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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일본 이와미 은(銀)광산과 임진왜란에서 사용된 은(銀)!
이 글에서는 일본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 생산량이 세계 최대가 된 이유 및 임진왜란 에서
은(銀) 이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조선의 은광(銀鑛) 정책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본인들이 부산 초량왜관에 은(銀)을 싣고와 조선의 인삼과 면포에 쌀과 중국에서 수입한
상품들을 교환해 가는데.... 조선 상인들은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에 끼여 사신의 통제
를 받으며 북경 사신단 숙소인 회동관(會同館) 으로 찾아온 중국 상인과 인삼과 종이
및 은(銀)을 거래하고 또 저 은(銀) 으로 유리창(琉璃廠) 에서 상품을 구매해서 가져옵니다.
동해(일본해) 쓰루가 남쪽 돗토리현에 돗토리조 鳥取城(조취성) 성은 센고쿠(戰國 전국)시대
인 1545년에 영주이던 이케다(池田) 가문이 축성했으니.... 1581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신하인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난공불락이라 일컫는 돗토리성(鳥取城) 을 공격합니다.
모리씨가 장악하고 있던 시마네현 이와미 은광산 (石見銀山) 을 빼앗기 위해서니 성이 함락되고 다음해
1582년 6월에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암살당하자.... 빗츄(오카야마) 의
다카마쓰성을 수공으로 공략중이던 히데요시는 군사를 돌려 미쓰히데와 다른 가신인 경쟁자 시바타
가쓰이에를 쳐부수고 일본을 장악한후 저 이와미 은광의 은(銀)을 군자금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히데요시는 일본 역사에서도 꾀가 가장 많은 장수이니 전에도 숱한 기묘한 꾀를 내고 역발상
을 통해 많은 성을 빼앗았는데, 혹은 그 절반은 참모인 전 희메지 성주 구로다 간베에
(요시타카)의 아이디어라고도 합니다만....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광으로 가는 길” 을
터기 위해 돗토리성(鳥取城) 을 공격하면서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 을 고심 합니다.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돗토리성(鳥取城) 을 공략하는 작전에 앞서 여름에 상인
들을 포섭해서 공작을 시작했으니.... 은(銀)을 풀어서 시세의 몇배를 주더라도
돗토리 주변 지역의 쌀을 모두 사들이게 하는데, 쌀 값이 천정부지로 뛰자 돗토리
성안에 있던 비축 병량 마저 히데요시가 고용한 상인들의 손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히데요시는 가을 추수기 직전에 3만 대군을 이끌고는 돗토리로 진군하면서
평소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농가에 방화등 가혹행위를 자행해 겁에질린 농민들이 돗토리성
으로 몰려들어가게 만든후, 2천명이 수비하던 돗토리성을 포위하고 주변에 작은 성과 진지
를 구축하고는 병사들에게 탄약과 철포, 군량미를 보급한후 공격하지않고 포위만 하게 합니다.
그의 목적은 돗토리성으로 어떠한 보급품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으니 장기전으로 가서
성안에 있는 병사와 농민들을 모두 굶겨죽일 작정이었는데.... 포위된 100일 동안 성 내부
에서는 군마와 소가 먼저 죽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다 먹은 후에는 마침내 굶어 죽은
시체인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자 항복하는데.... 성주 깃카와 쓰네이에는 할복자결 합니다.
히데요시는 전비(戰費)로 은(銀)을 쏟아 부었지만.... 돗토리성(鳥取城) 은 당시 히로시마 일대
의 대영주인 모리(毛利)씨 수중에 있는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산 (石見銀山) 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 이었으니, 6개국의 영주 모리씨는 성의 함락을 막기 위해 해상과 육로로
보급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성은 함락되었으며 "은광산" 까지 히데요시 수중에 들어옵니다.
이와미 은광은 시마네현 오다시에 있으니 전성기에 일본 전체의 생산량은 150톤으로 세계
생산량의 30% 를 차지했는데... 그 전에 세계 최대의 은광은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í)
로 16세기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60% 인 250톤의 은을 생산해, 막대한 은의 유럽
유입으로 인플레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는데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법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긴잔큐키(銀山日記) 기록에 이와미에서는 14세기 초부터 노천 채굴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광산개발은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貞) 가 스오의 오우치 요시오키의
지원을 받아 1526년에 시작했으며, 이후 조선 연산군 시대에 발명된 연은분리법의 도입으로 은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니 막대한 부를 생산해내는 이와미 은광을 노리고 전쟁이 발발합니다.
“'천문 2년(1533년) 8월 5일 하카다 (博多)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 (神谷壽禎) 가 종단(宗丹), 계수(桂壽)
와 함께 은광에 와서 회취법 (吹鎔鍵製) 을 시작했다. (伴同國博多 宗丹及桂壽者 而來于銀山
始吹鎔鍵製白銀).' (에도시대 이와미 은광 기록인 '긴잔규키·銀山舊記') 이와미 은광 발견 7년 뒤 였다 ”
“조선과 달리 여전히 재래식 제련법으로 은을 만들던 이와미 였다. 그런데 어느 날 조선의
첨단 제련법인 '회취법(灰吹法)' 을 초빙된 기술자가 와서 가르쳤다는 것이니....
이와미 은광은 볼리비아의 포토시를 제치고 생산량이 세계 1위 은광 이 되었는데
17세기 에도시대 초에는 연간 생산량 150톤으로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 에 달했다.”
“1595년 포르투갈 테이세라의 일본도. 시마네현 붉은 동그라미 속에 '이와미 은광 표시'
이들은 누구인가. 6년뒤 조선 실록에는 기록이 나온다. '유서종 이 왜노(倭奴) 와
사사로이 통해 연철(鉛鐵) 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銀) 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 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하나이다.'(1539년 8월 10일 '중종실록') ”
“유서종은 전주 판관인데 공직을 남용해 이익을 챙긴 죄가 많았다. 그런데 일본의
은광석을 밀수입해 제련하고, 일본인에게 제련법 까지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중종은 "저놈이 죽어도 좋으니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하라"고 명했다. '빽' 이
좋았는지 유서종은 전옥서 주부로 강등됐다가 4년뒤 파직 조치로 없던 일이 됐다.”
“한국과 일본 사료를 종합하면, 이와미 은광에 회취법(灰吹法)을 전수한 기술자는
바로 조선인 이라는 말이다. 중국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일 학계에서는
새로운 사료(史料)가 나오지 않는 한 종단과 계수가 조선에서 유출된 첨단
기술자라 판단하고 있다. 자, 도대체 왜? 왜 조선의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갔는가.”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제작한 '문록석주정은(文祿石州丁銀)'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씨를 격파하고 이와미 은광을 장악한 후에 임진왜란
문록의 역)에 사용된 철포와 배 같은 무기 구입 을 위해 이와미 은으로 만든 은화 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세계무역의 결제 수단은 은(銀) 이었으니..... 세계의 유명한
은광산으로는 서구에서는 남미 볼리비아의 포토시 이고 동양에서는 일본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산 (石見銀山) 인데, 조선일보 ‘박종언의 땅의 歷史(역사)’
칼럼에 보면 “조선은 은을 버렸고 일본은 은을 손에 쥐었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서기 1503년 5월 18일 서민인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 이 경복궁에 입궐해
어전회의에 출석했는데 왕(연산군) 에게 보고하기를‘납 한 근을 이용하면
은 두 돈을 제련 할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수있게 되었나이다.’ 김감불과 김검동이 발명한 제련법 이름은 '회취법(灰吹法)' 이다.”
“잿더미에 은광석과 납석을 섞어 녹이면 납은 재에 흡수되고 은만 분리되는 제련법 이다.
은광석을 깨부순 뒤 녹여 은을 골라내던 재래 방식에 비해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첨단 기법이었다. 16세기 초에 발명된 이 첨단 제련법은 세상을 바꾸었다.
세상을, 조선만 빼고 온 세상을 바꿔 놓았다. 기회를 발로 차버렸던 조선 이야기 이다.”
“일본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은 생산량이 세계 1위 이니 일본은 이를 통해 세계무역
네트워크에 동참 했다. 일본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제련법 '회취법'
은 조선에서 데려온 기술자 2명에 의해 전수됐다. 조선은 명·청의 조공 요구가 있을
까 두려워 팔도 금광과 은광을 폐쇄했으니 금· 은광 폐쇄 정책은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16세기는 대항해 시대로 유럽은 신항로를 따라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명나라를 찾았으니
유럽과 아시아가 무역으로 연결되는 시대며 명나라는 은(銀)으로 조세를 통일한
일조편법을 운용중이었는데, 세계 최대 은광은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 (Potosi)
로 포르투갈은 포토시 은을 싣고 명나라로 와서는 도자기와 비단을 빈 배에 실어갔다.”
“일본 또한 동남아시아 믈라카(말레이지아 말래카)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일본 물품
을 팔고 은(銀)을 수입했다. 무역은 이즈모(出雲) 지역(시마네현) 다이묘(大名)
인 오우치(大內) 가문이 독점했다. 이즈모 지역의 옛 이름은 이와미노쿠니(石見國)
이다. 요컨대....... 은(銀)에 의해 유사(有史) 이래 처음으로 세계가 연결되고 있었다.”
“1526년 일본 이즈모에서 은광이 발견되자 오우치 요시오키는 야바무키성을 쌓고
부(富)의 원천으로 삼는데..... 오우치 (大內 대내) 가문은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일본 다타라하마 상륙해 쇼토쿠 태자를 만나고 다타라
성씨를 칭했다는데, 16대 후손 모리후사는 성(性)을 오우치 大內(대내) 로 바꿉니다.
그 25세손 오오우치 요시히로는 야마구치와 시모노세키 및 북규슈 일대 6개국의 슈고
(守護 수호)가 된 후에 고려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를 소탕해 주는
대가로 8만 대장경을 얻어간 적이 있으며...... 조선과 중국 무역에 힘썼으니
조선왕조 실록에는 “大內展(대내전)” 이라는 용어가 무려 “200차례 ”이상 등장합니다!
오우치 요시타카가 규슈 공략에 눈을 돌린 1530년에 오가사와라 나가타카가 은광을 탈취
하였지만 3년후 오우치 가문에 다시 귀속 되었으며, 1537년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
가 이와미를 공격하여 은광을 빼앗았고 2년후 오우치 가문이 탈환했지만.... 그 2년후
아마고 가문이 오가사와라 가문을 이용해 다시 은광을 점령하니 쟁탈전이 계속됩니다.
오우치 요시타카 사후 모리 모토나리가 오우치 가문을 이어 아마고 가문과 은광 쟁탈전 이
전개되었고, 1562년 모리 가문이 승리해 완전히 손안에 넣었지만 돗토리성 함락 3년
후인 1584년 모리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니..... 은광은 도요토미 가문
으로 넘어가는데... "임진왜란을 일으킨 막대한 군자금은 이와미 은광" 에서 충당됩니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히데요시는 이와미 광산의 은(銀)이 없었으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라? 선조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 황제는 먼저 2만냥의 은을 조선에 보내
주니 1592년 6월 24일 의주에 도착했는데.... 훗날 1904년 러일전쟁시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서 거액의 돈을 빌려 군함과 대포, 기관포에 소총과 탄약등 무기를 구입하는데......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일본이 승리해야 하니 일본, 영국, 미국 세 나라는 동맹국이 되었지요?
중국에서 가장 무능한 황제로 명나라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라 강희제가 제왕 명부에서
빼버린 명나라 황제 만력제가 십수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태업을 하며 놀다가 처음 한 일이
참장 곽몽징을 시켜 조선에 보내준 은 2만냥인데 선조는 이 은(銀)을 병사들에게 쓰지않습니다?
왕비와 후궁, 왕자와 대신 및 환관들에게 나누어 주며 선심을 쓰는 이해못할 행동을 하니 광해군과
유성룡은 사양하느라 진땀을 흘립니다. 선조는 바보 일까요? 당시 명나라는 몽고족 발배의 난
으로 전쟁중이라 조선에 보낼 군대가 없으니... 우선 군자금으로 은(銀) 부터 보낸 것인데 말입니다?
선조는 평양성에 군량미 10만석을 모으고는 병사들을 배치해서 명군 구원군이 올때까지 버틸 생각
에 전라감사 이광이 지휘한 3도의 남도 근왕군 7만의 북상 소식에 큰 기대를 걸었으니.... 저들이
한성을 수복하거나 압박하면 왜군은 진격은 멈출 것이고 명군이 올 시간을 벌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인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천 6백명 왜군에게 참패해 도주하니 부대를 수습한
것은 광주목사 권율의 1천과 별부장수 황진의 4백 뿐이라.... 나머지는 연기 처럼 사라졌으니
선조는 절망해서 평양에서 의주로 달아나서는 은(銀)을 저리 낭비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산도해전의 조선군 전사자는 3명이고 명량해전의 전사자는 2명에 불과하니 왜군의 조총은
바다에서는 유효사거리가 70미터에 불과하지만.... 조선 대포는 평균 700미터라 10배에
달하며, 일본의 세키부네는 70명이 타는 작고 낮으며 약한 수송선이나 반면에 조선의
판옥선은 대포 20문 이상을 갖추고 150명이 타는 크고 높으며 튼튼한 군함이니, 부산
수영이 배를 일렬로 세운후 대포 사격을 했으면 왜군은 부산 상륙 자체가 불가능 했습니다?
하지만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25척에 비해 30척 판옥선을 가진 경상 좌수영 박홍은 적군과 아군
의 화력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며, 사전에 해상전투 훈련이 전무했으니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않고는 동래성에 연기가 나자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지른후
1만 수군을 해산하고는 서울로 도주하다가 추풍령에서 대기중인 조선군에 억지로 합류합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전투 서너시간만에 함락됐으며 이일이 한성에서 병사 300명을 구하지 못해 사흘을
지체하니 제승방략으로 대구에 모인 수만명의 조선군들은 흩어져 버렸고 군관 서너명만 데리고
뒤늦게 내려온 이일은 상주에서 농민병 기몇백명을 모아 훈련중에 기습을 받고 1시간만에 몰살당합니다.
그리고 충주의 신립도 반나절만에 전멸했고, 한강 방어군과 한성(서울) 방어군은 전투없이 도주했으며
임진강 방어군과 평양 방어군도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데다가, 7만 근왕군이 1,600명 왜군에게 패해
사라졌으니, 선조는 조선군을 믿을수 없는지라..... 나라를 구할자는 명나라 군대니 그들을 초청하고
접대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명군을 잘 대접하는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은(銀)을 저리 쓴 것일까요?
실제로 명나라는 규슈에 거주하던 중국인을 통해 일본이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정보를 얻었고 유구국을 통해서도 정보가 전해지고 잇었는데도, 조선에서는
보고를 하지 않는데다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장정이 걸어서 20일 걸리는 거리를
왜군이 똑같은 “20일” 만에 한성에, 그것도 “무혈입성” 하자 조선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1591년 쓰시마국주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내어달라는 요구를 명나라에 보고해야 하는지에 대해 대신들은 “긁어 부스름”이라며 보고하지
말자고 할때 유성룡이 우겨서 늦게나마 보고를 했으니, 명나라 사신이 조선이 일본군과 한패인지 확인차
평양성을 방문했을때 유성룡은 강 건너편에 왜군과 대치중인 상황을 설명해 비로소 오해를 풀기도 했습니다.
명나라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3천명(5천명?) 기마병이 평양성에서 패하자 심유경을 보내 거짓
평화교섭으로 몇개월을 번후, 발배의 난을 200만냥의 은(銀)을 풀고 반간계에 영하성을 수공
(水攻) 으로 진압한 이여송은 3천리를 달려와.... 4만 3천 명군에 8천 조선군과 2천 승병등 5만
3천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이 전투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은 명나라 대포 400문 이었습니다.
1592년에는 명군의 군량을 조선이 대 주었으나, 다음해 부터 6년간은 조선이 전란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 흉년이 들기도 하는지라 명나라가 중국에서 직접 곡식을
운반해 오는데.... 1593년 明史(명사) : 하북의 양곡 13만석을 징발해 조선의 변경으로
수송하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4월 1일 황제가 산동의 군량 10만석을 배로 운송하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8월 19일 비변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군량을 운반 대책을 아뢰다. 1593년 8월 28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한 자문을 보내다. 1594년 1월 9일 청량사 허욱이 곡식을 보내달라는 자문을 가지고
떠나다. 1594년에 계갑 대기근이 터졌다, 명사(明史): 기근으로 허덕이는 조선에 100만석 쌀을 구휼
하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4월 1일 왜적이 남쪽에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중국에서 쌀을 보내 구제하다.
1593년부터 6년간 중국이 군량을 가져온 이유는 은(銀)을 보내도 조선에서는 전란으로
쌀을 구입할수 없었기 때문이니..... 만주를 통해서 오는 군량은 운송비가 많이 들고,
강남에서 바다를 건너 오는 쌀은 배가 태풍과 풍랑에 부숴지고 경기도나 충청도
서해안에 상륙해도 경상도의 명군과 조선군에게 수송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충주에서 한성이나, 안동에서 부산이라면 배에 실어 강으로 내려 보낼수 있지만 경기도나 충청도 해안
에서 경상도로 보내자면 육로로 운송해야 하는데 조선은 강에 다리가 없을뿐더러 2천년전 로마가
건설했던 돌로 된 포장도로가 없으니 흙길이라.... 홍수가 아니래도 비가 많이 오면 길은 진흙탕으로
바뀌고, 또 조선은 산이 많으니 이래저래 우마차 라는게 없이 사람이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는
보부상(褓負商)이 운송을 하니 경상도에 당도하면 중국에서 보낸 쌀은 절반 이상이 없어져 버립니다.
로마 가도는 도로가 놓일 땅의 양 옆으로 나무뿌리가 도로에 침투하거나 산적이 숨어 있는걸 방지
하기 위해 수십미터를 벌목하고는 평탄하게 한 다음에 1.5미터 정도로 땅을 깊게 파며, 도로의
너비는 왕복 2차로는 4미터에 배수로가 양쪽에 2개가 있고 인도가 각 3미터씩 합쳐 10미터
에 달했는데.... 땅을 깊이 판 다음 최하층은 statumen 이라고 해서 자갈을 30cm 높이로 깝니다.
2층은 rudus 라고 돌과 자갈에 점토를 섞어 깔고 3층은 nucleus 이니 인위적으로 잘게 부순 돌멩이
를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깔며 4층은 pavimentum 이라고 바닥길이니, 접합면이 딱 들어
맞도록 사방 70cm 정도의 자른 마름돌을 빈틈없이 맞추며 또 계곡을 지나가면 수십미터
높이로 교각을 만들고 산을 지나갈 때는 동굴도 뚫어 가급적이면 도로가 일직선이 되도록 합니다.
명나라는 절(浙)ㆍ섬(陝)ㆍ호(湖)ㆍ천(川)ㆍ귀(貴)ㆍ운(雲)ㆍ면(緬) 에서 22만 1천 5백여명을 징발했으며,
원정에서 천만냥의 은을 소비했으니... 조선주둔 명군의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583만냥이고 90만냥은
조선에 지원해준 금액인데, 만력제는 중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어도 구제에는 한푼도 쓰지
않으면서도 조선에는 돈을 퍼부었으니 꿈에 자기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라나요?
조선은 1592년 개전 중에 파악한 장부상 병력이 17만명이었는데 이후 재정 문제로 3만
명 규모까지 감축하니.... 정유재란시 병력은 일본군 14만과 명군 11만 7천명에
조선군은 3만 8천명이었는데, 조선은 전란으로 농사를 짓지 못한지라 백성들이
굶어죽는 판이니 세금을 거둘 여력이 없는지라 많은 병력을 유지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1597년 12월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스 1만 6천에 대해 조선군은 권율
등 12,000명인데 비해.... 명군은 양호와 마귀 58,000명으로, 2만은 양산에 주둔해
부산에서 구원올 왜군에 대비케 하고 3만 8천등 합계 5만으로 울산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 원군 8만이 양산 저지선을 뚫고 당도하자 대패하고는..... 멀리 경주로 달아납니다.
또 1598년 10월 4로병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8천명으로 지키는 사천성에 조선군 정기룡의 2천과 명군
동일원의 2만 7천등 3만 대군이 공격했으나 참패해 1만명이나 전사하고 경북 성주까지 달아나는데....
조명 연합수군이 장도해전에서는 승리했으나 유정과 권율등 육군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으니 상륙
하지도 못하고 큰 피해를 입고 이미 물러났던 순천왜성의 포위도 풀리고 2차 울산 도산성을 공격중이던
마귀의 조명연합군 30,000명도 조선군 대장인 선거이가 전사한 가운데 철수하니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동로(東路)의 중국군은 2만 4천명이고 조선군은 5천 5백명이며, 중로(中路)의 중국군은 2만 6천 8백명이고
조선군은 2천 2백명이며, 서로(西路)의 중국군은 2만 1천 9백명이고 조선군은 5천 9백명이며, 수로(水路)
의 중국수군은 1만 9천 4백명이고 조선 수군은 7천 3백이었으니 중국군 92,000명에 조선군 21,000명
모두 합하면 11만 3천명이었다. 군량과 무기도 비등했는데, 삼로(三路)의 군대가 흔적도 없이 무너
지니, 인심이 흉흉하여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10월 12일 갑자 7번째 기사
중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어도 눈썹하나 까닭않고 정사를 내팽개치며 30년간 태업을 벌인
만력제가 한 유일한 일이 조선에 연 25만 대군 파병에 은(銀)에다가 쌀을 퍼주는 것이었으니 중국인
들은 그를 “조선황제” 라고 부르는데, 발배의난과 임진왜란에 남쪽 파주 양응룡의난등 3대전쟁으로
재정이 파탄나자 세금을 폭징하고 농민반란을 진압하느라 여진족이 흥기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양응룡의 난은 남쪽 귀주지방 파주에서 묘족의 수장으로 800년간 세습해온 파주선위사 양응룡이
1597년에 난을 일으켰으나 명군이 진압에 실패하자 반란군이 14만으로 불어나니, 1600년
명나라는 20만 대군을 동원해 8로로 진격하는데 정유재란때 순천을 포위했던 유정의 부대가
114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누산관을 함락해 진압했지만 은(銀) 150만냥을 전비로 써야 했습니다.
만력제는 1619년 사르후 전투의 하나인 푸차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또 다시 은(銀)
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명나라는 그가 죽은지 24년 후에 멸망했으니....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어 기울고
있던 명나라 실정을 감안해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변에 튼튼한 성채를 구축하고 대병을 주둔시킨후
조선에는 돈과 무기만 대주면서 여진족을 통제했더라면 명나라는 수명이 좀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나라는 은(銀)으로 조세를 통일한 일조편법을 운용중이었으니 만력제는 명나라 군인들에게
은을 월급으로 주었는데... 명나라 병사들은 중국에서는 은을 가지고 거리에 나가면 밥이나
술에 기방을 갈수 있지만, 조선의 민가에서는 은(銀)을 받지 않아 무용지물이라고 불평
을 하는 것을 보는데..... 당시 상평통보 보다는 주로 쌀과 베(무명) 가 화폐로 통용되었습니다.
1894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 버나드 비숍여사는 조선에서 가장 불편한게 돈이라고 했으니 지폐나, 금화 및
은화가 없이 철전인 상평통보뿐인데... 무거우면서 가치도 없으니 많은량을 들고 다닐수가 없는지라 충주,
단양에 가면서 나룻배를 한척 세내어 상평통보 한가마니를 사서 배 바닥에 쏟고는 빈가마니로 덮은후
앉아 배에 밧줄 7개를 연결해 사람을 고용해 강변에서 밧줄을 끌고 충주까지 남한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1904년 5월 러일전쟁 취재차 미국 콜리어스(Collier's) 기자 로버트 던(Dunn) 이 조선에 왔으니 평양으로
떠나기전 한양에서 구리타 (Kurita) 라는 일본인에게 150달러(현재 4,000달러로 500만원)를 주면서
환전을 부탁했는데 환전한 상평통보는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트럭 한 대는 있어야만 옮길수 있는 양이라?
던(Dunn)은 조선인 스무명을 고용해 돈을 지키라 하고는 자기가 몸에 지닐수 있는데 까지만 엽전을
들고 다녀와서는 스무명에게 2주 동안의 일당을 주니.... 인플레에 돈 가치가 없었던지
저 엄청난 양의 돈이 다 없어져 버렸다는? 금화나 은화가 통용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이와미 은광 생산량이 세계 1위가 되지만 그전의 일본은 은(銀) 제련술이 부족했으니, 품질
과 생산량은 일본 광업계의 난제였는데 이와미(石見) 은광 안내문에 보면... “이와미
은광 세계문화유산센터 전시장 초입에 있는 안내문 : 1526년 은광 발견, 1533년 조선
의 회취법 도입, 그리고 1543년 철포 전래” 이 모두가 조선이 소유할 수 있었던 기회라?
“그런데 이와미 은광이 발견되고 20년이 못 돼 상황이 급변했다. 해마다 조선에 후추,
소가죽 따위를 팔러왔던 일본 사절단이 양질의 은(銀)을 가져와 면포와 교환을
요청한 것이다. 시전(市廛)은 왜은(倭銀)이 가득 채웠고 정기 무역단이 자그마치
8만냥(3.2톤)이나 되는 은을 가져와 면포와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일 까지 벌어졌다.”
“ 면포 3필에 은 2냥 이니 자그마치 12만필 규모였다. 결국 조선 조정은 1만 5000냥
어치만 매입하고 무역단을 돌려 보냈다. (같은 해 7월 17일 '중종실록')
농구로 치면 버저비터요, 축구로는 극장 골이다. 일등 공신은, 헛발질한 조선 왕실 이었다.”
“'1533년 8월 5일 하카다 상인 가미야 주테이가 종단(宗丹), 계수(桂壽)와 함께 은광에 와 회취법 (吹鎔鍵製)
을 시작했다 (伴同國博多宗丹及桂壽者 而來于銀山 始吹鎔鍵製白銀).' (에도 시대 '긴잔규키·銀山舊記')”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해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음은 천하가 아나이다.’1429년 8월 18일
세종대왕이 명나라 황제 에게 '금과 은을 조공 물품에서 제외해 달라' 고 편지를 올렸다.
편지를 들고 북경으로 갔던 이복동생 함녕군등 사신들이 희소식을 가져왔다. 금과 은(銀)
은 안 바쳐도 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말과 소, 명주(비단)에 인삼 등을 더 바쳐야 했지만.....
“그해 12월 6일 명나라측 협상 파트너 윤봉의 동생 윤중부가 조선 정부로 부터 토지 80결을
선물로 받았다. 윤봉은 조선인 출신 명나라 환관이다. 윤봉은 매, 개 따위를 황명(皇命)
이라며 빼앗다가 의전 담당 함길도 무장 이징옥에게 혼쭐이 났다. 금은(金銀) 조공
면제가 얼마나 큰 공이었는지 세종은 윤봉은 못 건드리고 오히려 이징옥을 처벌했다.”
이징옥은 호랑이를 산채로 잡았다는 무장으로 함길도에서 여진족과 싸워 큰 공을 세웠는데 세종대왕은
성군이시지만 조선 처녀들을 잡아다가 바치는 등 명나라 사신을 칙사대접 해야하는 처지라.... 고려때
50차례에 거쳐 공식적인 숫자로만 쳐도 2천명 이상을 바친데 비해 조선 태종은 진헌색(進獻色)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나이 어린 양가 처녀들을 3차례에 40명을 바쳤으며 세종은 4차례에 74명을 바쳤습니다.
이때 눈치없는 이징옥이 조선 백성을 혹사시키는 명나라 사신의 불의(不義)한 요구에 대적했다가 세종대왕
에 의해 파직된 것인데, 마치 천문관측 사실이 명나라 사신에 들키자 장영실 무리를 곤장을 쳐서 내쫓은
것과 같으니.... 훗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정권을 찬탈하자 이징옥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피살됩니다.
“ 그 정도로 명나라의 '처녀' 와 '금은' 조공 요구는 가혹했다. (세종이 조선 처녀들을 잡아다가
명나라에 바치니 3천리 강산은 피울음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세종이 내놓은 정책은 화근
(禍根) 제거, 바로 은광 '폐쇄' 였다. 금·은을 캐지 말자는 것이다. '경국대전' 은 '금은 을
북경에 몰래 가져다 파는 자는 교수형' 이라고 규정했고 폐쇄 정책은 조선 말기까지 시행됐다.”
“1600년 선조 는 당시 최대 은광인 단천 은광을 채굴한 자는 전 가족을 국경으로 추방
하고 감사는 파직하라고 명했다. 1706년 숙종 때 만든 '전록통고' 는 금과 은을 미리
국경도시 의주에 숨겨둔 자를 신고하면 면포 50필 혹은 면천(免賤) 포상을 규정했다“
“18세기 영조는 새 은광 발견 보고에 개발을 금했고, 19세기 헌종은 ‘금은(金銀) 채굴 금지는
농사철에 방해가 되고 백성이 이익을 다투니 행한 조치’ 보고에 채굴 금지 정책 을 이어갔다.”
“명이 됐든 오랑캐나라 청이 됐든 중국에 들키면 안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백성이 본업인 농사 대신
이득에 눈이 멀게되니 아니되었다. 사대주의와 성리학적 도덕론에 의해 조선의 은(銀)은 햇빛을
영영 보지 못했다. 1582년 율곡 이이는 상소 '진시폐소 (陳時弊疏)' 에서 그 나라를 이렇게 묘사했다. ”
“'國非其國 (국비기국)'. 나라 꼬라지가 나라가 아니라는 뜻 이다. 에피소드가 누적되면
역사가 된다. 결국 19세기말 조선 방방곡곡에 있는 광산은 '제국주의 양허업자의
행복한 사냥터 로 전락했으니... 조선이 고이 간직한 금은(金銀)은 고종의 조선 정부
가 미국인 모스에게 운산 금광 채굴권 을 주니 "노다지(노터치)!" 라는 말이 생깁니다.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유네스코센터 전시장에는 철포와 은과 회취법 전래를 요약한 안내문
이 걸려있다. 철포, 은, 회취법. 안개처럼 조선의 손에 들어왔다 빠져나간 기회 이다.” “일본은
믈라카(말레이시아 말래카) 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 까지 만들어 포르투갈 상인과 무역을 했다.”
“1543년 9월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중국 상선이 일본 가고시마 다네가시마 (種子島) 에 도착
했다.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가 포르투칼인들로 부터 철포(鐵砲) 2정을 구입했다.
1549년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가 철포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은 쿠니토모 (國友)에서
철포 500정을 구입했다. 철포로 무장한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통일을
완성했다.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銀)으로 은화 '문록석주정은 (文祿石州丁銀)' 을 만들었다. ”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광에서 얻은 은화로 철포와 군선(軍船)
을 구입 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새벽 철포부대를 포함한 1만 8,000여
일본군이 700척이 넘는 배를 타고 대마도 오우라(大浦) 항구를 빠져 나갔다. 임진
왜란, 조선이 무시한 철포와 조선이 부도덕 하다고 몰아붙였던 은(銀)의 역습(逆襲) 이었다.”
1653년 네델란드 상선 스페르버르호(Sperwer)는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에 제주도에서 폭풍으로
70여명 선원 중에 38명만이 살았는데..... 조선은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7,000 등 30만냥어치 상품을 압수하고 억류했다가 서울로 불러와 과거 병자호란의 벨테브레(박연)
처럼 훈련도감에 배치됐는데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귀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기겁을 한 조선은 중국 사신에게는 뇌물을 먹이고는 2명을 처형한후 나머지 33명 서양인들을 전라도
로 보내 세곳에 분산시켜 잡역에 종사하도록 시키니 흉년에는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해 구걸하며 목숩을 부지하다가 13년만에 하멜 일행이 탈출 합니다.
조선은 500년간 쇄국정책을 실시한지라 단 한척의 무역선도 바다로 띄우지 못했고 단 한명
의 상인도 개인이 자유롭게 무역하러 외국에 나가지 못했으니.... 임진왜란 이전 부터
일본 상인들은 중국 영파와 동남아로 진출해서는 베트남의 호이안, 태국의 아유타야,
말레이시아의 말래카 등 여러 도시에 일본인촌을 세우고 정주하며 무역한 것과 비교됩니다.
하멜 일행이 태풍으로 표류했을 때 저들을 잡아 가두고는 귀국을 불허할 것이 아니라....
이때 조선이 “쇄국정책” 을 폐하고는 “금은(金銀)” 을 캐 내서 저 네델란드인들과
무역하여 서양 대포와 군함에 신식 총을 구입하고 군비를 확충해 군사력을 기르며, 더
나아가 유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 을 도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