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국 목사
저는 여러 해 동안 설교하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지내왔지만, 이러한 입장에서 이러한 식의 글을 쓰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끝마치게 만들 마지막 시대의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그 심각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 바로 잘못된 신앙 사상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분명해지면서 그 충격이 더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 날수가 있을까요?
뉴욕 무역쎈타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의 테러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전쟁사에서 하루에 죽은 사상자들의 숫자로도 최고의 기록을 갱신하였습니다. 세계 1,2차 대전들을 다 포함하여서 말입니다. 이 아비규환의 끔찍한 장면들이 전파를 타고 지구를 맴돌자 온 세계가 경악하였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CNN 방송을 시청하면서 뉴스에 접하고 있었는데, TV 화면에 얼어 붙은 중국인들의 표정들도 한결같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어안이 벙벙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여행객들을 실은 커다란 비행기들이 110층 건물들을 뚫고 들어가 커다란 화염과 함께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장면들..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거대한 건물들이 붕괴되는 장면들..어마어마한 양의 먼지들을 뒤집어 쓰고 소리치며 도망 나오는 사람들..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이 일로 이제는 우리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같은 인심, 같은 생활 양상으로 살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세계는 더욱더 하나로 뭉치게 되었는데, 세계 단일 정부 사상의 급진전은 물론,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다는 국가나 사회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철학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시나요? 이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에 관한 예언의 시나리오를 가능케 하는 바로 그 무대라는 것을 말입니다. 다음의 공격은 어떠한 종류일까요? 화학 개스? 생물학 폭탄? 아니면 적은 가방 사이즈의 핵 폭탄? 누가복음 21장에 있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바라보며 두려워 기절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살아남는 이들이 되실 것인지요?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을 당신의 크신 은혜의 날개로 감싸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사건이 일어 날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잘못된 신앙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종교관 때문입니다. 자살 테러리스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잘 배운 그리고 엄격한 종교인들입니다. 옛날에도 과격파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겉으로는 경건하고 점잖게 보이는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번 테러사건의 용의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의 놀라움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선량하고 훌륭한 시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모 바르고 깨끗하며, 동물하나 죽이지 못할 지성인들로 그들의 눈에 비쳤기 때문입니다. 아마 실제로도 그들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종교와 사상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들은 참으로 누구보다도 훌륭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관과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쉽게 희생할 수 있는 어떤 의미에서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만 당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잘못된 사고 방식이나 신앙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소스라치며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폴란드에 있는 아우스비치 나치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곳에서 느낀 감동과 분노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의 벽들에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는 유태인 음악인들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독일말로 기록되어 철문 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알바잇 막프라잇”-”노동이 자유를 준다”. 얼마나 억장 막히는 기만입니까! 또한 포로들을 가두었던 지하 감옥들로 들어가는 입구의 벽에는 역사가 Gerorge Santayana 씨가 말한 다음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한가지 사실은, 600만 유태인들을 살해한 많은 나치스 군인들이 그들의 가정으로 돌아가서는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수백 명 내지 수천명의 유태인들을 죽이거나 화장하고 나서 그 날 밤에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웃으면서 음악을 연주하였고, 사랑하는 애완용 동물들이 죽었다고 울고 있는 자녀들을 끌어안고 위로해 주며 함께 동물들을 묻어주는 자상한 아버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잘못 주입된 사상과 편견이 그들을 온 세상이 경악할 살인마들로 만든 것입니다. 유태인들을 죽이는 일이 그들에게 있어서 독일 내지는 온 세상을 위한 의로운 일로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들이,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떠한 특정한 무리들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하는 모습으로 끝마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그 핍박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재림하시고 개입하시는 모습으로 성경 예언은 그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하여 단 하나의 재난이 불러 올 수 있는 급격한 민심의 변화와 그 파급을 보았습니다. 이번 미국의 참사를 통과하면서 CNN 이 발표한 여론 조사는 우리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인들의 3분의 1이 아랍계 사람들을 다 붙잡아다가 수용소에 가두어야 한다는 질문에 동의하였다는 것입니다. 약 100건에 가까운 아랍계 이슬람 시민들에게 가해진 미 국민들의 분노의 표시들은 그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계시록 13장의 예언이 말하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짚어 보도록 하십시다.
첫째로 마지막 짐승의 표의 전쟁은 무신론자들과 믿는 자들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예언 해석입니다. 짐승의 표의 환란은 믿는 자들이 다른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건입니다. 과거 중세기 때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였고 하나님의 진리를 땅에 던져 오류와 타협하도록 조장했던, 그래서 진리를 혼잡케 하여 교회가 바벨론이 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세력이 다시 그 힘을 부활시키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을(참된 교회)죽이려고 달려드는 싸움이 바로 짐승의 표의 환란이요 진짜 아마겟돈 전쟁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새끼양 같은 짐승이 앞장서서 온 세상을 호령하면서 자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어떤 특정한 무리들을 핍박하게 되는 일이 짐승의 표의 환란인 것입니다. 이 새끼 양 같은 짐승인 미국이, 자기보다 앞서서 먼저 나와 이미 성도들을 중세기의 오랜 기간 동안 크게 핍박 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짐승을 위하여서 우상을 만들어 주고 또한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앞에 절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러한 일을 행하는 배경이 경제적으로 악해져 있는 상황일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핍박의 조처가 사고 팔게 하지 못한다는, 다시 말해서 악화된 상황 속에서 음식 배급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명령과 함께 결국에는 죽이겠다는 심각한 핍박으로 번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미국이 그러한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국가로서 세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에언 대로 미국은 새끼 양처럼 기독교 국가의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대로 이 나라가 용처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소련이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냉전시대라면 이러한 계시록 13장의 예언이 결코 이루어 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마지막 짐승의 표의 환란의 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떠한 입장으로 휘몰아 치게 될까요? 아니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커다란 천연 재해 같은 돌발적인 위기의 상황은 이 세상과 민심을 갑자기 돌변 시켜서 죄없는 한 무리들을 무고하게 핍박하는 일을 얼마든지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번 테러리스트들은 천하가 공노할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민심을 훈련시키어 다음 번에는 무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으려는 모략을 꾸미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편견을 가지고 어떤 한 종류의 사람들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핍박 받는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옛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잘못 이해했고 또 그렇게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같은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비밀 휴거설이나 아니면 다른 이설들로 잘못 이해되어 있고 이미 존재해 오고 있는 적 그리스도의 성경 예언이 마치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어떠한 이상한 적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가르침들로 교회들이 어두워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참된 복음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의에 대한 가르침이 통속적인 가르침으로 바뀌어져서 교회들 안에서 가르쳐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가르침들이 유대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거절하게 만들었던 것 처럼 오늘 날 현대 교회가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력으로 탈바꿈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인 것처럼 현대 타락한 교회들이 잘못된 성경 예언의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참된 백성들을 죽이려 하게 되는 사건이 바로 짐승의 표의 환란입니다.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경찰국이 되어 있습니다. 온 나라들이 속속 미국 뒤에 와서 정렬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혼잡하게 이해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란 단어의 뜻처럼 말입니다. 무언가 큰 사건이 곧 터질 것만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의자에서 창문을 내어다 보니 큰 민간인 대형 여객기 비행기 한대가 여러분을 향하여 돌진해 오고 있습니다. 도망할 틈이 없습니다. 몇 초 동안에 여러분의 과거가 눈 앞을 자나갑니다. 아! 이제 모든 것이 끝이구나! 지금 여러분이 그러한 상황에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만나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번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앞날에 하나님의 자비와 가호하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우리는 세상 역사의 그 마지막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2.권두언
세상에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 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뉴욕과 와싱턴에서 희생된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에게 진실된 애도의 뜻을 보내는 동시에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심각한 교훈을 받아드려야만 합니다.
6,600명 이상 되는 그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과연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까요?
이번 미국의 테러 참사는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일은 우리들에게 한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갑자기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할 것으로 생각하며 갑작스러운 회개를 계획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이시여!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매 순간마다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게임이 아닙니다. 나의 전략대로 이리 저리 살다가 마지막에 가서 검은 세력을 이기고 내 뜻대로 구원에 들어가는 그러한 종류의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쎈타 쌍둥이 빌딩에 있던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창문 밖에서 달려오고 있는 큰 비행기를 보는 순간부터 불과 몇 초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하거나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위기는 우리 중 누구에게나 닥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은 성경 예언 상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계속되는 기사들을 읽으시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잘못된 성경적인 이해들을 정리하고 고칠 시간입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 예언과 진리에 대한 이해와 관점들은 마지막 사건들 속에서 나를 어느 편에 서게 할 것인지를 결정 짓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호의 기사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건이 터지기 전에 준비되어 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잘못된 신앙관을 개혁하기 위한 간절한 호소입니다. 읽는 분들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앞날에 하나님의 자비와 가호하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우리는 세상 역사의 그 마지막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3.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법
생애의 빛 편집실
사려 깊은 남편
사려 깊은 남편은 아내의 마음에 행복을 심어준다. 그러나 어떤 남편은 아내를 무관심하게 대한다. 그는 자신이 아내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남편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아내는 풀이 죽고 낙망 하게 된다.
아내의 마음 속에서 희망과 유쾌함은 사라진다. 자신의 맡은 바 일이 반드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성질의 것임을 알기 때문에 매일의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아내를 사려 깊고 동정적으로 대하지 않을 때, 가정의 분위기는 어둡게 된다. 이러한 가족의 분위기를 지 켜보는 천사들은 이 슬픈 소식을 하늘로 가져가서, 사려 깊지 못한 남편으로 빚어진 이러한 상황을 하늘 기록책에 기록한다.
남편은 그의 가족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특히 그는 연약하고 위로 받기 원하는 아내의 감정을 매우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 이러한 남편은 아내가 얻을 수 있는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친절하고 상냥하며 격려하는 말은 가장 효능 있는 약보다 효과적이다. 이러한 말들은 의기소침하고 낙담한 자들의 마음에 용기를 줄 것이며 친절한 행동과 격려하는 말에 의해 가정 안에 들어온 행복의 햇빛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남편은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는 일의 대부분이 어머니에게 주어져 있음과, 자녀들의 마음과 성품을 꼴 짓는 일에 있어서 아내가 할 일이 매우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은 가장 부드러운 동정심과 관심을 가지고 아내의 짐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로 하여금 언제든지 그의 넓은 사랑에 의지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서도 아내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남편은 밖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찌푸린 얼굴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남편은 가정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를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남편의 임재는 가정에 햇빛을 가져 와야 하며, 아내로 하여금 위를 쳐다보고 하나님을 믿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러한 부부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주장하게 된다. 불친절, 불평, 분노는 성령을 가정에서 쫓아낸다. 불쾌한 말이나 초조함 혹은 분쟁이 있는 가정으로부터 하나님의 천사는 떠나가게 된다.
쾌활한 아내
어떤 아내는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제어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가정을 불행의 늪으로 이끌어 간다. 이러한 아내는 자주 성급한 말이나 불필요한 불평을 늘어 놓는다. 남편은 그러한 아내의 말과 표정 때문에 지치게 되어 나중에는 유쾌하고 격려하는 말 대신에 찌푸린 눈살로 아내를 대하게 된다. 남편의 애정이 아내로부터 떠나게 되면, 가정에 대한 애착도 잃어 버리게 되고, 그의 앞길은 어두워지고 용기는 꺾이게 된다. 그러한 남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지하기를 요구하시는 위엄과 자존심을 포기하게 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머리이신 것처럼 가정의 머리이다. 그러므로 남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그를 그 위엄 있고 책임 있는 위치에서 내려오도록 하는 아내의 모든 행동과 말과 표정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소원과 뜻을 남편에게 순복 시키는 것이 아내의 의무이다. 피차 복종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남편의 판단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다. 상담자요 충고자요 보호자로서 그가 선택한 남편에게 순복 하는 것은 아내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일이 아니다.
남편은 매우 온유하지만 결단성 있게 가정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남편이 이러한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아내의 따뜻한 미소와 격려가 필요하다. 행복한 가정을 갖기 원하는가? 아내와 남편은 손을 마주 잡고 모든 일에 있어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한다. 사단이 가정 안에 던져 넣은 모든 유혹과 시험을 견디기 위해서는, 행동과 성품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많이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남편과 아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할 것이다.
이해성 있는 부모
부모들은 자신의 유년 시절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동정과 사랑을 갈망했던 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부모로부터 비난 받고 신경질적인 책망을 받았을 때에 얼마나 많이 마음이 상했던 가를 기억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의 원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하여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이 말은 자녀들이 요구하는 무분별한 것들을 모두 들어주라는 뜻이 아니다. 부모는 사랑이 섞인 확고한 원칙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부모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자녀들의 품성 계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를 대하고 자녀를 다루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완전히 낙망 하여 넘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친히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힘과 능력에 맞는 길을 우리에게 예비하여 놓으시고 우리의 자녀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인도 하심으로써, 그분의 동행이 우리에게 안위가 되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를 뒤에 남겨놓고 부모들만 앞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부모와 자녀와 함께 뒤쳐질 정도로 그렇게 급히 인도하지 않으신다. 오, 그렇지 않다. 그분께서는 부모와 자녀 모두를 위해서 생명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부모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는 좁은 길로 자녀들을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 각자의 힘과 능력에 맞는 길을 부모에게 지정해 주신다.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부모의 깊은 사랑을 자녀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자녀들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행복을 주며,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자녀들의 어린애 같은 놀이나 즐거움에 동참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을 올바로 이해하고 동정할 줄 모로는 부모로부터 자녀들의 마음은 떠나가게 된다. 거친 말이 그대의 입술을 새어나가도록 하거나 그대의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그분의 기록책에 기록하신다. 거친 말들은 자녀들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상처는 치료하기가 매우 힘들다.
부모들의 잘못된 교육 방법 때문에 자녀들의 마음 속에 반역이 형성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일 올바른 방법을 사용했더라면, 선량하고 균형진 품성을 형성했을 아이들이 부모의 부적절하고 감정적인 교육 방법 때문에 비틀어지고 반항적인 기질을 갖게 되어 인생을 불행과 절망으로 보내게 된다면, 부모로서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를 다루기에 부적합하다.
친구 같은 부모
자녀들이 부모의 찌푸린 얼굴을 보지 않게 하라. 자녀들이 시험과 유혹에 굴복했을지라도,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경우에는, 그대가 하늘 아버지께 용서 받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기꺼이 자녀를 용서해 주라.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교훈을 줌으로써 자녀들의 마음을 그대의 마음에 붙들어 매라. 자녀에게 교훈을 주고 징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질 때에는 부모로부터 자녀를 떠나게 만드는 영향력이 행사되기 때문이다. 부모를 그들의 막역한 친구로 삼도록 자녀들을 가르치라. 그들로 하여금 부모의 귀에 그들의 시련과 기쁨과 유혹을 이야기하게 하라. 이 일을 격려함으로써, 부모는 사단이 그들의 경험 없는 발을 위하여 준비한 많은 올무로부터 자녀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를 다룸에 있어서 그들이 어린아이에 불과함을 잊고,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음으로써 엄격함만으로 다루지 말라. 그들이 일시에 완전하기를 기대하거나 즉시로 장성한 장년처럼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그렇게 할 경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열 수 있었을, 그들에게 접근하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사단과 그의 악령들은 자녀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하여 가장 강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공정함과 그리스도인의 온유와 사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부모는 자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은 부모에게 무한한 신뢰를 둘 수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자녀들에게 부모와 교제하는 데서 얻는 매력을 갖도록 하고, 가정을 매력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그렇게 한다면, 자녀들이 길거리로 나가 거리에 나와 있는 다른 아이들과 놀기 위해서 지나치게 갈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단은 주로 자녀의 친구들을 통하여 역사하는데,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게 하며 부패케 한다. 이 방법은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이들은 서로 강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다. 그들의 대화가 언제나 잘 선정된 것이거나 고상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악한 말들이 귀에 속삭여지며, 이를 단호하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마음에 자리잡고 뿌리를 내리며 싹이 터서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태도를 더럽힌다. 세상에 오늘날 존재하는 죄악과 도덕적 타락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붙들어 매는 일에 최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며, 부모야말로 자녀의 행복을 진정으로 소원하는 유일한 친구라는 사실을 자녀로 하여금 올바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스리고 징계하는 부모
부모의 조급함은 자녀의 조급함을 자극한다. 부모가 나타내는 분노는 자녀들 마음 속에 똑같은 성질의 분노를 일으키며, 그들의 성품 속에서 악한 것들이 폭발되도록 조장한다. 어떤 부모들은 조급한 정신이나 분노의 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심하게 징계한다. 그러한 징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한 가지 악을 교정하려다 두 가지 악을 만들어 낼 뿐이다. 계속적인 책망과 채찍질은 자녀들을 완악하게 하고 부모로부터 떠나게 한다.
부모들은 먼저 자제를 배워야 한다. 그런 후에야 성공적으로 자녀를 다스릴 수 있다. 부모가 자제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말하며 행동할 때마다 그것은 자녀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우선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그들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고 죄를 보여 주어야 하고, 그들이 부모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도 범죄 하였음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자녀들을 징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분노와 화를 가라앉히고, 잘못한 자녀에 대한 동정과 측은함이 넘치는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라. 그렇게 할 때에는, 자녀들이 그대의 징계로 인해 부모를 미워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부모를 불쾌하게 하였기 때문에, 혹은 부모의 불만을 자녀들에게 터뜨리기 위하여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악 중에서 성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무감과 자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 하였다는 사실을 자녀들이 깨달아야 한다.
부모의 신앙 교육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키는 일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도 소홀히 하고 있다. 양쪽 다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의 마음은 활동적이어서, 육체 노동에 종사하거나 공부에 몰두하지 않으면 악한 영향에 노출된다. 자녀들이 무식한 상태로 성장하도록 용납하는 일은 부모들에게 죄가 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유익하고 흥미 있는 책을 제공해 주어야 하며, 일을 가르치고, 육체적 노동과 공부 및 독서를 위해 여러 시간을 보내도록 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을 향상시키며 마음의 기능들을 증진시키고자 애써야 한다. 계발시키지 않은 채 버려둔 마음은 대개 비열하거나 육욕적이며 부패된다. 사단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게으른 마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부모들이여, 기록하는 천사가, 그대들이 자녀에게 발하는 모든 조급하고 분노가 섞인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교훈을 주지 못했거나, 죄의 흉악함과 죗된 길의 마지막 결과가 어떠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 못한 부모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기록하는 천사는 자녀들 앞에서 부주의하게 혹은 농담조로 발하여진 모든 말과 정숙하고 고상하지 못한 말들을 하늘 기록책에 기록한다.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 그들은 우선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과 말을 제어하는 것, 그리고 얼굴 표정까지 그리스도의은혜로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음성이 분노와 흥분으로 날카로워 지거나 격앙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후에야, 부모는 자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녀들이 옳은 일 하기를 바라며, 부모와 어른들에게 순종하며 친절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자녀들에 대한 징계와 격려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비록 자녀들이 좋은 결심을 할 지라도, 그들의 원칙이 신앙으로 강하여지고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새롭게 하는 은혜의 영향을 입기 전에는 자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라.
부모들은 자녀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인내와 성실로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며, 자녀로 하여금 그들 마음대로 무분별하게 교육을 받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자녀 스스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배우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악은 선보다 훨씬 신속하게 증가한다. 그들이 습득한 악이 여러 해 후에 사라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누가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겠는가? 시간은 짧다. 후 일에 잡초를 뽑아 내는 것보다 정결하고 좋은 씨를 자녀들의 마음에 뿌리는 것이 훨씬 쉽고 안전하다. 주변의 영향력이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다. 자녀들 스스로가 친구를 선택하도록 허용하지 말고 부모가 친구를 선택하여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다. 부모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그대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녀에 대한 관심을 다른 어느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원의 계획을 설명하고 알기 쉽게 알려 주어야 한다. 여덟, 열, 혹은 열 두 살 된 자녀들은 개인적인 신앙 문제를 말해 주기에 충분한 나이에 이르러 있다. 자녀들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리를 믿는 일이 미래의 어느 때에 저절로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올바로 가르친다면, 매우 어린 아이들이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4.죄에 빠져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질문과 답변
문: 저는 요즘에 매우 깊은 늪에 빠져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육신이 약해서 자꾸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게 됩니다. 결심하고 또 결심하지만, 나를 붙잡고 있는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의 신앙 생애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요?
답: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 받은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도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소원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마음의 동기와 목적과 품성이 변화되게 됩니다. 악을 좋아하던 내가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모든 동기와 목적이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마음의 중심에 생긴 사람에게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가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거듭남의 경험 없이 신앙 생애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어도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늑대가 양의 흉내를 내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늑대의 헛된 시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윌리”라는 이름의 늑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늑대로 태어난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늑대들 곁을 떠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다른 그룹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에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한 그룹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초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 무리였다. 늑대 윌리는 양 무리를 보면서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보았다. 언제나 먹을 것을 찾아서 온 숲속을 돌아다녀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 일단 먹을 것이 보이면 사정없이 공격해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상대방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급소를 물어 뜯을 때에 피를 흘리며 몸부림치는 상대방의 모습. 살아 남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윌리는 결심했다. “그렇다! 나는 양이 되어야 한다!” 윌리는 양처럼 보이기 위해서 풀을 뜯어 먹으며 양 떼에게로 접근해 갔다.
양 떼 중에 있던 한 아버지 양이 윌리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얘, 저 짐승은 무엇이지?” 새끼 양인 리비가 대답했다. “아버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생겼내요. 그러나 생긴 것은 우리와 다지만, 우리처럼 풀을 뜯어 먹는데요.” 새끼 양은 윌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 너도 우리 양 떼들과 함께 살고 싶니?” 윌리가 대답했다. “그래, 나는 정말로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그 때 아버지 양이 말했다. “그렇지만, 너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생겨서 힘들 것 같구나.” 윌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양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나도 너희처럼 다리가 넷이고, 머리가 하나이며, 귀가 둘이고, 한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단다.”
아버지 양은 망설였다. 윌리의 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니, 무서운 발톱, 그리고 교활하게 옆으로 찢어진 눈과 크게 울부짖는 소리. 그러나 새끼 양이 아버지를 재촉하였다. “아버지, 우리만 모여 있으면 재미 없어요. 윌리가 우리와 다르게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전혀 다른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로부터 여러 주일이 지나면서, 이곳 저곳에서 양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에는 윌리를 양 떼들 속에 넣어주는데 앞장 섰던 그 아버지 양과 새끼 양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양들을 지키는 개가 숲속에서 사라진 양들의 시체와 뼈를 발견하고는 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 날 밤, 윌리는 살며시 양떼를 빠져나가 숲으로 도망하였다. 숲속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돌아오면서 윌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로 양이 되고 싶었어. 양이 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 그러나 그 맛없는 풀을 하루 종일 먹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단 말이야. 피냄새와 고기의 쫄 깃 쫄깃한 맛을 잊을 수 없어. 달 밤에 숲속을 돌아다니며 토끼와 노루를 사냥하는 그 재미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나는 양들의 소리를 흉내내서 “음-매”라고 울어 보았지만, 그 때마다 내 소리는 “우-우”라는 울부짖음이 나왔을 뿐이야. 양이 되어 살고 싶다는 나의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풀만 먹느라고 내 체중이 너무나 많이 줄었단 말야. 나는 도저히 양의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어. 그래서 어느 날 나를 양 떼 속에 받아준 아버지 양과 새끼 양까지도 잡아 먹을 수 밖에 없었어. 그들이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던지 정말 참을 수 없었어. 내가 양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나는 양과 같은 생활을 할 수가 없어.”
늑대가 양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생애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은 인간적인 노력과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으로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요.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귀하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바치십시요.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귀하의 마음과 생애를 지배하시고 인도하시게 될 것입니다.
5.하나님의 마음
서정희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쉽게 유혹에 넘어졌을 때,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 보고 또 다짐해 보지만 매번 같은 자리에서 넘어졌을 때,
그래서 내 자신에 대해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더 이상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걸 수 없을 때,
더욱이 마음 아픈 것은 나를 늘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한결같이 기다려 주시며 참아주시는 감사하신 하나님을 실망 시켰다고 느꼈을 때,
그래서 그 분께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질 때,
내 자신이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사랑이 없는 자라고 느껴질 때,
그래서 자신이 한없이 밉고 살아 있다는 것조차 힘에 겨울 때,
죄들의 가시 밭 길에서 이리 긁히고 저리 긁혀 죄의
상처만 남았을 때,
그래서 상한 모습으로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조차
돌아가기 미안하다고 느껴질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왜 또 넘어졌냐고, 왜 항상 그래야만 하냐고, 왜 일어서지 못하냐고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차마 그분은 그렇게 생각조차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넘어진 것으로 인해 상처 입었을 까봐 달려 오셔서 두 팔 넓게 벌리어 안아 주시며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혼자서 긴 고통 가운데 마음 아팠었니? 사랑하는 내 아이야 이 것 만은 알아다오. 넌 결코 혼자서 일어 날 수 없고 넌 결코 스스로 네가 입은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단다. 모든 것을 회복하고 해결한 다음에 나에게 올 수는 전혀 없단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여기 있는 것이란다. 널 위해.....
내 아이야 이제는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품에 있듯이 매 순간 내 안에 있어다오. 나에게 너의 모든 일과 의지를 맡겨다오. 엄마가 아이를 온 정성을 다해 돌보듯 너의 모든 일을 내가 처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오로지 너 하나를 위해, 너의 짐들에서 널 일으키기 위해 내 생명 생각 지 않고 달려 온 거란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 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는 내가 한 이 약속대로 네가 나를 찾는 심령의 호소를 듣고 달려 왔단다. 널 회복시키기 위함이란다. 넌 결코 어디서 건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다. 내 안에 있는 한 .....내가 널 너무도 사랑한단다.” 하시며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자비와 은혜의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다 내려놓고, 우리의 무능력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길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분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참된 회개의 경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어디든 인도 하시는 대로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구원의 열쇠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열쇠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6.성경에 기록된 하늘 아버지의 편지
너는 나를 잘 모를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너무나 잘 안단다 .... 시 139:1
너의 앉고 일어섬을 알고 .... 시 139:2
너의 모든 행위를 알며 너의 생각을 멀리 서도 안단다. 너의 길과 너의 눕는 것을 샅샅이 알며 너의 모든 길을 잘 알고 있단다 .... 시 139:3,4
너의 머리털 수를 다 세어 두었을 정도이고 ....마 10:30
이는 내 형상대로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창 1:27
너는 항상 내 안에서 살며 기동하고 있단다 ....행 17:28
너는 나의 소생이니까 .... 행 17:28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내가 너를 알았고 ....렘 1:5
창세 전에 내가 너를 택하였단다 .... 엡 1:11
너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란다.너를 위해 정한 날이 내 책에 다 기록되어 있으며 ....시 139:15,16
너의 태어날 때와 살 곳을 정하였으며 .... 행 17:26
너를 신묘 막측 하게 만들어 .... 시 139:14
어미의 모태에서 지었고 .... 시 139:13
내가 너를 취하여 태어나게 하였단다 .... 시 71:6
마귀와 나를 모르는 자들이 나를 잘못 알렸지만 .... 요 8:41~44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사랑이란다 .... 요일 4:16
이 사랑을 너에게 아낌없이 주련다 .... 요일 3:1
너는 나의 자녀이고 나는 너의 아비이란다 ....요일 3:1
육신의 아비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리니 .... 마 7:11
나야말로 온전한 아비이란다 .... 마 5:48
각 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내게로부터 오며 .... 약 1:17
너에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안단다 ....마 6:31~33
너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너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은 .... 렘 29:11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 렘 31:3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조차 없구나 .... 시 139:17,18
나는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노래 부르며 .... 습 3:17
너에게 복 주기를 멈추지 아니 할 것이니 ....렘 32:40
너는 나의 소유이기 때문이란다. .... 출 19:5
내가 기쁨으로 너에게 복을 주며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해 너를 이 땅에 심을 것이란다 .... 렘 32:41
보아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니 .... 렘 33:3
네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구하면 나를 만나리니 .... 신 4:29
나를 기뻐하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란다 .... 시 37:4
네가 소원을 두고 행하기를 원하노라 .... 빌 2:13
네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줄 것이니 .... 엡 3:20
나는 너의 위로자이기 때문이란다 ....살후 2:16~17
모든 환란 중에도 너를 위로할 것이니 ....고후 1:3,4
너의 마음이 상할 때에 내가 너를 더욱 가까이 한단다 .... 시 34:18
양을 안는 목자같이 내가 너를 품 속에 안고 있단다 .... 사 40:11
언젠가 너의 눈에서 영원히 눈물을 씻겨주고 .... 계 21:3,4
이 땅에서 얻은 모든 고통과 아픔을 없애리니 .... 계 21:3,4
내가 예수를 사랑한 것같이 너를 사랑함이란다 .... 요 17:23
예수를 통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였으니 .... 요 17:26
예수는 나의 형상이란다 .... 히 1:3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이고 .... 롬 8:31,32
회개한 너의 죄를 묻지 않으며 .... 고후 5:18,19,20
너와 화목하기 위해서 내 아들 예수가 죽었으니 .... 고후 5:18,19
그의 죽음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란다 ....요일 4:10
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나의 소중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단다 .... 롬 8:31,32
아들의 사랑을 믿는 자는 나를 받는 것이요 ....요일 2:23
나의 사랑에서 너를 끊을 것이 없단다 ....롬 8:38,39
네가 하늘 본향으로 돌아오는 날, 하늘에서 기쁨의 잔치를 열 것이란다 .... 눅 15:7
너는 진정 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느냐? ....요 1:12,13
너를 기다리며 .... 눅 15:11~32
너를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7.치매를 염려하시나요?
편희수
근래에 마이클 제이 폭스 (Michael J. Fox)가 치매에 걸려서 유명 잡지와 신문에 크게 보도 되었다. 그는 40세도 미처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노년에만 생긴다는 노년성 치매. 근래에 나타나는 사례들을 보면 노년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럼 치매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이제는 젊은이들도 자신은 노년성 치매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노년성 치매에 걸리게 되면 기억하고 있던 단어들을 떠올리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치매에 걸린 환자는 대화를 1분 정도 하면 3~6초 정도는 중단한다. 이것이 바로 노년성 치매의 초기 증상이다. 치매는 주로 노인들에게 생기는 병이지만 30~40대의 젊은 사람들에게도 종종 나타나는 병이 되었다.
치매의 증세들
1. 일의 기능에 영향을 주는 기억력 손실
가끔 프로젝트, 직장 동료의 이름 그리고 동료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더 자주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못한다.
2. 항상 해오던 일이 하기가 어려워짐
바쁜 사람들은 가끔 음식을 스토브에 올려놓고 나중에 기억해서 식사가 거의 끝날쯤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경우도 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식사를 준비해서 차리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식사를 준비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3. 언어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사람들은 적당한 단어를 찾는데 가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사람은 아주 쉬운 단어도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단어를 맞지 않는 단어로 바꿔서 사용하거나 문장을 맞지 않게 만들어서 사용한다.
4. 시간과 장소에 관한 개념을 잃어버림
잠시 오늘의 날짜와 어느 날인지 그리고 장소를 잊어버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살고 있는 길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왔고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지 알지 못한다.
5. 분별력이 감소되거나 약함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아이를 돌보고 있는 동안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고 엉뚱한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옷을 이상하게 입거나 셔츠나 블라우스를 몇 개씩 입는다.
6. 논리적으로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음
은행에 있는 돈을 매달 계산하고 지출과 수입을 계산 하는 것은 다른 일보다 조금은 복잡한 것일 수도 있다. 치매를 경험하는 이들은 숫자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것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잊어버린다.
7. 물건을 잃어버림
누구라도 지갑이나 열쇠를 잃어 버릴 수 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물건들을 적당하지 않은 곳에 놓는다. 다리미를 냉동실에 넣거나 시계를 설탕 그릇에 넣거나 한다.
8. 감정이나 행동의 변화
모든 사람들에게 감정의 변화가 생긴다. 치매 환자는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평안 했다가 갑자기 우는 등 극적인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9. 성격의 변화
사람의 성격은 나이가 들면서 변화한다. 그러나 치매환자의 성격은 갑자기 변하고 혼돈하며, 의심하고, 무서움을 느끼기도 한다.
10. 흥미를 잃어버림
집안 일이나 사업 그리고 사교적인 일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에 흥미를 금방 다시 되찾는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사람은 심각하게 수동적이며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옆에서 자극하는 것이 필요하다.
85세 이상 되는 노인 중 5~10% 정도가 노년성 치매에 걸려 있다. 이보다 적은 숫자의 65세 이하의 노인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노년성 치매의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의심 받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는 알루미늄이다.
알루미늄은 광물질 중에서 가장 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알루미늄은 보크사이트 광석(Bauxite Ore)으로부터 생산된다. 약 50년 전부터 이 금속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부터 수 년 동안 알루미늄 소금이 야채를 절이는데 사용되어 왔다. 지금은 수도물, 산중화제(Antacid), 항발한제(Antiperspirant),그리고 다른 많은 제품들에서도 알루미늄을 찾아 볼 수가 있다.
혈액을 거르는 투석(Dialysis patients)환자들에게 종종 치매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치료 과정에서 알루미늄 성분이 함유된 약품을 사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도시에서 알루미늄을 사용해서 침전물을 제거한 물을 마시는 사람들 중에도 치매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혈액 투석환자들은 혈액속에 인(Phosphorus)의 양을 감소시키기 위해 알루미늄이 든 산중화제를 먹는다. 알루미늄은 혈액의 단백질에 붙어서 아주 쉽게 뇌로 침입한다. 그리하여 치매는 투석 환자들에게는 흔히 발생되는 합병증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괌도의 지질과 지하수에는 칼슘과 마그네슘의 양이 낮고 알루미늄의 양이 높다. 이러한 이유로 괌도에는 루게릭병 환자와 파킨슨병 환자가 아주 많다.
치료 방법
1.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에 수 시간씩 환자를 자연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밖에서 운동이나 일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2.운동은 치매 환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치료이다. 운동을 하면 치매의 악화 속도를 지연시키고 치료를 향상시킨다. 밖에서 매일 운동을 하라. 밖에서 할 수 없으면 안에서라도 운동을 하라.
3. 은행, 허똔 열매 차(Hawthorn Berry Tea), 인삼 그리고 겨우살이(Mistletoe)와 같은 약초를 사용하라.
4. 음식
ㄱ. 정제된 흰 설탕이나 자극성이 있는 양념, 식초 그리고 커피등을 사용하지 않은 완전한 채식을 하라.
ㄴ. 비타민 B-3, 비타민 E, 또는 달맞이 꽃 기름(Evening Primrose Oil)등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비타민 B 복합제(Folic Acid)는 치매 환자를 편안하게 해 준다. 비타민 B 복합제를 함유하고 있는 것들은 시금치, 브로컬리(Broccoli), 감자, 콩, 아스파라거스(Asparagus), 통밀빵, 강낭콩 그리고 라이마 콩(Lima Bean)등이 있다. 특히 비타민 B 복합제(Folic Acid)는 IQ를 높히고 반사 작용을 향상시킨다.
노인성 치매의 방지와 치료!
1. 음식, 화학물질, 그리고 독소에 알러지가 있으면 무력하여 정신이 맑게 깨어 있지 못하게 된다.
2. 치아의 은 충전물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다.
3. 눈 밑의 까맣고 늘어진 부분 그리고 흰 안색은 화학물질에 예민한 것을 알려준다.
4. 니켈(Nickel)또한 관절염, 루퍼스(Lupus), 파킨슨, 그리고 암을 발생시킨다.
5. 피해야 할 것들: 수도물, 환경 오염물, 스프레이, 공해, 그리고 탄화수소(Hydrocarbons) 의약품들도 문제가 될 수 있다.
6. 치매와 관계된 병들: 정신 분열증(Schizophrenia), 실리액병(Celiac Disease), 우울증, 혈당과 관계된 질병, 그리고 노이로제(Neurosis)
7. 근관(Root Canal)은 독을 발생시킨다.
8. 치매 환자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되며 술이나 마약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모든 음식물에 관계된 알러지를 치료하고 치아의 충전물(Filling)을 금속이 아닌 것으로 바꿔야 한다. 만성병들도 치료해야 한다.
9. 위의 열거된 치매의 치료 방법은 관절염, 치질, 고혈압, 그리고 귀에서 소리 나는 것도 치료한다.
신앙적인 치료 방법
1. 하나님께서 그 동안 베푸신 은혜들을 하나 하나 생각하여 감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눈다.
2. 성경 말씀을 암기한다.
3. 매일 성경을 읽고 깊이 명상한다.
4. 기도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5. 찬송을 암기하여 부른다.
6.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매 순간 기쁘게 생활한다.
의과대학 졸업반이었을 때, 나는 사람의 뇌와 정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권위 있는 죠지아 정신 연구소에서 수련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연구소에는 30여 개의 병실이 있었는데, 그 곳에 입원한 환자 중의 어떤 사람들은 뇌가 너무도 심하게 파손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걷거나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제한된 장소 즉, 침대나 철창이 있는 방이나 간단한 놀이 기구가 있는 방에 있어야만 하였기 때문에, 자주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을 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간호원들이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진정제를 주어야만 하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 나는 한 달에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진정제의 양을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에 약 500달러 가량의 돈이 진정제를 구입하는 데 지불되었다.
연구원들은 환자들의 방에서 잘 보일 수 있는 곳에 몇 대의 텔레비전을 천장에다 매달아 놓기로 하였다. 일반 가정에서, 어머니들은 어린 자녀들을 텔레비전 앞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설거지나 각종 집안 일들을 한다. 그래서 우리 연구진들도 환자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에는 어린아이들처럼 가만히 있을 것이며, 신경 안정제를 투입하는 양이나 횟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간호원들은 조금 더 쉽게 환자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 하였다.
텔레비전 세트를 설치한 후 3개월이 지난 다음, 우리는 신경 안정제를 구입하는데 사용된 지출액을 조사하였다. 그 때 우리 모두는 신경 안정제의 구입에 지출된 돈이 그 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사실에 대해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 우리는, 간호원들 자신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 환자들에게 진정제를 더 많이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진정제를 주는 3명의 간호원 모두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간호원은 텔레비전을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간호원은 종교적인 이유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세 번째 간호원이 근무하는 책상은 전혀 텔레비전을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나와 연구원들이 진정제의 투입량이 늘어나게 된 이유를 조사한 결과, 우리는 텔레비전이 환자들의 신경을 예민하고 짜증이 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즉시로 우리는 텔레비전을 끄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한 달에 사용되는 안정제의 양이 즉시로 감소되어서 예전처럼 500불 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 대개, 쓰레기(Trash) 같은 장면들이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골치 아픈 문젯거리(Trouble)들이고, 무가치하고 하찮은(Trivia) 것들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것을 가리켜서 텔레비전을 세 가지 의 T(Trash-쓰레기, Trouble-문젯거리, Trivia-사소한 일)를 쏟아내는 상자라고 불렀다. 텔레비전을 매일 보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피해를 가장 적당하게 설명하자면, 가장 적은 피해는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가장 최악의 피해는 자신의 영혼이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에 의해서 오염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과 경건한 신앙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마다, 텔레비전을 가정에서 몰아내야만 한다. 바라보는 대로 변화된다는 영적 원칙은 텔레비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9.콩팥과 물
Susan Kang
인체의 93%는 액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체의 각 기관들이 잘 활동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콩팥에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혈관을 통해서 혈액이 운반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5쿼트 정도의 혈액을 가지고 있는데, 하루에 약 2000 쿼트 정도의 혈액이 콩팥을 통과하며 순환하게 된다. 그러므로 콩팥은 하루에 400회 정도 혈액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 정화 작용의 결과로 생긴 1.5쿼트의 부산물(쓰레기)이 소변으로 배출되게 된다.
날마다 땀, 소변, 대변, 그리고 폐를 통하여 수분이 배출되기 때문에 충분한 수분이 인체에 공급되어야 한다. 체내에 수분이 부족할 때에는 콩팥에서 항 이뇨제 작용을 하는 화학물질이 배출되어 소변이 노란색으로 나오게 된다.
수분이 부족할 경우, 인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우울증, 짜증, 피로, 정신 장애 등등. 하루에 6~8컵의 물을 마심으로써, 수분 부족증을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중이 증가되는 것을 막는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체내에 수분이 부족하면, 콩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간이 그 부담을 안게 된다. 체내 지방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대사작용을 하는 간이 과도한 부담을 안게 되면, 지방의 대사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체내에 불필요한 지방이 축적되게 되어 결과적으로 체중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충분한 양의 물을 마시는 것은 건강 뿐 아니라 체중 조절에도 도움을 준다. 수분은 인체로부터 염분을 몸 밖으로 배출해 내기 때문에 체중 조절에 도움을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양의 염분을 섭취하기 때문에 충분한 양의 물을 마심으로써, 염분이 체외로 배출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몸의 건강은 얼마나 충분한 양의 물을 섭취하는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귀, 눈, 입도 그들의 올바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수분의 공급이 요구된다. 또한 감기나 고열 역시 수분의 부족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한 양의 물을 마시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은 고열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물 2컵을 마시는 것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아침에 마시는 물은 인체가 하루를 위해서 준비시키며, 대변이 잘 배출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몸에 수분이 부족할 때에는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신호가 나타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배고픔을 느낄 경우, 실제로는 배고픔이 아니라 인체가 수분이 부족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일 수 있다. 식사 시간이 아닐 때에 배고픔을 느낄 때에는 한 컵의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콩팥은 체내로부터 쓰레기를 청소해 내고 수분이 체내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예수께서는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다(요 7:37). “목마른 자도 오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실지어다” 요한계시록 22:17. 우리가 그 분께로 가면 생명수를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처한 환경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신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염려, 불안, 분노와 같은 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는 동안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지칠 대로 지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그 분께로 가면 그 분께서 수정같이 깨끗한 생명수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적셔 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염려로부터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께로 가서 생명수를 마시면, 우울증, 짜증, 감정 및 정서불안과 같은 문제들이 사라지게 된다. 충분하게 물을 섭취하고, 예수께로 가서 생명수를 받아 마심으로써, 우리는 유쾌하고 밝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10.구원의 열쇠
서론-은혜의 의미
강병국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
살인자가 사형 선고를 받고 형 집행 날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법 아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는 죄책감과 아울러 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된다.
그러한 암담한 입장에 있는 죄수를 대통령이 그의 정상을 참작하고 불쌍히 여겨 용서하고 사면해 줄 때에 그는 더 이상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 된다. 법이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 경찰이 막을 수가 없다. 그는 법을 집행하는 최고의 지도자에게서 용서를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을 더 잘 순종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가 값없이 받은 그 용서가 너무나 고마워서 이제는 평생동안 법을 존중하며 살 것이라고 오히려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이면서도 많은 경우에 이해가 부족한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말들을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시다고 찬송을 부른다. 그러면서도 많은 경우에 은혜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은혜란 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부족한 사람들을 불쌍히 봐주시는 의미 그 이상의 것이다.
은혜와 믿음
엡 2:8,9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 은혜를 받는 방법이 믿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은혜를 받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순종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하고 있다. 1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계속 적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은 단지 어떤 신조에 대한 동의나 이해 정도가 아니다. 믿음은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고 설명 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신 행위가 먼저 선제한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되어 반응하게 되는 것이 믿게 되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 받았다” 는 말의 의미
에베소 2장에서 설명하는 우리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은혜가 그 초점을 이루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선한 행실이나 순종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더 순종하며 선한 행실을 할 수 있게 힘을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 2:1-7절을 읽으면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은혜라고 하는 단어의 뜻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지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지금 읽은 말씀은 폭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쉽고도 분명한 말씀을 가지고도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통속적인 믿음과 은혜에 대한 이해가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에베소서 2장은 은혜를 부활의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들을 다시 살리셔서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켜 주셨다고 말이다. 5절은, 바로 그것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죄에서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묶여 있었던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는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끝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붙잡혀 있었던 과거의 죄의 힘, 그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일도 동시에 행하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일 매일 은혜를 항상 공급하여 주신다. 물론 받는 자들이 계속 원할 때에 그러하지마는. 다윗은 시편 51:1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은혜로 받는 구원에는 새롭게 태어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포함된다. 그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생애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참된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양이 되어야 양으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처럼 살려면 마음이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양처럼 살기 위하여서는 먼저 양의 마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양이 죽은 동물의 시체를 보고 뜯어 먹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양으로 살아 갈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양이 아니라 늑대가 아니겠는가! 양들이 왜 서로 으르렁 거리지 않고 하루 종일 풀을 뜯으며 평화롭게 지낼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양이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날과 꼭 같은 마음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거듭나지 못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은혜 받은 자의 태도
1800년도 중반에 미국 죠지아 주에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한 부자가 노예 시장에 가서 아주 반항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한 쓸모없는 흑인을 꽤 많은 돈을 주고 샀다. 그 주인의 마차에 실려 오면서 그 노예는 줄 곳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일 하지 않을 것이요. 나는 당신들을 증오합니다.” 그러한 말을 계속 듣고 있던 주인이 농장에 도착하자 마차에 묶여 있던 그 노예의 손과 발목에서 사슬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을 비싼 값을 주고 산 이유는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요. 당신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였소. 이제 부터 당신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당신은 이제 나의 친구요. 이제 부터 당신은 자유의 몸이요. 마음대로 하시요.” 이 흑인은 처음에는 그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주인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자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내가 당신을 오해하였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처럼 좋은 분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주인님 집에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요. 저는 평생 주인님을 섬기겠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순종하면서 평생 살겠습니다. 의무적으로가 아니라 주인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평생토록 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은혜 받은 자의 태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은혜 받은 자의 삶
로마서 6:1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의 힘은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게 해 준다. 은혜로 계명을 폐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만들어 준다. 진실로 용서 받은 자들만이 하늘에 있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시고 나면 이 세상에 다시는 죄를 짓는 자들이 없을 것이다.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법을 범한 불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마귀가 가져온 또 다른 속임수에 기만 당하지 않도록 하자.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니 그저 구원을 즐기며 감사하면 된다고...
갈 2:20과 롬 6: 19-23의 말씀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많은 오해들로 부터 보호 받게 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 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부-기독교회에 들어온 구원에 대한 오해
한 가지 조건을 전제로 주어진 특권
만일 성경 전체에 나오는 말씀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선택하겠는가?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야말로 성경 전체의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순종을 전제 조건으로 놀라운 특권들을 주셨다.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순종의 생애를 사는 한, 놀라운 선물들이 그들에게 영원히 약속되어 있었다. 생명, 의로운 성품, 지구의 모든 생물을 지배함, 그리고 에덴 동산의 아름다운 집 등이 모두 그들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가지의 조건 하에서 이 모든 축복들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단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는 불순종, 즉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영생과 구원을 빼앗아 갔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유혹한 사건은 인류의 운명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인류의 시조가 죄를 범한 이후부터 그리스도와 사단, 진리와 오류, 순종과 불순종 사이의 대쟁투가 시작되었다. 성경의 모든 장마다 인류를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담겨져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물론, 여기서 죄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
구원의 조건
가끔씩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왜 율법에 대한 행함과 외부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해서 염려해야 하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인 마음과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셨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외부적 행위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십자가의 죽음과 희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는 감사와 사랑의 정신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법과 일치되도록 하심으로써 구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에 일치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도 순종에 관한 동일한 이슈가 펼쳐져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 또는 짐승의 표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받게 된다. 시험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을 전제 조건으로 해서 각 영혼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마지막 시대에 구원 받는 성도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집약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조를 에덴 동산에서 살도록 허락하셨던 조건이 인간이 하늘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구원의 조건은 시대를 통하여 언제나 불변하는 것이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하늘에서 죄와 반역이
반복되지 않게 되는 이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안전한 사람들에게만 영생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에덴 동산에 선악과가 있어서 아담과 하와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불순종을 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에 데려간 후에도, 그들에게 여전히 선택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물론, 성경은, 하늘에서는 다시는 반역이나 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는 6천년 동안 있었던 것과 같은 죄와 반역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죄와 반역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기 보다는 차리리 죽기를 원하는 거룩한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죄와 반역이 없게 되는 것이다. 천사들은 하늘이 안전할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도들이 불멸의 몸을 받기 이전에 세상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악몽이 구원 받아서 하늘에 올라간 성도들에 의해서 다시 재현될 위험은 전혀 없다. 성도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죄와 배도의 위험천만함을 온 우주계에 증거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체험적인 간증이 온 우주를 죄로부터 보호하게 될 것이다.
사단의 기본 전략
사단이 구상하는 기본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것은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죄를 품고 있는 자를 결코 하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을 하는 가가 우리의 주인을 결정한다. 바로 그 자가 우리의 주인이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중단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그치는 것이다. 사단의 계획은 그대로 하여금 사단 자신을 순종하도록 함으로써 그대를 사단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한, 그대가 무엇을 할지라도 사단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리스도 교회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지라도, 그대 개인의 마음과 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있다면, 사단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의식과 활동에 생애를 바쳤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 함으로써 사단의 종이 된 예가 너무나 많이 있다. 사실상, 그들도 자신들의 불순종에 대한 이유를 말할 때, 매우 종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주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불법한 생애를 살아감으로써 영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하였지만, 하늘에 들어가기 직전인 세상 끝에 예수께로부터“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선언을 듣게 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는가? 왜 이런 비극이 생기게 되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예수께서는 이 성경절의 바로 앞에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해 두셨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매우 많이 불렀지만, 그들은“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열심을 내어 일했지만, 그들의 열심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5:9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그분을 열심으로 경배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잃어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에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못 경배하는 것이며, 그들의 경배가 무가치하고 헛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들의 경배를 받으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옆으로 제겨놓고, 인간이 만든 계명과 교리 즉,“사람의 계명으로 교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순종을 가장 높은 경배 형태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불순종에 이유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귀에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유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사울의 경우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승인하셨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을 위하여 보냈을 때,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라고 명령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명령이 너무 지나 치다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진영으로 어떤 전리품도 가지고 돌아오지 말고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다.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하였다.
그런데 사울은 살찌고 건강한 얼마의 가축을 남겨 두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을까? 전쟁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지자 사무엘을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의 불순종을 매우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말을 들어보자.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리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사무엘상 1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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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그러한 대답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들릴지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계획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사울의 대답 속에는 가축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남겨서 가져온 것에 대한 책임을“백성”들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사울은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사울은 왕으로서 책임을 맡은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자였다. 그는“그 이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오직 적은 불순종이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들이 남겨 가지고 온 가축들은 그들 자신의 부의 축적을 위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질 좋은 가축들을 골라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울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그러한 논리를 받아주실 수 있겠는가? 사무엘 선지자의 칼날같이 예리한 말을 들어보라.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사울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번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가장 높은 경배의 형태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비록 사울왕이 불순종에 대하여 매우 종교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를 말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거절하셨으며, 더 이상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취급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 이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대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라.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것들만 골라서 순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계명과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는 여러 가지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서 거절하거나 무시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울 왕이 범한 잘못을 뒤쫓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깊이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잘 납득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 아이일 지라도 이해할 수 있게 분명한 요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계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는 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력을 하나님의 지혜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이 주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있으며, 심지어는 장사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범하고 있다.
창조주께서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기록한 명령을 감히 거역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헌금을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물론,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원불변의 법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목사로서 나는 지난 수 년 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십계명을 범하도록 가르치는 설교들을 들어왔다. 그러한 설교자들 중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였으며, 진지한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즘, 자동차 뒷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웃어보세요!”, “그대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손을 흔드세요!” 사람들은 사랑이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때에는 사랑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이 희생과 손해를 요구할 때에는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 따르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14:15). 바로 이것이 사랑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값싼 사랑이 아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거품과 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감정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셨으며, 불쾌한 말이나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셨으며 당황해 하거나 초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가장 극적인 상황이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라도 인내하면서 평온을 유지하셨으며 다른 사람의 칭찬에 고무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원수의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폭력과 죄악과 흥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태양이 구름 위에서 운행되는 것처럼 행동하셨다. 인간적인 정욕과 소요와 시련은 모두 그분 밑에 있는 것처럼 그분께서는 의연하게 행동하셨다.
그리스도의 갈망
구주께서는 자기를 알아봐 주기를 갈망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피로 사신 자들의 동정과 사랑에 주리고 計신다. 그분께서는 말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시고 사람들이 그분께로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신다. 사람들이 그분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나갈 때마다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사단이 만든 두 가지 위조 지폐
사단은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도록 유도할까? 그가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지금 가장 뛰어난 위조범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매우 교활한 기만자인 사단은 종종 선과 악이 혼합된 형태의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성경 말씀을 이용하기조차 한다.
물론 사단이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을 때에 그러했듯이, 사단 역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 하도록 이끌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속임수, 즉 율법주의와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기독교회 속에 밀어 넣고 있다.
첫번째 위조 지폐 - 율법주의
사단의 첫번째 위조 지폐는 다음과 같은 성경절을 이용하여 조작되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요한계시록 22:14(영문 킹제임스 성경 번역). 사단은 이 성경절을 언급하면서“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명에 잘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어떤 면에 있어서 이러한 주장은 진리이다. 사실상,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 속에 매우 치명적인 오류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계명을 지킬 만큼 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구원의 계획과는 매우 상반된 것이다. 자신이 한 순종과 희생의 대가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모든 이방 종교 가르침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기만적 가르침에 속임을 당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율법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받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가 죄를 범한 이후에 인간의 본성에는 매우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훨씬 순종하기 쉬운 상태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순결하였으며, 타락하지 않았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받은 모든 유혹은 밖으로부터 오는 유혹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은 타락한 본성이며, 우리 안에 가장 큰 유혹의 샘이 있는 본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좀 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피할 수 있다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사단의 기만적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죗된 성향을 조절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좌절하여 다음과 같은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도 열심히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이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율법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담대하게 더욱 더 많이 범하는 타락한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순간부터 남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즉, 남은 생애 동안에 단 한번의 실수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생애가 그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미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범한 죄로 인하여 그대에게는 이미 죽음이 선언되어 있다. 어떠한 종류의 선한 행위로도 그대가 과거에 범했던 죄의 기록을 변경시킬 수 없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이웃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의 죄가 사라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지금까지 오직 한 사람만이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은 완전한 생애를 살았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에는 반복되는 더러움과 추함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과거에 행한 기록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완전한 의만을 인정하시며, 의로운 행위만을 가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그러한 생애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지 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배려가 베풀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5장 10절에서 발견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여기서 잠깐 멈춰서 이 성경절의 전반부를 검토해보자.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기별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은 말하기를,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죄를 속하는 대속이 완성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이와 같은 화해를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십자가가 원수 관계를 없애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는가?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무엇을 지시고 가셨는가? 하나님의 법은 죄의 대가로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육체로 아담과 하와의 모든 자손들이 범한 죄의 책임을 지셨던 것이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한 책임과 그분의 죽음을 교환하셨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위에 내려져 있는 정죄와 사형 명령을 취하셔서, 그것을 십자가로 지시고 가신 후, 우리에게 내려져 있던 죄의 값인 형벌을 대신 당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범죄한 죄들에 관한 추한 기록들을 덮어주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이 완전한 의로운 생애를 사심으로서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전가 시켜 주시는데, 이로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마련된 구원과 영생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에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시며, 예수께서 우리 죄의 책임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신 것으로 취급하신다.
로마서 5장 10절의 후반부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설명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생애,life)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완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 즉, 둘 모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죄들은 예수께서 이루신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덮어짐을 당하게 되며, 미래의 승리는 인간의 육체를 쓰시고 죄없는 삶을 사신 그분의 생애로부터 나오는 공로와 모본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 기록책에 이미 기록된 행위들을 변경할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되는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만 지워질 수 있다. 그리고 장래의 행위들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사시면서 경험하셨던 승리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사단이 공격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을 죄짓게 만드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두 번째 위조 지폐 - 값싼 은혜의 복음
사단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교묘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놀랄 만큼 설득력 있는 위조물을 만듦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혼돈 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다. 사단의 주장은 이렇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불필요한 것이다.” 사단의 이러한 논리 중에서 어떤 부분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 속에 무서운 오류와 기만이 숨어 있다는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행함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우리가 순종의 의무로부터 면제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교묘한 논리에 이끌려서 그의 먹이가 되고 있다. 나는 나의 복음 전도 사업 중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수많이 보아왔다.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교파와 교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회를 개최했을 때, 첫 며칠 동안은 하나님의 진리에 열렬하게 동의하다가도, 하나님의 법과 은혜에 관한 문제에 들어가면 즉시로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온다: “목사님, 우리에게 옛날 구약시대에 있었던 법을 강요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쟎습니까? 우리는 지금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쟎아요?” 여기서, 우리는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강력한 반응을 나타내는 분들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그들을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기만인 값싼 은혜 속으로 끌고 들어갔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순종과 은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성서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오늘날, 두 가지 극단이 있는데, 사단은 우리 모두를 이 두 가지 극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믿음과 행함에 관한 균형은 믿음과 행함이라는 글자를 양쪽 끝에 새긴 노를 젓는 것과 같다. 만일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배는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면서 맴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이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구원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면들이 올바르고 균형 있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가 부딪치거나 투쟁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이라는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낸다. 성경은“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야고보서 2:26).
우리 모두의 가장 큰 원수인 사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교활하게 위조해 놓았다. 그는“의로움”위에 율법주의라는 보자기를 뒤집어 씌어 놓았으며,“믿음”은 순종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값싼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의로움”과 진짜“믿음”을 보지 못한 채, 가짜 의와 가짜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수많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더럽고 추한 것으로 둔갑 되어 있으며, 믿음이 값싼 감정에 불과한 것으로 추락되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가지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사도 야고보는 그러한 믿음은 행함이 전혀 없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야고보서 2:19~20. 야고보가 지적인 동의나 정신적인 동의에 불과한 믿음을 귀신의 믿음으로 묘사하였던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은 행함이 있지만,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근거로 이루어 지는 것을 말한다.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정지 신호를 보고 있는 운전사의 예를 통하여 두 번째 부류의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자동차를 정지시켰다. 그가 왜 자동차를 정지시켰는가? 다른 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자동차와 충돌하여 죽는 것이 무서워서 정지하였는가? 아니면, 교통 경찰관이 자신에게 법규 위반 티켓을 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지하였는가? 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두려움에 근거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은 마치 불을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의 끝에 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 불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하는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믿음은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세 번째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세 번째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믿음인데, 그 믿음은 갈라디아 5장 6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모든 순종의 행위가 사랑에 그 근거와 동기를 두고 이루어질 때에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되는 것이다.
3부-죄와 구원
사랑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동기가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앞서,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된 몇몇 성경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사도 요한은 사도 중에서도 사랑의 사도로 불리 울 만큼 사랑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이 성경절은 매우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2제자 가운데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랑의 사도인 요한 이야말로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던 사도이다.
우선, 우리는 죄의 정의에 대해서 기록한 성경절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성경절을 요한의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4. 부디 이 성경절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간직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앞으로 계속해서 죄의 본성과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도 요한이 제시한 죄의 정의를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지만, 여기서“법”이라는 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여기서“법” 을 무슨 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7장 7절에서 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을 준비해 두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십계명의 열째 계명(탐심)을 언급하면서, 죄는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말하였다. 죄는 법을 범하는 것으로서, 특히 십계명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
요한일서 3장을 계속해서 읽어나갈 때, 4절에서 기록된 죄의 정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즉, 죄의 정의는 도덕률인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5절에 전개되는 요한의 기록을 보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예수께서 우리로부터 가져가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 죄이다.” 무슨 죄인가? 십계명을 범한 죄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가 십계명을 범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계속해서 요한은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6절에 나오는 성경절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굉장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굉장히 강력한 설교를 많이 들어 왔는데, 어떤 목사나 설교가도 이처럼 강력한 설교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6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십계명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분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라는 것이다. 충격적인 이야기 아닌가? 정말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좀더 읽어 보자. 좀더 강력한 기록이 나온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7~8절. 여기서, 요한은 진리를 입으로 공언하는 자들과 진리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사도 요한은 죄와 구원의 문제를 설명하면서“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앞에 펼쳐져 있는 놀라운 기만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이다. 마태복음 24:3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재림에 관한 징조를 질문 하는데, 예수께서는 4절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다음, 마지막 때에“휴거”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놀라운 혼돈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가르침도 이와 유사한 혼돈 속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할 수 있다. 죄의 문제가 혼돈될 것이다. 순종과 법에 관한 진리가 혼동되고 왜곡될 것이다.
요한은 어떤 사람도 십계명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못박아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람은 사실에 있어서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요한은 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 평신도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말씀을 기록하였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seed)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한일서 3장 9절. 성경에서 여자의 자손(the seed of the woman)은 누구를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씨(후손)이시며, 하나님의 개심한 참된 자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계명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불순종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거하실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죄인의 마음 속에 그분께서 거하실 수 있는 보좌를 마련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자. 어거스틴과 요한 칼빈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상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로 잠입하여 들어왔다. 그 이상한 가르침은 고의적인 불순종의 생애를 걸어가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무서운 가르침을 경계하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칭의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변화시키는 일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입장을 변화시킨다는 가르침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마시고 있다.
칼빈의 사상은 비록 우리가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덮어주시는 의인 칭의가 하나님 존전에서 우리를 가납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속죄(atonement)는 우리를 죄의 결과인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지, 죄 그 자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가르침이 칼빈의 사상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는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어떠한 것이냐 하는 그 죄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칼빈의 사상이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쨌든 간에 죄는 그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치명적인 것이 되지 않게 된다. 개심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영원한 멸망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지만,“구원 받은”후에 범한 동일한 죄는 그 그리스도인을 지옥으로 보낼 수 없게 된다.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대신에 죄의 성격(본질)을 변화시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는 장난이 아니지 않는가? 칭의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범하고 있는 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새롭고 영적인 삶을 가져다 주는 개심(거듭남)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마음과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칭의는 죄를 고의적으로 범하는 동안에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칭의는 계속적으로 범해지는 죄를 가리워 주는 망또와 같은 것이 아니다. 칭의는 죄책감과 죄의 권세를 벗기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잘 이해하라! 진짜 믿음은 항상 순종이라는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from sins) 구원해 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죄 안(in sins)에서 구원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from their sins)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성경은 죄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말하고 있지만, 단 한번도 죄를 어떤 좋은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우리들이 범하는 죄의 양을 줄이라는 식의 표현을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의 어떤 곳에도 불순종의 횟수를 줄이거나 감소시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죄는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알고 있는 죄들을 단호하게 버려야 하며, 거절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분께서는“가서 그 죄를 줄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노니 죄를 점점 더 줄여가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내가 너희에게 쓰노니 너희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죄에 대하여 그의 편지서를 기록할 때에 전혀 망설이지 않은 태도로 분명하게 말하였다. 어떤 목사나 설교가도 그가 했던 것처럼 강력하게 죄에 대하여 말하지 못했다. 요한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들어보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한일서 3:8.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동안에도 그 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다고 믿는 어리석음은 전혀 성경에 의해서 뒷받침 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분의 능력은 우리를 어떤 특정한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로부터 구원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다음, 우리를 계속되는 죄의 세력 아래에 그대로 남겨두기를 원하신다고 믿는가? 만일 그대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대는 하나님을 죄에 대하여 우리의 공범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건져주시며 구원하실 수 있다.
4부-하나님의 심판
이제, 심판은 우리의 행함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자. 물론, 이러한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율법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요한은“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요한계시록 20:12~13.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가? 행위가 심판의 기초가 된다는 말은 성경적 칭의와 상반되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해서 행위가 심판 받게 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행위로 심판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를 어떻게 시험하시고, 어떻게 측정하실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절되거나 가납 받도록 만드는가? 사람들이 행한 행위의 양인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몫을 위해서 충분하게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는 하늘 진주 성문을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행함이 부족한 자들은 성밖에 남겨짐을 당하게 될 것인가?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하늘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2~23.
이 말씀 중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그들 자신들이 행했던 행적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부인하거나 책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수많은 행위에 대해서 길게 늘어놓았다. 행위의 양에 있어서는 조금의 부족도 없었다. 행위의 양은 인정되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행위의 양에 근거하여 심판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 받지 못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이 행하였던 행위의 종류들을 볼 때에 더욱 혼돈하게 된다. 그들은 많은 행위를 하였을 뿐 아니라 매우 놀라운 행위들을 하였기 때문이다. 행위의 양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를 짓는 데에 수백만 달러를 헌금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도 하늘 문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이 성경절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엄숙한 명령이 그들에게 내려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성경절을 읽으면, 모든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려나가서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3:15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셨다. 물론,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시며, 그것에 의해서 최후의 심판을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을 읽어보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요한계시록 3:15~16.
여기에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풀어 헤치는 비밀이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심판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행위의 무게나 높이에 의해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열에 의해서 받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모든 순종은 하나님을 향하여 헌신과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의해서 모든 동기가 벗겨질 것이며, 검토될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불타는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행위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행위 전체가 가치 있는 것으로 판명되든지, 아니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으로 향기로운 향이 되어서 가납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토해 내치실 만큼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모든 것은 동기에 달렸으며, 누가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힘을 주었는 가에 달려있다. 그러한 행위의 원동력이 하늘로부터 온 능력인가? 아니면 지옥으로부터 올라온 세력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육체의 행위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인간의 노력이지만, 마음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행위는 그와 정반대이다. 이러한 행위는 진짜 믿음과 사랑의 신임장을 가지고 있는 행위들로 판명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이후부터 지금까지 시험 기준을 변경시키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종류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당시, 우리의 시조인 아담은 타락하지 않은 거룩한 본성에 의해서 순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의 후손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조화되지 못하는 타락한 본성을 유전으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기적과“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가진 거듭난 피조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또한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길,“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9:17).
이 두개의 성경절 사이에는 서로 상충되는 어떠한 것도 없다. 이 두개의 성경절은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 없이 어떤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으며, 고의적으로 계명을 어기어 불순종의 길을 걷는 어떤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두개의 성경절은 동일한 구원을 두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계명을 순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진리는 개심하여 거듭난 경험이 없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순종하기를 거절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거짓말에 대해서 귀를 막아라. 또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라는 기만을 경계하라. 그러나 그대의 그리스도인 생애에 열매를 맺게 하는 숨겨져 있는 뿌리인 마음과 동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라.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생애를 산다면, 그대의 마음에는 놀라운 즐거움과 만족함으로 채워질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연결이 지속될 것이다. 누가 그대를 율법주의자라고 정죄할 지라도,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대를 정죄한 그 사람이 스스로의 말에 의해서 정죄 받게 될 것이다. 사랑에서 기인한 그대의 행위는 율법주의와는 철저하게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5부-믿음과 순종의 두 예화
1. 연못가의 환자
“예루살렘에 있는 양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한복음 5:2~3
이 연못의 물은 때때로 움직였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초자연적 능력의 결과로 받아들여졌으며, 누구든지 물이 요동한 직후에 이 물 속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그가 어떤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나음을 받는다고 믿었다. 수백명의 환자들이 그 곳을 방문했으나 물이 요동할 때에는 무리가 너무 많아서 자신들보다 약한 남자, 여자, 아이들을 발로 짓밟으면서 서로 앞을 다퉈 밀려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모여 들었기 때문에 그 못에 가깝게 접근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못 가까이에 갔을지라도 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연못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허다하였다. 그 곳에는 오두막이 세워져서 환자들이 낮의 뜨거움과 밤의 냉기에서 보호 받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거기에는 날마다 고침을 받겠다는 헛된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 기어와서 이 행각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는 예수께서 홀로 걸으시다가 그 못에 이르셨다. 그는 불치의 환자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연못이 요동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치유력을 행사하셔서 그곳에 있는 모든 고통 당하는 자를 건강하게 하시기를 갈망하셨다.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사람들이 예배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치료의 행위가 유대인들의 편견을 자극시켜서 당신의 사업에 장애를 일으킬 것을 아셨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한 사람의 가장 처참한 형편을 보았다. 그는 38년간을 속절 없는 앉은뱅이로 지내온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 불치의 질병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그 환자는 홀로 쓸쓸하게 누워서 자기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겼다고 생각하면서 오래 동안 불행의 세월을 보내 왔다. 물이 요동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에는 그의 무력함을 측은히 여기는 사람들이 그를 행각에까지 실어다 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 꼭 혜택을 입어야 할 순간에 그를 도와서 물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못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보다 힘센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앞서 뛰어들어가곤 하였다. 그는 이기적이며 광분하는 무리와 경쟁할 수 없었다. 그 한가지 목적을 위한 그의 집요한 노력과 근심과 계속적인 실망은 그의 남은 기력을 신속히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때때로 그 못을 바라보려고 머리를 들곤 하였다. 바로 그 때에 한 부드럽고 연민 가득한 얼굴이 그를 굽어보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묻는 말에 그의 온 주의가 끌렸다. 그의 마음 속에는 희망이 솟아났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타오르던 용기는 곧 시들어졌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자주 그 못에 들어가려고 애썼던 가를 상기했다. 이제 그는 물이 다시 동할 때까지 살아 있을 가망조차도 거의 없었다. 그는 지쳐서 얼굴을 돌리고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환자에게 당신을 믿는 믿음을 활용하도록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순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온 믿음을 다하여 그 말씀을 굳게 붙잡았다. 모든 신경과 근육이 새로운 생명으로 전율하고, 절던 그의 다리는 건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의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자기의 뜻을 정하자 그의 모든 근육이 그의 의지에 응답하였다. 자기의 다리로 일어서면서 그는 자기가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그에게 미리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람은 멈추어 의심하여 그가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하자 힘을 얻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통하여 영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왔다. 우리의 영혼은 마비되어 있다. 그 쇠잔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유혹을 이기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깨닫고 그들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만들 영적 생명을 갈급 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들은 헛되이 분투한다.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4)고 부르짖는다. 이러한 낙심하고 몸부림치는 자들은 위를 쳐다보라. 구주께서는 자기의 피로 사신 자들을 굽어보시고 말할 수 없는 연민과 긍휼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대에게 건강과 평안 가운데서 일어서라고 명하신다. 그대가 완쾌됐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단순히 그의 말씀을 믿으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분을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죄로 죽었던”(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는 연약과 불행과 죄의 사슬에 매인 포로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2. 청년 관원
마 19장 16~23절, 막 10장 17~33절, 눅 18장 18~23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이렇게 질문한 청년은 관원이었다. 그는 큰 부자였으며 책임 있는 지위에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나아온 어린이들에게 나타내신 사랑을 보았다. 그 분께서 그토록 부드럽게 어린이들을 영접하여 그의 팔에 안으시는 것을 본 그의 마음은 구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그는 매우 깊이 감동되어 예수를 따라 달려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영혼과 모든 인간의 영혼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를 성실하고도 열렬하게 다음과 같이 질문 하였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BR>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관원의 성실성을 시험하고, 자기를 선하다고 하는 그런 사고 방식을 그에게서 뽑아내고자 하셨다.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그가 깨달았을까? 그의 마음의 진정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이 관원은 자기 자신의 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어떤 점에 있어서도 결점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으나 그러면서도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가 갖지 못한 어떤 것의 필요를 느꼈다.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처럼 그를 축복해서 그의 영혼의 필요를 만족시키실 수는 없으실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이웃에게 대한 사람의 의무를 보이는 몇 계명을 인용하셨다. 관원의 대답은 당당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의 생애를 환히 아시고 그의 품성을 살피시는 것처럼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으며 실질적으로 그의 품성을 변화시킬 평화와 은혜와 기쁨을 주고자 갈망하셨다. 예수께서는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청년에게 이끌리셨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한 그의 확언으로 청년의 성실함을 아셨다. 구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마음의 헌신과 그리스도인 다운 선행의 필요를 깨달을 수 있게 해줄 분별력을 그의 마음속에 일으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바칠 최고의 사랑을 의식하고 그 부족함을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안에 숨기는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그에게서 발견하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만약 이 관원이 구원의 사업에 당신과 동력자가 된다면 이 청년이야말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이 될 것을 아셨다. 만일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지도 하에 둔다면 그는 선을 위한 한 능력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관원이 구주와 연합했더라면 그는 자격, 즉 그로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한 능력이 될 수 있게 해주었을 자격을 구비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현저하게 드러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품을 꿰뚫어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 관원의 마음에 일어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낳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당신의 동력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는 거울로 만드시고자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품성을 탁월하게 향상시켜 주께서 쓰실 수 있도록 성화 시키기를 원하셨다. 만약 그 관원이 그 때에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쳤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가 이것을 선택하였더라면 그의 장래는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예수께서는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관원의 마음을 읽으셨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한 가지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심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였다. 만일 이 부족이 보충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온 성질과 품성을 부패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방종은 이기심을 더욱 굳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청년 관원에게 하나의 시험을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보화와 세속적 위대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셨다. 그가 만일 예수를 따른다면 하늘의 보화가 그에게 약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포기하고 그의 의지를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이 청년 관원에게 제공되었다. 그 관원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늘의 보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 받을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지고 구주를 따라 극기의 길을 가야만 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관원에게는 사실상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는 초청이었다. 선택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가 회개하기를 열망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품성의 병든 곳을 그에게 보이셨으며, 청년이 그 문제를 마음 속에서 저울질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큰 관심으로 주목하고 계셨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모든 일에 그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의 야심찬 계획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구주께서는 청년이 성령의 초청에 응하기를 바라시면서 얼마나 열렬히 간원 하셨으며, 얼마나 갈급한 심령으로 그 청년을 바라보셨던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완성시킬 수 있는 곳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은 엄격하고 가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만이 관원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었다. 그의 높은 지위와 재산은 그의 성품을 악으로 인도하는 교묘한 감화를 끼치고 있었다. 그것을 계속 간직한다면 그것들은 하나님 대신 그의 사랑을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소라도 물러가는 것은 도덕적인 능력과 효능들을 감소시킬 것을 계속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사물을 귀중히 여기면, 그것들이 아무리 불확실하고 무가치할지라도 마음을 모두 빼앗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원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였다. 만일 그가 구주께서 주시겠다고 제의하신 선물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더라면 그는 지체 없이 그리스도의 추종자의 일원으로 가담하였을 것이다. 그는 명예로운 유대인의 공회의 일원이었다. 사단은 그의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서 청년 관원의 장래가 유망하다는 말로 아첨을 하게 하였고, 돈과 명예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의 보화를 원하였지만 그의 재산이 가져올 현세의 유익도 원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음을 슬퍼하였다. 그는 영생을 원하였으나 기꺼이 희생하려고 하지 않았다. 영생의 값이 너무 큰 것처럼 생각되고 “재물이 많으므로” 그는 슬퍼하면서 떠나갔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왔다는 그의 주장은 기만이었다. 그는 재산이 자기의 우상임을 보여 주었다. 세상이 그의 애정의 첫째 자리를 차지한 동안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구원과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구원과 축복 자체를 더 사랑하였다. 그리스도는 청년에게 당신과의 친교를 제의하셨다. 그분께서는 “나는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자신의 명예나 재물만큼 귀중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하늘 보화를 위하여 보이는 그의 세상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 큰 모험 처럼 느껴졌다. 그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제의를 거절하고 떠나갔다. 그 때 후로 세상은 항상 그에게 있어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호된 시련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와 세상을 저울질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택한다. 그들은 젊은 관원처럼 나는 이분을 나의 지도자로 모시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구주로부터 돌아선다.
이 청년에 대한 그리스도의 취급 하심은 중요한 교훈으로 제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종들이 따라야 할 행위의 규범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단순히 법문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실 생애로 옮겨지고 품성으로 예증될 수 있는 순종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과 순종에 대한 분명한 표준을 세우셨다. 그리스도와 동력자가 되고, “주여 나의 모든 소유와 나의 전 존재가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하늘을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제시된 조건들 때문에 돌아서 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든 사람들은 숙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아니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라. 관원은 “아니요. 나는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구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맡기신 사업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세상에서 그분의 사업을 진척시키는 데 사용하자고 제의하신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구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 관원의 재산은 그가 충실한 청지기임을 입증할 수 있도록 그에게 위탁된 것이었다. 그는 이 소유물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분배해야 만 하였다. 그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재물과 재능과 기회를 위탁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자를 도와주는 일에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게 하신다. 그에게 위임된 선물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사용하는 자는 구주와 동력자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품성의 대표자로서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
젊은 관원의 경우와 같이 신임 받는 높은 지위에 있고 재물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 너무도 큰 희생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행동 법칙이다. 전적인 순종만이 가납된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지이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가르침은 종종 매우 권위적이고 강력한 표현으로 제시되고 명령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기심과 자아 숭배의 정신은 사람을 송두리째 타락시키므로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잘라 버리는 길 외에는 사람을 구원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