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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사찰자료실 스크랩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소윤당 추천 0 조회 93 13.12.21 19: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 국보제199호

 

 

 

 

 

단석산  

 

단석산(斷石山·827.2m)은 경주시 건천읍과 산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신라의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이라 불렸으며, 이전에는 월생산으로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사하여 난승이라는 도상에게서 비법서와 신검(神劍)을 받고 신술로 큰바위를 내리치니 그 큰 바위가 두동강이 나버렸다. 그 후로 김유신이 무예를 닦았던 이 산을 ‘단석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신라의 화랑들은 김유신을 흠모하며 단석산을 수련장으로 이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을 구해 월생산(月生山)의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했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 하였다'고 적고 있으나, 현재 단석사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다

 

칼로 바위를 잘랐다는 단속(斷石)의 설화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설화집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圖 )에는 유비와 손권이 '대업을 이루게 해 달라'는 저마다의 속마음을 숨기고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기세로 단칼에 바위를 두 동강 낸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검성(劍聖)으로 명망이 높았던 야규 무네요시(柳生宗嚴)가 검법의 극의를 터득한 뒤 칼로 큰 돌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석산은 높이가 827m로 경주시내에서 약 24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등산객이 많이 찾는 산이다. 산을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험해서 좀 힘들다.

 

 

                          단석산 정상에 있는 단석                                             천주암에 있는 단석

 

단석산 정상에 오르면 두 동강난 바위가 있다. 대부분 이 바위를 단석바위라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천주암에 있는 네모난 입석의 바위를 단석바위라고 한다.

신선사의 홈페이지에도 "김유신 장군이 십칠세 되던해 신라오악중 중악 석굴에서 기도를 하여 난승으로부터 받은 보검으로 바위를 자른곳(이 단석으로 인하여 산이름이 월생산에서 단석산으로 바뀌게됨'이라고 천주암에 있는 이 바위를 단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전설이다 보니 어느 것이 단석이다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단석산 정상에 오르면 경주 시가지를 병풍처럼 두른 송화산과 선도산, 벽도산, 그 뒤로 남산의 금오봉, 토함산 삼태봉 등 신라의 삼산오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선사(神仙寺)

 

 

 

 

단석산 북편에는 신선사(神仙寺)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 신라 석굴사원지(石窟寺院址)가 있다.

 

이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의 바위는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부터 이 바위를 탱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신선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옆 야외에 있는 석불

(몸체부분과 좌대의 하대석만 옛것이고 나머지는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돌담 위에 올라앉은 나신상과 돌탑

 

마애불상군에서 내려다본 신선사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해독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현재 이 석굴은 미륵암이라는 부르는 작은 암자로 이용되고 있는 듯 '미륵암'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석굴 30m쯤 아래에 본절(신선사)이 들어서 있다.

신선사는 대웅보전(大雄寶殿)전과 삼소암(三笑庵), 산령각(山靈閣),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돌담과 돌탑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용담스님이 주지로 계시는데 스님은 1951년 신선사에서 출가하여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께 사미계를, 서울 보광사 정일스님께 비구계를 받아 50여년을 이곳 신선사에서 수행정진중이시라고 한다.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

 

강화 아크릴 지붕의 보호각 속에 있는 마애불상군

 

신선사옆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은 거대한 암벽이 ㄷ자 모양으로 높이 솟하나의 석실을 이루고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법당 형태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실은  길이 약 18.2미터, 폭 약3미터로 장방형을 이루고 동쪽,남쪽,북쪽이 칼로 밴듯한 바위가 솟아있고 서쪽만 틔어 있다.

삼면의 바위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장관을 이룬다. 북쪽의 독립된 바위면에는 높이 8.2m의 여래입상 1구가 서 있고. 동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북면에는 여래입상, 보살입상, 반가사유상, 공양인물상 등 7구의 상이,  남면에도 거대한 입불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석굴의 남쪽 암벽에는 '경주상인암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라는 400자에 가까운 명문이 조각되어 있어 석굴조성의 배경과 의미를 알 수 있으며 불상의 조각수법과 아울러 신라시대 금석문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969년 당시 조사를 했던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의 조사과정과 결과를 정리하여 보면 

'동경잡기가 "유암흘립 고백여척(有巖屹立 高百餘尺)"이라 기록한 상인암은, 높이 827미터의 단석산 정상 서남쪽 아래에 자리잡은 자연의 4개의 거대한 바위를 가르킨다.

이들은 동남북 3면에 병립되어서 ㄷ자형의 석실을 이루었다. 자연의 석실 안에는 십여미터 절벽에 인공을 가하여 당대 신앙의 불보살 등 대소 10구를 각 면에 새겨 놓았다.

 

평면 길이 약 18.2미터, 폭 약3미터로 장방형을 이룬 석실 동북쪽에 독립한 큰 바위에는 전면 가득히 높이 약 7미터의 여래입상을 양각하였으며, 이 거상을 중심으로 좌측과 전면에는 또한 거구의 보살입상 각 1구를 조각하여 상기한 여래상과 더불어 삼존상을 이루었다.

 

이들 3존 중 주존여래가 지니는 둥근 동안(童顔)과 두 손의 여원(與願) . 시무외인(施無畏印) 그리고 고졸한  조각 수법과 통견대의(通肩大衣)의 양식 등에서 보살상과 더불어 삼국말기의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상호(相好)에 나타난 미소상은 충청남도 서산의 백제 서산 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에서도 본 바 있는 고식(古式)의 미소로서 동안(童顔)과 더불어 그 연대의 고고(高古)함과 당대의 신앙을 오늘에 보여 주고 있다.

 

동.남.북면에는 우뚝 선 바위가 있고 서쪽으로 개방된 이 천연의 석실은 지면의 고저와 불상의 배치방안 등으로 보아 전후(前後)의 양실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가 있다.

즉, 전실(前室)은 후실(後室)에 봉안된 삼존불에게 예불을 드리기 위한 준비하는 곳이며 후실은 이 석굴의 주존인 1여래 2보살의 봉안에게 예배하는 곳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前後 兩室로의 구분은 인도의 초기 석굴에서 비롯한 것으로 토함산석굴에서 더욱 정비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석굴은그 중간 과정인 삼국기 석굴의 시원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방형의 석실은 중국 석굴에서뿐 아니라 삼국시대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 미륵삼존석굴(彌勒三尊石窟 : 선덕왕대)이나 군위의 아미타삼존석불(700년경)에서 그 계보를 찾을 수가 있다.

 

 

 

서쪽 석실 입구에서 본 마애불상군

 

 

 

석실 조사에서 가장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이들 4개 바위 정상을 덮었던 거대한 목조로 만든 기와 지붕(木造瓦葺屋蓋)의 확인이다. 목조 기와지붕의 추정은 석실 주위, 특히 남쪽 바위의 암반에 이르는 석굴에서 삼국시대부터 통일기에 이르는 각종 와당류와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이에 따라서 불상 조성과 동시에 자연 석실을 그대로 불당으로 전용함으로써 석굴사원으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하였던 것이다. 

 

남면 암벽에 새겨져 있는 조상기

 

석굴내 남쪽 벽면에 각자(刻字)된 명문은 약 20행으로서 행마다 19자로 약 400여자인데 그 중 약 2백여자가 현재까지 판독되고 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절이름(寺名)뿐 아니라 본존불의 명칭(主尊名)을 알 수 있었다.

 

절이름에 대해서는 "인령허(因靈虛) 명신선사(名神仙寺)"라고 명기하였고, 존명에 대해서는 "작미륵석상일구(作彌勒石像一軀) 고삼장(高三丈) 보살이구(菩薩二軀)"라 하여 주실의 봉안상이 미륵삼존으로서 고신라 최대의 조상임이 확인된 것이다.

또 명문중에 "잉어산암하(仍於山巖下) 창조가람(創造伽藍)"이라 하여 자연 석굴인 상인암 대법당을 포함하여 가람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체적으로 보아 삼국 최대의 거상을 봉안한 우리나라 초기의 석굴법당으로 추정되며 신선사의 주존불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하는 사실은 당대의 미륵신앙과 이에 귀의하여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컷던 화랑도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당시의 김유신은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으며 당시의 화랑들은 용화라고 하는 이름을 즐겨 붙였다.  이 용화는 불교용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미륵이 환생을 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을 하고, 설법 교화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법회를 의미한다. 그 당시 향도(香徒)라고 하는것은 곧 신앙결사(信仰結社)의 의미를 뜻한다. 이 미륵이 출현하는 세계는 바로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이상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 화랑들은 바로 이상세계의 도래(到來)를 정신적 염원으로 삼아 강건한 무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적 바탕은 바로 젊은 낭도들에게 정신적 기강이 되어 곧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불행히 명문(銘文)에는 창건 연대등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만들어진 시기를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 작품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서쪽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 북면 바위에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있는데 삼존 모두 북동쪽의 본존불(本尊佛)로 인도하는 독특한 손모양을 보여준다

 

현재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강화아크릴로 된 보호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불상 배치도

 

 

 북쪽바위(北巖)

북쪽 바

 

 

북쪽은 2개의 바위가 있고 그 사이는 틔어져 있다

그중에서 동쪽의 바위에는 주불인 여래입상(미륵불)이 있고 서쪽의 바위에는 반가사유보살상, 여래입상 3구, 보살입상 1구, 공양인물상 2구 등 모두 7구의 상이 있다.

 

 

여래입상1(如來立像1) - 미륵여래입상

 

 

 

                                                                    <  ▲ 신선사 홈페이지 사진임>

 

이 석굴의 주불(主佛)으로서 거대한 장방형(長方形) 1석(石) 전면에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상호는 둥글고 고식(古式)의 미소를 짓고 있으며 머리의 정상에는 특이한 2단의 육계형이 있다. 삼도는 없고 내액의(內腋衣)가 엿보이는 통견의(通肩衣)로서 좌우대칭의 조각기법을 따랐으며 법의(法衣)는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의 좌우 아래까지 이르고 있다.

수인은 양손 모두 다섯손가락을 펴서 여원인(與願印)과 시무 외인(施無畏印)의 통인(通印)을 하고 있다.

비록 딱딱하고 서툰 듯한 솜씨로 조성된 면도 있지만 전체높이 약 7m로서 삼국시대 초기 마애불의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작품이다.
신산사 홈페이지에는 이 불상을 미륵여래입상이라 부르고 있다.

 

미륵여래불의 발부분-바위를 깊게 파내고 발가락을 새겼다

 

 

북면의 서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반가사유상,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

 

 

 

장식이 없는 둥근 원형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머리에 삼산관 보관을 쓰고 동안을 보이며 삼도는 없다.

나신에 가까운 상체이며. 목에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반가한 오른쪽 다리 위에 올리고다시 팔을 올려 오른쪽 손가락을 빰에 살짝 대어서 사유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왼쪽 발의 무릎위에 얹어서 통형(通形)의 반가형식(半跏形式)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발이 연꽃 대좌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반가사유의 금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원위치를 지키고 광배와 대좌 등을 구비한 고신라 유일의 마애석상으로 신라 전역에서 현재 남아 있는 마애존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전체높이 109cm이며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조각선이 분명하다.

전체의 형식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손모양을 보면 예불하는 모양이 아니고 안쪽 미륵불로 안내하는 형상이다.

 

반가 사유상의 왼쪽으로 3기의 여래입상과 보살상이 있는데 양쪽 손을 모두 주불인 미륵여래입상쪽으로 
안내하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른쪽 여래입상(如來立像)

 


보주형 두광이 있으나 밑의 연화좌는 분명하지 못하다. 두정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그 아래로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으며 왼손은 몸밖으로 뻗어 주존불을 가리킨다.

정면을 보는 상이며 전체 높이는 116cm이다.


가운데 보살입상(菩薩立像)

 

 


정면상으로서 머리에는 삼각보관(三角寶冠)을 얹었으며 삼도(三道)는 없다. 천의(天衣)는 양 어깨로 걸쳤으며 배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두 팔에 걸쳐서 몸측으로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왼손은 왼쪽 몸의 측면 밖으로 나가서 주존불를 기리킨다. 둥근 두광과 연화좌를 지니고 있는데 몸체의 높이는 102cm이다.


 

왼쪽 여래입상(如來立像)

 

 


이 곳의 세 입상중 조각이 가장 선명하다.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과 단판복련좌를 지니고 있는데 연화문에는 자엽(子葉)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둥글고 큰 상호에 비해서 육계가 매우 적은 것도 특이하다.

두 눈은 부어 오른 초기 석불상의 특색을 지녔으며 두 귀 또한 길고 삼도는 없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왼손에 걸쳐서 아래로 내려 뜨렸고 신체 하단에는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위에 올려서 다섯손가락을 폈으며 왼손은 몸 밖으로 들어서 다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이와 같은 왼손형식은 다른 두 상과 동일하여서 마치 이들이 동쪽 끝에 있는 반가사유상과 나아가서는 굴내의 주존인 미륵여래 입상을 지칭하고 인도하는 듯하다. 이 상은 이곳의 4상중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주목할만하다. 불상의 높이는 105cm이다.

 

 

공양인물상과 입불상

 

공양인물상

향로와 나무줄기를 들고 걸어가는 방향은 주존불인 안쪽의 미륵여래불쪽이다

 

공양인물상 1


 


동쪽 굴내부를 향하여 공양하는 입상으로서 두 손으로 병향로(柄香爐)를 잡고 있다. 머리에는 독특한 관모를 썼으며 상하의제(上下衣制)의 구별이 주목된다.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상호의 두 눈은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 위장부(偉丈夫)임을 느끼게 한다. 몸의 높이는 122cm이며 남면의 금석문 중에는 "보살계제자잠주" 라는 문자가 적혀 있어 이 석굴 조성의 발원인으로 추정이 된다.

 

공양인물상 2

 


공양인물상 (1)에 비해 약간 작으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과 자세와 의복이 동일하다. 다만 두 손으로 나무줄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앞의 상과 다를 뿐이다. 역시 공양상으로 추정된다.

 

특히 위의 두 공양상의 의복과 모자는 고대 신라의 복식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어서 복식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아랫쪽 여래입상(如來立像)

 

 


맨 아랫쪽에 자리 잡은 있으며 불상군 중에서 가장 작은 입상으로서 우견편단을 하고 있다.

몸의 높이는 57cm에 불과하며 다른 상에 비하여 후대에 따로 조각해 넣은 듯 하다.

 

 

동쪽 바위(東巖)

 

살입상(菩薩立像) - 관세음보살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상으로 선의 각이 깊어 대체의 윤곽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앙련대좌 위에 바로 서 있으며 오른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신선사 홈페이지에는 관세음보살상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상의 전체 높이는 약 3m이다.

남쪽바위(南巖)

 

보살입상(菩薩立像) - 지장보살상


 

 

 

 

 

동쪽 바위면에 있는 보살상과 같이 미륵여래 입상의 협시상을 이루며 명문에 보이는 두 보살 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조각 양식은 동쪽 것과 비슷한데 두 손이 다르다. 전체 높이 약 2.1m이며 얇게 조각되어 있다. 또한 오랜 세월을 견뎌온 탓에 마멸과 손상이 심해 조각선을 찾기가 어렵다.


 

신선사 홈페이지에는 지장보살상으로 부르며 관세음보살상과 같이 미륵여래상의 협시상을 이룬다고 적혀 있다.

 

조상명기

 

 

단석산 마애조상군의 석실(石室)의 남쪽면에 각자되어 있는 명문이다.

글을 쓰기 위하여 면을 고른 후 각자를 한 것으로 보인다.

명문은 세로로 20행이며, 각 행의 글자는 19자로  약 400여자의 조상명문(造像銘文)이 새겨져 있고 그 중에서 약 2백여 글자가 현재까지 판독되고 있다. 이 명문은 마애석불군의 조상기로 이 명문에 의하여 절이름(寺名)뿐 아니라 본존불의 명칭(主尊名)을 알 수 있었다.

글자크기는 대략 2~4cm정도이며. 글씨는 고예서(古隷書)와 해서(楷書)가 섞여 있는데 전체적으로 예서(隸書)의 느낌이 강하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상인암(上人巖)에 새겨진 이 명문에 의해서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은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신명(神明)에게 기도하던 중악(中岳)의 석굴임이 밝혀졌고  본래의 이름이 신선사(神仙寺)임이 밝혀졌다.

 

 

산행코스

 

 

 

단석사의 등산은 일반적으로

건천방내마을 버스정류장~조망바위~너럭바위~천주암~진달래 군락지~단석산 정상~쌍바위~신선사(마애불상군)~오덕선원~절골 버스정류장 순이다. 총 산행 거리 10.5㎞에 걷는 시간은 5시간, 휴식을 포함하면 6시간쯤 걸린다.

그러나 신선사 마애불상군만을 보려면 건천 송선리 우중골 마을에 주차를 하고 약 1.6km의 등산로를 오르는데 개인차가 있으나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우중골 마을에 경주시에서 마련한 주차장이 있으나 지나서 오덕선원 앞쪽에 약 5대 정도, 안내소 앞에도 약 5대정도 주차헐 수 있으므로 주중에는 여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오덕선원에서 신선사 앞까지는 시멘트포장길이며 사륜구동차량은 신산사 전방 300m까지 오를 수 있으나 경사가 매우 심하여 위험하므로 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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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큰 오색딱다구리

 

 단석산의 큰 오색딱다구리 발견 사진(아시아뉴스 사진)

 

2010년 2월, 보호조로 알려진 큰 오색딱다구리가 국립공원 경주 단석산 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199호) 주변 7∼8부 능선 계곡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발견돼 조류학계에 큰 관심을 모은바 있다.

신선사를 찾거나 단석산 등반시에 관심을 가지고 다니다 보면 큰 오색떡다구리를 만나는 행운을 얻를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가져큰 오색딱다구리 사진이다.

수컷은 머리 위쪽에 붉은 깃털이 있고 암컷은 없다.

 

 

 

답사길에서 만난 산새와 예쁜 꽃들

등산로에서 만난 산새

 

하얀 제비꽃

 

생강나무꽃                                            산수유꽃

 

자목련

 

백목련

 

피나물

  

현호색

 

산괭이눈

 

산괭이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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