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전윤정(한가운데 앉은 이)과 슈퍼스타 (사진: 이미선 제공) |
#01 교실은 내무반을 닮았고, 운동장은 연병장 같다. 학교와 군대는 분명 다른 기관이지만 건물과 공간의 짜임새가 비슷하다. 교도소 구조 또한 학교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학교가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75년생 김 목사’는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연병장 같은 운동장에서 총검술을 익혔고, 학우들의 ‘소대장’이 되어 베고 찌르라며 구령을 외쳤다. 병영 담장을 넘어서는 안 될 얼차려 문화가 중학교과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넘어와 피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땅바닥에 꽂기도 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는 식전 행사로 연단에 있는 교장 선생님을 향하여 사열을 하기도 했는데, 열세 살짜리 세 개 반을 합친 ‘중대장’이 되어 변성기의 생목으로 ‘교장선생님을 향하여 우로~~ 봐!’ 하는 따위의 제식 훈련을 지휘했었다. 당시 대통령이 전두환이었다. 아동·청소년기에 중대장과 소대장을 역임한 김 목사는 구청 교통지도과에서 불법주정차를 단속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을 필한 예비역 이등병이다.
이제 학교에서 군사 훈련은 사라졌고,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사열 따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의 구조는 병영 시설과 지금도 닮았지만, 군대도 학교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나 보다. 변화 중이지만,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학교에 스민 군대 문화는 완전하고 충분하게 제거되진 않았다.
윤정 씨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도 군대식 문화는 다소 남아있었다. 윤정 씨는 82년생이다. ‘82년생 전윤정’이 초등학교 4학년 체육대회 때 일이다. 학생 전체가 줄지어 나와 있는 운동장은 복잡했고, 운동장엔 담임선생님만 나와 계신 게 아니어서, 어떤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운동장에 이는 먼지로 전두엽 속까지 뿌옇게 흐려진 것만 같은데 어디선가 쩌렁하게 울리는 구령 소리가 몸에 닿았다. 구령 소리는 학생들에게 ‘전체 앉아’ 하며 명령했고, 학생들이 앉으면 다시 ‘전체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서 있지만 다리가 아프지 않았던 윤정 씨는 앉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고 앉아서 더 쉬고 싶은데 굳이 일어서야 할 까닭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앉을 때 그대로 서 있었고 다른 사람이 설 때 그냥 앉아 있었다. ‘82년생 윤정 씨’는 구령을 따라 앉고 서는 게 아니라, 쉬고 싶을 때 앉았고, 앉아서 충분히 쉬고 난 후에 일어섰다. 학교가 왜 군대 같은지, 운동장이 왜 연병장 같은지, 지적장애인 윤정 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우뚝 서 있으면 민망했고 서 있는 사람들 속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갑갑했지만, 지적장애인 윤정 씨는 다른 이의 구령이 아니라 마음속 울림을 따라 앉기도 하고 서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체육대회 때 구령 소리를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께서 윤정 씨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장애 진단을 받았다. 보건복지부는 윤정 씨를 지적장애 3급으로 규정한다. 김 목사는 윤정 씨를 잔존 군사 문화에 저항하는 인권감수성 풍부한 ‘프로테스탄트’ 1급으로 이해하겠다.
| | | ▲ 다영 씨와 함께 (사진: 이미선 제공) |
#02 ‘전체’ 운운하는 권위주의적 명령체계에 저항했던 윤정 씨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구축한 포드주의(Fordism)마저 거부했다. 컨베이어벨트 앞에 앉아서 잡곡 포장을 하는 곳에서 일했었는데 장애인에게도 법정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는 흔치 않은 보호 작업장이어서, 월 1백만 원 이상의 ‘고수익’이 보장된 곳이었다. 임금만 놓고 보면 좋은 직장이었지만, 윤정 씨는 컨베이어벨트의 속도를 따라 일할 마음이 없었다. 다른 라인에 서 있는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벨트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어서, 작업 중에 쉼 없이 동료들에게 말을 걸고 참견했다. 윤정 씨의 참견을 불편해하는 동료들이 불량을 냈고, 윤정 씨도 컨베이어벨트 위를 지나쳐가는 잡곡을 자주 놓쳤다. 어쩌면 보호작업장에서 무능했던 윤정 씨는 공장 시스템에 꼭 끼워지지 못한 부품이었다. ‘모던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공장 생산 방식에 적응된 부품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적응된 부품으로 전락해버린 사람은 그 인품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지 않는가.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윤정 씨는 스스로와 동료들에게 부품이 될 수 없는 인품에 관하여 모터보다 더 크게 말하고 싶었던 게다. 사람이거든 부품이 되지 말고 인품을 잃지 말라고 지적장애인 윤정 씨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다.
#03 윤정 씨는 소래 포구 근처에 살았다. 소래 사람들은 농사도 지었고 조개를 캐기도 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중학교에 가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제법 가야 해서, 처음엔 어머니와 함께 등하교를 연습했다.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이 눈에 익자 윤정 씨 혼자 등교를 하게 되었다. 중학생 윤정이가 집을 나서 학교에 갔는데, 오후 2시쯤 담임선생님께서 윤정이가 왜 결석했느냐고 전화하셨다. 학교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문제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중간에 내릴 만큼 무모하지 않은데, 학교에도 없다면 중학생 윤정이는 어디로 갔을까. 엄마는 직관을 따라 버스 종점에 가서 버스를 마냥 기다려 보았다. 아침에 버스를 탄 윤정 씨는 오후 3시까지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하냥 앉아 있었다.
엄마와 여러 차례 연습했기 때문에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 앉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우뚝했고, 선 사람들 속에 쪼그려 앉을 수 있었던 윤정 씨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남들 내린다고 따라 내리진 않았다. 남들 다 내리고 한가한 버스 안에서 당당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종점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만나 윤정 씨는 윤정 씨의 시간에 등교했다. 친구들은 이미 하교했지만, 느지막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등교 인사를 드리곤 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 학교 앞에 내리지 않고 버스 안에 남아 종점에서 엄마를 만나던 날이 셀 수 없이 많다. 친구들이 이미 하교한 시간에 등교한 날이 부지기수다. 윤정 씨는 학익동에 있는 남인여자중학교와 남인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개근상을 받았다. 학교 가는 길을 교실로 인정해준 학교가 고맙다. 길에 있다면 늦어도 괜찮다, 고 윤정 씨는 학교에서 배웠다. 길 위에 참 배움이 있음을 학교가 윤정 씨에게 배웠거나.
#04 윤정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장이었던 윤정 씨 어머니는 일을 하셔야 했고, 기회가 돼서 제법 규모 있는 사업이 됐고, 사업이 자리 잡히던 중 연달아 사고가 나면서, 소송에 휘말리다가 파산했다. 어머니가 직장에 다니고, 사업을 하고, 송사에 분주할 수밖에 없던 15년 동안 윤정 씨는 할머니와 함께 경로당에 다녔다. 15년 동안 어머니의 공간은 위급했고, 윤정 씨의 시간은 멈췄다. 경로당을 오가던 윤정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때를 말할 때면, 윤정 씨 얼굴이 무서워진다. 무서운 얼굴로 지난 시간을 노려본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기억과 무의식 속 깊이 흐르는 마그마가 터져버릴 듯, 무서워진다. 멈춰버린 채 지나온 15년을 무서워하지 않아 다행이다. 지나간 시간 속 고통을 무서워하지 말고, 무서운 눈으로 제압해버리는 기개를 칭찬하고 싶다. 마음속 전쟁이 끝나고, 무섭지도 않고 무섭게 제압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가 윤정 씨에게 오소서.
#05 오래 살던 마을을 떠나 2016년 김포로 이사 왔다. 아주 조금, 평화가 왔다. 김포에 와서 다른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자조모임을 꾸리게 되면서 평화가 아주 조금, 왔다. 자조모임을 하고 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공방 교실과 요리 수업 등을 하게 되면서 “살맛이 난다.” 자조모임 회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배웠다. 짧은 단어로 문자를 주고받게 됐고,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긴 문장도 저절로 익혀졌다. 단어로 연발하던 문자가 모이고 모여 마침내 긴 문장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점심을 잘 먹어 감사하고, 독감에 걸린 김 목사 아들을 위해 기도해준다고 했다. 김 목사 아들 이름은 ‘진하’가 아니라 ‘준하’지만 뭐 어떤가. 국가 간 외교문서도 아닌데 맞춤법이 틀리면 어떻고, 인감증명도 아닌데 이름 좀 잘못 쓰면 어떤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동영상을 복사해서 지인들에게 보내주기도 한다. 자조모임을 하며 “살맛이 난다”는 윤정 씨를 보며, 어머니도 최근 2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시며 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눅 6:21)
요새 살맛이 나는 건 맞지만 가끔 짜증도 난다. 매일 김포 장기동에 있는 카페에서 함께 일하는 장애인들이 버릇없이 굴면 짜증 나고 성질난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윤정 씨에게 20대 동생들이 이기죽거릴 때가 있는데, 때로 컵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짜증 나고 성질났지만 컵을 던지진 않았다는 말을 자조모임 회원들에게 풀어놓고 나면, 적어도 한 주간 컵을 던지지 않아도 될 만큼 화가 가라앉는다.
무섭고 화났던 일들을 반복해서 말하는 중이다. 2년 전, 김포 마송에 있는 보호작업장에서 항공 여객기 안에 들어가는 일회용 세면도구 포장 작업을 했었다. 주로 칫솔 포장을 했는데, ‘빨리빨리’ 채근하는 공장장의 눈에 차지 않았나 보다. ‘빨리빨리’ 작업하지 못하는 윤정 씨에게 공장장이 비눗갑을 던졌다고 한다. 공장장이 던진 비눗갑에 손등을 맞아 멍들었던 일을 자조모임에서도 말하고, 발달장애인 직업훈련 포럼에서 발표하고, 자조모임의 필요를 설명하기 위해 공무원들 앞에서 호소하기도 했다. 화났던 일을 처음 말할 땐 아랫입술이 떨렸는데, 반복해서 말하고 나니 손등의 멍이 풀렸듯 마음속 화도 풀어지는지 자꾸 지난 이야기를 물어보는 김 목사를 귀찮아한다. 그만 됐지 싶다.
요새 살맛 나는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조합 이사장에게 요리책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요리책을 보고 직접 식단을 짜서 집에서 요리를 하다가, 요리별로 식자재를 외우게 됐다. 카레라이스, 주먹밥 정식, 크루아상, 잔치국수, 계란탕, 볶음밥을 할 줄 안다. 자조모임 전에 회원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회원들에게 주먹밥 정식과 크루아상을 6천 원씩에 팔기도 했다. 좋은 재료를 썼기 때문에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06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있어도 인생이란 게 항상 살맛 나는 건 아니다. 작년 연말에 윤정 씨는 언짢았었다. 자조모임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지 않을 거 같아서였다. 재작년 연말에는 지역 팟캐스트 방송국에서 주관한 공개 방송에서 노래도 하고, 마술 쇼도 보았는데, 올해엔 행사 소식이 안 들리고 자조모임에서도 크리스마스 전야에 무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지 말자는 사람들은 제각각 사연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공연을 보러 가고, 어떤 사람은 선약이 있어 크리스마스 파티에 올 수 없다고 했다. 사연을 듣긴 했지만, 무시당하는 느낌이다. 분명 윤정 씨는 여러 차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모임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자조모임에서 윤정 씨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삐쳤고 공방 교육도 가기 싫어졌고 협동조합에서 탈퇴하고 싶어졌다. “아프로”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언짢기 때문에 “아프로”는 협동조합의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이사장에게 협박하기도 한다.
#07 협박은 잘 통하지 않는다. 윤정 씨는 강아지띠이기 때문이다. 82년생 윤정 씨는 자기 십이지간을 개띠라 하지 않고 ‘강아지띠’라고 한다. 82년생 윤정 씨는 스스로를 ‘강아지띠’라 부르며, 조금 어리게 산다. 강아지띠 윤정 씨가 때로 협박하며 이를 드러내고, 있는 힘껏 물려고 하지만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모임에 오지 않겠다는 선언과 협동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협박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윤정 씨는 개띠가 아니라 강아지띠니까. 여러 사람들이 윤정 씨 이빨에 물렸지만, 아무도 아파하진 않았다. 82년생 강아지띠 윤정 씨는 “아프로”도 당분간 조금 어리게 살 것이다. 구령 소리에 굳이 반응하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 속도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며, 내려야 하는 정거장이 아니라 내리고 싶을 때에 내리고, 이기죽거리며 까부는 동생들 때문에 짜증 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지 않으면 삐지기도 하면서,
82년생 강아지띠 윤정 씨는 조금 어리게, 산다. 김영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