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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양반 쌍놈 없다.
이북에 복음이 확산된 이유!
편저중...
지금 남북 간의 갈등이 외부 요인 탓도 있고 내부 요인도 있습니다.
첫째는 조선조 500년 동안 이북을 너무 천대했습니다.
이남 사람들이 그래서 이북에 벼슬이 없었습니다. .
이북 사람들이 군수 이상은 다 이남에서 가서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평양 감사 그 평양 감사 평안도의 그 평양 감사가 이게 아주 노나는 자리다.
이 자리라는 게 뭐 평양 감사도 자기 싫으면 그만둔다는, 이런 속담이 생겨난 건 전라감사나 경상감사이에 비해서 연봉이 한 세 배 정도 더 셌습니다
평양 감사가. 그러니까 전라감사가 연봉을 1억 받는다면. 그러면 평양 감사는 3억을 받았던 거죠 매년 착취해가지고.
그래 서 착취를 할 수 있었던 구조가 뭐냐
이북은 그. 정년퇴직한 관찰사가 이북 출신은 없습니다.
선배들이 리더 해 가지고 딱 있으면 신임 관찰사가 선배한테 가서 인사를 해야 됩니다.
옛날 관습으로는 그러면 자기가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르지를 못합니다.
선배들이 또 모여 팀들이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마음대로 합니까 미담은 그렇게 돼 있었어요. 충청이나 경상 전란은 그러니까 신임 관찰사가 와도 위에 어른들이 있기 때문에 가서 문안 인사도 드리고 어 자네.
잘해 뭐 이런 정도 말을 하는데
이북은 이북 출신이 그런 고위직에 올라가는 경우가 없어요.
그러니까. 가면 마구 갈퀴질를 했던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막 창출을 하니까 연봉이 막 따따블로 이렇게 올라간 겁니다.
그러면 왜 이북 출신을 그 고위 벼슬을 안 줬냐 초장에. 이북에서 반란이 많았어요.
초장이 정권 초기에. 그 함경도나 이쪽은 저 여진족 뭐 이런 쪽이 섞여서 살아가지고 국경이 뭐 철조망. 그걸 딱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 느슨할 때니까 이러니까 뭐 이게 목민관 군수를 함경도로 파견을 하면 이게 통제가 잘 안 됐습니다.
어떤 때는 그냥? 그 서울에서 한양에서 파견한
군수를 그냥 잡아다가 린치를 가하고 그랬거든요. 우리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봤죠.
임진왜란 때 그 이매군인가 이쪽에 왕자 2명을 잡았지 않습니까? 그쪽에서 함경도에서 잡아가지고 일본의 각도한테 갖다 바쳤습니다. 이게 그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일입니다 그리고 선조가.
이웃.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났는데 철수를 했는데도 이제 협상이 진행되니까 물러났는데도 평양성에서 6개월 동안 한양으로 들어오질 않고 평양성에 있었습니다. 선조가
만약에 한양으로 돌아갔을 때 성중지변 성중 성 안에서의 변수가 있을 수 있다. 이건 백성들이 나를 잡아가지고 겁밥을 할 수 있다 그 염려 때문에 이걸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이걸.
그 조선시대 정서가 그랬고 특히 조선 초기에 그 이시의 난 이괄의 난 뭐 이런 거 보면은 군사를 기병을 일으킨 반란은 다 이북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이북이 특히 평양 평안도 쪽은 중국의 그 정보 당시 최강대국인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보와 물류가 이쪽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출력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기병을 하니까 우리가 함께. 황경도는 아까 뭐 그런 여진족이라든가 섞여 가지고 계속 뭐 이러고 하니까 안 좋죠? 이쪽으로 이남에서는 반란이 났어도 뭐 그렇게 우리 반란을 하자 뭐 입으로만 이렇게 뭐 모의하고 이 정도지 실제 마라탕 기병을 데리고 가서 공격을 하자 이런 건 별로 없었습니다.
그 무신난 때 이제 1728년 영조 4년 때 무신난 때 조금 기병을 했었고 그 다음에는 조선조 연장선상에서 이렇게 쭉 보자면은. 남인이 정권을 잡은 경우는. 박정희 516이 그 이후로 최초입니다.
남쪽에서 일으킨 반란이 성공한 경우는 그걸 반란이라고 규정한다면 쿠데타를 성공은 뭐 규택하는 규칙할 수가 없다는 뭐 판결문도 있듯이 그게 처음이고 그 이전에는 이남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북에. 전부 그렇게 블로킹을 했죠. 그러니까 인자 한이 맺힌 겁니다.
한이 많이 맺혔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평양에서 있는데, 평양 사람들 어떤 유지 팀의 부잣집의 임금 행차가 가면은 수용원이 뭐 1이백 명 될 거 아닙니까? 몇백 명 그러니까 밥 해주고 그러려면 살림이 충나잖아요.
언제 가나 이 왕이 언제 우리 집 떠나 이걸 합숙으로 해가지고,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 그러니까 그때 그 평양 가지고 뭐 새 붕알처럼 벌었습니다.
임금한테 매우 속어로 점잖지 못한 말로 퉁명스럽게 그 대답했다는 얘기를 내가 들었어요,
이북 출신 평양분한테 내가 밑에 선조들이 자기 집에 왔을 때 그렇게 답변을 했다는 거예요? 그건 미국 사람들이 그때 조선 한양 정부에 대해서 매우 불편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했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인자. 이 우린 상놈이다. 뭐 이래 가지고 서북 사람들을 차별을 해가지고에 홍경래의 반란이 유명한 반란 아닙니까 그게.
그게 성공은 혁명하고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이죠. 그러다가 이 이북 사람들의 차별 의식을 해소해준 게 기독교입니다. 개신교가 떠니 들어가서 물론 이제 천주교도 포함입니다만.
주님 앞에 양만 쌍놈이없다.
그 평등 사상을 기독교가 가지고 이북을 들어간 겁니다.
처음에 이북부터 들어갔어요 이남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이 남에는 이쪽 양반들이 술에쩔어 있어 가지고 기독교가 잘 흡수가 안 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양반 쌍놈 없다.
어 다 평등하다 이래야 되니까 그냥 전부 북 이북에서 아주 그 기독교를 열렬하게 받아들이게 된 그게 계기가 됐어요.
그런 데다가 이게 이제 처음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게 지금 이북에서 중산층들입니다.
그래도 학교도 다니고 뭐 이렇게 하고 그리고 그 천주교회 사회인가에 보면 달레 신부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 의사가 백정 아들인데 천대받던 그 백정 소 잡는 백정 아들이 외과 의사가 됐는데 그.
그 그 천주교 박해 때 인자 뭐 작두로 잘라죽이는 거 있지 않습니까? 이때 죽음을 앞에 놓고 자기 신앙고백을 하는데 나는 살아서 이미 천당해 왔고 왜 내가 백정 아들인데 이렇게 인간 대접을 받았다는 거죠? 이건 이미 내가 살아서 천당이 왔고.
죽어서도 나는 천당에 갈 게 분명하다.
그러니 뭐가 걱정되느냐 죽음 앞에서 온 고백입니다.
아 죽음 앞에선 고백이 그래서 이 저걸 하다가 그 다음에 이제 꾸미루짐이 들어오니까 공산주의가 들어오니까 여기다가.
그건 평등하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기독교보다 한풀을 더 떠서 아 땅을 무상몰수 해 가지고 무상 분배를 했죠. 저쪽에 이북 정권이 그래서 없는 사람들한테 땅을 나눠줬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북이 그 그 빈민층들이 무산대중들이 전부 아바이 수령이 된 거예요. 아바이 통닭처럼. 아바이 아바이가 이게 저 이게 국회 된 거예요.
저쪽이 저기 아 땅을 주니까 무상몰수에서 무상 무상 분배로 해가지고 그게 아마 이북 정권의 에너지가 됐을 겁니다. 그게 가장 큰 큰 문제가. 불외해 놓으니까 이게 지금.
음 한국 사회 이 남북 간의 갈등이 크게 보면 외세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런 이북 차별이 오늘날 서로 그런 그런 감정으로 다 남아 있는 거예요.
서로 그리고 또 뭡니까 이 한국의 개신교나 이쪽은 다 그래도 평양이나 이런 중산층 교육받은 계층들인데 그걸. 그럼 뺏었잖아요.
이북 김일성 정권이 그러니까 이남으로 전부 내려왔죠. 이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의 감정은 어떻겠습니까?
내 정답. 앞에서는 그 이북 정권에 대해서 아주 적은 풀천지 원수지 출신 표면 수치 그런 아 우리가 인과가 있었다.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가 참 무지몽매했다. 인간 사회의 삶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혁명한다고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참 우리가 나이도 어리고 철도 없고 우리 참 한민족이 무지몽매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에 이제 그 또 한 가지는.
이제 그. 그 이남에서의 저런 이런 문제인데. 이게 지금. 한국 사회가 이게 양반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이 양반 저 양반 이렇게 양반자를 붙이는 건 다 양반이 모두 되고 싶다는 뜻인데 아무나 보고 이 양반 저양반 요즘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아마. 아 해방 이후에 생겨난 언어 관습이지 않으려나 저는 그렇게 추론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는데 해방 이후에. 그래서 물론 이제 양반하면은 그동안에는 우리는 다 토색질이나 전부 착취한 계층으로 그렇게 저희는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그렇지만은에 그렇게 착취만 해가지고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 계층이 유지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 삶인데 그러면 거기에 걸맞는. 그런 처신을 보여줘야 되는데.
에, 그래서 난리가 나면은 뭐 좌뇌 우뇌 하는 얘기는 그건 껍데기 얘기고 평소에 쌓인 개인 감정 정리하는 기간입니다. 그때 되면 그래서 평소 내가 뭐 양반이라고 폼 잡고 창피하던 사람들 육이오템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육이오가 지나면서 양반 얘기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양반이라고 자기가 뭐 얘기하다가는 이건 잘못 오면 죽창 찔려 죽는 거예요. 부탁드려 죽는 겁니다. 그래서 그 특히 그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가 직격탄을 받았습니다.
그쪽에서 저쪽에서 올라오니까 외국들이 저쪽을 쳤거든 주 이 동로가 경상도로 그리고 이 서쪽 호남이나 충청 일대는 보존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의병도 해고 뭐도 해고 했습니다. 식량이 보충이 되니까?
그런데 6.25 때는 충청도 호남을 때렸어요. 낙동강 이남은 보존이 됐습니다. 저쪽은?
그래서 아 지금 대구의 뭐 고서적이랄지 어 경상도의 그런 유교 문화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아있는 게 6.25 때 그쪽이 좀 경상도가 보호됐다는 면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낙동강 하면 어찌 됐든 보존 됐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쪽 양반의 고향인 충청도는 톱질을 두 번 당했습니다.
1.4 후퇴 때 공주 이남까지 또 들어왔습니다. 한번 6.25 때 한번 톱질을 하고 또 또 톱질을 두 번에는 통에 이 지주 집안이랄지 뭐 명문가 이런 지방들이 다 박살이 났습니다. 전부.
어 이쪽에요? 전부 다 절단 낫죠? 그리고 경선에 쌓인 또 개인 감정 있을 때는 이때 그냥 다 가서 뭐 그냥 껍데기 뒤집어 씌워가지고 다 죽여버렸죠.
서로 간에 이 앙금이 이 죽어야 끝나는 것 같아요. 그 세대가 다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잊혀지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이게. 어렸을 때 그 상황을 본 사람들은 그걸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가장 트라우마로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이제 그 우리가 그때 그 양반으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 공동체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 배어가 없이는 그게 자기 양반으로 털 수 없습니다, 양반이라는 게 벼슬도 있어야 되지만 신방을 얻어야지.
이게 양반 노릇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어른 노릇을 해야지. 아 자기가 나이만 먹었다고 행동은 엉망으로 해고 나 존경이라면 이게 됩니까 다 욕하지 그래 가지고 이게 특히 저 호남 쪽은 여수 순천 쪽은 여수 사건이라고 그러죠, 일명 여순 반란 사건 이때 또.
결단이 나왔습니다. 또 그때 유교보다 더 무섭게 맞죠, 그때 거기서 그러니까 서로 그때 찔러 죽이고 이거 한번 해보니까. 625 때는 오히려 조용하게 지나갔어요, 한 번 서로 이쪽에서 저게 문제가 있다.
그래가지고 선제 공격을 해서 죽이면 그쪽이 또 가만히 있습니까 이쪽 다 와서 죽였어요. 그러면 또 이쪽에서 죽이고 죽이고 하니까. 이게 선제 공격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거예요.
함부로 이거 좌우 문제 가지고 했다가는 끝없는 고륙 상징의 길로 간다는 걸 알고 6 이 5 때는 서로 조심했습니다. 함부로 선재 공격 안 했어요. 이걸 한 번 해 놓으면 이건 치유가 잘 안 됩니다.
죽어야 끝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종교 문제도 그렇습니다, 한 번 이게 싸움이 나면 화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왜 화해를 허는 쪽이 지는 쪽이기 때문에 종교라는 건 절대적 신념체계인데 절대로 믿어야 되는데 이건 상대적으로 신축성을 보이는 집단이 그건 약하다는 얘기밖에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리 한국 사회가 이게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 종교 문제고 이 시아파 수니파가 나는 없어서 참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이게 굉장히 나중에 이건 정말 터지면 정말 복잡한 문제예요. 이것은 이건 정말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건 서로 조심해야지 함부로 공격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나도 반드시 보복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돼요.
아 또 그리고 자기도 보복당을 각오를 하고 공격을 해야 되는 겁니다. 이건. 그래서 원로들이 이걸 중재를 해야 돼요.
철없는 애들이 함부로 그거 하는 거 말려야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사람이 말로 허는 거 하고 직접 가서 죽창을 가서 찔러 죽이는 거하고 전혀 다른 거니까 그 남쪽에 인제 그 육이오 때나 이런 때 보면은. 에 인심을 얻은 집안은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뭡니까 기와집이 남아 있는 집들은. 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냥 얼음은 기와집이 몇 시간짜리 집들이 남아있는 건.
동학 6 이오 때 다 검증받은 집들입니다. 아니 그리고 다 가서 불질러 버렸습니다. 저 학교도 다 가서 불 질러버렸습니다.
가서 가만 안 놔둡니다. 그때 난리 때 날릴 때 개인감정 정리하는 기간입니다. 그때 아이 나면 개인 감정 뭐 뭐 뭐 명분은 덮어씌우기 나름이에요.
뭐 딱지를 좌를 붙이든 우를 붙이든 그건 뭐 그냥 형식적인 얘기고 다 가서 때려 죽여버렸습니다. 가서. 저 지금 음.
이제 이 한국에 이게 제가 집안들을 쭉 보니까. 영원함 간에 이 집안 간에도 무슨 차이가 있냐면 제가 안동을 가서 조사를 해보니까 안동은 양반의 동네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안동이 딱 벼슬도 많이 하고, 고관 대작들을 많이 하고 권력도 많이 누리고 막 잘 먹고 잘 사는 동네인 줄 알았어요.
조선조 때 아니 가서 가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교실들, 그렇게 많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안동 그 양반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뭐 교리 때 정원 정원댁 교리 교리 정은 승지 승지 댁 그래요?
테코가 이건 중앙정부의 과장급 정도밖에 안 되는 벼슬입니다. 이건 뭐 경승 판서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되감 지낸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안동이 그 농사도 많지 않으면 산간지역입니다. 그게. 경치는 좋은 데인데 참 배고픈 동네입니다.
한 분 그래서 안동에 요즘 또 그 요리가 뭐 헛제사밥하고 간고등어 아닙니까? 제사 음식 때나 밥을 제대로 한번 차려 먹는 거예요. 다른 땐 못 먹고 그러니까 그 제삿밥이 그렇게 생각이 나는 거죠?
먹고 싶은 생각이 평상시에 그러니까 제사 안 지내면 그냥 혼자서 밥이라도 한번 먹어보자랑게. 근데 제가 이 헛제사밥을 먹어보니까 고기도 별로 없고 그냥 나물 좀 좀 차려놓은 정도예요. 이 전라도 한정식에 비하면 이건 뭐 전혀 비교가 안 되는 식사입니다.
그래도 그걸 제삿밥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맛있는 요리라고 생각했으니 조선조 때 안동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수술도 못하고 농사도 없으니까. 이게 월급을 타야 되는데 교수를 넣으면 월급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녹봉이 이것도 없고 나오는 물산도 없고 경상도가 이 경부선 타고 가다 보면 거의 화전민 수준이었어요.
경상도가 농토가 별로 없습니다. 상주 쪽에 있고 경주 쪽에 조금 있지 그래서 경상도입니다. 나머지는 농토 없습니다.
삼천 석 이상 나오기가 힘듭니다. 부자가? 이쪽에는 서쪽은 만석군이 많아도 저쪽은 삼천석이면 이쪽이 만석군 급에 해당되는 부자들이에요.
그쪽 그쪽? 그쪽 부자들이 그러니까 얼마나 고생했어요. 교수는 안동이 남인을 했거든 야당 조선조 때는 야당이 남인입니다.
남인을 하니까 블로킹을 당한 거죠. 이쪽에 기호 노론들이 벼슬을 안 줬다니까 고위 벼슬을 정삼품 당산관인데. 당선관 이상을 표수를 주지를 않으고, 교수를 치면, 하위 직급의 벼슬들은 아까 그 교오리 정원 뭐 승지.
이런 제가 지금 영남에서 유명한 명문집 안이 의성 김씨 학봉 집안인데, 그 집안에 사실 뭐 기구 높은 거 뭐 했습니까 하니까 경조 참회했다고 그러더라고 경조 참이 우리 집이 그게? 이미 영남에서 플러스급 양반입니다. 양반의 레벨로 따지면.
A 플러스급인데 병조참이라는 건 차관보 차관 밑에 차관 법 그게 우리 집안에선 최고 매설이다는 거예요. 아, 뭐 공부를 못 해가지고 못 했겠습니까? 안 시켜주면 어떻게 해, 발령은 안 내는데 과거는 합격해도.
아 이래 가지고 남인이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그래서 그 경상도 남인들은 대설도 못 했고 그다음에 금강산 유람 다니는 게 인자 18세기 이때쯤에 사대부들 사이에 굉장히 유행한 풍조인데 영남에서는 금강산 유람기가 나오는 일이 없습니다. 당시 금강산을 유람하려면 경 그 뭐 금강산 철방이나 그쪽 지역에 자기 친구가 벼슬을 한다거나 아는 사람이 네트워킹이 있어야 그쪽.
유럽을 가면 한 한 달 이상 가는 건데, 그걸 먹고자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자기가 무슨 돈이 있다고 한 달 이상을 먹고자 하는 요즘에 말하자면 유럽 여행 한 달 다니는 건데 그건 못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기호 쪽에 노론 측근들은 많이 다닙니다.
그쪽을 유람을 경상도 그 저 저 금강산 유람을 그리고 골동사화가 미술사에 이 골동품이 경상대는 없어요. 별로. 지금 저 뭐 저 저 경제 경선이랄지 이쪽 다.
22세기 28세기 17세기 이후에 미술사 이 작품들이 다. 이게 서울에 거주하는 경화 가족들 서울 양반들인데 이게 다 노론적인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죠 팔십 프로가 아.
이게 남주 북병이라는 거 아닙니까? 서울도 어 청계천 남쪽 저쪽 청계천 남쪽으로는 남산 쪽 사는 데는 남인이 살았고 북촌에는 노론이 살았는데 남주 북병이라 북경 북쪽은 병이다. 떡병자.
북쪽에서는 떡 맨들어 먹었고 남쪽에서 술 만들어 먹었다는 건데 남인들은 부연하니까 술이나 먹고 북촌읍이나 똥*. 흔들어가지고 무지개떡 무슨 떡이 수십 가지가 있어 여러분들이 만들어보겠던 떡은 아이고 쌀에다가 똥 만들려면 쌀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지끔 담은 떡 맨들어 먹고 힘없는 야당 난민들은. 부자가 나니까 자꾸 그냥 딱주 만들어 가지고 그거 먹었던 거죠, 이게 이제 서울의 상황입니다. 서울의 난민들은 또 이 기원아민들이에요.
영남 남인이 아니고 성우 이익이란 뒤쪽은 다 이게 기원함인들입니다. 남인 중에서도 경상도 남인이 가장 천대를 받았어요. 그리고 안동이나 경상도는 남인이 한 칠팔십 됩니다.
그게 경상도는 남인의 지역이었죠 그래가지고 이렇게. 차별을 받아 놓으니까 그게 언제부터냐 인조반정 이후부터로 보면 됩니다 인조반장? 그래서 어 해방될 때까지 거의 한 300년간.
아 저 1000대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남인으로서 처음 경상도 남인으로서 처음 해방돼 가지고 벼슬은 게 저 장택상이 국립칠곡 사람인데 창택상의가 외무부 장관의 이 박사 정권에서 처음으로 장관을 하니까 대구 시민회관에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에.
그 저 축하 뭐 이걸 대회를 했죠? 그때 영남에서 300년 만에 처음으로 판사 나왔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삼창을 했습니다. 이 장택성이가 그리고 장택사위가 총리를 뭐 잠깐 했어요 한두 달인가 그때 그 서해 유성룡.
지금 저 통일부 장관 이번에 낸 유우익 장관의 그 선조인데 영남에서 유일하게 고의 벼슬 많이 연 집이 그 유씨들입니다. 그 집이 그 집이 좀 내림이 있어 그 집 같다고 봐. 아니 그 집이 그 그 서해 후손들이 유 후조도 그렇고 유 후조가 대원군 때 처음으로 의정시켜줬습니다.
대원군이 배려 차원에서 지역 안배 차원에서 그래 가지고 이 후조가 처음으로 서해 다음에 영남에서 정승 반전에 오른 사람인데 대원군이 탕평책 차원에서 서울에 와서 엄청나게 놀림을 당했어요. 유 후조가 낙동대감이 그게 지금 아마 저 현재 유익시 고조부 정도 될 겁니다. 그 양반이 구조부 정부 엄청 놀림을 당했어요.
왕따당했지 여기 와가지고. 낯설고 물 썰으니까와 가지고 뭐 놀림도 많이 당했고 그런데 그 아까 그 정책상의가 총리 돼가지고 서해 영정 모셔놓은 사당에 가서 분양을 하면서 뭐라고 했냐면? 대강 이후로 영남에서 정승 나온 건 제가 처음입니다.
그다음에 제가 처음입니다 하고 분양을 했다는 거 아니에요. 이게 이게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300년을 굶다가 처음으로 밥상을 받은 게 박정희 오일육입니다.
300년 맺힌 한을 풀어줬지 겁쟁이가 처음으로. 응, 처음으로. 300년 만에 그러니까 300년 굶다가 밥상을 받은 겁니다.
영남이 그러니까 나는 요즘에 영남이 좀 뭘 좀 독식을 하더라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300년 굶었는데 좀 먹었는지 이게 뭐 좀 아 아 연장선상에서 보면 그래요. 역사를 연장선상에서 보면 그래서 경상도가 음식 문화가 발달이 안 된 거예요. 먹을 게 없어서 놓으니까 이게 가서 한정식이 그쪽에 별로 없었거덩 안정식은 제가 출원컨대는 이 전라도 만석군 지주지방 음식입니다.
이게 퍼진 거예요. 서울도 사대부들 그렇게 못 해 먹었습니다 왜 임금이 휘찮으는데 누가 그렇게 음식을 많이 해보면 아, 이놈은 뭐 부정한 수입이 있는 모양이다, 너 돈 어디서 나왔어 이렇게 들어갈 수 그리고 고 만들어가 고발 들어가요, 저 잘못 부탁한다고 그러면 저거 모가집니다 저거 너 너 돈 내놔 어디서 나왔었나 수입 투공당하지? 저쪽 전라도 쪽에는 죽음 안 당하지 정권하고 서울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놓으니까.
그게 이제 서울에 지금 이건 좀 사이드로 빠지는 얘기인데 이 지금 곰탕 같은 거 있죠. 곰탕 그 갈비탕 이건 이북 사람들 음식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피난으로 왔거든 이쪽으로. 먹을 게 없으니까 음식 장사를 처음에 했어요. 그런데 이 부분 소고기를 좀 많이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남보다 이남은 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손을 함부로 못 잡고 거의 뭐 늙은 소나 먹는데 이 북은 아무래도 좀 소를 이쪽보다 좀 더 먹는 습관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소고기를 그려놓으니까 그 이북 사람들이 그냥 북극. 북 덜어가지고 아주 터프하게 고깃덩어리를 끓여서 먹던 게 이게 갈비탕 곰탕이고 피난민들이 와서 해방 이후에 여기 와서 그런 장사를 했지 음식 장사를.
그래서 설에 옥 평양이 서쪽이니까 그쪽에서 어 서쪽에서 왔다 설에 올레짜 그래서 와서 음식 장사를 했었고 평양이나 이쪽 서쪽 사람들이 그리고 육이오 때 피난 갔다가 인제 그 설혜옥이 다시 피난같이 육이오 때 그래 가지고 또 다시 와가지고 맨든 음식점이 우레로 또 왔다. 에 또 자의 올레자 오레오 이게 다 이북 사람들이 쓰던 음식이고 그다음에 김치나 이런 건 5일 6배. 군인들이 퍼트린 거예요.
5일육 이후에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군인들은 이게 뭐 발령이 많이 나가지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먹어봤거든 근데 상무대랄지 광주 그쪽 다 거쳐야 됐기 때문에 그쪽 일대에서 음식을 먹어보니까 이게 맛이 좋은 거야. 그러니까 요정에 가가지고 야 그 김치 담아 그걸로 그렇게 주문해가지고, 그 음식이 그때 오일육 이후에 이제 좀 음식이 전라도 음식이 많이 퍼졌고 음식을 가장 잘하는 데는 개성 음식입니다.
우리나라 남바원은 개성 음식이고 남바투가 전라도 음식이고 개성 음식은 그건. 그 그 개성 서울의 아주 그 고급스러운 그런 격조와 취향이 있는 음식들이죠. 개성 음식이 사실은 뭐 잡죽이랄지 뭐 뭐랄지 이런 음식들이 아주 그 품위가 있는 고급스러운 음식들입니다.
그리고 그쪽이 무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개성이면 개성이면 뭐 서쪽에 아주 저 그 경남도랄지 여성강으로 해서 물자가 크루가는 집중되고 또 불교 고려 때는 물류가 많거든 그러니까 중국하고 이 교역도 많고 해가지고 외국의 향신료 같은 거 우리나라 산초 먹는 게 원래 개성 사람들의 습관이었어요? 어 제피라든가 뭐 이런 게 약간 그 뭡니까 그 그 그거보다 뭐 노린내 한다고 그럽니까 그 제피라고도 해고 제피 이거 못 먹는 분들 있잖아요. 고소 같은 거 고소 이런 게 다 저기 중국 영향을 받은 향신료인데 이건 개성 사람들 개성 귀족들이 먹던 향신료들입니다.
예 이제 얘기가 좀 그쪽으로 갔는데 하여간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남인들이 정권 잡은 게 516혁명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그거 찾기 전에는. 에
지역 간의 진보와 보수도 달랐습니다.
경상도가 진보 욕구 호남 기호 쪽이 보수였습니다.
경상도가 진보였고 왜냐 대구 폭동을 보면 그게 48년에 나왔습니까?
1900 해방 이후에 48년인가 구년인데
6.25 전이죠? 그때 사망자가.
박정희 의원 박상희도 거기 대구 폭동에 주동이 됐다고 그러는데 주동자 중에 1명인데 1만 5000명에서 아마 1만 8000명 죽었을 겁니다.
대구 북동으로. 그러니까 이건 야당이라는 얘기지. 대구가 야당 도시였어요.
그리고 당시에 이쪽에는에 기호 쪽에는 한민당인데 이게 인천 김성수가 당선을 했죠. 인천이 누굽니까 부자 아닙니까 지주 삼양사 대지주 그러니까 이라는 건 이 지주 집안들 돈 많은 부자당했어요. 그때 한민당이라는 게 다 돈 많은 부자들이 그 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이 보수지 한민당 그럼 한민당의 주력 부대가 인천 이하 그 그 추종자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쪽이 보수고 저쪽이. 이 일찍 야당 야당을 내니까 대구 쪽이 대구 북동은 많이 죽고 그쪽이 다 좌익들 아니었습니까?
그래가지고 많이 죽은 거다. 이거 근데 이게 지금 이번에 보니까에 야당 쪽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오는 사람들 뭐 박원순 조국 뭐 그다음에 안철수 문재인 이런 사람들이 전부 또 경상도 사람들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이게 지금 야당이 또 이쪽으로 또 옮겨오는 건데 이게 지금 어떻게 되는 그림인지 모르겠어요.
이게 그리고 지금 만약에 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지금 여당 측 한나라당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사람들이 김왕식 총리가 전라도 장성 사람이고 이석연 씨가 아마 정읍인가 그럴 겁니다. 이 호남 쪽이 지금 또 오히려 이쪽에 보수 쪽으로 가고 있고 이게 어떤 크로스 매치인지 모르겠어요? 이 복식조가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혹시? 아 그러니까 이게 참 이게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쪽이.
경상도가 인조반정 이후로 300년간을 그 천대받았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저도 이거 몰랐습니다. 현장에 가가지고.
에, 그 현지 조사를 해서 제가 알았지 안동 양반이고 뭐 해 가지고 나는 이쪽이 계속 잘 먹고 잘 사는 걸로 생각했어요. 벼슬도 많이 해고 양반도 지니까? 아니, 그게 아니더란 얘기죠.
그게 맞어? 그동안에 이제 조선조 때 300년간 잘 먹고 잘산 집단은 이쪽 기호 쪽이고 이제 이 기호 노론들이 서울에 올라가가지고 한. 1700년도 중반부터는 로테이션이 안 되고 계속.
붙박이로 주저앉았지. 서울에에 자기들이 계속 그때부터 장기 집권에 들어갔으니까. 옛날에는 그 이전에는 벼슬을 했다가 그만두면 리타이어를 지방으로 내려가야 됐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근데 이게 안 가고 계속 그냥 서울에 붙박이로 북. 물을 앉으면서 음 이게 저 귀경천향 지풍이 생겨난 거죠? 서울을 귀하게 여기고 향 천향 향리 시골을 천하게 여기는 응 서울에 살아야 된다.
그래서 뭐 말새끼는 제주도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야 된다. 그 말이 1700년대 중반부터 나온 말입니다. 아마 영조 집권기부터 영조 집권기가 한 한 20년 이래 되면서부터 이제 그때부터 이게 완전히 인자 그 전에는에 남인과에 노론 동서의 문제였는데 그.
그 그때부터 들어가면서부터는 서울이 완전히 다 장악을 해요. 서울이 이 지역 간의 이 문제가 아니고 서울과 지방의 문제로 뛰게 되는 거죠 그때부터 우리 역사가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까 말씀드린 아까 그 뭐 이런 미술사라든가 지금 겸재 정선이랄지 이게 다 노론들 문화예요.
지금 돈 없으면 갤러리 못 갑니다, 지금도. 그린 뭐 이거 골동 소화 이건 다 돈 있어야지 19 삽니다. 밥 먹고 난 뒤에 일이지.
이게 밥도 먹기 힘든데 이게 무슨 갤러리 가서 그림 사겠습니까? 그 이쪽에서 인제 그 지역 간에 그런에. 전라도는 그 개탕세라는 말이 있었고 경상도 보리문댕이 이런 옛날들 어른들만 있었는데.
에 이게 인자 이 개 땅새는 이 갯벌에서 일하는 사람을 개당서라 그러고 보리문댕이는 경상도 쪽에 상대적으로 피부병 환자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추방이 되니까 옛날에는 나환자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추방이 되니까 배고프니까 이 호남 쪽에 이 보리밭에 와가지고 보리모가지가 날무렵에 이 보리모가지를 꺾어 먹으러 다녔습니다. 거의 기아 선상이니까?
에 그런데 이제 시간이 이쪽에서 오늘 첫 시간은 아마. 예 이 정도에서 아마 해고 잠시 있다가 한 3분 정도 쉬다가 또. 나머지에 두 번째 시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한 3분 쉬겠습니까? 돈? 누가 벼슬을 다 가지면 양손에 떠들자는 얘기인데 이거 부작용 생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돈도 있고 대선을 또 또 다 갖고 한쪽을 선택해야지. 권력을 잡으면 아무래도 재물에 대해서는 좀 청렴하게 해야 되고, 돈을 가지고 있으려면은 사회 후원 사업을 해야지 그걸 자기가 나가가지고 그 돈 가지고 내가 벼슬하고 아 그것을 바꾸겠다. 아, 이건 이건 지혜가 없는 행동이 될 수가 있어요.
제가 그 경주 최부잣집 얘기를 제가 그 저 신문에다 많이 썼습니다, 제가 한 10년 전부터 그. 그 노블레스 오블리주 얘기를 제가 뭐 하여간. 계속 반복해서 얘기를 했어요, 이 얘기는 좀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경주 최부자팀이 남인 집안이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만약에 그 집이 벼슬도 구의 벼슬을 했다.
그리고 이제 진사에서 하지 말자는 게 가훈인데 심사 이상까지 하면 아마 이 노론한테 돈 다 뺏겼을 겁니다. 뭐 역적 뭐 역모 뭐 무슨 쿠데타 혐의에도 너 혐의가 있다 해가지고 아마 재산 몰수해고 뭘 했을 거예요? 이걸 아니까 경주 채무자 집도 우리 재산을 지키자 이런 것으로 해서 진사 이상은 하지 말자 아마 이랬을 겁니다.
제가 이 부자들을 쭉 보니까 한국 사회에서에 300억 이상은 자기 돈 아니에요. 그 돈은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돈이고 그 돈은 사회적으로 다 엮여 있어. 그리고 돈을 가지고 있으면 옆에서 가만 놔두질 않습니다, 뭐 사업하자 투자이자 뭐예자 그다음에 집안 형제간 친척들이 왜 너는 돈 많은데 나 돈 안 주냐 너만 잘 먹고 잘 사느냐 아마 그래가지고 막 형제 간에 이상, 후보 그 다음에 제가 한국 사회에서 1000억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 더러 보니까 이 밤에 50 프로는 수면제 먹고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10억 이상 갚기까지는 순탄치가 않습니다. 그 타이틀방 하는 게 그게 쉽지가 않아요. 천억을 방어한다는 게 이게 다차원적으로 문제가 오는 거거든?
다차원적으로 아 뭐 여러 가지 면에서 특급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뭐 자기는 또 뭐 또 이거 투자해라 뭐 저거 더 하자 뭐 해가지고 소송으로 한 두세 개씩 다 얽혀 있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50 중반까지는 자기 타고난 밧데리로 이걸 버티지만 50 중반이 넘어서 계속 이런 문제 시달리면 수면제 먹어야 됩니다. 그럼 저 한국 사회 10억 이상 가지고 있는 건 천벌을 받는 겁니다.
하, 그냥 아파트 하나 가지고 있고 자식들 뭐 대학 보내고 그냥 해서 남한테 돈 많아 안 빌려가면 됐지 수면제 안 먹는 게 낫지. 이 수면제까지 먹으면서 꼭 살아야 되느냐 이게. 300억 이상은 자기 돈 아니고 천억 이상은 50 프로가 수면제 먹고 이게 그런 겁니다.
제가 팔자를 연구해 보니까 제다 신약이라. 재물이 많으면 반드시 몸은 약해집니다. 우리 뭐, 저 삼성 집안도 뭐 몸 안 좋은 사람 많습니다.
그 집안도 되게 그리고 우한이 끓일 날이 없어요. 우한이 이 돈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없다고 또 장땡도 아니고 돈이 없어야 행복하냐 이건 또 그건 아니지?
이게 돈과 도가 니은 자 받침 하나 차이인데. 그 저 이 그 여수에 가니까 그 저 봉소당이라는 집이 있어요. 큰 그 기와집인데 그 집이 한 5000평 되는 집인데 그 가문의 영광에 그 나온 그 세트로 나온 집인데 그 집이 뭐 구한 말 때부터 뭐 굉장히 영광김씨 그 만석군 부잣집이었습니다.
그지 여수에서 아주 부잔데. 어떻게 그 안 죽었느냐 여순 반란 사건 때 이 집이 최고 부잔데 저는 어디 명문 지방 가면은 육이오 때 뭐 동학대 그런 사회적 격변기 때 안 죽었느냐 그것부터 질문합니다. 그 매우 허기 힘든 질문인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죠.
안 죽었느냐 그때 되게 변수를 켰거든 그때 부자들이 그때 난리 나면 지금 아마 중동 이집트나 이런 데 막 격경기 리비아 뭐 이런 데 지금 막 내부적으로 막 약탈이 나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저는 안 봐도 기대웁니다 그게 반란 사건이 나니까 임시 그 그 레프트 혁명 정부를 여천군청 2층에 차렸다고 그래요. 저게 1948년인가겠네 그래서 이제 부자는 너 나와 해 가지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거지.
인민재판 해 가지고 또 지금 오면 북창으로 가서 찔러 죽이는 데까지. 그런데 자기 집이 가장 만석은 부자니까 만석군이라면 지금 조단입니다. 옛날에 천석군이 지금 천억 빼고 5000 석 군은 오천억이고 만석군은 조 단위 부자예요.
지금 자기 집이 만석군 조 단위 부자인데 재벌이죠 만석군은 재벌입니다. 옛날로 치면은 아 일본 타자로 딱 불려나갔지 여천군청 2층에 자기 아버지가 쫙 불려나갔는데 그 혁명군 그 반란군 대장이. 2층으로 자기 아버지를 딱 쥐조들에 올라오라 그래.
가지고 년도 너는 인민을 착취했으니까 넌 사형 그러면 가서 죽창을 찔러 죽이는 겁니다. 밑으로 데려가서 그럼 이제 주부로 간 거지. 딱 2층에 가니까 그 반란군 대장이 자기 옆에 있던 보처 2명을 호의병 2명을 너희들은 내려가 그러더라 아래로 내려가.
고위병원 내려가라고 해놓고 자기가 직접 이렇게 딱 보더만 거의 아버지가 올라왔는데 관람문 대장이 아무 말도 않고 신문만 이렇게 팍 들었다고 해요. 신문을 보고 의자를 이렇게 돌려가지고 이렇게 뒤를 딱 봤다는 거 아니에요. 아.
10분이 지나도 아무 말도 않고 20분이 지나도 아무 말도 않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이 집 불태까지는 왜 나를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 취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죠. 그러다가 유레카 알았다 나보다 티라는 거구나 20분이 넘어가면서 아 이건 나보다 도망가라는 얘기구나 하고 2층인데 옆에 창문 열고 물 홍콩 타고 끓고 내려가서 도
