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 安炳茂(1922~1996)】
「민중民衆의 눈으로 성서를, 성서 속의 예수를 보다.」
1985년 익산 삼기교회 성서 다락방에서 안병무 선생의 「역사의 증언」을 학습했다. 이 책을 나누면서 그 동안 내가 배우고 알았던 성서관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 실존주의 철학의 세례를 짙게 받은 안병무는 세상을 새롭게 만나고 있었다. 1975년 3월1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연세대 김동길·김찬국 교수 석방 환영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안병무는 ‘민족, 민중, 교회’를 강연한다. 5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교회 본관은 경찰에 의해 폐쇄되고 2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는 교육관에서 강연은 진행되었다. 교육관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마당에서 스피커로 전해지는 그의 육성을 들었다. 수많은 감시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1976년 3월1일, 윤보선·김대중·함석헌·문익환·문동환·서남동·김승훈·이문영·이해동·함세웅·안병무 등 민주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3·1민주구국’ 선언을 감행한다. 안병무의 수유리 집에서 선언문이 만들어진다.
김대중·문익환 등 11명이 구속되고 9명이 불구속 입건된다. 안병무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열흘 동안 조사와 고문을 당한다.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기소되어 감옥으로 넘어간다. 정신을 단련하고 밑바닥 민중을 만나는 기회였다.
“밤이면 귀신이 들끓는 듯한 이 흉가의 여기저기에 내 편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간수들의 모진 매에도 마다하지 않고 심부름을 하는 저 ‘소지’들이 내 마음에 새로운 무게로 압도해 들어왔다. 그들은 절도, 강도, 강간범이었다. 나는 이미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신념에서 새 신학의 장을 열었는데도 저들을 이 범주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안병무는 감옥에서 말해지는 온갖 쌍소리를 감당할 수 없어 솜으로 귀를 막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그 쌍소리가 싫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이 쓰는 말이 오히려 가증스럽게 들렸다. ‘쌍소리’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 감옥은 그에겐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눈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항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 않을 터이니까.”
“나의 삶에, 나의 사상에 결정적 전기는 ‘민중’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정좌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침내 역사의 담지자를 만난 것이었다. 대학에서 거리로, 집 안에서 감옥으로 가게 되지 않았던들 이런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 6부작인 제1권 <역사와 해석>, 제2권 <민중신학을 말한다>, 제3권 <갈릴리 예수>, 제4권 <예수의 이야기: 성서의 비유풀이>, 제5권 <민중과 성서>, 제6권 <역사와 민중>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빛나는 학문적·실천적 이론이고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수난의 도상에서 민중과 만나면서 나는 오랫동안 거미줄같이 나를 휘감았던 서구적 사고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못 만난 예수를 나는 만나게 되었다.”
안명무 선생이 만난 도상의 나그네 민중 속에서 같이 걸으시고 웃으시고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나 역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고난받는 민중 속에 그 아픔 속에 울고 웃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