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39회 단종문화제[단종대왕어가행렬]을 위해서 준비하고, 진행하고, 참여하신 많은분들이 고생을 하셨습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어린이와 청소녀,소년들이 심한 봄바람에,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1시간동안 영월읍내를 행진하는데 많은 고생들을 하였습니다.
|
소개
세조에 의해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유(瑜)가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서인으로 강봉되었다. 단종은 사약을 마시고 죽임을 당했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17세. 단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동강에 버려졌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당시 세조의 서슬이 시퍼래서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월에서 행정 업무를 보좌하는 호장 엄흥도는 아들 삼형제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야밤을 틈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 (지금의 장릉)에 모셨다.
장릉에는 특이하게 문관석이 두 개 있을 뿐, 무관석은 없다. 단종 복위와 얽혀 목숨을 잃은 이만 해도 200여 명. 생전에 그 무수한 죽음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단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릉은 여느 왕릉과 달리 단종에게 죽음으로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
장릉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배식단(配食壇), 객사, 충신각 등이 보이고 영천(靈泉)이 나온다. 이 우물은 한식날 장릉에 제사를 올릴 때면 물이 많이 고이는데 단종의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정자각에서 떼를 입힌 능선 허리를 오르면 장릉이 눈에 들어온다.
단종이 승하한 뒤 단종에 관한 신비한 여러 이야깃거리가 전한다. 그중 최근에 있었던 홍모씨의 일화가 유명하다. 불치병을 앓고 있던 그는 장릉을 매일 참배하면서 정성을 다해 장릉을 보살폈다. 그 덕분인지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규석광산을 발견해 부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장릉 입구는 엄대현군수가 세운 비석이 있는데 그 비용은 홍씨가 댔다고 한다. 그는 매일 장릉을 찾는다고 한다. 이밖에도 단종께 치성을 다한 이들에게 단종이 꿈에 나타나거나 소원을 이루었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단종 문화제
단종과 충신들을 모시는 영월군민들의 추모제
영월군에서는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과 단종을 따른 충신들의 충절을 위로하기 위해 1967년부터 매년 한식(4월경)을 전후로 3일간 단종 문화제를 연다.
단종 문화제 첫날에는 읍내 일원에서 역사를 재현하는 가장 행렬이 있으며, 전국에서 유일한 칡줄행렬행사를 연다. 밤이 되면 동강변 금강정에서 단종제 전야제를 알리는 축하 음악이 울리면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어 약 200개의 불꽃이 영월하늘을 수놓는다.
한편 단종이 승하하자 단종의 뒤를 따라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을 택한 시녀와 시종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금강정 낙화암에서는 이들을 위해 유등 70개와 단종이 돌아가신 년도를 따져 540여개의 유등을 동강에 띄워 보낸다.
둘째날에는 정순왕후 행차가 있으며, 장릉에서는 단종대왕 제향식과 충신 제향식이 이어진다. 이어 단종을 위해 죽은 268위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가 조사단에서 열릴 때 제례악과 궁중 제례무도 함께 공연한다.
이 행사를 마치면 영월군청에서는 단종 문화제 개막식을 알리면서 본격적인 행사로 들어간다. 장릉을 지켜온 도깨비들을 형상화한 '능마을 도깨비놀이'와 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굿과 검무가 어우러진 '대왕신령굿' 등의 행사가 이어진다. 이밖에 사물놀이 경연, 민속경연대회, 굿풀이, 고적대 행진이 있다. 세째 날에는 엄흥도, 정사종, 추익한을 모시는 3충신 추모제가 영모전에서 열리고, 창절사에서는 단종을 추모하는 ' 한시공모'가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칡줄다리기 한판 승부와 시군대항 남녀 궁도대회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