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185] 영서연설(郢書燕說)
정민 · 한양대 교수 · 고전문학
입력 2012.11.20. 23:30업데이트 2012.11.21.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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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한양대 교수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손자를 가르치다가 영 속이 상하셨던 모양이다. 손자에게 주는 시 두 수를 남겼다. 그중 둘째 수. "내가 직접 모범 보여 손자 교육 못하니, 타일러도 우습게 아는 것이 당연하다. 내 말은 그래도 성현의 말씀이고, 네 자질은 다행히 못난 사람 아니로다. 맹상군이 무를 캠이 어이 뿌리 때문이랴, 영서(郢書)의 거촉(擧燭)으로 어진 신하 길 열었네. 선생 비록 바르지 않다손 치더라도, 네 덕을 새롭게 함에 어이 방해되겠느냐?(我敎小孫不以身, 宜其邈邈此諄諄. 余言而自聖賢說, 汝質幸非愚下人. 趙相采 豈下體, 郢書擧燭開賢臣. 雖云夫子未於正, 於爾何妨德日新.)"(趙相은 齊相의 誤記인 듯)
공부 안 한다고 야단하자 "아빠는 잘했어요?"라고 대꾸하는 연속극의 한 장면이 자꾸 겹쳐진다. 할아비가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못 했어도, 새겨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될 성현의 말씀인데, 열심히 익혀 실천에 옮기면 좀 예쁘겠냐는 말씀이다. 5구 맹상군의 '채봉채비(采葑采菲)' 고사는 앞서 살폈고, '영서의 거촉' 운운한 6구의 맥락이 궁금하다.
초나라 영(郢) 땅에 사는 사람이 연나라 재상에게 편지를 썼다. 한밤중이라 글씨가 잘 보이지 않자 곁에 서 있던 하인에게 '등불을 들어라'[擧燭]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얼떨결에 이 두 글자를 맥락 없이 써넣었다.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아 읽다가 '거촉'이란 두 글자에 이르러 문맥이 탁 막혔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궁리했다. "등불을 들어올리란 말은 밝음을 숭상한다는 뜻이겠지. 그렇구나! 어진이를 천거하여 임용하라는 말이렷다." 그는 기뻐하며 이 말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말에 따라 어진 이를 등용하면서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편지를 보낸 이의 본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꿈보다 해몽이 좋아 결과마저 흐뭇했다.
이것이 영서연설(郢書燕說)에 얽힌 사연이다. 영 땅 사람이 잘못 써서 보낸 편지[郢書]에 연나라 재상이 그럴듯한 설명[燕說]을 덧붙이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본래 뜻과 달리 멋대로 가져다 붙인 견강부회의 의미로 쓴다.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으로 알아듣기 일쑤인데, 반대의 경우라면 그런대로 괜찮다. 엉터리 풀이라도 결과가 좋았다면 굳이 탓할 일이 못 되는 걸까? 그게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