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열하일기 속으로...
내가 과거로 여행을 간다면...
요즈음 시간여행을 하는 영화가 많다. 과거 사람을 현재 위치에 데려오기도 하고,
미래로 가 보기도 하고, 왜인지는 몰라도 종횡무진 시간여행을 즐기는 영화가 많다.
남편은 중국어에 매료되더니 중국 배낭여행을 가자한다.
이 나이에 배낭 메고 자유여행이라니,
결국은 배낭 달랑 메고 중국을 자주 갔다 오면서 두보도 만나고 굴원도 만나고 삼국지 유방도 조조도...
거기에 한적한 시골마을 편액에 우리나라 신라 시인도 만나면서
어떻게 두보시가, 이백시가, 굴원시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와
우리 옛 선인들에게 읽히곤 옛 사람들 그네들 보다 시를 더 잘 지었다니 놀라운 마음이고 궁금하였었다.
나는 과거 어디로 갈까?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또 버스를,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이어도 그리 쉬운 여행이 아닌데,
그 옛날 박지원의 중국여행기 열하일기가 궁금해진다.
열하일기 속에서 지내다 보니 내가 처음 중국을 가서 느낀 감동을 열하일기 속에서 보기도 하면서
푹 빠진 며칠이 행복해지기까지 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초여름 사행단의 일원이 되어 연경으로 향한다.
은거하다시피 산골에 묻혀 산 연암이 가는 길 마다마다의 역사의 흔적 삶의 현장이 그에게는 모두
‘온고창신’의 의미와 대상이 되는 노릇이다. 가난하기에 은전을 바꾸고 우황청심환을 챙기는 행장을 꾸렸다.
우황청심환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우리의 고유 약인 줄 몰랐었는데,
우리부부가 江西省 ‘루산’에서 가파른 계곡 ‘삼폭포’를 다녀오던 중 중국여행에서 아이들이 사다 준 청심환을
거의 빈사 상태인 대만 여행객인 남자 분한테 준 적이 있어 중국 약인 줄 알았었는데,
우리의 고유의 약이었다는 것을 열하일기 속에서 알게 되었다.
그 여행객들 우루루 몰려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추억이 있었다.
약이 잘못 된 줄 알고... 알고 보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 했었다.
연암 일행은 가는 곳마다 우황청심환으로 물물 교환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도강록‘은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7월 9일까지의 일기이다.
의주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의 요양까지 이르는 도중에서
일어난 일과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중심으로
일기체로 서술하였다.
도강록이란 말은 압록강을 건너서 남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의 행적을 그린 일기는 여행자로서의 행적과 더불어 에피소드와 한데 어우러져
채색의 자연방초와 한데 어우러져
봄을 그린 수채 물결과 금쪽의 성설한 명필이 가득한 병풍 같다.
일기의 첫 부분 ‘도강록‘은 색깔이 마치 오리처럼 푸르다 하여
’압록‘이라 하였다는 강을 건너는 과정을 상세히 적었다.
“물살이 빨랐으나 사공들이 일제히 뱃노래를 부르며 번개처럼 빠르게 나아가자
새벽이 밝아 오는 것 같이 황홀했다.
멀리 統軍亭의 기둥과 난간이 팔방으로 앞 다투어 빙빙 도는 것 같고,
아직 건너편 모래언덕에 서서 배웅하는 사람들은
마치 콩알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멀리 의주를 바라보니 한 조각 외로운 성곽이 마치 한 필의 비단을 널어놓은 듯하고
성문은 마치 바늘구멍과 같으며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은 한 점의 샛별과 같았다.”
“사슴 한 마리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 갈대를 뛰어넘어 달아나는데
마치 보리밭 사이로 새가 날아가듯 빨라 일행이 모두 깜짝 놀랐다.
십리를 가서 삼강에 이르렀다. 강이 맑아서 비단결 같고 강 이름이 ‘애라하’라 하는 곳,
갈대숲을 지나 도착한 곳은 구련정이다.”
“큰비가 쏟아져 한방중이 못되어 장막위로 빗물이 새고
풀냄새가 진동하는 땅바닥은 축축하여 어디 피할 곳이 없었다.
잠시 뒤에 비가 개고 하늘엔 별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즈음의 어느 수필가도 이렇게 보드라운 감성의 글을 쓸수 있는 수필가가 몇이나 될까.
40대의 건장한 남정네 글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나도 심양을 거쳐 백두산(장백산)을 가면서 노천 화장실이라며 내려 준 한 빔중
무슨 나무의 향기인지 어느 향수보다 향기로운 향기에
취하고 별이 예쁘게 내려앉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연암은 유람 차 즐기고 놀고 술을 마시며 흔적을 남긴 여행길이지만
단순히 그것이 주 목적이 아니었다.
연암은 달랑 붓 2자루와 공책 4권을 이고 떠난 3700리 이국 길이지만
그가 남기고 알려준 세상 소식은
230여 년이란 긴 시간의 차가 존재함에도 여전히 진행형이고
실로 방대한 만리장성과도 같은 아우라를 구축했다.
우선 연암을 알아가면서 술을 말한다. 그는 천부적인 술꾼이었다.
글발을 쫓아 술 발도 연일 종횡무진 대륙 땅을 누볐다.
감기 기운이 있어도 소주를 마다하지 않고 밥을 못 먹을 정도면 심한 편인데도
술 맞을 찾아 8 월 3일 연경 바닥을 누비고 다닌다.
강행군임에도 대부분 술과 더불어 더 빛이 난다.
술을 마시면 글도 잘 써지고 사람들과 만나 술을 마시면 신바람으로 기분 좋은 글,
맛깔스런 글을 쓴다. 열하일기는 술꾼들의 정취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술을 못하는 나도 연암선생과 함께라면 한잔 술 거절 못할 것 같다.
술꾼들 특유의 호탕함, 대범함, 어디서든 마음을 여는 다정다감,
말술을 마다하지 않는 능청스러움의 안주로 해학을 곁들인 자유분방한
연암선생의 천부적 글 열하일기 속으로 빠져 든다.
힘들게 도착하면 우선 술파는 가게를 알아보고 꼭 방문하여
그 지방의 특색인 술 맛을 꼭 보는 연암선생이다.
요동에 들어서며
“물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물살이 사납고 빠르기는 어제 건넌 물보다 더했다.
산기슭이 가로막고 있어 백탑이 보이지 않기에 말을 급히 몰아 수십보를 채 못가서 산기슭을 벗어 났는데
안광이 어질어질하더니 홀연히 검고 둥그런 물체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이란 본래 의지하고 붙일 것 없이 단지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이리저리 나다니는 존재라는 것을”
광활한 대지를 보자 왜소한 인간이란 생각이 불현 듯 들었던 모양이다.
연암은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손을 이마에 얹고 하는 말은,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 이로구나” 하였다. 호곡장론
“이렇게 시야가 툭 터진 곳을 만나서 별안간 통곡할 생각을 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물으니
“갓난아기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히고 좁은 곳에서 웅크리고 부대끼다가
갑자기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과 발을 펴서 기지개를 켜고 마음과 생각이 확 트이게 되니,
어찌 참소리를 질러 억눌렸던 정을 다 크게 씻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다.
지정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진대 울음과 웃음이 무엇이 다르리오.“
그야말로 사고의 대 전환이며, 남다른 창조적인 감성이다. 눈물과 슬품이 꼭 같을 이유가 없다.
아이가 태어나 우는 것이 정녕 슬픔은 아니다.
요동 벌판 광활한 대지 산이라고는 없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은 이곳
비와 구름을 만이 창창하니 여기가 바로 한바탕 실컨 울어 볼 장소가 아니겠는가
요동벌판 광활한 땅 요동 벌을 보고 ‘호곡장론’이라 하는 것은 어떤 수사학을 동원하더라도
‘호곡장론’보다 대신할 명문장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선인의 한이 서린 심양에 도착하여.
盛京雜誌는 7월 10일 병술 일부터 14일 경인일이까지 모두 닷새간이며
십리하에서 소혹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327리 길에 펼쳐진 이야기다.
성경은 심양의 옛 이름이다. 성경 잡지는 그 기간의 여행기록과 심양에서 체류하며 겪은 내용으로
연암선생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은 모두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어서 시대가 다른 데도 여행의 별미를 느끼게 한다.
“몇 리를 더 가니 멀리서 불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양에 가까워진 것이다.
혼하는 아리강 혹은 소료수라고도 하는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沙河와 합쳐져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나도 심양을 거쳐 백두산(장백산)을 종주 한 추억이 생각난다.
요즈음이었으면 연암도 분명 천지를 올라 보고 많은 감동을 느꼈으리라.
백두산이 그때는 우리나라 땅 이었을 테지만 지금 이리 중국 땅으로
편입 되었다하면 얼마나 통탄해 하셨을까?
그때 그 시절 연암은 고구려의 흔적 우리 땅이었던 곳을 지나기도 하면서
“그 옛날 우리나라의 기상을 상기 하였었다.
군청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후위와 수당 시절에는 고구려 땅에 속했다.“ 그렇게 적어 놓았다.
고구려는 부뚜막, 절구통, 매사냥에 청국장. 맥적이라는 지금의 불고기와 꼬치구이를 즐겨먹었다.
우리에게 이 풍속은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한마디로 심양은 우리 땅이다.
심양을 떠나기 전에 정 많고 마음 따스한 연암은 그동안 돈독한 만남을 한
허태사 로부터 “북경에 가면 못 구하실 것이 걱정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골라잡기가 걱정일 것”이라 했다.
허태사 말에 따르면,
“우선 청동으로 주조를 마친 후 칼로 무뉘와 글씨 등을 새긴 후 땅에다 이를 묻을 구덩이를 판다.
거기에 소금물 몇 동이를 부어 잦아지는 것 기다려 그릇을 그 속에 넣고 몇 해 동안 묻어 두었다가
끄집어내면 꽤 고물 같은 빛을 띠게 된다. 보다 오래된 것처럼 감쪽같이 속이려면 붕사 한수석, 망사....
중국의 짝 퉁이 요즈음이 아니라 오랜 전통으로 연암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마음은
연암의 다정다감한 마음에 대한 보답이 아닌가 한다.
중국여행에서 요즈음도 가짜를 사오는 것이 일상이니 오랜 전통의 결과이다.
의심하고 관찰하는 앎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연암은 아예 체험하는 앎과 쉼을 동질화 시켰다.
“이틀 밤을 연거푸 설치고 보나 해가 나온 뒤에는 너무도 고단했다. 한숨을 푹 잤다.".....
그동안 낙타가 지나갔다는 하인 장복이 말에 야단을 치며 “어째서 고하지 않았더냐?”....
연암의 호기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행 하는 동안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놀라워하는 연암.
나도 중국 여행을 하면서 경치에 반하고 부지런함에 놀라고 돈을 벌기 위해
조그만 어린이들도 이용하는 모습에 놀라웠었다.
관광지에는 한참 공부할 나이인 아이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종종 볼수 있었다.
참외 장수에게 속임수를 당한 신민둔을 지나며,
눈물을 흘리는 늙은이에게 참외를 터무니없는 값에 사고...
요즈음도 중국 여행을 해보면 그들의 상술은 알아 줄만하다. 그들만의 짝퉁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시대 사신단 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사행 길이었지만 돈 대신 통용되는 청심환 덕으로 고달픈 행군도 만사형통이었다.
열하일기의 구성은 <傾蓋錄>은 러허 태학관에서 한족과 만주족의 학자 10여명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며,
<黃敎問答>은 불교의 한 지파인 라마교 중에서 갈라져 나온 황교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黃도기략>은 연경에서 관광한 문물, 제도 등 39항목...으로
26권 10책 <燕巖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1~7권 (도강록~환연도중록)은 여행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연암의 순간적인 관찰은 사물을 꿰뚤었고 묘사는 자세하며 묘사는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그의 문체는 적절한 비유를 구사하며 상상력을 느낄 수 있도록 생생하며 입맛이 다셔지듯 짭쪼름하다.
내가 연암선생을 알게 된 것은 고전 소설로 ‘호질’ ‘허생전’ 등으로 만나지기 어려운 분인 줄 알았었는데
‘열하일기’ 속에서 만나지는 분은 현대에 더 잘 어울리실 호방하시고 호탕하신 얼마나 멋진 분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열하일기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남편하고 틈틈이 다녀온 중국 곳곳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청진을 거쳐 남경으로 가서는 ‘남경대학살’ 방문해서는 일본의 만행이
중국사람들 에게도 아픈 과거로 남아 있었음에 동질감을 느꼈었다.
<江西省>황산을 오르면서는 우리나라 설악산을 생각나게 하고,
루산에서는 등소평이 수영을 즐겼다는 사실에 등소평을 떠 올려 보기도 하였었다.
<운남성>을 여행 할 때는 대리를 지나 이장에서 한마을 아주머니들이
모두 나와 전통춤을 추어 함께 손잡고 어울려 본 추억이 생각난다.
연암이 현세에서 다시 여행을 한다면 굴레 다 벗어 던지고 같이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옥령설산’을 올라가면서 보는 설산이 안개구름이 늘 산봉우리에 머물며
가는 눈가루를 뿌려 설산을 만드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눈이 와서 상고대 만드는 설산이 아님을 알게 되는 희열이 있었다.
이장을 거쳐 샹그리라에서 만난 절에 생불을 그대로 미이라 형태로 있는 광경은
3000미터 이상의 고원이어서 가능한 일임을 알아진다.
중국이라는 곳은 역사와 전통이 아직도 존재하는 나라이구나 생각되었다.
지독한 고산증은 우리에게 정말 알맞은 약인지, 어쩔 수 없이 약을 사게 하는 곳.
샹그리라어로 모든 불경이 전해지는 곳을 다녀오며 특이한 관광객이 되었었다.
운남성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石林 돌이 마치 나무가 우뚝우뚝 서서 만들어진 숲처럼 돌이 숲처럼 만들어진 곳(셕림)을
돌고 돌아 나오던 추억으로 즐겁던 여행이었다.
연암이 이런 기이한 풍경을 보시면 어떻게 표현을 하셨을까? 궁금해진다.
<四川省>으로 여행은 내가 아주 궁금하던 구채구와 황룡이 있다.
구체구가 오채지인 줄 알았었는데 황룡이 그리 칭찬이 자자하던
옥색의 물이 층층이 담겨 있는 모양이 오채지라 이름 지어 질만 하다.
남편이 배낭여행으로 중국을 가서는 현지 여행사를 좇아 간 구체구와 오체지 황룡. 구체구도 아름답지만
황룡은 너무도 아름다움을 글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연암선생님을 모셔와 어떤 글을 써 내릴지 알고 싶어진다.
<어메이산>의 추억도 잊혀 지지 않는 곳이다.
설악산 정도 오르기에 여기가 거기? 했더니 잠시 쉬고 산길을 돌고 돌아 오르는데,
이정표에 한국말이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다시 표를 끊어 주는데 사진을 찍어 인쇄된 표를 주고 들여보낸다.
산 정상이 얼마나 높기에 절벽으로 떨어진다면 찾지 못할까봐 자살할까 보아 곳곳에 주의 하라는 팻말이 보인다.
난 거기에 가면 이리 높으니 잠자리나 제대로 있을까가 걱정인데 중국 아줌마 자꾸 이야기 건다.
이야기 못 알아듣는다 해도 내가 중국 아낙처럼 생각되는가 보다.
어메이산에 도착하니 그 높은 곳에 호텔이 마을처럼 늘어서 있다. 놀라워라!
아침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산 정상을 한 바퀴 난 또 사진 담느라 정신없고
그리고 다시 이곳저곳 계곡을 다니는 중 계곡에 물건 파는 집이 있었는데
우리를 알아보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 한다.
양츠강 쿠르즈 여행하면서 삼국지를 만나고, 굴원의 어부사도 알아지고.
샨샤 체험도 하면서 과거 속으로 여행을 열하일기 때문에 한다.
두보초당에서 두보를 만나면서는 이 먼 이국땅의 시인을, 시를 어찌 알았을까 궁금하더니
연암 선생이 북경에서 제일 중요하게 하던 일이 책방에 들르던 것을 알고 나니
학문에 목말라 하던 그 시대를 이해하게 된다.
연암선생의 말씀처럼 우리 고구려 민족이 중국에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든다.
다시 중국 여행을 돌아 볼 기회를 ‘열하일기’ 읽어 보는 기회로 다시 추억을 들쳐볼 수 있어서
연암선생을 다시 알아보게 되어 행복하였고 우리가 비행기로 버스로 기차로 중국을 방문하였는데,
연암은 어떻게 중국을 찾았을까 하던 궁금증이 가셔진다.
지난 며칠 과거속의 연암선생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나도 과거 속으로 즐겁던 여행으로 행복한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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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오랜 만에 중국 열하 일기의 명작을 담으셨네요.
글이 길어 몇번에 나누어 읽느라 눈이 아물 거려도 함께 떠나보는 중국 여행이 참 즐거움 이었어요.
곳곳의 낭만, 풍경과 절경을 보고 느껴보는 시간, 다시 떠나보고 싶은 그곳.
굿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