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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梅月堂 김시습.
이장희 추천 0 조회 25 14.05.24 22: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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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月堂 김시습(1435 ~ 1493)

 

재주가 너무 많아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

기행·괴벽·광기의 천재 시인 매월당 김시습

 

글·이재광

 

김시습은 조선조 5백년사에 기록될 만한 최고의 천재였다.

그는 태어난 지 겨우 8개월만에 글을 깨우쳤고 세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다섯살 때는 나라를 짊어질 기둥감으로 온나라의 기대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일생은 불우했다.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평온한 가정조차 갖지 못했다. 천재를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옹졸함 때문인가, 워낙 파격적이고 괴팍한 그의 성품 때문인가. 온갖 기행과 괴벽, 광기의 흔적으로 얼룩진 천재시인 김시습의 일생을 되돌아봤다.

 

‘노목개화심불로’ (老木開花心不老).

‘내시강보김시습’ (來時襁褓金時習).

‘소정주택하인재’ (小亭舟宅何人在).

‘성주지덕황룡창벽해지중’ (聖主之德黃龍暢碧海之中). 

 

이 네개의 문장이 다섯살배기 어린 매월당을 조선 5백년사 최고의 천재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선 5백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한명의 천재 율곡 이이가 그를 가리켜 “내 전생(前生)의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율곡은 “재주가 너무 커 타고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는 의미다. 범인(凡人)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매월당의 기행, 괴벽, 광기에 대해 율곡은 이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매월당에 대한 해석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매월당이 천재임을 그 주변에 알린 것은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서다. 겨우 8개월만에 글을 깨우쳤고 세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니 누구라도 그의 비범함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시습(時習)-. ‘때로 익힌다’는 이 뜻은 ‘논어’‘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유명한 어구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챈 집안 어른이 붙여줬다는 이름이다. 그의 자(字)인 열경(悅卿)도 마찬가지. 같은 어구에서 ‘기쁠 열(悅)’자를 따 지은 것이다. 돌이켜 보면 ‘때로 배우며 기뻐한다’는 그의 이름과 자(字)의 합성어는 마치 예언과도 같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때로 배우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이 되어버렸지만…. 그가 세살 때 지었다는 시 한수를 읊어보자.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복사꽃 붉고 버들잎 푸르니 3월이 저물어 가는구나 (桃紅柳綠三月暮)

푸른 하늘에 꿰인 구슬은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네 (珠貫靑針松葉露)

 

1439년 그의 나이 다섯살. 아직 부모로부터 떨어지는 것조차 싫어하던 이때가 기이하게도 매월당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천재로서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며 장차 나라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는 찬사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것이다. 당시 그의 집에는 매월당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천재와 신동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발길들이었다. 이중에는 재상 허조도 끼어 있었다. 그는 어린 매월당에게 이름 대신 자(字)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그를 테스트해 봤다.

“열경아, 나는 늙지 않았느냐, ‘늙었다’(老)는 말로 글을 지어주지 않으련?”
노 재상의 청탁에 매월당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온 문장 하나가 바로
‘노목개화심불로’  (老木開花心不老)였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는 뜻이다.

허조가 감탄했음은 물론이다. 문장을 짓는 솜씨도 솜씨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다’는 말로 노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여유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다섯살짜리 어린 아이로 볼 수 없는 글이었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의 입에서 감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허허,과연 신동이로구나.”

어린 천재, 신동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매월당과 허조의 대화는 삽시간에 퍼졌고 어렵지 않게 당시 임금인 세종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인들 어찌 관심이 없었을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두루 인재를 찾아 써야 한다”는 성군(聖君)이신 세종대왕 아닌가. 사람까지 시켜 직접 소문의 진상과 매월당의 됨됨이를 확인하라 지시했다.

그 사자(使者)가 바로 승정원의 박이창이었다. 박이창은 매월당의 부모에게 즉시 아이를 데리고 입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제 아이에게는 어명을 받은 신하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을 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목은 마치 서양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모차르트를 연상시킨다. 세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다섯살때 피아노 소곡을 작곡했던 모차르트. 그 역시 여섯살 때 ‘7년전쟁’의 주역인 오스트리아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신기(神技)를 시험받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한다. 그는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와 2중주를 하며 향후 일기장에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만일 앙투아네트가 모차르트와 결혼했더라면 멍청한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아내로 프랑스 대혁명기에 죽음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월당은 피아노 의자 대신 나이 많은 사신의 무릎 위에 앉았고, 피아노 대신 한시를 읊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시험을 거친다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숨막히는 긴장과 기대가 방안을 감싸고 돌았을 것이다.

“아가야, 네 이름을 갖고 글을 지어보겠느냐?”
박이창은 아주 쉬운 주제로 테스트의 문을 열었다.

“이 정도쯤이야…”.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시강보김시습’(來時襁褓金時習)
‘올 때 강보(포데기)에 싸여 있던 김시습입니다’라는 뜻이다.

박이창은 감탄하며 무릎 위에서 노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글을 청한다. 이번에는 좀더 어려운 청이다.

“저 앞에 있는 산수화를 보니 무엇이 생각나느냐?”
‘이번에도 답할 수 있을까?’ 시험관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어서 자칫 분위기를 깰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의 입에서는 거침없이 말이 나온다.

‘소정주택하인재’(小亭舟宅何人在)
‘작은 정자와 배 위의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뜻이다.

“허허-.”

박이창은 놀라움과 동시에 흥이 나기 시작한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처음 대하는 신동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시 한 수가 튀어 나온다. 감탄과 찬사의 시였다.

‘동자지학백학청공지말’
(童子之學白鶴靑空之末, 어린 아이의 학식이 백학이 되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을 추는구나)

극찬이었다. 더이상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시험은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한걸음 더 나갔다. 박이창의 시구를 이어받아 대구를 읊고 있지 않는가.

‘성주지덕황룡창벽해지중’
(聖主之德黃龍暢碧海之中, 성스러운 임금의 덕은 황룡이 되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서 번득이고 있네)
이로써 시중에 떠도는 소문의 진상은 모두 밝혀졌다. 그는 신동이었고 소문은 모두 사실로 판명난 것이었다.
왕실의 기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창건 이래 처음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다던 세종 시대가 아니던가. 이 좋은 시절에 종묘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최고의 인재를 얻게 됐으니 길게는 3대까지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인재를 발견한 것이다. 태평시대의 또 하나의 길조였다. 하늘이 이 작은 반도에 내려준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어찌 임금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세종대왕은 친히 비단 여러 필을 하사하며 마지막 테스트를 한다. 어린 몸으로 혼자 그 비단을 가져가라 시킨 것이다.

이때 어린 시습은 장차 5백5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지혜의 교훈을 가르쳐 주는 유명한 장면을 연출한다. 비단의 끝을 몸에 묶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지금도 이 이야기는 아이들 동화책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매월당은 불과 다섯살 때 영구불변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화려한 5세, 비참한 50세

이후 사람들의 입에서는 ‘5세 시습’이라는 말이 떠돌아 다녔다. ‘김5세’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십년이 지나도, 나이를 먹고 흰머리가 났어도 세간에 알려진 김시습은 바로 ‘5세 시습’이었다. 그만큼 다섯살 때의 매월당은 뭇사람들을 흥분시켰던 것이다. 반도 전체에서 김시습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두들 나라의 미래를 이끌고 갈 큰 재목으로 여기며 그를 우러러 봤다. 무량사에 있는 그의 부도(浮屠, 고승의 뼛가루나 사리를 묻어둔 돌탑)에는 아직도 ‘5세김시습지묘’라고 씌어 있다. 죽어서도 ‘5세 시습’을 면치 못한 셈이다.

‘5세 시습’은 이토록 화려했다. 그 어린 나이에 임금까지 나서서 ‘나라의 대들보’가 되라며 격려했던 5세였다. 기대와 찬사를 한몸에 받던 5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50세 시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병들고 지친 몸뚱아리였지만 누구 하나 보살펴줄 사람이 없었고 어느 한곳 따뜻하게 쉴 곳이 없었다.

단 한번이라도 부귀영화를 누린 적이 있다면 그래도 나았다. “한때는 잘 나갔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아예 속세를 완전히 뒤로 하고 산속에 파묻혀 살았다면 그래도 떳떳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살아 있는 부처’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세간에 알려지기는 술맛, 고기맛, 여자맛을 모두 알아버린 ‘돌중’에 불과했다. 게다가 속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때 환속까지 했던 몸이다.

누가 봐도 그는 삶을 완전히 해탈한 스님은 아니었다.

그는 또 늘그막에 가족을 갖고 싶어 했다. 19세 때 장가까지 갔다가 중이 되겠다며 꽃다운 나이의 아내마저 버린 그였다. 죄값을 치르는 것이었을까.

큰 마음 먹고 산에서 내려와 마흔 일곱이라는 나이에 늦장가를 가 봤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세속에 묻혀 살기로 작정했지만 그마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자식은커녕 두번째 아내마저 손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해 나가는 세속적인 삶조차 이토록 어렵다는 말인가.

장탄식을 해 보지만 이미 모두가 끝난 일이었다. 평민으로도, 유생으로도, 승려로서도 모두 실패한 삶이 되고 말았다. 다음 시 한수에서 50세 되던 해 그의 슬픔과 회한 그리고 말년의 불우함을 읽을 수 있다.

 

 

나이 오십에도 자식이 없으니 (五十已無子)

여생이 진실로 가련하다 (餘生眞可憐).

어찌 앞으로의 편안함을 말할 수 있으랴 (何須占泰否)

그렇다고 결코 사람과 하늘을 원망해서는 안되지 (不必怨人天).

고운 해가 창호지를 훤히 비추니 (麗日烘窓紙)

맑은 티끌이 자리에 깔려 있구나 (淸塵?坐氈).  狐를 ?. 

남은 해 동안 원하는 것 없으니 (殘年無可願)

먹고 마시는 것 편한 대로 하자꾸나 (飮啄任吾便).

 

그래서 범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된다.

조선 5백년사의 최고 천재로 꼽히던 매월당이 왜 실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인 중심의 조선 사회요, 임금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사회, 입신출세를 최고로 여기던 조선 사회가 아니던가. 임금에게까지 한몸에 기대를 받던 천재적 문장가가 입신출세는커녕 가족조차 없는 낭인이 되어 기구한 삶을 살게 된 배경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의 타고난 성품 탓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과거 시험에 낙방한 불세출의 천재

흔히 그가 떠돌이 생활을 했던 이유 중 하나를 불우한 청소년기에서 찾고 있다. 사실 그의 집안은 별 볼일 없었다. 강릉 김씨이니 그 뿌리는 신라 김알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매월당 당대에는 이렇다할 부도, 권세도 없었다. 증조부인 김윤주(金允柱)가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낸 것이 고작이었다.

조부는 종6품 무관직인 오위부장(五衛部將)에서 끝났다. 부친은 그나마 관직조차 갖지 못했다. 충순위(忠順衛)라는 관직명은 있었지만 자리도 녹도 없는,그야말로 이름 뿐인 관직에 불과했다.

당시 관직을 지닌 사람들의 자식에게 그저 이름 하나 얹어 주는 제도의 혜택을 받았을 뿐이다. “조상의 은혜로 관직을 준다”는 ‘음사(陰仕)제도’ 덕이다.

그러나 이같은 빈곤이 그의 청소년기를 불우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는 부모님의 정성스러운 후원으로 착실하게 천재 수업을 쌓아갔다. 당대 석학으로 인정받던 김반과 윤상이 그의 개인교사였다. 특례 입학으로 성균관에까지 입학하는 특전을 얻기도 했다. 빈한한 집안의 자식으로서는 호사를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불행은 한창 예민한 시기인 열다섯살 때 찾아왔다. 느닷없이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어려운 생계를 꾸리고 건강도 좋지 않은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자식의 공부를 위해 애써 선비마을로 이사했던 어머니였다. 어린 매월당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도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불우한 청소년기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혼자 몸으로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지 외숙모에게 시습을 맡겼고 외숙모는 어머니처럼 끔찍하게 아이를 위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허전함을 외숙모가 극진한 사랑으로 메워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숙모마저 세상을 뜨고 만다.

이어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후원자였던 세종대왕마저 승하한다. 어머니를 잃고 난 후 3년 사이 그는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잃은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자 계모를 맞아들였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시습과 계모는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시습은 아버지가 새 여자를 맞자 곧장 집을 나와 버렸던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불행이 그를 덮쳤다. 1453년 19세 때인 단종 1년 치른 시험에서 그만 떨어지고 만다.
신동이라며 세상이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그가 과거에 낙방한 것이다.
어머니에 이어 외숙모를 잃고 아버지마저 계모를 들였으니 그 충격 때문이었다며 나름대로 이유를 대고 위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일찌감치 죽음을 경험한 그가 불교에 빠져들어 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붙이기도 한다. 뭔가 이유를 달지 않고서는 그의 낙방을 해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인이나 이유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속세의 삶이었다. “신동이라더니” “천재라더니” 등 세간의 비아냥거림은 아마도 시험에 떨어졌다는 자존심의 상처보다 더 컸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기에 그가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혼인했던 것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주변 사람들이 과거에 낙방한 그의 마음을 잡아주기 위해 여자를 들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아내는 그의 삶에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혼인 시기도 분명치 않을 만큼 미미했던 존재였다.

 

 

지금도 살아있는 매월당의 천재성

 

자유·평등 주장한 반체제적 사상가

 

매월당의 천재성은 비록 당대에는 정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가장 흔히 얘기되는 것이 국내 최초의 한문 소설이라는 “금오신화”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문학계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훑어 보면 그의 천재성은 오히려 기괴함으로 다가선다.

 

이 책 “금오신화”에는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있다. 짝이 될 여자를 그리워하다 왜구에 의해 죽은 여인을 만난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한 선비가 염라대왕을 만나 귀신과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다는 얘기에 이르기까지…. 비록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전등신화(剪燈新話)”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해도 매월당의 독창성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이 책을 쓰고 “훗날 이 설잠(雪岑)을 알아 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며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상사 연구자들은 정작 그의 천재성을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은 철학에 있다고 말한다. “금오신화”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유·불·도 3교에 정통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3교의 벽을 허물고 넘나들고 있다. 따라서 그는 유교의 원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는 환속하며 “이단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참회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을 보면 실상 그렇지 않았다. 그의 시 중에는 공자와 석가를 비웃는 시도 있다. “유교도 불교도 모두 하나의 도(道)로 통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상은 유교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조선 사회에서는 반(反)체제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당시 사회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양반의 자제라도 일을 해야 한다”며 수락산 시절 그의 제자들에게 밭일을 시키기도 했다. 이 정도는 약과다. 신분 문제에 이르면 지배층이 경악할 정도의 과격한 말들을 해댄다. “신분과 계층의 구분 없이 적극적으로 인재를 발굴하라”며 “모든 이들이 자신의 소양을 계발한다면 훌륭한 선비가 될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가 관직에 등용됐다 해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다.

 

그의 이같은 자유·평등의 사상은 구한말 개화파에 의해 꽃피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 해석에 따르면 매월당은 무려 4백년이나 앞선 생각을 했던 사상가가 된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시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 夜如何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

뭇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

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

 

夜如何其夜未央(야여하기야미앙),

繁星粲爛生光芒(번성찬란생광망),

深山幽邃杳冥冥(심산유수묘명명),

嗟君何以留此鄕(차군하이유차향).

 

-『매월당 김시습 시선』 중에서, 허경진 옮김, 평민사 발행. -

 

김시습은 이 시에서 ‘杳冥冥(묘명명)’이라고, 그러니까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둡다’며 세 번이나 어둡다는 말을 썼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스물한 살 시절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단종에게서 정권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이나 두문불출한 다음에 통곡하고 자신의 책들을 모두 불살랐다더니 그런 참담한 시대를 일컫는 것이었을까? 얼마만큼 어두웠기에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둡다’라고 쓸 수 있을까? 그만큼 삶이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웠다는 뜻이 아닐까?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詩

 

해설 - 송재소(문학박사, 성균관대 교수)

 

 

1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이라 할만한 {금오신화}의 저자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59년이라는 길지 않은 일생을 방랑과 고독 속에서 살다간 불우한 천재였다. 천재의 주변에는 으레 신이(神異)한 이야기가 따르게 마련인데 매월당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우선 탄생 설화부터 그렇다. 어느 날 성균관 사람들이 반궁리(泮宮里)의 김일성(金日省­매월당의 부친)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났다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그 집을 가보니 과연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가 곧 김시습이다. 반궁은 성균관의 별칭으로 성균관이 있는 동네를 반궁리라 한다. 태어난 곳이 공자를 모신 문묘가 있는 성균관 근처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탄생이 공자에 비견되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탄생 설화에 걸맞게 그는 생후 8개월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세 살 때 유모가 보리방아 찧는 것을 보고

 

 

맑은 날, 천둥 소리 어디서 울리나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날리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다섯 살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여 김신동(金神童)으로 이름이 났는데, 이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許稠)가 그의 집을 방문하여 김신동의 실력을 시험해 보았다.

허조가 "나는 늙은 사람이니 늙은 '老'字를 넣어서 글을 지어 보아라"고 하니 서슴지 않고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구려(老木開花心不老)"라 대답했다고 한다. 생후 여덟 달만에 글자를 알고 세 살 때 시를 지었다는 것은 얼른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천재적인 인물에 붙어 다니는 상투적인 일화 쯤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일면이 있다.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 시에서 이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시 [동봉육가(東峰六歌)]여섯 수를 지었는데 그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외할아버지 어린 나를 사랑하시어

돌 지나며 글 읽는 소리 기뻐하셨네

 

걸음마 배울 무렵 글 가르칠 계획 세워

일곱 자 엮은 글이 매우 아름다웠지

 

外公外公愛我孀 喜我期月吾伊聲

學立亭亭誨書計 七字綴文辭甚麗

 

 

이로 미루어 보면 그가 첫 돌 무렵에 글을 읽었고(물론 한문이다) 기어다니다가 일어서서 걸음마를 배울 무렵에는 "일곱 자 엮은 글" 즉 7언시를 지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기 과시를 위하여 없던 일을 꾸며낼 그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천재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1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과거시험에 대비한 공부를 하던 중, 서울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 그는 사흘 동안 방안에 박혀 있다가 통곡을 하며 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 뒷간에 빠졌다가 정처없는 방랑의 길에 나섰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이로부터 그는 10여년간 전국을 유람하면서 중의 행색을 하고 다녔다. 이 시절의 기행시집이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호남록(遊湖南錄)]으로 남아 있다. 31세 때에는 경주 남산의 용장사(茸長寺)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6년 동안 이곳에 거처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인 [금오신화]는 이 시기의 소산이다. 이 금오산 시절의 시들을 묶은 것이 [유금오록(遊金鰲錄)]인데, 앞서 3부의 기행시집과 함께 후세에 {매월당시 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으로 간행되었다.

만년에 그는 이 시절의 유람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즐율나무 즐율나무 가시도 많은데

그걸 짚고 사방으로 노닐었다네

 

북으로 말갈까지 남으론 부상(扶桑)까지

어딘들 시름의 창자 묻을 수 있었으랴

 

날 저물고 길은 멀어 내 갈 길 요원하니

어찌하면 선풍(旋風) 타고 9만리 날아볼까

 

 

?○?○枝多芒 扶持跋涉遊四方

北窮??南扶桑 底處可以埋愁腸

日暮途長我行遠 安得扶搖?九萬

 

 

○枝多芒 扶持跋涉遊四方

北窮 ?南扶桑 底處可以埋愁腸

日暮途長我行遠 安得扶搖 九萬

 

― [東峰六歌], 제2수

 

 

여기서 우리는 그가 왜 현실을 등지고 방랑길에 나섰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시름의 창자"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의 창자는 시름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의 창자를 시름으로 가득 채웠는가? 직접적으로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이었을 것이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을 때만 해도 그는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유학의 정도를 걷는 청년 선비였다. 그런 그가 불의의 왕위찬탈을 보고 시름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고 방랑길에 올랐지만 어디를 가도 시름을 묻을 곳은 없었다. 그는 일생 동안 시름을 달고 다녔다. 매월당 시에서 "시름[愁]"이란 시어가 그토록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름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매월당 시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이 시를 쓸 당시 그의 나이는 적어도 50이 넘었을 터인데, 그때에도 그는 "날 저물고 길은 먼" 것을 한탄하면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향하여 머나먼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정열이 식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어찌하면 선풍(旋風) 타고 9만리 날아볼까" 라고 말한 데에서 그의 기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원래 {장자(莊子)}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 고기가 붕(鵬)이라는 새로 변하여 선풍 즉 회오리 바람을 타고 9만리나 날아 올라 6개월만에 남쪽 바다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갈 길은 멀고 길이 험하기 때문에 붕새처럼 높이 날아 단숨에 가고 싶다는 염원이다. {장자}의 붕(鵬)새가 도가적(道家的) 절대자유를 상징하듯, 붕새처럼 날고 싶다는 매월당의 염원 속에는 제도의 틀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보인다. 그가 삼각산 중흥사를 뛰쳐나온 깊은 동기도 여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기존의 윤리와 제도의 틀 속에 가두기에는 이 천재의 그릇이 너무 컸던 것일까?

매월당은 6년간의 금오산 생활을 마치고 37세에 친구의 권유로 상경하여 서울 근처의 수락산 기슭에 자리 잡고 살다가 47세에는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환속하여 머리를 기르고 안씨(安氏) 부인과 재혼까지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단(異端)에 빠졌다가 말로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고 하여 그동안의 행동을 뉘우치는 듯했다. 그가 왜 행동 양식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 근처에서 보통 사람들과 보통의 생활을 하는 것이 그의 본령은 아니었다. 드디어 그는 49세에 다시 출가하여 머나먼 방랑길에 나선다.

서울 근처에서 생활한 12년 동안 그는 갖가지 기행(奇行)을 저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의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행차하는 것을 보고 "이놈아, 그만 물러나거라" 고 소리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율곡(李栗谷)이 쓴 [김시습전]에 의하면, 재판정에 나아가 그른 것을 옳다고 우겨서 재판에 이긴 판결문이 나오면 너털웃음을 웃고 찢어 버렸으며, 망나니나 장바닥의 아이들과 어울려 거리를 쏘다니다가 술에 취하여 쓰러져 자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 생활은 그가 가야할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가는 길은 끝이 없는 길이었다. 그는 끝이 보이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시름'을 달고 다녔다. 이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49세에 서울을 떠나 그가 다닌 곳은 춘천과 설악산 등지를 제외하고는 자세하지 않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헤매다가 59세 되던 해에 충청도 무량사(無量寺)에서 미완의 여정(旅程)에 종지부를 찍었다.

 

 

2

매월당의 시는 15권의 시집에 2000여 수가 지금 전하고 있다. 이것도 적지 않은 양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양의 시를 썼다고 한다. 이제 그 중에서 몇 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마음과 세상 일이 서로 어긋나

시 짓지 않으면 즐길 일 없어라

 

취중의 별천지도 순식간이요

잠자는 그 맛도 잠깐 사이라

 

송곳 끝 다투는 장사치도 이 갈리고

말 기르는 오랑캐도 한심하다네

 

나라에 몸바칠 인연 없으니

눈물을 닦으며 길이 탄식하노라

 

心與事相反 除詩無以娛

醉鄕如瞬息 睡味只須臾

切齒爭錐賈 寒心牧馬胡

無因獻明薦 ?淚永嗚呼

 

― [ 悶六首] 중 제1수

 

 

"마음과 세상 일이 서로 어긋난다"고 했는데 이것이 매월당을 방랑의 길에 오르게 한 주된 원인이다. 그의 마음이 세상 일과 어긋나지 않았으면 그는 현실을 등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빈번히 나타난다.

"나의 재주 세상와 맞지 않아서(我才與世不相當)" "세상과 이 몸이 서로 어긋나(世與身相乖)" "이 몸과 세상이 어긋남 심해서(身世相違甚)" "세상과 내가 서로 모순되어서(世我相矛盾)" 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그에게 있어서 자아와 세계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양극이었다.

이렇게 자아와 세계가 조화롭지 못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투쟁을 통하여 세계를 자아에 맞게 개조하든가 아니면 세계를 잊어버리고 세계 밖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이른바 '방외인(方外人)적 삶' 이다. "송곳 끝을 다투는 장사치"가 될 수도 없고 "말이나 기르는 오랑캐"도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외(方外)의 현실권 밖에서 노닌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법이다. 기본적으로 유자(儒者)인 그가 불교에 빠져들기도 했고 도가(道家)의 신선사상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지만, 현실의 그림자는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마음과 세상 일이 서로 어긋난다"고 거듭 호소하는 그 자체가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여기에 그의 갈등이 있고 이 갈등으로부터 "시름"이 생긴 것이다. 그는 이 갈등과 시름에서 벗어나려고 술을 마셔 보지만 "취중의 별천지도 순식간"이고, 잠을 청해 보지만 "잠자는 그 맛도 잠깐 사이"일 뿐이다.

그래서 시를 쓴다고 했다. "시 짓지 않으면 즐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미친 듯 시를 지었다. 율곡의 [김시습전]에 의하면, 그는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시를 써놓고 한참 읊조리다가 갑자기 통곡을 하며 깎아 버리기도 했고, 종이에 시를 썼다가 남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달랠 수 없는 시름을 시에 붙인 것이다.

 

 

끝없는 시름 솜과 같아서 닿자마자 달라붙으니

맑은 시 아니고는 고칠 수 없네

 

窮愁如絮着旋粘 除却淸吟不可

 

― [窮愁]

 

 

끝없이 밀려오는 시름을 그나마 시를 써서 달래보려는 매월당의 모습이 보인다.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 言)}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비온 뒤 산골짝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종이 조각 1백여장을 잘라 붓과 벼루를 갖고 뒤따르게 한 다음,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반드시 여울이 급한 곳을 가려 앉아서 침통하게 읊조리며 시를 지으니 때로는 율시(律詩)를 오언(五言) 또는 고풍(古風)으로 종이에 써서 흐르는 물에 띄우고 멀리 떠가는 것을 바라보고는 또다시 지어 써서 물에 던지곤 했다. 어떤 때는 온 저녁을 그러다가 종이가 다 떨어진 뒤에 돌아오니 하루에 지은 것만 해도 수백 수였다.

 

시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양식이었다. 시를 쓸 수 있었기에, 자신과 세계와의 불화에서 오는 시름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쓴 시가 수만 수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깊은 산 세밑에 시를 쓰는데

솔 숯에 얼음 타서 벼루 살결 물들이네

 

바위 위의 주린 매, 씩씩한 기상이요

가지 위의 언 올빼미, 기이한 자태로다

 

도잠(陶潛)의 오세(傲世)에 어찌 술이 없었으리

두보(杜甫)는 임금 그려 시(詩) 폐하지 않았다네

 

가슴엔 운몽(雲夢)을 삼킬만한 뜻이 있어

대장부 늙어감에 호기로운 때로다

 

 

窮山歲暮坐題詩 ?合松煤染硯肌

飢?下巖多壯氣 凍??樹有奇姿

陶潛傲世那無醉 杜甫思君不廢詩

自有胸呑雲夢趣 丈夫老去卽豪時

 

 

窮山歲暮坐題詩 合松煤染硯肌

飢 下巖多壯氣 凍 樹有奇姿

陶潛傲世那無醉 杜甫思君不廢詩

自有胸呑雲夢趣 丈夫老去卽豪時

 

― [漫成二首] 중 제1수

 

 

번역하기가 어려운 시라 대강의 뜻만 옮겨 놓았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는 깊은 산 속에서 세밑을 맞아 무엇을 할 것인가? 소나무 가지를 태운 숯검댕이 먹으로 얼음을 타서 "벼루 살결에 물을 들여" 시를 쓰거나 아니면 실컷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다. 제3련에서는 이런 자신을 도연명과 두보에 비유하고 있다. "오세(傲世)"는 세상을 가볍게 보고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간 도연명이었기에 그토록 술을 좋아했고, 가난과 싸우면서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한 두보였지만 임금을 생각하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술을 마시고 시를 쓴다는 것이다. 두보가 그리워한 임금이 당시의 임금인 숙종(肅宗)이 아니고 전왕(前王)인 현종(玄宗)이었듯이, 매월당의 그리움의 대상도 세조가 아닌 단종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도연명의 고고함과 두보의 충성심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기에 제4련에서 "가슴에 운몽(雲夢)을 삼킬만한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운몽은 중국 초나라에 있었다는 사방 9백리나 되는 큰 저수지이다. 그래서 늙어도 호기로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과연 매월당의 그릇이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제2련의 풍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위에 내려 앉는 매와 나무에 걸터 앉은 올빼미는 실경(實景)이라기 보다 매월당이 만든 심상(心象)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맹금류인 매와 올빼미를 통하여 "운몽을 삼킬만한" 자신의 "호기(豪氣)"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주린" 매와 "언" 올빼미를 등장시켰다. 물론 한겨울이라는 계절과 상관이 있겠지만, 굶주리고 있으나 "씩씩한 기상"을 잃지 않는 매와 추위에 얼어 있으나 "기이한 자태"를 뽐내는 올빼미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와 의지를 나타내려 한 것이다.

 

 

3

애민시 또는 사회시를 빼놓고 매월당의 시를 논할 수 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애민사상에 바탕한 인정(仁政)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가 현실 정치권을 외면하고 방랑하면서 "마음과 세상 일이 서로 어긋난다"는 말을 되풀이 한 것도, 인정을 실현하려는 그의 마음과 그렇지 못한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 인정을 베풀 대상은 백성들이고 그 당시의 백성은 농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농민시편을 남겼다.

 

 

사또가 어질어도 헐떡일 생활인데

승냥이, 이리를 만났으니 가련하도다

 

이고 진 유랑민 길마다 가득하니

굶주림과 추위가 어찌 흉년 탓이리오

 

長官仁愛猶能喘 幸遇豺狼是可憐

婦戴翁提盈道路 豈遭飢凍不豊年

 

 

산골 농민의 고통스런 삶을 노래한 [영산가고( 山家苦)] 8수 중의 제5수인데, 흉년보다 더 무서운 탐관오리를 승냥이와 이리에 비유하고 있다. 이 밖에도 [기농부어(記農夫語)], [석서(碩鼠)], [전가즉사(田家卽事)] 등 여러 작품에서, 불인(不仁)한 정치로 인하여 찢겨진 농민들의 삶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조달했다고 한다. 그에게 배우러 오는 젊은이가 있으면 비록 부자집 자식일지라도 김매고 수확하는 일을 몹시 시켰기 때문에 끝까지 배우는 자가 드물었다고 한다. 또 나무에다 농부가 밭가는 모습을 조각하여 백 여개를 책상 위에 벌여놓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통곡하며 불살랐다는 등의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농민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4

매월당이 그렇게 많은 시를 쓴 것은, "마음과 세상 일이 어긋난" 데에서 오는 정신의 굴곡이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가령

 

 

꽃은 산 속의 달력이요

바람은 고요 속의 손님일세

 

花是山中曆 風爲靜裏賓

 

― [悶極]

 

 

와 같은 표현에서 그의 시적 천재를 읽을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꽃은 달력이요" "바람은 손님"이라는 절묘한 은유만으로 이 시 전체의 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살기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이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요한 곳이기에 문을 두드리는 손님은 바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꽃 달력'을 보며 '바람 손님'과 더불어 소일하는 자신의 생활을 이보다 더 시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월당의 절창(絶唱)이라 일컬어지는 시 한 수를 더 소개한다.

 

 

아이는 잠자리 잡고 영감은 울타리 손질하고

작은 시내 봄물엔 가마우지 멱을 감네

 

푸른 산도 끊어진 곳, 갈 길이 멀어라

등나무 가지 하나 등에 걸머지고 있네

 

 

兒捕??翁補籬 小溪春水浴??

靑山斷處歸程遠 橫擔烏藤一箇枝

 

 

兒捕 翁補籬 小溪春水浴

靑山斷處歸程遠 橫擔烏藤一箇枝

 

― [山行卽事]

 

 

한 폭의 그림이다. 이 시에 묘사된 광경을 화폭에 옮기면 그대로 그림이 된다. 그야말로 '시중유화(詩中有畵)'요 '유성지화(有聲之畵)'라 할만하다. 특히 제2련은 압권이다. 산길을 따라 가는 나그네 앞에 그 산길이 끊어졌으니, 그렇지 않아도 먼 길이 더욱 멀어졌다. 지팡이 삼아 짚고 가던 등나무 가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잠시 서서 가야할 먼 길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나그네는 아마도 매월당 자신일 것이다.

 

 

...

 

 

 

‘성주지덕황룡벽해지중’ (聖主之德黃龍碧海之中). 

원글에 "번"으로 되어 있으나 "창"으로 정정함.

 

맑은 티끌이 자리에 깔려 있구나 (淸塵坐氈).

狐 를 ?(국죽 삼. ?이다)

 

 

?○?○枝多芒 扶持跋涉遊四方

 

? 질률나무. 즐(木+卽).

* 木+栗 : 률.

 

櫛 빗 즐.(木+節)

櫛栗 즐률 나무  : 스님들이 지팡이로 만드는데 쓰는 나무.

* ?○ : 아마  櫛栗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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