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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조익선생묘소>
https://m.cafe.daum.net/sabisaem/8XUL/99?searchView=Y
다음 카페에 <사비샘>이라고 부여전교조 모임 카페가 있습니다. 여기에 위의 글을 올리고 전교조 지부집행위에 참석하러 예산에 갈 때 조익 선생 묘소에 들렀습니다.
예산군 신양면에 있는 조익선생묘소에 가서 절을 올리고, 사원과 사당을 둘러보는데 조익선생 공덕비가 있어서 비문을 보니 송시열이 작성한 글이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이덕일씨가 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 의하면 송시열은 대동법을 반대했는데, 그렇다면 정적일게 분명한 조익 선생에 대한 공덕비를 쓴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조익 선생이 대동법 시행에 공이 많다고 적혀있으니, 송시열도 대동법에 긍정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때 처음으로 "뭔가 야료가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오항녕 교수의 책 '광해군'과 '조선의 힘'을 읽어보니 송시열 선생은 대동법 추진에 힘을 합한 사람이었고, 대동법이 건들지 못했던 왕실의 공납까지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까기위해 조작 날조한 것입니다.
이덕일씨는 평소 '노론망국론'을 주장하던 사람입니다. 노론들, 특히 노론벽파는 정조의 개혁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한 집단으로 묘사합니다. 또 노론세력이 정조를 독살했다고 했습니다.
내의원 도제조인 노론벽파인 이시수가 어의 강명길을 사주하여 정조를 독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시수는 노론벽파가 아니고 소론이었습니다. 이덕일씨는 자기 주장을 위해서 날조, 조작을 서슴치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의사 이성곤씨가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분석한 글을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이 있습니다. 이글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병에 대한 처방을 자신이 직접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습니다. 아래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글인데 긴 글이지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사도세자는 정조를 죽였다.>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111551
다음에 이덕일씨는 서인과 노론에서 자신들 학파의 시원으로 존숭하는 율곡 이이 선생을 까기 위해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유성룡이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이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한 말을 조작의 증거로 들었습니다. 문성은 이이의 시호이고, 유성룡은 이이에게 시호를 내리기 17년 전에 죽었으므로 문성이라는 시호를 알 수 없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십만양병설은 후대에 이이의 제자들이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덕일씨는 내놓는 책마다 연달아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커져 있던 상태였고, 진보, 보수언론을 가리지 않고 신문에 기고를 많이 했었습니다. 이때 이덕일씨는 한겨레신문의 주요 필자로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이덕일씨의 십만양병설 조작설에 대해 감히 반론을 기고하여 논쟁을 벌인 역사학자가 있었습니다.
전주대학교의 오항녕 교수는
이항복이 쓴 이이의 신도비문에는 이문성이 아니라 이문정으로 되어있고, 김장생의 사계집에도 이문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이덕일씨가 근거자료로 사용한 순조 14년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성으로 나오지만, 그보다 앞시기인 영조 25년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으로 나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이문정은 이이가 아니라 송나라때 <이항>의 시호인데 이항이 나라가 너무 평안하면 오히려 화근이 된다고 걱정하여 송의 진종에게 항상 간언을 했다는 사람으로 나중에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동료였던 왕단이라는 사람이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말이 훌륭한 인물을 칭찬할 때 쓰는 상투어가 되어 유성룡도 이이를 칭찬하여 이항처럼 훌륭한 성인이라고 칭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순조 25년의 "율곡전서" 편찬자가 이런 고사가 있는 줄 모르고 이이의 시호인 이문성으로 고친 것이었습니다.
이덕일씨는 여러 판본을 검토해서 어떻게 된 것인지 면밀히 살펴봐야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판본만 가지고 주장하다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덕일씨는 중요하지도 않은 판본을 가지고 논점을 흐린다고 반박합니다. 그래서 오항녕 교수가 "이덕일씨는 자기의 논거가 무너진 것을 모르고 있다."고 힐난합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이덕일씨를 아끼고 있던 한겨레신문은 이덕일씨가 더 큰 망신을 당할까봐 토론을 계속하지 않고 서둘러 종결시킵니다. 이런 망신을 당했다면 1년 동안은 밥맛이 없을텐데 이덕일씨는 아직도 십만양병설은 조작이라고 떠들고 있을 것입니다.
이덕일씨가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노론이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덕일씨는 <한중록>을 쓸 당시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미 노련한 정치꾼이 되어 있어 노론가문인 친정 홍씨가문을 변호하기 위해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묘사했다고 했습니다.
이덕일씨는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는 영조가 능행할 때 한번도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태묘(태조의 묘)에 여러번 영조를 따라 갔다"고 했습니다.
이에 정병설 교수가 어이없어 하면서 "태묘는 태조의 묘가 아니고 종묘를 말한다."고 일깨워 줍니다. 그러나 이것때문에 사이비역사학계에서는 정병설씨를 노론계통의 식민사학자라고 비난합니다. 이덕일씨의 이론에 딴지를 걸거나 실수를 일려주면 식민사학자가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덕일씨는 태묘가 종묘인지 이성계의 능인지 구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능(陵)과 묘(廟)의 차이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묘(廟)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한문 독해를 할 수 있나 의심해봐야 합니다.
만약에 김대중 정부가 국정운영을 잘해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고 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을 위시해서 정부 여당의 장관, 정치인이 잘해서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니고 야당 정치인이 잘해서 업적을 남긴 것이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영조, 정조 연간에 조선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국정이 안정되고 민생이 나아졌다면 그 집권세력이 잘해서 그랬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덕일씨는 노론세력은 개혁을 반대하고 정조의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조, 정조시절에 집권세력은 노론이었고, 특히 정조때는 노론벽파였습니다. "집권세력은 노론이지만 이들은 국정개혁에 사사건건 반대했고 민생복리에도 항상 반대했지만 야당세력인 남인과 정조의 노력때문에 개혁을 이뤘다."고 하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정조가 노론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어찰)를 공개합니다. 이 어찰에 의하면 정조와 심환지는 정치적 동지로 항상 상의하면서 정치를 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노론벽파는 정조의 개혁에 사사건건 반대한 것이 아니고 긴밀하게 협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대회 교수는 역사학자도 아닌데 사이비역사학으로 부터 노론 식민사학자로 몰렸습니다. 아주 기막힙니다. 자신들 마음에 안들면 영낙없이 식민사학자가 되고 맙니다.
아래 글은 노론세력이 반개혁세력이 아니라 문예부흥을 이끌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후기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색당파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식민사학자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끝판인 서인 소중화주의자들이 개혁세력인 남인세력을 억압하고 정조의 개혁 정책을 방해해서 조선이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진보적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인세력이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문화의 최절정기인 진경시대를 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진경시대'라는 말은 간송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최완수 선생이 <진경시대, '우리문화의 황금기'>라는 책에서 사용한 용어입니다. 조선의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125년간의 기간으로 조선은 이때 문화절정기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아마 정선의 산수화 등을 '진경산수화'라고 칭하는 것에서 따온 용어인 것 같습니다. 중국의 성리학이 이율곡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조선성리학으로 발전하면서 조선의 고유이념화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는 문화가 꽃피었다는 것입니다.
정철은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열었고, 최립은 독특한 문장형식으로 조선 한문학의 선구를 이루었으며, 한호는 조선고유서체인 석봉체를 이루었습니다. 창강 조속에서 부터 그림도 조선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서포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삼연 김창흡의 진경시문학, 이병연의 진경시등으로 진경문화가 발전하다가, 겸제 정선은 진경문화를 절정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 화가등 예술가가 나와 조선의 문화는 난만하고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일컷는 K 컬처라는 말이 전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진경시대입니다. 충분히 긍지를 느낄만 합니다. "현재 한류의 발전이 한국의 자생적 민주주의 때문"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은 의미심장합니다. 조선시대의 진경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띤 조선성리학이 바탕이 된 것 처럼, K컬처의 배경은 우리 국민들의 희생끝에 얻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도약하여 국민들이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시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덕일씨는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라는 책에서 윤휴가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윤휴가 죽은 것은 학문적 이유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에서 죽은 것입니다. 송시열도 나중에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정치투쟁 끝에 죽은 것이지 학술적 투쟁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윤휴가 북벌을 주장하면서 도체찰부의 복설을 주장하고, 자신이 체찰사가 되려다가 그게 빌미가 되어 죽은 것입니다. 이덕일씨가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세력이 학문 탄압을 한 것으로 조작한 것입니다.
또 이덕일씨는 조선의 실학자 중에 노론 출신은 한 명도 없다고 해서 그런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같은 북학파는 모두 노론벽파입니다. 김정희같은 고증학파도 노론벽파입니다. 왜 이리도 노론을 못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세도정치 가문인 안동 김씨세력도 노론 벽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정조의 정책을 지지했다는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덕일씨는 김현구 교수의 책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를 비판하면서 김현구 교수가 임나일본부를 주장했다면서 '내면이 일본인'이라면서 모욕하고 인신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김현구 교수의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라는 책은 임나일본부를 비판하는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것인지 일본서기를 이용해서 임나일본부를 비판해서 그런 것인지 단순한 학술비판을 넘어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강현구 교수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됩니다. 이덕일씨는 김현구 교수의 글에 대해 하지도 않은 말을 조작하고 날조하다 결국 1심에서 징역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의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맙니다. 그러나 판결문의 취지는 명예훼손이 안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학술논쟁으로 해결하라는 취지로 무죄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덕일씨는 이를 자신의 주장을 법원에서 인정했다는 식으로 선전합니다. 이덕일씨의 눈밖에 나면 모두 식민사학자가 될 각오가 되야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에 식민사학자들이 독도를 일부러 삭제했다는 거짓 주장으로 또 한번 야단이 납니다. 근거없이 역사학계를 모함하는 이덕일씨가 아직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말할 때마다 들먹이는 '역사학계가 식민사학자라'는 말에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이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것도 이덕일씨가 조작 날조한 내용으로 거짓말이었습니다. 기경량 교수가 이덕일씨의 지도에 독도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이야기했다가 이덕일씨에게 고소당합니다. 그러나 경찰서에 가서 인터넷으로 동북아재단의 지도를 직접 보여주고 독도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그냥 경찰서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덕일씨는 권력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부도덕한 정권의 만행에 저항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명색이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때도 애매모호하게 조건부 반대라는 입장을 취했고, 이번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도 그가 식민사학자라고 매도하는 역사학자들은 시국선언으로 반대를 명확히 했지만, 이덕일씨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이비역사학자들은 어떻게든 인원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학문이 다중의 위협속에 그들의 검열을 받는다면 이미 학문의 숨통은 끊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교회의 힘을 빌려 진화론을 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이비역사학의 몰상식하고 폭력적인 언동을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