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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동 지역방어에 나서
증 언 자 : 김신덕(남)
생년월일 : 1948. 11. 15(당시 나이 32세)
직 업 : 세일즈(현재 로케트정밀 근무)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5월 18일 오후 2시 광주공원에서 공수들의 만행을 보고 분노하여 차량시위에 참여, 화정동에서 공수부대들과 대치하여 협상을 하기도 한다.(증언자의 기억이 불확실하므로 날짜별 활동을 정확히 조사하지 못했고 의문이 가는 부분도 있다)
역사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4살 때 6·25로 인하여 아버님을 여의고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렵게 되자 작은아버님 집에서 자라났다. 국가유공자라는 혜택 때문에 겨우 겨우 먹고사는 형편이었다. 교회의 유치부에서 유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 장성에서 광주로 나와 누님과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광주에서의 자취생활은 꿈 같은 생활이었다. 연탄보급이 되지 않아서 나무를 피우며 살았다. 무등산 고개를 넘어 나무 한다발을 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출발하여야 했다. 돈으로 나무 한다발을 사려면 그 돈으로 연필, 노트 등 학용품 몇 개를 살 수 있었으므로 도저히 나무를 사서 땔 수가 없었다. 나무를 많이 하면 할수록 좋았으므로 한꺼번에 무리하게 짊어지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나무를 그냥 놓고 오자니 아깝고 가져가자니 너무나 무거워 망설일 때도 종종 있었다.
누나는 광주에서 미용학원을 다녔고 내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나무를 해 온 날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가난의 설움에 지쳐서 누나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도 하였다. 어려운 생활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광천동에서 어망 만드는 공장을 다니게 되었다.
이 무렵 유신체제가 연장되면서 3선개헌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3선개헌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한국 사람은 한국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만족하였고, 정부에서 말하는 3선개헌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대학생들로부터 정치적인 전후 실정을 이야기 듣고 3선개헌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역사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3선개헌의 심각성을 깨달으면서 작은 활동들을 하기로 했다. 고향인 장성에까지 내려가서 3선개헌의 부당성을 장성 주민들에게 설명해 주면서 극구 반대를 해야한다고 피력하곤 했다.
그 후 1975년 동아사태가 일어났다. 정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의 발간이 어려워지자 성원과 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1980년 이후 국회의원 선거 때와 대통령 선거 때에도 야당의 선거활동을 돕기도 했었다. 여러 차례의 경험과 정치적 각성을 하면서 공장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역사소설이나 의식있는 책들을 즐겨 보게 되었다.
광주 광천동에 있던 어망 만드는 공장을 그만두고 1977년에 장성군 평동면에 있는 단위농협에 취직이 되었다. 공장에 다니던 때에도 회사내에서는 노사관계가 아주 복잡했다. 모든 사원들은 무슨 말을 하고도 그 말이 높은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사장의 말은 지상 최대의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생활에 그만두고 광산군 단위농협으로 옮기게 되었다. 국가유공자라는 이유로 보훈청의 도움을 받아 보험업무의 공제일을 맡게 되었다. 광산군 단위농협에서 일하기 전부터 나는 농민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 속에 뛰어들어 농민운동을 하고자 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게 되었다. 보험계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광산 농민들이 보험에 가입해 주어야 나의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농자금을 대출해 준다는 식으로 농민들에게 빚을 내게 하여 매달 공제를 넣게 하는 것들을 반복했다. 대출이라는 것은 실제로 농민들을 생각해 주는 척하면서 농민들을 간접적으로 착취하는 행위였다. 또한 주민들은 대출을 받기 위해서 나에게 갖은 대접을 다 해주곤 했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진정한 농민운동의 길과는 다르게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생활이 되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의 이런 모든 일들에 부당함을 느끼고 '더 이상 이곳에 몸을 두고 있으면 뭣 하겠는가?'가 싶어 '차라리 도시에 들어가 다시 노동자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살아가는게 더 낫겠다'고 마음먹고 단위농협에 사표를 제출했다.
밖에 나가지 마세요
그 무렵 세일에 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정통적 세일과 마케팅 업무를 배우고 싶어서 대한전선에 들어갔다. 1980년 전국의 세일즈맨들이 모여서 세미나와 세일즈맨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나 역시 그곳에 참여하여 교육을 받았다. 교육평가에서 내가 1등을 받기도 했다.
1980년 4월 18일 광주 북동침례교회에 정식 입교를 했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받았던 영향이 크게 작용을 했고, 이때부터 나의 신앙생활은 더욱 깊어만 갔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면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교회는 매주 빠짐없이 다녔다. 교회에 정식으로 입교한 지 한 달 후 1980년 5월 18일 오후 2시 광주공원에서 광주침례교회 '한미전도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집사람과 함께 교회를 갔다. 12시쯤에 예배가 끝나고 '한미전도대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광주공원까지 걸어갔다.
1시가 넘자 광주공원 앞에는 신자들을 비롯하여 놀러 나온 사람들과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한미전도대회'가 막 열리려는 찰라였다. 광주공원 건너편 광주대교를 지나오는 공수들이 보였다. 공수들은 대교의 양쪽을 가득 메운 채 줄을 지어 걸어왔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일부는 도망가기에 바빴다.
도대체 공수들이 왜 오는 것인가 이상해서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다. 공수들은 다리를 다 건너오더니 진압봉을 휘두르면서 구름떼같이 모여 있는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공수들의 얼굴은 빨갛고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은 곤봉과 군화발로 시민들을 짓밟았고 잡히는 대로 대기되어 있던 군용차에 실었다. 공수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시민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멍하니 바라보거나 이곳저곳으로 도망가느라 그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디기 어려워 흉기라도 들고 공수들에게 저항하고 싶었다. 본래 나는 평소에도 불 같은 성질에 한번 울컥 치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공수들이 저렇듯 선량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가슴아프게 느껴졌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흉기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무기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광주공원 앞 동백간이음식점 돼지머리 고기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마침 식당의 아주머니가 큰 식칼을 들고 고기를 썰고 있어서 빼앗으려고 달려 들었다. 식당의 아주머니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고 동시에 난 칼을 뺏어들었다. 그 순간 집사람이 칼을 든 나를 보고 기겁을 하면서 나의 팔을 움켜잡고 애원했다. 집사람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칼이 땅에 떨어지고, 나는 택시에 태워져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공수들에게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제대로 저항 한번 못 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그 이후 광주에는 유언비어처럼 엄청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저 죽일 놈들이 6·25 때보다도 더한다."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광주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집사람은 "시국이 어수선하고 어머님도 집에 계시니까 밖에 나가지 마세요"하며 당부하였고, 어머님 역시 "세상이 너무나 시끄럽고 무서우니 제발 외출은 하지 말아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화정동 치안을 담당하다
어머님과 집사람의 말처럼 잠자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8시경에 화정동 육교 있는 곳으로 걸어나왔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모여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고 시내에서 생긴 일들을 이야기 듣고 치를 떨며 분노했다. 이 광경을 보고 한동안 시내 쪽을 바라보다가 쌍촌동 집으로 돌아왔다.
5월 00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찍 화정동으로 나왔다. 화정동 육교 부근에는 주민들이 모여 있었고 시민군을 결성하자고 했다. 가급적이면 직장이고 뭣이고 전부 다 뒤로 하고 우리 시민들은 우리대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힘을 모의자는 결의를 했다. 화정동의 일부 사람들은 광천동 죽봉 동상에서부터 상무대 앞까지를 담당구역으로 나누고 이곳을 왔다갔다 왕래하면서 치안질서를 잡기로 했다. 시민군 편에 서 보았을 때 불순분자를 색출해 내고(공수부대원이나 정보원) 광천동, 화정동, 쌍촌동 일대를 관할하기로 했다.
나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는 않고 상황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밤에도 광주시민들과 단합하여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모여서 힘을 합쳐 공수들을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매일같이 날이 밝으면 집에서 화정동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면 시민들은 어김없이 화정동 육교 아래 모여 있었다.
도청 앞을 지나갈때 도청과 상무관 안 주변에 관이 쌓여 있고 시체들이 보였다. 그 주위를 시민들이 에워싸고 있고, 가족들이 통곡을 하며 엎드려 있는 모습들도 보았다. 다른 시민군 차들이 '투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몽둥이로 차체를 두드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남도예술회관 앞에서는 기마대원으로 보이는 경찰들이 각각 5, 7마리의 말(?)을 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차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시내 곳곳을 타고 다니면서 구호도 외치고 노래를 부르곤 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한 손에는 각목을 들고 머리에는 하얀 띠를 두르고 차를 타고 다녔다. 서부경찰서를 지나 왼편에는 청기와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기름 공급을 많이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 부근에서 화염병을 제공해 주어서 나는 그 화염병을 화정동으로 옮기곤 했다. 그러면 학생들이 와서 가져가기도 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지나가는 차를 타고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다. 월산동 오거리 부근에서는 월산동 아주머니들이 밥을 해주었다. 큰길에 큰솥을 내놓고 밥을 하여 지나가는 시민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톤 반 트럭에 운전석에는 3명이 타고 뒤에는 10명 정도가 탔다. 시민들이 준 밥과 빵, 음료수 등을 차에 실어 화정동으로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 시민군들은 교련복에 평상복을 입고 젊은 층은 하얀 띠를 이마에 두르고 다녔다. 화정동 육교 밑에 서성거리고 있을 무렵, 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 몇명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화정동 지역의 질서를 담당해 주십시오."
"당신은 누구요?"
"서울에서 온 학생대표입니다."
그들은 화정동의 질서를 담당해줄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하고 돌아갔다. 학생들의 부탁을 듣고 이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고 화정동에만 있기로 다짐하고 정착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하여 화정동 지역 시민군들과 자칭 화정동지부를 설치하고 나는 총지휘자가 되었다. 가끔씩 화정동에 본거지를 두면서 정보를 알기 위해 광주 전역을 순시하기도 했다. 정확한 날은 기억하지 못하나 순시대가 기동타격대로 바뀌게 되었다.
육군소령과 평화협상을 하다
5월 00일 나는 오전부터 화정동 일대에 나와서 매일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순시하며 돌아다녔다. 화정동에서 거의 활동했지만 대체로 조직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이날도 낮에는 시민, 학생 2천여 명이 모여 있기도 했다.
오후 무렵 공수부대 4백여 명이 운천보트장 옆에서 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면서 보란 듯이 왔다 갔다 했다. 낮부터 시민들과 공수들간에 서로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화정동 육교 부근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무기를 총관할하고 있었는데, 시민군이 가지고 있는 총은 M1 소총, 수류탄과 카빈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실탄은 상당 분량이 있었다. 나는 M1 소총과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밤이 되자 겁도 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치열한 결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전이 벌어진다고 가정하면 우리측의 피해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무리한 싸움을 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리고 운천보트장과의 거리를 1백 미터 정도로 좁히면서 공수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적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협상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지고 있던 M1 소총과 수류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두 손을 들고 걸어나가자 40대 전후의 육군소령이 권총을 차고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평화협상을 하기 위하여 여기 왔습니다."
그러자 내 몸 전체를 훑어보더니,
"손을 내리시오."
내가 조건을 말했다.
"시민들이 광천동 죽봉 동상이 있는 곳까지 물러나 준다면 평화적 협상을 하겠습니다."
육군 소령이 내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들은 모두 상무대 안으로 들아가십시오."
"나는 전남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군에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최악의 경우 영산강 사업소(안전기획부)까지 사수를 하되 그 선이 무너지면 발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지체를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요구했다.
"시민군들이 납득이 가도록 말로만의 평화협상이 아닌 평화협상의 증표를 보여 주시오."
"그러면 좋소. 제일 좋은 증표로 영산강 사업소의 길 한가운데를 포크레인차로 파서 서로가 넘어오지 않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여 시민군은 공수부대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도록 멀리 후퇴하고, 공수부대원은 시민군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잠시 후 상무대 안에 있던 공병들이 나와서 영산강 사업소 길을 중장비로 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민군과 시민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공수부대와의 결전은 없었다. 공수부대는 상무대로 들어갔다. 나는 대강 수습이 되자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잤다.
5월 30일경 오전 11시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떨며 말리고 있었다. 그때 젊은 사람들 3명이 집으로 들어와 내게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안전기획부 요원입니다."
그들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내 오른쪽 손을 허리 뒤로 꺽고 왼쪽 손을 어깨 뒤로 꺾더니 수갑을 채우는 것이었다. 내 양쪽을 나머지 두 사람이 움켜잡고 서 있었다. 나는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내게 수갑을 채웠던 사람이 집안을 온통 수색하기 시작했다. 벽장 안에 M1 소총과 실탄 50여 발을 숨겨두었는데, 형사가 찾아서 들고 방에서 나왔다. M1 소총과 실탄을 전날 밤에 소지하고 있다가 집에 들어와 벽장 안에 두고 잠을 잤었다. 나는 이렇게 불쑥 찾아와 가택수색까지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총도 가볍게 벽장에 두었던 것이다.
입과 코로 부어대는 물고문
안전기획부로 끌려가자마자 단 한마디 이유도 묻지 않고, "혁띠를 풀어라." "신발을 벗어." "상의도 벗어." 하더니 신발과 옷을 벗고 서려는 순간 몽둥이를 무차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으로 끌려오자 겁에 질려 있기도 했고 그 무서운 눈초리들이 나만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고 끔찍한 일이었다. 웃옷까지 벗기고 한 사람이 두들겨 패다가 지치면 다른 사람과 교체하여 계속 때렸다. 하루 온종일 몽둥이로 두들겨맞았다. 비참한 모습으로,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이 되자 상무대 헌병대로 나를 끌고 갔다. 헌병대에 들어가자 의자 하나 가 보이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안전기획부에서 두들겨 맞았던 때와는 아주 다르게 점잖게 물었다. 마음 속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무의자에 손을 뒤로 하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머리채를 잡고 세차게 뒤로 제쳤다. 머리가 뒤로 제쳐지기가 무섭게 물이 가득 채워진 노란 주전자를 집어들고 나의 입에 부었다.
처음에는 머리를 뒤로 제치자 약간 고통스럽게 느껴졌지만 입으로 물이 들어오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물을 입에만 부었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한참 동안을 입에다 물을 붓다가 멈추고 다시 코에다 부으면서 입과 코에 번갈아 물을 퍼부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미색 잠바를 입고 있던 허장환 상사가 웃옷의 잠바에서 권총을 꺼내어 나의 가슴에 들이댔다.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물었다.
"김일성에게 받은 난수표를 내놓아라."
지령문을 내으라는 소리였다.
"간첩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는 그런 것이 없소."
라고 외쳤다. 그러나 매일 물주전자를 입과 코에 부어댔고 난수표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다가도 헌병들은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는 너무나 못 견뎌 마치 죽을 것 같으면 통합병원으로 후송했다.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있는 나를 보고 군의관이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주사 바늘로 검은 피를 뽑아야겠습니다."
몸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으면 다시 상무대로 데리고 가서 똑같은 고문과 질문을 던졌고 상태가 위험하면 다시 통합병원으로 옮기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들은 나를 두들겨패는 것도, 고문하는 것도 지치면 감방에 넣었다가 다시 감방에서 꺼내어 고문을 하고 몽둥이로 두들겨팼다. 주전자로 물을 부어대는 것도 지쳤는지 이제는 컵에 물을 담아 퍼붓기 시작했고, 그것마저 지치고 재미가 없었던지 두 되짜리 주전자를 가져와 억지로 한꺼번에 물을 모두 마시게 강요했다.
나는 두들겨맞는 도중에 고막이 터졌고 이빨이 3개 빠졌다. 또 손, 다리, 머리 등에는 깊은 상처가 났고 좀체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들의 구타와 고문에 의하여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결국 한번도 보지도 못한 김일성에게 지령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김일성이에게 명령을 받았다고 할테니까 종이에 써주시오. 그러면 내가 지장을 찍고 시인하겠소."
그렇게 하여 무어라고 썼는지도 모르는 자술서를 쓰는 격이 되어버렸다. 자술서를 자기들 마음대로 써와서는 정신도 못 차리는 나에게 읽어주었지만 난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야말로 나의 자술서는 그들의 강요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나는 시위대상들 중 특A급으로 분류되었고 사형대상자 속에 끼었다는 것을 비밀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사진도 요란스럽게 이곳 저곳에서 찍었다.
얼마 후 통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의 집사람 오빠의 도움으로 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나왔다. 나중에 확인한 것으로 보면 집행유예 10년으로 되어 있었다.
9월쯤 되었을까.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던 부상자들끼리 노래자랑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서 통닭, 과자, 과일 등이 많이 있어서 그것을 상품으로 했다. 심사위원장은 정광기 씨였고, 3등은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었는데 당시에 연락병으로 활동했다고 했다. 2등은 하성관의 팽이를 부른 젊은 대학생이 되었고, 1등은 비내리는 고모령을 부른 김신덕, 즉 내가 되었다. 덕분에 상품을 푸짐하게 받아 여러 환자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위로해 주고 위로받으며 치료했다.
5·18의 정신적 유산을 다음 세대에 올바르게 계승시키자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1987년까지 정부기관의 미행을 당하며 생활했다. 서울, 광주, 서부경찰서, 광주경찰서, 본촌동 동사무소 직원, 본촌동 파출소, 통장에 이르기까지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호남신학대학을 다니던 중에도 감시는 계속되었다. 호남신학대학에서 5·18 추모예배를 보던 때가 있었다. 이때 내가 사회를 보았는데 형사들은 그곳까지 쫓아와 맨 뒤쪽에서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렇다고 그들을 무서워할 것은 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말해버리기도 했다. 안전기획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민정당 끄나풀을 하라고 협박하면서 집도 주고 돈도 주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주겠다고 물질적인 회유를 해오곤 했다. 나는 3선개헌 때부터 독재에 항거하고 군화발에 짓밟히며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소신껏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고 사글세 35만 원 집에서 살지만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증언을 했다. 앞으로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5·18 당시의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도 끔찍스러워 집사람과 사랑스런 딸들에게는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사진 한번씩을 보면 며칠씩이나 몸서리치며 분노한다.
현재는 로켓정밀의 총무부에서 일하고 있다. 숙직을 하던 어느 날에는 정부에서 5·18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을 듣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혈서를 쓴 적도 있다.
5·18의 정신적 유산을 우리 세대에서 그치지 말고 다음 세대로 면면히 이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5·18 정신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모든 재야세력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특히 광주에 있는 5·18 부상자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값진 5·18 정신을 건강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리 가족 들에게도 자주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만을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는 기층민의 생존권이 확보되어야 하고 조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조국의 민주화 없이 기층민의 생존권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둘째로 평화적으로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 통일만큼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셋째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나의 조국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조국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시각을 세계로 돌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우리의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덕분에 경험하지 못했던 민주화운동의 많은 것을 알아가고 잇습니다.
힘차고 행복한 화요일 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