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부르노의 카르투시오 수도회
1030년경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난 부르노는 사제로 서품된 후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랭스 (Reims)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1075년 랭스 대교구의 고문 역할도 맡게 됩니다.
당시 대교구장인 마네싸 주교를 성직매매로 고발하면서
마네싸 주교의 위협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만
교구민들의 마네싸 주교에 대한 저항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1)의 판결로
결국 마네싸는 주교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랭스의 교구민들은 브루노가 그들의 주교가 되어주기를 원했지만,
세상을 떠나 애독과 기도 생활을 원했던 부르노는
훗날 시토회를 설립하는 몰렘의 성 로베르토를 찾아가 조언을 청하였습니다.
성 로베르토는 그르노블 교구의 주교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을 하였고,
그의 말대로 1084년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그르노블 교구장이었던 성 후꼬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들이 오기 전 샤르트르즈 계곡 위에 일곱 개의 별이 떠 있는 꿈을 꾸었던
성 후꼬 주교는 성 부르노와 여섯 동료들을 보고는
그들이 바로 꿈속의 일곱 별들임을 확신하여
꿈에 본 그 장소를 기쁜 맘으로 제공하였습니다.
성 부르노는 그곳에 작은 경당과 한 사람씩 사용할 수 있는
일곱 개의 작은 초막을 지어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하느님을 찾는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시작이었습니다.
1088년 교황 우르바노 2세(2)가 선출이 되고 선임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스승이었던 부르노를 로마로 불러들입니다.
은수자의 삶을 계속 살고 싶었지만 교황의 부름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로마로 내려가 교회 개혁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주게 됩니다.
1090년 칼라브리아 교구장이 선종하면서
교황은 부르노에게 교구장이 되기를 명령하였지만,
부르노는 오히려 예전의 은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청하였고,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교황은 자신이 언제나 찾을 수 있도록
이탈리아에 머무는 조건으로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영주이자 이탈리아 남부 백작이며 부르노의 후원자가 된
루제로 1세 (Ruggero I)로부터 해발 790미터에 있는 ‘라 토레’ (laTorre)라는 땅을 기증받아
후에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모델이 되는
봉쇄 사제들이 거처하는 성모 마리아 은수처와,
그곳에서 2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 은수 사제들을 도와줄 수 있는
노동 수사 (conversi)들의 성 스테파노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부르노는 이곳에서 자신이 꿈꿨던 애독과 기도 생활을
형제들과 10년을 살다 1101년에 선종하였습니다.
후원자였던 루제로 1세 백작도 같은 해에 선종하였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지 40일 만인
1099년 7월 29일에 선종하였습니다.
성 부르노는 베네딕도 규칙을 기본으로
침묵 속에서 애독의 은수 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에
카르투시오회의 회칙을 직접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글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 두 통이 있고,
이 안에서 카르투시오회 삶의 핵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독 안에서 은수 생활, 형제적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연대의식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끊기 있는 깨어있음이었습니다.
첫 번째 회헌은 경험에서 오는 가르침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5대 원장이었던 귀고 1세(Guigo de Castro, 재임 1109~1136)가 1127년 저술한
「관습법」(Consuetudines)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카르투시오의 구성원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와 평수도자입니다.
성 부르노의 여섯 형제들도
네 명의 사제와 두 명의 평수사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제 수도자와 평수도자는 같은 수도원 안에서 살고 있지만
생활 공간과 방식이 다릅니다.
사제 수도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독채에서 애독과 침묵
그리고 손노동과 공부, 기도 생활로 하루를 보냅니다.
식사는 점심 한 끼만 할 수 있고
그 식사는 평수도자들이 각자의 방으로 가져다줍니다.
평일에는 자신의 독방에서 나와
하루에 세 번 성당에 모여 공동 기도와 미사를 하고
나머지 네 번의 기도는 각자의 독방에서 혼자 바치게 됩니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수도원 식당에서 함께 침묵 속에서 공동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공동 산책을 두세 시간 하면서 둘씩 짝지어서
그리고 간간이 짝을 바꾸어 가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평수도자는 애독과 침묵 중에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의 목적은 같지만
삶의 시간은 독방 안이 아니라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성 베네딕도가 수비아코에서 동굴 생활을 할 때
로마노 수사가 음식을 제공하여 보호하였듯,
독방에서 은수 생활을 하는 사제 수도자를 보살피고
수도원 안에서 필요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기도보다는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봉헌해야 하기 때문에
점심뿐만이 아니라 약간의 저녁 식사도 허락이 되고
휴식 시간도 사제 수도자보다 더 길었습니다.
사제 수도자와 평수도자는 다른 방법으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성 부르노가 형제들에게 남긴 편지글처럼
애독과 침묵 중에 하느님을 기다리는 끊기 있는 삶을
서로의 형제적 사랑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제 수도자는 평수도자 없이는 독채 안에서 은수 생활을 유지할 수 없고
평수도자는 사제 수도자 없이는 하느님께 향하는
영적인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방법적으로 사제의 영적인 것과
평수사의 육체적인 것을 교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은수처와 수도원이 분리되어 생활하는 까말돌리회와도 달랐고
공동체 생활만을 하는 베네딕도회와도 구별 지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봉쇄 수도원 안에서 애독, 침묵, 단식, 극기와 노동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나눌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카르투시안에게 애독이라는 은수적 삶은
나의 하느님을 만나 절대적 사랑을 느끼는 것이고
형제들과의 공동체적 삶은
이웃 사랑 안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공동 전례는 공동체 삶 안에 중요한 시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기도는 그레고리안 성가로 부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만들었고
오르간이나 악기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수도회처럼 개혁이나 갈라짐 없이 하나의 수도회로
지금까지 1000년을 내려왔다는 것으로 은수와 공동체의 삶의 균형이
얼마나 잘 이루어져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 클루니 수도회의 영향을 받아 교회 개혁을 처음 시도하였으며,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와 주교 서임권 문제로 다투어
황제를 파문함과 동시에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세속의 권한을 갖고 있는 황제보다 영적이 권한을 갖고 있는 교황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최초의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였다.
[출처] 성 부르노의 카르투시오 수도회|작성자 Roma Vian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