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쇼팽 독주회
프로그램:
바르카롤 Op.60
6개의 왈츠
스케르초 No2
피아노 협주곡 1번(실내악 버젼: 특별출연 -콰르텟 21)
앵콜: 마주르카, 영웅 폴로네이즈
당 타이손의 쇼피협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막연하게나마 '(대단히 좋은 의미에서) 살롱 음악의 극치를 듣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의 연주를 직접 듣고나서 그렇게 생각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여태 들었던 어떤 연주자보다 대단히 '섬세한' 연주라서 그렇다는 것을.
그것은 터치의 강약이 섬세하다던지, 페달을 자유자재로 쓴다던지 하는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 연주자의 본질적인 내면이 섬세한 감수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제 연주는 마치 재즈피아노를 듣는 것 처럼 자유분방한 면이 없잖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섬세함'이 빛 바래진 않았다.
쇼팽의 아름다움은, 곡을 들을 때 마다 마치 얇은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춰진 형형색색의 빛들을 보는 것 처럼 느껴지거나 혹은 조용히 일렁이는 물결에 드리워진 은은한 저녁 햇빛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어제의 바르카롤에서는 처음으로 '바다'가 느껴졌는데(이것은 드..드뷔시?!;;) 그동안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바다,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들어야만 비로소 희미하고, 또렷하게, 그리고 아련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바다를 보았다. 마치 저감도의 흑백필름을 써서 핀 홀 카메라로 찍은 회색 해변가를 보는 것 처럼.
6개의 왈츠는 저번에 들었던 베레조프스키가 마치 집에 놀러온 친구들 앞에서 연주하거나, 혹은 홀로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 처럼 무심하게(성의가 없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임) 후루룩~ 쳐냈던 것에 비해, 당 타이 손은 마치 재즈 피아노처럼 자유분방하게 연주했다. 에너지의 낙차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아무래도 체격 탓도 있으리라) 나름 다이내믹하게 연주하려고 노력했으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의 연주가 원래 '내면적'이라서 그런지 장조보다는 단조의 연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단조곡에서의 어떠한 체념과 슬픔과 침묵을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들려주었던 것은 그의 신산(辛酸)했었던 삶과 무관하지많은 않을 것이라고 연주를 들으며 감히 생각도 해 보았다.
스케르초도 마찬가지로 자유 분방하게 연주했고…분명 그의 연주가 테크닉적으로 미스터치 하나 없이 완벽했던 것도 아니고, 군데군데 치다가 음을 먹은 것도 있어서 그 점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듯 하긴 했다(개인적으로는 그런데 크게 개의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리고 인터미션 후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콰르텟 21과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는데, 공연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주 불쾌한 일을 겪어서 그 좋아하는 1악장을 송두리째 날려 먹었어야 했다. 무슨 일인고 하니, 내 옆에 앉았던 연세도 지긋해 보이던 아저씨 한 분께서 1부부터 계속 부시럭 거리고 머리도 긁고~ 좀 산만하게 구셔서 그냥 그것까진 나름대로 참을 수 있었는데, 2부 피아노 협주곡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공연 중에 대놓고 연주자들에 대해 욕을 한 것 이었다. 투덜대는 정도가 아니라 옆에 앉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욕하는 것을 들었는데 콰르텟21의 연주실력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피아노 연주를 현악이 못 받쳐 주고 연주를 망친다고 어떻게 저런 연주자들을 기용할 수 있냐고 욕을 하는데, 솔직히 내 느낌에도 콰르텟21에 대해 아쉬운 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누가 보아도 긴장한 모습으로 무대에 나와 정말 최선을 다해 연주한다는 것이 눈에 보였는데 거기다 대놓고 욕을 하다니…그것도 여러 사람 관람하는 정적이 흐르는 연주회장에서…(솔직히 연주자들이 욕하는 거 들었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ㅜㅜ)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욕을 계속 하다가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나무라니, 분에 못 이긴 듯 연주 중간에 나가버려서 그 이후로는 오히려 속이 다 시원했다. 너무 불쾌해서 다시는 연주회장에서 그런 사람 보고 싶지 않다.
그래 버리는 바람에 1악장은 정말 거의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2악장으로 넘어갔는데, 다행스럽게도 아까 전에 1악장을 놓친 아쉬움을 서정적인 2악장의 연주가 보상 해주고도 남았다. 가끔 정말 좋은 연주를 들으면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하는 마음으로 눈 앞에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나비를 쫓아 다니듯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연주를 들을 때가 있다. 그 날의 연주에서는 협주곡 2악장과 앵콜로 친 마주르카가 그랬었다. 마치 총총한 밤하늘의 뭇 별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유영(游泳)하는 한 마리 은빛 나비를 보는 것만 같은.... 그리고 앵콜로 친 마주르카는 더 대단해서 아무 것도 필요 없이 눈을 감고 들은, 나와 音만 남겨놓은 시간도 떠나고 현실도 떠난 진공의 공간으로 나를 이끌었다. 오직 종교적인 비의(泌意)의 체험에서나 가능한 그런 일. 어쩌면 음악을 일부러나마 실황으로 들으러 가는 것은 이런 추체험(追體驗)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주르카 후에 연주된 앵콜은 폴로네이즈라고 하는데 그 때 언뜻 보면 키 작고, 몸집도 작고 회색 차이나칼라 자켓을 입었던 얌전해 보이는 베트남 아저씨께서 붉은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와서 관객 모두가 깜짝 놀랐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폴로네이즈를 연주해서 큰 갈채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는 몰라도 귀여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다는…^^*
당 타이손 독주회는 그 날 새벽에 월드컵 대 나이지리아 축구경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애호가들이 모여 좋은 연주를 들었고 또한 좋은 연주회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무례한 한 사람만 빼고!). 굳이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진실로 아름답고, 행복했던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