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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항쟁과 2단계 민주화
- 그 영향과 특징을 중심으로 -
고려대 정외과 교수 최장집
1. 들어가며
이 글은 1980년의 광주민주항쟁이 오늘의 한국민주주의에 가져다 준 영향과 그 영향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주요 관심은 사건의 원인과 전개과정 그리고 항쟁의 성격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민주화과정에 남긴 영향을 검토하는 것이다. 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이 민주화에 남긴 영향은 지대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광주민주항쟁이 한국의 정치체제가 군부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그것이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어떤 변화의 궤적을 그리고 한국민주화가 다른 남부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국가들과 비교할 때 어떤 특징적인 면을 갖도록 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연구된 것이 없다. 필자는 이 문제를 보기위하여 한국 민주화를 "2단계 민주화" (two-phased democratization)로 특징지어 보도록 하겠다. 2단계 민주화라 함은, 말그대로 한국의 민주화가 하나의 단일 과정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두단계로 분리되어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이 두단계는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가 하나의 연속과정과 서로 단절된 과정, 두 과정으로 구성된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이 가져오는 특징과 영향은 무엇인가? 이글은 이 문제를 풀어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풀어말하면, 한국의 민주화는 1987년 6월 항쟁이 가져온 민주적 개방을 뚜렷한 기점으로 한다. 그러나 이 6월항쟁은 7년전 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없이는 생각할수 없고, 그것을 샸번째 기점으로 볼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광주항쟁은 신군부에 의한 군부권위주의체제의 성립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민주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럼으로 그것은 일단 실패한 민주화운동으로 끝났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7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87년 다시 본격화되었다. 6월항쟁이 성공하여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두 단계의 민주화과정이 어떤 영향을 남겼나, 그리고 그것은 한국민주화에 있어 어떤 특징을 드러내게 되었나? 하는 문제는 한국민주주의의 과정과 성격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생각이다. 지금 그러나 민주화로의 이행이 어느 정도 진행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광주항쟁의 의미는 많은 변용을 겪어왔다. 광주항쟁의 국지화, 지역화, 호남문제의 호남화를 통하여 그 위상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광주항쟁이 가져다 준 영향과 그 변화를 추적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는 작업은 한국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2. 광주항쟁 對 5共
- 80년 광주항쟁의 유혈진압과 신군부정권의 국가권력장악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관점에서 볼 때 패배와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에서의 일시적 패배는 한국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을 추동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고, 결국 87년에 이르러 한국사회가 민주화로 이행하는 중요한 힘의 원친의 하나가 되었다. 광주항쟁은 국가에 반하는 운동으로서의 시민사회가 부활(O'Donnell & Schmitter,1986:p.48-56)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두환 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반체제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87년 6월의 민주화운동과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이 은 광주항쟁으로 받은 직.간접적인 영향을 크다. 광주항쟁은 민중항쟁의 모델이었고, 저항세력들의 정당성을 공유하게 만든 정체성 형성의 근원이었다. 일찍이 홉스봄(1964:p.140)은 "프랑스혁명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어떤 곳에서든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정치적 격변의 모델이요 패턴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하는 모든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바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광주항쟁은 그것을 5공군부권위주의정권에 대한 반체제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게 했다. 5共對 광주항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광주항쟁은 보편적 측면과 뒤에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로 변질될수 있는 局地的 측면 두가지 내용을 갖는다. 보편적 측면은 광주가 과거 박정권이래 군부권위주의의 지배체제와 정책이 만들어낸 문제점들을 응축적으로 표출하기 때문에, 그 대응으로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사회세력,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화하고 대변함으로써 그것이 民主 對 反民主 권위주의의 대립축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른하나는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를 창출해 낼 수 있는 局地的 측면이다. 군부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은 호남민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박정희 정권 말기에 발생한 부마항쟁에서 잘 보여지는 바와 같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중항쟁은 산발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문제는 광주민주항쟁이 철저히 고립된 상황에서 일어난 사실에서 보듯 민중들의 항쟁이 전국적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볼 때 광주항쟁은 가장 중요한 군부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별한 경험을 갖는 특별한 사태였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호남배제의 호남문제를 창출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호남문제는 3가지 구성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박정권이래의 산업화와 권위주의에서 소외된 호남배제라는 구조적 문제, 두 번째는 광주항쟁과 유혈참극이라는 광주사태, 세 번째는 호남민들이 소외를 극복할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김대중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 세요소는 "連繫效果" (coupling effect)를 만들면서 훗날 호남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주게된다.
- 어쨋든 광주항쟁이 갖는 보편적 측면과 국지적측면은 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줄곳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그리고 특히 광주항쟁의 이러한 성격은, 5共군부권위주의정권이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광주항쟁의 성격을 축소 왜곡하고 선전홍보함으로써 광주항쟁의 의미를 국지화하고, 훗날 호남배제를 중심으로한 지역문제를 만들어낼수 있는 반호남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자원이 되었다. 학생들이 제기한 중심적 요구사항은 광주학살의 가해자인 전두환 정권의 퇴진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출범은 광주사태를 통해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퇴진은 광주가 제기한 보편적 민주화 요구를 전국화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거리에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가두투쟁만이 아니라 산업현장에 직접 투신하여 노동자들에게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폭로.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많은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광주학살을 고발하는 비디오나 각종 상징물에 접하게 되었고, 그것은 저항의식을 강화하는 직접적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과정은, 국지적 항거로부터 전국적 민주화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 권위주의對 민주화운동세력간의 대립이라는 힘의 관계면에서 볼 때, 5공 對 민주화운동세력은 유신체제 對 민주화운동세력간의 관계와 상이하다. 유신체제하에서의 권위주의세력은 매우 강하여 그 자체의 정책과 의지를 (매우 탈정치화되고 탈활성화된) 시민사회위에 부과할수 있었다. 그러나 5共하에서는 권위주의의 힘과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세력의 힘은 균형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민주화운동세력이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광주항쟁은 80년대를 통하여 시민사회가 강력하게 활성화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을 마련했다. 이와 관련해 피조르노는 "새로운 대중운동의 출현은 正體性형성의 원칙으로서 저항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Pizzorno,1981:p.250). 이같은 새로운 인식에 입각해 학생운동 세력들은 '노학연대'를 주장하며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을 통해 사회기층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치참여를 불러 일으키고자 노력하였고, 사회의 수많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권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그 이전 시기와는 달리 학생과 지식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폭넓은 사회세력을 포괄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과정에서도 광주항쟁은 보편적 효과와 국지적 효과라는 2중적 측면을 내포한다. 한국사회에서의 시민사회의 힘이 활성화되고 팽창한 결과 시민사회가 강해졌다는 말은,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가 이에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광주항쟁이라는 하나의 사태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수 있다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볼수 있다는 것이다. 광주항쟁이 사회의 광범한 교육받은 도시중산층과 노동자들을 포함하는시민사회의 중심에 놓일대 그것은 실체적으로나 이미지상에서나 모두 민주화의 원천이며 상징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경우에는 국지화의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 광주항쟁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운동의 방법에 있어 대단히 전투성이 높고 이념적 정향에 있어서 급진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7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갖는 중요한 차이점은 후자에 이르러서는 한국사회의 지배구조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촉발시키게 된 것이다. 광주항쟁은, 군부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보편적 민주화 운동으로서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주의(procedural democracy)를 확립하려는 운동보다도, 특정 형태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득구조를 갖는 군부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실체적 민주화 (substantive democracy)에 대한 변화에 관심을 더 크게 가졌고, 한미관계에 대한 재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남북한 분단을 총체체적으로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변혁적 발상, 즉 최대강령적 (maximalist)민주화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우리는 이를 4.19당시와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4.19이후 민주화요구는 온건에서 급진으로 진행하는 계기롤 보였다. 즉 민주화-->노동문제-->통일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80년대의 운동은 이 세가지의 문제가 한꺼번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오리혀 통일문제를 중심으로한 민족문제가 압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찍이 덩크와트 러스토우는 민주화과정에서 민족문제, 또는 국민일체성 (national unity)의 문제가 민주화과정에 過負荷를 준다는 견해를 말한적이 있다 (Dankwart Rustow, 1971). 광주를 중심으로한 이러한 무드는 광주를 훗날 민족문제해결을 민주화와 동일시하거나 오히려 前者를 우선시하는 이른바 NL의 온상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광주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노동문제와 같은 사회문제를 더 우선시하는 이른바 PD노선을 중심으로하는 운동을 폈다. 운동권에 있어서 NLPD가 상당정도로 지역문제와 중첩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광주항쟁의 국지화에 대한 하나의 어두운 징표로 이해될수 있다.
3. 광주항쟁과 6월항쟁
- 87년의 6월항쟁은 5공군부권위주의에 대항하는 전체 시민사회의 민주화투쟁이었다. 그 결과 민주적 개방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i) 광주항쟁은 7년후에 민주화로 실현되었다. 이 글에서 2단계 민주화라 함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ii) 광주항쟁의 유혈이 6월항쟁의 무혈 민주화로의 이행을 가져오는데 기여한 것은 거의 결정적이다. 5공정부와 미국은 모두 광주의 교훈으로부터 마지막 결정적인 국면에서 軍을 동원할수 없도록 했다.
iii) 전국적인 운동으로서의 6월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은 분리되지 않고 後者는 前者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4. 광주항쟁과 선거에 의한 경쟁을 제도화한 민주주의
- 광주항쟁의 지역화, 국지화는 민주주의의 이행과 공고화과정에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운동과 거리의 정치로부터 선거의 정치로 정치적 경쟁의 방법이 바뀌는 민주화과정에서 광주문제의 국지화가 심화되었다. 권위주의하에서 호남배제가 민주화과정에서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고착되게 된 것은 한국민주화의 부정적 측면이다. 이점에서 한국민주주의는 스페인의 민주주의와 비교될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은 권위주의하에서 억압되고 소외된 사회의 두 중심적인 집단, 노동자와 카탈로니아, 바스크의 지역분리주의운동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이를 민주주의틀내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민주주의제도의 핵심은 투표에 의한 數의 경쟁이다. 그것은 수를 증대할수 있는 모든 가용한 자원의 동원을, 모든 잠재적 자원의 顯在化를 수반한다. 민주對 反민주의 구도가 투표에 의한 민주적 경쟁의 場에서 내용적으로 非호남對 호남이라는 경쟁축으로 재편성되는데 있어서 광주항쟁과 호남에 대한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로의 변용은 핵심적이다.
-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광주항쟁 그자체와 5共下에서 80년대의 운동으로 表象된 광주항쟁이 다르다는 면을 고려하는 것이다. 광주항쟁은 민주화를 요구하고 계엄에 항의하는 학생과 전시민의 항쟁인, 反군부독재 민주화투쟁이었다. 이와는 달리 80년대 광주항쟁은 이시기동안에 가져온 임팩트전체를 포괄한다. 그것은 극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그리고 최대강령적 반체제운동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띄었고, 이러한 것들을 상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변혁운동의 원천이며 상징인 것이다. 한국사회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하여 실현할수 있는 실체적 이데올로기적 범위를 훨씬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급진적인 것, 즉 노동운동, 통일운동, 학생운동등에서 모든 급진적인 것은 광주항쟁과 호남으로 연결될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이 가능해진다면 모든 反호남, 反광주와 反급진주의는 혼용되어 분리되기 어렵게 된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지형에서 선거를 통한 경쟁은 정당체제로 대표된다. 한국의 정당체제는 진보적 개혁을 수용할수 있는 제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부권위주의하에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급진주의와 진보성을 폭넓게 내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 진보성, 급진주의는 모두 구분과 경계가 애매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적 개혁을 급진주의와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부정적 효과를 갖는다. 더욱이 그것은 선거의 지형과 정당체제하의 정당이 기본단위가 되는 數의 경쟁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먼저 호남문제, 광주항쟁은, 민주화- 급진주의- 진보성등과 애매하게 모호하게 연계된다. 이러한 연계언술의 작동은 매우 이데올로기적 내용으로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 호남문제, 광주문제는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 문제는 호남민과 비호남민 양측에서 모두 작용한다. 87년대선에서의 민주세력의 분열은 광주의 수용을 통한 민주화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90년초의 3당통합은 지역간 정치경쟁을 제도화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더욱이 광주문제와 김대중과의 연계효과는, 그 인물이 야당지도자의 한사람이 됨과 아울러 광주문제를 여러지역의 하나, 여러 민주화운동의 한 대표적인 운동으로 지역화하는 것을 가능케했다.
5. 광주항쟁, 호남문제, 김영삼정부
- 광주항쟁의 의미의 국지화는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는 김영삼정부하서 더 가속화한 느낌이다.
80년이후 민주화투쟁의 대상은 누구였나? 그것은 신군부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세력이었다. 문민정부의 등장은 그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럼으로 그에 대한 저항의 중심이었던 광주와 호남을 국민적 통합성을 위해 통합하는 작업을 개혁의 제 1과제로 삼는 것이었어야 했다. 우리가 김영삼정부의 경험을 통하여 보게되는 것은, 호남문제를 우회하고서는 민주화 개혁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호남문제는 개혁의 정치,사회적 지지기반을 지역을 가로질러 확대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민간정부의 강력한 지지기반 형성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지역균열의 구조적 제약은 야당을 호남지역에 그 지지기반이 한정된 허약한 존재로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6. 광주문제의 해소를 위하여
기본적으로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배제의 정치나 분열의 정치가 아니라 통합과 화해의 과정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특정의 지역이나 사회집단을 항구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과 원리에 배치된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제5공화국하에서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보편적 지주가 됨으로써 그 상처와 희생을 부분적으로나마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민주화 이행과 소위 문민시대에서 광주는 깊은 고립감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호남이 독자적으로 집권하기 어렵다는 것은 한국의 선거정치가 갖고 있는 구조적 제약조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호남문제를 중심으로한 지역문제가 갖는 중요성은 지역라인 하나가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영국,노르웨이,스페인 등 서구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여전히 지역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지역문제가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는 이유는 서구 민주주의에서는 투표자들이 단일한 균열라인에 따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지 않고 다양하게 중첩된 소속감(overlapping memberships)을 갖고 선거에 임한다는 사실이다(로버트 달,1966:p.369). 이같은 중첩된 소속감은 다양한 균열라인을 종단하는 연합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광주문제의 해결은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견고한 민주화의 기초를 제공했던 호남의 통합은 더더욱이 중요하다. 이같은 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제약하는 지역간 대결을 제도화하는 정치적 틀을 해소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퍼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