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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것
1958년 이브가 맡은 디올의 첫번째 콜렉션에서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은 처음 만난다. 그 날 이후 열정적인 사랑, 엄청난 성공 그리고 내밀한 상처로 뒤얽힌 50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 그리고 2008년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난 후 피에르 베르제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던 미술품 콜렉션을 경매에 내놓는다. '세기의 경매'라 불렸던 그들의 콜렉션은 3억7천3백50만 유로(한화 약 6천억 원)에 달하는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액으로 화제가 되었고, 수익금 전액은 에이즈 재단에 기부되었다. 장례식과 경매 행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수집품으로 가득 찬 파리의 아파트와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 그리고 노르망디의 샤토 가브리엘을 오가는 이브와 피에르의 마지막 여정이 펼쳐진다.
20세기 불멸의 패션 아이콘을 만나는 유일무이한 체험
패션과 예술, 인생과 사랑을 넘나드는 이브 생 로랑의 모든 것을 공유한다
20세기 최고의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 패션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재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였던 이브 생 로랑, 이니셜 YSL만으로 불멸이 되어버린 그를 만난다. 1957년 21세에 크리스챤 디올 수석 디자이너, 25세 오뜨꾸튀르하우스 '이브 생 로랑' 설립, 1966년 최초로 여성을 위한 팬츠 수트를 선보인 스모킹룩 발표, 47세 생존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회고전 개최, 49세 레종 도뇌르 훈장 수훈, 2002년 은퇴 선언, 2008년 사망, 프랑스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장례식 거행. 바로 불멸의 패션 아이콘이 된 유일무이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생애이다.
다큐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는 2002년 이브 생 로랑의 은퇴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는 언론의 플래시 세례와 함께 그토록 사랑하던 자신의 직업에 안녕을 고한다. 이어지는 2008년 그의 장례식… 장 폴 고티에, 발렌티노, 비비안 웨스트우드, 존 갈리아노, 겐조, 크리스챤 라크르와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그의 오랜 친구 카트린느 드뇌브 그리고 사르코지 대통령과 카를라 브루니 내외까지 참석해 애도했다. 그야말로 국장 수준이었다. 그들 안에 또 한 사람 피에르 베르제가 있었다. 이브 생 로랑의 오랜 연인이자 친구, 사업 파트너였던 그의 인사말은 담담해서 더욱 애잔하고 감동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를…" 그리고 마지막 휴식처인 모로코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에 잠든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추억과 회고 그리고 사랑과 예술을 둘러싼 때로는 아련하고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드라마틱한 감동이 살아 숨쉬는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화려한 패션계에서의 성공과 고뇌, 영광과 죽음까지의 이야기가 20세기 패션 역사를 관통하는 생생한 에피소드와 흥미진진한 뒷얘기들 속에서 펼쳐진다. 영원(永遠)을 사는 남자, 패션계의 제왕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가 이제 곧 우리 곁을 찾아온다.
패션의 역사를 새로 쓴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그가 창조하고 시작한 놀라운 패션 히스토리와 조우하다
오스카 와일드는 '터너 이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패션 역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지칭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시대를 바꾸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20세기 패션계의 마지막 전설, 바로 이브 생 로랑이다.
1966년의 패션 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져 있다. '이브 생 로랑, 최초로 여성을 위한 팬츠수트 스모킹룩 발표하다'라는 역사적인 한 줄이 포함된 것이다. 물론 이브 생 로랑 이전에도 여자들은 바지를 입었다. 하지만 그의 스모킹룩은 여성의 사회참여 물결과 맞물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역사의 변화와 함께 했다.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한 패션 혁명가, 천재의 타이밍과 감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가 남긴 기록은 그뿐만이 아니다. 몬드리안룩을 비롯해 마티스와 피카소, 팝 아트의 예술 세계를 색과 패턴의 배합으로 표현한 그의 의상들은 지금 보아도 혁신적이고 대담하다. 건축과 회화, 패션과 음악의 각종 장르를 넘어선 크로스오버 작업에 도전한 것은 이브 생 로랑이 처음이었다. 최근 패션계의 핫 트렌드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의 원조가 바로 이브인 것이다. 또한 세계 각국의 민속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콜렉션을 연이어 발표했고, 최초로 흑인 모델을 오뜨꾸튀르 무대에 올렸으며 패션쇼 피날레에 등장하기 시작한 첫번째 디자이너이다. 그 외에도 오뜨꾸튀르 디자이너로서 최초로 기성복 라인을 런칭했으며 피코트, 사파리 재킷, 점프수트, 트렌치코트 등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패션 아이템들을 창조한 장본인이다. 1983년 47세의 나이로 생존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해 파리 프티팔레에서는 대규모 이브 생 로랑 회고전이 열려 위대한 거장의 40년 패션사가 아낌 없이 펼쳐졌다.
영화 속 피에르 베르제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가들은 그들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에 그 시대를 바꾸는 존재가 아닐까요?" 시대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꿰뚫어보고 한 발 앞서 창조하는 예술가로서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그것이 가능했던 20세기 패션 역사의 정점에 서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기의 경매, 초특급 아트 이벤트!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최고의 추모이자 헌사
때로는 아련하고,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드라마틱한 감동이 살아 숨쉰다
2008년 이브 생 로랑의 타계 후 그의 오랜 동반자 피에르 베르제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모은 엄청난 규모의 미술품을 경매에 부치기로 한다. 그들의 인연과 사랑과 삶의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가장 호사스럽고 특별한 방식이었다. '세기의 경매'로 불리웠던 그들의 콜렉션 경매와 그 모든 것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들의 집, 파리의 아파트와 모로코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 노르망디의 샤토 가브리엘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카메라는 집요하게 비추어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은 바꾸어 놓았던 두 남자의 비밀스런 공간, 마티스와 앤디 워홀의 그림이 무심하게 걸려 있고 브랑쿠시의 조각이 거실 한켠을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곳을… 그리고 2009년 전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두 차례에 걸쳐 열렸던 그들의 콜렉션 경매는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1차 경매 낙찰액만 3억7천3백50만 유로(한화 약 6천억 원)에 달하는,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액수를 기록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경매 수익금은 전액 에이즈 연구 재단에 기부했다. 피에르 베르제는 말한다. "만약 내가 먼저 죽었다면 이브가 이런 경매를 진행했을까요? 아니요, 그는 결코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조각과 그림들 없이는 살 수 없었을 테니까요." 피에르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더없이 멋진 추모이자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콜렉션 경매는 단순한 미술품 경매가 아니었다. 엄청난 화제를 뿌렸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철저히, 고도로 준비된 '초특급 아트 이벤트'였다. 2009년 2월 23일부터 3일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크리스티가 진행한 이 '세기의 경매'는 미국, 일본, 중국 등에서도 경매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경매 프리뷰에 무려 3만여 명이 관람할 정도로 전시회로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단일 경매로는 총 732점의 경매 아이템 및 총 낙찰액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으며 개인의 이름으로 진행된 프라이빗 경매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빅이벤트였다. 이브 생 로랑은 이 '세기의 경매'를 계기로 패션계의 거장인 동시에 마티스, 세잔, 제리코, 앵그르, 드가, 피카소, 앙소르, 뭉크, 브라크, 브랑쿠시, 뒤샹에서부터 앤디 워홀 등등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어떤 극점에 다다른 전설의 콜렉터로서도 이름을 남기게 됐다. 그 외에도 국보급 유물과 고가구, 골동품 등도 포함되어 미술관 못지 않은 다양한 소장품들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려 새 주인을 찾았다. 그 중 마티스의 '뻐꾸기 그림이 있는 푸른색과 분홍색의 탁자보'는 3천5백90만 유로(한화 약 5백80억 원)에 미국인 콜렉터에게 팔려 최고가를 기록했으며 아일랜드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의 작품이 '용'이 새겨진 의자는 2천1백90만 유로(한화 약 350억)에 팔리며 20세기 가구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 경매에는 150년 전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가 중국에서 약탈해간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인 원명원의 12지신상 중 쥐와 토끼머리 청동상이 나와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2011년 S/S 시즌 패션 핫 키워드 1970년대와 이브 생 로랑의 부활
시대를 뛰어넘어 돌아온 이브 생 로랑의 패션과 그의 모든 것을 만난다
2008년 이브 생 로랑의 타계 후 2009년 전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최된 경매, 2010년 파리의 프티팔레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마지막으로 완성된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까지, 이브 생 로랑은 영원히 살고 있다. 그가 만든 패션과 그가 남긴 예술과 또 그가 창조한 스타일로서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국내 개봉을 앞둔 2011년 봄, 이브 생 로랑은 다시 한 번 부활했다. 바로 올 S/S 시즌의 패션 키워드로 화려하게 돌아온 것이다.
2011년 S/S 시즌의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는 바로 1970년대이다. 앞서 언급했던 지난 해 파리에서 열린 이브 생 로랑의 회고전이 그대로 트렌드에 반영되었다. '컬러 쇼크'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색깔의 조화가 런웨이를 장식했는데, 이브 생 로랑의 대표작인 몬드리안 드레스의 컬러 매치가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오렌지, 핑크, 그린, 바이올렛, 블루 등의 트로피컬 컬러부터 눈이 시릴 정도의 강렬한 네온 컬러까지 다양한 컬러 플레이를 시도한 룩들이 거리를 누빌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과감한 색감과 화려한 프린트로 이브 생 로랑의 관능을 계승한 집시 드레스와 하이 웨스트 팬츠, 사파리 재킷, 페전트 블라우스 등이 올 시즌 핫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1년 봄, 패션 트렌드의 핫 키워드로 떠오른 이브 생 로랑의 부활을 런웨이와 거리에 이어 개봉을 앞둔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로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원한 동반자 피에르 베르제 Pierre Berge
1930년 올레롱 섬에서 출생. 1948년 파리로 이주하였다. 문학에 열정이 있었던 그는 장 지오노, 장 콕토와 절친한 사이였고 이들과 죽을 때까지 친구로 지냈으며, 카뮈, 사르트르, 앙드레 부르통 등 당대의 지성인,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장 콕토가 죽은 후에는 그의 작품에 대한 법적 권리자가 되었다. 1949년에 베르제는 화가 베르나르 뷔페를 만났고 1958년까지 그와 긴밀한 관계로 지냈다. 같은 해에 이브 생 로랑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3년 후 둘은 함께 오뜨꾸튀르 하우스를 설립했다. 현재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 로랑 재단의 대표로 있다.
그는 아테네-루이 쥬벳 극장의 디렉터를 맡아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나비르 나이트>, 앙투완 비테즈 연출의 몰리에르 희극들을 무대에 올렸으며, 아테네의 월요음악축제를 설립했고 필립 글래스와 존 케이지의 콘서트 및 잉그리드 카벤 쇼를 제작했다. 또한 수년간 로버트 윌슨이나 피터 브룩의 연극 작품을 후원했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파리 오페라단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이 때 정명훈을 음악감독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수년간 에이즈 확산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1996년부터 에이즈 재단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브 생 로랑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사업가이자 좌파 정치가들의 후원자이며 사회운동가이자 공연예술 경영자이기도 한 피에르 베르제.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2007년에는 니콜라 사르코지와 맞서던 사회당 대통령 후보 세골렌 루이얄을 적극 후원했었다. 지난 해에는 경영난에 처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 '르몽드'를 좌파 성향의 기업인 컨소시엄을 결성해 인수하면서 사르코지로부터 독립언론을 구해냈다는 뉴스의 중심 인물이 되기도 했다. 2009년 경매 당시에는 중국의 청동상 반환 요청에 대해 "중국 정부가 인권선언을 실천하고 티베트인들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허락한다면, 당장 이 청동상들을 돌려줄 수 있다."라고 답해 논란을 사기도 했다. 영화 속 이브 생 로랑과의 50년에 걸친 다사다난했던 사랑을 지켜내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런 세상을 향한 굳은 신념과 그것을 실천해내는 강인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40년을 한결같이 패션쇼 런웨이 무대의 한쪽 끝에 숨어서 지켜보던 피에르 베르제일지도 모른다.
=== Production Note by Pierre Thoretton ===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처음엔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프로젝트로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듀서인 유즈 샤보누와 나는 이 두 사람의 인생이 진정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에 관한 영상 자료들이 있었고 나는 몇몇 러쉬들을 영화에 사용했다 그러나 진짜 영화적인 주제가 될 만한 것이나 내밀한 이야기들은 없었다. 문득 피에르 베르제의 말이 기억난다. "이런 말이 쓰여있는 머릿돌 위에 박물관을 세웠으면 좋겠어요. '돈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박물관에 이브 생 로랑이 만든 옷들과 그의 예술 작품 콜렉션이 모두 있을 거 같군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는가, 패션쇼 무대에서 미술상과 골동품상의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돈이 어떻게 돌고 도는가?" 결국 나는 이 주제를 다루어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미술상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생 로랑과 베르제의 취향을 넘어서서 언제나 토론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들 커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 둘 중 어느 한 사람을 배제한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고 아주 가끔씩 그들은 서로를 놀라게 할 만한 물건을 각자 발견해서 가져오곤 했다. 그림과 오브제들의 콜렉션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일과 성공 그리고 그들이 쌓은 부를 통해 이루어진 그들의 특별한 관계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주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피에르 베르제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당신들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할 공동 프로듀서를 찾는 것도 필요했다. 재능과 열정으로 이 역할을 다 해준 크리스티나 라슨이 바로 그녀이다.
촬영을 시작하다
피에르 베르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툼, 성공, 매우 심각한 반목들. 그렇지만 돈과 명예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남자는 50년 동안 사랑해 왔고 더불어 살았던 것들로부터 눈을 감았다. 나는 주변에서 그런 관계를 본 적이 없다. 내 가족이나 주변에는 한 사람과 50년 동안 함께 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이 두 사람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하도록 만든 그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업적, 이브 생 로랑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던 예술, 시, 문학과 같은 것들. 어쩌면 열정적인 사랑보다 같이 공유했던 환상이 있었기에 좀더 오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확실했던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서로가 서로를 감당해내지 못한 욕망 같은 것들이다.
지난 시간을 영화에 담다
이들 커플을 함께 담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는 종종 이 영화가 서로를 마주보고 의지하고 격려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문을 쾅 닫아 걸고 떠나고 싶어하기도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곤 했다. 지나간 삶이 있고 다가오는 죽음, 소멸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나에게 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정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다.
시나리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벌어질지 말지도 모를 일들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영화의 다소 예측 가능한 측면을 좋아한다. 그러려면 일단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터넷을 뒤져서 전세계가 다 알고 있는 이 두 인물에 대한 정보들을 복사 및 붙여넣기 하면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마도 전혀 흥미롭지 못했을 것이고, 인물들의 포스를 느끼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영화의 일관성을 갖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어시스턴트인 이브 기유에게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자고 요청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피에르 베르제가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들을 상상했다. 물론 우리가 시나리오 상에서 지어낸 것들이고 순수한 상상이기 때문에 결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은 아니었다. 피에르 베르제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한 그의 답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의 진짜 대답을 들은 후 수정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극영화의 작업과 같았다. 기본적으로는 시나리오가 존재하지만 배우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방식처럼.
재정비의 시간
피에르 베르제는 매우 활동적이고 사회 활동에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4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대화를 6개의 파트로 구성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구성의 리듬은 유용하게 작용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베르제 자신이 이전에 말한 것들이 무엇인가 다시 짚어볼 시간을 주고 파트와 파트 사이에서 자신이 한 대답을 스스로 바로잡을 시간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 동안 나 역시 반응에 따라 몇몇 질문들을 수정할 수 있었고 스태프들과 함께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시대의 초상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은 그들의 시대를 강렬하게 살았던 유명인들이었다. 성공이 꽃피우던 시절 그들은 정신적인 압박을 겪었다. 약물, 알코올, 우울증 등… 이런 것들이 왜 오게 되었을까? 나는 그들을 둘러싼 세계, 박수갈채, 칭찬 일색의 아부들, 조바심, 끝없는 요구들 그리고 그들을 망가뜨리는 긴장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실제 인물과 옛 사진들
서류들은 차치하고라도 옛날 사진들을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나는 편집기사인 도미니크 오브레이와 함께 수십 시간의 영상자료와 거의 10만 장에 가까운 사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을 누락시켜가면서 중요한 것들을 건졌다. 옛 사진들은 마치 법정에 출두한 증인들과 같았다. 사진들은 단지 그 시절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보여주고 있었고, 마침내 나는 그것들이 마치 대역 배우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시작에서 보여지는 이브 생 로랑의 은퇴 선언 장면은 흑백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연설 중간중간에 플래시를 넣고 사진들을 삽입했다. 마치 스타처럼 보여지는 주연 배우가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게 하는 것, 이것이 감독으로서의 바람이었다.
아름다움의 흔적
나는 애써 '관찰자'가 되고자 했다. 나 스스로 아름다움의 흔적과 표시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학자라기보다는 그저 즐기고 싶은 산책자에 가깝다. 벤치에 앉아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나만의 인간학을 생각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때때로 나는 지루한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페이지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계속 읽게 하거나 혹은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게 해주기를 바란다. 각 시퀀스의 구성 안에서 나는 관객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산책하듯 즐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일치된 생각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닌 각자의 방식대로 완결성을 갖게끔 말이다.
오리지널 음악
이 영화의 음악이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현재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음악이기를 바랐다. 그것이 바로 피아노가 표현하고 있는 바로 이 버전이다.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멜로디가 추억을 회상하듯 살살 흔들면서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 같다면, 왼손의 연주는 조금 강한 듯한 템포를 유지하면서 우리를 여전히 현실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베이스 리듬은 우리가 주제를 벗어난 꿈 같은 상상으로 빠지는 것을 막고 있다.
같은 서클
영화에서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은 마치 하나의 원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 비슷하다.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는 그렇게 돌고 도는 원 위에 펼쳐진다, 마치 자장가 같은 음악과 함께. 신화를 관통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를 구성하는 가능한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서클 안에 그들이 있다.
감독 피에르 쏘레통 Pierre Thoretton
사진작가이자 조형예술가. 2007년 첫 영화인 중편 <개와 늑대의 시간 Entre Chien et Loup>을 연출했으며, 2년 후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 커플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를 완성했다. 현재 극영화 첫 장편 <이상한 1년 Une estrange annee>을 준비 중이다.
패션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재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1936년 알제리 오랑(Oran) 출생,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냄
1954년 파리로 이주, 파리의상조합학교 등록, 크리스챤 디올을 만나고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됨
1957년 크리스챤 디올 사망, 디올의 뒤를 잇게 됨
1958년 피에르 베르제 만남, 패션계의 오스카인 니먼 마커스상 수상
1959년 최초로 공연 의상을 위한 디자인을 함(연극 <시라노 드 벨쥬락>, 롤랑 프티의 발레 공연)
1961년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오뜨꾸튀르 하우스 '이브 생 로랑' 설립
1962년 26세가 되던 1월에 최초의 콜렉션을 선보임
1966년 최초로 여성을 위한 팬츠수트 선보인 스모킹룩 발표. 기성복 라인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쉬' 런칭
1967년 만화 <발칙한 루루> 출판
1971년 '40'라고 불리운 S/S 콜렉션이 큰 반향을 일으킴. 향수 리브 고쉬 출시
1973년 롤랑 프티의 발레 <장미의 죽음> 초연에서 마야 플리세츠카야 의상 디자인
피터 한트케의 <콘스탄스 호수로의 여행>에서 잔느 모로, 델핀 세리그 의상디자인
1974년 마르소가에 5호점 오픈
1976년 '러시아 콜렉션' 대성공
1977년 향수 오피움 런칭
1981년 여성작가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 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의상 디자인
1982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상' 수상, 이브 생 로랑 20주년 기념 파티
198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회고전 개최, 생존 디자이너로서는 최초
1985년 베이징에서 회고전, 레종 도뇌르 훈장 수훈
1986년 파리 패션박물관 회고전, 모스크바 트레티아토프 갤러리 회고전
1987년 생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박물관 회고전. 호주 시드니 뉴사우즈 웨일즈 갤러리 회고전
1990년 도쿄 세존 미술관 회고전
1992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이브 생 로랑 30주년 기념 파티
199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경기 전 300명의 모델들이 출연하는 패션쇼 개최
2001년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 수훈자로 격상
2002년 1월 7일 은퇴 선언, 1월 22일 파리 퐁피두센터 '40주년 고별 패션쇼'
12월 5일 이브 생 로랑-피에르 베르제 재단 설립
2007년 레종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수훈자로 격상
2008년 72세로 타계
2009년 이브 생 로랑-피에르 베르제 콜렉션 '세기의 경매'로 화제
2010년 파리 프티팔레에서 대규모 회고전 개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7 0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