 무거워 다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담가(擔架 : 들것)에 돌을 싣고 옮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도 무거워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일학년(一學年) 때에는 겨울철을 빼놓고는 일 년 내내 점심 시간과 방과후(放課後)에 돌과 바위 제거 작업에 동원되었고, 학교 주변에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는 일에 참가하였다. 당시에는 학교 가기가 싫을 정도로 일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나중에 시야(視野)가 탁 트일 만큼 넓고 평평한 운동장이 만들어져 그곳에서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는 정말 보람을 느꼈다. 어디 그뿐이랴. 학교 건물과 운동장 주변에 우리가 심은 나무가 자라나 몇 해 후에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어, 신남리(新南里)의 ‘인제(麟蹄)-홍천(洪川)’ 방면(方面) 국도(國道)에서 학교가 있는 산기슭을 우러러볼 때 건물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변한 것을 보고, 모교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항상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 유학(遊學)을 하였고, 성인(成人)이 된 후에는 직장을 얻어 서울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자주 고향 방문을 하지 못했는데, 근자(近者)에 모교(母校)인 신남중학교 홈페이지(home page)를 방문해 보았더니, 사진 속의 중학교 건물 모습이 옛날 내가 공부하던 석조 건물이 아닌 것 같아 유감천만(遺憾千萬)이었다. 1960년대 초(初)에 세운 건물을 리모델링(remodeling)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 건물을 완전히 헐어 버리고 다시 세운 것인지 구분이 안 되었으나, 여하튼 내가 공부하던 건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솔직히 말해 현재의 중학교 사진을 보는 순간 모교에 대한 정감(情感)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중학교 시절에 우리가 공부하던 건물은 튼튼한 석재(石材)로 외장(外裝)을 하였기 때문에 족(足)히 몇 백 년은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내부 수리로 그치지 않고 건물 형태를 싹 바꾼 것인지 그 연유(緣由)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못 궁금하다.
우리가 새로 지은 건물에 들어가 처음으로 공부하게 되었을 때,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주민(住民)들은 누구나 새로 지은 신남중학교 석조 건물의 위용(威容) 앞에 찬탄(讚歎)을 금(禁)치 못했다. 나는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를 다닐 때도 처음에는 천막 학교(天幕學校)에서 수업(授業)받다가 3학년 때 비로소 새로 지은 콘크리트(concrete) 건물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중학교 또한 새로운 건물에서 처음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 그것을 늘 긍지로 여겼다. 초중학교(初中學校)를 연거푸 새 건물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어린 나이에 6.25를 겪어야 했던 우리 나이 또래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신남중학교 새 교사(校舍)를 지을 때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와 준 육군 제3군단장 오덕준 장군은 그 후 인제군(麟蹄郡) 군민(郡民)들이 지역 사회(地域社會)를 위해 지대(至大)한 대민봉사(對民奉仕)를 한 오장군(吳將軍)을 높이 평가해 주리라 자부(自負)한 나머지, 군복을 벗은 후 인제군 국회의원(國會議員) 보궐 선거(補闕選擧)에 입후보(立候補)하였으나, ‘4.19 학생 혁명’ 이후 새로 집권당(執權黨)이 된 민주당(民主黨) 신파(新派) 출신 ‘김대중(金大中)’ 후보(候補)에게 패배하였다. 국회의원 보궐 선거 입후보자 합동 유세(合同遊說)가 신남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어린 중학생이었던 나는 모교 운동장에서 훗날 이 나라의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후보의 웅변조(雄辯調) ‘사자후(獅子吼)’를 처음으로 직접 들었다. 당시 그이의 나이는 30대였는데, 상당한 미남(美男)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유당(自由黨) 정권 시절에 인제군에서 여러 차례 낙선(落選)하던 끝에 민주당이 집권하자 겨우 보궐선거(補闕選擧)에서 승리한 김대중 후보는 국회의원으로 첫 당선된 지 사흘 만에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후 군정(軍政)이 끝나자 자신의 고향인 목포(木浦)로 선거구(選擧區)를 옮겨 내리 당선하였고, 우리 강원도와는 아예 인연을 끊었다. 인제군 군민들은 당시만 해도 김대중 씨를 여러 차례 선거에서 낙선하고 조강지처(糟糠之妻)마저 사별(死別)한 불운(不運)의 정치인으로 여겼을 뿐, 후일 그가 이 나라의 대정객(大政客)으로 성장하여 대통령(大統領)까지 역임하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다. 나는 김대중 전대통령(前大統領)이 뉴스(News)의 주인공이 될 때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모교 운동장에서 보았던 청년 정치인 시절의 그의 모습을 기억하며 감회에 젖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나와 함께 공부한 신남중학교 동창생들은 지금 강원도 인제군에는 거의 살지 않는 것 같다. 자기들이 살던 마을이 ‘소양강(昭陽江) 댐(dam)’ 건설 때문에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되었건 아니건 간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정든 고향을 떠났다. 개발 시대(開發時代), 농촌 사회 해체(解體) 시대, 산업화(産業化) 시대의 그 도도(滔滔)한 물결에 휩쓸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거지반(居之半) 향리(鄕里)를 떠나갔다.
그래도 내 머리와 마음 속에는 무거운 돌을 주워 나르고 나무를 심으며 함께 공부를 한 동창생들과 모교의 석조 건물 모습이 항상 아스라이 잔상(殘像)으로 남아 있다. 삼 년(三年) 동안 힘들게 넘어다니던 ‘더수러니 고개’, 아니 ‘십 리 고개’의 오솔길과 함께…….
삼 년 동안 내 고향 상수내리의 고갯길을 힘들게 넘으며, 새로 건물을 지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근로봉사를 하느라 고생은 참 많이 했지만, ‘참을성’을 배웠기에 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온갖 궂은일을 겪으면서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고, 군대에 가서 힘든 훈련을 받거나 노동을 할 때에도 서울내기 사병(士兵)들보다는 비교적 적응을 잘 했다. 그런 내가 어찌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생각 잊어버리듯이 내 고향 마을과 모교를 잊을 수 있으랴!……
1815년 벨기에(Belgie)의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프랑스(France)의 나폴레옹(Napoleon) 1세의 군대를 철저하게 격파한 영국(英國) 장군 웰링턴(Wellington) 공작(公爵)은 승전(勝戰)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워털루 전투에서 거둔 승리의 바탕은 일찍이 나의 모교인 이튼스쿨(Eaton school) 운동장에서 마련되었다.”
나 또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성공적이었든 평범했든 간에 지금 이렇게나마 살 수 있는 저력(底力)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에 서울의 남산(南山)보다도 더 높고 험준한 우리 고향 ‘더수러니 고개(상수내리 고개)’를 넘나들며 ‘신남중학교’에 다니던 때부터였다. 그 당시 웬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共有)했을 일종(一種)의 ‘헝그리 정신(hungry spirit)’을 기른 덕분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삼 년 동안 매일매일 걸어서 넘어가야 했던 ‘더수러니 고개(상수내리 고개)’에는 ‘5.16 군사 정변’ 이후 육군 제3군단 소속 야전공병단(野戰工兵團) 부대원들의 노고(勞苦)에 의해 어렵사리 찻길이 닦여졌지만 그 길이란 것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비좁은 ‘돌길’에 지나지 않았고, 며칠 만에 한두 차례 국방색 지엠시(G.M.C.) 트럭만 오가는 전형적 시골 길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그 길이 예전보다 훨씬 넓게 확장되어 매일 버스(Bus)가 오가는 ‘46호선’ 국도(國道)가 되었으며, 이제는 ‘고개’를 넘어가는 일이 별일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오늘 오랜만에 실로 우연히 중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내 머리 속에 그 동안 까마득히 잊었던 중학생 시절의 온갖 기억들이 연무(煙霧)처럼 피어올라 나 자신도 모르게 췌언(贅言)을 늘어놓은 듯하여, 이쯤에서 글을 맺을까 한다.
2008 년 4 월 20 일
글 /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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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첫 번째 사진은 지금은 헐린 옛 신남중학교의 석조건물 사진이고, 두 번째 사진은 제가 신남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63년도에 모교 현관 앞에서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한 것인데, 사진 속의 인물들은 동기생(同期生) ‘서충규, 박광장, 유명수, 김남국, 이철규(맨 앞줄 왼쪽부터), 김종해(뒷줄 왼쪽)’ 군(君)입니다. 맨 뒤편 높은 곳에 홀로 선 채 ‘생 폼(form)’을 잡고 있는 친구가 바로 필자(筆者)이고요. 그런데 저 사진 속 친구들 가운데 두 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랍니다. 글 아래쪽 부분의 사진은 제8회 졸업 앨범의 일부를 발췌(拔萃)한 것입니다. 아!……1963년 모교졸업반 시절과 옛 동기생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옛 교정 생각 납니다.그리고 학교역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되었습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건 하루 되세요.
건강하시고,오늘도
졸문(拙文)을 읽어 주시고 과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64년 2월 18일 신남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서울에 올라 와 정착해 사느라 모교를 자주 찾지 못했고, 소양강 댐에 의해 고향 마을이 수몰된 이후로는 여지껏 한 번도 모교를 방문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간 먹고 살기 바빠서 그랬노라고 변명하기엔 제가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작금엔 고향 선산에 벌초도 못 갈 만큼 건강이 여의치 못해 더더욱 모교 방문은 꿈좋차 못 꾸고 있으니, 모교와 동문 여러분께 부끄러울 뿐이옵니다. 이렇게 글로나마 모교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는 저의 처지를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건승하소서.
다시 읽어도 좋군요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건승하세요.
저는 신남중26회 졸업생 입니다 두달전 동창회 갔다가 처음으로 모교에 들렀댔습니다 추억의 석조건물은 사라지고 운동장은 인조잔디 깐다고 공사 중이고 넘 변한 모교의 모습에 낯설었 댔습니다 저도이런데 대선배님께선 오죽하실까요.... 많은아쉬움을 안고 왔었는데 선배님의 글을 읽고 역사를 알게되니 더욱 아쉽습니다 건강이 안좋다하시니 염려됨이 있군요 부디 건강 회복 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아, 우리 모교가 다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모습을 보여 주려나 봅니다.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한 변화의 시도라고 생각하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다 바꾸지는 말고, 전통과 연륜을 상징하는 부분은 일정 부분 남겨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료합니다.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본관(本館)은 붉은 벽돌 건물로서 지은 지 100년이 가까워가고 있는데, 건물의 외장(外裝)은 그대로 둔 채 내부 시설만 현대식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으며, 가끔씩 1920~3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장소로 빌려 줄 만큼 건축학적 사료적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답니다. 후배님의 댓글 및 격려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후배님도 항상 건강하세요.
저 시절 교복이 참으로 단정하고 멋스러워 보입니다 요즘의 어느 교복보다 좋아보이는것은 추억이 묻어있는 교복이기에 그럴까요? 저는 형이 입던 조금은 빛바랜 교복을 물려받아서 입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교복 하나에도 애환이 담겨있는것 같읍니다 ~~^^
그렇습니다. 가난했던 1960년대 초(初) 시절엔 집안 형제끼리나 학교 선후배들끼리 교복 물려 입기가 성행하였지요. 군복(軍服)을 싼값으로 구입해 검정색으로 물들여 교복으로 만들어 입기도 했는데, 바로 이맘때 겨울철에는 군인들의 ‘동정복(冬正服)’ 복장(服裝)이었던 '사지(serge)' 옷감을 염색해서 만든 교복을 입기도 했었는데 아주 따뜻하고 착용감이 좋았으며, 겉보기에도 아주 근사하게 보였답니다.^^* 후배님 말마따나 정말 그때 그시절의 교복엔 요새와 달리 애환(哀歡)이 담겨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