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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김 형 경
고속버스가 쉽게 도심을 벗어나지 못해, 간헐적으로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설 때마다 나의 느닷없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자 하는 조급증이 솟구치곤 한다. 그는 아마 나의 악마성에, 나의 지독한 이기심에 동조하고만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자책하며, 그 우유부단함을 숨긴 채 그저 포용력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연출하고자 은근히 고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그는 진심으로 흔쾌히 내 요청을 수락했고, 아주 자발적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고속버스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라 해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을 것이고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묻지 않는 내 오래된 습관은 그저 멀미를 참아내듯 그 불편함을 삭이려 애쓸 뿐이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데에만 알맞도록 설계된 고속버스는 도심의 잦은 신호 대기에 결릴 때마다 몸살하듯 차체 진동이 심하다. 그럴 때마다 내 행위를 변호하고 이해받고 싶은 조갈증*이 미미한 멀미 기운과 함께 솟구쳐 올라 목이 타는 느낌이다.
올 사월 스무나흘이 늬 아버지 환갑이다. 연초에 올라오셔서 마치 큰 잘못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운을 떼신 어머니께˙내가 보인 첫 반응은 난 몰라요, 였다. 어머니 역시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신 듯 조금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신이 준비해 오신 다음 말씀을 이었다. 그렇다면 편지라도 드려라. 그래도 네가 맏인데. 그러나 어머니의 말투에 어떠한 긴박감도 강제성도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하며 오히려 내 쪽에서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쯤 일러두면 내가 알아서 처신하리라고 믿고 계시거나 아니면 완력으로 내게 그 일을 강요할 만한 명분이 없다고 여기시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어느 쪽이 진정한 당신의 묵언의 이유였든 간에 내가 맞은 비애로움은 참담할 뿐이었다. 그 참담함 뒤끝에 나는 성급하게도, 정종 병을 들고 처음 가보는 아버지의 집을 쭈뻣거리며 들어서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아버렸다.
톨게이트를 벗어난 고속버스는 비로소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스쳐가는 창밖으로는 조악한 손길이 어수선하게 드러나는 가로수며 야산들이 그의 시선만큼이나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의 곁에서 때때로 느껴 왔던 소외감이 다시 머리를 든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세 시간이 넘는 여행시간을 내내 저런 표정으로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환갑이셔요. 환갑은 사위와 며느리가 차려드리는 거라는데, 어머닌 내게 사람이 있으면 이번 기회에 아버지께 인사시키기를 바라셔요. 다른 이유나 조건은 없어요. 그저 잠깐 동행해줄 수 있다면. 그가 나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수락한 것은 뜻밖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가 그 정도의 요청은 충분히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 ㅇ¡른 바탈감과 절망뿐이었다 해도 그 원망스러운 기억들 사이로 따스했던 당신의 태도 몇 가지가 햇살처럼 비쳐 들곤 했듯이, 그가 내게 준 것이 예상치 못했던 상실감이었다 해도 나는 그의 기본적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강릉행 고속버스 티켓 매표소 앞에서 만나 아득히 먼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 후 이렇게 달리는 차 안에 나란히 앉게 되기까지 이것이 첫 대화이다. 내 물음이 그에게 쇠사슬이나 나무울타리 같은 작용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가장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질문의 방식을 택한다. 그는 원한다면 애매한 답변으로 내 물음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
“이사했어.”
그의 대답이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하고 부드러워 나는 자칫 물줄기들이 가지고 있는 완강한 고집에 대해 간과할 뻔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일상 중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되는 사건을 골라 내게 말해주는 것뿐이리라. 그럼에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비탈길의 환영을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그의 집으로 이르던 비탈길이, 저 스스로 살아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르며 그 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난감하고 당혹스럽게 만들던 그 밤, 그 길 앞에서 나는 무던히도 어려움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의 창을 바라보고 서서야 온몸의 식은땀이 기화하면서 체온을 앗아가고 있음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싸늘한 기운은 뼛속의 빈 공간을 휘돌아 나가며 태초의 그것과도 같은 적막함을 몸속에 남겨놓았다. 사색에 잠겨 깊은 빛을 띠는 그의 눈빛처럼, 어둠 속에 혼자 밝혀져 있던 그의 창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이 그의 집 앞이 아니라 허무와 절망의 점점 지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혹은 많은 일들을 인내하고 있는 그의 눈빛을 창망히 바라보다가 그를 보낼 수밖에 없음을 결정했듯이 나는 또 그의 창을 그렇게 돌아서 왔다. 그러나 어떻게 잊을 것인가. 비탈길에 실려, 길이 마치 나를 낮은 곳으로 내려놓는 듯한 느낌으로 슬픔처럼 완만한 그 길을 걸어 내려왔던 그 밤, 싸늘한 초봄의 밤공기까지.
나는 그에게 어디로 이사했느냐고 묻지 못한다. 이제는 집이라는 형태를 띤 그리움을 갖고 싶지 않다. 내게 있어 모든 집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그리움이거나 영원한 망설임이었다. 세상의 집들이 내게 드러내 보이던 배타성 앞에서 절망했던 어린 시절부터 왜 사람들은 저마다 집을 가지고 사는가를 되새겨 묻던 사춘기를 지나, 방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복덕방을 뒤지고 다닐 때, 복덕방 간판만 보아도 콧날이 시큰해오던 이십 대까지 집은 내게 불가항력 의 어려움이었다. 모든 집들이 내게 박탈감을 안겨주며 등을 돌린다는 삭연함과는 달리 나는 또 세상의 모든 집들이 일제히 입을 열고 나를 삼킬 것 같은 공포도 함께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러나 더 불행한 일은 내가 집들에 대한 기대나 미련 혹은 소외감들로부터 전혀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오면서 나는 이제 집이라는 형태의 어떤 기대도 환상도 갖지 않을 줄 알았다. 아버지의 집은 내게 가장 큰 어려움의 대상이었다. 내가 그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 집은 내가 다가가는 것에 비례하여 뒤로 물러나 한나절을 걸어도 그곳에 닿지 못할 것 같은 아득함만을 안겨주곤 했다. 아니다. 집이 내게서 멀어진 게 아니라 그 집까지 좁혀지는 거리에 반비례하여 내 마음이 한사코 뒤로 물러서곤 하였다는 게 옳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겉에서 하얗게 반사해 부서지던 햇살이며 작은 바람에도 뽀얗게 일어나곤 하던 먼지조차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그것들에 발이 걸려 멀미 기운이 일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집에서 처음 여자를 보았을 때 그녀는 작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니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내 기억이 왜곡시킨 그림 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쳐 아버지의 집을 빠져나왔고, 그리고 울었던 것 같다. 집 앞에 있던 거대한 침엽수 숲이며 그 숲을 연신 울리던 새소리며 물기 어른어른한 눈으로 보았던 하늘이 침엽수처럼 날카롭게 조각나 있던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은 열세 살짜리 계집 아이에겐 그저 충격일 뿐이었다.
그 후 반년 혹은 1년에 한 번씩, 때로는 의무감에서 때로는 필요에 의해서 아버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여자는 배가 불룩해져 있거나 새로운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와 비례하여 나는 여자에 대한 칼칼한 적의가 시들어가는 것을 느꼈고 급기야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일기까지 했다. 그것이 자칫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까지 파장될 듯하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보는 일의 고통으로부터 서둘러 걸어 나오고 말았다.
아, 아버지.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강인하고 과묵하며 상처 입은 자의식을 끌어안고 묵묵히 그 상처를 핥아내는 거대한 짐승의 모습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엇이 아버지를 그토록 크게 보이게 했으며 무슨 이유로 아버지를 그렇게 어렵 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 에도 아버지는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봉우리이거나 그 바닥으로 내려갈 수 없는 깊은 우물이거나 하였다.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현미경의 세계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일곱 살 무렵, 나는 알코올 속에 보관된 갖가지 생물들과 기이한 모양을 한 실험도구들이 가득 진열된 아버지의 실험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미미하게 허공을 떠도는 에테르 냄새가 분위기를 한층 교교하게* 만들던 그 방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외경심을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진열장 한켠에서 얇고 투명한 유리판을 꺼냈을 때는 너무나 조심스러워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유리판을 허리 굽은 노인의 모습을 닮은 물체―그것이 현미경이었다ㅡ밑부분에 고정시킨 후 위쪽을 가리키며 들여다보라고 했다. 대물렌즈니 대안렌즈니 하는 명칭은 물론 그 기구의 쓰임새조차 몰랐던 나는 그저 어리둥절한 조심스러움으로 그곳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 시선이 뜻밖에도 한없이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 속이 그토록 깊고 넓다는 의외성에 눈이 익자 이번에는 그 밑바닥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물체들의 움직임에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대물렌즈 쪽에 끼운 유리판은 아무 흔적 없이 말끔한 것이었는데 현미경을 통해 보니 그 내부에 그토록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여러 장의 유리판을 번갈아 끼워가며 이것은 수돗물, 이것은 혈액, 이것은 식물의 표피 따위의 설명을 곁들여주었지만 내가 보고 있는 구슬 모양의, 혹은 길둥글한 막대 모양의, 혹은 벌집처럼 생긴 사방 연속무늬의 그림은 아버지가 말해주는 물체와 너무도 달라 그저 당혹스럽고 막막할 뿐이었다.
그 후 나는 이따금 어린 시절에 보았던 현미경의 내밀한 세계를 떠올리곤 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의 은밀한 곳에서 생태계를 움직이는 생명 력이라든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물체들이 가지고 있는 이면의 실체, 그런 것들을 생각하곤 했다. 그 사실은 일종의 두려움의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내가 어떤 대상의, 혹은 세상 전체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간과하며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였고 때로는 미필적 고의로든 그런 것들을 아예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기도 했다.
차라리 아버지는 내게 망원경을 보여주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망원경을 높이 들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희망을 말해주거나 천체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 앞날을 예견한다는 점성술에 대해 들려주었더라면 나는 아마 먼 미래에 마음이 팔려 과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이 그만큼 더 용이하고 순조로웠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데 대한 원망을 풀고자 하는 열망은 얼마나 간절하였던가. 나는 모든 잘못이 아버지 개인에게만 있다고는 단정하지 않았다. 혼미함으로 일관된 당신의 삶에도 원인이, 아주 뿌리 깊고 치유 불가능한 상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용인하려는 내 노력이 명분을 얻으려면 아버지의 상처는 보다 정대한* 이상이나 뜻 깊은 모색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했다. 적어도 50년대에 이십 대를 보내며 전쟁에 앗긴 젊음, 그것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윤리성, 결코 회복되지 못하도록 고갈된 정서, 그런 것들이거나 60년대에 삼십 대를 보내면서 얻은, 그 사회가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갖다 안긴 뼈아픈 좌절감이나 패배의식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할아버지 세대처럼 낮에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글을 읽으며 소박하게 살 수 없었던 아버지 세대의 사회적 여건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터전에서도 늘 무언가 결핍감을 느꼈던 듯 끊임없는 이직과 이사를 되풀이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방증*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들은 바 없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 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우리는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서로의 삶의 터전이 갖는 지리적인 거리보다 두 사람의 심리적인 거리감이 열 배 스무 배쯤 더 멀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 속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어른 앞에서 숨죽이는 작은 어린아이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외조부가 돌아가신 자리에서 거의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계셨다.
“대전역에 내려서 전화를 해라. 그러면 마중을 나가든가 자세한 길을 일러주든가 하마.”
외조부의 부음을 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하고 건조하여 그것에는 부음(訃音)이 가질 법한 끈끈한 슬픔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건조한 공기를 뚫고 살아나는 외조부에 대한 죄의식과 내 속에서 붕괴되는 어떤 유토피아의 흔적을 느끼고 있었다. 매정한 것, 어릴 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키웠는데 떠나고 나서 한 번 제대로 찾아오길 하나. 이따금 외가 쪽에서 들려오는 외조모의 한탄은 매번 가슴을 뻑뻑하게 죄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외가의 그 평화로움에 대한 기억으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한 번쯤 돌아간다 해도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그것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콧날부터 시큰해져온다는 사실을 외조모는 모르실 것이다.
외가는 내 기억 속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게 지냈던 시절의 무대였고 일곱 살 이후 언제나 내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상의 낙원이었으며 현실의 어려움이 급박할 때 자주 회억* 속으로 들어가 숨던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뒷산에 올라 입술이 퍼렇게 물들도록 진달래를 따 먹는 계집아이, 보리 짚단을 껴안고 거위들과 함께 헤엄치는 발가숭이 계집아이, 사과나무에 올라 낮잠을 자거나 시냇가의 모래바닥을 파헤치며 뜸부기를 잡는 계집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곳에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시며 안방에 정좌하고 한서(漢書)를 읽으시
는 외조부와 음식을 만들어 이웃으로 돌리곤 하는 외조모가 계셨다. 내가 그곳을 떠나 일상의 흙탕 속으로 허우적거릴 때도 외가는 평화로운 외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나는 언제나 불빛 밝은 창밖에서 이웃의 방 안을 넘보듯 외가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늘 넘치도록 행복해 보여 불행한 내 어머니조차 그곳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외가를 스스럼없이 드나들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외조부의 부음을 들었을 때 내 속에 있는 낙원의 한구석이 붕괴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곳의 기둥이었던 외조부에게 내 사랑과 그리움을 전달할 길이 없다는 절망에 가까운 안타까움, 그것은 마음 한구석을 틀어막아 마치 물기 없는 음식을 먹은 듯 금방이라도 체증을 일으키고야 말 것 같은 발작의 조짐을 몰고 왔다. 그 불안한 예감을 다스리고 뻑뻑한 회한의 감정을 삭이는 데는 서울에서 대전까지 두 시간의 거리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대전역 앞의 공중전화에 줄을 섰을 때도, 아무 울림도 전해주지 않는 낯선 전화번호를 무심히 두드릴 때도 내 마음을 온통 지배했던 것은 붕괴된 낙원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제 어떻게 해야 외조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단 한 번이라도 당신께 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응답은 또 다른 삭연함을 몰고왔다.
“네, 박 교수 댁입니다.”
목소리의 낯섦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한 것은 외가댁에 대한 호칭이었다. 비록 고향을 떠나 외숙의 직장이 있는 도시에 새롭게 정착했다고는 하나 외조부가 계시는 한 그곳은 내게 외가댁이었다. 나는 아마 많이 당황하고 더듬거렸던 것 같다. 전화기 저편의 상대는 영리하게도 누구를 바꿔드릴까요라고 물어왔다. 어머니의 이름을 대며 나는 비로소 내가 그들로부터 얼마나 먼 하류로 떠밀려 와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택시를 타고 문화동 64번 버스 종점으로 가자고 해라. 거기서 내리면 바로 상가 표시가 보인다. 조등(弔燈)도 밝혀져 있고 골목에는 차일*도 쳐져 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건조했다. 64번 버스 종점이라 이르며 택시기사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거리가 셋으로 나뉘는 한가운데였다. 삼거리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망연한 단절감에 빠져드는 눈에 문득 들어온 것은 조등이었다. 조등은 어둠 속에서 자잘하게 주름이 잡힌 등피의 세세한 질감까지를 낱낱이 드러내며 길가 담벼락에 걸려 있었다. 등피에 먹으로 씌어 있는, 마치 시신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와도 같은 조(弔) 자를 보는 순간 그동안 뻑뻑하고 건조하기만 했던 감정이 소나기를 맞은 듯 젖어 내리기 시작했다.
골목에 쳐져 있는 대형 차일을 두 개나 지나고 연탄을 탑처럼 쌓아올려 화톳불을 지펴놓은 대문간에 이르기까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아버지를 보고 말았다.
아버지는 현관을 막 나서고 있는 중이었다.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는 걸음을 간신히 옮기시는 아버지에게서 먼눈으로도 가장 먼저 본 것은 세월의 잔인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은 너무도 잔인하게 아버지의 살결에서 탄력을 앗아갔고 몸에서 진을 빼어 아버지의 몸을 노송처럼 수굿하게* 기울도록 해놓았다. 물론 세월과 가세하여 아버지를 흐트러뜨린 것이 알코올 기운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 해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충격일 뿐이었다. 나는 대문간에 얼어붙어 뒤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여전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현관을 나선 후 나를 발견하였다이 첫눈에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힘주어 이를 물었고 다음 순간 아버지 쪽에서 주르륵 눈물을 떨구었다. 술상을 들고 나오던 이모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때까지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마주 보며 석고처럼 서 있었을 것이다.
“명선이 어디서 뭐 하냐고 묻더니 이렇게 만났구나. 자, 어서 들어가자. 저녁은 먹었니? 우선 외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평소에 과묵한 이모가 짐짓 어수선하게 수다를 떨었지만 이모의 수다만큼이나 우리 부녀의 만남은 어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거의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밥상머리에 앉아 반찬그릇을 이리저리 옮겨주시거나 서투른 젓가락질로 밥그릇 위에 반찬을 얹어주시거나 했다. 그토록 간단히 화해의 태도를 보이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서러운 분노를 느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감정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던 이유를 그제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 속에서 그토록 크고 어려운 존재로 자리 잡고 있던 아버지가 실제로는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내게 충격이듯이 초라하게 변한 지아비의 모습은 어머니에게도 당혹스러울 것이었다.
장인의 관을 끌어안고 통한으로 오열하는 배덕(背德)한 사위, 불분명한 태도로 아내를 외면하는 못난 남편, 어느새 장성한 자식을 향해 미안함과 대견함을 숨기지 못하는 무책임한 아버지, 그것이 내 아버지의 실상이었다. 그 뒤로 당신의 얇은 월급봉투와 지친 일상, 이제는 쉬실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져야 할 부담감으로 어깨를 누르는 늦뿌린 자식들. 아버지의 실체가 고작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고통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안으로 감추고 수습하는 일은 당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보다 한층 힘에 겨웠다. 아버지는 그저 원망의 대상,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높은 산이거나 깊은 우물이었을 때가 더 좋았을 것이었다. 이제 자명하게 연민의 대상으로 바뀐 약한 늙은이, 분명하게 잘못 살아온 당신의 지난날이 그 빈약한 어깨와 지친 얼굴에 주름처럼 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환갑이었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자도 없는 환갑,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모두들 결혼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자식들에게 결혼을 강요할 입장도 되지 못하는 아버지. 나는 다시, 진정으보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이해하려 노력 한다는 증표로서 결혼의 가능성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에게 동행을 부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더니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어 눈을 감는다. 그의 동작이 너무나 조용하고 섬세해 보여 나는 문득 힘이 빠진다. 저것이야말로 그가 이 불편한 여행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일 것이다. 그는 바로 저 같은 완강한 무표정과 조심스러운 외면, 그리고 딱딱한 침묵으로 나에 대한 경원함*을 표현하곤 했다. 그의 무념, 무심, 무감한 태도는 그리하여 가장 그다운 사태 해결법이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자주 내게서 떠날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는지. 처음에 그가 나를 떠날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을 때 그 말은 유독 누선*을 자극하여 끊임없이 눈물을 불러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너무나 힘에 겨워 깨문 이빨 사이로 빠져나오던 신음은 어쩌면 통곡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떤 사람들은 만나는 순간부터 떠날 것을 준비하기도 하는구나, 그리하여 이른바 연애라는 행위는 헤어짐에 이르는 그토록 길고 감미로운 고통인 모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떠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고 그의 말에 따라 기쁨의 긴장과 서러움의 이완을 반복하던 나의 감정은 급기야 탄력을 잃은 소성*의 물질이 되어갔다. 바로 그 시기쯤에 이르러 그는 맞잡고 있던 끈을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그가 우리의 끈을 놓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그의 등 뒤에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목련은 북쪽을 향해서만 꽃망울을 터뜨리고 갈매기는 태양을 향해서만 앉으며 진달래는 음지에서만 자란다는 사소한 세상의 이치를 터득해가며 그대 곁에서 참따랗게* 늙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이다. 그리하여, 버섯이 아주 커다란 곰팡이에 불과하다면 인간 역시 많이 진화한 미생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삶의 황혼기에 이르러 그저 손을 잡고 집 주변의 황혼녘을 산책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마지막이다 운운. 그러나 나의 편지는 그의 등 뒤에서 낙엽처럼 흩날렸고 그는 그저 무심한 눈길로 집 앞을 스치는 바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람이 자고, 또다시 낙엽의 원인이 될 새싹이 틀 무렵, 그는 내게서 떠나겠다고 했다. 그가 나를 떠나겠다고 하였을 때 나는 그것을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그저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여러 패덕과 교만과 이기심들에 대한 죄과여서 앞으로 내가 꾸준히 복역해야 하는 내 몫의 형벌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변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내가 결코 괜찮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이 온통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아니리라. 마음이 변한 데에 왜 이유가 없겠는가. 살다 보면 섬세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이 정서 불안 신경증으로, 겸손함으로 보였던 미덕이 소심한 비굴함으로, 진중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우울한 어둠으로 보여, 문득 상대방의 웃음소리나 발소리조차 듣기 싫어지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선량함이나 순수함이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똑똑함과 영민함이 자칫 교활함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 막막한 관계의 끝에서는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단지 상대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이외에는.
그리고 나는 돌아서서 재빨리 체념하고 욕심을 버렸다.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던 행운을 탐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미련을 거두고 마음이 머물지 않도록 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아꼈던 동화책과 소꿉 들이 함부로 꾸린 가재도구와 함께 남의 집 창고에 쌓이고 철문이 닫힐 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볕 바른 양지쪽에 쪼그려 앉을 때, 안방에서 들려오는 주인집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쓸쓸한 하숙방에서 잠들 때, 가족 사진 한 장 없는 나를 지켜준 힘은 체념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은 내 몫이 아니다. 욕심내지 말 것. 욕심은 언제나 상실감을 배가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말랑말랑 뇌수에 새겨 넣은 내가 어쩌자고 사람에 대해, 사람과의 감정 에 대해 그토록 섣부른 욕심을 보였던 것일까.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으로 보아 그는 제법 잠 속으로 빠져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잠들면 약 한 시간 반쯤 후에 문막이나 평창쯤에서 깨어날 것이다. 미간을 좁히고 잠든 그의 얼굴을 무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 얼굴에서 우리네 일상에 대한 스산한 거부감, 삶 전반에 대한 가없는 허망함 등속을 읽은 듯하여 다시 쓸쓸한 기분을 맛보고 만다.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두 사람의 타인이 한 지붕 아래서 서로 참고 이해하며,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려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 우스꽝스러운 관습에 대해 나는 어떠한 기대도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늦잠에서 깨어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혼자 음악을 들으며 맞게 되는 아득함을 견디는 쪽이 한결 손쉽고 익숙했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토록 섣부르고 성급하게 그를 통한 미래를 보아버렸는지 모르겠다. 그의 따뜻함, 그의 선량함, 그의 도덕적 올곧음 같은 것에 몸을 맡기고 그와 함께 결혼이라는 그 허황한 허구성 속으로 곤두박질쳐도 두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바로 그 무렵, 그는 내 속맘을 읽기라도 한 듯 물었던 것이다. 결혼은…… 꼭 할 필요는 없는 거지?
그때야 나는 퍼뜩, 내가 인간으로부터 위안을 꿈꾸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잊었을까. 그가 나의 어깨로 팔을 둘렀을 때, 그리고 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때, 문득 나를 이루고 있던 감각과 정서, 그리고 내장까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듯하던 그날의 경험을. 대신 텅 빈 내부를 채우는 것은 몸서리치는 삭연함⁕과 안타까운 갈증, 그리고 허탈한 곤핍감*이었다. 그때 나는 조금쯤 절망했던 것 같다. 오래도록 내가 느껴온 적막감이나 고립감이 외부의 여건에 의해 조성된 게 아니라 그저 나의 내부 깊은 곳에 본디부터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시외버스를 30분쯤 달려 서울 근교의 이름도 모르는 마을에 내렸다. 그저 바람이나 쐬러 나선 길이었지만 매연과 흙먼지를 뿜어놓고 달아나는 버스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느낀 감정은 암담함이었다. 늘 그랬다.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면 온몸과 마음이 다급하게 허둥대지만 막상 어딘가에 도착하면 그다음에 맞는 감정은 해방감이나 일탈감이 아니라 뜻밖의 담담함, 그리고 암담함이었다. 그 역시 다소 황망해하는 눈빛이었지만 이내 공감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저기, 가볼까? 그의 손끝에는 흰색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교회가 곧 기울어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교회는 그만그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야트막한 언덕의 가장 중심,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인자한 눈길로 손자를 굽어보는 노인의 비스듬히 기운 몸을 닮은 듯했고, 또한 두 팔을 벌려 마을 전체를 감싸 안은 큰 독수리를 닮아 보였다. 그 큰 새의 품속에서 마을은 그들에게 허용된 평화와 자유 속에 안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교회로 가기 위해 여러 집의 담벼락을 기웃거렸고 여러 골목의 깊은 곳까지를 들여다보곤 했지만 그 야트막한 야산에 있는 마을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도 끝내 교회로 오를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다. 교회는 마을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마을 전체가 거대한 담벼락이 되어 교회를 감싸며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묘한 소외감과 허탈감을 몰고 왔다. 그러나 우리는 돌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낙담과 좌절을 숱하게 겪은 사람들처럼, 그까짓 일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심상함*을 가장하며 교회를 포기했다. 그리고 마을의 길이 이어지는 대로 따라가 도착한 곳이 마을과 잇대어 있는 야산이었다.
그 야산에 그와 나란히 앉아서 나는 내부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는 내 본성의 고립감을 보고 말았다. 그것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날의 절망감이 떠오르자 다시 미미한 멸미 기운이 밀려온다. 어렸을 때는 차를 타는 일에 공포를 느낄 만큼 심하게 멀미를 하였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집에 갈 때마다 오물을 차내에 쏟지 않기 위해 여행 하루 전부터 배 속을 비우곤 했다. 그때에 비하면 멀미는 거의 완치된 셈이다. 더불어 내 부모에 대해 느껴온 어려움도 많이 극복하였다고 볼 수 있을지.
멀미 기운을 잊기 위해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잠이 찾아와 주기를 희구한다. 한 시간 반쯤 후에, 고속버스가 강릉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어 있기를 기대한다. 내가 외면하듯 잠든 머리맡으로는 강원도의 비탈진 삶이, 사람이 지구의 인력을 버티며 앉아 있을 수 있는 경사의 높이까지 산기슭을 개간하여 이룬 밭들이 스쳐 지나갈 것이다. 기껏해야 옥수수나 감자 따위의 구황작물밖에 자라지 않는 그곳에서 이름 그대로 궁핍이나 가려줄 만큼의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저들의 비탈진 삶에 비할 때, 그래, 사랑이나 고립감 따위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아마 그에게 동행을 부탁한 일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회란 체념보다 결코 옳은 정서가 아니다.
잠깐 비몽사몽간을 떠다녔을까, 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이 전과 다르다는 느낌에 눈을 떴을 때 버스는 낯선 구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극히 짧은 순간 여기가 어딘가,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다 그만 그의 시선과 마주치고 만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깊고 따뜻해 아직 혼몽*의 상태임에도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다. 다시 눈을 감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미세한 떨림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서히 모든 상황이 질서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내 난감해진다. 그의 눈빛에서 흐릿한 감정의 여운을 읽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포기했다고 체념했다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그의 시선 앞에서 꼼짝없이 포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휴식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다시는 혼란에 빠져들고 싶지 않아. 원망도 서러움도 없이, 그저 살이 내리는 상실감과 혼곤한 미망*만이 계속되는 그 나락으로는 들어서고 싶지 않아. 그러나 버스에 오른 그의 손에 쥐어진 주스 깡통과 팝콘 봉지를 보며 다시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동통*을 느낀다. 주스를 마시며, 입 안에서 터지는 주스 알맹이만큼이나 무수히 되뇐다. 난 그저 흰죽처럼 살래요. 너무 달콤하고 고소한 것도 기대하지 않고 너무 맵고 짠 것도 두려워요. 그가 다시 안전띠를 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치 적 앞에서 두 손을 드는 기분으로 생각한다. 그래, 어쩌면 내게는 연애라는 이름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곡예, 캄캄한 심리의 복마전*을 치러낼 만한 적극적인 능력이나 정서가 결여되어 있었는지도 몰라.
대관령 정상에서 잠시 쉰 고속버스는 이제 굽이 잦은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정작 익숙한 솜씨로 길을 잡아 내려가는 버스와는 달리 이리저리 몸을 흔들리며 그 안에 앉아 있는 나는 왠지 엉금엉금 기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아흔아홉 굽이란다. 신사임당은 그 고개를 넘어 서울로 가면서 시조를 지었지.
산이 덮인 내 고향은 천리련마는 /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
파 / 경포대 위에는 외로이 뜬 달 / 한송정 가에는 한 줄기 바람 /
갈매기는 모래 위로 흩어졌다 모이고 /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련만 /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 가 /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머니가 열 살 전후의 내게 읊어주셨던 시조가 떠오르는 것은 참으로 질긴 기억의 끈이다. 한두 번 읽어주면 절대로 잊지 않는 내 기특함이 어머니를 더욱 부추겼는지 그것 말고도 어머니는 내게 많은 시조나 시를 읊어주시곤 했다. 어머니는 신사임당 같은 어머니가 되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율곡과 산은 자식은 되지 못했다. 물론 내게도 한때는 어머니가 일러주었던 시조들 속의 교훈처럼 까마귀 노는 곳을 삼가고 말하기 좋다 해도 남의 말을 말며 이고 진 저 늙은이의 짐을 벗어 대신 지며 그렇게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위인전 속의 최영처럼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고 정몽주처럼 일백 번 고쳐 죽어도 한 신념을 지키며 한석봉처럼 겸허하고 슬기롭게 제 일을 하리라 다짐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성장기의 어느 시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지키기 힘든 억압이거나 위선이었다.
훌륭한 어머니의 훌륭한 자식이기를 포기한 순간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그것은 아니었다. 내게 떠안겨진 것은 그저 한 아름의 상실감이었고 어머니 역시 나보다 열 배쯤 많은 상실감으로 훌륭한 자식, 평안한 가정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조용히 포기하신 채 이제는 뜨개질을 하실 뿐이었다. 그 남쪽 도시 대구에서.
대낮에 어머니의 집을 들어가는 일을 피하기 위해 터미널에서 시간을 계산해 차표를 끊고 대합실을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마지막에 성급하게 차에 올라타도, 여름 해는 그 도시의 입구에 닿을 때까지 화사한 잔광을 차창 가득 뿌려놓곤 했다.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낯선 도시를 떠돌다 어머니의 집 앞에 서도 발목에서 절그럭거리는 어색함, 망설임, 난감함은 조금도 엷어지지 않았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곳마다 무심하고도 두법게 앉아 있는 벌건 녹은 마치 어머니가 혼자 죽여오신 시간의 애정 이기라도 한 듯, 혹은 우리가 떨어져 살아온 동안 그렇게 부식된 혈육의 애정이기라도 한 듯 스산한 어려움을 매번 똑같은 질량으로 가슴에 얹곤 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얇은 발을 내린 방 안에서 두터운 털실을 이리저리 가늠해가며 그 계절에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뜨고 계셨다. 그 모습이 마치 털실 가닥을 잡고 거대한 미궁을 빠져나가기를 희망하는 희랍 신화의 테세우스* 같기도 하고 가시 풀을 뜯어 마술에 걸린 오빠들의 조끼를 짜는 동화 속의 공주 같기도 하여 나는 스스럼없이 어머니를 부르지 못했다. 어머니가 미궁에 빠져 있거나 마술에 걸려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그저 위무*의 차원에 지나지 않았다. 오롯이 앉아 뜨개질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것을 비치는 불빛만큼이나 선연하고 뚜렷한 현실이었다. 그 방문 앞에 그저 묵묵히 서서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일은 또 얼마나 깊은 절망감을 주었던지 .
“왔구나. 저 방으로 들어가자.”
왔구나라는 말에는 어머니의 오랜 기다림이 앙금처럼 고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그 심상한 말투와 차분한 태도는 반년, 혹은 1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을 일시에 지워내는 사소함을 잘 가장하고 있었다. 나는 목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느낌 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건넌방의 음산하고 쓸쓸한 공기를 밀어내며 조심스럽게 들어서면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이 발밑에 툭 떨어지곤 하였다.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말끔한 얼굴로 서 있으면 잠시 후 어머니는 뜨개질감을 가득 안고 들어오셨다
“앉거라.”
한여름임에도 어머니는 내게 아랫목을 가리키며 그 앞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어머니와는 비스듬하게, 어머니를 마주 보지는 않으면서도 노골적으로 외면하지는 않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저녁은 먹었니?”
“응, 휴게실 에서……”
속이 싸늘하게 쓰려오는 것은 공복 탓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뜨개질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신 채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날씨가 많이 무덥구나, 우선 좀 씻고 오련? 두서없는 말을 낡은 고무줄이 끊어지듯 툭툭 던졌다. 그러면 나도 건강은 어떠세요, 한여름에 웬 뜨개질이세요, 물은 잘 나와요 등의 말을 끊어지는 고무줄을 주워잇듯이 받을 뿐이었다.
말씀을 하시면서도 뜨개질 감에서 손을 놓지 않는 어머니를 보며 「레이스를 뜨는 여자」라는 영화가 생각나는 것은 별로 유쾌한 연상이 아니었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 촬영기법을 사용해 그토록 정적이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주던 영화. 나중에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빨래하는 여자, 물 긷는 여자, 혹은 레이스를 뜨는 여자. 그런 내레이션 밑으로 주인공 여자가 정신병동에서 무람없이* 레이스를 뜨는 마지막 장면에 카메라는 단 한 번 이동을 감행하여 그녀의 뒷모습에서 프로필*까지를,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으로 비추어주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취향대로 변화시키려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기심, 혹은 사랑과 소유의 미묘한 차이를 그린 영화였다.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사랑이란 결국 연민이나 소유욕이고 결과는 약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영화였다. 혹은 계급과 무관하게 사랑이라는 유희에서 가해자인 남자와 피해자인 여자의 이야기. 혹은 성별과 관계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양날의 칼에 대한 이야기.
“너는…… 요즈음도, 사귀는 사람이 없니?”
어머니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내셨고 그때마다 나는 등줄기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감각을 아주 구체적으로 감지하곤 했다. 내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해 네게 결혼을 강요할 입장은 못 된다만……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더 늦으면 골반이 굳어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데. 어머니가 어렵게, 처음으로 내게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가 서른을 막 넘겼을 때였다. 그때 어머니가 발음한 행복이라는 낱말이 그 후로도 오래도록 낮은 파동으로 애잔하게 가슴을 울리곤 했다. ……그래도 네가 착하게 자라줘서 고맙구나.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어머니는 내 중학교 때의 일기를, 제 살을 깎아내는 반항과 적의로 가득 찬 그 글들을 본 일이 있다. 또 고둥학교 때 썼던 어두운 유서라든가,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잊은 어떤 실연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계셨다. 그것이 모두 당신의 책임인 양 가슴 조이시는 모습은 보기에도 죄스러웠다. 때로는 가상의 인물이라도 만들어내어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기쁨에 들뜬 어머니가 섣부른 기대를 품는 모습을 보는 일은, 그 기대가 스러졌을 때 실망하실 모습을 보는 것보다 한결 힘들 것이었다.
“그냥 지내요.”
바람이, 후텁지근한 바람이 문에 걸쳐둔 발의 성긴 구멍들 사이로 척후병처럼 틈입해 들어왔다. 바람은, 아무런 의미도 의욕도 의심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를 무심히 스쳐 갔다. 어머니는 여전히 심상한 표정으로 뜨개질을 계속하셨다. 저 실날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형태는 어떤 것일까. 우리가 시간과 행동 들을 엮어 이루려는 삶의 궁극적인 양상은 어떤 것일까.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정작 그것에 대한 대안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반항의 사춘기가 아득히 꿈결처럼 떠올라 왔다.
어머니는 뜨개질하던 손길을 멈추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눈초리*를 누르셨다. 아주 사소한 동작으로, 심상하게. 나는 무심히, 그리고 아주 느린 동작으로 시선을 방문 밖으로 던졌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 무화과며 라일락 같은 덩치 큰 나무가 심어져 있어 마당은 한층 좁고 답답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유독 둥치* 가 굵고 키가 우뚝한 나무는 무화과였다. 무화과를 보며, 꽃 없이도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는 게 공연히 억울하고 고약스러워 어머니께 재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라일락 가지에서 초록색 싹들을 떼어내며 말씀하셨다. 라일락은, 가지의 불거진 곳만 있으면 싹을 틔운단다. 이상한 나무지. 그러나 나는, 가지의 불거진 곳이 있어도 한사코 싹을 틔우기를 두려워하는 나는 또 얼마나 어머니와 유사해져 있는지.
고속버스는 어느새 평지로 내려서 있다. 이제 곧 강릉 시내로 진입하는 간선도로가 나타날 것이다. 고속버스에 앉아 바라보면 모든 집들이, 아니 도시 전체가 시선보다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그곳에서 내가 살았던 집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대문을 여는 듯한 환각을 느낀다. 내가 옮겨 다녔던 하숙집들. 그중에는 하숙을 치며 홀로 사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당신 스스로의 설움에 겨워 곧잘 술을 드시고는 어김없이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누워 앓으셨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교복을 벗을 틈도 없이 곧장 약방으로 달려가 뇌신*이며 명랑* 따위를 사다 나르곤 했다. 지금도 하숙을 치고 계실까 생각해보니 15년도 더 저쪽의 일이다. 눈 아래로 지나가는 집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집을 모으면 한 마을을 이룰 것이라는. 그러자 진저리 같은 것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고속버스가 강릉터미널에 도착하여, 여전히 무심한 표정 인 그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도 이 도시의 집들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진저리에 가까운 감정은 가스스한 소름의 형태로 살갗에 남아 있다.
어느새 매표창구 앞에서 서울행 티켓을 예매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해 보여 나는 천천히 되돌아선다. 좁고 어수선한 대합실에는 행락객 차림의 젊은이들이 유독 눈에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의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원색들이 눈길을 끄는 탓일 터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프로야구 중계 사이 짧은 광고가 나오고 있다. 남자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난 아직도 널 생각해. 여자의 목소리가 쓸쓸하고 확신이 없다. 저도 가끔은. 그럼에도 남자는 큰 가능성을 탐지한 것처럼 덤빌 듯 말한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여자는 갑자기 뒤로 물러나며 차갑고 확신에 찬 말투로 받는다. 우린 이미 끝났잖아요. 그리고 음악이 바뀌면서 추억을 마신다 운운하는 음료 선전이 뒤따른다.
나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뒤돌아선다. 그는 예매한 티켓을 손에 쥔 채 두리번거리고 있다. 나를 찾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 섣부른 가능성이나 기대를 갖게 되기 전에 나는 얼른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내게 한 장의 티켓을 건넨다.
“난 저녁 7시 차표 끊었어. 넌 내일 낮 12시고.”
티켓을 받아 쥐며 나는 썰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쓸쓸하게 물러나는 마음을 감지한다.
터미널 광장에는 택시 몇 대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 광경이 터무니없는 평화로움으로까지 여겨져 문득 서럽다. 얼마나 각박하고 다급하게 살아왔는지. 택시를 잡는 일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힘에 겹고 버거웠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까지도.
“경포대로 가주세요.”
그는 나를 한 번 돌아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다. 그에게 섣불리 동행을 부탁한 일이 이제는 아주 구체적인 형태의 후회로 떠오른다. 어느 아파트 몇 동이라는 주소만 들고 낯선 아파트 단지를 기웃거리는 어설픈 모습을 그에게 보일 자신이 없다. 단지 아버지를 위로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아버지에게 인사시킬 자신은 더더욱 없다.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거짓이고 기만일 것이다. 나는 아마 그를 서울로 올려 보내고 저녁 늦은 시간에 혼자 아버지의 집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손에는 흔들거리는 정종 병을 들고 골목의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회한과 망설임의 그림자를 길게 끌면서.
경포대로 이르는 길은 너무나 많이 변해 첫눈에는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예전에는 그저 논밭 사이 낡은 한옥들이 드문드문 서 있던 그 흙길이 이제는 넓고 반듯하게 포장되어 길가에는 연립주택과 아파트 들이 제법 세련된 모습으로 도열해 있다. 바다 가까이 갈수록 대형 위락시설과 캠프들도 눈에 띈다. 내가 아끼는 도시가 저렇게 변하는 사실에 대해 느껴온 부당함이나 모멸감 따위도 이제는 거의 무의미해진 듯싶다. 나이를 먹으면 남는 감정 이란 그저 쓸쓸함 뿐인 모양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벌써 찝찔한 바다 내음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바다보다 먼저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호수는, 그저 눈에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라 강한 빛의 형태로 시선을 제압하며 시신경 깊은 곳까지 틈입해 들어온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하오가 되어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즈음이면 호수는 어김없이 거대한 반사판이 되어 햇살을 쏘아 올리곤 한다. 반사적으로 실눈을 뜨고 호수를 둘러보는 그에게 나는 문득 이 호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이 호수의 비밀들에 대해 떠들썩하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원래는 바다였는데 퇴적암이 쌓여서 호수가 되었대요. 여름과 가을에는 부들이나 연꽃이 호수를 3분의 1쯤 덮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죠. 그리고 겨울에는 청등오리 같은 겨울 철새들이 몰려와 그 비단 날개로 호수에 수를 놓아요. 호수가 얼면 우리는 철새들 곁에서 얼음판에 낯빛이 까맣게 그을도록 스케이트를 타곤 했어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들뜨고 마는 마음과는 달리 한마디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한다.
시종 덤덤한 눈길로 호수를 바라보는 그를 돌아보다가 문득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가슴 아프게 떠올린다. 나는 철저하게 절망해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고 완벽한 희망을 품어보지도 못했어. 이대로 흘러도 언젠가는 바다에 닿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도 없지. 바다를 눈앞에 둔 채 육지 한가운데 갇혀버린 물들을 보며 그는 그때 자신이 한 말을 되새기고 있을까. 나는 문득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외할아버지 세대처럼 완강한 가족윤리나 가부장적 명분 같은 것에 기대어 살 수도 없고, 아버지 세대처럼 격변기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이상이나 신념 따위에 의지할 수도 없는 그의 현재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외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집에서는 이미 나와 버렸지만 아직 제집이라 이를 만한 터전은 소유하지 못한 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또 하나의 민달팽이였다. 우리는 그저, 집 없는 세대의 겁 없는 맹목성으로 쉽게 타올랐고 또 그런 특유의 부박함*으로 타인의 존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위안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바다를 향해 길을 잡는다. 한 걸음쯤 앞서서 걷고 있는 그를 천천히 뒤따라 걷는 시선 속으로 그의 구두가 들어온다. 검은색 구두는 뒤축이 많이 닳아 있다. 실제로 그의 구두 굽이 마모된 것인지 그에게서 느끼는 거리감이 그의 구두에서 낯선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그 구두가 멈칫거리며 멈춘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본다.
바다.
가득 들어오는 푸르고 황량한 바다는 얼핏 폭력과도 같아 큰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 가슴이 뻐근해진다. 바다는 왼쪽 숲에서 시작되어 멀리까지 크고 둥글게 원을 그리다가 오른쪽 바위틈에서 끝난다. 저렇게 크고 둥근 수평선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도 보고 있을까. 바다 색깔이 등고선처럼 나뉘어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옥색, 연두색, 초록색, 감색…… 으로 한결 짙어진다는 사실을. 해수욕 철이 아닌데도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이 연인들 이어서 문득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연인처럼 보일까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져본다.
서로의 옷 속에 모래를 집어넣는 장난을 하고 있는 젊은 연인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확연히 조바심 어린 동작으로 짓궂은 장난을 건다. 여자는 기쁨의 기색을 숨기며 남자의 장난에 앙칼지게 대응한다. 모래가 허공으로 흩뿌려지고 연인들은 모래 위로 나뒹군다. 우리도 한때는 저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서로를 확인하곤 했었다. 그건 마치 종이 위에 쇳가루를 뿌려놓고 그 종이 밑에서 자석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장을 따라 끌려 다니는 쇳가루의 유희를 보는 것과 흡사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자력에 이끌려 속수무책으로 배회하는 쇳가루의 유희는 얼마나 황홀한 기쁨이었는지. 문득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허탈감이 밀려온다.
“잠깐 앉았다 가요.”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던 그도 곁에 주저앉는다. 모래 위에는 부서진 조개껍질과 해초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어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서투른 추상화 같기도 하다. 나는 이 바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리에 감겨오는 해파리를 두 손으로 떠서 모래밭에 내다 놓고 부드러운 꽃잎 같은 그놈이 햇볕을 받아 형체를 잃어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오롯이 떠 있는 두 개의 바위.
“저 앞에 있는 것은 오리바위, 뒤의 것은 십리바위라 불러요. 어렸을 때 나는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듀브드 없이, 바다에 띄워둔 로프만을 잡고 오리바위까지 건너다니곤 했어요.”
한번 말문을 트자 봇물처럼 쏟아지며 더불어 가속도까지 붙는다. 그는 내 말투에 불안의 기미를 느꼈는지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타인처럼 아득히 먼빛을 띠고 있을 그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나는 그저 바다만 바라본다.
“그전 이 바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거예요. 바다는 날 해치지 않는다. 바다는 오히려 나를 감싸고 보호해줄 것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신뢰를 다 했다니까요. 짝사랑이었죠.”
어찌 바다나 해파리뿐이었으랴. 나는 이 도시의 많은 것들을 사랑하였다. 봄이면 처음으로 피는 제비꽃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것에 대한 사랑으로 입을 맞추거나 토끼풀 꽃을 뜯어 주렁주렁 목걸이를 땋아 내리던 일이며 시든 감자줄기를 걷어내고 땅속을 뒤져 여린 살결의 감자알을 파내던 일까지 그것은 모두 사랑이었다. 그러나 왜 몰랐을까.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행위들이 실은 상대에 대한 일종의 가해행위였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속절없는 죄의식과 자괴심으로 가슴께에 뻐근한 동통이 몰려온다.
바다는 어쩌자고 저토록 뒤척이는가. 바다는 무슨 할 말이 많아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무겁게 가슴에 쌓여서 저토록 안간힘을 쓰며 뒤척이는가. 예상치도 못했던 파도가 밀려와 온몸을 축축이 적실 때의 그 난감한 행복도 두려웠지만, 파도가 밀려가는 순간의, 온몸의 물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갈증은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온몸의 세포가 모래알처럼 낱낱이 해체되어 뒹굴며 아우성친다 해도 파도는 끝내 떠나버리고 만다는 그 상실감, 속절없음, 무력감 따위가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가 몸속으로 옮겨온 듯 속이 울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욕지기*가 솟구친다. 입을 막으며 돌아앉는 순간 진땀이 흐르며 기어이 속엣 것이 밀려 올라오기 시작한다. 멀미를 할 때마다 맞게 되는, 의식이 먼 과거로 뒷걸음질치는 아득함에 휩싸인다. 아, 아버지.
그는 당황한 듯 등을 두드려준다. 어른어른 물기가 번지는 눈에 휴게실에서 먹은 음식물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들어온다. 용서해주세요. 나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려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무턱대고 용서를 빈다. 내 고집을, 내 빈약한 사랑을. 그는 여전히 황망한 동작으로 휴지를 찾아서 건네준다. 휴지보다 더 창백한, 그리고 아무런 확신도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할 뻔 한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문학사상』 215호(1990. 9); 『단종은 키가 작다』 (아침바다 2003)
1 96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 983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시가,
1985년 『문학사상쇈 신인상에 중편소설 「죽음 잔치」 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세상과 타자에 대한 포용적인 자세로
남성과 불화 관계를 보이는 여성의 소외심리,
사랑과 성, 환상과 현실 등을 강럴히 묘사했다.
소설집 『단종은 키가 작다』 『담배 피우는 여ㅈι,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롬을 부르며 운다』 『세월』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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